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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적 폭력의 기록 두 편

그리고 있는 대상과 그리는 방법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이 둘은 구조적 폭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1. 조은. [사당동 더하기 25]

 

사당동 더하기 25 - 가난에 대한 스물다섯 해의 기록
사당동 더하기 25 - 가난에 대한 스물다섯 해의 기록
조은
또하나의문화, 2012

 

*  연구자 혹은 관찰자....

 

이 책은 인간의 삶을 관찰하고, 이를 통해 사회적/구조적 질서와 폭력을 해석하는 모든 학문분야에 던져진 도전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어떻게' 연구할 것인가....

 

조은 선생은 빈곤에 대한 주류적 시각 - 소위 '빈곤의 문화' - 에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빈곤의 문화'는 중산층, 혹은 전형적으로 중산층인 연구자들이 빈곤을 이해할 때 가장 쉽게 내릴 수 있는 해석이자 결론이다.

 

"이 연구를 정리하면서 나는 가난한 사람들의 빈곤을 설명하는 '문화적 요인'이 아니라 그러한 문화를 가져오는 구조에 주목하게 되었다. 빈곤 문화가 있는 것이 아니라 빈곤이 있을 뿐이며, 가난을 설명하는 데 가난 그 자체만큼 설명력을 가진 변수는 없다. '가난의 구조적 조건'이 있을 뿐이다."

" '가난함'의 경험은 그 가난을 실제로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생존의 문제지만,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생활양식인 것이다."

" 이들의 가난은 세계화나 금융 자본주의, 도시 공간의 자본주의적 재편 같은 구조적 요인과 동떨어진 듯하지만 실제로 이들의 삶은 바로 그러한 구조적 요인의 직접적인 충격에 노출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적 충격 속에서 그들이 살아 내는 방식, 곧 삶의 양식이 빈곤문화라고 이름 붙여진다. 그리고 그러한 빈곤문화의 핵심에 그들의 성과 사랑과 결혼의 방식이 있다. 그리고 가족이 있다. 이들이 그나마 스스로 선택했고 또 선택할 수 있다고 믿게 하는 영역이다. 특히 대중 매체가 대량으로 유포하는 로맨스 각본은 이들이 손쉽게 매달릴 수 있는 유일한 삶의 각본이기도 하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성적 문란'이나 가출, 이혼, 동거와 출산 등이 '가족의 위기'로 읽히고 빈곤을 재생산하는 빈곤 문화의 핵심 요소로 주목된다."

 

관찰자들, 혹은 연구자들은 같은 현상을 보면서, 다른 해석과 답을 찾아내곤 한다. 

이를테면 같은 시기에 사당동을 연구한 또다른 이들은 지역의 노동통계를 작성하면서 여성 취업률이 채 1/3도 안 된다고 파악했지만, 조은선생님 팀이 본 바로는 큰 병이 걸리지 않는 이상 집에서 '노는' 여자는 없었다.

 

그것이 비단 '가난'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문제를 '두껍게' 읽어내는 방식은 어디에나 필요하다.

우리는 조은 선생님 같은 선배 연구자들이 20년 넘게 노력한 덕분에 빈곤의 문제를 조금 더 두껍게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고, 복잡한 문제의 뒤안을 살펴보는 방식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어떤 관찰자인 것일까.....

 

 

*  그들과 나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내가 책을 읽으며 괴로웠던 것은 솔직하게도, 이들에 대한 연민이나 사회적 불의에 대한 통탄, 혹은 연구자로서의 반성이라기보다, 정말 습자지 한 장 밖에 차이나지 않는 그들과 나의 삶 - 너무도 위태로운 그 경계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마치, 헐리우드재난 영화에서 한끝 차이로 목숨을 건진 인물들이 그 순간 마냥 기뻐하지조차 못하면서 일종의 멘붕 상태에 빠지는 모습이라고나 할까.....

아주 작은 차이 - 정말 우연하게도 우리 집에는 가정폭력이 없었다. 여태까지 이게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환경에서 폭력이 없었던 것이 당연한 것은 아니었던 게다. (아마 가정폭력을 경험했다면 지금과 같은  resilience 를 갖지 못했을 것 같다 ㅡ.ㅡ) 그리고 나는 우연히 공부에 재능이 있었다. 무엇보다, 우연히 우리가 살던 동네에는 대규모 재개발이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소소한 재개발이 있어서 계속 근처 동네를 떠돌며 이사를 다니기는 했지만, 사당동이나 상계동, 행당동 같은 폭력적 상황들은 다행히도 벌어지지 않았었다.

 

부유한 가정, 혹은 중산층 가정이라면 이런 세 가지가 일상이고, 그닥 축복받은 우연도 아니겠지만,

우리같은 사람들에게는 이 세 가지가 같이 있었던 것이 그야말로 우연이고 축복이었다.

취약성 (vulnerability) 이란 이런 것이다.

삶의 경계에 위태롭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작은 변화와 우연에도 엄청난 변이가 일어나고 통상적이지 않은 파국으로 연결되는 것.....  '매일매일 드라마를 찍는다'고 표현할 만큼 우여곡절 많은 삶이란 바로 그러한 잠재적 취약성이 현실화된 결과일 것이다.

"... '에이 쪼금만 들어갖고 되는 것이 아니여. 내가 살았던 것을 얘기할라고 하면은 한정 없어'라는 말로 경훈이 아빠 김씨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경훈 아빠의 가족사와 생애사를 듣는 데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 때 김씨 나이 서른 넷이었다....."

나의 지나간 유년시절에 '찾아온' (내가 만든게 아니니까!) 이러한 소소한 우연과 축복이 일단 빈곤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었다는 점에 대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기뻐하기엔 그 진실이 너무나 씁쓸하다. 

 

 

*  국가의 폭력

 

아무리 생각해봐도 국가 폭력은 참으로 대단하다.

막무가내로 철거를 하고 사람들 3천명을 트럭으로 실어다가 막무가내로 사당동 산 자락 (수도, 전기, 집, 도로, 정말 아무 것도 없는 진짜 그냥 산자락)에 내려놓질 않나, 항의하는 사람들은 한강 모래사장에 풀어놓지 않나.. 이건 뭐...   이건 추상적인 '국가폭력'이라는 단어로 도저히 담아내기 어려운 우격다짐이다.

백주대낮에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 수단이라도 세련되게 바뀌었길 기대하지만, 오늘 본 [두개의 문]은 그러한 기대마저도 헛된 것임을 새삼 일깨워주었다. 

 

#. 김일란 감독 [두개의 문]

 

두 개의 문

 

이렇게 차분한 내러티브 속에서 울화가 치미는 경험도 참 오랜만이다.

정말 짜임새 있게 만들어진, 충실한 텍스트라는 생각이.......

보고 나면 분노와 허탈과 한숨이..... ㅜ.ㅜ

 

어쩌다보니 나는 이명박 정권이 뭘 해도 놀랍지가 않다.

그들은 뭘 해도 정치적 타격을 받지 않는 놀라운 반사 신공, 혹은 투과 신공을 갖춘 것 같다.

용산 참사, 쌍용차 폭력, 사찰, 측근 비리...

하나하나 만으로도 정권퇴진에 이를만한 대박 사건들이지만,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 니들이 그러는게 놀랍지도 않다...

이 정권의 가장 놀라운 업적은 관용과 체념의 수준을 극상으로 이끌어올렸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뭐라 해도 듣지 않으니, 이제 욕하기도 지쳤다며 자포자기하게 만드는 그 근성이 그저 감탄스러울 따름....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나서도 찜찜한 것은

이렇게 기억투쟁에 동참하여 이사건을 잊지 않는 것, 그 너머에 과연 무엇이 있는지 도대체 답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영화 봤으니 나도 개념있는 시민이야 하면서 트위터에 인증샷 올리면 되는 거여?

반드시 정권 교체한다는 각오로 대선에 올인해야 하는겨?

속이 터져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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