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그 환상의 붕괴

아이엠에푸가 터진 이후 극도의 사회적 혼란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거리의 노숙자가 되어갔다. 눈만 뜨면 벌어지는 구조조정, 돌고 돈다던 돈이 돌질 못해 발생한 신용불량자, 먹고살기 어려워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 그리하여 거리 거리에는 길바닥에서 잠을 자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사회현상에 대응하는 언론매체의 반응, 물론 그것은 국가적 차원에서 진행되는 이데올로기의 광고형태에 불과하겠지만, 거리에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언론을 통해 갑작스레 많이 듣게 된 단어는 '가족'이었다. 결론은 하나,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제발... 꾀죄죄한 노숙자들의 몰골이 보기 싫었나?

 

내용은 별 거 아니다. 그저 가족의 사랑만이 고단한 삶을 지켜줄 든든한 등대요, 유일한 구원의 안식처라는 것이다. 그렇잖아도 시원찮은 사회안전망이 전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가운데, 길거리에서는 사람이 죽어가고 내일 아침 모가지가 달아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람들이 떨고 있는데도 국가가 내놓은 대안은 오로지 '위기탈출'이었고, 그 경제적 위기탈출의 경로에서 숨막히게 아우성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니들 가족에게나 가보라는 것이 국가의 대응이었다.

 

어찌되었거나 가족은, 그렇게 20세기의 종착역에서 또다시 지고지순한 가치로 부활하게 되었고, 지 할 일을 개인의 몫으로 또는 가족의 몫으로 온전히 돌려놓은 국가라는 조직체계는 사회계약론의 기초공식을 거부한 채 지들 갈 길을 찾아 폭주한다. 그 폭주의 끝에 역시나 '위기'는 현재진행형으로 남아있고, 아니 남아있다고 포장되고 있고, 몇 년간 단련된 가족의 끈끈한 애정은 공적부조의 틀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취약한 가정의 물질적 바탕을 보완해주는 기제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 관념이 현실에 기적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데이빗 카퍼필드의 요란한 마술의 힘이 실상은 돈이라는 물질 없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듯이. 가족애라는 무척 따끈하지만 매우 공허한 그 관념이 먹고살기 어려운 현실을 천상에서의 향연으로 바꾸어놓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봉고차 안에서는 70대 노인에서 이제 5살이 된 어린 아이까지 일가족 5명이 불에 탄 변사체로 발견된다.

 

자식과 부모의 목숨마저도 자신의 것인양 치부해버렸다는 비판을 할 수도 있다. 10살, 7살, 5살이 된 세 명의 딸, 팔순을 바라보고 있는 노모... 왜 이렇게 극단적인 방법을 취해야 했는가는 알 길이 없다. 비록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는 하지만, 가족들의 생명까지 함께 가져가버린 어느 비정한 가장의 행위를 변론할 마음도 없다. 이해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가족이 구원의 안식처요 안락한 애정의 공간이 아니라는 것이 여실히 확인된다는 것이다.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 아니 돌아가봐야 다른 가족구성원들까지 사회적 빈곤에 대한 연대채무자의 책임을 떠맡아야하는 것에서 언론이 공공연히 떠들어대던 가족이데올로기는 그 자체 환상이요 말 그대로 뻥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모든 문제의 해결을 가족에게 구하도록 종용했던 언론과 국가. 이제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또 전문가들을 동원하여 가장의 심리상태를 분석하고 사회안전망 운운하다가 조용히 막을 내리겠지. 정해진 수순을 거부할만큼 혁신적인 언론종사자들과 국가공무원들은 그리 흔치 않으니까. 그리고 계속해서 방송에서는 가족의 소중함을 널리 일깨워 어리석은 백성들이 가족의 품을 박차고 나가 노숙자로 전락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노력이 진행될 것이다.

 

이제 그만하자. 가족은 피난처가 아니다.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너의 채무를 네 가족들도 함께 갚아라라는 요구에 다름 아니다. 그 채무의 무게가 가족 전체에게 골고루 돌아갈 때 봉고차 안에서는 계속 불길이 솟아 오르고 핏빛 카니발이 진행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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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14 10:29 2005/01/14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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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벌써 한두번도 아닌데 가족이라는 철옹성은 무너질 줄 모르죠. 그때문에 여성과 아동의 권리 침해도 심각하구. ㅡ.ㅡ

  2. 에혀... 글게 말이져... 지난번에는 엄마가 애를 안고 뛰어내렸죠. '애가 부모 소유물이냐?'라는 논쟁으로 번지기도 했죠. 이번에도 또 그런 소리 나올 것 같더군요. 왠지 조용하기는 합니다만... 가족, 그 정감어린 단어 속에 얼마나 많은 사회의 부조리가 숨어들어가야 이 학살이 끝날까요...

  3. 가족해체를 유행처럼 얘기하던 시대가 있었지만 여전히 다양한 가족구성에 대한 방식은 꺼내기조차 어려운 닫힌 구조인듯...
    그나마 호주제라도 폐지된다 하니 이제부터라도 가족에 대한 개념정의를 다시해야 하지 않을런지..

  4. 저희 아버지는 그거 절대 인정 안 하세요...
    뭉쳐야 산다...의 환상... 그건 정말 각자의 짐을 서로 교대로라도 짊어질 자세가 되어 있고, 그럴만한 여력이 있어야 하는데...
    당위성만으로 서로의 인생에 발목을 잡는다면..말이 가족이지 남보다 못하걸랑요...가족 구성원들이 서로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 느껴가는가에 대한 문제가 중요한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