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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글] 최순영 의원이 노무현 대통령,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에게 보내는 서한

고 김경숙 열사 제25주기 추도식을 맞이하여


  비가오는 여름날이면 어김없이 몸소리치는 두려움에 떨며 밤을 맞이합니다. 그러다가 옆에 누워있는 남편을 보고서야 비로서 과거가 아니라 현재임을 확인하고 평정심을 찾는 것을 반복한 지도 벌써 25년째입니다. 오늘은 YH 지부장으로서 조합원들과 함께 신민당사에 진입하여 사흘밤을 뜬눈으로, 고향집 부모님과 어린동생들을 생각하며 버티었던 마지막 날입니다. 그 날 기어이 박정희 정권은 폭력으로 어린 노동자들을 짓밟으며, 인간의 존엄성과 기본권마저도 무참하게 빼앗아 갔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빨갱이로 덧칠이 되는 것을 보면서 권력자의 야만성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산업화의 역군이라고 유신내내 칭송하던 그들이 순식간에 입을 닥고 빨갱이로 몰아가는 파렴치함에 치를 떨고 밤을 새워야 했습니다. 그 와중에 운명을 달리한 경숙이만 생각하면 안타까움과 분노가 동시에 온몸을 짓누릅니다.

  연일 벌어지고 있는 두 보수의 국가정체성 논란을 보면서 참으로 어이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적어도 박근혜 대표가 퍼스트레이디로서 역할을 할 때, 노무현 대통령이 판사와 변호사를 하면서 지낼때 숨막히는 공장에서 공순이로서 살아왔던 사람으로서 그 이상의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노동자들의 피와 땀, 고혈로 만들어진 경제성장을 마치 박정희 개인이 만든 것처럼 왜곡하고, 현실을 외면하고 미래만을 언급하는 역사관으로 국가정체성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 아니고 무엇인가요.

  그동안 권력자가 만들어 놓은 ‘국가 정체성’이라는 잣대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나요. 그동안 국가 정체성을 제대로 세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름없는 사람들이 희생되었는지 아시나요. 그 수많은 국민들이 바로 국가 정체성이며, 국가 정체성은 그들이 원하던 민주주의가 아니었던가요. 그 국민들이 권력의 정체성 전쟁이라는 광장에 타의로 끌려나와 커다란 고통을 받고 살았다는 것을 다 알지 않은가요.  

박근혜 대표님이 얘기하는 국가정체성은 무엇을 말하는 건가요. 반공주의로 돌아가자는 얘기인가요. 아니면 다시 산업역군이라고 칭송하던 성장제일주의로 되돌아 가자는 얘기인가요.  국가 권력이 개인이 생존여탈권을 마음대로 행사하던 그 ‘좋던 시절’로 되돌아가자는 얘기인가요.

박근혜 대표님!

  10일 오전 님이 김영삼 전 대통령을 상도동 자택에서 만나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지난 79년 신민당사에서 우리 그렇게 처절하게 싸울 때, 님의 부친이 당시 김영삼 신민당사 총재를 만났더라면, 경숙이의 억울한 죽음도 없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님은 극구 부인하지만, 국가보안법 폐지, 친일진상 규명 등을 둘러싸고 발언하는 님의 국가정체성에는 여전희 박정희의 그늘이 그대로 묻어나고 있습니다. 님이 퍼스트레이디로 있을 때, 사람잡고 경제잡는 성장이데올기에 우리는 수없이 속아왔습니다. 지금이라고 크게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다만 과거에는 권력이 앞장섰다면, 지금은 폭력적인 시장주의가 우리를 옭아매고 있을 뿐, 다른 것은 없습니다.

  님이 국가정체성을 말하기 전에 경제의 고도성장과 정치의 권위주의가 수레바퀴처럼 굴러갈 때 벌어진 수많은 일들에 대해 철저한 자기반성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특히 저는 경제성장이 곧 박정희라는 등식에 절대 동의할 수 없습니다. 경제는 누가 그 자리에 있더라도 노동자의 희생속에 성장했을 거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이른 바, 고도성장의 그늘이 얼마나 거짓으로 가득찼는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제대로 국민에게 알려지지도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님에게 감히 당부드립니다. 아버지의 독재를 시대적 요청으로 인식하는 거나, 경제성장을 박정희 작품이라고 보는 것부터 교정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님이 이렇게 국가 정체성에 집착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국가 정체성에 대한 언급은 삼가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권위주의 산업화와 경제성장의 유산에 대한 욕심을 제발 버리셨으면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얘기하는 국가정체성 또 무엇을 말하는 건가요. ‘유신이냐, 미래냐’ 선택하라고 말합니다. 헌법을 위반하면서 이라크에 파병을 하는 것이 미래를 위한 것인가요. 박정희 정권 때도 그렇게 베트남에 파병을 했는데, 과연 ‘유신이냐, 미래냐’라고 할 수 있는건가요. 부끄럽지 않은가요. 개혁에 대한 실천은 않고 벌써부터 기득권에 안주하면서 미래를 이야기 할 수 있는 건가요. 과거로 회귀하려는 갖가지 정책이 열린 우리당에서 쏟아지는데 과연 미래를 이야기 할 수 있는 건가요.

노무현 대통령님!

  님께서 2003년 2월 제16대 대통령 취임사에서 한 말이 기억납니다. 님은 “개혁은 성장의 동력이고, 통합은 도약의 디딤돌입니다.” “정정당당하게 노력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사회로 나아갑시다. 정직하고 성실한 대다수 국민이 보람을 느끼게 해드려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현실은 나아진 게 전혀 없습니다.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자인 박일수씨를 비롯해 비정규직 차별과 희망을 잃어가는 노동자들의 자살은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현실을 외면하고 과거로 되돌아가자는 얘기인가요. 미래만을 얘기할 수 있는건가요. 님이 선택을 강요하는 ‘유신이냐,미래냐’는 현재의 노동자, 서민의 삶이 묻어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굳이 역사학자의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현재의 우리 국민들의 삶을 고민한다면 민생을 챙기는 일부터 서둘러야 할 것입니다.

  또한 재벌개혁을 비롯해 각종 개혁은 선거용이었다면, 지금이라도 보수의 정체성을 국민들에게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장밋빛 희망만을 양산할 뿐, 현실이 되지 못하는 미사어구에 불과한 말잔치에 더 이상 속을 수 없습니다. 진정한 개혁과 진보는 실천을 할 때 비로서 개혁과 진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넘어서지 못하는 박근혜 대표나, 박정희 전 대통령을 이용하는 노무현 대통령은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의 가슴에는 권력을 두고 벌이는 게임만이 존재하고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서민들의 민생은 온데 간데 없습니다. 우리 노동자 서민에게 고통과 비극을 가져다준 아픈 현대사에 대한 통절한 반성이 있다면, 국가정체성 논쟁보다는 당장 민생의 바다에서 짠 바닷물을 마시며, 고통을 나눠야 할 것입니다. 노동자 서민에게 좌절과 실패를 안겨주었던 분단도 어찌보면 두 보수처럼 ‘국가 정체성’을 빙자한 권력싸움이 만들어낸 과거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인가요.
  
내일 마석 모란공원에서 경숙이를 만난다는 설레임 때문일까요. 솔직히 잠이 안옵니다. 그동안 같은 공순이로서 언니로서 경숙이를 만나왔는데, 내일은 국회의원이라는 옷을 하나 더 걸치고 가야하기 때문인지, 더 어깨가 무거워집니다. 가서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걱정이 앞섭니다.  우리들은 하나같이 모두 시골의 가난한 농부의 자식들이었습니다. 일찍이 고향과 부모곁을 떠나 냉혹한 사회에 뛰어 들어 산업의 역군들로서 열심히 일해왔습니다. 번 돈은 그대로 고향집으로 보냈습니다. 부모님의 자식농사에 보태고, 다시는 우리처럼 못배워 고생하지 말라는 거였지, 경제성장의 단맛을 보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두 분께서는 이 점을 깊이 깨달아주셨으면 합니다.

2004. 8. 10(화) 밤에 최순영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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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대 국회, 개원을 앞두고 (경향일보 6.1)

6월 1일 경향일보 만평 (김용민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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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그렇게 혁명을 갈구했나" (프레시안)

전순옥 이야기
  
  동대문 창신동 '참여성노동복지터' 소장인 전순옥(50)씨에게는 전태일 열사의 동생이란 수식어가 늘 따라붙는다. 1970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은 전순옥씨 인생에도 큰 전환점이었다. 당시 16살이었던 그녀는 어머니 이소선씨와 함께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전씨는 22세까지 봉제의류 공장에서 일했고 그 후 노동조합 활동, 지역운동을 했다. 그녀는 35세의 늦은 나이에 영국 유학길에 올라 지난 2001년 런던 워릭대에서 70년대 여성노동운동을 다룬 <그들은 기계가 아니다(They are not machines)>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은 그해 워릭대 최우수 논문으로 선정된 바 있다.
  
 
전순옥 참여성노동복지터 소장 ⓒ프레시안

  최근 출간된 <끝나지 않은 시다의 노래>(한겨레신문사 펴냄)는 이 논문을 한국어로 옮긴 것이다. 이 책은 동일방직노조·청계피복노조 등 70년대 여성 노동운동가 1백여명의 생생한 육성을 통해 1970년대 여성 노동운동, 또 그녀들의 삶에 대한 재해석의 필요성을 보여준다.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전씨는 유학을 떠나기 전 바로 그 자리로 돌아왔다. 영국 대학과 성공회대 교수직을 마다하고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실이 있는 동대문에서 가난한 여성 노동자들과 함께 지내고 있다.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대신 사회에 알려주는 역할이 바로 내가 할일"이라고 생각하며 "저소득층 여성노동자에 대한 제대로 된 통계를 만드는 것"이 그녀의 목표다.
  
  전씨는 또 지난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의뢰를 받아 고 조영래 변호사의 〈전태일 평전〉(A Single Spark)을 영어로 옮긴 데 이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의문사진상위원회 등의 한국 민주화운동사 영문 번역 작업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이 작업에는 뒤늦게 그녀의 인생의 반려자가 된 남편 크리스 조엘(61)도 함께하고 있다.
  
  조주은 이야기
  
 
여성학자 조주은 ⓒ프레시안

  이화여대 여성학과 박사과정인 조주은(38)씨는 국내에서 드물게 '노동자 가족'을 연구하는 학자다. 노동, 노동운동에 대한 연구는 많지만 노동자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구체적인 삶에 대한 연구는 전무하다는 점에서 조씨가 석사학위 논문으로 쓴 울산 현대자동차 가족에 대한 <현대가족 이야기>(이가서 펴냄)는 올 상반기에 출간된 노동 관련서 중 도드라졌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의 재생산을 담당하는 곳인 가정은 노동 정책과는 거리가 먼 듯하지만 상호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런 노동자 가족에 대한 연구가 전무한 우리나라의 학문 풍토에서 조씨는 일찌감치 어려운 길을 선택한 셈이다. 이런 선택에는 남다른 개인사도 한몫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늦깎이 운동권이 돼 만난 노동운동가인 남편을 따라 울산에 내려가 '전업 주부'로 살았던 경험은 연구자로서 그녀를 '관찰자'에만 머무르게 하지 않았다. 그녀는 앞으로도 '노동'과 '가족'을 화두로 연구를 진행할 계획이다.


전순옥ㆍ조주은 이야기
  
  두 사람에게 공통된 이슈는 '여성'과 '노동'이다. 지난 6일 오후 동대문 '참여성복지센터'에서 첫 대면하자마자 둘은 서로의 연구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보이며 대담은 시작됐다. 대담을 마치면서 전씨는 조씨에게 공동 연구를 제안하기도 했다.
  
  70년대 여성노동운동이 남성 연구자에 의해 경제주의적ㆍ고립적 운동으로 폄하돼 왔다는 점에 동의하면서 두 사람은 연구 대상을 '대상화'하는 지금까지 구태의연한 연구 방법으로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제대로 설명될 수 없다는 점에 공감을 표시했다.
  
  또 "공부한 사람들끼리만 아는 책을 쓰는" 기존의 현학적 풍토에 대한 저항 의식도 비슷했다. 조씨는 "한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있는 책"을 쓰고자 했고, 전씨는 "책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직접 자기 얘기를 읽고 자신들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지금 여기에서 새로운 삶을 만들어가고 긍지와 자부심을 갖는 것"이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는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현재의 남성,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노동운동에 대한 비판 의식도 똑같았다. 조씨는 "대기업 남성 노동운동가들이 자본가와 함께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놀이문화를 공유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이들에게 희망은 없다"고 강하게 비난했다. 전씨도 "영국의 노조가 무기력하게 무너진 것은 노조의 조직 이기주의 때문이었다"며 "현재 우리나라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노동운동도 바로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은지 반성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 사회의 '낮은 곳'을 들여다보고 있는 두 사람은 "우리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질문해야 할 때라고 지적한다. "우리가 왜 노동운동을 하고, 정치를 민주화하려고 하고, 경제 성장을 이룩하려고 하는가?", 좀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날 두 사람의 대담은 사회자가 별 끼어들 필요, 아니 끼어들 틈 없이 세 시간 넘게 계속됐다.
  
ⓒ프레시안

  대담은 지난 6일 저녁 '참여성복지터' 사무실에서 이뤄졌다. 다음은 대담 전문이다.
  
  "여성노동운동에 대한 무관심, 폄하로 이어져"
  
  프레시안 : 전순옥 선생의 책 <끝나지 않은 시다의 노래>와 조주은 선생의 책 <현대 가족 이야기>는 상반기에 출간된 주목할 만한 노동 관련 책이다. 서로의 책을 읽은 소감이 있을 듯하다.
  
  조주은 : 먼저 시작하겠다. 그간 '노동운동'의 역사는 있는데 '여성노동운동'의 역사는 없었다. 2000년에 개인적인 이유로 여성노동운동의 역사와 관련된 책을 도서관에서 검색해보니 정말 한 권도 찾을 수 없더라. 일제 강점기 때 부문운동의 하나로 여성노동운동이 좀 언급돼 있고, 최초로 고공농성을 했던 강주룡 열사의 얘기 등이 부분적으로 인용될 뿐이었다.
  
  이런 무관심은 자연히 여성노동운동에 대한 폄하로 이어진다. 남성이 쓴 많은 노동운동사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 1990년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 1995년 민주노총으로 이어지는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를 말하면서, 이런 노동운동이 1970년대 노동운동의 중심이었던 여성노동운동의 경제주의와 고립적인 한계를 극복하면서 가능했다고 쓰고 있다. '그건 아닌데', 하면서 한국 여성노동운동의 역사를 새롭게 재조명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런 의미에서 전순옥 선생님이 쓴 이 책은 굉장히 큰 의의가 있다고 본다.
  
  전순옥 : 나는 일단 <현대가족 이야기>라는 제목이 참 좋더라. 현대에 살고 있는 가족이 파괴되고 있잖아. 난 제목만 보고도 많이 사서 볼 것 같던데. (웃음) 책은 많이 팔렸나?
  
  조주은 : (웃음) 거의 안 팔렸다.
  
  전순옥 : 사실 노동조합에 대한 연구는 너무나 많은데 실제로 노동자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들의 구체적 삶에 대한 얘기는 전혀 없었다. 이 책은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돋보기를 들이댔다는 점에서 중요한 연구라고 본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나는 이 책에서 사용한 방법론이 참 마음에 들었다. 복잡한 이론을 사용하기보다는 책에서 서술되는 주인공들의 목소리를 가능하면 그대로 반영하려는 노력, 그렇게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구체적인 삶을 들여다본 것도 참 좋았다.
  
  조주은 : 글을 쓸 때 '한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순옥 : 그런 부분이 나랑 맞았다. 내 책의 주인공들도 내가 인터뷰를 할 때, 전에도 인터뷰를 많이 했지만 도대체 내 말들이 어떻게 쓰이는지 몰라서 인터뷰하는 게 싫다는 얘기를 하더라.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하면 주인공들의 언어로 글을 쓸 수 있을까. 그래서 그들이 직접 자기 얘기들을 읽을 수 있을까, 이런 것을 고민하면서 글을 썼다. 나는 학자라기보다는 노동자 출신이니까 그런 면에서는 좀더 유리했고.
  
  내 책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직접 자기 이야기를 읽고, 자신들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지금 여기에서 새로운 삶을 만들어 갈 수도 있고 긍지와 자부심을 가질 수도 있다. 공부한 사람들끼리만 아는 책을 쓰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서구 페미니즘이 제3세계 여성을 대상화한 것은 오류"
  
 
ⓒ프레시안

  프레시안 : 책을 읽으면서 상대방의 연구에 이견이나, 아쉬운 점은 없었나?
  
  전순옥 : 영국에서 공부하면서 서구의 여성학자들이 아시아 개발도상국 여성노동자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알게 됐다. 그들은 아시아 여성노동자들이 경제성장 과정에서 겪은 희생을 보면서, 여성노동자들을 '희생자로 개념화((victimization)'하곤 한다. 대부분이 이런 접근인데 나는 이렇게 제3세계 여성들을 대상화시키는 것에 대해 비판적이다.
  
  제3세계 여성들은 무조건 순종적이면서 희생을 묵묵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기들을 없애기보다는 오히려 현실의 모순을 떨쳐 일어나려는 움직임이 활발했고, 우리나라의 70년대 여성노동운동은 그 단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
  
  <현대 가족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그런 접근이 좀 묻어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남편이 현대자동차 노동자이긴 하지만 그도 노동자 출신은 아니지 않느냐, 조주은 씨도 마찬가지고. 그러다보니 조주은 씨도 노동자 가족들 속에 파묻히기보다는 한 발 떨어져서 '관찰자의 시선'으로 본 게 아니냐는 느낌을 받았다.
  
  조주은 : 물론 그런 측면에 있다는 걸 부인하진 않겠다.
  
  사실 울산에서 이 책은 일종의 '금서'다. 나는 남성 노동자들이 이 책을 읽기를 원했다. 그들이 이 책을 읽고 성찰할 부분이 있다면 성찰하고, 너무 일상이나 관성에 젖었던 자기들의 모습을 이 책을 통해 스스로 객관화시켜 자기비판의 계기로 삼기를 바랐는데...... 남성 노동자들은 아예 안 읽더라. 남편 동료들한테 책에 대해서 물어보면 말을 안 한다. 왜 자기들 사는 모습을 공개적으로 까발려서 우리를 죽일 놈을 만드느냐, 자본가를 욕하고 기업을 욕해야지 왜 우리를 비판하느냐, 이런 식이다.
  
  실제로 인터뷰에 응한 여성들도 책을 보면서 기분이 별로 안 좋다고 애기했다. 한 여성은 나한테 "그래 언니 말이 맞아. 내 남편이 생산직 노동자가 맞긴 한데 그 책을 보니까 갑자기 내 처지가 서글퍼지더라"고 불편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연봉 4~5천만 원씩 받지만 그래봤자 결국 너희는 노동자다, 이렇게 규정하는 게 불편해 보였다.
  
  전순옥 : 실제로 노동자이면서 노동자라는 것을 까놓고 얘기하는 건 안 좋아한다는 얘긴데, 그게 일반 노동자의 의식이 아닌가 싶다. 노동운동을 하면서 또 학생들에게 가르치면서 임노동자와 그들의 자녀들이 정작 스스로 노동자 또는 노동자의 자녀라는 의식을 거부하는 것을 보고 갑갑했던 적이 있다. 사실 그렇게 임노동자들이 노동자 의식을 갖지 못한 것은 예외적인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조주은 : 이견이라기보다는 질문이 될 텐데, 선생님 책을 보면 1970년대 여성노동운동과 관련된 국내 여성학 연구에 대해서도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어떤 점이 문제라고 생각하는가.
  
  전순옥 : 사실 1970년대 우리나라에 여성운동은 없었다. 1980년대 들어오면서 여성평우회, 여성민우회가 생기는 것을 시작으로 여성운동 단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여성학자들은 1970년대 '여성들이 여성의식이 없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예를 들어 노동조합에서 단체교섭을 할 때 여성만의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다거나, 여성 노동자로서 받아야 할 교육은 없었다는 둥. 이런 비판은 당시의 상황을 충분히 감안하지 않은 조금은 무책임한 것이다. 자기들은 그 때 뭘 했나?
  
  프레시안 : 그 당시 여성노동운동을 살펴보면 여성노동자들의 '생활 공동체' 같은 게 존재했다. 그런 모습을 '자생적 페미니즘'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전순옥 선생님도 '한국적 페미니즘'이라는 이유로 그런 것을 강조하고 있다.
  
  "박정희 정권의 탄압에 여성노동운동은 어떻게 10년을 버텼나"
  
 
ⓒ프레시안

  전순옥 : 그렇다. 이런 것을 한번 생각해보자. 1970년대 여성노동운동이 어떻게 박정희 정권의 억압적이고 무자비한 탄압 속에서 10년을 견딜 수 있었을까? 나는 그 힘이 바로 지적한 그런 데서도 나왔다고 생각한다. 많은 연구들은 당시 교회에서 여성노동운동을 지원해준 것을 중요하게 보는데 그것보다는 바로 이런 부분이 더 중요하다.
  
  그들은 정말 인간으로서, 여성으로서 너무 대접을 못 받고 살아왔다. 집에서는 말순이, 섭섭이, 끝단이, 큰년이, 막내로 불리다 공장에 오니까 시다 1번, 미싱사 3번으로 불렸다. 그런데 노동조합에서는 그들의 이름을 불러줬다.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위원장, 교육선전부장 등 직함으로 불리고. '아, 나한테 이름이 있었구나', 이렇게 노동조합 활동을 통해 자아, 존재를 찾은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공장에서 사장들하고 단체교섭을 하면서 사용자가 "미스 리"라고 부르면 "내 이름은 이총각이고, 지부장이다"라고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게 됐고 또 그런 대접을 받으면서 '아 노동조합이야말로 나의 자아를 지켜주는 곳이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노동조합을 지키는 데 헌신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된다.
  
  프레시안 : 그런 점과 연관해서, 1970년대 여성노동운동은 노동조합의 민주적 운영 방식에 있어서도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전순옥 : 맞다. 남성 노동운동가들이 노동조합을 운영하는 방식과 여성 노동운동가들이 노동조합을 운영하는 방식은 전혀 다르게 나타났다. 심리학적으로 남성은 개인적으로 지도자로 우뚝 서려고 하는 성향(individual-oriented)이 있고 여성은 같이 하려는 성향(group-oriented)이 있다고 설명된다. 노동조합 운영에서도 이런 면이 발견된다.
  
  남성들은 자기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이끌어가려다 보니 굉장히 비민주적으로 조직을 운영하게 된다. 그러나 1970년대 여성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운영할 때 모든 것을 조합원들과 같이 의논했다. 여성 노동운동가들은 조합원들 이름 하나하나를 다 기억하려고 했고. YH노조의 최순영 씨 같은 사람은 조합원 3천 명의 이름을 다 기억하려고 노력했던 사람이다.
  
  예를 들어 남성 노동운동가들이 단체교섭을 할 때는 '빠다 조건'이라는 게 있다. 노조 지도자가 사용자한테 이번에 임금을 10%에서 1%를 더 올려주면 내가 노동자 생산력을 향상시키고, 노조가 시끄럽지 않도록 하겠다고 물밑 협상을 하는 것이다. 그러고는 조합원들한테 는 '당신들이 나를 위원장으로 뽑아준다면 다른 사람보다 임금을 1% 더 올리겠다'고 말하고.
  
  근데 여성 노동운동가들의 모습에서는 이런 것을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단체교섭을 할 때 임금 인상률을 지도부에서 결정하는 게 아니라 조합원들과 함께 결정했다. 1970년대에는 소그룹이 많았는데, 그런 소그룹에서 '이번에 우리가 임금을 얼마를 올려야 하는지' 자기들끼리 논의를 한다. 조합원들이 임금 인상률을 15%로 결정되면 집행부가 논의를 해서 조합원들의 의견을 최대한 수용한 결정을 내리고, 공고한다. 이런 과정을 거친 간부들은 교섭에 들어가서 반드시 15%를 올려야 한다. 조합원들의 의견이기 때문에 다른 '빠다 조건'으로 바꾸지도 못한다. 조합원들은 그들대로 내가 주장한 15% 인상을 간부들이 사용자와 교섭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연스럽게 지도부에 신뢰와 절대적 지지를 보낸다. 여기서 지도부는 또 싸울 용기와 힘을 얻는다.
  
  "혼자 결정하다 보니 남성 노동운동가들은 회유가 잘 돼"
  
  조주은 : 동감한다. 남성 노조 지도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제가 다 책임지겠습니다", "믿어주십시오", 이런 얘기들이다.
  
  전순옥 : 맞다. 그런 남성 노조 지도자들은 모든 것을 혼자 결정하고, 혼자 달려가다 보니 유혹에도 쉽게 무너진다. 남성 노동운동가들은 회유가 잘 된다. 어용이 되기 쉽다. 박정희가 1960~70년대 노조를 완전히 어용화시켜 조정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남자들 몇 명만 잡고 있으면 노조를 좌지우지할 수 있었던 그런 분위기 탓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여성들이 중심이 된 노조는 그럴 수 없고, 비타협적이어서 오히려 박정희한테 큰 타격이었다. 그래서 더욱 박정희는 민주노조를 없애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YH노조가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할 때 겨우 여성 2백여 명이 농성을 하고 있는데 중앙정보부 김재규가 관여를 하지 않았느냐. 그만큼 그들의 행동을 큰 타격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한두 사람을 회유하는 것으로 안 되니까 뿌리째 뽑아서 노조를 없애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 상황을 바로 1970년대 여성 노동운동가들이 만들어냈다.
  
  조주은 : 당시에 여성노동자들의 파업을 남성노동자들이 앞장서 방해했었다. 구사대의 대부분이 남성노동자였고 여성노동자가 출근 투쟁할 때 위협을 가하고, 머리채를 잡으며 폭력을 가했던 게 다 남성노동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부분은 선생의 연구에서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
  
  전순옥 : 섬유나 방직 산업에서도 총 4천 명이 일하는 공장에 남자는 한 5백 명 정도에 불과했다. 1천3백 명 있는 공장에서 남자는 1백 명 정도가 있었고, 나도 당시 여성노동자들을 인터뷰하면서 '당시 남성노동자들에게 얼마나 많이 당했느냐, 같은 노동자들에게 당하는 게 더 분하지 않았느냐'고 질문을 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대답이 놀라웠다. 그들은 "아니다. 다시 생각해봐도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남성노동자들도 결국 사용자에게 고용된 희생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오히려 그런 남성노동자들을 노조 지도부에 넣으려고 노력했다. 이 사람들이야말로 계급의식이 훨씬 강했다. 남성과 여성의 대립 구도로 끌어가지 않았다. 만약에 그 남성들과 싸우기 시작하면 그게 바로 자본가들이 바랐던 '노-노(勞-勞) 갈등'이라고 여겼다. 개인적으로 이견이 있더라도, 그들의 입장을 최대한 그대로 반영하는 게 기록자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내 책에서 남성과 여성간의 '적대적 관계'가 빠진 것은 그 때문이다.
  
  "대기업, 정규직, 남성 중심 노동운동 썩었다"
  
  프레시안 : 현재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으로 대표되는 대기업, 정규직, 남성 중심의 노동운동에 대한 비판이 많이 있다. 두 분의 연구는 현재 이런 노동운동 경향에 대한 아픈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노동운동이 자기비판을 하면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다.
  
  조주은 : 극단적인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대기업, 정규직, 남성 중심의 현재 노동운동은 '썩었다'고 생각한다. 파업을 하면서도 '삐삐 아줌마'를 불러서 같이 놀고... 울산에서 직접 보고 들은 차마 얘기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다. 가장 진보적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집행부를 장악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노사가 상견례를 핑계로 룸살롱을 같이 가는 경우도 많다. 사용자가 미리 대기시켜 놓은 아가씨들 끼고 양주 마시면서 놀고. 사용자가 용돈을 쓰라고 주머니에 돈을 찔러주면서 미끼를 던지면 일부 노동운동가들은 그걸 거부하지 않고 받기도 한다. 적어도 남성 노동운동가들도 자본가와 함께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놀이문화를 공유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전망을 가지고, 진보가 나올 수 있을까 굉장히 자괴감이 든다.
  
  오히려 나는 노동운동의 희망이 지금 현재 가장 변두리에 있는 노동자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또 그 중에서도 가장 주변부에 있는 노동자들의 활동 속에서 나오리라고 기대한다. 그들의 활동에서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전순옥 : 자본가와 싸울 수 있는 조건은 자본주의화 되지 않는 것이다. 단체교섭을 통해 임금을 많이 올리는 것은 결코 자본과 싸우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임금을 조금씩 올려 받으면서 노동자들은 '자본의 그물' 속으로 점점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가 의식된 노동자라면 그런 것들을 오히려 거부해야 한다.
  
  우리가 아무리 임금을 올려 받아도 자본가처럼 잘 살 수는 없다. 결국 우리가 노동자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임금인상이 노동운동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됐다. 그것이야말로 자본가들이 원하는 것이다. 대기업 노동자들 중에서는 연봉 4~5천만 원, 심지어 6천만 원을 받는 곳도 있다. 강연을 하러 가면 아예 노조에서 그런다. 강연 듣는 사람들은 노동자가 아니라고.
  
  그렇게 임금이 올라가면 자연히 노동조합의 힘은 없어진다. 어느 정도 임금이 되면 노동자 동료들과 함께하기보다는 가족들과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각종 소비문화를 즐기고 싶어진다. 비정규직 문제를 가지고 노조가 집회를 해도 '그것은 나하고는 상관 없는 일이다', 이런 식이다. 정말로 자본가들이 바라는 그런 노동운동이 지금 한국 노동운동의 모습이다.
  
ⓒ프레시안

  "영국 노동운동 조직이기주의로 망해. 현 대기업 노조 권력 다툼에 몰입"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영국 노동운동이 망했다고 본다. 그들은 노동조합이 조직이기주의에 빠져 비정규직이나 여성노동자들 등 주변에 있는 노동자들의 권익을 추구하는 데 등한시했고 결국 대중으로부터 소외됐다.
  
  그것을 절묘하게 이용했던 게 바로 대처다. 1980년대 대처가 추구했던 신자유주의 정책의 핵심은 노동조합의 힘을 약화시키는 데 있었다. 노조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는 조합원 수를 줄여야 했고, 국영기업의 민영화 정책을 강하게 밀어붙인 배경에도 이런 사정이 있었다. 국영기업을 사기업으로 만들면서 구조조정을 통해 한 사업장에서 반 수 이상의 노동자들이 해고됐다. 영국의 노조가 너무나 무기력하게 이런 공세를 당한 데는 노조의 조직이기주의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노동운동도 바로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은지 반성해봐야 한다.
  
  영국에 처음 간 1990년 초에 노동자 대회를 갔는데, 2백 명이 참석했더라. 당시 우리나라는 노동운동이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있을 때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운동은 성공할 때가 있고 기울 때가 있다. 우리나라의 노동운동도 이런 것을 똑바로 배워야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조주은 : 현재 대기업 노동조합들은 서로 조직의 권력을 잡는 데 몰두해 있다. 민주노총 현대자동차 노조 자유게시판을 한번 봐라.
  
  내가 남편하고 5년 정도를 떨어져 있었다. 남들이 남편이 '바람'을 필지도 모른다면서 걱정하곤 할 때마다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남편이 혹시 다른 여자하고 그런 일이 있다면 바로 자유게시판에 뜬다. 눈에 띄는 신인 노동운동가가 부인하고도 떨어져 있는데, 저 뒤를 캐면 속한 조직에 흠집을 낼 수 있겠구나 하면서 감시를 하는 거다. 남편이 속한 조직의 상대편 조직 사람들이 내 남편을 지켜주고 있는데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웃음)
  
  현대자동차 노조의 경우에는 이번에 울산 북구에서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이 나왔기 때문에 권력을 둘러싼 경쟁이 더욱더 치열해질 것이다. 다음 현대자동차 노조 위원장을 하는 것은, 이후에 누가 울산 북구 국회의원을 하느냐의 문제와도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차마 말로 못하는 사정들이 너무나 많다.
  
  전순옥 : 사실 우리 노동운동 속에 보기에도 민망한 추악한 계파 싸움이 있다. 다들 다른 이데올로기를 표명하지만 사실 자기 조직을 지키기 위한 이데올로기이지 노동자를 해방시키기 위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는 것은 본인들이 더 잘 안다. 서로 자기 정파를 살리기 위해서 내분을 하고, 그 때문에 지도자들을 믿고 따랐던 노동자들이 희생을 당하고.
  
  이렇게 지도부가 계파 싸움에 몰두해 있는 동안 조합원들과 지도부의 괴리감이 커진다. 지도부가 뭘 하고 다니는지 조합원들이 모른다. 그러다 보니 예전에 없던 '지도부 불신임'이 많이 일어난다. 이런 속에서 노동운동의 노하우가 축적이 안 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지도부는 능력 없는 허수아비가 될 것이고, 그러다 보면 더 계파 싸움에 의존하는 악순환이 반복될 것이다.
  
  프레시안 : 조주은 선생의 남편도 현대자동차 노조 활동가였다. 남편은 이 책에 대해 어떻게 평가했나?
  
  조주은 : 남성노동자들을 너무 비하하는 표현들이 있어서 걸린다고 얘기했다. 예를 들면 "남성노동자들은 여성노동자들을 성적인 시선으로 대한다", 이런 단정적인 표현을 "그러기 쉽다" 이렇게 고치는 식으로. (웃음)
  
  전순옥 :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다. 여성은 18명을 인터뷰했는데, 현대자동차 남성노동자들의 수는 적다. 일부러 아내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가족 얘기를 쓴다고 해도, 부부 양쪽 얘기를 같이 들으면 내용이 더 풍부해졌을 텐데, 왜 그랬나? 남성노동자들을 인터뷰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나, 아니면 의도적이었나?
  
  조주은 : 약간 의도적이었다. 이 연구를 하기 전에 울산 노동자 가족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부부를 같이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부인은 말을 한 마디도 못했다. 그런 거 보면서 같이 안 되겠구나 싶었다.
  
  사실 가장 좋은 것은 똑같은 사안을 놓고 부부를 동시해 인터뷰해서 그들의 목소리를 담는 것일 텐데, 울산에서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그럴 때 남자들은 대개 "나는 이렇게 얘기했는데 너는 뭐라고 했느냐. 너한테 이런 질문 할 테니 이렇게 답해라", 이런 식으로 아내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 든다. 그래서 처음부터 아내의 목소리에 주목하기로 했다.
  
  프레시안 : 혹시 서로의 책을 읽으면서 세대차나 또는 시각차는 없었나?
  
  조주은 : 나 같은 경우는 오히려 가까워졌다. 솔직히 말하면 전태일 열사의 여동생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전순옥 선생의 책은 남성적 시각이 주가 됐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책을 읽어보니 책 전체에 여성주의적 관점을 견지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을 보면서 오히려 반갑게 느껴졌다.
  
  "노동자 중에도 가장 힘없는 노동자에 마음 가. 그게 바로 여성노동자"
  
  전순옥 : 이 책을 쓸 때도 그랬고 지금도 주변 사람들은 내가 여성주의자인지 안다. 또 여기 창신동에 와서 '참여성노동복지터'를 하고 있어서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누가 '페미니스트가 아니냐' 물어보면 '아니다'라고 말한다. (웃음) 페미니즘을 거부하기 때문은 아닌데 어쨌든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닌 것 같다.
  
  나는 아무래도 노동자 출신이라서 그런지 노동계급의 성향이 짙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노동계급 중에서도 가장 열악한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 사회에서 가장 힘이 없는 사람들, 같은 노동자 중에서도 가장 힘이 없는 노동자 쪽에 내 마음이 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항상 그곳에는 여성이 있었다.
  
  프레시안 : 괜한 것을 물은 것 같다. 그럼 상대방에 대한 조언이나 바람이 있을 법하다.
  
  전순옥 : 나는 오늘 조주은 선생이랑 같이 얘기를 해보니까 앞으로 같이 해볼 수 있는 일들이 너무 많을 것 같아서 기대가 된다. 얘기를 하면 할수록 그런 생각이 더 뚜렷해졌다.
  
  앞으로 빈민 여성에 관심을 가지는 학자들끼리 네트워크를 한번 해보고 싶다. 서로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방점은 다르겠지만, 부분적으로는 같이 연구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일을 거라고 기대된다.
  
  조주은 : 나도 그 네트워크에 꼭 끼워 달라. (웃음) 나는 전 선생이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말한 게 페미니즘에 대한 거부감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든다. 얼마 전에 <한겨레21>에 내 책에 대한 서평이 실렸는데 거기에 '여성학자 조주은'이라고 쓰인 것을 보고 나도 깜짝 놀랐다. 그 때 기분이 참 묘했다. 내 자신부터 여성학자라고 규정되는 게 당혹스러웠다.
  
  나는 전순옥 선생이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한다. 선생이 하는 일이 가장 앞서가는 여성주의적 실천과 연구라고 생각한다.
  
  "노동자 목소리 대신 알려주는 게 내 할일"
  
 
  전순옥. <끝나지 않은 시다의 노래> (한겨레신문사 펴냄) ⓒ프레시안

  프레시안 : 현재 하고 있는 일과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소개해 달라.
  
  전순옥 : 내가 연대하고 싶은 사람들, 이 노동자들에 대한 기록이 너무 없었다. 창신동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몇 시간을 일했고, 얼마를 받고 있는지에 대한 통계가 하나도 없다. 기존의 통계들은 너무나 공평하지 못하고 자의적이다. 소외된 사람들은 통계마저도 거부한다.
  
  우리나라가 세계 11위의 경제 규모를 가지고 있고, 노동운동도 많이 발전했지만 여전히 이 사람들은 그런 것과 무관하게 살고 있다. 그들의 목소리를 기록하고 그들의 통계, 아니 우리들의 통계를 만드는 것이 바로 내 꿈이다.
  
  영국에서 학위를 마쳤을 때, 그 학교에 자리가 났었다. 사실 고민하면서 영주권 신청까지 했다. 그러나 이런 결심을 굳히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 와서 마침 성공회대학에 연구교수 자리가 생겨서 가게 됐는데 거기도 딱 1년 만에 사표를 냈다.
  
  내가 원래 이 지역에서 여성노동자 공동체, 탁아소를 했다. 이제 외국까지 가서 박사를 마치고 다시 돌아오니까 주변에서 '박사까지 하고 이걸 하느냐'고 혀를 차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바로 박사까지 했기 때문에 꼭 여기로 돌아와야 했다고 생각한다.
  
  전태일 오빠는 70년대 노동자들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노력했다. 그런데 그가 보잘 것 없는 노동자였기 때문에 아무도 귀를 안 기울였다. 만약 전태일이 대학생이었어도 그랬을까?
  
  여기서 1960~70년대부터 노동을 하고 있던 여성노동자들이 16시간씩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어도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돌아오니까 인터뷰도 하고, 한마디 하면 신문에도 실리고 그러더라. 그게 바로 외국 유학 다녀온 박사라는 타이틀 때문이라면,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대신 사회에 알려주는 역할이 바로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조주은 : 나는 아직 학위 과정 중에 있으니까 큰 포부를 말하기는 좀 어렵다. 다만 노동자 가족 문제에 계속 천착해 들어갈 생각이다. 솔직히 노동자 가족을 연구하는 사람이 나 밖에 없는 것 같다. <현대가족 이야기>는 노동자 안에서도 가장 상층 가족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젠 가장 밑바닥에 있는 노동자 가족에 대해서 연구해보고 싶다. 또 민족주의적인 태도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더 홀대 받고 있는 이주 노동자의 가족에 대해서도 연구를 해보고 싶다.
  
  "권력 가진 이들의 정체된 의식이 사회의 정체 낳아"
  
 
  조주은. <현대가족 이야기> (이가서 펴냄) ⓒ프레시안

  프레시안 : 마지막 질문을 던져보자. 각자 영역에서 두 분은 우리 사회의 변화에 대한 어떤 전망을 가지고 있나.
  
  전순옥 : 요즘엔 현대 사회와 가족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곤 한다. 가족이 어떤 가치를 함께 나눌 수 있을까, 이런 생각 말이다. 서구와 달리 우리는 끈끈한 가족애, 가족에 대한 사랑이 있었고 나는 그것이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어갈 수 있는 힘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자부심을 가졌는데 그 동안 많이 변했더라.
  
  사회가 발전하면서 경제 성장이라는 한 가지 목표만 열중하다 보니까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이제 우리 사회도 거시적인 것보다는 좀더 미시적인 접근을 해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가치관을 어디에 둘 것인지를 같이 고민했으면 좋겠다.
  
  우리가 왜 노동운동을 하고, 정치를 민주화하려고 하고, 경제 성장을 이룩하려고 했나. 왜 우리가 그렇게 혁명을 목소리 높였나. 바로 내 삶을, 또 이웃들의 삶을 좀더 행복하게 만드는 게 아니었나?
  
  그게 개인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사회 모든 구성원들이 가치관을 어디다 놓느냐에 따라 '새로운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노동자들부터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할 때다. 우리가 무엇을 향해 달려갈 것인지를 점검한 다음에 다시 시작했으면 좋겠다.
  
  조주은 : 질문에 답하기가 막막했는데 전순옥 선생 말씀을 듣고 보니 감이 온다. (웃음) 우리 사회는 현재 엄청난 변화와 정체가 섞여 있는 것 같다. 강금실 법무부 장관이 인기를 얻는 것을 보면서 여자가 법무부 장관을 하고, 그가 이혼했다는 게 거의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의 인식이 많이 변했다고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변하지 않는 뭔가가 있다.
  
  난 두 아이 엄마인데 큰 애가 '가정환경 조사서'를 갖고 왔다. 너무 놀랐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 그 양식 그대로더라. 여성, 소수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 그런 모습이 여전히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 좀더 힘 있는 사람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정체된 의식이 바로 사회의 정체를 낳는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가 합리적인 의사소통이 안 되고 힘을 가진 사람 위주로 돌아가는 것도 그 때문이라는 생각이고.
  
  변화의 가능성과 과거의 정체가 혼돈돼 있는 이럴 때일수록 조금이라도 더 힘을 가진 사람들부터 우선 변할 필요가 있다. 당장 우리 사회 남성들부터 조금씩 변하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것을 이끌어내기 위한 여성들의 노력도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프레시안 : 오랜 시간 좋은 말씀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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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열사의 영전에 원내진출 보고합니다&quot; (오마이뉴스)

▲ 19일 오전 권영길 민주노동당 대표와 당직자들이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모란공원에 있는 전태일 열사의 묘소를 찾아 헌화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단병호 당선자를 안으며 축하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법대생 친구 하나만 있었으면..."이라고 호소했던 전태일. 그가 떠난 지 34년만에 법을 만드는, 노동자·농민·민중을 위한 법을 만들겠다는 국회의원 10명이 그의 묘소를 찾아왔다.

권영길·천영세·조승수·강기갑·최순영·이영순 등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당선자들과 이주희 비례대표 후보 등은 19일 아침, 총선 이후 민주노동당의 첫 공식행사로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의 묘소를 찾았다. 단병호 당선자는 당선확정 다음날인 16일 아침에 혼자 모란공원을 찾기도 했다.

전태일 열사가 70년 이후 한국 노동운동의 발화점이고, 민주노동당의 뿌리라는 점에서 이들이 모란공원을 찾아 '총선보고대회 및 전태일 열사 추도식'을 가진 것은 너무나 당연해 보인다.

단병호 당선자는 추도식을 시작하기에 앞서 모란공원에 묻힌 조영래 변호사, 79년 YH사태 당시 사망한 김경숙씨, 계훈제 선생, 유구영 전노협 선봉대장, 최명아 민주노총 조직1국장 등의 묘소를 참배하면서 기자들에게 이들에 대한 기억을 전해 주기도 했다.


"태일아, 엄마가 너하고 약속한 것을 지켰다"

▲ 이소선 여사와 권영길 대표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전태일 열사의 묘소에서 민주노동당 당선자들을 맞이한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75세)는 "태일아, 너하고 한 약속을 지켰다. 너도 지하에서 기뻐할 것이다"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당선자들을 차례차례 껴안았다.

이 여사는 단병호 당선자에게 "이제는 '단 위원장'이라고 하면 안되지. 맨날 감옥에서만 만났는데. 어제 텔레비전에 나오는 것을 보고 양복 좀 입고 나오지 했는데. 구속돼 있을 때 감옥에 두고 나오면서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데. 참 장하고 대단합니다.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안 죽고 사니까 이런 모습을 봅니다. 10명 채워달라고 그렇게 기도를 했습니다"라며 감격스러워했다.

단 당선자는 "저 한테는 위원장이 최고의 호칭 아닙니까. 그 동안 어머니가 그렇게 고생하셨는데…. 저희가 잘 할 겁니다"라며 응수했고, 권영길 대표를 비롯한 당선자들과 민노당 관계자들 모두 얼굴이 벌개지도록 눈물을 흘리며 이 여사를 껴안았다. 권 대표와 단 당선자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이게 꿈은 아니죠."(이소선), "정말로 고맙습니다."(권영길) "이제 한 번 웃으셔야죠. 그리고 건강하게 오래 사셔서, 우리가 집권하는 날을 보셔야죠."(천영세) 차례차례 포옹을 하는 이 여사에게 조승수 당선자는 "어머니, 저도 좀 안아주십시오"라며 '어리광'을 부리기도 했다.

"원내진출은 노동해방·인간해방의 한 과정일 뿐입니다."

권 대표는 "민주노동당의 국회진출을 모란공원에 있는 열사들에게 보고 드린다"며 추도사를 시작했다.

"전태일 열사의 영전에, 그리고 수많은 열사들의 영전 앞에서 오늘 민주노동당이 드디어 마침내 국회에 진출했다는 보고를 드립니다. 우리는 목숨을 뺏긴 동지들, 목숨을 버린 동지들을 안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여전히 노동자·농민·서민은 죽어가고 신음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목숨을 내던지고 있습니다.

민주노동당의 의회진출은 노동해방·인간해방의 한 과정이고 시작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다짐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수많은 탄압을 딛고 여기에 왔습니다. 앞으로 또 다른 고난의 길이 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어떤 길이라 하더라도, 지금보다 더한 고난이 되더라도 분연히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한판 대동의 춤판을 펼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새롭게 출발합니다."


전태일 열사의 동생인 전순옥(성공회대 교수)씨는 "70년 11월 13일 오빠가 분신해서 죽은 뒤 18일 이곳으로 왔을 때는 나무 하나 없고, 마른풀만 있었다"며 "그때는 오늘 같은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고 눈물을 찍어냈다.

양재우 모란공원 관리소장은 "모란공원에는 열사들의 묘가 90기 정도 있는데 전태일씨가 가장 먼저 들어왔다"며 "이소선 여사를 자주 뵀는데 이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인 것 같다"고 말했다.

부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이소선 여사는 병색이 비치는 얼굴로, 가끔씩 숨을 몰아쉬면서도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이들에게 기쁨과 당부의 말을 전했다.

"민주화운동했던 사람들도 우리 외면…마른땅에 내리는 비가 돼 달라"

▲ 아들 전태일의 흉상앞에서 눈을 지긋이 감고 있는 이소선 여사.
ⓒ 오마이뉴스 권우성
"오늘이 있기까지 투쟁하다 죽은 사람들의 노력이 이어져 온 것을 느낍니다. 35년동안 생생하게 봐왔습니다. 어제 방송에서 모란공원에 온다는 말을 듣고 감사하고 기뻤습니다. 그런데 앞으로도 얼마나 고생을 해야 할지 마음이 아픕니다. 한나라당과 다른 당들이 있는 곳에서 당당하게 해 나가기를 빕니다.

태일이가 죽기 전에 그랬습니다. 노동자가 같이 싸우지 않으면 저들이 시키는 대로 사는 노예가 될 것이라고 그랬습니다. 엄마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엄마가 하늘나라에 와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그래서 꼭 지키겠다고 약속하고 억장이 무너져 내가 쓰러졌어요.

그런데 그 동안 수많은 사람이 죽고 싸우고 한 그 노력이 없었다면 태일이가 골백번 죽어도 오늘이 있었겠습니까. 근로기준법 고치자고 할 때 한 명의 의원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국회앞에서 농성할 때도 우리와 같이 민주화운동을 한 국회의원들이 우리를 외면했습니다. 국회의원 한 번 더하려고 우리를 외면하는구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 우리의 국회의원이 생겼습니다. 약한 자, 굶는 자, 멸시 당하는 자 들을 위해 계속 싸워 주십시오. 겸손하고 강하게 해야 합니다. 말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힘들어도 바르게 가야 합니다. 간절한 소망입니다. 그렇게 해서 4년 후에는 온 국민이 갈급해 하는, 오늘처럼 마른 땅에 내리는 비처럼 돼야 합니다.

할 말이 많지만 힘이 듭니다. 국회의원 된 사람들한테 함부로 말한다고 하지 말아 주세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데…. 기자여러분들도 노동당에 대한 여론을 정확히 감안해서 잘 써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고 문익환 목사가 자신의 영치금을 기증해 만든, 가슴에 근로기준법 책을 들고 있는 전태일의 흉상이 민주노동당의 다짐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2004/04/19 오후 4:29
ⓒ 2004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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