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헌
극동아시아에서는 개헌이 무슨 유행인갑다. 한국은 노무현의 '원 포인트' 개헌안이 한동안 설왕설래 하다가 정치꾼들 간의 주고 받기를 통해 일단 정리되는 분위기긴 하나 18대 국회에서 다루니 마니 하는 문제로 장기적인 논란의 여지를 안게 되었다.
일본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13일, 일본 중의원은 "국민투표법"을 통과시켜 참의원으로 올려 보냈다. 이 국민투표법은 헌법개정을 위한 국민투표의 방식을 정한 것이다. 국민투표법은 결국 개헌을 위한 절차적 준비였던 거다.
한국의 개헌이 집권세력의 권력안정을 어떻게 도모할 것인가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면 일본의 개헌은 일본 헌법 제9조, 즉 평화헌법을 폐지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일본은 자위대를 자위군으로 승격시키고 반세기 이상 유지되어왔던 "국제분쟁의 해결을 위한 무력행사 포기" 기조를 지워버리겠다는 것이다.
노무현 발 '원 포인트' 개헌은 애초부터 영양가가 없는 것이었다. 이걸 가지고 개헌정국에 뛰어드네 마네 생 쑈를 했던 일부 정치집단과 운동권은 한 마디로 떡도 보지 못한 상태에서 김칫국부터 마셔대고 있었던 거다. 이승만 정권과 군사정권에서 계속되었던 정권안정차원의 헌법훼절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노무현의 개헌론은 노무현 스스로가 얼마나 이승만, 박정희와 유사한 사고체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준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는다.
제왕적 대통령제, 좀 점잖은 표현으로는 한국형 대통령제의 수혜를 등에 업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맛본 노무현, 같잖게 각 정당에 개헌을 당론으로 채택하지 않으면 계속 개헌 카드를 써먹겠다는 협박을 한다. 정당정치에 대한 기본 개념조차 버로우시키고 사는 노무현. 그 버릇 어디 가질 않는다.
각 정당이 18대 국회에서 개헌논의를 하겠다고 했으므로 개헌발의를 철회할 수 있다는 언론보도가 있었다. 이게 정당들과 노무현 간의 윈윈의 형식으로 정리된 듯 보이나 실상 노무현은 이 개헌정국을 통해 열우당 잔류파들에게는 몰라도 다른 정치세력에게는 이미 자신의 약발이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이나 민주노동당이나 18대 때 개헌 이야기 한 번 해보겠다는 수준이지 '원 포인트 개헌'을 당론으로 건 게 아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노무현 혼자 생쑈를 하다가 제풀에 꺾인 것이 이번 개헌 해프닝이다.
관심을 끌어보려 했지만 관심을 끌지 못한 것이 이번 한국 개헌론의 과정이었다면, 일본의 경우는 좀 다르다. 일본은 될 수 있는 한 관심을 끌지 않으려 노력하면서도 정작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밖에 없는 개헌작업을 하고 있다.
국민투표법 통과 사실은 언론에 의해서도 크게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어제 오늘 일본의 각 신문들을 보면 국민투표법에 대한 기사를 비중있게 다룬 신문이 없을 정도다. 언론을 통제하는 것인지, 아니면 '국익'을 위해 일본의 모든 언론이 총단결 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관심은 일본 내의 시민사회는 물론이려니와 세계 각국에서도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이 개헌작업을 주목하는 이유는 일본이 다시 군사패권주의의 격랑을 몰고 올 것인가에 있다. 역사 이래 일본이 중무장한 이후 세계가 조용한 날이 없었다는 사실(史實)은 일단 접자. 전국시대의 종식과 중앙집권제의 안착이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이나 막말의 유신과 선진문물의 수용 이후 대동아 전쟁을 일으켰던 일들을 거론할 필요가 없다.
지금 현재의 주변국 상황만으로 보더라도 일본이 자위군을 만들어 중무장할 가능성은 매우 농후하다. 가깝게는 북한의 미사일과 핵이다. 한 번 핵에 데였던 일본은 핵 소리만 들어도 거의 노이로제에 가까운 반응을 보인다. 그런데 북한이 기름을 부어 버렸다. 북한에 실제 전략핵무기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도 되지 않은 상황(북한은 있다고 주장하며 핵실험까지 했으나 그게 진짠지 가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물론 주체사상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 분들은 핵무기보다 더한 무기도 있다고 벅벅 우기는 상황이지만)에서 일본은 북핵을 이유로 중무장을 결의하고 있다.
일본이 직접적 위협요소로 드는 것은 북한만이 아니다. 영토분쟁, 국경분쟁을 겪고 있는 중국과 러시아는 물론 한국도 잠재적으로 영토분쟁의 대상이 된다. 중국과 러시아는 말할 필요도 없이 군사력의 측면에서 초강대국이고 한국의 '도발'행위도 만만치 않을 정도다. 일본 우파들이 군사력의 확장이 필요하다고 역설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거다.
여기에 더해 미국의 이해관계가 결합되고 있다. MD체제에 일본을 본격적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라도 자위'대'보다는 자위'군'이 훨씬 적절하다. MD뿐만이 아니라 일본 전역을 미군의 전초기지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본은 미국에게 더 없이 좋은 전략적 요충지일 뿐만 아니라 활용할 수 있는 기술과 인력이 넘치고 쌨다. 뻗어나오는 중국의 군사력을 조기 저지할 수 있기 위해서는 미국의 신속기동군이 언제라도 뛸 수 있도록 요지를 확보할 필요도 있고, 미군만으로 수행하기 어려운 작전을 일본의 자위'군'과 함께 수행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아시다시피 명목상 자위대는 전투병력을 국외로 내보낼 수 없게 되어 있다. 그것이 바로 일본 헌법 제9조의 기능이다. 당연히 일본정부가 이 평화헌법조항을 걷어내고픈 충동이 일어난다. 이미 종전 직후 현행 헌법이 만들어지면서부터 이 논란은 이어지고 있었고, 경제부국으로 거듭난 이후 일본에서 더욱 극렬하게 헌법 제9조 폐지가 요구되어 왔다.
이런 상황에서 헌법 제9조가 폐지될 경우 일본은 노골적으로 군사대국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된다. 국제적으로는 이미 유엔이나 미국으로부터 경제대국에 걸맞는 군사력 제공의 요청을 받아왔으므로 중국이나 러시아가 뭐라고 할지라도 그다지 꺼리낌이 없는 상황이고, 국내적으로는 유일한 걸림돌이었던 헌법 제9조가 사라짐으로써 아무런 문제가 없게 된다.
역사적 사실들의 경험이 있는 아시아 각국은 일본의 군사력 확충과 더불어 자신들의 군사력 강화도 재고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인민을 위해 사용되어야 할 수많은 돈이 전비로 전용되는 현상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일본의 평화운동가들은 일본 헌법 제9조를 "아시아의 보배, 아시아의 진주"라고 부른다. 이건 단지 일본 활동가들만의 찬사로 끝낼 일이 아니다. 그 헌법조항의 출발이 어디에 있었건 지금 일본의 경제력과 국제적 영향력을 감안한다면 "아시아의 보배, 아시아의 진주"라는 찬사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평화를 위하여 세계인이 하나가 될 것을 소망하는 한국의 평화운동 활동가들의 적극적인 국제연대가 필요한 시점이다. 한국 내의 개헌논란은 이제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아마도 연말 대선이나 내년 총선에서 하나의 이슈로 등장할지는 모르나 그 내용은 결코 민중의 사활을 결정할 정도의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일본 헌법 개정은 전 세계 민중, 특히 아시아 민중의 사활일 걸릴 수도 있는 중차대한 문제다. 일본 헌법 개정 과정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