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홍주를 찾아서...

동인천 역 앞에서 답동성당 고개를 넘어오면 신포시장이라고 있다. 꽤나 큰 재래시장이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잘 모르겠다. 암튼 이 신포시장이 행인에게는 온갖 술과 얽힌 전설을 만들어낸 보금자리였다. 이 시장 골목 안에서 술먹다 일어난 사건 정리해도 아마 꽤나 분량이 될 거다.

 

암튼 이 골목은 맛깔스러운 음식들도 많아서 주당들을 끌어당기는 맛이 있는 곳인데, 인천의 조폭, 건달, 양아치들도 상당히 돌아다니는 곳이다보니 엉뚱한 일이 속출하는 경우도 있다. 아무튼 인천생활을 시작한지 1년 정도 지나고 나니 신포시장 먹자골목은 행인의 나와바리처럼 되어 버렸다.

 

술을 워낙에 좋아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같은 과의 K 선배. 부산 출신인 이 선배는 8년 선배였는데, 몸이 탱크같이 단단하고 축구를 정말 잘했다. 고정운과 같은 스타일이었는데, 이 K형과는 술 때문에 행인과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많이 만들었던 주인공이었다.

 

 암튼 이 K 선배가 하루는 조용히 술 한잔 하자고 행인을 꼬셨다. 어이구나,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올시다. 술먹자고 하는데 빠질 수가 있나? 그래서 퇴근하자마자 냉큼 따라나섰다. 나서기 나섰는데, 기껏 간 곳이 신포시장이다. 초장에 김이 새버리는 거다.



"아 기껏 온 게 시장통이요? 난 또 뭐 대찬 거 있는줄 알았네..." 그랬더니 이 형님, 씨익 웃더니 "문디야, 따라온나, 니 오늘 복장(뱃속)에 불나는 경험을 하게 될끼다. ㅋㅋㅋ" 하며 자신만만이다. 하긴 이 형 따라다니면서 술마시는 것만큼은 손해본 일이 없는지라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따라갔다.

 

시장 모퉁이를 뺑뺑 돌더니 찾아 들어간 곳은 옥호도 없는 허름한 선술집이었다. 드럼통 엎어놓고 가운데 구멍 뚫어 불판을 얹어놓고, 잘라놓은 통나무를 의자처럼 깔고 앉게 되어 있었다. 분위기만큼은 행인이 좋아하는 그런 분위기여서 일단 호감이 갔다. 바닥은 그냥 흙바닥이었다. 메뉴판도 없는 그런 집이었다. 주인 아주머니는 한 40대 중반쯤 되었을까, 혼자 모든 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주문도 하지 않았는데, 화덕을 드럼통 구멍 안에 집어 넣고 석쇠 얹고 고기를 갖다가 구웠다. 빨간 색 두꺼비 한 병이 바로 따라 나왔다.

 

 "여기 가게 이름이 뭐에요?" 하고 묻자, 이 형님 하는 말씀이 "그런 거 엄꼬, 기냥 멧돼지 집이라꼬 칸다"하는 거다. "그럼 이 고기가 멧돼지에요?" "쉐끼. 함 무우바라. 지긴다." 자글자글 기름을 뿜어내며 익어가는 고기가 평소 보던 뻘건 고기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지만 멧돼지고기라니, 그 맛이 어떨지 궁금했다. 약간 질긴듯 하면서도 쫄깃한 육질, 그러나 누린내가 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했는데, 별로 그런 냄새가 나질 않는다. 암튼 꽤나 맛은 있었다.

 

소주 한 병을 비울 때쯤, 형님이 아주머니를 부르더니 "그거 쫌 주소. 한병." 하는 거다. 아주머니, 슬쩍 웃으면서 "하여튼 날짜는 참 잘맞춰요. 근데 댁들이 이렇게 마시고 가버리면 다른 손님들은 어떻게 해?"하는 거다. "딴 소리 고마하고 그기나 퍼뜩 내오소. 며칠 기다렸는지 아요?" 아주머니가 살림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가게라고는 하지만 바로 살림방이 붙어 있는 구조였다. 방에 들어간 아주머니, 잠시 후에 4홉짜리 소주병에 새빨간 술을 하나 채워서 나왔다. 갈수록 궁금증이 더해갔다. "이게 뭐에요?" "문디야, 니 이거 첨 보재? 이기 홍주 아이가?" "홍주?" 사실 행인은 홍주라는 술이 있다는 이야기를 첨 듣는 거였다. 하긴 뭐 소주 이외의 술이라는 것은 마셔본 역사가 없으니 알 턱이 있나? "니 오늘 내덕에 호강하는줄이나 알거래이."

 

술이 이렇게 빨간색을 띨 수가 있는 건가? 포도주의 색이 아니었다. 정말로 빨간색 그 자체였다. 맑고 투명한 빨간색. 그러면서도 아주 찬란하고 진한 빨간색. 혹시 색소가 들어간 것은 아닐까? 일단 한 잔. 오호... 이것은 인간세의 맛이 아니었다. 그동안 마셔왔던 술이란 것은 여기에 비하면 그저 에틸알콜을 희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묘한 향에, 알싸한 맛에, 혀와 코끝에 계속 남는 묘한 운치, 그러면서도 끝맛이 전혀 부담이 없는 그런 맛이었다. 무엇보다도 소주보다 훨씬 독한 거 같으면서도 목넘김이 부드러웠다는 거다.

 

"이게 몇 도 짜리에요?" "그기 장 같은 것이 아니라서, 한 50에서 60도 정도 될 끼다. 우떻노? 괘얀나?" 괜찮다 뿐이냐, 하나가 마시다가 둘이 급사를 해도 모를 정도인데. 게다가 이 홍주라는 것이 멧돼지 고기와는 금상첨화, 기가 막힌 궁합이었다. 술 한 잔에 고기 한 점. 이건 뭐 말이 필요 없는 그런 맛이었다.

 

4홉짜리 소주병에 나오길래 뭘 이렇게 많이 주나 했는데, 마시다보니 왜 4홉짜리에 줬는지 금방 이해가 되었다. 한 잔 두 잔 꺾다 보니 어느 새 한 병이 바닥이 나버렸기 때문이다. 한 병 더 달라고 하니까 안 된단다. 이건 딱 정해져 있는 거기 때문에 더 주게 되면 다른 사람들이 마실 수가 없게 되기 때문이란다. 진도에서 홍주 만드는 할머니가 직접 만드시는 건데, 혼자 만드시다보니 많이 만들 수가 없어서 가지고 나오기도 어려운 술이라고 하면서 더는 못 준다고 했다.

 

K형은 사정을 뻔히 아는지라 입가심이나 하러 가자고 하는데, 행인은 도저히 그냥 일어설 수가 없었다. 아주머니 붙잡고 하소연을 하다가 다음에 또 오라는데 언제 올지 모른다고 벅벅 우기다가 급기야 낼 모레 군대간다고 뻥을 쳐버렸다. 그제서야 아주머니 할 수 없다는 듯 2홉짜리 소주 한 병에 홍주를 더 받아 주었다. 희희낙락하면서 아끼고 아껴 먹었지만 그것도 금방 바닥. 입맛만 버린 것 같아서 영 안타까웠지만 어쩌랴, 그렇게 팔아야 다른 손님들도 맛을 본다는 것을.

 

나중에 그 집에 다시 가자, 아주머니 군대간다던 넘이 어떻게 된 거냐고 하길래 군입대 연기했다고 했다. 복무중에 휴가 나와서 제일 먼저 간 곳도 거기였고, 복직하고 나서 제일 먼저 간 곳도 그 집이었다. 가끔은 때를 놓쳐서 홍주맛을 못 보는 일도 있었지만 어쨌든 그 술 맛은 정말 잊을 수 없는 그런 맛이었다.

 

마지막으로 그집 홍주맛을 본 후 10년이 넘어 학교 근처의 한 한식집에서 홍주 맛을 볼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그 술맛이 아니었다. 빛깔은 홍주였으되 그 빛깔도 예전의 찬란했던 그 빨간색이 아니었고, 맛도 끈적한 것이 설탕을 얼마나 뿌렸는지 모를 정도였다. 언젠가 한 번 인천을 갈 기회가 있으면 그 집을 꼭 찾아가고 싶다. 그런데 워낙 길치가 되어놔서 그 집을 잘 찾아갈 수 있을런지 궁금하다. 아직 남아 있을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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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09 22:50 2004/10/09 2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