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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녀

요즘은 다소 나아진것 같지만, 짐승이 대구에서 서성거릴적만 해도 변변한 시네마 테크가 없어서 키노 나 씨네21 등에서 추천하는 '고전 명작' 들은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었습니다. 서울에 있다는 이런저런 씨네마 테크들을 보면서 부러움에 몸부림(-,-;) 치기도 했지요. 솔직히 서울에 직장을 잡은 이유중에 하나는 저런 문화적 혜택을 많이 누릴수 있다는 계산도 깔려 있었습니다. 막상 올라오니까 게을러져서 그렇지 --;


하여튼 당시에는 그나마 '영화마을' 비디오 대여점이 약간의 대리만족을 제공해주는 역활을 했었죠. '솔라리스' 시리즈나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 '택시 드라이버' 등등 분명히 비디오로 출시는 되었으나 타 대여점에서 장사가 안된다는 이유로 반품.폐기하거나 아예 구입하지 않은 좋은 타이틀들이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는, 말하자면 보물창고와도 같은 곳이었슴다. 미닫이 형식으로 되어 있는 비디오진열대를 이리저리 밀고 당기고 하다 보면 생각치도 않은게 발견되곤 했으니까요. 그 중에는 김기영 감독의 영화도 있었습니다.


지난 토욜, '미디어 몹' 의 #@%~/&^ 님과 하늬 님과 함께 한국영상자료원에서 김기영 감독의 '하녀' 를 보았습니다. 영화 상영전에 두분에게 '비디오 대여점을 뒤지다 보니까 '하녀' 도 있더라. 그런데 내용은 기억 안난다' 고 썰을 풀었는데, 영화가 시작되고 10 초도 안지나서 그게 구라였다는 게 밝혀지더군요. 무엇보다도 제가 봤던것은 칼라필름 이었는데, 이 '하녀' 는 흑백이었던 것입니다 (--;;) 아마도 비디오로 봤던것은 하녀 3 부작 중에 충녀, 아니면 화녀 였던거 같은데, 너무 오래된 탓인지 '감독 김기영' 말고는 아무것도 기억이 안나고 있습니다. -_-;

 


'하녀' 는 공장 기숙사에서 음악을 가르치는 ( 예전엔 이런것도 했었나봐요? ) 남자와, 그 남자를 짝사랑하는 여공, 그리고 여공이 남자의 집에 소개해준 하녀 이렇게 세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남자 ( 이하 선생님 ) 는 이미 가정을 가진 유부남이고, 당시의 기준으로는 어느정도 성공한 중산층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선생님' 은, 중간계급 지식인의 성격을 보여줍니다. 자신의 가족, 자신의 현재 위치를 지키는것이 그가 가지는 가장 큰 가치관이고, 거기에 약간의 위협이라도 가해진다고 판단되면 과감하게 응징하려고 하죠. 영화 초반에 나오는 연예편지 사건 같은것은 그져 적당하게 거절해도 될 문제인데, 여공에게 징계가 가해질것을 알면서도 관리자에게 고자질하는 모습은 그런 가치관과 성격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하녀의 흡연에 대해서 크게 문제삼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당시의 시대기준으로 보면 의외의 행동이었습니다. 아마도 흡연행위가 '가족' 에게 큰 해가 되지만 않으면 된다고 판단했던것이 아닐까요.


가정에서의 그는 아내에게 헌신적이고 아이들에게 적당히 자상한 아버지로서 전형적인 '좋은 남편(가부장)' 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아내 역시 그에게 헌신적이며, 가족 구성원들의 신분상승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습니다. 현재 자신(들)이 사회에서 가지고 있는 성공한 중간계급의 위치를 놓치는것에 대해서 과도할 정도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죠. 그리고 그 두려움과 집착이 이후의 '가족' 에 대한 비극적인 사건을 불러오는 주요한 이유가 됩니다. 물론 직접적인 계기는 남편의 외도 입니다만, 이후 그 아내와 남편의 대응을 생각해볼때 자신들이 차지하고 있는 사회적계층에 대한 집착 이라고 밖에는 설명이 안되더군요.


또 다른 한편으로, 이것은 계층에 대한 이야기 이면서 동시에 가족에 대한 이야기 이기도 합니다. 하녀가 처음 그 집에 들어왔을때 가족들이 가지는 경계심, 특히 딸아이가 보여주는 경계심은 ( 그녀는 별다른 이유도 없이 하녀가 물에 쥐약을 탔을거라고 동생에게 말합니다 ) 가족이라는 구조가 가진 타인에 대한 폐쇄성과 함께, 직감적으로 '젊은 하녀' 가 자신의 단란한 가족을 깨트리는 불륜의 원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적대적인 인식을 보여주고 있죠.


영화에서 인상적으로 느꼈던것 중에 하나는, 피아노라는 장치입니다. 피아노는 뒤에 하녀의 광기를 표현하는 수단이면서 동시에 그 광기어린 연주(?)는 관객들에게 불안감을 조성하는 장치로서의 역활을 수행하지요. 왜 '하필이면 음악 선생' 인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그래서 풀립니다. 그러한 장치를 통해서 김기영 감독은 등장인물의 내면 표현을 하면서 동시에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사용되는 효과음까지 대체시켜 버리는 효과를 거뒀다고 보여지네요.


아무튼 이제서야 비로소 진짜 '하녀' 를 본 셈인데, 보고난 후에야 이 영화에 쏟아진 무수한 찬사들에 대해서 이해가 되더군요. 우리 영화계에서 한동안 죽어있다가 몇년전부터 '호러' 라는 쟝르가 부활하면서 이런 저런 영화들이 만들어 지고 있습니다만, 솔직히 말해 '하녀' 만 못한 작품이 상당수 입니다. 이게 리메이크 되면 꽤 무서울거 같은데, 충무로의 누군가가 그런 야심찬 프로젝트를 진행해주지 않으려나...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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