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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10/31
    병원에서 만났던 그사람들
    젤소미나
  2. 2005/10/31
    무서운 고객관리
    젤소미나
  3. 2005/10/31
    반보기도 못하는 추석
    젤소미나
  4. 2005/10/31
    덜컹덜컹
    젤소미나

병원에서 만났던 그사람들

문득 엄마가 병원에 있을 때 만났던 사람들이 기억이 났다.
엄마는 신부전증으로 95년부터 현재까지 투석을 하면서 병과 싸우고 있다. 초반기인 95, 96년에는 자주 입원을 했고 대학생이었던 내가 엄마 병수발을 들었던 기간이었다.
그때 만났던 사람들인데 오늘 유난히 기억이 새롭게 난다.
엄마와 같은 병을 앓고 있던 그언니는 나보다 3~4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결혼한지 2년 정도 된 새댁이었고 아기가 있었다.
신부전증 환자들은 노폐물을 일반인들보다 걸러내는 일이 힘들어서 얼굴색이 거멓게 변하는데 그언니는 얼굴색이 우유빛이었다.
남편은 트럭운전사였고 언니와 같은 병실에 2달인가를 있었는데 내가 얼굴을 본 것은 2번이 다였다.
알고보니 언니와의 결혼생활에 진력을 내고 있던 중이었던가 본데 병실에 와서도 보호자 침대에 누워 잠자기에 바쁜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난폭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말이 없는 편이었다.
그에 비해 언니는 섬세하고 민감한 성격으로 가끔 혼자 울기도 했고 병수발을 들고 있는 어머니에게 성질을 내기도 했다. 남편이 왔다가 간 날은 더했다. 언니의 어머니는 계속 눈치를 보면서 미안해 했기 때문인지.
어느날 나도 낮잠에 까무라져서 깼더니 창가에 우두커니 앉아서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그모습이 참 잊혀지지가 않는다. 신부전증이라는 병은 행동반경을 조이고 불치병이기 때문에 평생 투석을 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받아들이기도 힘들다. 그언니는 신부전증의 가장 큰 적인 당뇨병까지 있었으니.
결혼해서 행복한 신혼을 맛보기도 전에 힘든 몸으로 아기를 낳고 무심한 남편때문에 맘이 상하고 늙은 어머니가 젊은 딸 병수발을 들고 있으니 그 맘이 오죽하랴 싶었다.
퇴원하고 싶다고 보채는 언니때문에 억지로 퇴원을 했다. 그리고 나서 우리 엄마가 다른 큰 병원에 가는 바람에 6개월 넘게 만나지 못했다.
다시 엄마가 그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을 때 응급실에 실려온 언니를 만났다. 넋놓고 있다가 하루에 4번 해야 하는 투석을 두번이나 빼먹고는 쇼크가 와서 응급실에 들어왔다고 했다. 병실에 올라온 언니를 향해 언니의 어머니는 혀를 끌끌 차면서 애도 아니고 말이야..여행 못가게 한다고 그러냐며 안타까워했다. 그때 언니는 고개를 돌리고 앉아있었는데 그 표정은 실수가 아니라 세상만사 다 포기한채 투석 안해버릴 거야 라며 때를 쓴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언니가 먼저 퇴원하고 우리도 퇴원했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못만났는데 그언니의 하얀 얼굴과 표정이 가끔 떠올라 궁금해진다.
언니의 귀여운 아기(나는 무료함을 아기와 놀면서 지우기도 했다.) 후덕해보이던 언니의 어머니.
그 사람들은 어떻게 또 하루를 보내고 있을까. 아니 그 전에 IMF가 터지고 민생고 심해졌을 때 특정한 수입이 없는 언니네는 어떻게 살아냈을까.
궁금해졌다. 사실은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신부전증과 유아당뇨를 가지고 있는 언니는 위태위태한 수준이라서 혹 생명이 다하지는 않았을까, 무심한 남편이 계속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을까, 아기는 학교에 들어갔을까.

(2001년 5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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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고객관리

설 연휴 오랜만에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나서 제각기 사는 얘기들을 풀어놨다. 교통관리공단에 있는 친구, 하나도 하기 힘든 외국어를 2개국어를 마스터하고 불어까지 도전하고 있는 친구, 의상학과를 나왔지만 치과에 취직한 친구..나처럼 단체활동하고 있는 사람. 제각각 직자얘기로 한참 할 무렵 치과에 다니는 친구의 얘기를 들으면서 소름이 돋았다.
"갑자기 왠 치과냐?"의 질문으로 부터 보수가 더 좋다고 하면서 자신이 일하는 파트가 무엇인지 설명하였다.
그 친구는 백화점에서 픽업된 형태라서 다른 간호사들보다 훨씬 보수가 좋다고 한다.
왜? 백화점 경력이, 추천이 그럴까?
3~4층짜리 빌딩이 전부 치과인데 그중에서 고가의 치료를 요하는 층에서 근무한다. 접수부스인데 들어오는 손님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관찰해서 상품명까지 적는단다. 심지어 반지의 다이아몬드, 진주알 크기까지.
그렇게 해서 손님이 치료에 관련한 상담에 들어가면 의사가 경제력과 신분을 측정해서 상품을 추천해서 더 비싼 것으로 하게끔 만든다. 상중하로 급을 나누면 상에 해당하는 사람에게는 제일 고가의 상품을 추천하고 중일때는 약간 저렴한 것(안그러면 자존심도 상하고 황당해 하기 때문에) 뭐 이런씩으로...
그리고 두번째 온 손님은 무조건 이름을 외워서 병원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000님 어서오세요!'로 맞이해야 한다. 악세사리가 바뀌었으면 이쁘네요..어디서 하셨어요..이런씩으로 대화를 끌어내서 그전 손님의 스케쥴, 이후 스케쥴까지 알아내서 기록해야 하고 다음에 또 오면 '000님 여행은 잘 다녀오셨나요' 등으로 대화를 해서 또 알아내고 기록하고...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고가의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관리이다.
VIP, 리더스클럽홈페이지(서울대, 연고대, 이대 출신들의) 등 모두 비슷하지만 정말 끔찍하다. 사람을 대할때 그들이 갖추고 있는 상품을 통해 가격을 매기는 것. 골라내는 것도 아니라 시작부터 간추려낸 사람들을 또 급수를 매기는 것..사람사는 방법이 아니다.
내친구는 잘해내고 있단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비싼 돈주고 자기를 데려왔으니 단물을 쏙 빼 먹겠다는 병원측의 의도를 알고 있다고도 한다.
사람에게 가격 매기는 사람기계가 아니고 무엇인가. 무섭다.

(2001년 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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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보기도 못하는 추석

추석은 다가오고 뭔가 관련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은 굴뚝같은데, 맨날 하는 평등한 명절을 보내자고 주장만 하는 것도 좀 동어반복하는 것 같아서. 하릴없이 인터넷을 뒤적거리면서 사전을 뒤져봐도 정확한 명칭에 대한 설명이 없다. 백과사전에서 ‘한가위’를 클릭해서 한참 읽어나갔다. 호남지방에서는 ‘올벼심리’, 연남지방에서 ‘풋바심’이라 하여 나름의 관습이 있군. ‘5월 농부, 8월 신선’이라, 멋진 말이다. 소먹이 놀이, 소싸움, 닭싸움, 거북놀이, 가마싸움 등 농작의 풍년을 충하하는 다양한 놀이라. 이제 그 놀이를 무슨 큰 공연 보듯이 해야하니 슬픈 일이다. ‘그리고 음..다음은 뭐야. 어, 어, 어...이런 이거 뭐야. ’눈을 휘둥그레 하게 만든 내용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가윗날에는 농사일로 바빴던 일가친척이 서로 만나 하루를 즐기는데 특히 시집간 딸이 친정어머니와 중간 지점에서 만나 반나절을 함께 회포를 풀고 가져온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즐기는 것을 중로상봉(中路相逢), 즉 반보기라 한다.

속담에 ‘근친길이 으뜸이고 화전길이 버금이다’라고 할 정도로 추석을 전후하여 반보기가 아닌 ‘온보기’로 하루 동안 친정나들이를 하는 것은 여성들에게 큰 기쁨이며 희망이다.

풍습에 반보기, 온보기라는 이름으로 여성의 친정나들이에 대해 명시되어 있다는 사실을 처음 봤다. 물론 숨막히는 가부장 사회에서도 반발작용을 막는 숨구멍이 몇 개 있었는데 아마도 그런 것이겠다.

서두가 길었다. 인용한 글을 읽으면서 눈앞에 그림을 그린다. 첩첩 산길, 누런 들판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발걸음이 춤을 춘다. 하나도 힘들지 않다. 어느 마을 주막집에 앉아 말로다 못할 감정에 어머니는 딸의 손만 쓰다듬었을 것이다. 해마다 조금씩 나이들어가는 딸, 조금씩 모습까지 자신을 더 닮아가는 딸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시선에는 대견함이 반, 슬픔이 반. 하루를 다 못채우고 다시 헤어져서 돌아가는 길은 아쉬움도 많아서 눈물이 쏟지만 어머니 보는 앞에 눈물을 흘릴 수 없이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종종 걸어간다. 그 모습을 어머니는 돌장승처럼 바라보며 손을 흔들고 계실 것이다.

추석에 관한 생각에 대해 여러사람과 얘기를 나누다가 몇가지 차이점들을 발견했다.
결혼을 하지 않고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에 의구심을 던지는 한 여성활동가는 설사 결혼을 하더라도 명절에는 자신의 집으로 가고 싶다라고 의견을 제시했다. 명절 전후로 친정에 다니러 가긴 하지만, 결국 명절 당일에는 시댁에서 차례를 지내야 하는 것 아니냐, 그날은 한 개인에게는 더욱더 날 낳아주신 부모님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한데, 그렇게 하면 안되냐. 뭐 이런 내용이다.

가족을 꾸리고 있는 한 남성활동가의 얘기를 들어보면, 명절이 갖고 있는 본래의 의미를 강조했다. 떨어져 지내던 가족, 친족, 이웃들끼리 음식을 나누고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라는 공동체적인 의미를 잊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일단 평등한 명절 치르기가 기본이 되어야 하고, 그리고 설날과 추석 번갈아가며 이번에는 친정에서 명절을 보내고, 다음번에는 시댁에서 보내고 이렇게 하는 것이 더 맞지 않겠냐는 것이다.

양쪽이 대립하는 얘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두 이야기의 기본이 되는 것이 평등한 관계를 기반해야만이 성립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조선시대에 여성의 친정나들이가 허락이 되었다면, 21세기를 관통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좀더 다른 관계를 만들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여전히 명절을 맞는 우리(활동가들 전체를 포함해서)의 모습은 그 시대에서 반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남, 여 모두 잘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각은 한발짝 나가 있지만 행동은 반발짝도 나가지 못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일상의 모든 것과 싸워라’ 라는 말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

술자리에서 한 남성활동가는 이렇게 말하더군..
“남성들이 명절 얘기가 나오면 슬그머니 꼬리를 뺀다. 나역시도. 그 이유는 명절을 평등하게 보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알면서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조용히 침묵한다. 왜냐하면 활동가라고 하면 자신이 말한 것에 대해서 실천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할 자신이 별로 없는 것이 사실이다.”

다음 설날은 어떻게들 보낼 것인가.
여성들이여 당당하게 주장해보자. ‘나, 친정갈래. 당신 같이 갈래? 말래?“
남성들이여 이번에는 꼭 실천해보자. 평등한 명절 보내기, 아내의 가족들과 온전히 명절보내기.


<2002년 추석 즈음에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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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컹덜컹


(photo by 젤소미나)

 
 
덜컹덜컹


이경림


 

협궤열차가 다니던, 그 앞에 잡곡 파는 아낙들 즐비하던

지금은 문 닫은 송도역 앞에서 나 지금 취해 섰네

어둠은 비처럼 추적거리고 그 속에 선 역사는 왜

저리 암울하냐 등뒤에는 무슨 울음 같은 철길 두 줄기

간이역사여 세상 모든 정거는 느닷없어라

 

협궤열차를 타면 지나치던 곳 소래 남동 군자 오이도.............

어는 곳 하나 가슴에 바다 하나씩 안고 있지 않은 곳 없으리

때로 차표도 없이 그곳까지 내달은 마음 한 줄기

거기 바닷가 바위 끝에 아직도 앉았으리

몸이여 취기여 허기여 느닷없음이여

나 지금 간이역사같이 암울에 몸 담그네

그래도 마음은 협궤열차처럼 덜컹덜컹

또 저 혼자 아득하네

 

 


♪ 이겨림 시낭송 - 덜컹덜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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