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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2/02
    공개입양가족의 적응이라...
    푸른들판
  2. 2006/12/09
    성적지배와 그양식들
    푸른들판

공개입양가족의 적응이라...

양육, 육아의 고통을 너무나 뼈저리게 경험한, 경험하고 있는 나로서는

감히 엄두도 못 낼 주제인 '입양'

 

'입양'을 하는 이유는 다양하겠고,

많은 부분 '불임'이라는 상황 속에 피할 수 없는 대안이기도 하겠지만...

소위 혈연 중심의 가족을 당연시하는 한국사회에서

'입양'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사회적 소수자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

그 안에서 차별과 배제를 경험하면서 당하는 고통들...

그러나 그 고통을 통과하면서(입양사실을 알리고, 입양 가족 안에서 적응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전통가족제도와 문화에 균열을 내고 있는 그들.

 

그들은 특별히 더 선한 사람들도 아니다.

단지 자신들의 필요와 이유에 따라

입양이라는 선택을 했을 뿐이다.

 

단지 입양가족을 바라보는 사회 전체의 고정된 시선, 반응이 차별적이라 문제인 것이지...

 

그런데 그런 입양의 특수성과 대비해 나는 어떤가?

 

   

 




지난 주에 현이(아기 이름)를 어린이집에 보내는 중에

두 분의 여성(60대 정도로 보이는)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말았다.

 

"저렇게 어린애를(현재 현이는 만으로 14개월) 어린이집에 보내다니.. 애도  불쌍하고 엄마도 불쌍하다

 엄마는 돈 벌러 일하러 가야되고, 애하고 떨어져 있어야 하다니..." 

 

입양이라는 상황과 동일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아기가 어릴 때(통상 만 세 살 전)에는 엄마하고 떨어져 있으면 안된다는 주변의 시선으로

나는 죄많은, 그러면서도 불쌍한 엄마가 되고 만다.

나는 죄 많지도, 불쌍하지도 않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고,

당연히 어떤 상황에서도 사회적으로 일이 필요한 사람이다.

여자는 가정, 남자는 바깥일이라는 이분법은 나에게 통용되지 않는다.

돈이 없어서 억지로 떠밀려 일하는 불쌍한 사람 취급받고 싶지 않고,

엄마하고만 아이가 있다고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을 직접 깨닫기도 한 사람이다.

(지난 6개월 아이와 단 둘이 있으면서 우리는 서로 행복했던가? no!! 나는 나대로 내 일을 못해

스트레스 받았고, 아이는 나밖에 의존할 사람없어서 괴로웠다, 어떻게 아냐규? 엄청 많이 울어댔으니까!)

 

 

그날 그 사람들에게 직접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바로바로 이야기 못하는 나의 한계여!)

지금이라도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지금 우리 아기는 어린이집에서 다른 친구들 사귀면서 사회생활 잘 배우고, 건강하게 지내고 있거든요.

저도 일 시작하면서 더 행복하고, 아기에게도 짧은 시간이지만 둘만 있을 때보다 즐겁게 지내구요,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래,

바로 그거다.

뭔가 세상은 이래야 한다는 고루한 관념으로

자신이 맞다는 고정된 시선으로

타인들의 상황을 재단하고 판단하지 말라는 거다.

 

입양가족들에 대해서도, 일하는 엄마와 어린이집에서 낮시간을 보내는 영아에 대해서도

동성애 커플에 대해서도, 성폭력피해생존자에 대해서도, 이주노동자들에 대해서도

기존에 가진 색안경으로

불쌍해하거나 혐오하거나 무시하는 그런 태도들...

 

그게 참 무섭단 생각이 든다....

 

권지성씨가 쓴 '공개입양가족의 적응'은 나에게 이렇게 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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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지배와 그양식들

이종영이 쓴 '성적지배와 그 양식들'을 읽어본 사람들은

이 글을 읽고, 같이 이야기 나눠보고 싶다. 주로 3,4장을 중심으로 글은 씌여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의 회원소모임 '토닥'스터디에서 나눌 글을 올려본다.

그 곳에서는 여성문제, 계급문제 관련한 단행본이나 자료를 읽고 모여서

각자의 활동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는다.

거기서 나오는 많은 이야기를 다 쓸 수는 없지만,

관련된 고민들을 여기서도 나눴으면 좋겠다.

여성과 여성간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서 경계(계급, 성적 취향, 종교, 인종, 국가 등등)를 허물고 새롭게 만드는 작업에 같이 하고 싶다면 누구든 덧글 달아주셔용~~  



 

★ 제 3장부터는 국가 형성이후 남성지배적 친족 공동체의 권력이 일정하게 해체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러나 그것이 완전한 해체가 아닌 또 다른 형태의 변형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가족유폐적 성적지배양식’이라는 것. 가부장들이 자신의 아내와 딸들을 가족 속에 고립, 유폐시켰던 것은 그러한 책임수행에 위협이 되는 사랑의 힘을 사전에 철저하게 봉쇄하기 위해서이다.

 ▷ 여기서 나는 최근에 본 영화 ‘막달레나 시스터즈’가 떠올랐다. 부모의 동의 없이 아이를 가졌다고 수용소로, 성폭력을 당해도 수용소로, 남자들에게 대꾸를 했다고, 성적 관심을 나타냈다고 수용소로 간다. 그리고 거기에서 엄격한 규율/ 외부인과의 접근통제/ 감금/ 순결강조... 이런 일이 1900년대에까지 있었단다. 그러나 우리사회도 물리적 감금은 아니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는 ‘막달레나 집’을 만들어 사회가 그녀들을 주시하고 있다. 

125p. 인간 내부에 이미 자리잡고 있는 사랑을 발현시켜주는 매개체에 불과한 대상은 결코 결정적인 것이 아니다.

 ▷ 음... 일정부분 동의. 특히 사랑도 가시적인 조건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현실을 보면... 하지만, 수많은 사람중에 누군가를 어떤 장애에도 불구하고 만났다는 그런 감정을 여전히 로망스로 품는 나는 뭘까?


★ 129p. 내가 ‘문화적 후진성’이란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인류학자들이 주장하는 ‘문화상대론’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 자연적 소여들과 역사적 우연들에 의해 규정된 문화적 다양성은 물론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타자의 사물화로부터 타자성의 존중으로 이행하는 문화적 발전이 한편에 있어서는 관철되는 것이다.

  ▷ 여기서 소여란

       1 주어진 바. 또는 부여된 바. 2. 논리>연구 따위의 출발점으로서 이의 없이 받아들여지는 사실이나 원리.

       3 <철학>사유에 의하여 가공되지 아니한 직접적인 의식 내용

     기본적으로 저자의 말에 동의한다. 어떤 사회에 대해 그 사회의 억압적인 문화(내가 판단할 때)를 다양성에 빗대어 어떤 대응도 하지 않으려는 안이한 태도는 버려야 한다. 그러나 저자가 사용한 ‘문화후진성’이라는 표현이 가지는 관찰자적인 용어를 계속 쓸 것이냐는 고민된다. 난 번에도 논의가 되었던 ‘이슬람여성의 베일문화’, ‘아프리카의 여성할례’를 무조건 후진성, 억압이라 볼 것인가?      즉, 나는 언어자체가 가지고 있는 권력, 차별이 있다고 본다. 우리가 ‘원시, 후진’이라는 말을 서슴치 않고 쓰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본다. 그리고 그 용어는 그 사회에 있는 사람들이 쓰는 말이 아니라 소위 선진국에서의 연구자, 운동가가 쓰는 용어이다.

    운동을 하는 우리는? 무언가 문제제기를 하고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한다면, 운동가 스스로의 한계, 문지를 인정하고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변화를 원한다면, 그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내가 판단하는 해당사회의 문제, 과제를 설득하기도 하되, 나도 그 문화에 가서 내가 보지 못한 어떤 맥락은 없는지 돌아보면서 당사자들과 함께 만들어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기존의 연구는 제 3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문화가 가진 관점을 그대로 잣대로 들이대며 어디는 선진, 어디는 후진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가지는 맹점이 있다.(물론 나보고 연구하라고 하면 제대로 할 수 있냐는 말을 하면 할 말은 없다. ㅜㅜ) 그렇기에 특히나 용어의 사용 속에 들어간 차별, 권력, 편견은 없는지 더 세심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 물론 운동도 마찬가지. 연구자도, 지식인도, 운동가도 아닌, 당사자 운동, 당사자가 주체가 되는 운동이 중요해지는 시대이다.




★ 러시아 10월 혁명이후 실천과제

  1) 가사노동의 공공화

  2) 모성보호와 양육의 공공화(모든 아이에 대해 부모처럼 대해야 한다. 새로운 양육규범)

  3) 자녀교육의 공공화

 ▷ 현실 속에서는 이런 기치를 내걸었던 남성들이 도로 이를 회수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진보이념을 내세운 (남성)혁명가들이 스스로 그 이념들을 부정하는 남성들의 무의식적인 지배욕망으로 실천되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 여성소설읽기 모임에서 읽은 ‘어둠의 왼손’에서는 비록 허구로나마 이런 현실을 상상했는데, 거기엔 성적으로 활성화되는 시기가 따로 있는 소머-케머주기(한 달에 한 번씩 성이 바뀌기도 한다.)사회가 있다.


* 작가는 글에서 주인공의 입을 빌려 미래시대에 인간이 소머-케머주기를 실험한 이유를 설명한다

 1. 지속적인 성적 능력을 갖지 않은 인간이 지성적이고 창조적인 문화를 일으킬 수 있는가 확인해보고 싶어서

  2. 성적 충동을 불연속적인 시간 캡슐에 제한시키고, 남녀동성으로 소위 ‘평준화’를 이룩함으로써 성적 착취와 욕구 불만을 막으려고  

  3. 전쟁의 제거(지속적인 성적 포화상태와 조직사회의 공격성은 불가분한 인과관계


  이런 상황 속에서 인간은 어느 달에는 여성이 되고, 어느 달에는 남성이 되기 때문에 임신의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있고, 그런 이유도 양육도 어느 성이 전담한다는 개념없이 태어난 아이는 소유가 아니라 공동체의 미래가 되어 공동양육이 된다. 너무 신나지 않은가?


* 물론 이것도 현실 속에선 이루어지지 않는 이야기다. 210p.에서 저자는 여남간의 서로의 존중이 어떤 영적인 것에서 이루어진다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그것은 인간적 보편성에 기초한 서로간의 내면적 교류를 통해서 일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타자를 배려하게 된다고 했다.

  그런데 그동안의 글의 전개에 비해서는 왠지 마지막에서는 너무 안이하게 결론을 내린 것은 아닐지 생각이 들었다. 소위 ‘인간적 보편성’이라는 것이 여남의 공통된 부분을 말하는 것일진대, 그렇다면 저자의 말대로라면 여성의 특화된 부분(임신, 출산)을 경험하지 않는 남성들이 여성을 어떻게 배려한단 말인가? 타자에 대한 배려라는 것은 인간의 지배욕망과 대치되는 것인데, 그렇게 윤리적으로만 이야기한다고 그런 세상이 오나? 내가 지배하고 싶은 욕망 속에는, 누군가로부터 지배받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이야기하면서 서로를 존중해야한다는 결론은 나오지만, 그렇게 아무리 도덕교과서에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현실은 어떤가?


   여기서 나는 ‘상생’의 세계가 앞으로 지속가능한 사회의 대안이라는 것을 좀 더 실리적으로 대중에게 설득하기 위한 과학적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본시 이기적이고 탐욕적이라면, 내가 그리고 인류가 더 오랜 기간 잘 살기 위한 것이 무엇인지 연구하다보면 그것이 바로 ‘더불어 삶’이라는 것을 과학적으로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주여성의 삶이 현재를 살고 있는 나에게 어떤 영향을 앞으로 미칠 것인지, 타인의 가난이 현재 중산층으로 살고 있는 나의 미래를 어떻게 바꿀 것인지, 폭력이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들...) 그 사회로의 이행 중에서 사회주의가 있을 수도 있고, 자연환경과의 조화가 있을 수 있을 것이고 느린 발전을 지향하는 사회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자신만 잘 살면, 미래는 그다지 눈여겨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건 내가 죽었을 때 일이고, 나는 지금 가족들 잘 살게 하는데도 바빠!’라는 말들을 당연하게 한다.

그런 상황 속에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빠르게 바뀔 수 있는 유혈혁명? 느리더라도 계속되는 일상의 혁명? 아직까지 이상주의자인 나는 후자에 꽂혀있는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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