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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펌] 위기의 한국의료 2

영리병원 허용과 민간의료보험 도입이 과연 한국의료의 대안인가?
  
  지금 우리나라 보건의료 제도는 변화의 갈림길에 서 있다. 지난 9월부터 정부가 쉴 새 없이 쏟아내고 있는 여러 법률들의 제정 및 개정 때문이다. 대표적인 보기 두 가지만 살펴보자.
  
  먼저 재정경제부가 제출한 경제자유구역의 지정 및 운영에 관한 법률(경제자유구역법) 개정안(9월 10일 입법예고). 이 개정안은 기존 법률에서 "외국인 전용 의료기관"이라는 용어를 없애고, 의료기관 개설의 주체로 기존의 "외국인" 외에 "외국인 투자 기업"을 덧붙였다. "외국인 전용 의료기관"이라는 용어를 없앤 것은 곧 내국인 진료를 허용하겠다는 뜻이다. 경제자유구역에 사는 외국인만을 상대해서는 외국병원이 수입을 올릴 수 없고 따라서 들어올 외국병원이 없다는 것이 법률 개정의 이유라고 한다. "외국인 투자 기업"을 덧붙인 것은 국내 기업이 영리병원을 세우는 것을 허락하겠다는 의미다. 왜냐하면 외국인투자촉진법은 "외국인 투자 기업"을 "외국인"의 투자 금액이 5천만 원 이상이면서 주식의 10% 이상인 기업으로 보기 때문이다. 국내 기업 중 이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기업은 거의 없다.
  
  다음으로 민간투자 활성화를 위한 복합도시개발 특별법(기업도시법) 제정안(9월 22일 공청회 자료). 법안 공청회 자료에 따르면 기업이 도시개발과 동시에 의료기관을 세울 수 있으나 병원 운영을 시작할 때 비영리 의료법인으로 바꾸어야 한다. 특이한 점은 노인 병원, 생명공학 전문병원, 암 전문병원 등 특수 목적 병원을 운영할 때 발생하는 잉여금 일부를 기업도시 개발에 쓸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말로는 영리법인 의료기관을 개설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 같으나 실질적으로는 의료기관을 운영해서 생기는 수익을 의료기관 바깥으로 유출하는 것을 허용한다는 것이 이 법의 핵심이다. 말하자면 실질적으로는 영리법인 의료기관 운영을 용인하는 법이다.
  
  "의료'기업' 만드는 데 혈안된 정부
  
  여기에서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정부가 기업 투자 활성화를 위해 사활을 걸고 있는 핵심 법안들이 모두 영리법인 의료기관 개설을 허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우리나라 의료 제도에 큰 변화를 불러올 수 있는 이들 정책은 모두 경제 부처에서 만든 것이라는 점이다. 지금은 주무 부처인 보건복지부가 복지정책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 부처들의 영리법인 의료기관 허용 정책에 맞서는 방파제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 이 나라의 국정의 형편이다.
  
 
  ⓒ연합뉴스

  참여정부 보건의료 정책의 핵심 공약이라 할 수 있는 45%에 머물고 있는 건강보험의 보장성(진료비가 100만원이면 자기 주머니에서 55만원을 내야한다는 뜻)의 80%까지의 확대와 8%에 머물고 있는 공공의료기관의 30%까지의 확대(OECD 평균은 공공의료기관비율이 75%이다) 정책은 새 정부 출범 2년이 다 되어가도록 전혀 실현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최근 경제 부처의 정책 드라이브가 참여정부의 보건의료 정책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영리병원, 정확하게 영리법인 의료기관 허용 정책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받아들일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병원을 세우는 데 외부의 자본을 끌어들이고 병원을 운영하여 거둬들인 이윤을 자본 투자자들에게 배분하는 것이 영리병원이다. 영리병원은 '이윤 획득'을 존재 이유로 삼는 하나의 의료 '기업'인 셈이다.
  
  영리병원의 장점은 단순한 경제 논리, 즉 경쟁 논리라는 경제학의 상식에 기초하고 있다라는 점에서 주장되고 있다. 그리하여 이윤 동기는 경쟁력 강화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경쟁력 강화는 서비스 개선과 비용 절감, 가격 하락으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보건의료가 다른 재화나 서비스에 비해 특수하다는 것이 모든 보건학과 보건경제학 교과서의 첫머리에 나오는 문장이다. 요약하면 의료라는 재화는 다른 상품과 달리 소비자가 의료라는 상품을 판단하기 곤란하고 따라서 공급자가 주도할 수밖에 없으며 또한 의료가 필수재라는 것이 그 이유이다.
  
  "영리병원이 비영리병원보다 효율적일까?"
  
  영리병원이 비영리병원보다 효율적이다? 이론적으로도 사실로도 그렇지 않다는 것이 밝혀진지 오래다. 우선 영리병원은 비영리병원일 경우 하지 않아도 될 비용부담이 크다. 영리병원은 우선 비영리병원보다 세금부담이 높다. 또한 시장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마케팅도 더욱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 비영리병원을 운영할 때는 그리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비용이 발생하는 것이다.
  
  게다가 가장 큰 문제가 있다. 투자자들에게 이윤을 배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푸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먼저 수입을 늘리는 방법이 있다. 의료의 특성인 소비자 무지(consumer's ignorance)를 악용하여 의학적으로 불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환자는 자신의 병이나 치료 내용에 대하여 (설명을 듣더라도) 알기 어려우므로, 속수무책인 경우가 다반사일 것이다.
  
  또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서비스 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도 있다. 환자의 조기 퇴원을 유도하여 병상 회전율을 높이는 것도 방법이다. 또 하나의 방법은 비용을 줄이는 것이다. 인건비 비중이 높은 의료 산업에서는 의료진, 특히 간호사나 보조 인력의 수를 줄이는 것이 효과적인 방안일 수 있다.
  
  이렇게 상식선에서 파악할 수 있는 영리병원의 장단점은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있을까? 미국의 사례가 도움이 된다. 미국의 경우 2002년 현재 영리병원의 병상수가 전체 병상수의 13%로, 영리병원과 비영리병원을 비교할 수 있는 자연 실험(natural experiment)의 장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연구 결과 몇 가지만 살펴보자.
  
  -메디케어(Medicare)* 중증 환자의 영리병원 사망률은 비영리 비수련(non-teaching) 병원보다 7%, 비영리 수련병원보다 25% 정도 높았다. (메디케어는 65세 이상 노인을 대상으로 미국 연방 정부가 운영하는 의료보장 제도다.)
  
  -여러 연구에서 영리병원 진료비가 비영리병원 진료비보다 3-11% 가량 비싼 것으로 나타났다. 영리병원 진료비가 더 싸다고 보고한 연구 결과는 아직 없다.
  
  -영리병원은 비영리병원보다 관리 운영비를 더 많이 지출하는 반면, 간호사와 기타 의료진에 대한 인건비 지출은 더 작은 것(40.9% 대 48.0%)으로 나타났다.
  
  -영리병원과 비영리병원의 환자 사망률을 비교한 15편의 연구 결과를 메타분석을 통해 종합한 결과, 영리병원 환자 사망률이 의미 있게 높았다.(메타분석은 쉽게 말하면 여러 연구를 분석하는 포괄하여 분석하는 연구방법이다.)

  
  서비스의 질 개선과 비용 절감, 가격 하락 등 영리병원에 대한 희망 섞인 기대가 현실 속에서 보기 좋게 배반당한 셈이다. 단지 영리병원에 입원했다는 이유로 환자의 사망 확률이 커진다면, 그 어떤 것이 영리법인 의료기관 허용을 정당화할 수 있단 말인가?
  
  "영리법인 의료기관 도입하면 '민간의료보험'도 도입될 것 뻔해"
  
  그럼에도 영리법인 의료기관을 제도적으로 허용하는 경우, 뒤이어 따라오는 변화는 '민간의료보험' 도입이다. 현재 우리나라 건강보험이 감당하는 진료비는 전체 진료비의 절반 수준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건강보험을 의료보장 제도가 아니라 '진료비 할인 제도'라고 비꼬기도 한다. 이렇게 급여 수준이 낮은 상황에서 비영리병원보다 진료비가 비싼 영리병원이 허용되면, 목돈을 당장 마련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별도의 보험에 들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아니, 영리병원이 허용되지 않더라도 건강보험의 급여 확대가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가 지속된다면, 사람들은 자연스레 다른 대안을 찾기 마련이다. 바로 민간의료보험이다.
  
  마침 영리법인 의료기관 허용 문제가 쟁점으로 떠오르는 것과 때를 같이 하여 민간의료보험 도입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보험개발원의 연구 결과가 거의 모든 일간지에 보도되었다. 지난 10월 14일 보험개발원은 이라는 연구 결과를 소개하며 "우리나라의 경우 본인부담금 비율은 OECD 조사대상국 중 최상위로 나타났으며, 전체 의료비 지출 중 공적건강보험의 지출구성비는 최하위로 나타나 민영건강보험의 활성화가 절실한 실정"이라고 주장했다. 연구 결과는 정부가 펴내는 <국정브리핑>에 실린 것은 물론, KBS, SBS, iTV, CBS, YTN, MBN 등 방송 전파를 탔으며, <중앙일보>, <한국일보>, <한겨레신문>, <경향신문>, <국민일보>, <문화일보>, <매일경제>, <한국경제>, 심지어는 <스포츠한국>도 같은 내용을 논평 없이 고스란히 "받아 적었다."
  
 


  민간의료보험 도입이 과연 그렇게도 매력적인 대안인가? 공적건강보험의 지출 구성비가 최하위라는 문제의 해법이 공적건강보험의 급여 확대가 아니라 민영건강보험 활성화가 될 만큼 민간의료보험 도입이 절실한가?
  
  이 또한 상식선에서 문제를 본다면, 고개를 끄덕이기가 쉽지 않다. 영리병원과 마찬가지로 사(私)보험의 존재 이유도 역시 '이윤 획득'이다. 사보험도 보험 '기업'이 파는 상품이다. 획득한 이윤을 투자자들에게 배당하기 위하여 시장 점유율을 끌어올려야 한다. 이를 위한 공세적인 마케팅 활동은 필수적이다. 그러니 관리 운영비가 커질 수밖에 없다. 바로 그만큼, 환자 진료에 쓰는 비용은 줄어들게 된다. 건강하고 돈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가입도 쉽지 않다. 나이가 많고 가난한 사람일수록 질병 발생 확률이 크기 때문에 부담해야 하는 보험료가 많거나 아예 보험회사가 가입 자체를 기피할 수도 있다. 한국의 경우를 보면 공적인 건강보험의 경우 가입자가 1백원을 내면 기업주가 1백원을 내야한다. 건강보험공단 관리비로 15원이 들고 따라서 가입자가 받는 비용의 혜택은 1백85원이다. 그러나 모 생명보험의 경우 작년 한해 수입은 2조원인데 비해 가입자에게 지불한 돈은 6천억원이다. 말하자면 1백원을 가입자가 내면 돌아오는 돈은 30원이다. 6배 정도의 차이가 나는 것이다.
  
  이러한 상식을 다시 자연 실험의 장인 미국으로 가져가서 극적인 두 가지 사례만을 살펴보자. 인구 3천4백만인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서 가장 큰 건강보험으로 꼽히는 것은 비영리의 카이저 퍼머넌트(Kaiser Permanente)와 영리적으로 운영되는 청십자(Blue Cross) 건강보험이다. 그런데 2000년 기준으로 전자는 보험료 수입의 96%를, 후자는 76%를 보험 의료비로 지출하였다. 결국 20%의 차이에 해당하는 금액이 투자자에 대한 이윤 배당과 공세적인 마케팅 비용 등 간접비로 지출된 셈이다. 아래 그림은 미국의 공적의료보장 제도에 해당하는 메디케어와 비영리 청십자 건강보험, 그리고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민간의료보험의 간접비 비중을 비교한 그림이다. 그림에서 가장 오른쪽에 있는 막대그래프는 우리나라에서 판매되고 있는 암보험 상품의 간접비, 정확하게는 사업비의 비중을 보여준다. 2003년 건강보험통계연보에 따르면 건강보험의 간접비, 즉 관리운영비는 4.1%였다.
  
  "우려스러운 참여정부의 '선택'"
  
  지난 7월 14일, 재정경제부는 국민경제자문회의에 제출한 <서비스산업 경쟁력 강화방안>이라는 보고 문건을 통해 "개방과 경쟁을 통한 서비스의 질 향상, 고용 창출 및 성장 기여, 국제수지 개선 등의 효과를 체험케 함으로써 이해집단의 인식을 바꾸고 사회적 합의 기반을 확충"할 것을 주장했다. 영리법인 의료기관 허용과 민간의료보험 도입 정책은 그 주장의 핵심에 서 있다. 과연 이들 정책이 한국 의료의 새로운 대안인가? 대답은 부정적이다. 우리의 상식과 현실적 근거들은 재정경제부의 바람과는 한참 거리가 있어 보인다. 변화의 갈림길에 놓인 한국 의료, 참여정부의 선택이 우려스럽기만 하다.

 

최용준/한림의대 사회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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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펌] 위기의 한국의료 1

위기의 한국의료, 현실 진단과 해법
  
  요즘 한국 의료의 속내를 유심히 살펴본 사람이라면 한결같이 '내우외환의 위기 상황'이라는 데 입을 모으고 있다. 위기의 징후는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우선 급증하는 의료비 지출이다. 1995년 5조원이던 건강보험재정 지출이 2003년 현재 16조원으로 무려 3배 이상 증가했다.
  
  병원업계의 상황도 심상치 않다. 병원협회의 추산에 따르면, 1998년 3.7%이던 병원 도산율이 2002년 9.5%로 급증했다. 상당수의 병원이 경영적자를 호소하고 있는데, 이를 단지 병원업계의 엄살로 치부하기는 곤란한 실정이다. 의료에 대한 국민의 반응도 위험 수위다. 한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의료소비자권리찾기' 토론방에는 개설 6일만에 1천3백50여건의 의견이 올라왔고, 조회 건수만도 20여만 건에 달했다. 게시된 의견의 대부분은 병원과 의사, 그리고 정부의 의료정책에 대한 극도의 불신과 불만을 여과없이 드러낸 것들이었다. 여기에다 2006년 예정된 의료시장 개방은 한국의료에 대한 불안감을 한층 가중시키고 있다.
  
  "한국 의료의 위기, 고령화 진행될수록 더 본격화될 것"
  
 

  문제의 심각성은 아직도 한국의료의 위기가 본격화된 것이 아니라는데 있다. 한국에서는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급속한 인구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다. 인구 고령화는 다양한 문제를 발생시키는데, 그 중 하나가 의료비 급증이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2001년 현재 33조, GDP의 6.1%를 차지하고 있는 국민의료비는 고령사회로 진입하는 2020년경에는 1백71조, GDP의 11.4%로 증가하고, 2040년경에는 7백43조, 2050년경에는 1천2백87조로 GDP의 26.5%를 차지하게 될 것으로 추정된다.
  
  노인 부양비가 높아지면서 국가 생산성이 현저히 낮아질 것으로 예상되는 미래사회가 과연 이 같은 의료비 부담을 감당할 수 있을지 매우 우려되는 상황이다. 한국의료의 위기를 진단하고 해법을 마련하는데 있어 의료비 지출을 '적정화'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병원의 위기는 '의료의 과잉'이 빚어낸 구조적 문제"
  
  한국은 의료장비의 본산이랄 수 있는 미국보다 더 많은 고가 의료장비를 보유한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이다. OECD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인구 백만명당 CT와 체외충격파쇄석기 보유대수는 30.9대(미국 : 13.1대)와 6대(미국 : 2.9대)로 미국을 크게 앞지르고 있다. 병상 수도 마찬가지다. 인구 천명당 급성병상수의 OECD 평균이 3.1병상인데 반해 한국은 5.2병상에 이른다. 게다가 매년 3천5백여명에 달하는 신규 의사가 배출되고 있다. 병원의 출혈, 과다경쟁이 불가피하다.
  
  특히, 경제적 합리성을 갖추지 못한 병원 구조는 한국의료를 정상화하는데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규모의 경제'에 미달하는 3백병상 미만의 중소병원이 전체 병원의 83.1%, 병상 기준으로는 54.1%에 달한다. 의료시설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과거에는 굳이 '규모의 경제'를 충족시키지 않아도 병원 운영에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과잉상태로 접어든 지금, 더 이상의 정상적 병원 운영은 불가능해졌다. 일부 병원은 도산했지만, 더 많은 수의 병원은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비용을 줄이고, 매출을 늘리는 생존전략을 택하고 있다. 병원인력 감축과 노동조건 악화에 따른 의료의 질 저하, 매출 증가를 위한 과잉진료와 부당청구 등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같은 '의료의 과잉'은 한국의료의 미래를 설계하는데 있어 인구 고령화와 더불어 큰 우환거리이다.
  
  "의료의 양극화, 불만의 양극화"
  
 
  한국의 의료가 위기에 처해 있다. 1997년 IMF위기 이후 진행돼 온 부의 양극화는 이렇게 의료의 양극화까지 초래하고 있다. ⓒ연합뉴스

  모든 것이 시장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사회 전반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 의료도 예외가 아니다. 매년 적지 않은 수의 부유층 환자가 질병 치료를 위해 미국병원을 찾고 있는데, 여기에 드는 비용이 수천만원에서 많게는 수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돈이 없어서 치료를 포기하는 경우도 속출하고 있다. 일선 의사들의 말에 따르면, 예전 같았으면 벌써 병의원을 찾았을 환자들이 2천~3천원 하는 진료비 부담 때문에 병의원 찾기를 꺼린다고 한다. 가족 중에서 중한 환자가 생기면, 집 팔고 전세금 빼는 경우도 여전히 비일비재하다.
  
  우려되는 점은 의료이용의 양극화가 건강의 양극화로 이어질 가능성이다. 이미 그런 조짐은 여러 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울산의대 강영호 교수가 최근 분석한 바에 따르면, 학력과 경제력이 낮은 계층이 중류 이상의 계층보다 사망위험이 1.5~2배 가량 높은 것으로 나타나 건강의 양극화가 고착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우려를 낳고 있다.
  
  상황이 이러니, 의료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도 제각각이다. 부유층은 의료서비스 수준을 탓한다. 한마디로 기대수준에 못 미친다는 것이다. 돈을 더 내도 좋으니 질 높은 의료서비스를 제공해 달라는 요구다. 이에 반해, 상당수의 국민은 의료비가 비싸다고 호소하고 있다.
  
  문제의 심각성과 크기로 볼 때, 응당 후자의 불만 해소에 정책적 우선순위가 주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정부정책 방향과 언론을 통해 형성된 사회적 의제는 이와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다. 오히려 '다양화되고 고급화된 의료수요를 어떻게 충족시킬 것인가?'에 더 많은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고급의료에 대한 '선호'를 보장하기 위해 대다수 국민의 필수의료에 대한 '권리'를 배제하거나 축소하려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의료와 건강의 양극화는 이해당사자간의 갈등을 유발할 뿐 아니라 갈등구조를 고착시킨다는 점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위기의 한 측면이다.
  
  "의료시장 개방, 병원업계의 공갈ㆍ협박"
  
  많은 이들은 의료시장이 개방되는 2006년이면, 파란 눈의 외국인 의사가 한국으로 물밀 듯이 몰려 올 것처럼 이야기한다. 하루빨리 한국의료를 옭아매고 있는 각종 규제를 철폐해서 자유경쟁체계를 갖추지 않으면, 이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들이 주장하는 2006년의 상황은 그야말로 상상에 그칠 공산이 크다. 현재 WTO DDA 서비스 개방협상이 진행 중인데, 자국의 의료인력을 선진국으로 수출하려는 일부 개발도상국을 제외한 대다수 국가가 의료시장 개방에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대다수 선진국들은 '의료의 공공성'을 근거로 서비스 협상 대상에서 의료를 제외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런 정황을 모를 리 없는 이들이 한사코 의료시장 개방을 들먹이는 데에는 숨겨진 의도가 있다. 병원업계는 이 사안을 정부에 규제 완화를 요구할 수 있는 호재로 인식하고 있다. 영리법인 허용, 민간의료보험 확대, 의료기관의 건강보험 탈퇴 허용 등을 요구할 때마다 '의료시장 개방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는 논리가 등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여기에는 정부의 이해관계도 일치한다. 시장 원리에 맡기는 의료영역을 확대함으로써 정부의 부담을 덜 수 있기 때문이다.
  
  의료시장 개방이라는 외부의 위기요인은 사실상 한국의료 내부의 문제이다. 실체도 없는 외부의 위기를 들먹이면서 편법적으로 최소한의 규제조차 없애겠다는 것은 한국의료의 위기를 더욱 가중시킬 뿐이다. 집 대들보가 썩어 무너져 가는데, 오지도 않을 손님 맞겠다고 대문에 페인트칠하는 꼴은 면해야 할 것이다.
  
  "미국이 과연 우리의 대안인가"
  
 


  한국의료는 보편적 국제규범에서 한참 동떨어져 있다. OECD 국가를 비교해 보면, 한국은 멕시코, 미국과 함께 시쳇말로 '독도'다.
  
  이런 경향은 각국 국민의 건강수준과 의료제도에 대한 만족도 조사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독도' 국가의 건강수준과 만족도가 다른 국가보다 뒤쳐지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국민의료비에서 공공재원이 차지하는 비중이 클수록 적은 재원으로 더 나은 의료성과를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 국제 연구의 공통된 결론이다.
  
  현재 한국의료의 진행방향은 미국의 위치로 수평이동하는 것인데, 이것이 과연 한국의료의 바람직한 귀착점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많은 선진국이 우리보다 앞서 인구 고령화와 의료의 과잉을 경험하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 현재의 의료제도를 갖추게 된 것이라면, 대다수 OECD 국가가 위치한 방향이 보다 나은 대안이 아닐는지?
  
  "한국의료, 어디로 갈 것인가"
  
  거시경제지표가 아무리 좋아도 민생이 계속 피폐해져 간다면, 그 경제를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의료서비스 수준이 아무리 높아도 의료제도의 재정적 지속가능성을 보장할 수 없거나 상당수의 국민이 자신의 질병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다면, 바람직한 의료라고 할 수 없다.
  
  정부는 의료부문에 자본참여를 활성화시켜 의료를 산업으로 발전시키겠다는 일관된 정책기조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정책은 그렇지 않아도 과잉상태에 있는 한국의료를 폭발직전의 상황으로 내몰게 될 가능성이 크다.
  
  정확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정확한 원인 진단이 필요하다. 한국의료에 부족한 것은 '활성화'가 아니라 '적정화'다. 실체 없는 외부의 위기를 근거로 한국의료의 진짜 위기를 간과하는 경향도 경계해야 한다. 과잉투자를 조장하고, 의료의 영리화를 부추기는 정책은 국민의료비 급증에 대한 사회적 대응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린다. 곧 본격화될 한국의료의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화려한 '외양'이 아니라 '내실'을 단단하게 다지는 것이 중요하다.

 

이진석/충북의대 교수, 의료관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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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Optimism of Uncertainty


.........  by Howard Zinn  November 06, 2004   
  
In this awful world where the efforts of caring people often pale in comparison to what is done by those who have power, how do I manage to stay involved and seemingly happy?

 

I am totally confident not that the world will get better, but that we should not give up the game before all the cards have been played. The metaphor is deliberate; life is a gamble. Not to play is to foreclose any chance of winning. To play, to act, is to create at least a possibility of changing the world.

 

There is a tendency to think that what we see in the present moment will continue. We forget how often we have been astonished by the sudden crumbling of institutions, by extraordinary changes in people's thoughts, by unexpected eruptions of rebellion against tyrannies, by the quick collapse of systems of power that seemed invincible.

 

What leaps out from the history of the past hundred years is its utter unpredictability. A revolution to overthrow the czar of Russia, in that most sluggish of semi-feudal empires, not only startled the most advanced imperial powers but took Lenin himself by surprise and sent him rushing by train to Petrograd. Who would have predicted the bizarre shifts of World War II--the Nazi-Soviet pact (those embarrassing photos of von Ribbentrop and Molotov shaking hands), and the German Army rolling through Russia, apparently invincible, causing colossal casualties, being turned back at the gates of Leningrad, on the western edge of Moscow, in the streets of Stalingrad, followed by the defeat of the German army, with Hitler huddled in his Berlin bunker, waiting to die?



And then the postwar world, taking a shape no one could have drawn in advance: The Chinese Communist revolution, the tumultuous and violent Cultural Revolution, and then another turnabout, with post-Mao China renouncing its most fervently held ideas and institutions, making overtures to the West, cuddling up to capitalist enterprise, perplexing everyone.

 

No one foresaw the disintegration of the old Western empires happening so quickly after the war, or the odd array of societies that would be created in the newly independent nations, from the benign village socialism of Nyerere's Tanzania to the madness of Idi Amin's adjacent Uganda. Spain became an astonishment. I recall a veteran of the Abraham Lincoln Brigade telling me that he could not imagine Spanish Fascism being overthrown without another bloody war. But after Franco was gone, a parliamentary democracy came into being, open to Socialists, Communists, anarchists, everyone.

 

The end of World War II left two superpowers with their respective spheres of influence and control, vying for military and political power. Yet they were unable to control events, even in those parts of the world considered to be their respective spheres of influence. The failure of the Soviet Union to have its way in Afghanistan, its decision to withdraw after almost a decade of ugly intervention, was the most striking evidence that even the possession of thermonuclear weapons does not guarantee domination over a determined population. The United States has faced the same reality. It waged a full-scale war in lndochina, conducting the most brutal bombardment of a tiny peninsula in world history, and yet was forced to withdraw. In the headlines every day we see other instances of the failure of the presumably powerful over the presumably powerless, as in Brazil, where a grassroots movement of workers and the poor elected a new president pledged to fight destructive corporate power.

 

Looking at this catalogue of huge surprises, it's clear that the struggle for justice should never be abandoned because of the apparent overwhelming power of those who have the guns and the money and who seem invincible in their determination to hold on to it. That apparent power has, again and again, proved vulnerable to human qualities less measurable than bombs and dollars: moral fervor, determination, unity, organization, sacrifice, wit, ingenuity, courage, patience--whether by blacks in Alabama and South Africa, peasants in El Salvador, Nicaragua and Vietnam, or workers and intellectuals in Poland, Hungary and the Soviet Union itself. No cold calculation of the balance of power need deter people who are persuaded that their cause is just.

 

I have tried hard to match my friends in their pessimism about the world (is it just my friends?), but I keep encountering people who, in spite of all the evidence of terrible things happening everywhere, give me hope. Especially young people, in whom the future rests. Wherever I go, I find such people. And beyond the handful of activists there seem to be hundreds, thousands, more who are open to unorthodox ideas. But they tend not to know of one another's existence, and so, while they persist, they do so with the desperate patience of Sisyphus endlessly pushing that boulder up the mountain. I try to tell each group that it is not alone, and that the very people who are disheartened by the absence of a national movement are themselves proof of the potential for such a movement.

 

Revolutionary change does not come as one cataclysmic moment (beware of such moments!) but as an endless succession of surprises, moving zigzag toward a more decent society. We don't have to engage in grand, heroic actions to participate in the process of change. Small acts, when multiplied by millions of people, can transform the world. Even when we don't "win," there is fun and fulfillment in the fact that we have been involved, with other good people, in something worthwhile. We need hope.

 

An optimist isn't necessarily a blithe, slightly sappy whistler in the dark of our time. To be hopeful in bad times is not just foolishly romantic. It is based on the fact that human history is a history not only of cruelty but also of compassion, sacrifice, courage, kindness. What we choose to emphasize in this complex history will determine our lives. If we see only the worst, it destroys our capacity to do something. If we remember those times and places--and there are so many--where people have behaved magnificently, this gives us the energy to act, and at least the possibility of sending this spinning top of a world in a different direction. And if we do act, in however small a way, we don't have to wait for some grand utopian future. The future is an infinite succession of presents, and to live now as we think human beings should live, in defiance of all that is bad around us, is itself a marvelous vic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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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한겨레 비빔툰 &quot;선배형&quot; (2004.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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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한국민주주의의 취약한 사회경제적 기반

한국 민주주의의 취약한 사회경제적 기반

최장집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장


I. 대기업-정규직 중심의 사회경제관

오늘의 한국현실에서 대다수 일반 시민이 직면하고 있는 경제생활의 질적 저하와 그것이 가져오는 사회적, 인간적 피폐화만큼 큰 문제는 없다. 고실업, 고용불안정, 노동시장의 내부분화에 의한 이른바 대규모 비정규직 노동자의 누적, 소득분배구조의 악화, 가계파산에 의한 신용불량자의 양산, 빈곤층의 확대 등 오늘날 한국의 노동시장 상황을 나타내는 양상들은 IMF개혁패키지를 통해 급격하게 전개된 한국경제의 구조변화를 특징짓는 중심 내용들이다. 이러한 경제적 변화가 초래하는 사회해체 효과는 더 파괴적인 것처럼 보인다. 끔찍한 살인 및 강력범죄의 급증, 가족동반자살이라는 비극적 형태를 포함하는 자살률의 급증, 세계 최고수준의 이혼율과 거꾸로 세계 최저수준의 출산율 등의 지표들은 사회해체의 급격함과 그 심각함의 일단을 드러낸다.

빠른 근대화에도 불구하고 일정하게 온존되고 있었던 전통사회적 구조와 인간관계의 공동체적 연계들, 사회안정에 기여했던 잘 발달된 중산층이 중심이 된 계층구조, 높은 경제성장의 지속 등은 그 동안 한국사회의 안정화와 공동체성의 유지를 가능케 했던 요소들이었다. IMF위기의 충격효과와 더불어 이러한 구조들이 해체되면서, 급속히 팽창한 사회저변층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계층구조로 빠르게 전환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러한 사회변화에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의 문제는 그만두고라도 변화의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조차 힘겨워하고 있다. 과연 이러한 사회적 격변이 우리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종국적으로 어떤 한국사회로 귀결시킬지, 그것이 민주주의와 어떤 관계를 갖게 될 것인지, 과연 이런 사회경제적 토대 위에서 한국 민주주의는 대체 어떤 내용을 갖게 될 것인지에 대해 우리가 갖는 지식의 한계는 크다.

오늘의 노동문제가 커다란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면, 그것은 노동운동의 한계 즉 노동운동이 서 있는 기반의 협애함이라는 문제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의 신자유주의적 경제환경과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조건에서도 한국경제의 생산체제는 과거 권위주의하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중심축이 재벌중심의 대기업생산체제라는 점에서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그리고 재벌기업과 그 하청업체의 위계구조하에 중소기업이 위치해 있다는 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현재 고용문제에 있어서나 노동운동에 있어서나 그 중심적 이슈가 비정규직 문제라는 것은 두루 알고 있는 사실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에 비해 현격하게 낮은 임금, 높은 고용불안정, 낮은 조직률, 기업복지 및 노동보호입법으로부터의 배제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현실에서, 정규-비정규직 차이는 단순한 차이를 넘는 의미를 갖는다. 공공부문의 노동자도 수혜의 정도에 있어 대기업의 정규직 노동자들과 같은 범주에 위치지울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노동운동과 그 전투성은 그들이 민간부문이든 공공부문이든 대규모 기업의 정규직 노동자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운동적 표현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노동운동이 서있는 기반의 협애함은 결과적으로 기존의 재벌중심의 경제체제와 노동시장의 양극화를 제어하는 영향력을 조직하는 데 큰 한계를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노동문제가 전체 생산체제와 사회적 역할에 있어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거대기업 및 조직에서의 노동문제에 국한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로의 한국경제의 급속한 재편은 기존의 사회계층구조를 새로운 형태로 양극분해하고 있고, 국가정책에 의해 지원되었던 ‘지식기반산업화’ 역시 이러한 경향을 확대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기존의 안정적 대기업군, 자산소득자, 경영 및 지식산업 분야의 전문가들이 새로운 사회구조의 상층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동안, 중소기업과 영세산업, 서비스산업 등 주변적 산업부문에 광범하게 존재하는 노동자집단은 분명 보다 절실한 노동문제를 안게 되었다. 이들 주변적 노동자들 가운데서도 여성이나 파견직 노동자, 중소 영세산업의 저학력 고령노동자, “계급 이하의 계급”으로 범주화되는 외국인노동자들의 임금, 고용 및 노동조건은 실로 열악하기 그지없다. 여기에 “노동시장 밖으로 밀려나는 사람들”, 즉 실업자와 취약계층, 그리고 신빈곤층으로 분류된 신용불량자들의 경우는 주변적 노동자집단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노동시장으로부터의 퇴출과 진입이 유연하고, 열려있는 미국이나 서구에서의 노동시장과는 달리, 시장으로부터 밀려난 사람들에 대해 극히 폐쇄적인 한국의 노동시장구조에서, 그리고 열패자들에게 가혹한 한국사회의 풍토에서 이들은 실로 소외와 궁핍, 사회적 차별과 천시를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경제의 생산체제가 어떤 구조와 내용으로 변하든, 예나 지금이나 재벌중심 생산체제의 중심적 역할은 거의 절대적이다. 한 나라의 경제성장, 한 정권의 경제적 업적이 실제로 이 재벌기업의 투자와 업적에 의존하게 될 때, 정부의 성장정책은 곧 이들 기업의 투자인센티브와 투자효율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나타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경제체제 전환의 직접적 결과로 재편된 현재와 같은 노동시장구조에서, 이러한 정책이 갖는 한계는 수출이 호조를 띠고 기업이윤이 증가되고 경제 전체의 성장률이 상승한다하더라도 고용의 증대와 아울러 이들 주변적 노동자집단의 권익증대, 노동조건의 향상을 결과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현재 미국경제가 직면하고 있는 고용문제도 이와 유사하다. 그리고 바로 경제의 호전이 기대하는 것만큼의 고용효과를 가져오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다가오는 미국 대통령선거 결과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이슈로 등장하고 있다. 아마 저조한 고용증대는 테크놀로지 향상에 따른 노동력의 대체효과일 수도 있고, 국제경쟁력 약화로 인해 미국국내의 고용수요가 해외로 빠져나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사실은, 콜럼비아대학의 글라시엘라 치칠니스키(G. Chichilnisky) 교수가 강조하듯이, 튼튼한 중소기업의 발전이 고용에 있어 중심적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Financial Times 04/05/14). 중소기업의 고용효과에 관한 한 한국경제도 미국경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중소기업의 발전이 중요한 이유는 거시적으로 볼 때 재벌기업보다 더 큰 고용을 포괄한다는 것과, 광범한 주변적 노동자군이 이 허약한 중소기업부문에 산재해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요컨대 오늘의 한국경제 문제는 재벌기업의 노사가 민주적 틀 내에서 어떠한 공존협력관계를 설정하느냐, 어떻게 중소기업 발전이 가능한 생산체제를 만드느냐, 어떻게 재벌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다이나믹한 관계가 형성될 수 있는 시장구조를 창출하느냐 하는 문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광범한 중소기업부문이 재활성화되지 않는 한 주변적 노동자집단의 ‘2등 노동자화’의 경향은 억제될 수 없으며, 궁극적으로 한국 노동운동의 보편적 기반은 더욱 약화될 수밖에 없다.

II. 대안적 사회경제정책 없는 민주주의의 취약성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다뤄져야 할 실제 문제(real issue)는 절대다수의 노동인구가 직면한 사회경제적 삶의 조건이 매우 크게 위협받고 있는 현실이며, 이 문제에 대한 적절한 정책대안을 발전시키지 못한다면 한국 민주주의는 적어도 그 내용에 있어 공허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일반 시민들의 사회경제적 삶을 개선하는 데 기여할 수 없다면, 사회적 불만이 확대되는 것만큼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의 기반도 약해질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오늘의 한국경제의 위기와 그로 인한 사회적 효과들을 이해하는 방식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우리는 그것이 IMF위기라는 외부로부터의 경제적 충격에 의한 결과일 뿐 아니라 이에 대응했던 민주정부들에 의한 주체적인 정책적 대응이 빚어낸 복합적 산물이라고 이해한다. 만약 민주주의가 평등한 정치참여의 권리를 통해 실현되고, 시행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밖으로부터 주어진 위기에 대응하는 능력은 한국사회의 전체적인 역량을 가늠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IMF개혁패키지로 대변되는 외부로부터 주어진 경제개혁이 한국의 민주정부를 매개로 어떻게 관철되었는가 하는 질문을 통해 접근할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민주화 이후 한국의 민주정부들이 어떻게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면했는가 하는 문제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IMF충격의 효과와 신자유주의적 경제의 전면적 확대가 엄청난 사회경제적 결과를 가져왔다면, 그 책임은 일차적으로 민주정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의 중대한 사회경제적 문제가 정부정책의 의제로 진전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것이 정치적 이슈 내지는 정치적 사안이 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것이 우리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적?사회적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의 방법으로 정치의 장에서 다루어지지 않는다면, 그럼으로써 그 문제에 대응하는 정책적 내용과 이를 실천할 정책적 수단을 마련하도록 하는 제도적 힘으로 작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제적 변화를 가져오는 실제 이슈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찍이 미국의 정치학자 바크라크와 바라츠(Bachrach & Baratz)는 다원주의적 권력 개념을 비판하면서 ‘비결정’(non-decision)이라는 개념으로 이 문제를 설명했다. 그들은 먼저 ‘결정’이라는 개념을 통해 다원주의적 권력개념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출발한다. 사회에서 발생하는 모든 갈등이나 이익들이 표출되고, 조직되고, 대표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할 때 모든 사회경제적 갈등이나 이익들은, 만약 그것이 중요하다고 한다면, 정치경쟁의 장에서 이익집단이나 정당을 매개로 표출되고 선거를 통해 대표되고 종국에는 정책으로 만들어지게 마련이다. 그 경우 실제의 정책은 이러한 이슈를 둘러싸고 이해당사자들이 경쟁하고 타협한 결과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이때 이러한 정치과정을 우리는 정치세력과 갈등들의 다원적 경쟁 내지는 다원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정책의 결정이 곧 사회적 갈등과 힘 관계의 정직한 반영이라고 한다면, 정책결정 수준에서의 정치적 다이나믹스와 정책의 산출은 사회갈등의 축약이며 정치의 모든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듯 사회경제적 현실과 정치 간의 매개가 순기능적으로 작동된다면, 중요한 사회경제적 문제들은 용이하게 정치적으로 해소될 수 있고, 이를 통해 사회갈등이 순조롭게 해소되고, 사회통합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낙관적 사회발전의 전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다원주의적 정치관에 도전하는 비결정의 개념은 우리가 가시적으로 관찰하고,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정책과 그 결정은 전체 정치과정과 권력관계의 다만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그보다 더 중대한 사회경제적 갈등이나 이익들을 마땅히 이슈화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이유는 이슈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이슈화하지 않는 또는 못하게 하는, 다시 말해 정책결정의 사안으로 등장하지 못하게 하는 힘 또는 영향력의 산물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즉 이 관점은 이 비결정의 영역/수준이야말로 보다 더 중요한 정치과정이요, 권력관계라는 사실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민주주의에 있어 논의되는 이슈/사안의 범위와 성격이 얼마나 중요하고, 사회의 중요 문제에 대한 시민개개인들의 계몽된 인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두루 알다시피 정치참여는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이슈의 범위와 계몽적 인식이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일상적으로 지나쳐 버린다. 한국사회를 근본에서부터 변화시키는 사회경제적 문제가 중요한 정치적 사안의 범위 내로 들어오지 못하거나, 유권자 개개인이 사회의 중요한 이슈에 대해 올바른 이해에 근거한 판단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 참여가 아무리 확대된다 하더라도 민주주의 발전을 도모하기 어려우며, 역으로 한 사회의 중대문제는 민주주의를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민주정부의 무능력으로 직결될 수밖에 없다. 정치적 무관심, 냉소주의, 투표율의 하락현상이 보여주는 정치참여의 저조함은, 사회의 중대이슈를 의제의 범위 밖으로 밀어내고 덜 중요하고 나아가서는 하찮은 문제를 둘러싼 갈등으로 정치가 왜소화되고 타락하고 있는 오늘의 한국정치의 현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정치권에서의 정치적 대립이 아무리 격렬하고, 정치에 대한 관심이 아무리 높고, 시민들의 시민운동에의 참여가 아무리 열성적이라 하더라도 사회경제적 중대문제가 정치사안으로부터 배제되고, 쟁점으로 떠오르지 못할 때 민주주의를 통한 집단적 결정의 내용은 민주적 가치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이다. 뭐든 참여의 확대가 다 좋은 것은 아니다. 계몽적 이해로 뒷받침된 중대사안이 이슈의 범위 내로 들어오지 못할 때, 새로운 영역으로의 정치참여는 다른 분야에서의 참여를 오히려 떨어뜨린다는 ‘참여적 다원주의의 역설’이 나타나기 쉽다(Dryzek 1996, 7). 바꾸어 말하면 정당간의 경쟁이든, 시민사회의 운동이든 잘못된 이슈, 중요하지 않은 이슈에 열정을 쏟는다면 정작 중요한 이슈에 대한 참여를 제약하는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민주화 이후 민주정부들은 사회의 중대사안을 정치영역에서의 중대사안과 병행시키는 일을 통해 민주정부의 효능을 창출할 수 있었는가? 그럼으로써 체제로서의 민주정부를 강화하고 사회경제적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능력을 보여줄 수 있었는가? 이 문제들은 우리 모두의 커다란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그 동안 민주정부들의 경험을 통해, 여야당간의 갈등이 첨예하였던 정치적 이슈영역은 대체로 네 가지로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정당간의 정치경쟁의 규칙을 어떻게 제도화하는가 하는 정치의 제도개혁을 둘러싼 이슈이다. 집권정당은 어떻게 권력을 안정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야당은 어떻게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하고 다음 선거에서 유리한 지위를 점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를 둘러싼 갈등과 쟁투로 정치는 요란했다. 둘째는 역사, 이념 및 가치, 정서적 문제를 둘러싼 이슈영역이다. “역사 바로세우기”, “지역감정 극복”, “과거사 진상규명”, “용공 전력조사” 등은 모두 민족주의, 반공주의, 또는 민주주의의 가치, 또는 지역정서의 동원이 중심이 되는 이데올로기적, 감정적, 상징적 이슈영역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이데올로기나 집단적 열정을 쉽게 동원하게되어 정치를 극한적 갈등으로 치닫게 하는 경향이 있다. 셋째는 현 노무현 정부에 들어와 새로운 중요이슈가 된 행정수도 이전 및 이른바 “지역혁신체제”의 추진과 같은 지역개발정책 분야이다. 그러나 정책추진자들이 중앙집권화의 폐해와 분권과 혁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동안, 그것이 과연 주장하는 대로의 바람직한 효과를 낳게 될지, 정말 모든 지역이 자립적 발전모델을 갖는 사회가 될 것인지에 대한 우리사회의 확신은 더욱 약해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넷째는 사회경제적, 정치경제적 이슈영역이다. 이 문제는 그간 정치적 이슈로서는 크게 부각되지 못했지만 분명 현실적 삶의 세계에서 중심 문제로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이슈영역의 우선순위가 있다면, 네 번째 사회경제적 이슈가 최우선 순위에 자리잡아야 할 것이다. 또한 현실적으로도 최소한 서구민주주의에서의 상황은 그러하다. 그러나 한국의 상황은 이와는 정반대인 것으로 보인다. 현실생활에 기초를 둔 사회경제적 문제가 제일의 우선순위를 갖는 정치사안이 되는 것은 그만두고라도 중요 의제로 부각되지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정치의 제도개혁, 이념대립과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감정적 상징적 이슈 또는 삶의 현실적 문제와는 거리가 먼 지역개발주의적 사안들이 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자리잡았다.

물론 기존의 지배적 담론을 당연시하면서 정치에 있어서도 경제문제가 최대 이슈라고(또는 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문제인식에 즉각적으로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그들은 한국사회의 사회경제적 이슈를 곧 경제성장의 문제와 동일시한다. 고용확대, 노사관계, 경제적 불평등의 완화, 복지의 증대, 빈곤문제 등을 포함하는 모든 사회경제적 문제들은 성장이 창출하는 넘쳐흐르는 효과(trickle-down effect)에 의해 해결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이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빨리 성장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집약된다. 그러므로 정부의 가장 중심적 정책은, 나아가 정치의 핵심적 역할은 모두 성장을 촉진하는 것이어야 하고, 이러한 관점에서 시장의 작동과 자본의 흐름을 방해하는 모든 정책이나, 행위는 부정시된다. 이러한 일면적 경제성장관이나 독트린은 과거 권위주의적 산업화를 통해 신화가 되었고, IMF위기를 거치면서 신자유주의적 논리 기반을 통해 더욱 강화되어 사실상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여기에서 대안적 경제성장관이나, 재벌중심 생산체제의 거버넌스 문제와 같은 정치경제적 문제 혹은 빈곤과 불평등의 심화가 가져온 여러 사회정책적 문제들이 중대이슈로 자리잡을 여지는 별로 없다.

권위주의적 관치경제 시기로부터 민주화 이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시대의 현재에 이르기까지 경제영역에서만큼 정책의 연속성이 유지되는 분야는 없을 것이다. 그간 경제정책에 대한 민주정부들의 개혁레토릭이 어떠했든, 혹은 정부 내 이른바 개혁파들에 의해 간헐적으로 언표화되는 주장들이 얼마나 개혁적이든, 반대로 민주정부의 경제관이 급진적 또는 반시장적이라는 주류언론들의 우려가 어떠했든 민주정부에서조차 실제의 경제정책은 민주화 이전과 그 차이를 실감하기 어렵다. 가장 변하기 어려울 것 같아 보였던 냉전반공주의의 구조조차 민주화 이후, 특히 “햇볕정책” 이후 크게 변화했고 또 변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하다. 확실히 경제영역에 관한 한 일면적 경제성장의 독트린은 어떠한 대안적 도전도 허용하지 않고 있다. 경제문제, 또는 경제정책 사안을 둘러싼 이슈들이 국회에서의 정당간 논쟁에서, 신문의 지면에서 언제나 가장 빈번하게 가장 중요하게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그것은 언제나 성장의 방법론을 둘러싼 문제였다. 말하자면 그것은 ‘결정’의 수준에서, 거의 의식화(儀式化) 되어버린, 그리하여 사태를 변화시키는 데는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하고 그저 습관적으로 되풀이되는 익숙한 주제에 불과할 뿐이다. 사회경제적 이슈들은 ‘비결정’의 영역에 머물고 있으며 정치화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기득이익이 가장 강력한 헤게모니를 갖고 있는 영역은 냉전반공주의도 아니고, 친일파청산 문제와 같은 역사적 가치의 문제도 아닌, 경제와 관련된 이슈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성운동의 이론가 시리아니(C. Sirianni)는 여성운동의 범위를 비약적으로 확대한 “사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새로운 정의를 제시했다. 이 새로운 정의는 그 동안의 전통적인 사회관계에서는 전혀 이슈가 될 수 없었던 부부관계를 포함하는 가부장적 가정 내의 관계나 가사노동과 같은 사적관계의 영역으로까지 여성운동을 확대할 수 있는 이론화에 기여했다. 같은 논리로 “경제는 정치적인 것이다”, 또는 “시장은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정의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경제나 시장이 성장을 추동하고, 경쟁과 같은 자연스런 본성적 인간행위가 필연적으로 효율성을 창출한다는 신화가 아닌, 성장이든 시장효율성이든 그것은 사회의 힘의 관계와 가치가 반영된 정치적 결정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이를 통해 경제성장이 사회경제적 이슈영역을 포괄할 때 비로소 지속가능한 경제를 향한 전망을 발전시킬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회통합의 효과를 가짐으로써 정치안정화에 기여하며, 일의 윤리, 일에 대한 헌신을 높이고, 갈등적 노사관계를 보다 민주적이며 협력적인 것으로 전환시키며, 사회적 정치적 안정을 통해 기업의 투자의욕을 높일 뿐만 아니라, 수요의 증대를 통해 성장에 기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민주화 이후 반복되어온 한국 정치의 한 속성이 드러난다. 정치가 현실 생활에 기초를 둔 사회경제적 이슈영역을 중심적으로 대면하고, 그 영역에서의 갈등을 해소해 가는 과정에서 정치의 제도개혁 이슈나 역사적 정서적 이슈를 흡수통합해 가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후자의 문제를 다루는 데에 몰두하면서 전자를 방치하는 특징을 보인다는 것이다. 후자의 비정치경제적 이슈들이 과도하게 정치화되고 결과적으로 정치는 이데올로기적 쟁투의 장이 되는 동안, 전자의 사회경제적 이슈들은 탈정치화된다. 선거를 통해 사회로부터의 요구를 위임(mandate)받은 것과는 무관하게 정부가 된 민주파의 경제정책은 권위주의적 성장정책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경제정책은 그 어느 정당이 집권하든 유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과거 권위주의적 관치경제를 주도하고 운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경제정책은 관료의 수중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외형적으로만 보면 그간 여야 정당은 상호 공존이 가능할 수 없을 정도의 적대적 담론과 감정으로 충돌해왔다. 정치인들과 정당들의 이합집산이 짧은 사이클로 순환하면서 파노라마처럼 명멸하였고, 국회의원 교체율이 세계 최고임을 자랑할 만큼 매 선거마다 대규모 퇴출이 계속되었다. 여러 수준과 여러 정책영역에서 수많은 전문가집단의 참여가 확대되었고 뭔가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듯한 인상과 분위기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경제정책 영역에 관한 한 변한 것은 없다. 어찌보면 여야간 정치적 갈등의 격렬함은 실제로 가장 중요한 사회경제적 이슈가 배면에서 ‘비결정’의 영역에 머물러 있음으로 인해 실제 이슈에 있어서는 극히 좁은 갈등의 범위에 한정되어 다퉈야 하는 협애한 정치적 대표체제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누가 사회경제적 이슈를 전면으로 끌어낼 것인가? 그것은 누구보다도 먼저 투표자 다수의 지지를 통해 선출된 민주정부가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민주정부가 일차적인 책임을 진다는 것은 말처럼 간단치 않다. 사회경제적 이슈는 갈등의 정도와 폭이 가장 큰 영역이기 때문에 사회경제적 이슈를 전면으로 끌어내는 데는 부와 권력에 있어 강력한 사회적 힘을 갖는 기득이익들의 도전이 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많은 정치적, 사회적 힘들이 투입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따라서 정당의 역할은 이 영역에 있어서 결정적이다. 정당은 사회의 사회경제적 문제들이 선출된 민주정부로 투입되는 통로이고, 정부의 정책결정이 사회로 전달되는 정치의 조직망이다. 그러나 한국의 현실에서 좁고 얕은 사회적 기반을 갖고, 협애한 이념적 스케일로 정당간 차별성이 적고, 특정 분야의 전문가집단이 과다대표되고 있으며, 제도화의 수준도 낮고 정체성도 약한 정당들이 정책적 대안을 유능하게 조직할 수 있는 수준으로 발전하는 문제는 아직도 지난한 과제일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시민사회로부터의 운동의 힘들이 투입될 필요가 있다. 그 정책이슈를 지지하는 많은 사회적 힘이 투입되지 않고서는, 즉 대통령이나 최고 정책결정 수준의 결정자나 정치엘리트들의 의지라든가, 개혁마인드라든가 하는 것만으로는, 많은 변화를 수반할 수밖에 없는 사회경제적 문제들을 정치적 이슈의 전면으로 이끌어내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정책사안이 중대할수록, 이해당사자들의 갈등의 정도가 클수록 특정의 정책은 그 정책에 대한 사회적 힘의 투입 없이는 실현 불가능함을 말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대안을 조직하는 문제에 있어, 헤게모니의 영역 밖에서 사고하고 행위하는 지식인들의 역할 또한 필수적이다.

III. 현실적 대안의 중요성

그렇다면 노동과 복지문제를 포괄하는 사회경제적 문제를 대면하고 주요 정치적 사안으로 이슈화함에 있어서 어떤 대안적 처방이 가능한가라는 문제가 검토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여기에서 필자는 그것은 이러이러한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떤 해답을 갖고 있지 않다. 아마도 그것은 어떤 한 사람의 제안이기보다도 정치인, 지식인, 대의(大義)추구적 사회운동, 노동 및 민중운동 등 여러 사회집단들 사이의 심도 있는 논의를 통한 정치적, 사회적, 지적 노력이 진지하게 이루어낸 결과물이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필자가 제시할 수 있는 것은 대안의 내용 그 자체가 아니라 대안의 성격, 방향 및 범위를 설정하는 문제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하는 대안형성의 방법론에 관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이 문제가 결코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권위주의시대 이래의 경제정책이 변하지 않고 한결같이 사회경제적 문제를 배제하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한국의 현실에서 기존의 강력한 헤게모니를 갖는 경제정책 노선에 수정을 가하기 위해서는 그 대안은 매우 이성적이고 현실적으로 실현가능하고, 그럼으로써 넓은 범위의 콘센서스를 창출할 수 있고, 그리고 집행 가능한 어떤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그것이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이고, 실현가능하지 않은 어떤 것이라면 대안으로서 아무런 힘을 가질 수 없다. 그것은 진지하게 실천하고자 하는 결의라기보다는 단지 “나의 이념은 이것이다, 나는 개혁적이다”라는 것을 천명하는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것은 운동의 한 타성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비결정’이 만들어지는 데는 양 측면이 존재한다. 하나는 개혁의 외적 제약이다. 민주정부의 어떤 개혁적 의지, 비전, 정책은 헤게모니의 제약으로 인해 정치적 이슈로 전환되지 못하고 보다 강력한 외부적 힘에 의해 좌절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개혁의 내적 제약이다. 민주정부를 포함하여 개혁을 만드는 사람, 세력이 실현가능한 대안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의 한계 때문에 정치이슈화하지 못하고 개혁적 대안이 내부로부터 소멸하는 경우이다. 첫 번째 문제보다도 두 번째 문제에 주목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문제는 민주화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회적 요구들이 투입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권위주의시대의 정책이 지속되는가 하는 것을 이해하는 하나의 열쇠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정치학자 콜린 크라우치(Colin Crouch)가 민주적 시민/시민역할에 대해 두 가지 구분되는 개념, 즉 ‘긍정적/적극적’인 것과 ‘부정적/소극적’인 것의 개념 구분을 제시하는 것은 우리의 논의와 맥락을 달리하지만 시사하는 바 크다. 긍정적인 시민권 개념에서는 특정의 집단이나 조직들이 스스로의 아이덴티티를 발전시키고, 이익을 공유하면서 정부정책에 자신들의 요구를 투입할 수 있는 능력을 독자적으로 형성한다. 반면 비판과 불평을 중심으로 하는 부정적 시민행위는 집권세력을 견제하고 정치인들에게 책임을 묻고, 이들의 공적 사적 도덕성을 통해 정치인들에게도 강력한 도덕적 기준을 요구한다. 부정적 시민행위는 정치란 기본적으로 엘리트들의 일이고 시민은 관중이나 감시자의 역할에 만족하는 수동적 관점을 견지하는 경향이 있고, 따라서 이들을 감시감독하기 위해 정치계급에 대해 극히 공격적인 모습을 띤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창의적 에너지를 대변하는 것은 부정적인 것보다 긍정적인 시민권의 역할이기 때문에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는 이들 두 측면이 모두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시점에서 부정적 행위가 지배적이라는 사실은 우려할만하다는 것이다. 한국의 맥락으로 다시 돌아와 보면, 운동이 중심적 동력을 제공하는 민주정부는 당연히 긍정적 시민의 역할이 중심이 되고 그러할 때 그 에너지를 통해 많은 대안정책들을 형성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또한 민주정부 내의 개혁적 정책결정자들과 시민사회로부터의 운동과 지식인들에 의한 개혁의 비전과 정책의 입안은 개혁적이되, 무엇보다도 현실적이고 구체적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현재 한국사회에는 경제정책과 관련하여, 한편에는 권위주의적 관치경제에 그 연원을 갖는 국가-재벌연합의 견인차가 중심이 된 ‘신자유주의적으로 변용된 성장정책’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민주화운동 및 노동운동에 기반을 갖는 ‘신자유주의 반대’, ‘사회민주주의의 길’이라는 방향이 있다. 그러나 두 방향 사이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이러한 테제와 안티테제를 한국적 현실에서 실현가능할 수 있도록 취합하는 설득력을 갖는 대안적 정책비전이며, 그 틀 안에서의 구체적인 프로그램이라 할 것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양자택일의 수준에서 안티테제를 말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다. 민주세력들에게 민주정부의 수립과 아울러 그들 스스로가 그들의 희망과 기획을 실현할 기회가 부여되었을 때, 현실적 대안을 통해 현실을 변화시키고자 노력하기보다 쉽게 안티테제를 말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은 운동에 의한 민주화가 가져온 무책임한 관성적 결과물일 수 있다. 즉, ‘긍정적’ 시민의 역할이 요구되는 시점에서 여전히 ‘부정적’ 시민으로서의 역할에 안주하는 모습이라는 비판도 가능할 것이다.

오늘의 현실에서 신자유주의를 수용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선택의 문제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이 이론적 수준에서, 가치와 신념의 차원에서 그리고 운동의 차원에서 신자유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현실의 정책적 대안에 있어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싫든 좋든 이미 우리의 현실이 되었다. 따라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하는 것은 그것이 한국사회의 부문, 수준, 그리고 집단, 계층들에 있어 어떤 차별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이 문제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들인 것이다. 혹자는 영미식의 신자유주의형 경제모델에 대비되는 유럽식 복지국가모델 혹은 일본형의 조율된 자본주의형과 같은 어떤 비자유주의적 자본주의경제(non-liberal capitalism)를 더 선호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한국의 민주정부는 후자의 비자유주의적 모델을 선택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제안이 현실의 대안이 되기 위해서는 오늘의 세계화라는 조건에서 무엇보다 먼저 이론적으로 케인지언적 사회복지국가 모델을 포함한 비자유주의적 경제이론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인지 하는 문제가 먼저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나아가 그것이 현실적으로 추진된다고 가정할 때 현재와 같은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 무역자유화를 포함하는 세계화라는 국제환경적 압력과 조건, 현재와 같은 재벌중심의 경제적 생산체제의 특성, 그 정책을 위한 정치적 지지의 동원, 신자유주의적 및 성장이데올로기, 사회적 힘의 관계 등, 여러 측면과 여러 힘들이 연관되어 작동되는 조건하에서 정치적으로 취약한 민주정부가 이러한 대안적 정책을 집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를 검토해야 하고, 없다면 이를 위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 것인지의 문제들이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2만불성장시대라는 성장의 목표와 가치를 천명하였는데 그러면서 한편으로 정부 내 개혁파들은 간헐적으로 사회정의, 사회복지, 분배의 가치실현을 언명하기도 한다. 이는 다음의 둘 중의 어느 하나를 의미할 것이다. 하나는 진정한 정책적 목표, 내용과는 무관하게 분배와 복지를 요구하는 지지세력에 부응하는 슬로건 내지는 레토릭에 지나지 않는 경우이다. 다른 하나는 노동, 복지, 분배의 정의가 실현되지 않으면 2만불의 성장목표를 달성하기도 어렵고 또 달성한다 하더라도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판단하는 경우이다. 만약 후자를 진지하게 추진한다고 할 때, 그것은 마치 미국의 정치학자 아담 쉐보르스키(A. Przeworski)가 ‘전환의 계곡’이라고 말하듯, 구조개혁이 진행되는 일정한 기간동안 저성장이라는 계곡을 지나게 되는 것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현재와 같은 생산체제가 획기적인 구조전환을 해야 할 것이고, 이를 감당할 만한 정치적, 정책적 역량이 존재해야 하며, 재벌기업을 중심으로 한 투자자, 기업가집단의 동의가 요구된다고 하겠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본의 투자회피, 해외로의 자본도피, 해외투자의 확대 등으로 인해 ‘전환의 계곡’으로 들어가기 이전에 경제는 공동화되고 사회는 커다란 위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참여정부의 경제정책이 이러한 방향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은 별도의 설명을 요하지 않는다. 요컨대 정부 내 개혁파들의 노동, 복지, 분배정의에 대한 강조는 정책적 진정성으로 뒷받침되고 있지 못한 것이다.

혹자는 기업의 안정적 투자유인, 고용안정, 노동, 복지의 실현을 위해 영미식의 자유경쟁시장체제에 대한 대안으로서 독일식의 ‘이해당사자자본주의’(stakeholder capitalism)를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존과 협력의 노사관계도 발전시키지 못하는 한국의 기업문화에서, 노조의 조직이나 활동도 어려운 조건에서, 이해당사자들이 목소리를 갖고 결정에 참여하는 유럽식의 생산체제로의 비약이 가능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러한 독일식 모델은 노사의 극한적 대립이 파시즘과 2차대전을 초래했다는 파멸의 역사적 경험, 전후 반노동자적 자세로부터 친노동자적 자세로 전환한 기독교의 변신, 이 과정에서 노사화합을 가능케 한 기독교 박애정신, 이를 당의 이념으로 한 기민당의 존재와 같은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조건 등, 여러 요소들이 결합되어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누군가가 독일식 모델을 진지하게 정책대안으로 발전시키고자 한다면, 그에 대한 단순한 천명에서 끝날 것이 아니라 이를 실현할 수 있는 한국적 조건들이 무엇인가를 면밀하게 검토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하나의 정책대안을 만들기 위해 논의되어야 할 문제의 차원은 복합적이다. 먼저 무엇을 개혁할 것인가, 기존의 어떤 것이 개혁되어야 한다면 이를 대체할 대안적 처방은 무엇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조건들은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들은 그 가운데서도 필수적인 문제들일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직면한 사회경제적 문제의 구조와 성격을 밝히고, 어떤 모델이 우리의 모델을 발전시키는 데 준거가 될 수 있나 하는 문제를 검토한 후에도 따져봐야 할 문제들은 많다. 그것은 개혁의 범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의 문제라 할 수 있다. 한국의 현실은 어느 정도의 변화를 감당할 수 있나? 개혁자들은 어느 정도의 정치적 능력을 갖고 있나? 민주정부는 국가 행정기구들을 통솔하고, 새로운 개혁안을 수행할 능력을 갖고 있나?

IV. 우리는 왜 한국 민주주의에 대해 낙관적이지 못하나?

민주주의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를 구성하는 일련의 제도적, 절차적 요건들을 그 출발점으로 한다. 즉 그것은 평등한 시민권, 일인 일표의 투표권에 의한 정치참여의 권리, 공정하고 자유로운 선거의 주기적 실시와 이를 통한 정부의 선출, 정당과 자율적 결사체의 자유로운 조직과 이들간의 상호경쟁과 협력 등이다. 그러나 이렇듯 단순하게 보이는 정치체제를 실현하기 위해 엄청난 투쟁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실제로 민주주의가 작동하면서 만들어지는 다이너믹스는 제도나 절차로서 이해하는 민주주의보다 훨씬 복잡한 결과를 낳았다.

정의에 있어서 민주주의는 다중의 보통사람들의 힘이 체제의 중심에 자리잡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군부권위주의라든가, 군주정, 귀족정과 같은 다른 경쟁적인 체제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다른 체제보다 보
통사람들의 삶의 질의 개선을 포함하는 시민권의 확대와 실현이 가능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경제 또는 시장의 영역에서 약자이며 소외된 보통사람들이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방법을 통하여 시민권을 획득, 확대하고 그들의 삶의 조건을 개선할 수 있을 때 체제로서의 민주주의가 작동한다고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절차적 방법을 통한 실질적 문제의 해결 또는 개선이 그 핵심인 것이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는 절차적, 형식적 내용과 실질적 내용이 역동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체제이며 따라서 일차원적인 것이 아닌 복합적인 구조와 과정을 갖는 것이다.

평등의 원리를 핵심으로 하는 민주주의는 불평등을 창출하는 자본주의와 항상적인 긴장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들 양자간의 긴장관계와 갈등은 민주주의 자체를 제약하는 원천이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간의 갈등은 크건 작건, 민주주의는 건설적인 타협을 통하여 보통사람들의 사회경제적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한 바 컸다. 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갖는 커다란 제약에도 불구하고 광범한 문제해결의 공간을 갖는 것이고, 그것은 민주정부의 능력의 함수이기도 하다. 우리가 민주주의에 대해 이러한 가능성을 기대하지 못한다면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와 신뢰는 허약해질 수밖에 없다. 나아가 그 중심적 지지세력으로부터 괴리되기 시작하는 민주주의는 그 취약함으로 인하여 민주주의를 원하지 않는 혹은 민주주의와 갈등관계를 갖는 힘들에 의해 커다란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시민생활의 실질적 향상에 기여하도록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일이 민주정부의 책무라고 할 수 있음에도 오늘의 민주정부들이 그 책임을 다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민주화 이후 민주정부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그들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라 할 대표-책임의 연계고리로부터 상당정도 벗어나 있다는 사실이다. 중산층과 서민을 대표한다는 그들의 자임에도 불구하고 민주정부의 정책적 책임성은 그러한 방향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IMF위기 이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조건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사회구성원들의 사회경제적 조건을 악화시켜온 부정적 측면들을 포함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민주정부들은 정치사회적으로 우리사회의 위기를 불러오는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이렇다 할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이 문제를 다룰 수 있는 비전, 의지, 정책대안의 부재를 반영하듯, 오늘의 민주정부는 이렇다할 경제정책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리하여 민주정부들이 세계화의 조건하에서 보통사람들의 삶의 조건을 더 악화시키는 데 앞장선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해도, 이를 방치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결과는 사회양극화의 급속한 심화이다. 한편에서는 세계화로 재구조화된 시장경제 경쟁에서의 승자들, 거대기업들, 정치인들, 사회엘리트와 지식인 그리고 주류신문을 통하여 익숙하게 소개되는 이들의 세계가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많은 시장경쟁의 열패자 내지 탈락자들, 사회계층구조의 하층에 위치하면서 점차 생산과 소비의 중심영역으로부터 주변화, 배제되고 있는 서민들의 삶의 세계가 광범하게 존재한다. 우리사회에서 이 두 세계 사이의 격차와 분리는 그간 심화될대로 심화되었다. 우리는 그 동안 정치인들, 언론들이 ‘사회통합’을 가장 중요한 가치이자 목표인 듯이 강조하는 소리를 듣는 데 익숙해있다. 통합을 강조하는 정치적 담론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렇듯 분리되어가는, 시장에서뿐만 아니라 민주적 권리를 통하여서도 대표되고 보호되지 못하는 한국사회의 다른 영역에 대한 이해와 정책을 말하는 소리를 듣기 어렵다.

사회경제적인 문제가 정당들과 민주정부에 의해 정치적인 문제로 다투어지지 않는 한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는 한 발짝도 진전하기 어려울 것이다.


참고문헌

Bachrach, Peter and Morton S. Baratz. 1970. Power and Poverty: Theory and Practice. New York: Oxford U. P.
Chichilnisky, Graciela. 2004. “Think Small If You Want to Create More Jobs.” Financial Times(May 14).
Crouch, Colin. 2004. Post-Democracy. Cambridge: Polity Press.
Dryzek, J. S. 1996. Democracy in Capitalist Times. New York, Oxford: Oxford U. P.
Przeworski, Adam. 1991. Democracy and the Market. Cambridge, New York: Cambridge U.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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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실신한 국보법 : '김용갑 의원 졸도' 사태를 보고

실신한 국보법
  
  김용갑 의원이 국회 단상에서 제 분을 못 이기고 쓰러졌다. 대한민국을 한 몸으로 떠받치던 인간 국보법이 제 풀에 지쳐 졸도했다. 상징적이다. 50년 동안 선무당처럼 펄펄 뛰던 그 악법도 이제 기운이 다 쇠한 모양이다. 물론 아직도 백주대낮에 길거리에서 칼로 제 배를 갈라 그 놈에게 충성을 바치는 이들이 더러 있지만, 이 미련한 신체 예술로 그들이 보여준 것은 ‘국산 칼, 더럽게 안 든다’는 사실뿐이다.
  
  언뜻 보면 국보법의 폐지에 반대하는 흐름이 대세같다. 착시현상이다. 촛불도 꺼지기 전에는 마지막으로 크게 한번 낼름거리는 법. 우익 시위의 격렬함은 ‘마지막 발악’이다. 그 살벌한 제스처로 저들은 국가의 안보가 아니라 자신들의 정체성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저들의 공포는 북한의 안보위협에서 오는 게 아니다. 국보법이 폐지되면 도대체 이 사회에 자신들이 있어야 할 이유가 사라진다는 것. 저들은 그게 무서운 것이다.
  
  국민 대다수가 국보법 폐지에 반대하고 있다? 그 또한 착시현상이다. 여론은 추이를 따라 동태적으로 읽어야 한다. 국보법에 관한 여론의 추이는 목하 ‘개정불가’에서 ‘개정가능’을 거쳐 ‘폐지가능’으로 이동하는 중이다. 게다가 반대론자들의 상당수가 사안 자체에 대한 판단보다는 “경제가 급한데 웬 국보법 논란이냐”는 상황논리에 잠시 설득된 상태. 경제가 급한데 국보법 ‘폐지’에 목숨 거는 것을 이해 못하는 이들은 경제가 급한데 국보법 ‘수호’에 목숨 거는 것도 이해 못한다.
  
  50년 넘게 존속했던 법을 없애자니 시민들이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는 게 사실이다. 정치권에서 자꾸 대체입법이니, 형법보완 운운하는 것은 그 때문이리라. 최근 형사법 전문가들은 국보법의 공백은 형법으로도 얼마든지 메울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뭘 더 대체하고, 뭘 더 보완한단 말인가? 대체입법이니 형법보안이니 하는 것들은 사실 국가의 ‘안전’(安全)을 위한 법적 조치가 아니라, 유권자의 ‘안정’(安靜)을 위한 심리요법일 뿐이다.
  
  대체나 보완은 필요 없다. 형법으로 처벌하지 못하는 것을 처벌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인권유린이다. 고작 “불안감” 따위를 해소하기 위해 시민의 권리를 법적으로 제한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불안감을 해소하는 길은 따로 있다. 국보법을 확실하게 폐지하는 것이다. 그러잖아도 이미 사문화되어가는 법, 폐지해도 별 일 없다는 보여주는 것만큼 확실하게 “불안감”을 해소하는 길이 또 있을까?
  
  여당 내의 기회주의 분파는 제 이름대로 개혁을 “안개” 속으로 밀어 넣으려 하고 있다. 어영부영 타협하거나 질질 끄는 것은 전술적으로도 현명하지 못하다. 빈틈을 주면 안 된다. 선명하고 명확한 입장을 정해 신속하고 확실하게 처리해야 한다. 보수층이 국보법에 집착하는 것은 사실 상징성 때문이다. 국보법의 폐지가 기정사실이 되면, 깃발을 잃은 저들의 반항은 순식간에 무력화할 것이다. 국보법은 죽었다. 남은 것은 진단서를 떼고 송장을 치우는 일뿐이다.
  
  자신감을 가져도 된다. 표면에 이는 보수의 거센 파도에 불구하고 바다 속의 조류는 빠르게 바뀌고 있다. 지금 개혁정권은 지지율이 바닥을 헤매고 있다. 그런데도 차기정부의 성격을 묻는 설문에 시민의 56.9%가 “진보개혁 성향의 정부”라 응답했고, 오직 35.7%만이 “보수안정 성향의 정부”라고 대답했다. 현 정권의 보수화에 실망해 떨어져나간 지지층이 정권과 거리를 두면서도 여전히 “진보개혁”을 원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럼 뭘 해야 할지 분명하지 않은가?
  
  대체입법이나 형법보완 따위에서 국보법의 대안을 찾는 것은 정치적 상상력의 빈곤이다. 누군가 국보법 폐지의 ‘대안’을 요구하거든, 가령 취약한 정보전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조치 등, 안보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방안을 찾아 제시할 일이다. 안보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을 못 받아들이겠는가. 야당 역시 제발 시민의 권리를 제한하겠다는 부정적 발상에서 벗어나 이제는 뭔가 긍정적인 대안을 제시할 줄 알아야 한다.

 

- 2004.9.25 진중권 (정치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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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자 나이 (민지네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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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 웃겨요...(민지네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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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환 : 국가보안법을 폐지해야하는 10가지 이유(진보누리)

기득권 세력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소수의 소유자들이 전횡을 하고 대다수 사회적 약자들을 견디기 어려운 고통으로 몰아넣는 천민적인 사유재산 절대주의 사회였다. 그것은 지극히 비정상적인 사회였다. 국가보안법은 이 비정상적 체제를 지키는 수단이었을 뿐이다.      
 
          
   국가보안법 폐지 논리의 확대 필요성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보안법 폐지의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천명했다. 전후 세대의 지지를 받는 전후 세대 대통령으로서 당연한 자세이다. 그동안 국가보안법이 정권안보를 위해 반정부  인사들의 인권을 억압해왔으며, 이제는 우리 사회의 정상적인 발전을 위해서 족쇄가 되고 있음을 인식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나라당과 보수 언론, 전쟁을 경험한 보수적 주류 인사들은 국가보안법을 존속시켜야 한다고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있다. 민주진보세력은 국가보안법 폐지의 필요성을 다수 국민들을 상대로 설득력 있게 제시함으로써 국가보안법 존속 주장을 극복해야 한다.

   그동안 국가보안법 폐지운동의 지배적인 흐름이라고 할 수 있는, <통일운동이나 자주화운동에 국가보안법 철폐투쟁을 종속시키는 논리>는 국가보안법 폐지투쟁을 협소하게 만들었다. 민중의 생활과 직접 관련하여 국가보안법 철폐를 주장하는 논리가 빈약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인권운동사랑방 서준식 대표는 철저하게 <인권의 논리>로 국가보안법 철폐투쟁을 전개할 것을 제안하고 그러한 방향의 운동을 시도했다. “국가보안법 문제에는 철저히 '인권'의 언어를 가지고 '인권'의 입장을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 '인권'은 정치정세의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고 언제나 소리높이 외칠 수 있으며 안정적인 입지를 보장해준다. 또한 '인권'운동은 전세계적인 네트워크를 활용할 수 있고 UN이라는 장에서 쉽게 먹혀든다는 이점이 있으며 일반시민․대중에게 공포감을 주지 않으므로 특히 '냉전 이후' 시대에 있어서 운동의 대중성을 달성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통일운동과 국가보안법 철폐운동은 이제 막연히 혼재되어서는 안되며, 국가보안법 철폐운동은 자체의 독립된 전문성과 전략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서준식, “새로운 국가보안법 철폐운동을 향하여-기본구상”, 학술단체협의회, <국가보안법, 필요한가?> 토론회 발제문, 1996. 12).

   그러나 인권의 논리만으로는 다수 국민들의 국보법 철폐투쟁 참여를 이끌어내기는 어려웠다. 일반 국민들 가운데서도 인권을 담보 잡히지만 생활만 향상시킬 수 있으면 국가보안법에 의한 자유의 제약을 감수하겠다는 실리적 사고방식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 조갑제 기자는 박정희의 역사적 공과를 평가하는 TV토론 석상에서 박정희 전대통령이 인권을 억압한 것이 아니라 신장했다고 주장했다. 박 전대통령이 자유권을 약간 억압했지만 그 당시 다수 국민들이 겪고 있었던 빈곤으로부터 해방시킨 것이야말로 가장 크게 인권(생존권 생활권)을 신장한 것이 아니냐는 논리였다.

   따라서 국가보안법 폐지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인권+생활의 논리>가 필요하다. 국가보안법은 단순히 소수 사회운동가, 양심수들의 인권 억압이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우리 국민들의 의식과 사회규범을 지배함으로써 국민들의 일상생활을 어렵게 하는 등 사회 전반에 끼치는 부정적 영향이 심대했다는 것을 명확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 인권운동사랑방 전 대표 서준식씨도 국가보안법 폐지의 필연성을 모든 국민의 희생에서 찾아야 함을 역설한 바 있다. “국가보안법으로 인한 희생자는 극히 일부 기득권층을 제외한 모든 국민이다. 왜 모든 국민인가를 설명하는 것은 무척 어렵다. 그러나 이것을 해내지 않으면 국가보안법 반대운동의 대중화는 불가능하다. 안이하게 ‘국가보안법=양심수’의 도식을 만드는 일, ‘국가보안법 피해자선언’을 발표해대는 일, 이것은 고립을 자초하는 운동이 아닌가? 그것은 마치 교도소에서 ‘양심수’와 ‘잡범’ 사이에 계급이 있듯이 운동권 엘리트주의에 빠질 가능성이 있는 방법이 아닌가?”(서준식, “국가보안법 폐지운동에 관한 몇 가지 단상”, ꡔ인권하루소식ꡕ, 인권운동사랑방, 1999년 11월 2일)

   한국사회의 변화와 국가보안법의 시대착오성

   국가보안법이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상황을 ‘국가보안법체제’라고 부를 수 있다. 국가보안법이 견고한 재생산구조를 가지고서 지속적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1970년대에 대하여 ‘유신체제’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었다. ‘국가보안법체제’는 이와 동일한 차원의 개념이다. 이 때의 체제란 특정 개인의 퍼스낼리티나 정치세력의 집권을 넘어서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구조화된 질서로서 재생산되고 상당한 지속성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보안법은 단순한 법이 아니고 우리 사회의 성격과 변화에서 핵심적인 요소의 하나로서 작용해왔다.

   국가보안법체제가 한국자본주의 발전에 미친 영향은 시기에 따라 달라진다고 할 수 있다. 국가보안법체제는 인권을 억압하는 체제인데도 지금껏 유지되어왔다. 그런데 왜 최근에 와서는 국가보안법 폐지의 적극적 주장이 나오고 지배세력 일각에서도 페지 내지 근본적 개정 주장이 나오게 되었는가. 그동안 무엇이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1960, 70년대까지는 북한의 위협이 실재하였고, 이에 따라 다수 국민들은 전쟁의 위험을 피하기 위하여 국가보안법에 의한 인권과 자유의 제약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수용한 면이 있다. 그리고 고도성장을 이루기 위하여 노동권의 억압을 수용하였고, 또 자유를 희생하는 대가로 국민들의 생활수준은 꾸준히 향상되었다. 박정희 전대통령의 역사적 공과에 대해서 상당수 국민들, 특히 1960, 70년대에 사회활동을 한 노령층에서 긍정적 평가가 나오는 것에는 이러한 근거가 있다. 국가보안법체제가 고도성장에 일정한 순기능적 역할을 한 것이다. 따라서 대다수 국민들도 국가보안법 철폐에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1980, 90년대에는 한국경제가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경제로 되었기 때문에 지배세력에 대한 비판과 견제기능이 부재한 상태에서 재벌체제, 사유재산절대주의 등 구조적 모순이 누적된 결과 1997년말의 IMF 사태와 같은 파국적 경제공황의 발생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오늘 우리는 전기, 가스, 통신망, 금융거래망 등 고도로 복잡한 기술시스템의 속에서 살고 있어서 어느 한 군데라도 잘못되면 그 파급력이 엄청나고 우리의 삶과 생명이 위협받는다. 이제는 자유와 인권의 보장 없이는 경제적 생존도 어려워지는 상황으로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오면 국가보안법체제는 자본주의체제 모순 완화와 체제의 안정적 재생산에 역기능적 역할로 전환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자본주의적 모순의 심화와 경제불안정 및 재생산위기 사태가 국가보안법체제의 전환과 종식을 요구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국가보안법 폐지 움직임이  크게 진전되게 되었다.

국가보안법의 폐해, 곧 국가보안법이 폐지되어야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 차원에서 들 수 있다. 국가보안법은 기본적 인권을 탄압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과 창의성을 억압했다. 정치적으로는 진보정당을 탄압함으로써 정치의 민주화를 억압했고, 남북관계 개선을 방해했고, 한국이 미국에 종속되도록 했다. 국가보안법은 경제적으로는 재벌체제와 사유재산 절대주의를 옹호함으로써 재벌독재체제와 부동산투기 고지가 문제를 야기했다. 국가보안법은 사회적으로는 민주적 노동운동을 억압하고 사학재단의 부패와 전횡을 옹호했다. 국가보안법은 문화적으로 평등을 추구하는 좌파 사상을 억압하고 우파사상을 만연하게 했다.    

   첫째, 국가보안법은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억압했다. 일제하부터 최근까지 계속되어온 종전의 전향제도나 99년에 국가보안법 위반자들에게 사면을 할 때 제출을 강요하는 준법서약서 제도는 바로 양심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종교도 심하게 왜곡되어 기복신앙이 판치는 것도 국가보안법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이 처한 문제를 정상적인 절차를 밟아 해결하지 못하고 개인적인 정성과 기도 등에 의존하여 해결되기를 기대하는 정신상태를 배경으로 한다.
   국가보안법은 표현의 자유를 억압했다. 국가보안법 때문에 국민들은 진실과 자기 생각을 말할 수 없었고 많은 언론인들은 진실을 보도하다가 억압을 당했다.  

   둘째, 국가보안법은 학문의 자유와 문학 예술 창작의 자유까지 억압했다. 학문은 우리의 지식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고 진실을 추구한다. 그런데 학문적 연구결과를 사법적으로 재단할 경우 사회과학분야에서 진리 추구라는 학문의 존립근거는 없어지고 학문에게는 체제정당화 기능만이 남게 된다. 검찰이 1988년 학술단체협의회 심포지움의 서관모교수 발제문을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하려 한 것이나 1994년에 경상대학교 교양교재인 {한국사회의 이해}를 이적성 서적으로 규정해 저자들을 기소한 사건은 학문의 자유 침해의 전형적 실례이다. 조선일보가 김대중정권에 자문역할을 한 최장집 교수에까지 ‘마녀사냥’의 칼날을 들이댈 수 있었던 근거는 국가보안법이 철폐되지 않고 민주화가 완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이 존속하는 한 조선일보의 안보상업주의를 잠재울 수 없고 제2, 제3의 최장집이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국가보안법은 문학과 예술의 자유를 억압했다. 해방 이후 한국문학의 기념비적 작품인 소설가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국가보안법으로 수사를 받고 있다. 화가 신학철 그림의 초가집이 김일성의 생가와 닮았다는 이유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세계적인 음악가 윤이상선생의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레드헌트}라는 영화는 대법원에서 이적 표현물이 아니라는 판결이 났지만 이 영화상영을 주도했던 인권운동 사랑방 대표 서준식씨는 구속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좋은 작품, 노벨문학상을 받을 만한 작품이 나올 것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국가보안법은 사회심리적으로 인간의 창의력을 침해했다. 국가보안법은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정신적 상처를 남기고 무의식적인 공포를 조장해왔다. 많은 사회인사, 진보인사들은 자신의 발언과 글이 혹시 국가보안법에 걸려들까 봐 자기검열에 전전긍긍하였다.
   이제 한국은 중국 경제의 급속한 추격에 대응하여 과학기술 수준을 높이고 인문사회과학에서도 한국의 상황에 적합한 이론을 창조해야 한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은 인간의 창의적인 활동을 억압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질적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셋째, 국가보안법은 민주정치를 억압하고 민중의 정치세력화를 저지해왔다. 국민들은 이력서의 정당, 사회단체, 가입 란을 보면 주눅부터 든다.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말하는 것을 꺼려하는 것이다. 자기 생각대로 정치적 입장을 폈다가는 국가보안법으로 인해 곤욕을 치를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은 노동자를 비롯한 민중들의 정치세력화를 저해했다. 국가보안법은 자본주의적 모순이 심화된 한국사회에서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근로대중들이 정치적으로 단결하여 정당을 조직하고 선거를 통해 공직에 진출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1958년에는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 처형했다. 1987년 6월 항쟁후 민주화가 진전되고 1997년 외환위기 후 민주노동당이 2000년에 결성될 때까지 진보정당의 존립은 불가능했다.  

   넷째, 국가보안법은 남북관계 개선을 방해하고 통일을 지연시켰다. 국가보안법은 변화된 남북관계에 맞지 않게 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와 사회주의 진영도 해체되었고, 북한은 한국과 함께 유엔에 가입했다. 국제사회에서 국가로서의 인정을 받고 있는 것이다. 남북한 당국자 회담이 진행되고 있고, 개성공단에 한국 기업들이 들어가고 있는등 남북 교류도 활발해졌다. 그런데도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는 것은 너무나도 시대착오적이다.

   다섯째, 국가보안법은 대미종속적인 외교, 국방의 원인이 되어왔다. 국가보안법의 뒷받침을 받아 남북이 서로 적대적 관계에 있는 것을 배경으로 한국은 미국에 군사적 외교적으로 의존하게 되었다. 한국경제의 규모가 세계 12위에 있는 지금 군사 활동, 국제통상교섭 등에서 개도국과의 연대를 강화하고 이라크 파병요구 거부 등 평화외교를 펼칠 수 있는 자주적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국가보안법을 폐지해야 한다.

   여섯째, 국가보안법은 사유재산 신성시 관념을 강요했다. 우리 사회에는 “내 것 가지고 내 맘대로 하는데 뭐가 문제냐” 하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사회주의국가나 선진 자본주의국가에서는 사유재산의 규제가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사유재산의 한계에 대한 비판을 국가보안법이 억압해왔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상가와 주택 임대차의 권리 보호를 지연시켰고, 부동산은 투기대상이 되고 가격 폭등이 일상화되었다. 국민소득에 대비한 지가수준이 세계 최고가 된 것은 국가보안법의 탓이 크다.  

   일곱째, 국가보안법은 재벌체제에 대한 공격을 저지해왔다. 재벌체제는 독점 대기업들이 국민경제를 지배하고, 이 독점대기업들을 소수의 재벌총수가 미미한 지분을 가지고 계열사간 지분소유를 수단으로 지배하는 이중적 독재체제이다. 외환위기를 계기로 재벌의 폐해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러나 전경련 상무는 재벌에 대한 비판과 노동자의 경영 및 소유 참가 주장을 사회주의적인 것으로 매도했다.  

   여덟째 국가보안법은 민주적 노동운동을 억압하는 등 사회적 약자들의 권익활동을 억압했다. 우리는 “말 많으면 빨갱이”라는 말을 귀가 따갑도록 들어와고, 부모들로부터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라는 교훈을 들어야 했다. 억울한 일을 당하더라도 참아라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피해자인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은 노동자들이 사회주의 관련 서적을 읽고 노동자단체들이 사회주의적 주장을 하는 것을 억압했다.

   아홉째, 국가보안법은 사회의 공공적 부문에서도 족벌의 전횡을 조장했다. 국가보안법은 사립학교와 사립 병원, 족벌 언론, 족벌 교회의 전횡을 뒷받침해주었다. 사립학교 재단 설립자들은 학교를 사유물로 취급하고 학교 재산과 수입을 자기 것으로 빼돌리는 범죄행위를 저질러왔다. 이에 대응해 전교조 교사들과 학부모, 학생들이 학교 운영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면 사회주의를 하자는 것이냐 하며 반발한다. 국가보안법에 의지해서 사학에 대한 전횡을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언론기관이 집권세력이나 특정재벌 및 족벌의 사유물로 전락하게 되는 데도 국가보안법은 기여했다.

   열째, 국가보안법은 이기주의, 기회주의, 출세주의를 만연시켰다. 국가보안법이 인간평등론과 연대를 통한 저항을 강조하는 좌파적인 사고방식이 확산되는 것을 저지함으로써 우파적 사고방식을 조장한 것이다. 우파들은 불평등은 선천적인 것이며, 따라서 제거될 수 없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불평등한 현실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우파들은 대답은 “억울하면 출세하라”이다. 우파 정치세력은 현재의 불평등구조를 존속시키거나 확산시키려 한다. 우파는 사람사이의 관계를 수직적 지배종속관계로 본다. 위 사람과 아래 사람으로 구분하고 위 사람을 잘난 사람으로 우러러보고 부러워한다. 우파는 지위와 재산을 인간의 존엄성보다 중시하고 지위와 재산에 따라 인간의 가치를 평가한다. 이러한 우파적 사회분위기 속에서 부모들은 자녀가 공부를 못하면 마구 구박하고 심지어는 죽어버리라는 극언하는 등 자녀를 자살로까지 몰아세우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우리 사회에서 우파적 사고방식이 지배하는 것은 국가보안법으로 인해 평등주의를 본질로 하는 좌파적 사고방식과 실천이 완전히 봉쇄되었기 때문이다.

   다수 국민의 행복과 정상적인 사회를 위해서

   정부 관료들은 국가보안법은 이제 신중하게 적용하고 있으며 피해자는 극소수라고 하고, 사회 고위직을 차지했던 기득권자들은 국가 보안법이 한국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라고 소리높여 옹호한다. 그리고 다수 국민들은 국가보안법은 그 법에 위배되지 않는 일을 하지 않을 나한테는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득권 세력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소수의 소유자들이 전횡을 하고 대다수 사회적 약자들을 견디기 어려운 고통으로 몰아넣는 천민적인 사유재산 절대주의 사회였다. 그것은 지극히 비정상적인 사회였다. 국가보안법은 이 비정상적 체제를 지키는 수단이었을 뿐이다.

   다수 국민의 행복을 보장하는 정상적인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 시대착오적인 국가보안법은 이제 폐지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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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료/문화 개방 사유화 저지를 위한...


  

셋째 정부는 경제자유구역내 외국병원이 유치되면 국부유출은 없고 오히려 외국진료의 국내흡수 가 나타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선 외국진료가 1조원 규모라는 연구는 근거가 없음이 밝혀진지 오래이다. 미국전체의 외국인에 의한 진료수입이 연간 1조 2천억원 수준이다. 이러한 규모로 보았을 때 한국 한 나라에서만 외국진료로 인한 외화유출이 1조원이라는 것은 터무니없이 과장된 수치이다. 또한 외국진료의 대부분은 원정출산이나 여러 외국병원의 세계일류부문에 한한 것이다. 국내외국병원에서 출산할 때 외국국적을 주는게 아닌 이상, 그리고 국내 한 병원에 여러 외국병원의 초일류부분만 모을 수 없는 이상 외국진료의 대부분은 막을 수 없으며 오히려 국내의 외국병원에 대한 신규수요만 늘리게 될 것이며 이는 곧 국부유출로 이어질 것이다. 국내외국병원이 유치될 가능성도 희박하지만 유치된다고 하여도 이는 외국병원과의 연계구실을 하게 될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넷째 외국인설립이 아니라 외국인투자기업까지 병원설립자격요건을 확대한 것을 재경부는 국내기업에 대한 차별을 줄이기 위한 조치라고 이야기 하나 사실상 이는 외국병원의 투자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조치라고 보인다. 중국에서 확인된 바로는 한국에서 양해각서 체결 이야기가 나온 유펜이나 하바드 대학병원의 경우 내수시장이 넓고 병실료와 인력이 훨씬 유리한 중국과 투자협정을 상당정도 진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의 한국진출은 사실상 없었던 일이 되고 있다.
  결국 이번조치는 국내의 몇몇 대형병원들이 외국브랜드만 유치한 형태로 영리법인화를 허용하는 조치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이는 국내병원간의 차별을 노정하여 결국 역차별 논리에 입각한 국내병원 전체의 영리법인화를 촉진하게 될 것이다.

  다섯 번째 재경부는 국내공공의료체계의 확충을 보완정책으로 내놓고 있는 바 공공의료확충은 그 자체로 필요한 것이지 의료개방의 보완물이 아니다. 더욱 황당한 것은 바로 이러한 말을 하는 재경부가 2004년은 물론 2005년 내년 예산 심의에서 공공의료확충예산을 일반회계에서 전액삭감하였고 기금예산에서 조차 대폭 삭감하여 공공의료확충이 거의 불가능해졌다는 사실이다. 한편으로는 공공의료확충예산을 거의 전액삭감하고 한편으로는 공공의료확충을 보완조건으로 이야기하는 재경부는 거짓말을 전문적으로 늘어놓는 부서인가?

  이처럼 재경부의 주장 전체가 사실상 거짓말일뿐이며 이미 밝혀진 사실과 전혀 다르다

  2. 경제자유구역 병원의 내국인진료, 영리법인허용안은 철회되어야 한다.

  현재 최대다수 가입자단체인 민주노총과 전농, 시민단체와 진보적 보건의료단체 등 대부분의 시민사회단체들이 재경부의 이번 조치를 반대하고 있다. 또한 국내의 의료계 직능 4단체 모두 재경부의 조치에 반대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보건복지부도 의료개방은 매우 신중하게 처리해야할 사안이라고 말했으며 재경부가 예산의 거의 전액을 삭감한 공공의료가 확충되기 전까지는 시기상조라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즉 시민사회단체 전체와 직능단체 전체가 반대하고 있으며 정부부서간의 협의도 아직 채 이루어지지 않은 조치가 이번 재경부의 경제자유구역법 개정안이다.

  경제자유구역내 병원의 내국인 진료와 영리법인화는 누차 지적하여왔듯이 그 자체로 국내 고급수요층의 의료수요만을 겨냥한 것으로 의료이용의 빈부격차만을 증가시킬 것이며 외국인 환자유치는 비현실적인 것이다. 또한 경제자유구역내 병원의 영리법인화는 연쇄적으로 전체병원의 영리법인화의 시발점이 될 것이며 이는 당연히 의료의 고급화와 의료비 지출의 급등을 부추킬 것이다. 이러한 의료비를 건강보험재정이 담당할 수 없으므로 건강보험과 경쟁적인 대체형 민간보험도입은 필연적이 된다.
  이러한 영리법인-민간의료보험체제는 한마디로 재경부가 말하는 국내병원경쟁력의 강화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나 남미처럼 비효율적이면서 불평등한 체제로 귀결된다는 것이 이미 전세계적으로 확인된지 오래이다. 미국은 의료비로 GDP의 14%를 쓰면서 5000만명에 가까운 인구가 의료보험이 아예 없고 국민의 의료만족도가 10%내외로 전세계적으로 가장 낮은 편에 속한다. 남미의 경우 인구의 10%정도가 민간보험에 가입하여 영리병원을 이용하고 인구의 나머지는 보험혜택이 극소로 축소된 공적 보험으로 의료불평등이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영리법인-민간의료보험도입은 현재도 민간기관이 중심이어서 매년 의료비상승률이 GDP 성장률의 2배인 한국의 의료비 상승폭을 폭발적으로 만들것이 분명하며 이는 거시경제적으로 엄청난 비효율과 의료이용의 빈부격차의 심화를 낳을 것이다.

  재경부의 이번 입법예고는 동북아 허브라는 정부의 구상에 의료의 특성을 모르는 채 적당히 구색맞추기로 끼워넣은 동북아허브병원 구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근거로 든 싱가포르나 중국, 제한적 영향론, 경쟁력 강화론, 외국진료억제론 등은 하나도 근거가 없음이 이미 명백하다. 위험성은 극히 크나 실익은 없거나 극히 의심스럽다.

  한국의 보건의료체계는 취약하기 그지없다. 의료보장률45%, 공공의료기관비율 8%는 OECD 평균 의료보장률 70-80%, 공공의료관비율 75%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동남아시아 국가보다도 공공성이 취약하다. 정부가 해야할일은 이러한 한국의 취약한 의료의 공공성을 강화하는 것이지 현실불가능한 외국진료수요나 국내일부 부유층의 고급의료수요를 충족시키려다가 국내의료체계를 붕괴시키는 경제자유구역 병원의 내국인진료허용과 영리법인허용이 아니다. 이 입법예고안은 즉시 철회되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수단과 방법으로 이 법안을 저지시킬 것임을 분명히 밝혀둔다.

우리의 주장

1. 경제자유구역내 병원의 내국인진료․영리법인화 허용 경제자유구역법 개정안 철회하라
2. 재경부장관은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파괴하는 입법예고안에 책임을 지고 즉각 사퇴하라
3. 보건복지부장관은 국민건강을 책임지는 주무장관으로서 경제자유구역법개정안에 대해 반대입장을 분명히 밝혀라
4. 참여정부는 의료보장률 80%, 공공의료비율 30% 확충공약을 준수하고 이에 정면으로 역행하는 경제자유구역내 병원의 영리법인화 허용과 의료개방조치를 즉각 철회하라

건강권실현을 위한 보건의료단체연합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 건강사회를위한치과의사회, 노동건강연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참의료실현청년한의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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