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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바도르 아옌데] 1편

지난 연말, 이러저러한 사연으로 학생 한 명에게 영문으로 된 논문 번역을 맡긴 적이 있다. 성적 때문에 추가 과제물을 해야 하는 학생도 괴롭겠지만, 없는 숙제 만들어서 줘야 하는 사람도 괴롭기는 하다. 그래도 학생에게 뭔가 도움이 되는 일을 시키고자 머리를 짜내다 결국 논문 번역을 시키게 된 거다. 그것도 너무 기술적인 걸 맡기면 안 될 거 같아 포괄적이면서 뭔가 이 학생에게 공부 의욕을 불어넣을 수 있는 희망찬 논문...

마침 읽으려고 책상 위에 출력해 놓았던 논문을 건내주었는데,

며칠 후 그 번역본을 제출받고, 수정해서 블로그에 소개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더랬다. 그게 벌써 세 달 전인디... 까먹고 있다가 아까 책상정리하면서 발견했다.

2005년도 국제역학회지 (34권)에 실린 논문으로, 칠레 정치사에서 살바도르 아옌데의 역할, 라틴아메리카 사회의학의 탄생과 그의 역할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Muir R and Angell A. Commentary: Salvador Allende: his role in Chilean politics

Waitzkin H. Commentary: Salvador Allende and the birth of Latin American social medicine

학생의 초고를 많이(ㅡ.ㅡ) 수정해야 하는디, 내가 언제 끝낼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진전이 있을 때마다 조금씩 끊어서 소개하려고 한다.

1. 의학에서 정치로..



살바도르 아옌데 고센스(Salvador Allende Gossens)는 1908년 태어나 1973년 9월 11일에 일어난 반정부 쿠데타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는 네 차례에 걸쳐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고, 1952년, 1958년, 1964년에 낙선했다가 마침내 1970년에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1932년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지만 학창시절부터 활발한 정치활동을 하였고, 그가 졸업하던 해에 출범한 칠레 사회당 (Chile's Socialist Party)을 결성하는데 힘을 보탰다. 그는 1937년에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지만, 정치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1938년에 인민전선(Popular Front) 정부를 수립한 급진주의자 대통령 뻬드로 아귀레 세르다(Pedro Aguirre Cerda) 정권에서 보건부 장관을 맡고 나면서부터이다.


칠레는 그 격동의 시기에 인민전선 정부를 수립했던 세계에서 유일한 3개국 중 하나였다 (다른 두 나라는 스페인과 프랑스). 이는 유럽으로부터 한참이나 떨어진 국가에서 좌파 급진주의 정치의 중요성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칠레는 20세기 초반의 공산주의, 아나키스트 운동 이래 강력한 좌파 운동이 존재해왔다. 1912년에는 사회주의 노동자당(Socialist Worker's Party)이 이뀌께(Iquique)의 탄광부두에서 결성되어 곧 칠레의 북부 탄광지역에 굳건한 뿌리를 내렸으며, 빠르게 성장하던 노동운동에서 급진적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칠레의 정치는 1917년 일어난 볼셰비키 혁명에 의해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사회주의 노동자당은 1920년에 칠레 공산당(Chilean Communist Party)이라고 이름을 바꾼 후 제 3차 인터내셔널에 가입하였다. 하지만 칠레 공산당은 소비에트의 영향력 아래로 들어감에 따라 스탈린의 숙청에 대해 부당한 지지를 보내야 했고, 중도 분파들과의 동맹을 회피하며 정치적 고립을 자초하는 협소한 계급 지향 전략에 몰두하게 되었다.


공산주의 노선의 경직성은 대공황이 칠레를 강타했을 때 정치적 주도권이 다른 좌파 그룹으로 넘어가는 결과를 초래했다. 1932년, 정부는 좌파 군관이자 칠레에 100일간의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했던 마르마두께 그로베(Marmaduke Grove) 대령에 의해 전복되었다. 당시 그는 경제적 위기의 와중에서 민중의 상상력을 사로잡은 일련의 조치들을 실행한 바 있었다. 비록 짧은 기간 동안이었지만 그러한 시도는 1년 후 젊은 살바도르 아옌데를 포함한 일군에 의해 건립된 사회당의 지도부 형성으로 이어졌다. 공산주의자들에 비해 이념적 측면에서 좀더 절충적이고 내적 규율이 덜 엄격했던 사회당은 스탈린주의 반대라는 목표를 공유한 토르츠키주의자, 아나키스트, 사민주의자들의 기묘한 연합의 본거지가 되었다. 그로베 자신의 인민주의자 스타일은 공황의 영향이 칠레를 강타하던 시기에 당이 선거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도록 만들었다. 노동 계층과 하위 중간 계급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커다란 지지를 얻도록 만든 것이다. 그렇기에 1930년대 중반, 칠레는 라틴아메리카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서유럽의 공산당, 사회당 구분과 유사한, 좌파 그룹 내 강력한 당파성이 발전하게 되었다.


칠레의 정치적 발달이 일정 부분 유럽과 닮아 있었다면, 사회 체계는 저개발 국가의 그것이라 할 수 있었다. 영아 사망률은 높았고 건강 수준은 낮았다. 의료 서비스는 불충분했고 영양실조가 빈번했으며 노동 환경은 안전이나 건강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옌데 같은 급진적 의사라면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기 위한 새로운 방식의 정책을 만들기 위해 정치에 뛰어들 이유가 얼마든지 있었다. 아옌데가 ‘칠레인의 의학적/사회적 현실 (La Realidad Medico-Social Chilena)’j이라는 책을 출판한 것은 그가 보건부 장관으로 취임한지 1년이 지나서였다. 이 책은 칠레 빈곤층을 향한 그의 인도주의적 관심은 물론 급진적인 구조적 변혁에 의해서만 이 나라에서 불건강의 사회적 원인을 제거할 수 있다는 그의 정치적 판단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책에서 주장하는 것은, 가난한 이들은 옷을 사 입고 가족들을 먹여 살릴 만큼 충분한 소득이 없고, 노동자들은 가혹한 상황과 고용 환경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며, 노동계급 가정은 살만한 주거환경과 위생시설을 갖추지 못했다는, 바로 이러한 조건들이 용납하기 어려울만큼 높은 영아 사망률과 불건강으로 직결된다는 것이었다.


아옌데는 이러한 상황들 중 일부를 해결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즉각적인 조치들, 이를테면 더욱 잘 짜여진 보건의료 체계, 강제적인 고용주 부담의 산재보험 등을 제시하면서 책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칠레의 사회 문제를 진정 해결하기 위해서는 급진적인 구조적 조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를테면, 토지 개혁과 국가의 천연 자원 판매에서 얻은 이윤이 사회복지에 쓰일 수 있도록 외국 기업의 국유화 같은 것들을 제시했다. 연정의 장관으로서 이러한 폭넓은 사회적/경제적 의제를 추진하는 그의 능력에는 제약이 따랐다. 하지만, 그는 여러 가지의 창조적인 조치들의 도입을 이끌어냈다. 싼 가격으로 우유와 유제품을 가난한 이들에게 공급했단 산티아고의 일명 ‘우유 판매대 milk bars’ 등이 그 좋은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는 농촌 지역의 열악한 주거 환경을 내보이고 고발하기 위해 산티아고에서 열린 대중 박람회를 후원하기도 했다.


인민 전선이 국가 주도의 산업화를 촉진하고 공공 교육 프로그램을 확장하면서 정치/시민 생활의 많은 측면을 민주화시키는 데에 적극적이었던 반면, 정권의 타협은 좌파들에게 대가를 요구했다. 1941년 선거에서 사회주의자들은 독립적으로 경쟁했고, 분열적인 내부 논쟁 끝에 급기야 정부를 떠났다. 냉전의 시작과 함께 미국의 압력 속에서, 급진주의자 대통령 곤잘레스 비델라(Gonzalez Videla)는 1948년에 공산당을 금지시켰고, 이러한 움직임은 사회당의 소수 분파에 의해 지지를 받았다. 이는 사회당이 다수 분파(살바도르 아옌데를 포함하는)와 결별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들 분파는 반(反) 공산주의 입법과 정부 내 급진주의자들과의 후속 협력을 반대하는 ‘인민 사회당(Popular Socialist Party)’을 형성하였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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