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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대의원대회 난행, 무엇이 문제인가?

지난 2월 1일 '사회적 합의안' 을 통과시키기 위한 민주노총 대의원 대회가 열렸고, 폭력이 오고간 끝에 대의원 대회가 유예되었다. 최근 그다지 큰 뉴스거리가 없어 장사가 곤궁했던 언론들에게 민주노총 폭력사태는 지난번 기아자동차 취업비리 문제에 이어서 노동계를 물고 늘어질수 있는 좋은 핑게거리를 마련해 주고 있다.


사실 이번에 저들이 노동운동을 공격하는 목소리는 취업비리 사건때의 입장과는 다른 방향에서 나온것이다. 그러한 입장을 가장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는 쪽은 동아일보와 열린우리당 이목희 국회의원으로 양쪽다 민주노총 내의 '강경파' 들이 조직내의 민주주의를 망치고 있으며, 다수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고 고립을 자초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노무현 정권의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및 조.중.동 보수언론은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환상의 셋트요, 최고의 정치 파트너임을 여실히 드러내는 모습이다.


만약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의 입장과 결정들이 반대였다면, 현 지도부가 사회적 합의안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안을 통과시키려 하고 그것을 반대파들이 물리력으로 저지하려 했다면 저 환상의 셋트들이 앞다투어 지금과 같은 입장을 밝혔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저들이 아쉬워 하는것은 대의원대회 폭력사태 그 자체가 아니라, 사회적 합의안을 통과시키지 못한것, 더 정확하게 노동운동의 중추세력을 자신들 진영으로 끌어들여 체제내화 시키지 못한것에 대한 아쉬움이다. 그렇기 때문에 '강경파들이 문제' 라고 입을 모으고 있는것이며, 노동운동에 대한 '충고' 를 아끼지 않고 있다. 


더군다나 이번 사태를 취업비리와 연관시켜 노동운동의 도덕성이 실추되고 있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저들이 말하는 '도덕성' 의 정체가 무엇인지 드러나고 있다. 취업비리 사건은 도덕성의 타락이 아니라 사측및 정부기관들과 밀접한 유대관계를 가져온 노동조합 관료들의 구조적인 문제로, 현장 조합원들이 노동조합에 대한 통제력을 장악하는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진정한 방법이 될수 있을것이다. 그런데 과연 노.사 협조를 우선시하는 사회적 합의주의를 내세우면서 조합원들 자신, 아래로부터의 노동조합 통제가 가능해질수 있을까? 저들이 노동운동의 '도덕성' 을 회복하라고 말하는것은 단지 이와같은 모순된 입장을 은폐하고 노동운동을 공격하고 약화시키기 위한 하나의 수단, 그 이상의 의미는 없는것이다.


'사회적 합의' 는 진정한 의미에서 이주노동자,비정규직,중소영세노동자,여성노동자 등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의 질을 하향평준화 시켜 노동자들 사이의 상대적 박탈감 을 '완화' 시키는 역활만을 수행할수 있을 뿐이다. 당연히 그것은 계급적 대표성을 획득하는 방법이 될수 없다. 계급적 대표성은 다같이 못산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얻어지는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노동운동은 물론이고 전반적인 삶의 질을 하향조정하는 결과만을 불러올 뿐이다.


민주노동당 의정지원단 단장인 최병천씨는 예전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에서, 북구 유럽의 예를 들며 사회적 합의주의를 강조했다. 그가 제시하는 스웨덴식 , 혹은 네덜란드식 노사관계 모델의 핵심은 정규직 노동자들이 많은 부분을 희생하고 양보하여 비정규직 노동자를 비롯한 사회 전반적인 복지정책의 향상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장미빛 환상으로 바라보는 스웨덴과 네덜란드의 상황은 '모든 노동자들이 희망을 잃어버리고 있는' 중이라는 점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스웨덴이 그렇게 할수 있었던것은 전후 호황기에 자본주의를 규제하고 더 인간적인 자본주의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조건, 당시 서유럽보다 더 큰 규모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경제적 조건, 즉 자본주의가 노동자들에게 양보를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수익성이 높을 때만 가능했었던 일이며 일시적인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전후의 세계적 호황과, 2차 대전 당시 중립국의 길을 택하면서 세계 대전의 피해와 전후 군사비 지출 부담을 줄여, 경쟁 우위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스웨덴도 1970년대 오일 쇼크에 이은 세계 경제 위기를 벗어날 순 없었다. 경제가 불항에 빠지고 이윤율이 떨어지면서 그동안 이루어두었던 성과들도 다시 빼앗기고 있다. 스웨덴의 공식 실업률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9퍼센트를 넘고 있다. 특히, 유럽과 세계 시장의 통합도가 증가하면서 증대된 경쟁 압력에 사민당은 우경화하며 노골적으로 자본가의 대변인 노릇을 하고 있다.


1985년에 는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대규모 투쟁이 벌어졌다. 지금 스웨덴에는 다양한 사회세력 간의 조화가 아니라, 계급투쟁과 높아진 실업률과 복지 축소를 둘러싼 사회 갈등이 여전히 살아 있으며 그것은 국가 경제력에 의존해 이리저리 표류할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틀 내에서 사회주의적 정책을 추진하려고 하는 사회민주주의 기획이 본질적으로 내재한 한계라고 할수 있다.


네덜란드역시 갈수록 심해지는 국제경쟁과 경기불황 속에서 혼자만 평화로울수 있는 '섬' 은 아니다. 네덜란드는 2001년부터 미국과 독일, 이 두 주요 교역국가의 경제가 어려워지자 극심한 불황에 빠졌다. 1990년대 중반 3퍼센트대의 견실한 성장을 보이며 서유럽에서 가장 부러움을 많이 샀던 것은 옛날 얘기가 돼 버렸고, 2001년 1퍼센트 이하의 성장을 보인 후 하강곡선을 그려 2003 년에는 마이너스 0.8퍼센트 성장에 머물렀다.


네덜란드 정부는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제2차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재정 삭감을 감행하고(약 25조 원), 모든 노동자들의 임금 동결을 요구하고, 연금제도 변경 등 사회복지 부문의 재정 지출을 낮추기 위한 대수술에 들어갔다. 삭감된 재정은 대부분이 사회복지에 관계된 예산이었고, 전후 유럽에서 가장 인상적인 복지시스템을 자랑했던 나라가 보건과 교육이 경제산출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미국보다 더 낮아졌고 의료비 삭감으로 중환자실에서 대기자 수가 늘어남으로 제대로 응급치료를 받지 못한 중환자들이 죽어나가는 일이 벌어졌다.


노동조합은 저소득층과 사회적 약자들이 일방적으로 고통을 전담하게 된다는 점을 들어 정부에 대한 전면 투쟁을 선언했다. 그러나 사회적 합의주의에 순응해온 노동조합은 투쟁을 지속할 힘이 없었고, 평 조합원 노동자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채 무력하게 손쉽게 투쟁을 접을수 밖에 없었다.


최근에 참여연대가 제안하고 정부가 검토중인 '경제사회협의회' 는 1992년 스페인의 노사정 기구를 닮았다. 스페인 정부는 1992년 노.사.정 '경제사회협의회' 를 구성하고 1994년 정규직노동자들의 해고 조건을 완화하는 노동법을 개정했다.


노동법이 개정된 이후에 신규고용된 노동자의 96%가 비정규직으로 고용되었고 실업률은 전혀 해소되지 않았다. 1997년 스페인 정부는 사회적인 반발 때문에 정규직 고용 기업에 인센티브를 주는 방식으로 방향을 틀어야만 했다. 하지만 여전히 유럽지역에서 가정 높은 비정규직 비율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유럽의 선진적 복지국가들이 시행한 사회적 합의주의는 이와 같이 노동자들과 일반 대중들의 삶의 질을 하락시키는 결과를 만들었고, '시장주의 개혁' 은 정치적 불안정을 낳았다. 작년 정부의 신자유주의 개혁에 반대하여 네덜란드에서 30만,  독일에서 5만 여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었다. '사회적 합의' 모델은 점차 빛을 잃어가고 있으며 그러한 역활들에 익숙했던 노동자들은 점차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투쟁을 준비하고 있다.


흔히들 노동자들이 사회적 합의 모델에 반발하는 이유는 민주노총이 98년 노사정위에 참여한 이후에 정리해고제와 근로자 파견제가 통과되었고 전 세계적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비정규직이 폭발적인 증가를 보인 등, 노사정 위원회에서 '재미를 못본것에 따른 반발심리' 때문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런데 98년 노사정 위원회 참여이후 그와 같은 결과가 나온것은 우연이 아니다.


자본주의가 노동자들에게 양보를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수익성이 높을 때에만 성과를 얻는것이 가능한 '사회적 합의' 가, 경기불황의 시기에 노동자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까닭은 어디에도 없다. 98 년 노사정 위원회에서의 실패는 우연이나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될 결과였으며,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물론 노동조합 운동은 체제를 전복하려는 것은 아니며, 그 투쟁에는 협상이 따를수 밖에 없다. 그러나 협상은 어디까지나 강력한 투쟁끝에 자본과 정권이 먼저 손을 들도록 만들어야 가능한 것이지, 사회적 합의주의가 노리듯이 처음부터 협상을 전제로 하고 협상자체를 위해 파업투쟁을 주머니칼 처럼 꺼냈다 넣었다 할수는 없는것이다.


민주노총 지도부가 퇴진을 불사하고 강행하겠다는 '사회적 합의안' 은 이와 같은 결과를 불러올 뿐이며, 따라서 대의원 대회에서 그것을 저지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충분한 이유가 있는 일이다. 다만 그 방법이 반드시 옳았다고는 볼수 없다. 차라리 대의원 대회장 안에서 충분히 논쟁하고 그것이 불가하다고 판단될때는 정족수 미달을 위해 대회장 밖으로 철수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았을까? 철수한 후에 대회장 밖에서 집회를 가졌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수호 위원장을 비롯한 민주노총 지도부는 '소수 강경파' 들이 민주노총의 민주주의 질서와 전통을 훼손하고 대의원 대회를 망쳤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사회적 합의안에 대한 충분하고 진지한 토론조차 제대로 보장하지 않고 민주주의의 최하위 원칙인 다수결만 강조하며 밀어붙인것은 바로 그 지도부다. 민주노총 지도부의 강경파에 대한 제제 선언은 사회적 합의안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제거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폭력사태를 일으킨 양쪽 모두에 대해서 비난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공정하지도 않으며 문제를 해결할수도 없을것이다. 사회적 합의안은 노동운동을 약화시키고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질을 하향평준화 하는 결과만을 불러올 뿐이며, 그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분명하게 지지할 필요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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