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만의 헌법

행인이 구로공단 이후 다녔던 회사는 삼성 계열사였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삼성 사관학교"라고 자칭 타칭 일컬어졌던 제일제당. 현재는 삼성과 분리되어 CJ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회사. 삼백산업 중 설탕과 밀가루로 사업 기반을 일군 후, 현재는 외식산업과 영상산업에까지 손을 뻗친 굴지의 재벌이다. 가만, 지금 내가 CJ 광고하는 거야??

 

1991년 초, 군복을 벗고 작업복을 입고자 복직을 하였다. 복직계를 내기 위해 삼성본관을 갔다가 현관에서 개망신을 당했다. 삼성 사원이 정장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원 떠그랄, 지들이 옷 한 벌 사준적이 있었나... 암튼 그렇게 깐깐하게 예의범절을 따지는, 아주 고상한 집단이 바로 삼성이었다. 그렇게 복직한 후 1년동안 현장에서 말 그대로 뺑이를 치고, 공장 시운전을 하면서 꽁꽁 얼어붙은 인천의 겨울을 체감했다.

 

그리고 1992년이 밝았다. 하루는 사무실에서 회장 신년사가 있다고 전 사원을 불러모았다. 회장이 신년사를 한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전 공장이 셧다운. 군신유의의 화신들이다. 그렇게 공장을 잡고 사무실로 갔다. 그날 신년사의 주제는 이거였다. "마누라랑 자식만 빼고 다 바꾸자!" 행인, 뒷자리에서 혼자 피식 웃었던 기억이 있다. '마누라랑 자식 없는 넘은 뭐냐? 여사원들은 우째야 하는 거쥐??' 그 때나 지금이나 삐딱한 행인이었던 거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 유명한 문장. "마누라랑 자식만 빼고 다 바꾸자" 이 바꾸자는 이야기를 하면서 이건희 회장은 자신이 바꾸자고 하는 이유는 단지 돈 몇 억을 더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고 했다. 자신은 현재 가지고 있는 재산만으로도 자기 자식의 자식의 자식의 자식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먹고 살만큼 충분하다고 했다. 그래서 단지 몇 푼의 돈을 더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삼성을 높이고 국가경제를 살리기 위해 다 바꾸자고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했다. 정확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대충 그런 취지였다.

 

신년사가 끝나고, 작업장으로 돌아가면서 주변의 사람들에게 물어봤다. "회장은 지금 가지고 있는 재산만으로도 자식의 자식의 자식의 자식이 암 것도 안해도 먹고 살 수 있다는데, 왜 우린 요모양 요 꼴이지?" 이 질문에 대한 정확한 정답을 한 선배가 해줬다. "니가 이병철이 자식이냐?" 그거였다. 난 이병철의 자식이 아니었던 거다. 그것이 이건희와 그 공장 노동자들의 결정적인 차이였던 거다.(언론에 이건희의 '바꾸자' 논의가 국민적 화두로 난리가 났던 것은 92년 대선에서 YS가 이 논의를 차용했고 93년에 삼성의 경영이념으로 알려지면서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머니투데이라는 매체가 있나보다. 이름도 무지 촌스럽지, 머니투데이가 머냐? 머니투데이가... 돈 벌자고 환장한 넘들은 좋아할 제호이긴 하다. 그런데 삼성관련 기사를 검색하다보니 이 머니투데이라는 매체가 삼성 띄워주기 집중홍보기간이라도 가졌나보다. 별 기사가 다 올라와 있는데, 그 가운데 눈에 확 띄는 것이 있었다. "삼성헌법"... 다 바꾸자고 선언한 직후 나왔던 삼성경영이념이었다.

 

다 바꾸자고 하면서 삼성헌법을 내놓은 후, 92년 신경영 선언후 10년간 삼성은 매출 4배, 이익 62배, 시가총액 21배의 엄청난 성장을 이룩했다. 매년 6배의 평균이익 증가. 6%도 아니고 6배! 놀랍지 않은가?

 

삼성헌법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임직원 각자가 인간미와 도덕성을 회복"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삼성이 "예의범절을 중시하는 기업"으로 거듭나야한다는 것이다. 이 예의범절을 위해 삼성맨은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이 인간미는 급기야 신 장유유서의 질서로 발전한다. "상사는 직장의 부모"가 되는 것이다. 사원들을 부모와 같은 마음으로 보살펴야 한다. 이건 뒤집어 말하면 직원들은 상사를 부모처럼 섬겨야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렇게 도덕성과 인간미를 갖추면 1조의 이익을 내지 못해도 상관 없단다. 그리고 도덕성과 인간미를 갖추면 법도 필요 없단다. 가히 요순시대로의 회귀이며, 삼강오륜의 복권이다. 기업이 이러한 도덕성을 갖추게 된다면야 그건 두 말 할 필요도 없이 반가운 일이다.

 

도덕성을 이렇게 강조하는 삼성은 채권떼기, 불법 증여와 같은 화려한 도덕성을 보여준다. 도덕성을 갖춘 삼성의 유능한 삼성맨들은 자기 회사가 저지르는 이 이상한 도덕성회복활동에 대해 침묵한다. 상사를 부모처럼 섬겨야 하기 때문이다. 상사들이 그런 일을 하는 것은 직원들을 위한 것이며, 그러한 인간미 넘치는 행위를 비난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사원들을 자식처럼 어여삐 여기는 삼성의 상사들은 노조를 만들어 회사를 망치려고 하는 직원들에 대해서 입에 담기 어려운 욕설을 퍼붓기도 하고, 1m 감시를 하기도 하고, 보직전환배치를 능사로 일삼고, 출근하는 직원을 들어내다 버리기도 한다. 삼성전자, 삼성SDI, 삼성중공업, 삼성생명 등 모든 사업장에서 삼성직원들은 부모와 같은 상사들의 자애로운 배려 속에서 매년 6배의 평균이익 증가를 위해 30분의 점심시간을 감내해야 한다. 사업장 내에서 생산을 위한 노력을 배가하는 동시에 삼성의 기업이미지 재고를 위한 봉사활동에 평균적으로 1년에 두 번씩은 봉사활동을 해야한다.

 

이렇게 도덕성과 인간미를 갖춘 삼성의 임직원은 법을 알기를 개코구녕에 고추가루 낀 것 정도로 생각한다. 재채기 한 번으로 떨구어버릴 대상이언정 지키고 따라야할 기준으로서는 생각지 않는 것이다.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노동3권은 짓밟히고, 인간으로서 보장받아야할 기본권은 압살당하고 있으며, 불법적인 정치자금을 마구 퍼주기도 하고, 도덕성의 화신 이건희는 인간미의 화신 이재용에게 불법적인 변칙증여를 하고 있다. 법이 뭔 소용이 있나?

 

삼성식 도덕성과 인간미에 푹 빠진 삼성맨들은 자신들이 금과옥조처럼 여기고 있는 삼성헌법의 정신을 훼손하고 있는 자기 회사의 이 몰지각한 짓거리에 대해 모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런 일이 도덕성과 인간미를 회복하기 위한 일종의 산고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것일까?

 

이건희 말마따나 "인간성을 회복하지 못하면 1조 이익을 낸다해도 반갑지 않다." 더불어 "도덕은인간의 기본적 양심이다." 이렇게 잘 아는 이건희, 법도 필요없다고 뗑깡 부리고 있을 것이 아니라 법이라도 우선 잘 지키기 바란다. 도덕과 윤리는 사실 법보다 한 단계 윗자리의 개념이다. 지지리 못난 것들이 법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서 도덕과 윤리를 들먹거리는 것은 참으로 같잖게 보인다. 삼성헌법? 좋아하고 자빠졌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4/10/14 17:49 2004/10/14 17: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