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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노동자들은 무엇때문에 싸우는가?

공무원노조는 온전한 노동기본권 쟁취를 위해서 지난 8월 부터 투쟁을 준비해왔다. 8월 21일 임시 대의원대회에서 만장일치로 무기한 파업을 결의한 공무원노조는 내달 초 파업 찬반 투표를 거쳐 전면파업을 실시하기로 했다고 한다.


예견되었던 일이지만, 친일청산법이나 국가보안법 폐지 등의 사안을 두고 치열하게 싸우던 여.야 의원들은 공무원 노동자들의 투쟁을 비롯한 하반기 노동관련 쟁점에 대해서는 한목소리를 내고있다. 최근 이해찬 총리가 해외에서 '전두환 독재정권은 용서해도 조선일보는 용서할수 없다' 는 요지의 발언을해 파문을 빚고있는 모양이지만, 그러나 공무원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해서 이해찬 총리를 비롯한 정부여당의 가장 든든한 지원자는 조중동을 비롯한 주류언론들이다.


공무원 노동자들의 투쟁은 노동부가 지난 8월에 '공무원노조 법안'을 정기국회에 제출하겠다고 밝히면서 시작된 문제였다. 지금은 공무원 노동조합 관련 '특별법' 이란 딱지가 붙은 이 법안은 사실 지난 연말 공무원 노동자들이 반대한다는 이유로 유보된 관련 법안에서 전혀 달라지지 않은 법안이다.
도대체 왜 유보시켰는지, 반대하는 공무원 노동자들의 입장을 들어보기나 한건지 모를일이다. 이거야 완전히 눈가리고 아웅 아닌가.


이번에 노동부가 입법예고한 '특별법' 은 노동 3권 가운데 단결권과 교섭권만 보장한채 쟁의행위는 금지하고 있다. 또한 공무원 노동조합은 가입대상을 일반 노동법에 따라 '직무 성격상 사용자의 행위자'를 제외한 전 공무원을 대상으로 하는반면 특별법은 6급 이하로 한정시키고 있으며, 조직구성도 전국 단일조직이 아닌 2개 이상의 복수노조로 분할하여 공무원 노동자들의 집중된 힘을 저해하고자 한다. 노조 전임자 규정에서도 공무원 노조는 일반 노동법에 따른 유급 전임자 인정을 요구하는 반면 특별법에서는 무급 전임자만 인정한다고 하고있다.


전국 공무원 노조 김영길 위원장은 '(노동부 입법안은) 행동권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단결권조차 온전하지가 않으며, 단결권도 6급 이하만 허용하고, 그나마도 현재 직장협의회법상 가입 금지 대상으로 묶고 있는 인사·예산·회계 등은 조직 대상에서 제외시켜 규제와 분리를 핵심으로 하고있다','단체교섭권에 관련해서, 법령·예산·조례 관련 사항은 효력이 없다고 되어 있는데 법령·예산·조례에 안 걸리는 게 있느냐, 노동조합은 누가 뭐라 해도 일단 조합원의 권익 향상을 위한 단체인데 이건 노조를 하지 말라는것' 이라고 말하며 '(정부는) 행동권은 행정이 멈추면 국민이 불안해져서 안 된다 고 호도하는데, 내용을 보면 행동권만 문제삼는 게 아니' 라고 말하고 있다. (다함께 신문 38호)


공무원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해서, 아직 많은 사람들은 '철밥통' 을 지키려 한다면서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공무원이 고임금에 안정적인 직장이라고 하지만 IMF 이후 공공부문 구조조정 이란 명목하에 12만명의 공무원 노동자들이 퇴직당해야 했던것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당시 공무원 노동자들에게 투쟁조직이 없었다는것을 고려해보면, 결국 정부가 공무원노조에 노동3권을 온전히 보장하지 않으려 하는 진짜 속내는 '국민이 불안해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자신이 추진하고있는 신자유주의적 노동.경제 정책의 걸림돌로 기능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려는 것에 그 진정한 목적이 있는것이다.


정부는 공무원 노조가 온전한 노동기본권을 보장받게되면 행정이 마비되고 국가 전체에 혼란이 발생하는 것처럼 과장해서 말하고 있지만, 그렇다면 한겨례 손석춘 의원의 말대로 영국이나 프랑스의 '국가기능'은 이미 몇 차례나 '마비'되어야 했으며 국민도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어야 정상일 것이나 그렇기는 커녕 그들 공무원의 대국민 서비스는 우리보다 훨씬 선진적이다. 심지어 오스트리아, 덴마크, 핀란드, 독일, 룩셈부르크, 노르웨이, 스웨덴 과 같은 나라들에서는 군대에도 일정한 단결권을 인정하고 있으며, 경찰에 대해서도 23개국에서 단결권을 인정하고 있다. 공무원 노조가 주장하는 노동권의 인정범위 -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 등 노동3권 인정, 다만 공안직군에 대해서는 단체행동권 제한 가능 - 는 이러한 사례를 반영한 매우 '온건하고 현실적인' 요구안인 것이다.


정부는 '공무원이 파업하면 국가가 마비된다' 고 호들갑을 치면서도, 사태를 파업까지 악화시키지 않도록 하기위한 조취는 전혀 취하지 않고있다. 노동부 장관 김대환은 지난 9월 18일 공무원 노동조합의 대표들과 '면담' 을 가진다고 나섰다가 '정부 입법안은 문제없다. 대화할 필요없다' 고 못을박고 10분만에 회의장을 나가버렸다. 여기에 주류언론들은 노동자들의 투쟁이 불거질때마다 언제나 그랬듯이 노동자들에 대한 마녀사냥을 거들고 있다. 조선일보는 10월 17일자 사설에서  청주시 공무원노동자들이 노조와의 성실한 협의도 없이 막무가내로 근무시간을 조정하는 시장에 항의하여 한 퍼포먼스를 두고 '패륜' 이라며 비난했다. 연합뉴스는 10월 20일자 '전공노, 누울자리 보고 발을 뻗으라' 라는 시론을 통해 공무원 노조 관련 특별법이 '진일보' 한 법안인양 왜곡하는 기사를 실었다.
앞으로 공무원 노동자들의 투쟁이 다가올수록, 이들 주류언론들이 더 강력한 수위의 마녀사냥을 실시할것은 불을보듯 뻔한일이다.


공무원 노동자들의 투쟁은 철도-운송-택시 노동자들의 투쟁을 비롯해 비정규직 정규직화, 파병연장안 저지 등을 걸고 총파업을 벌일 양대노총의 투쟁계획에서 중심적인 역활을 수행할수 있을것이다. 정권과 주류언론의 노동자들에 대한 마녀사냥에 맞서 공무원노동자들의 투쟁을 일관되게 방어하고 함께 연대해서 투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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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정권의 생명연장의 꿈 - 비정규직 다음엔 이주노동자.

국내에 들어와 있는 이슬람 계통 불법체류자 중에도 주목할 만한 사람들이 있어 국가정보원, 검찰, 경찰이 체크하고 있다 (중략 )이들의 반한활동이 처음으로 포착된 것은 올 초 명동성당에서 열린 외국인 불법체류자들의 시위에서 “자진출국 전면 거부, 정권타도, 이라크 파병반대” 등의 구호가 등장하면서라고 한다.
( 조선일보 10월 3일자 기사 )


반한 활동을 하는 이들이 불법시위를 통해 불법체류자 단속에 대한 단순한 항의 차원에서 벗어나 “정권 타도, 이라크 파병 반대” 등 정치적 구호마저 들고 나섰다는 것은 결코 방관할 수 없는 일이다.
( 세계일보 10월 4일자 사설 )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불법체류자 중에 반한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심각한 우려를 자아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의 반한 활동이 포착된 것은 올초 외국인 불법체류자들의 시위에서 자진출국 전면 거부,정권 타도,이라크 파병 반대 등의 정치성 구호가 등장하면서부터라고 한다. 정부는 이들 가운데 주목할 만한 사람들을 체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국민일보 10월 4일자 사설 )


법무부가 밝힌 불법체류자의 반한활동 범위는 ▲한국의 체제와 정책을 부정하거나 한국인에 대한 적대감으로 한국의 부정적 측면을 강조하는 자 ▲테러 음모 또는협박 ▲국가정책에 반대하는 집회.시위를 선동.주도.적극 참가자 ▲정치적 주장을하면서 정부시책을 비판.오도하며 이를 선전.주동하는 자 ▲기타 국익에 현저히 위배되는 활동을 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되는 자 등이다.


그러나 체불임금 청산이나 사업장내 인권개선 요구 등 단순한 권리구제 요구는반한활동에서 제외됐다.
( 10월 3일 연합뉴스 기사 )


집권 초부터 노무현 정권은 '노동귀족론' 을 줄기차게 주장해왔다. 노동귀족들이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기 때문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이 팍팍해져 가는것이라고 말하며 열악한 근무환경과 박봉으로 사회적인 동정심을 유발하기 쉬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언급하며 노동운동을 타격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지난번 궤도연대의 파업이나 LG 정유 노동자들의 파업에서 보여지듯이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규직화와 처우개선을 포함한 '전 사회적인' 요구안을 들고 나왔을때 정권은 무조건적인 탄압으로 일관했다.


노무현 정권의 '비정규직 생각' 이 얼마나 얄팍한 것인지는 이번에 정부여당이 입법예고한 비정규직 관련법 (파견법, 기간제법) 에서 여실히 드러나 버렸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열린우리당 당사 점거투쟁을 통해서 드러난 정권의 비정규직 관련 입법안의 요지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우개선은 고사하고 그나마 있는 정규직 마져도 비정규직화 하려고 하는것이다. 노무현 정권은 처음부터 노동자 사이의 차별을 완화하려는 의도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비정규직 노동자들 스스로 말하듯이 "노무현 정부는 비정규직 문제를 대공장 정규직 노조를 공격하기 위한 소재로 활용하였을 뿐, 실제 비정규직 문제로 들어가면 철저히 자본의 입장을 옹호하고 있을 따름" 이며, ( 전국비정규직노조대표자연대회의(준) ) 전체 노동계급의 하향평준화 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이미 노무현 정권의 얄팍한 사기술 따위에는 넘어가지 않고 있다. 이번 입법안과 그에대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 때문에 일반 국민들도 정부의 비정규직 관련 정책들에 의구심을 품기 시작하고 있다. 그러자 정권은 마치 사회적인 동정심을 이용하여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이간질 시켰던 것처럼, 이번에는 민족과 인종에 대한 차별적인 감정을 이용하여 이주노동자를 '공공의 적' 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이라크의 무장 저항세력인 '알 카에다' 가 한국에 대한 테러위협을 발표하자마자, 정권은 불법체류 이주노동자 들이 '반한감정' 을 가지고 있어 테러단체와 연계될수 있다고 말하며 마녀사냥에 나서고 있다. 때를 맞추어 주류언론들 역시 사설과 기사를 통해서 불법체류 이주노동자들이 잠재적인 테러리스트라도 되는것처럼 말하고 있다. 이주노동자가 아닌 한국의 시민과 노동자들로 하여금 이주노동자에 대한 적개심을 품도록 여론조작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저들의 '반한감정' 규정은 대단히 모순적이다. 저들이 말하는 '반한감정을 가진 이주노동자' 의 공통적인 기준은 고용허가제 반대 등 정권과 정책에 반대하는 주장이나 시위를 하거나, 특히 이라크 파병 반대 등 정권의 안위를 위협하는 요구를 하는 경우이다. 그러한 정치적인 주장들은 정확히 말하자면 한국과 한국인 모두를 겨냥하는 '반한' 의 요구가 아니라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위협하는 정권에 반대하는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다수의 한국인들도 이라크 전쟁과 파병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 한국인들도 '반한감정' 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것인가?


노무현 정권이 이주노동자들의 반한감정을 들먹이며 국가보안법 까지 적용하겠다고 말하는 저의는 그들스스로 정의한 반한감정에 대한 규정에서 너무나도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들은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해서 항상 '밥그릇싸움' 이라 폄하하면서도 전체 사회제도의 개선이나 정치적 요구들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탄압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왔다. 그들이 정말로 두려워 하는것은 국민에 대한 테러가 아니라 자신들의 밥그릇, 바로 정권에 대한 비판과 도전인 것이다.


'알 카에다' 가 한국에 가한 테러위협은, 지난번 김선일씨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한국 정부의 파병방침 강행에 따른것으로 정권 스스로가 불러온 위협이다. 김선일씨가 살해당했을때 김선일씨의 부모님은 정부가 아들을 죽였다며 오열했다. 이번에 한국에 방한하여 반전강연을 하게 될 닉 버그의 아버지 마이클 버그씨 역시 부시와 럼스펠드가 자신의 아들을 살해했음을 분명하게 이야기 하고 있다. 노무현 정권은 마치 '불법체류 이주노동자' 들이 잠재적인 테러리스트인양 매도 하고 있지만, 국민에 대한 진정한 테러리스트는 바로 노무현 정권 그 자신임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노무현 정권은 낮은 지지율로 인한 불안감을,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이주노동자들을 차례로 언급하며 노동계급 사이의 갈등을 부추기는 방법을 통해서 극복하려고 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정권의 기만적인 술책을 폭로하고 정권과 언론의 공격에서 이주노동자들을 보호해야 한다. 열린우리당의 비정규직 관련 입법안에서 보여지듯이 비정규직, 이주노동자 들에 대한 공격은 바로 노동계급 전체에 대한 공격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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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코포타리즘?

사회적 코포타리즘?

 

프레시안에 실린 최병천씨의 주장 링크 -

"노동운동, '네덜란드-스웨덴 모델'에서 대안 찾자"


지난번 박승욱씨의 "왕자병 걸린 노동운동" 이후로 프레시안 에서는 지속적으로 노동운동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민주노동당 의정지원단 부장인 최병천 씨가 '거시적 코포타리즘' 을 주장하는 글을 올렸다. 나는 그가 말하는 거시적 코포타리즘이 노동운동은 물론이고 전반적인 삶의 질을 하향조정하는 결과만을 불러올것이라 판단하며 그가 제시한 네덜란드와 스웨덴 모델을 통해 그러한 '합의' 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말하려고 한다.


최병천씨는 현재의 노동운동이 노동계급 전체를 대표하는 계급적 대표성을 획득하고 있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100인 미만 사업장' 의 노동자, 다시 말해서 조직되지 못한 89% 의 노동자들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비정규직/중소영세노동자/여성노동자 들이 참여하고 그 이해관계를 반영할수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해법으로 거시적 코포타리즘, 즉 개별 사업장이나 연맹 단위가 아니라 '포괄적인 협상', 즉 '포괄적인 사회적 합의' 를 대안으로 말하고있다.


그러나 그 포괄적인 사회적 합의는 진정한 의미에서 이주노동자,비정규직,중소영세노동자,여성노동자 등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의 질을 하향평준화 시켜 '노동자들 사이의 상대적 박탈감' 을 완화시키는 역활만을 수행할수 있을 뿐이다. 당연히 그것은 계급적 대표성을 획득하는 방법이 될수 없다. 계급적 대표성은 다같이 못산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얻어지는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대안으로 주장하는 사회적 코포타리즘은 서유럽의 복지국가들에서 나타나는 그것이다. 그가 제시하는 스웨덴식 , 혹은 네덜란드식 노사관계 모델의 핵심은 정규직 노동자들이 많은 부분을 희생하고 양보하여 비정규직 노동자를 비롯한 사회 전반적인 복지정책의 향상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장미빛 환상으로 바라보는 스웨덴과 네덜란드의 상황은 '모든 노동자들이 희망을 잃어버리고 있는' 중이라는 점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그는 스웨덴에서 배우자고 한다. 스웨덴이 낮은 실업률, 높은 1인당 국민소득, 좋은 복지제도 등을 성취했었던 것은 사실이며, 사민당이 매우 오랫동안 스웨덴의 지배정권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그 사민당은 1938년에 노동조합과 사용자 연합이 파업 금지등 노동자들에게 불리한 '살쯔요바덴' 협약을 체결하도록 만들었다.  


1947년에 사민당은 '연대임금정책' 을 추진하는데, 금속노조의 숙련 노동자들이 양보해서 저임금 노동자들과 '같은 수준의 임금을 받으' 라는 것이 사민당의 '연대임금정책' 의 골자였다.
당연히 금속노조의 노조원들은 이에 맞서 싸웠고 금속노조가 탈퇴하면서 사민당의 연대임금정책도 파행을 겪었다.


스웨덴 모델이 높이 평가받는 것에는 시장을 규제하고 인간의 복지나 사회적 가치·연대 등등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스웨덴 모델은 사람들이 신자유주의를 거부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긍정적인 부분이 존재하는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스웨덴이 그렇게 할수 있었던것은 전후 호황기에 자본주의를 규제하고 더 인간적인 자본주의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조건, 당시 서유럽보다 더 큰 규모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경제적 조건, 즉 자본주의가 노동자들에게 양보를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수익성이 높을 때만 가능했었던 일이며 일시적인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전후의 세계적 호황과, 2차 대전 당시 중립국의 길을 택하면서 세계 대전의 피해와 전후 군사비 지출 부담을 줄여, 경쟁 우위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스웨덴도 1970년대 오일 쇼크에 이은 세계 경제 위기를 벗어날 순 없었다. 경제가 불항에 빠지고 이윤율이 떨어지면서 그동안 이루어두었던 성과들도 다시 빼앗기고 있다. 스웨덴의 공식 실업률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9퍼센트를 넘고 있다. 특히, 유럽과 세계 시장의 통합도가 증가하면서 증대된 경쟁 압력에 사민당은 우경화하며 노골적으로 자본가의 대변인 노릇을 하고 있다. 1985년에 는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대규모 투쟁이 벌어졌다. 지금 스웨덴에는 다양한 사회세력 간의 조화가 아니라, 계급투쟁과 높아진 실업률과 복지 축소를 둘러싼 사회 갈등이 여전히 살아 있으며 그것은 국가 경제력에 의존해 이리저리 표류할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틀 내에서 사회주의적 정책을 추진하려고 하는 사회민주주의 기획이 본질적으로 내재한 한계라고 할수 있다.


또다른 사회적 코포타리즘의 예로서 최병천씨가 거론한 '네덜란드' 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네덜란드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은 유럽에서 가장 짧은 노동시간을 자랑한다. 네덜란드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을 100으로 놓을 때 미국 노동자들은 140이다. 주5일 근무제는 1960년대부터 시행됐고, 보통 제조업 노동자들은 한 달간 여름 휴가를 즐긴다. 그리고 그 공백은 용돈을 벌기 위한 대학생들이 메운다.
회사 사정이 어려워 노동자들이 해고될 때는 그들의 재취업과 당장의 생계 보장을 위한 계획을 노조와 사용자가 함께 마련한다. 민주노동당이 주장하는 무상교육(고등학교까지), 무상의료가 거의 완전하게 실시되고 있고, 부자들이 세금을 더 많이 내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네덜란드역시 갈수록 심해지는 국제경쟁과 경기불황 속에서 혼자만 평화로울수 있는 '섬' 은 아니다. 네덜란드는 2001년부터 미국과 독일, 이 두 주요 교역국가의 경제가 어려워지자 극심한 불황에 빠졌다. 1990년대 중반 3퍼센트대의 견실한 성장을 보이며 서유럽에서 가장 부러움을 많이 샀던 것은 옛날 얘기가 돼 버렸고, 2001년 1퍼센트 이하의 성장을 보인 후 하강곡선을 그려 작년에는 마이너스 0.8퍼센트 성장에 머물렀고, 올해와 내년에도 1퍼센트대에 머무를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초 출범한 네덜란드 정부는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제2차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재정 삭감을 감행하고(약 25조 원), 모든 노동자들의 임금 동결을 요구하고, 연금제도 변경 등 사회복지 부문의 재정 지출을 낮추기 위한 대수술에 들어갔다. 삭감된 재정은 대부분이 사회복지에 관계된 예산이었고, 이에 노조들은 저소득층과 사회적 약자들이 일방적으로 고통을 전담하게 된다는 점을 들어 정부에 대한 전면 투쟁을 선언했다. 그러나 평 조합원 노동자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은 아무런 성과도 얻어내지 못한채 곧 손쉽게 항복해 버렸다.


사회적 코포타리즘, 사회적 합의주의에 순응해온 노동조합은 투쟁을 지속할 힘이 없었던 것이다. 정권과 보수언론들이 그토록 찬양하는 고용안정과 임금동결을 맞바꾸는 사회적 합의, 즉 1982 년의 바르세나르 협약이후 노동조합들은 20 년 만에 투쟁에 나서려 했지만 그럴 힘이 없었다. 바르세나르 협약으로 노동자들이 더 좋은 조건을 가지게 된것도 아니었다. 1982년 이후 노동자들은 복지비 삭감, 임금 억제, 노동시장 유연화 등으로 생활 수준이 더욱 나빠졌다. 이 때부터 전후 가장 인상 깊은 성과를 거둔 네덜란드의 복지 체계가 뒤흔들리게 됐다. 노동당과 보수당의 좌우 연정 '자줏빛 동맹' 이 노조의 협조를 얻어 복지 제도를 무자비하게 공격한 결과, 경제산출에서 보건과 교육 예산이 차지하는 비율이 미국보다 더 낮아졌다. 의료비 삭감으로 병원 환자 대기자 수가 늘어남에 따라 중환자실이 부족해 중환자들이 죽어가는 일이 벌어졌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호황이 찾아왔지만 빈부격차는 증대했다. 이 때부터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백만장자 수가 폭발적으로 증대한 반면, 노동자들의 임금은 물가상승을 따라잡지 못했다. 임금 억제 대신 고용이 증가했다는 얘기도 과장이다. 1982년 이후 늘어난 고용의 75퍼센트가 시간제나 임시직 고용이었다. 2001년 현재 네덜란드의 시간제 노동자 비율은 전체 노동자의 33퍼센트로, 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다. 네덜란드의 고용안정은 비정규직 노동자를 늘림으로 얻어낸 고용안정에 지나지 않는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질 실업률은 10% 를 상회한다. 네덜란드의 '사회적 코포타리즘' 은 노동운동을 저하시켰을뿐 아니라 복지제도마져 파괴한 것이다. 네덜란드 정부는 노동자들의 약점을 알게되었고 이제 정부는 노동시간을 하루 최대 12시간, 주당 60시간으로 연장하는 충격적인 계획을 들고 나왔고, 실업과 산업재해 기금 수혜자 제도를 엄격하게 적용하려고 하고있다.


최병천씨는 노동운동 진영 내부에서 '사회적 합의' 를 배제하려고 하는 이유가 '98년 노사정대타협의 패배에 대한 경험적 학습효과' 인것처럼 말하면서, 사회적 합의주의가 마치 대기업과 비정규직 노동자 모두의 이해관계를 충족시켜줄뿐 아니라 사회 복지에도 기여할수 있을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그가 바라보고있는 서유럽의 사민주의 국가들의 경우에서 보듯이, 사회적 합의에 기반한 복지체제는 국제적 경기의 호황, 또는 불황에 영향을 받을수 밖에 없는 경제사정에 따라 그 동안 얻어 낸 양보도 도로 빼앗기기 마련이며 그것은 사민주의의 근본적 모순이기도 하다.


사회적 합의에 따르는 방식은 제한적이고 일시적인 성과를 가져올뿐이며, 그렇기 때문에 제한된 임기내에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줄 필요성을 느끼는 관료나 제도정치인들에게는 환영받을수 있을 것이며 그러한 부분을 '현실적' 이라고 선전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로 그런 이유때문에 일반적인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대안으로 자리잡을수 없으며 네덜란드의 예에서 보듯이 오히려 그것은 운동을 파괴하고 길들이는, '체제내화' 의 역활을 수행하기 마련이다.


그는 박승옥과는 다른 방식의 '대안적 해법' 을 제출하고자 하려 한다고 했지만, 체제와 권력에 도전하지 않고 사회적 합의에 의존하는 그런식의 해법은 결과적으로 박승옥씨의 해법과 맞다아 있다. 그것은 또 어차피 진정한 대안이 자본주의 체제의 완전한 대체밖에 없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전히 자본주의를 무너뜨리는것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와 적대적 관계에 있을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이 중심이되어 일어날때만이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지금 현시점에서 해야할일은 노동운동이 이러한 체제변혁적 관점을 가지고 보다 더 공공성을 가지는, 결과적으로는 노동자들이 직접 권력을 쟁취할 있도록 노동운동의 방향을 제시하고 함께하는 것이 될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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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에 실린 박승욱 씨의 '한국 노동운동, 종말인가 재생인가' 에 대한 반론

프레시안 에 실린 박승욱 씨의 '한국 노동운동, 종말인가 재생인가' 에 대한 반론

 

프레시안에 실린 박승욱씨의 원문 링크

"'왕자병' 걸린 노동운동, 이대로 가면 죽는다"
[쟁점]선배 노동운동가가 본 현 노동운동의 위기, 원인, 해법

 

프레시안 9 월 2 일자에 박승욱 씨의 '한국 노동운동, 종말인가 재생인가' 에 관한 기사를 봤다. 그는 원본의 글이실린 '당대비평' (2004 년 가을호) 에서 노동운동의 위기는 그 내부적인 것에서부터 찾아야 한다고 하며 몇가지의 주장을 하고 있기에 이에대해 반론을 하고자 한다.


주장들에 대한 구체적인 비판에 들어가기에 앞서, 그의 주장 전반과 그가 대안으로 세우는것을 통해서 봤을때 그는 노동자들이 정치투쟁을 포기하고 시민운동과의 협조하에 소규모 공동체 위주의 자기헌신적 운동에 매진하기를 바라는듯 하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 전반적인 변화를 바라는듯한 그 자신의 앞선 주장들과 모순되며, 권력에 대한 도전을 포기함으로서 현재 정치.경제적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에게 '안전망' 을 제공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라는점을 말해두고자 한다. 이후 진행될 글중에서 왜 그의 주장이 그러한 결과만을 초래하게 되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고자 한다.


우선 그가 말하듯 노동조합의 조직율이 '1989년 이래 꾸준히 감소해 전체 노동자의 12%도 안 된다.' 는 현상 자체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원인에 대해서 그는 침묵함으로서 전체 글의 맥락과 서로 모순된다. 그 스스로도 인정하듯이 노동조합의 조직율이 낮아지는 가운데서도 민주노총의 조합원수는 1995년 406,748명에서 2002년 685,147명으로 무려 28만 명 정도 늘어난반면 같은 기간 한국노총의 조합원수가 1,208,052명에서 876,889명으로 줄어들었다. 만약 그가 주장하는것처럼 '대기업 노동자 위주의 노동운동이 스스로의 위기' 를 불러왔다면, 어떻게 '대기업 노동운동' 위주의 민주노총 조합원의 숫자는 늘어날수가 있었단 말인가? 그는 '단순히 상급단체를 바꾸었기 때문' 이라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왜 노동자들이 상급단체를 ( 스스로 노동운동의 위기를 불러오고있는 ) 민주노총으로 바꾸길 원했는가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할것이다.  


조합율이 낮아지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임시직, 비정규직 노동자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임시직, 비정규직 노동자는 그 노동의 특성상 조직화 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한국에서 불안정 고용이 본격화한 것은 1980년대 초부터였으며, 1987년에 임시일용직 비중은 전체 노동자의 45퍼센트에 이르렀다. 그러던것이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여파로 노동운동이 힘을 얻게 되면서 크게 줄어들었다. 임시일용직 비중은 1994년부터 다시 늘어나기 시작했고, 특히 IMF 때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가 통과되면서 급격히 늘어난 것이다. 다시말해 노동운동이 강력하게 전개되고 힘을 얻을때에는 기존의 임시직, 비정규직도 정규직으로 전환시킬수 있으나 투쟁이 어려운 상황이 되거나 노동자들 스스로 포기할때는 그 반대의 현상이 일어나 정규직 노동자가 비정규직으로 내몰리게 되며, 그에따라 조직율도 감소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나라만의 현상이 아니다. 한때 떠들석하게 거론되었던 스웨덴식 노사관계에서도 스웨덴의 노동조합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날때는 비정규직이 감소했으며 힘을 잃었을때는 증가하는 모습을 볼수있다. 스웨덴뿐만 아니라 프랑스,영국 등 세계 모든나라에서 비정규직의 증가는 노사간의 힘의 균형에 좌우되기 마련이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노동자가 '자기희생' 하면서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줬을때 전체 사회가 '아, 노동자들 참 멋지다.' 하며 감동받아서 배풀어주는것이 아니며, 사회적 합의에 충실하거나 국가경제발전에 매진할때 일어나는 일도 아니다. 노동자들의 강력한 투쟁으로 노사간의 힘의 균형에서 우위를 차지했을때만이 정규직화를 쟁취할수 있다는것은 이미 국내외의 노사관계에 대한 진행사항에서 충분히 입증되고 있는것이다.


다만 현상에서 정규직 노동조합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적극적으로 조직하고 함께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부분들은 아쉬운 부분들이긴 하다. 하청사업장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청소년노동자, 여성노동자, 이주노동자 등을 조직하고 이들에 대한 보호를 강화하자고 하는 박승욱씨의 주장에대해 반론없이 찬성한다. 그러나 그 방법은 지속적으로 꾸준하게 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연대를 제안하고, 몇몇 노동조합에서 보여주듯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강력한 연대투쟁을 통해 함께승리하는 노동운동을 건설할때 가능한 것이지, 그가 말하듯 '권력지향형 노동운동의 포기' 일수는 없는것이다.


그는 또 임단협 이외의 사안들, "노동자 생활조건, 나아가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대한 대안의 정책 부재" 가 전투적인 임단협 투쟁의 성과를 역으로 상쇄시켜 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을 강력하게 만들어주는 '노동자들의 대학' 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노동자 스스로의 이익을 지키기위해 싸우는 한계도 가지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들과 함께 사회 전체의 변혁을 위해 싸워나갈 '정치조직' 이 필요한 것이다. 


한국의 노동자운동은 비록 맹아적인 형태이기는 하지만 체제 자체에 대한 저항인 반자본주의 운동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도 안된다. 박승욱씨는 참교육, 참의료는 어디로 갔느냐고 비아냥 거리지만 전교조가 학교안의 문제를 넘어서 교육환경의 문제를 거론하고 있고, 가스,전기,통신,철도 등 공공서비스 영역 노동자들이 고용불안의 문제를 넘어 사유화 자체에 반대하고 환경문제에 대한 제기 ( 금번 LG 칼텍스 노동조합의 경우에도 보여지듯이 ) 까지 나서고 있으며, 지난 보건의료노조의 파업시 ( 서울대병원 등 ) 과도한 입원료의 시정등을 비롯해 사회 전반적인 의료공공성을 앞세웠던점, 지하철노동조합 파업시 승객에 대한 안전과 과도한 요금인상의 철회요구등 공공성과 관련된 투쟁들은 지속적으로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것이다.


박승욱씨는 또 "노동운동이 정치세력화 된다고 해서 현재의 노동운동 위기가 해결된다고 생각하기도 어렵고 극단적으로 노동자들이 권력을 가진다고 해서 현재의 한국 사회가 더 나아진다고 볼 근거는 전혀 없다." 라고 말한다. 이런 태도는 말하자면 '세상이 왜 이따위야!' 하고 허공에 대고 주먹한번 휘두르고는 집에가서 발닦고 자는 행태와 다르지 않다. 세상이 이따위가 되어버린 원인이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것이 이윤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자본주의체제가 아직 세상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는 어떻게 무너뜨려야 하는가? 나는 그 해답이 노동자들이 그 스스로의 힘으로 권력을 잡고 자신과 사회의 모든 억압받는 이들을 함께 해방하는 사회주의적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박승욱씨는 왜 '노동자들이 권력을 가진다고 해서 현재의 한국 사회가 더 나아진다고' 생각하지 않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야 할것이다.


그는 '생태' 와 '시민' 이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환경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소중히 여겨야함은 더이상 말할것도 없을것이다. 그러나 생태를 중요하게 여기는 녹색운동의 방향이, '자연은 순수한 이미지로 보존되어야 한다' 는 식으로 나아가야 하는것은 아니다. 자연은 인류와 함께 진화하는것이며 상호 연관되어 존재하는것이지 독립적인 절대 순수의 이미지로 존재하는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과 자연은 상호간에 조화로운 발전을 추구해야 하는 관계이지,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양보와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그런 관계가 아닌것이다. 그런점에서 볼때 '사회주의는 성장과 발전 이념이라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쌍둥이' 라고 주장하는 박승욱씨의 관점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것이다. 그의 말대로라면 가장 바람직한 운동의 방향은 인간에게 금욕을 강요하는 그런 것이어야 한단 말인가?


환경과 자연에 대한 대규모적인 공격및 파괴는 자본주의가 성장하면서 찾아온 것이다. 오로지 이윤만을 고려하는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이 자연과 환경에 대한 무분별하고 무절제한 파괴를 불러온것이며, 자본주의 이전의 시대에는 그러한 양식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의 인류가 자본주의 이전의 시대로 돌아갈수 있는가? 그렇지는 않을것이다. 결국 환경문제에 있어서도 자본주의의 극복이 선행되어야 하며, '민주적 계획경제' 에 의거하는 사회주의적 경제체제가 그 진정한 대안이 될수있을것이다.


노동운동이 시민운동과 연대하는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 연대의 형태가 시민단체의 관점과 정치를 따라야 하는것은 아니라는것이 문제다. 그는 맑스주의는 지나치게 계급을 중시하고 때문에 배타적이라고 말하지만, 여기서도 문제는 자본주의에 대한 관점과 태도에 달려있다. 운동에 있어 왜 노동계급이 중요한가? 그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소외받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노동계급이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결코 자유로워 지거나 소외에서 벗어날수 없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자본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노동계급만이 자본주의를 뿌리부터 무너뜨릴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맑스는 노동계급이 '스스로를 해방함으로서 다른 이들을 해방시키는' 역활을 수행한다고 지적한 것이다. 노동계급의 그러한 역활때문에 사회변혁에 있어 노동자들은 중심에 있을수밖에 없다. 그것은 시민단체들과 연대할때도 마찬가지다. 연대의 정치적 방향과 운동에 대한 관점은 노동계급의 그것이 되어야 한다.


시민단체들의 운동은 충분히 존중되어야 하며, 박승욱씨가 지적하듯이 매우 열성적이고 헌신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만이 다는 아니다. 기본적으로 시민운동은 계급통합적이며, 그 때문에 운동의 관점과 방향을 잡는데있어 때때로 보수적인 방향으로 흐르기도 한다. 시민운동을 형성하는 인자들이 비록 '부르조아' 가 아니라 하더라도, 사회의 급격한 변화에는 거부감을 느끼는 중간계급들이 다수 참여하기 마련이며 그때문에 체제에 안주하고자 하는 양상을 보인다. 그것은 참여연대등 시민운동의 주요한 단체들이  '개혁적인 이미지' 를 이유로 노무현 정권을 지지하는것에서도 드러난다. 특히 언급할만한 것은 지난 대구 시내버스 파업시에 지역의 시민단체들이 보여준 태도다. '노동조합이 요구하는 버스의 공공성은 현실성이 없다' 고 주장하던 그들의 보수성은 시민운동과 노동운동의 연대에 있어 어떤 관점으로 접근해야 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폭력시위에 대한 입장도 짚어볼만한 문제다. 한마디로 박승욱씨가 말하는 폭력시위에 대한 입장은 시위에 있어서 폭력사태가 일어나는 원인과 과정을 무시한 도덕적 강박증의 그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평화적으로 행진한다면 저들이 폭력을 사용하지 않을까? 그렇지는 않다. 작년의 노동자대회 이전에 벌어졌던 수많은 폭력사태에서 집회 참가자들은 그가 그렇게도 혐오하는 쇠파이프, 화염병을 사용하기는 커녕 휴대하지도 않았다. 박승욱씨가 문제삼는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시위의 폭력사태가 일어나는것을 문제로 하는것인가, 아니면 시위대가 폭력을 사용하는것을 문제로 삼는것인가. 만약 후자라면 나는 '시위참가자가 경찰의 진압봉에 두들겨맞아 피 흘리는 모습을 보여주어 여론의 동정표를  얻어내려는' 위험한 의도와 전술을 그가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의심할수 밖에 없는것이다.


맨 앞에서 말했지만 박승욱씨의 주장은 내용 곳곳에서 사회 전체의 변혁과 공공성을 위한 투쟁을 언급하면서도 그것을 구현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사회 전체의 변혁이 아닌 일부 논점이 되는 정책 (  환경문제 라든가 )에 있어서의 변화, 그것도 근본적인 변혁이 아니라 권력에 대한 도전을 회피함으로서 지배층의 도덕성과 아량에 의존하는 제한적인 변화만을 얻어낼수 있는 방법을 제시함으로서 그 자신의 관점이 모순적인것을 보여준다.


공공성을 띈 사회전체의 변혁은 극히 소수의 이익을 위해 다수의 인간과 자연을 착취하는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극복과 그 대안이 될수있는 사회주의체제의 수립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있을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 자본주의를 무너뜨리는것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와 적대적 관계에 있을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이 중심이되어 일어날때 가능한 일이다. 비록 우리 노동운동이 아직은 완전하게 이러한 태도를 취하고 있지는 않지만, 신자유주의의 공세를 겪으면서 점점 더 많은 노동자들이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 라는 관점을 가지고 운동에 나서고 있는 것은 분명 고무적인 일이다.


우리가 해야할일은 노동운동이 이러한 체제변혁적 관점을 가지고 보다 더 공공성을 가진 강력한 투쟁에 나서도록 고무하고 보수우파들의 공격으로부터 이 운동을 보호해야 하는것이지, 그들의 말장난에 입맞추어 대기업 노조가 문제라는둥, 정치권력에 도전하는것이 부질 없다는둥, 폭력시위가 문제라는둥 의 이야기를 하는것은 아니다. 그것은 운동을 성장시키는것이 아니라 운동을 죽이는 것이며, 그러한 입장으로 사회변혁은 아득한 꿈으로만 남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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