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다지리산

한달 전부터 짜왔던 계획에 따르면 지금은 노고단을 넘어 지리산 어디쯤 있어야 한다.

같이 갈 사람을 모으고, 서로 어렵게 일정을 맞췄는데, 이럴수가. 느닷없이 태풍 때문에 입산을 통제한다는 연락이 왔다.

 

지리산과 운때가 안맞나보다.

일정을 취소하고 엠티나 가자고 했는데,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확인해보니 어제 입산통제가 풀렸다. 국립공원에 전화했을 땐 오늘까지 통제될거라며... ㅠㅜ

 

아..정말 아쉽네.. 언제 또 이렇게 다같이 시간을 맞춰볼 수 있을까..

 

시간 많은 사람들만 엠티갔다 지리산 오르기로 했다.

 

얼마나 부덕한 사람들이 모였으면 산신이 노하셔서 태풍을 불렀겠느냐며,

이러니 운동이 망한다며 푸념했다.

2010/08/12 08:23 2010/08/12 08:23

박헌영 평전

지난 여행 때, 박헌영 평전을 읽었다.

 

한국의 공산주의 운동사를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에 이런저런 책을 뒤적이는데, 박헌영에 대해 모르고서는 흐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겠단 생각이 들어 읽어봐야겠다 맘을 먹었다.

 

박헌영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평가를 떠나, 그 모진 시기를 생존한 것 만으로도 경이로웠다.

무엇이 그 사람들을 버티게 했을까? 무엇이 사람을 그토록 잔혹하게 만드나..

버티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오류를 남겨선 안되었을테고, 자신이 믿고 있는 것 역시 오류여서는 안되었겠지.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어느만큼의 신념을 갖고 그것에 헌신하는지가 항상 궁금하다. 나에게 불신이 배어있다.

 

그 조그만 자리를 두고도 파벌싸움이 끊이지 않았던 것은 서글프다. 그런데 그 파벌싸움 또한 진심에서 비롯되는 것이었으리라고 생각해보면 힘이 빠진다. 인간이란 서로 속을 완전히 내보일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어긋날 수 밖에 없는걸까? 이렇게 근본적으로 이러저러하다는 답을 구하려 하면 지금 발딛고 있는 것 모두가 무가치해진다. 스탈린은 스탈린 나름의 진심이었을까? 김일성은? 아니었을거야. 그러니 선을 긋는 건 가치없는 게 아니야. 정말? 모르겠다..

 

숙청은 마음이 너무 무거워지는 단어다. 나름 명망가들도 숙청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된 사람들, 어느 길거리에서 변명한 번 못해보고 죽었을 사람들, 이름조차 남아있지 못한 사람들.. 한 사람의 생명이 개미만큼 가벼워진다. 그런 작아짐은 또 한 번 무력감을 느끼게 한다. 대의를 위해서 라든지, 그런 거 아니라는 거 다 알잖아..

 

해방 이후 오히려 더욱 운신할 폭이 좁아지고, 일제강점기보다 더한 절멸의 위기 앞에서 그들은 절망하지 않았었을까? 남로당.. 이현상.. 빨치산..  올해 지리산을 가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빨치산이다.

한국전쟁을 결정한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를 떠나, 그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해방을 위한 전쟁으로 생각했으리라는 것, 최소한 빨치산들은 자신들이 구조되기를 바랬으리라는 것을 알게 됐다. 한국전쟁에 대한 해석의 차이는 남침이냐 북침이냐를 가르는 정도에서만 찾고, 침략 자체가 비윤리적인 일이었다고 별다른 의심없이 받아들여왔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 어느 쪽이 먼저 침공했느냐는 무자르듯 판단할 수 없고, 핵심적인 문제도 아니다. 당시 정세에서는 조건에 따라선 정말 계급투쟁으로서 내전이 될 수도 있었을 거다.

그래서 필요한 질문은 이런 계급투쟁으로서의 전쟁은 올바른가? 저 사람들이 죽어야만 혁명을 할 수 있다면 그 혁명을 해야하는 건가? 저곳을 거치지 않는 길은 없는 걸까? 누구 말마따나 계급투쟁은 장난이 아닌데, 그곳에서 평화를 이념으로 가진다고 대항폭력이 아닌 다른 정치가 가능할까?

 

북에서도 버림받은 채 지리산에 최후까지 고립되었던 이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한사람, 한사람 삶마다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묻혀 있을까. 하지만 또, 이런 이야기들이야 얼마나 많았을 것이며 앞으로도 많을 것인가.

 

박헌영 평전을 읽고나서, 우연히 책을 들추다 조정래의 아리랑을 얼핏 읽게 되었는데 이현상이란 이름이 나온다. 그 내용들이 예사로 읽히지 않았다. 알고 읽어야 그만큼 보인다.

 

여운형에 대해서도, 조봉암에 대해서도 읽어봐야겠다.

'한국 공산주의운동사 연구'는 논문 모음인데, 무턱대고 읽기엔 너무 난해하다. 논문 형식이라 어떤 하나의 입장으로 죽 서술하지 않고 비교를 위해 다른 입장들을 교차해서 보여주는데, 애초 그 시기에 대한 아무런 배경지식이 없는 사람으로서는 '뭐 어쩌라고'만 연신 튀어나온다.

우선 사람 중심으로 읽는 게 더 좋겠다.

2010/08/10 23:12 2010/08/10 23:12

지나간다성별화된 권리를 위한 여/남 연대 촉구

푸우님의 [여성연대의 촉구] 에 관련된 글.

 

언제나 단초 수준의 고민이어서 잘 전달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일단 적어볼게요.

 

여성이 남성의 잔유물로서 섹슈얼리티화되어 있는 것이 문제이고, 그 섹슈얼리티를 전화시킬 기획이 필요한 것일텐데, 그 섹슈얼리티가 애초 여성집단에서 따로, 남성집단에서 따로 구성되는 것인지, 그리고 인위적인 노력으로 그것이 가능한 것인지(예를들면 여성집단만의 대항문화를 만들어내는 것 - 이것은 사회 전체의 이데올로기와 독립되어 있을 수 있는가, 그것이 가능하다고 가정하는 것은, 개인을 집단에서 분리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근대 자유주의 법체계가 상정하는 인간에서 비롯한 산물이지 않은가)에 대해 의문이 있습니다. 한 인간이 남성이나  여성으로 주체화되는 과정은 전사회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여성만이 다른 성에게 대상화되는 현실 또한 '남성'이 만든 게 아니라, (그 남성이 포함되어 있는) 젠더중립적이지 않은 사회가 만든 것입니다.

 

서로 다른 주체화경로를 개발하는 페미니즘은 일종의 대항운동으로 진행되기 쉬운 것 같습니다. 대항문화운동은 사회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개인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그 해결 방법을 자유로운 개인(혹 전체와는 분리된 집단)을 상정하는 데에서 찾는 역설을 갖습니다. 실제 언니네 같은 공간에서 여성들이 말하는 공간이 열렸을 때, 외부의 남성들은 그 이야기들을 자신의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키는 데 활용했을 뿐입니다.

 

성적 차이가 제대로 발현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매개하는 보편적인 시민권이 필수적고, 이 때문에 보편적 권리(성별화된 권리)로 구성되는 페미니즘을 고민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그 공동체가 갖고 있는 공통의 양식이 전화되어야하고, 페미니즘은 언제나 공동체 전체에게 발언하는 운동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발언이 토론가능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정치가 가능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 반성과 성찰의 윤리가 공동체에 요구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반성을 어떤 개인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공동체가 어떻게 성찰과 반성을 축적해나갈 것이냐는 문제제기입니다. 그리고 만약 어느 집단에 무엇인가 축적 될때, 그것이 사회 다른 영역에도 적용될 수 있는 보편성을 가질 때에야 그것이 유효한 전략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도 어떤 개인의 사과가 이루어지는 것 자체는 공동체의 의식이 전환되는 데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하고, 사과가 이루어지기까지의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푸우님의 결론, 여성들의 글쓰기, 여성들의 연대 등을 통해 여성을 고유한 권리를 갖는 주체로서 섹슈얼리티화시키는 것, 에 동의하고, 그 작업을 누가 할 것이냐에 대한 고민을 끄적였습니다.(물론, 짐작하겠지만, 중립적인 입장에서 함께 고민하자는 얘기를 하는 건 절대 아닙니다.)

 

 

이 글을 적는 저 또한 남성이고, 글을 적기 전 매 순간 갈등하면서 제가 무엇을 이해하는지, 동감할 수 있는지에 대해 되짚어보곤 합니다. 항상 자신 없네요.ㅋ 그래서 직접적으로 논란이 됐던 글에 댓글을 달지는 못했습니다. 그게 계속 맘에 걸리고, 말은 부왕부왕 하게 했지만, 결국 남성인 내가 여성과 어떠한 연대를 할 수 있을지 미심쩍곤 합니다.

2010/08/10 13:38 2010/08/10 13: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