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를 보여줘...

송두율 교수가 독일로 출국하는 모습을 보는 심정은 착잡하다. 발에 묻힌 흙이 떨어지기 전에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겠다는 송두율 교수의 말을 들으면서 솔직하게 드는 심정은 천지개벽하기 전에는 그가 이 땅에 돌아오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국가보안법이라는 프로쿠스테스의 침대가 해체되지 않는 한, 송두율 교수가 살아왔던 경계인으로서의 삶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침대의 길이에서 한치의 어긋남도 없어야만 그가 평생을 그리워하던 이 징글맞은 고국이라는 곳에서 그나마 남은 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국가보안법이 사라지고 양심과 사상의 자유가 추상적 선언이 아닌 구체적 실재로서 우리 사회에 정착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철도 아닌데 빨간색 페인트가 도처에 뿌려지고 때도 아닌데 정체성 논란이 분분한 것을 보면 국가보안법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법도 이 땅에서는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불길한 예감마저 든다.

 

연전에 후배들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수감된 일이 있었다. 사상이 불온한 책과 문건을 읽고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글을 만들어 인터넷 사이트에 게재하였다는 것이 밝혀진 죄상의 전부다. 이 친구들이 읽었다는 불온한 책들은 버젓이 출판되어 시중 서점에서 유통되던 것들이었다. 공안기관의 논리에 따르자면 결국 대한민국 최대의 지하조직은 교보문고가 된다. 게다가 이토록 엄청난 범죄조직이 청와대에서 도보로 20분, 정부종합청사에서 도보로 10분도 안 되는 거리에 암약하고 있다. 교보문고를 체포하지 못하고 있는 공안기관의 무능력함에 통석의 염을 보내는 바이다.

 

국가보안법 철폐를 주장하는 집회나 시위를 할 때마다 반드시 등장하는 애국시민들이 있다. 이 애국시민들, 갑자기 나타나 벽력같이 고함을 치며 국가보안법이 없어지면 어떻게 ‘북괴’의 침략을 막을 거냐, 니들이 ‘융니오(6·25)’를 겪어봤냐 하면서 그 뜨거운 애국심을 과시한다. 이 사람들의 뜨거운 애국심은 국가보안법이 ‘북괴’가 발사한 미사일과 장사포탄을 막아줄 것으로 믿고 있다. 이정도가 된다면 부적 태운 재를 물에 타 먹으면 총알이 몸을 뚫지 못한다고 믿었던 구한말의 어느 혁명군의 신념은 저리 가라다. 완전히 종교수준이다. 그래서 그 엄청난 신념을 최대한 존중하며 국가보안법의 내용을 아느냐고 물어본다. 그리고 돌아오는 답변에 충격을 받는다. 아는 게 없단다. 뭐 어쩌자고?

 

경계인은 경계에 서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의 사상을 의심받는다. 한쪽 다리가 저쪽으로 걸쳐있다는 것이 그 이유다. 남이야 한쪽 다리를 여기 걸치든 저기 걸치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시중에 유통되는 책을 읽고 자신의 생각에 따라 정리하여 편집하면 그게 죄가 된다. 그럴 거를 애초에 왜 출판허가는 내주나? 국가보안법은 그 내용으로 승부하는 법이 아니라 이름으로 승부하는 법이다. 좋잖아? 국가를 보안하는 법이라는데. 그런데 국가가 법전쪼가리로 보안이 되나?

 

살아남기 위해서는 공안기관이 불온한 것이라고 한 번이라도 건드렸던 책들을 읽어서는 안 될 일이다. 왠지 불그스레한 색깔이 도는 인터넷 사이트는 접속조차 해서는 안 된다. 뭔가 사회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될 때는 근처에도 가지 않는 것이 좋다. 설혹 주의를 게을리 하여 그런 책을 읽고 사이트에 접속하고 사람들과 만났을지라도 이와 관련한 어떠한 글도 남겨서는 안 된다. 법조문이 날아오는 미사일을 막아낼 것임을 의심치 말고 국가보안법이니 민주수호법이니 테러방지법이니 하는 법률들이 그 내용과는 상관없이 이름만으로 불순분자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 것임을 믿어야만 한다. 함부로 머리를 굴리지 말고, 함부로 키보드를 두드리지 말 것이며, 함부로 법전을 들여다보지 말아야 한다. 이게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기 위한 생존의 전략이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라는 사실이 완전히 은폐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뒷산 대나무밭에 가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소리 지르는 놈이 있을 것이고, 대나무 뿌리와 줄기와 잎사귀를 사그락 거리며 스쳐지나간 그 외침이 언젠가는 도성 안에서 잠자고 있는 백성들의 귀를 간지럽힐 것이다. 그리하여 왕관 밑에 감추어졌던 임금님의 귀는 그 귀를 본적조차 없는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도 당나귀 귀로 뾰족 뾰족 돋아나는 것이다. 반면에, 눈치 없는 임금님은 왕관으로 귀를 가림으로써 세상의 모든 백성들이 자신의 귀가 매우 독특한 형태로 생겼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라고 여전히 착각한다.

 

국민들을 대나무밭으로 몰아대는 짓은 사실 임금님의 착각에서 비롯되는 행동일 뿐이다. 이미 대나무밭의 외로운 외침은 세상에 알려질 대로 알려졌다. 이렇게 된 바에야 왕관을 벗고 그 귀를 보여줘 버리는 것이 낫다. 귀가 당나귀처럼 생긴 인간도 있는 것이고 원숭이처럼 생긴 인간도 있는 거다. 이걸 인정해버리면 모든 것이 간단하다. 이 간단한 것을 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는 공안기관과 일부 정치인들의 행동을 보면 답답하기 한이 없다. 게다가 지들은 임금님도 아니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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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사회를 위한 변론에 실었던 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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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14 20:44 2004/10/14 20: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