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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함께 시작한 책들

돌아보면, 작년에 했던 결심 중 가장 잘 지켜진 것이 "책을 안 산다"였다.

돈벌이가 확 줄어들면서, 가장 크게 줄일 수 있는 지출을 생각해보니

다른 이들 밥사주는 것과 책/음반 사는 것...

일자리 바뀌면서 내가 밥을 사는 일보다는 얻어먹는 일이 압도적으로 많아졌고 ㅋㅋ

책은 확인해보니 딱 다섯권 샀다!!! 심지어 그 중 한권은 선물...

알라딘 플래티넘 회원에서 일반회원으로 강등 ㅎㅎ

 

이러다 구립도서관 모범회원으로 표창장 받을 거 같다!

 

지난해를 마무리하고 올해를 시작할 때 함께 한 책들을 적어두자

 

#. 거트 보네거트 [타임 퀘이크]

 

타임퀘이크
타임퀘이크
커트 보네거트
아이필드, 2006

 

제일 깨는 장면은 2차대전 후 화학원소 대표자들이 트라팔마도어 행성에 모여

"일부 원소들이 이제까지 잔인하고 어리석은 인간같이 지저분하고 냄새 고약한 대형 유기체의 몸을 이루고 있는 문제를 논의" 한 것.... 폴로늄이나 이테르븀처럼 인간의 필수요소가 되어 본 적 없는 원소들조차 격분...ㅋㅋ

정작 중죄인인 탄소는 딴청부리고, 질소는 2차대전 죽음의 수용소에서 나치 경비대원과 의사의 구성성분으로서 부역한 것에 눈물 흘리며 참회......

"모든 인간이 죽게 되리라. 모든 원소가 우주 탄생 당시처럼 죄 없이 순결해지리라."

 

이 소설은 매우 자전적인 경험에 기초하고 있는지라 (제 5도살장처럼!!!)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

보네거트는 소문난 휴머니스트이자 회의주의자인데,

작중 화자는 사람들에게는 교회에 나가라고 권해줄 때가 많다.

이유인 즉슨..

"휴머니스트들은 대체로 교육 수준이 높고, 나처럼 유복하고 안락한 삶을 사는 중산층 사람들이라 세속적인 지식과 희망에서 충분한 희열을 느낄 수 있다. 대다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

그런가....???

 

주변에, 자신을 과소평가하고 괴로워하는 자들이 창궐하여 나도 좀 괴로웠다.

본문에 버나드쇼 이야기가 나온다.

"사회주의자요 영리하고 익살맞은 극작가인 나의 영웅 조지 버나드 쇼는 80대에 말하기를, 자신이 똑똑한 사람으로 통한다면 멍청하다고 평이 난 사람들이 정말 불쌍하다고 했다. 살 만큼 산 그가 말하기를, 자기는 이제야 꽤 유능한 사무실 심부름꾼 소년으로 일할 수 있을 만큼 현명해졌다고 했다."

그러니, 평범한 우리들이 자신의 무능력함을 시시때때 깨닫는 건 정상이다.

괴로워할 일이 아니라는 말씀!!!

 

미국에 대한 근거없는 (?) 희망을 품었던 시절에 대한 회고담도 등장한다.

".. 나는 지금도 독일에서 우리가 풀려난 뒤 오헤어와 내가 독일 병사들에게 했던 말을 좋아한다. 미국은 더 사회주의적이 될 것이고 모든 사람에게 일자리를 주기 위해, 최소한 우리 아이들이 굶주리거나 추위에 떨거나 까막눈으로 살거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을 보장하기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할 거요.     

내 복에 무슨!"

 

그래서 서글프다.

대중 강연을 할 때면 사회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던 유진뎁스의 이야기를 언급한단다.

"하층 계급이 존재하는 한, 나는 거기에 속합니다. 범죄 집단이 존재하는 한, 나는 그 구성원입니다. 감옥에 한 사람이라도 있는 한, 나는 자유의 몸이 아닙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나는 뎁스의 말을 인용하기 전에 그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것을 주문하는 것이 지각 있는 태도임을 알았다. 그렇지 않으면 청중 가운데 많은 사람이 웃기 시작할 것이다. 그들은 야비한 행동이 아니라 친절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내가 재미있는 사람이 되길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서."

 

 

# 커트 보네거트 [마더 나이트]

 

마더 나이트
마더 나이트
커트 보네거트
문학동네, 2009

 

나치스 시절 궤벨스 휘하 선전부장으로 명성을 날린 미국인 하워드 캠벨의 자서전..

그는, 사실 미국의 지령을 받고 선전에 교묘하게 미국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맡은 스파이 - 하지만 그는 맡은 바 역할 (나치스의 선전부장)을 너무너무 잘 해서 많은 이들이 그를 통해 나치스에 빠지게 되었는디, 스스로는 한번도 미국을 위해 일한다는 생각을 버린 적이 없었다.

그런데 종전이 되고 나서 문제는, 그가 미국의 스파이였다는 사실을 입증하기가 어려웠다는 점!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짜임새 있는 플롯과 어처구니 없는 상황들이 이렇게 조화를 이루기도 쉽지 않을 듯...

성실하고 재능있는 사람들의 자기분열과 기만 (심지어 스스로에 대한)에 대해

이보다 더 신랄하게 그리기도 어려울 것이다.

할배 멋지삼!!!

 

# 버트란트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게으름에 대한 찬양 - 개정판
게으름에 대한 찬양 - 개정판
버트란드 러셀
사회평론, 2005

 

기억해두어야 할 구절들...

 

* 게으름에 대한 찬양*

 

"... 잘못하면 내가 지주들을 찬양하는 것으로 비춰질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의 게으름은 불행하게도 타인들의 근면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사실, 안락하게 게으름을 피우고자 하는 그들의 욕망이야말로 역사적으로 볼 때 일해야 한다는 모든 신조가 생겨난 뿌리인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의 본을 따르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상상조차 하기 싫은 일일 것이다."

 

"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는 일부 다른 나라들에서의 페메니스트의 승리와 몇 가지 일치하는 면이 있다. 오랜 세월 남자들은 여성의 숭고함이 우위에 있다고 인정해왔고 권력보다도 더 바람직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여성들의 열세를 위로해왔다.......  오랜 세월 부자들과 그 추종자들은 '정직한 노동'을 칭찬하는 글을 써왔다. 소박한 생활을 예찬했고, 부자들보다 가난한 자들이 천국에 갈 가능성이 더 높다고 가르치는 종교를 공언해왔으며, 물질의 공간적 위치를 변화시키는 일에는 특별한 고귀함이 있다고 육체노동자들로 하여금 믿게 만들려고 애썼다."

 

"이익을 가져오는 것만이 바람직한 행위라는 관념이 모든 것을 뒤바꿔버렸다. 당신에게 고기를 제공해주는 정육점이나 빵을 제공하는 빵집 주인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그들은 돈을 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제공해준 음식을 즐길 때의 당신은, 일하는 데 필요한 힘을 내기 위해 먹지 않는 한 불성실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생산에 관해선 너무 많이 생각하고 소비에 대해선 너무 적게 생각한다..."

아마도 러셀은 그 시절에, 오늘날 같은 극단적 소비자본주의가 득세하리라고는 상상치 못했던 것 같다. '소비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인간'은 짐작조차 하기 어려운 개념이었나보다.

 

"... 이 계층은 이른 바 문명이란 것을 담당하는 공헌을 했다. 예술을 발전시키고 과학적 발견들을 이루었다. 책을 쓰고, 철학을 탄생시키고, 사회적 관계들을 세련시켰다. 억압받는 자들의 해방 운동조차도 흔히 위로부터 일어난 것이었다. 유한계층이 없었더라면 인류는 결코 야만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도덕적 자질 가운데서도 선한 본성은 세상이 가장 필요로 하는 자질이며 이는 힘들게 분투하며 살아가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편안함과 안전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게.....

 

* 무용한 지식과 유용한 지식 *

 

"아이들에게만 놀이가 필요한 게 아니다. 어른에게도 현재의 즐거움 이외엔 아무 목적도 없는 행위에 빠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놀이가 제 구실을 다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일과 관계 없는 부분에서도 기쁨과 흥미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 '무용한' 지식의 가장 중요한 이점은 아마도 숙고하는 습관을 조성해준다는 점일 것이다." - 이 대목에서 러셀은 그 유명한 메피스토펠레스의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영원히 푸르른 것은 오직 생명의 나무'라는 대사가 얼마나 오해되고 있는지 비판한다.  한국에서도 이론과 실천 출판사 책머리에 항상 이 구절이 쓰여있어서, 마치 현실에서의 실천이나 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상징문구처럼 인용되고는 했는데, 나도 파우스트 읽고는 깜딱 놀랐었다. 악마가 열심히 공부하는 어린 학생 꼬드겨내려고 한 말이었는데, 좋은 건 줄 알고 써먹었다니 ㅋㅋ

 

"개인적인 불행이든 공적인 불행이든, 의지와 지성이 상호작용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극복될 수 있다. 의지에는 악을 피하고 비현실적인 해결책을 방아들이지 않는 자세가 포함된다. 지성에는 그 악을 이해하고, 치유가 가능하다면 치유책을 찾아내고, 만일 불가능하다면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되 그것을 벗어난 다른 영역, 다른 시대, 행성간의 공간에 놓인 심연들에는 무엇이 놓여있나를 되돌아봄으로써 그 악을 참고 살만한 것으로 만드는 일이 포함된다."

 

* 건축에 대한 몇 가지 생각 *

 

".. 인간에게 보통 이상의 자질을 요구하는 제도라면 예외적인 몇몇 경우에서만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해악이 드러나지 않는 몇 가지 드문 경우들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 제도의 불량함이 은폐되는 것은 아니다."

 

러셀은 사회주의를 진정한 인간해방, 미관상의 추악함에서부터 젠더/계급 불평등까지 해결할 수 있는 궁극의 답안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건축과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역시 사회주의가 답 ㅋㅋ

별도의 한 장이 "사회주의를 위한 변명"이라고 있을 정도...

 

* 우리시대 청년들의 냉소주의 *

 

"지식인들이 볼 때 자신들에게 일을 지시하고 대가를 주는 정부나 부자들의 목적이 해롭기까진 않다 하더라도 불합리하게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약간만 냉소적으로 되면 그 상황에 자신의 양심을 맞출 수가 있다."

 

냉소의 엄청난 유용성!!!

 

* 이성의 몰락, 니체와 히틀러 *

 

"정치 참여층이 점점 확대되고 이질화되면서 이성에의호소도 점점 어려워진다. 논쟁의 출발점이 되는,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가설들이 점점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러한 보편적인 가설들이 존재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자신의 직관에 의존하게 된다. 이질적인 집단들의 직관들은 당연히 서로 다를 것이므로 직관에의 의존은 결국 충돌과 힘의 정치로 이어지게 된다."

 

"정치에서 이성이 몰락하게 된 데는 두 가지 요인이 있다. 하나는, 세상이 자신들에게 아무런 기회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임금 노동자가 아니기 때문에 사회주의에서도 희망을 찾지 못하는 계층 및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요인은 능력 있고 힘있는 사람들 가운데 공동체의 이해와 반하는 이해 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다양한 집단 히스테리들을 조장함으로써 자신의 영향력을 안전하게 유지하려 한다."

이 글들이 대략 1930년대 즈음에 쓰였다고 하는데,

새삼 놀라운 것은,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치스가 (부분적이긴 하지만) 성공을 거두었다는 사실.... 어느날, 사람들 모르게 전체주의가 야금야금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 뚜렷한 징후 때문에 정신 똑바로 박힌 사람이면 그 위험성을 엄청나게 지적했는데.... 결국 통하지 않았쓰....ㅡ.ㅡ

조지오웰 같은 이는 펄펄 뛰면서 생난리를 치고, 러셀도 엄청 쎄게 이야기...

저런 경고들이 도대체 어떻게 묻혀버렸는지 참 상상하기 어려우면서도, 오늘날의 모습도 훗날 돌아보면 이와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라 짐작되어 씁쓸...... ㅜ.ㅜ

 

# 수잔 손택 [타인의 고통]

 

타인의 고통 - 이후 오퍼스 10
타인의 고통 -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이후, 2004

 

"나이가 얼마나 됐든지 간에, 무릇 사람이라면 이럴 정도로 무지할 뿐만 아니라 세상만사를 망각할 만큼 순수하고 천박해질 수 있을 권리가 전혀 없다."

 

'우리'가 아닌 '타인'의 고통을 인식하고 숙고하고 대처하는 방식에 대한 엄청난 성찰.... ㅡ.ㅡ

나는 이제 그녀의 '빠'가 되기로 결심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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