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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남는 영화들 1

파업전야 : 1990 년, 한국, 장산곶매.

 

영화 <파업전야> 중

 

고등학교시절, 한편의 작은 영화가 뉴스에 오르락 거리던 때가 있었다. 뉴스화면에는 헬리콥터가 하늘을 돌며 상영을 중지하고 해산할것을 명령하고 있었고, 자욱한 최루탄 연기속에서 전경들은 곤봉을 휘두르며 '영화관객' 들을 몰아내고 있었다. 한때 그 영화는 보는것도 불법이었고, 심지어 가지고 있기만해도 경찰의 수사대상이 되는 물건이었다.

 

대학이란곳에 들어가고난뒤, 최루탄 대신 담배연기 자욱한 동아리방에서 이 놈을 보면서 어떤 선배들은 그 말도 안되던 시절들을 이야기하며 웃었다. 작은 공장에 노조를 만들려는 사람들과 그것을 탄압하는 자들, 현실적 여건때문에 노동조합에 참여할수 없는 사람들과 자본가의 회유와 협박 때문에 배신할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지독한 신파이고, 최루성 가득한 영화다. 공장 한구석을 점거하고 농성하던 노동자들이 구사대라는 이름의 용역 폭력배들에게 짓 밟히고 끌려나가는 장면까지, 그것을 어정쩡하게 지켜보던 다른 노동자들이 마침내 저마다 손에 스패너니 쇠파이프 따위를 들고 동료들을 구하러 달려나가는 장면까지, 지독하게 상투적이고 감정적이다.  영상미라고는 눈 씻고 쳐다봐도 찾을수 없고, 음향은 또 왜 그렇게 퍽퍽 튀며, 편집은 왜 그리 자주 끊기나? 영화적인 의미로만 따져보자면 결코 잘 만들었다고는 할수 없는 영화가 바로 파업전야다.

 

하지만 중요한건 그런게 아니었다. 영상미고 나발이고 그따위것들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영화나 드라마 같은것을 보고 감정이입해서 우는 그런짓은 바보짓이다' 라는 내 관념은 작품성 부족한 독립영화 한편앞에서 완전히 무너졌다. 게다가 정말 중요한것은 보고난뒤 내 가슴속에는 주인공이 치겨든 스패너같은 뭔가 묵직한것이 걸려버렸다는것이다. 

 

장산곶매 출신의 감독들은 나중에 충무로로 진출해서 영화를 한편씩 찍었지만, 개중에 봐줄만한건 단 한편도 없다. 그나마 성공한 케이스가 장윤현인데, 여기저기서 아이디어나 훔쳐다 자기것인양 갖다바르는 그의 영화들은 '어둠의경로' 를 통해 다운로드나 받으면 모를까 돈 주고 보기는 심히 아깝다.

 

랜드 앤 프리덤 : 1995 년, 영국, 켄 로치.

 

 

'키노' 의 열렬 애독자였고 정성일의 극렬 지지자 임을 자처하는 나지만, 사실 그렇게 성실한 독자는 못되었다. 키노 창간호가 나오고나서 몇달뒤 입대를 해야했던 거다. 다만 복무 기간중에라도 키노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정기구독은 계속 유지하고 있었고, 덕분에 가끔씩 외박이나 휴가를 나갈때마다 집에는 아무도 보지않는 키노들이 쌓여가고 있었다.  입대후 1 년이 지나 정기휴가를 나왔을때, 밀려있던 키노들이 외쳤다. '랜드 앤 프리덤을 한국에서도 극장에서 상영한다!' 고 ^^;

 

내가 휴가를 나왔을때는 이미 이 영화를 상영하는 곳이 없었다. 시기상의 문제만이 아니라, 백두대간이 수입했으면 동숭 시네마텍 같은곳에서나 상영했을 것이지, 대구같은 지방 도시에서 상영을 했었을지는 심각한 의문이다. 하지만 어쨌든 마침 비디오로는 출시가 되었던 상태고, 다행히(?) 인기 없는 품목이라 아무도 찾는 사람이 없어서 대여기간의 압박없이 보고 또 보고 할수 있었다.

 

조그맣고 어두침침한 다락방에서 시간가는줄 모르고 할아버지의 유품들을 읽어내려가던 소년처럼, 나는 시간가는줄 모르고 영화속에 빠져들었다. 그 기록은 파시스트의 공격에 맞서 보통 사람들의 삶을 지켜내기위한 투쟁의 기록이며, 전 세계의 노동자들이 국경을 초월한 연대를 실현했던것에 대한 기록이다. 또한 동시에 원칙에 위배되는 입장들, 그런 입장을 주장하는자들 과의 타협이 어떻게 혁명을 망쳤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기도 하다. 몇번을 반복해서 봤지만, 볼때마다 드는 느낌은 '무언가 남겨진 이야기가 더 있다' 라는 것이다. 그 공백은 다락방에서 할아버지의 기록을 보던 소년이 채워넣을 몫이다. 그와 같이 할아버지의 기록을 봤던 우리들과 함께.

 

랜드 앤 프리덤은 처음으로 인터내셔널가 를 접했던 작품이기도 하다. 나지막하게 부르다가 마지막에 거대한 합창이 되는 영화속의 인터내셔널가와 같은, 우리의 운동은 그런것이 될것이다.  

 

메이트 원 : 1987 년, 미국, 존 세일즈.

 

 
 

 

 

 

 

 

 

 

 

 

'혼자' 영화 본적이 있는가? 비디오나 테레비젼이나 컴퓨터가 아니라, 단지 상영관에 혼자 갔을뿐 아니라 넓은 상영관에 단 혼자 앉아서 영화본적이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나는 딱 한번 그런 기억이 있는데, 그것이 이 메이트 원 이다.

 

당시 난 대구에 살았는데, 서울과 달리 지방도시들은 시네마텍 같은곳을 찾기가 만만찮게 어려운 작업이다. 그나마 열린공간 Q 라는 200여석 규모의 소극장에서 간간히 영화제 라는 이름을 붙여 호러물이나 이런 종류의 영화들을 상영해주곤 했었다. 사실 말이 영화제지, 포스터도 변변히 붙여져있지 않은 좁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공간에서 영화만 보고 가라는 것이었다. 메이트원을 상영하는날, 하필 그 시간에 그걸 보러 온 사람은 나 밖에 없었고 아저씨는 영화제 참가비 3000 원을 받아쥐고는 아무말 없이 오직 나만을 위해서 영화를 틀어주었다. ^^;

 

메이트원은 같은 이름을 가진 20년대 미국의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실화를 다룬 작품이다. 주인공은 파업이 일어난 광산에 대체인력으로 고용되는데, 사실 그의 정체는 노동운동가로서 메이트원에 민주적인 노조를 건설하려고 한다. 영화는 그 과정에서 자본가와 노동자들의 대립뿐만 아니라 사용자에게 매수된 다른 노동자들과의 갈등까지 폭 넓게 다루면서 노동자들이 건설해야할 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마지막에 사장이 고용한 갱들에 의해 조합원과 마을사람들이 학살당하는 장면에서는 '파업전야' 와 비슷한 '묵직한것' 도 걸린다.

 

생각해보면, 파업전야에서도 랜드 앤 프리덤 에서도 메이트원 에서도 진정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오지 않았다. 역시 그것은 영화감독이 아니라 관객이 해내어야할 몫인가 보다.

 

빵과 장미 : 2000 년, 영국, 켄 로치.

 

 

마지막으로 부산 영화제 갔던것이 언제더라?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가더라도 항상 빠듯한 알바일정^^ 과 적은 예산 때문에 영화를 많이 볼수 있는것도 아니었지만, 미쳐 예약을 하지않아 뜨거운 햇볕속에 한시간씩 줄서 있는것은 정말 고역이었지만 그래도 몇년째 영화제를 제끼고 있다보니 역시 갈수 있었던쪽이 좋은 것이었다는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2000 년 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4회 아니면 5회 영화제에서, 몇몇 단편들을 본뒤 천리안 영화동호회에서 알게된 사람들을 만나 밤새도록 술을 퍼마시고서 다음날 아침에 흐리멍텅한 머리로 봤던 영화가 빵과 장미다. 동호회 사람들은 뭔가 따분한 ( 내 주관에서 ^^ ) 영화를 본다고 우르르 몰려가는 바람에 또 나만 남겨져서 이놈을 보게 되었다. 선택은 현명했다. 이 놈을 본뒤 숙취가 확 깨버렸으니까.

 

빵과 장미는 얼핏 '메이트원' 을 생각나게 한다. 노동조합을 만들고 투쟁을 조직하는 과정이 담겨져있으며, 노동자들 사이의 대립이나 불신에 대한 장면들도 여과없이 보여준다. 메이트원을 좀더 밝고 경쾌한 이미지로 만든다면 빵과 장미 가 될것같다. 그래서 나는 메이트원 을 생각하면 빵과 장미가 생각나고, 빵과 장미가 생각나면 메이트원이 떠오른다. 두 영화간에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여주인공 이다. 그녀는 멕시코에서 국경을 넘어온 이주노동자 이며, 여성이며, 비정규직 노동자로 그려진다. '열악한 노동' 의 이미지를 모두 가지고 있는 그녀는 가장 소외받는 노동자이며, 그 때문에 노동운동가인 남자주인공과 트러블을 빚기도 한다. 그러나 마침내, 노동조합을 건설하고 파업투쟁에 돌입하는데 성공한다.

 

'빵과 장미' 역시 실제로 있었던 세탁용역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녀들은 행진할때 구호는 '빵 뿐만 아니라 장미도 필요하다' 였다고 한다. (원문은 까먹었다) 인간다운 삶이 어떻게 빵만 가지고 이루어질까?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싸우지 않으면 얻어낼수 없는것이 이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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