노동중심성에 대한 어떤 당의 설왕설래를 보며
정의당에서 '노동중심성'이 논란이 되고 있나보다. 녹색운동 전문인 이헌석이 문제제기를 했고, 거기에 과거 노동운동 또는 노동당계 쪽에서 의견개진을 하고 있고, 때는 이때라며 온갖 만사에 낑궈들며 설레발이 치는 걸 전공으로 하는 다함께...노동자연대가 뭐 잘하고 있니 마니 헛소리를 해대고.
노동중심성이라는 말이 다시 부상하는 건 반갑긴 한데, 이게 뭐 그리 오래 갈 논쟁이라고 보이진 않는다. 깊이 논의될 가능성도 없어 보이고, 더구나 정의당 안에서 이 문제가 당적 방향정립에 영향을 미치는 의제로 역할할 것이라고 생각되지도 않는다.
우선, 정의당 안에서 이 의제가 제 자리를 잡기는 어려울 거다. 왜냐하면, 정의당은 노동자 정당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의당은 노동자를 자기 대중으로 하는 대중정당이 아니라 사회의 모든 문제에 개입하고 모든 계급계층을 대변하는 포괄정당이다. 이때 포괄정당이 가지는 일련의 한계를 정의당도 벗어나지 못하는데, 그것은 결국 정의당이 선거정당으로서 자기정체성을 유지할 수밖에 없으며 이를 위해 특정한 관점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정치노선이 아니라 모든 정치노선을 모아놓고 그 노선들 간의 균형을 맞추는 정도로 당을 운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노동의 관점에서 세계를 해석하고, 그에 따라 젠더니 기후니 인권이니 문화니 교육이니 하는 문제들을 배열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젠더는 젠더대로, 기후는 기후대로 자기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 노동 역시 한 부문으로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수준의 상태에서, 느닷없이 제기되는 노동중심성은 그나마 당을 구성하고 있던 다른 부문의 반발만 사게 될 것이고, 이것은 정의당의 현재 상태마저 위태롭게 할 수 있기에 흐지부지 봉합될 것이다.
정의당으로부터 촉발된 노동중심성 논의가 더 심도있게 확산될 수 있는 가능성도 없다. 왜냐하면 이 논쟁을 진지하게 이끌어갈 수 있는 노동정치세력이 현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까놓고 말해서 이 의제를 폭렬하게 만들 수 있는 정치조직도 없고 운동조직도 없다.
노동당이 할 수 있을까? 현재 노동당 내에 노동중심성에 관한 당적 방향정립과 이를 위한 이론구성 및 정강정책화 작업을 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현재 당의 집행을 담당하고 있는 주류는 과거 김길오와 유착하여 사회당계의 입장과 궤를 같이 했던 자들이다. 누구랑 뭘 했건 간에 그거야 다른 이야기니 제끼더라도, 이들에게 노동중심성에 대한 관점이 없다는 건 당 내에 있을 때 여러 경로로 확인된 바가 있다. 정파조직으로 출범한 '당의 미래'가 가장 중점적으로 제시했던 아젠다가 노동중심성이었는데, 그 당시 소위 '신좌파' 운운하던 현 노동당 집행부 그룹은 마치 현재 정의당에서 제기되는 노동중심성에 대한 비판적 입장과 거의 유사한 입장을 취했다.
비록 지금은 변혁당과 합당함으로써 변혁당이 노동중심성에 대한 나름의 기조를 내세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변혁당을 놓고 보더라도 노동중심성을 의제화할 거로는 보이지 않는다. 이론적으로야 현 노동부 집행단위보다 더 나을 수 있겠지만, 실천노선 또는 정책화와 관련된 역량은 현 노동부 집행단위와 그다지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이들은 도그마틱에 매몰된 써클주의적 행동양식으로 인해 정치세력으로서 외부적 확장력을 가지지 못한 집단이다. 즉 이론적 측면에서나 조직적 측면에서 현재의 노동당은 노동중심성을 자기 의제로 가져갈 역량이 없다.
사회운동조직 역시 마찬가지다. 노동중심성을 가장 적실하게 자기 의제로 사고해야 할 민주노총은 노동중심성을 확보한 정치방침을 낼 여력이 없다. 남한 최대의 통일운동조직이 되어버린 지금, 민주노총은 통선대를 지원할만한 힘조차 정치방침을 만들어내는데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2008년 이래 지금까지 민주노총은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정치방침이랍시고 내놓고 있을 뿐이다. 노동자의 네셔널 센터인 민주노총 조차도 노동중심성을 현상시킬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어떤 사회운동조직에게 노동중심성 의제를 사회의제로 끌고 나갈 것을 기대할 수 있겠나?
노동당이 이름만 노동당이 아니라 노동정치를 하고자 하는 정치세력으로서 제 역할을 다할 능력이 된다면 노동당이 노동중심성을 사회의제화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의당이 세력 간 연대체로서의 역할에서 벗어나 노동중심성을 핵심으로 하는 노동정치 노동자 대중정당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재구성한다면 노동중심성 논의는 지금과는 다른 방향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민주노총이 통일운동조직으로서의 정체성을 벗어버리고 노동정치의 핵심이자 노동계급의 네셔널 센터로서 정체성을 재정립한다면 노동중심성 의제는 사회적 의제로 지위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상태로 볼 때 이 모든 것은 요원하다.
노동중심성 확립, 노동자 정치세력화, 노동정치의 강화는 일관된 하나의 노선이다. "노동의 관점에서 기후위기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라는 노동중심적 사고관은 "녹색/기후의 관점에서 노동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라는 녹색/기후 중심적 사고관과 맞부닥쳐야 한다. 이런 구도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제 부문에서 확립될 때 노동중심성 의제는 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 그 어느 정치세력도 사회운동세력도 이 작업을 하지 않고 있다.
진보신당이 민주노동당과 분당하면서 내세웠던 소위 "진보의 재구성 - 적녹보 연대"라는 구호가 결국은 적/녹/보 각자의 정체성을 흐리게 하고 종국에는 지배이데올로기와의 대립전선까지도 희석할 것이라는 우려는 불과 십여 년만에 이렇게 현실이 되었다. 적/녹/보는 각각의 영역에서 자기 정체성을 더 명확히 하면서 서로 경쟁하고, 그러면서 서로의 공통분모를 찾아 연대해야 한다. 그냥 한 정당 안에 잡탕츠로 집어넣어놓고 서로 건드리지만 않으면 되는 형식을 유지하는 한 진전은 없을 것이다.
선거를 위한 포괄정당의 성격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기존의 정당들 역시 자기 정체성이라는 것, 자기 대중이 누구인지를 확인하는 것을 더 이상 미뤄선 안 될 거다. 아무리 세상이 변했다고 해도, 정당은 자기 대중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확장성조차 도모할 수 없다. 노동중심성 논란이 이러한 문제에 대한 고민을 깊이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만은, 역시 안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