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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10/31
    마음의 바닥을 치게 한 글
    젤소미나
  2. 2005/10/31
    책그림책에서
    젤소미나
  3. 2005/10/31
    [김진숙]봄은 만인에게 평등했는가.
    젤소미나
  4. 2005/10/31
    도로시 엘리슨 "A Question of Class"중에서
    젤소미나
  5. 2005/10/31
    45일 단식, 천지 사람들
    젤소미나
  6. 2005/10/31
    구로 3공단에서
    젤소미나
  7. 2004/09/17
    [펌-칼럼]노래패는 힘들어
    젤소미나
  8. 2004/07/28
    도로시 엘리슨 "A Question of Class"중에서
    젤소미나

마음의 바닥을 치게 한 글

민주노총 자유게시판을 뒤적이며 하염없이 가슴을 쓸어내리다가..

이글을 보고..거의 폭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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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민주노총 상근활동가의 고백

 

 

3년전 어는 날 저녁, 내가 일을 하고 있는 사무실에 남루한 옷차림의 중년 사내가 찾아왔다. 그 사내는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말을 꺼낼 듯 말 듯 한참 동안을 그렇게 보내던 사내는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자기가 일하는 회사의 노동조합 위원장이 조합원 몰래,  “사납금 인상”에 합의를 해주고 잠적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택시 노동자였던 것이다. 그는 흐느꼈다. “기름값도 오르고, 승객은 줄었는데... 사납금이 오른 액수를 채울려면 1시간을 더 해야 하는데... 지금도 집에 가져가는  돈이 월 백만원도 안되는데.. ”.
  
해결 방법이 있냐고 그는 물었고 나는 없다고 대답했다. 다만, “다음번에는 노동조합의 조합원을 배신하지 않을 사람을 노동조합이 대표자가 될 수 있도록 하세요. 아니면 지금이라도 노동조합 위원장을 만나서 잘못된 부분을 변경할수 있도록 요청해보세요.”라고 대답했다. 그 사내는 돌아갔고, 나는 이틀후에 그를 신문의 지면에서야 다시 볼수 있었다. 중년의 그 사내는 “불쌍한 택시노동자”라는 말을 남기고 자신이 속해있던 회사의 노동조합 위원장을 살해했다.

나는 너무나 공포스러웠다. 노동조합이 사람의 운명까지도 좌지 우지 할수 있다는 사실자체만으로도 공포로 다가왔다.
  
민주노총의 수석부위원장이고 전 민주택시노련 위원장이었던 강승규씨의 추악한 행위가 드러났다. 택시사업주연합단체의 임원에게 돈을 요구하고, 상대방은 사업주들의 이익을 지켜줄수 있도록 돌봐달라는 청탁을 하며 돈을 건넸다는 것이다. 아! 정말로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졌으리라고 상상이나 해볼수 있는 일인가!  강승규! 그 이름만으로도 택시노동조합의 수많은 역사를 대변하고, 택시노동자의 희망이었던 그가, 어떻게 그런 파렴치한 행위를 할 수가 있었다고 상상이나 해 볼수 있는 일이었던가!
  
사업주는 노동조합을 대하는 손쉬운 방법으로 노동조합 대표자를 매수하고, 노동조합 대표자는 못이기는 척 하며 투쟁상대인 사용자와 부화뇌동하는 현실! 정말로 눈물이 난다. 노동조합을 믿었던 그 많은 사람들.. 잘못된 유착에서 피해를 고스란히 떠앉아야 했던 노동자들 앞에서 우리 노동운동가들은 무슨 말을 할 수가 있을까! 아직도 고단한 노동을 개선하기 위해, 온몸으로 행동하고 저항하는 그 수많은 노동조합의 활동가들이 느낄 충격과 배신감을 어떻게 위로해 준단 말인가!.
  
다시 3년전의 그 중년사내가 생각이 난다. 지금도 어디서 수감생활을 하고 있을 그가 느낄 증오가 생각이 난다. “강승규”,“노동조합”, “민주노총”, 이 이름을 곱씹어 보는데, 마냥 눈물만 흐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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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그림책에서

여기가 좋다. 정확하게 두마을 사이의 중간인 이 장소가.

어제의 마을은 이제 내 뒤에 있다.

결코 그리로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다음 마을이 아직 보이지 않는 동안, 지금 나는 홀로 있는 것이다.

산들 바람이 불어온다.

 

- 다비드 그로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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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숙]봄은 만인에게 평등했는가.

봄은 만인에게 평등했는가.

열 몇 살 아이들이 아파트 옥상에서 동백꽃처럼 낙화하고 무덤조차 없는 아이들의 뼛가루가 황사처럼 날리는 땅. 이 척박한 땅에서도 봄은 과연 만인에게 평등했는가.

새끼들하고 발 뻗고 누울 게딱지만한 집을 지키겠다고 살인범이 되어 세 시간의 물대포와 최루탄에 생쥐처럼 끌려 내려오던 철거민들. 그들의 손목에 채워진 수갑위에서 빛나던 햇살은 얼마나 따사로웠는가.

월남전 파병용사에 해외 산업역군에 60평생 일만 해 온 늙은 노동자가 외친 "서러움이 뭔지를 알려거든 나를 보아라" 그 외마디 절규에 600명을 연행하고 마흔두 명을 구속시키는 걸로 화답했던 참여정부의 곤봉과 군홧발 위에도 햇살은 자애로웠는가.

아이들과 선생님들이 집으로 돌아간 텅빈 학교에서 한 달 6-70만원으로 당직을 서며 혼자 라면발을 건져 올리는 경비용역 아저씨들의 젓가락질 위에도 햇살은 온화했는가.

급식종사원인 엄마와 학생인 아들이 아침마다 가는 목적지가 같건만 단 하루도 함께 등교해 본 적이 없다는 신발공장 해고노동자 정희.

매일 아침 엄마에게 등을 돌린 채 뛰어가는 아들의 그 작은 등에서 잔인하게 부서져 내리던 햇살은 얼마나 찬란했는가.

그 아들을 불러세워 함께 가자 단 한번도 얘기할 수 없었다던 정희는 "난 다시 태어나면 우리 재경이 학교에 선생으로 태어날 거야. 그래서 하루만이라도 재경이 손잡고 학교에 같이 가보는 게 소원이야"

꺼이꺼이 울며 술주정마저 서럽던 못난 에미의 눈물 위에도 햇살은 눈부셨는가.


그 정희를 제가 처음 만난 건 그 아이 열두살 때였습니다.

열세살 아래는 취업이 안 되니까 이름도 두개였고 나이도 두가지였던 소위 생계형 위장취업자였던 아이.

목표량 달성이 생명보다 중요했던 공장에서 부산 사투리를 잘 못 알아들어 조장에게 터진 날 밤에 기숙사 옥상에 올라가보면 영어를 몰라 미싱사한테 엉뚱한 라벨을 갖다줘서 목덜미까지 손가락 자욱이 선명했던 그 아이가 쭈그려 앉아 울고 있곤 했었습니다.

그 아이의 꿈은 미싱사가 되는 거라 했습니다.

우리가 최대한 아낄 수 있는 시간은 점심시간 20분이 전부였던 시절. 밥을 굶어가며 미싱을 배워 마침내 장군처럼 미싱을 타게 된 정희는 열네 살 때 이미 미싱바늘에 찍혀 손톱 두개가 없었습니다.

대학생하고 연애를 하면서 기숙사 삼동에 그 소문이 파다해져서 영웅처럼 의기양양하던 영자를 보면서 정희의 소원은 대학생하고 연애 한 번 해보는 걸로 바뀌었습니다.

그때 우리들 사이에선 영자처럼 두꺼운 책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게 유행이었고 헷세나 니체같은 책들을 미싱바늘 갈듯이 서로 바꿔가며 끼고 다니다가 밤엔 베고 자고 그랬습니다.

교복 입은 또래들을 보면 처음엔 눈물이 나다가 나중엔 저절로 욕이 나온다던 그 공순이들이 군복 입은 사람들을 보면 처음엔 무섭다가 나중엔 저절로 욕이 나오게 된 게 87년 꼭 이맘때였습니다.

그때 우리가 거리에서 만난 건 영자의 돈도 빼앗고 몸도 빼앗고 꿈마저 짓밟은 사장보다 더 나쁜 대학생이 아니라 또는 시내버스 안내양 시절 대학생 회수권을 들고 버스에 올라서는 파마 잘나오는 미장원 얘기 부츠 세일하는 얘기나 늘어놓던 한심한 대학생이 아니라 최루탄이 안개처럼 뒤덮인 거리를 질주하던 진짜 대학생들이었습니다.

준비물을 안 챙겨갔다고 국민교육헌장을 못 외운다고 모내기 하는 날 결석했다고 코피가 나도록 줘패던 수많은 박정희들이 아니라 세상의 주인은 노동자라던 믿어지지 않는 말씀들을 하시던 여러분들 참스승들이었습니다.

그후로 우리들은 더이상 읽지도 않는 책들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지도 않았고 안내양하면서 삥땅해뒀다가 남의 버스 탈 때 마패처럼 내밀곤 하던 몇 년이 지난 대학생 회수권도 비로소 버릴 수 있었습니다.


16년전 오늘.그 아이들이 얼마나 여러분들을 자랑스러워했는지 아십니까?

정문 앞에서 부터 쫓기고 쫓기는 숨바꼭질 끝에 부산대학교 기계관 앞에서 마침내 하늘을 향해 오르던 전교조 부산지부의 깃발을 보며 그 아이들이 얼마나 울었는지 아십니까?

16년전 오늘. 선생님들을 그렁그렁 눈물 매달고 지켜보던 그 아이들의 수천마리의 새들의 비상처럼 터져나오던 갈채소리를 아직도 기억 하십니까?

그때 그날 신용길 선생님이 형형한 눈빛으로 읽어가시던 축시를 들은 이후 정희는 시인이 되는 게 꿈이라 했습니다.

준재를 두고 떠나시는 그 오죽한 순간에도 눈을 세상에 남겨 전교조 합법화의 그날을 보리라던 꼭 신용길 선생님의 현신 같았던 조직.

1500명의 선생들을 학생들마저 폭력혁명의 도구로 삼는 좌경 용공 의식화 교사로 내몰고도 꺾을 수 없었던 조직.

학부모의 손에 머리채가 잡혀 정문 밖으로 끌려 나가는 선생님들을 울며 불며 따라오며 선생님들을 돌려달라고 목 놓아 울던 아이들을 가졌던 참 행복한 조직.

그 조직을 아이들로 부터 분리해내는 게 이제는 강압이 아니라 자발적 복종으로 너무나 인텔리스러운 방식의 구조조정이 교원평가제입니다.

수백만개의 사업장은 말할 것도 없고 금융 철도 통신 전력 도로 건설 운송 다 휩쓸어버린 신자유주의자들의 오직 단 하나 마지막 남은 미션. 학교입니다.


신입사원이 들어와도 비정규직이니 환영식도 없고 수시로 짤려나가니 환송식을 할수도 없는 수많은 현장들.

아무도 노젓는 법을 나누지 않고 친구의 노를 몰래 부러뜨려 놓아야 내가 강물을 건널 수 있다고 믿었던 자들은 결국 그 강의 끝이 유토피아가 아니라 망망대해로 이어져 혼자 탄 뗏목으로는 난파할 수밖에 없다는 걸 처음엔 잘 몰랐습니다.

제일은행 노동자들이 짤릴 때 주택은행 노동자들은 시금치를 무치거나 아이의 장난감을 고르는 일이 더 중요했었고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짤릴 때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은 대부분 잔업을 하거나 축구를 보고 있었습니다.

여성 노동자들이 먼저 짤릴 때 남성 노동자들은 이제 시집이나 가라고 농담처럼 말했고 형님들이 짤릴 때 동생들은 '헹님은 인자 낚시도 실컷 댕기고 땡 잡았네' 라고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웃으면서 했던 똑같은 말을 울면서 듣게 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수백만의 머리에 총알이 박혔지만 아무도 자기가 그 대상이 되리라는 걸 상상할 수 없는 이 짜릿한 러시안 룰렛 게임.

이미 1300만 중에 840만이 비정규직이지만 아직도 내가 비정규직이 되리라는 걸 예상하지 않는 이제는 자본과 노동의 전선이 아니라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전선이 돼버린 이 스릴 넘치는 치킨 게임.

급식종사원 당직경비 영양사 사서 각종 보조의 이름으로 불리는 학내 비정규직들에게 익숙해진 우리들은 머잖아 하청교사 용역교사에게도 서서히 익숙해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 미션의 임파서블은 거기까지 입니다.

신자유주의의 관리자거나 희생양이거나 두 종류만 키워내면 되는 학교에서 아무도 참교육을 말하지 않는 그때까지....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고 밀어내는 것도 자본이고 이제 와서 아빠 힘내시라고 노래불러주는 것도 자본이고 집도 사고 차도 사야 하는데 당신이 아프면 큰일이라고 걱정해주는 것도 자본이고 사고가 나면 남편보다 먼저 달려와 주는 것도 자본이고 소리 없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도 자본이고 또 하나의 가족이 된 자본은 이제 안아달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들과 우리가 공평할 수 있었던 단 하나의 영역이 그것들도 죽는다는 사실이었는데 황 박사의 생명 연장의 꿈은 결국 자본 연장의 꿈이 될 것입니다.

상위 10%에 비해 하위 10%의 사망율이 다섯배가 높은 나라에서 노무현이가 보톡스 맞듯이 쌍꺼풀 수술하듯이 줄기세포 갈아 끼우고 죽지도 않고 러시아로 행담도로 삽질하러 다니는 상상을 해보십시오.

이건희 명예박사 사건 일명 이명박 사건으로 존재감을 뿌듯하게 확인한 이건희 하고 똑같은 게 수십개 수백개가 여기저기 돌아다닌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정형근이가 호텔방에서 묵주하고 바꾼 난자로 고문기술자 이근안이 같은 것들을 아예 프레스로 찍어 낼 수도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저는 벌써 소름이 끼칩니다.


동지여러분. 아이들을 일진이라고 때려잡던 소탕작전은 마무리 됐습니까?

사립학교법 죽어라 반대하는 한나라당 떨거지들. 학생과 교사를 좌경과 건전으로 분리해 좌경학생을 격리조치하고 좌경교사를 감찰하라는 신선한 발상이 화수분처럼 샘솟아 오르는 교육인적자원부. 천성산에는 철도를 놓고 아이들의 머리에는 고속도로를 내서 살기 좋은 새마을을 만들고 싶어 환장을 한 아직도 건재한 수많은 이 땅의 박정희들.

진짜 일진은 그것들 아닙니까?

국민들의 주머니를 털고 동료들간의 왕따를 조장하고 폭력으로 나와바리를 유지하는 그들이야말로 우리시대 진정한 일진들 아닙니까?

이 일진세력들을 그대로 둔 채 교원평가제가 시행되면 아이들은 저절로 영악해지고 선생들은 알아서 비겁해질 겁니다.

아이들은 꿈을 잃어가고 선생들은 영혼을 잃어가는 학교에서 중간고사 끝난 나른한 봄날의 4교시. 선생님께 첫 사랑 이야기를 조르는 아이들도 더 이상은 없을 테고 그 아이들에게 진달래를 불러주는 친구 같은 선생님도 더는 없게 될지도 모릅니다.

선생님을 상대로 첫 사랑의 황홀한 꿈을 꾸는 아이들도 없을 테고 선생님들은 더 이상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지 않게 될지도 모릅니다.

학교가 아닌 아파트 옥상으로 등교하는 아이들은 점점 많아질 테고 그때 우리는 아이들의 책상만이 아니라 옆자리 선생님의 빈 책상위에도 하얀 국화꽃을 올려놓게 될지도 모릅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 밖에는 별로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여러분들.

나는 그 아이들은 담싹 안아주고 싶어 다가가는데 가까이 갈수록 멀어지는 아이들. 그럼 어쩌시렵니까?

나는 아이들에게 밤새워 메일을 쓰는데 한 번도 답장을 하지 않는 아이들.

그런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 '보내기' 대신 '취소'를 누르며 긴 밤을 서성거릴 때. 그 뜨거운 마음들을 다 어쩌시렵니까?

쏟아내지지도 않고 내려놔지지도 않은 채 자갈처럼 구르며 온 가슴을 헤집고 다닐 결국에는 상처가 될 그 걷잡을 수 없는 사랑들을 다 어쩌고 사시렵니까?


권미경이라는 노동자가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졸업한 열세 살 때부터 홀어머니와 정신이 온전치 못했던 오빠.어린동생 둘을 먹여 살리는 가장이 되어야 했습니다.

글재주가 유난했던 영민한 아이였습니다.

똑똑하면 안 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똑똑하다는 게 얼마나 큰 고통인지 혹시 아십니까?

미싱만 잘 밟으면 되는 공순이가 그림 잘 그리는 저주를 받아 초등학교 6년 내내 게시판에 그림이 걸려 있던 기억이 얼마나 상처가 되는지 혹시 상상해보셨습니까?

미경이의 글재주는 작업시간에 빵 먹었다고 조장한테 터지고 온 날. 구비 구비 서러운 일기를 써내려가는데 밖엔 써먹을 데가 없었습니다.

매일 매일이 유서 같았던 일기장을 몇 권이나 남겨놓고 공장 옥상에서 고단하기만 했던 스물두 살의 몸뚱이를 끝내 날렸던 미경이의 유서는 그러나 막상 외마디였습니다.

"내 이름은 공순이가 아니라 미경이다" 그 유서를 왼쪽 팔뚝에 볼펜으로 비명처럼 새겨 넣고 갔습니다.

그 미경이를 신용길 선생님의 바로 앞자리에 묻으면서 신선생님께 부탁했습니다.

작가가 되는 꿈을 꾸었으나 살아서는 도저히 그 꿈을 이룰 수 없었던 미경이가 선생님의 곁으로 갔습니다.

수만 벌의 옷을 만들었지만 단 한 벌도 그 옷의 주인일 수 없었던 미경이의 소원은 제비꽃 한복을 입어보는 거 였습니다.

여기저기 터지고 부러진 스물두 살 몸뚱이 여며서 그 옷을 수의로 입혀서 보냈습니다.

비록 눈으로 보실 수는 없더라도 제비꽃 향기가 나는 아이가 있거들랑 시도 읊어주시고 문학도 가르쳐 주시구려.

미경이 같은 아이들이 가진 꿈을 살아서 이룰 수 있는 무상교육. 전 그게 꼭 됐으면 좋겠습니다.


전교조 부산지부 동지여러분.16...년 동안 정말...고생 많으셨습니다. - 2005. 6.10

[6.10일, 부산교사결의대회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의 연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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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엘리슨 "A Question of Class"중에서

"나는 가난하고, 미움 받으며 육체적, 정서적, 성적 폭력의 희생자로 성장했다. 나는 고통이 고상하게 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파괴한다.

파괴, 자기혐오, 좌절에 저항하기 위해서 멸시당하기의 학습을 던져버리고, 경멸적인 '그들'로 얘기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던져버려야 하며, 거짓 신화와 안이한 도덕률을 거부해야 하고, 우리 자신을 인간적이고, 결함을 갖고 있고, 예외적이라고 보아야 한다.

우리 모두는 예외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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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일 단식, 천지 사람들

45일 단식... 천지 사람들
어제 오래간만에 진짜 미안하게도 오래간만에 천지 연대집회에 갔었습니다.
멀리서 보기에도 사람은 그리 많아보이지 않았고,
현장에 있어야할 노래패 패장이 투쟁조끼를 입고 나와있었습니다.
그는 군복무기간(?) 4개월남은 병역특례병이지요.
이번싸움에 적극 참여하게 되면 곧 군대로 끌려갈지도 모르는 여려운 상황에서도
그는 그대로 있을수는 없어서 나왔다고 했습니다.
회사는 화의 신청을 해놓은 상태이고, 강준희 직무대행은 45일째 단식중이고,
회사는 사람이 죽든 말든 너희들이 단식하고 있는 거니까
그건 임단협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하루하루 살이 타들어가는 그 시간속에서 유유자적하며 교섭날짜를 죽죽 늘리고 있으니,
그도 자신의 신변만을 생각해서 가만히 있기에는 괴로웠을겁니다.

정문앞에는 단식 45일째 죽은 사람처럼 강준희 그사람이 누워있었습니다.
집회가 끝나고 인사라도 하려고 다가간 저는 그만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고개조차 잘 가누지도 못하고 그래도 웃으며 내게 인사하는 그,
입속에는 단식으로 인한 것인지, 피가 고여있었습니다.
"내청춘 바쳐 만들어 놓은 천지노조를 이렇게 앉아서 빼앗길수는 없다.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기필코 사수할 것이다." 그는 단식 전 그렇게 말했습니다.
아내도 있고 세살박이 딸도 있습니다.
그렇게 정문앞에서 저들에게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
그도 생각이 많을 것입니다.

그에게 인사하러 왔다가 펑펑 울고 있는 미남을 달래면서 공단하늘 한번 바라봅니다.
(박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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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 3공단에서

오래간만에 가리봉역에 내려본다.
늘 가리봉5거리 문화공간에서 연습하다가,
오늘은 다른 패와 연습이 겹치는 바람에
천지노조에서 패모임을 한다고 했다.
좀 여유있게 시간을 잡고 구로 3공단을 걸어본다.

이런.... 어둑해지는 공단길을 보고 있자니 만감이 교차하는군
여기 이곳 구로공단에 내가 온지가 벌써13년째...
그동안 같이 울고 웃으며 노래했었던 그 동지들은 지금 모두 어디에 있는지..
중원전자, AMK, 슈어프로덕츠, KDK, 나우정밀,
그리고 고향같은 사람들, 구노련 사람들...
수많은 노래패가 만들어지고, 해체되었는데,
나는 오늘도 여전히 이 거리에 서있다.

불타 없어져 버린 가리봉 시장, 하나씩 문을 닫고 있는 상점들,
거리의 수많은 이주노동자들, 무수히 생겨나는 중국상점
이제 패션거리의 변해버린, 공단4거리
하지만 여전히 구로공단노동자들은 무심히 그 길을 걸어
일하러가고, 오고, 그렇게 살아간다.
나도 무심히 그 길을 걸어 강습가고 오고, 술먹고, 노래하고.....
하지만 오늘 따라 공단길이 정겹다 못해 슬프다.

이제 곧 천지산업노래패에서 노래테잎이 나온다.
8년째 구로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어있다,
미남이, 영진이, 상곤이, 형원이, 정훈이...20대 초반에 만난 그들이
이제 30을 눈앞에 두고 있다. 10대 후반에 만나 이제 20대 중반을
바라보는 승렬이, 종문이......내게 너무나 소중한 사람들....
이제서라도 그들의 목소리를 담을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
너무 힘들었지만 비록 또 해를 넘겨버렸지만,
2002년 출발부터 결실을 맺는 듯하여 뿌듯하다.

 

(박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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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장 뱀발--젤소미나
박미영 선배는 십여년 구로공단에서 노래강습을 하고 있습니다.
노문교협을 해산할때까지 함께 하였고, 노문센터 초기 논의부터 준비위, 창립을 하는 과정에서도 아낌없이 힘을 다하였구요..
2000년에 독립하셔서 노래강사로서 역할을 더 열심히 하고 있어요.
음..나이보다 훨씬 감각이 젊어서 신입들과 말이 잘 통했고..나이 많은 선배들과이 갭을 줄여주는 들어주는 선배이셨답니다.
노문센터 준비위때..처음 문화단체에 들어와서 일하기 시작한 젤소미나가 이래저래 많이 기댄 선배이죠. 늘 고마운 선배..미영언니...이 글로 진짜 노래 한곡 만들어봐요..

(200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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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칼럼]노래패는 힘들어

 
[사진] 2003년 노문센터 연대의 밤에서 노래하고 있는 서울은행 한울타리 노래패






 

 

 

 

 

 

 

 

 

 

 

 

 

 

 

 

 

 

 

 

 

 

 

 

 

 

몇 주 전 기업은행 노동조합으로부터 참으로 황당한 전화한통을 받았다.
‘노래패가 3명밖에 모이지 않아서 회계감사가 들어왔다. 8월 달에도 거의 모이지 않던데, 그렇게 저조해서는 더 이상 노래패를 지원해 줄 수 없다’,
그래서 내가 ‘아 그런가요, 그럼 노래패 사람들이랑 얘기해보겠습니다’
그랬더니 ‘아니, 앞으로 노래패가 더 모이든 안모이든 지원을 하지 않겠다’.
이 이야기의 경과는 이렇다.
기업은행 ‘새울림’노래패는 전 집행부가 만든 노래패다. 물론 나도 그때 강사를 맡게 되었다. 선거를 통해 생각이 다른 집행부로 바뀌면서 제일 우려했던 것은 ‘과연 노래패를 그대로 둘 것 인가’였는데 (이전에 ‘한울림’이라는 노래패도 집행부가 바뀌면서 지원을 하지 않는 정도가 아닌 엄청난 탄압을 받았었다), 처음에는 별로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독자적으로 준비하고 있던 노래패공연을 집행부 초기라는 이유로 11월로 연기해달라고 하면서 만약 연기하지 않으면 노동조합 차원에서의 어떠한 지원도 해 줄 수 없다고 했다. 후원에 노동조합이라는 이름도 넣지 말라는 것이다. 이미 홍보도 되었고 한 달 밖에 남지 않은 공연을 연기할 수는 없었다. 노래패는 공연을 올렸고, 집행부는 좀 머쓱했는지, 부분적인 지원을 해주었다. 그런데 여기부터가 시작이었다. 금융노조 대의원대회 때 금노 산하 노래패들이 연합으로 공연을 하자고 의견이 모아졌고, 다른 노조에서도 좋은 일이라고 했는데, 유독 기은집행부는 기은노래패는 무대에 세우지 말라고 하면서, 활동까지 못하게 했다.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게다가 노래패원이 모이지 않으니 사람들을 모우기 위해 한 달에 두 번 대중가요를 가르치라고 했다. 문화패활동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며 내가 그렇게 못하겠다고 했더니, 독자적으로 신입패원을 모집했고, 한명도 사람이 모이지 않자 집행부들 보고 노래패 활동을 하라고 했으나, 이도 여의치 않자 결국은 결별을 선언했다. 자기 사람들로 노래패원들을 채우고 싶었는데, 그게 쉽지가 않자 껄끄러운 노래패를 떼어내고 만 것이다. 이에 새울림 노래패는 자체적으로 모임을 하기로 결정했다.(하지만 30대 중후반의 기혼자들인데다가 일하는 지점이 평촌, 인천인 사람도 있고, 새로운 전산시스템 도입으로 퇴근이 보통 9시, 10시인 상황에서 어렵게 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앞으로도 노래패 활동이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기업은행 노조가 아주 심한 경우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대다수 노조 간부들은 문화패가 문선대이기를 바란다. 노래패는 2년, 3년의 자신들의 임기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노래패가 활동하는 동안은 얼마든지 지속될 수 있고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는 독자적인 소모임이다. 그런데 문화패가 하나둘 사라지고 그 활동이 예전 같지 않은 지금 그 진리는 다시 위협받고 있다.

    또 다른 노래패 이야기를 해보자. 현대백화점 노래패는 주5일제가 시행되면서 전원이 모인 적이 거의 없다. 남들처럼 일요일, 공휴일에 쉴 수 없는 백화점 노동자들은 주중에 개인이 시간을 조정하여 이틀을 쉬게 되는데(대체휴일), 퇴사는 하는 사람은 있어도 더 뽑지는 않고, 이틀을 쉬기 때문에 필요인원이 늘 부족하고 그래서 자기가 일하는 날은 죽고 싶을 정도로 바쁘다고 한다. 이는 노래패 뿐 만이 아니고 매장 안에서도 다같이 얼굴 보는 날이 거의 없다고 한다. 그래도 직영사원들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늦게까지 일하면 연장수당도 있고, 일할 때 힘들어서 그렇지 이틀이라도 쉴 수 있지만 백화점 내의 비정규직 사원들이나, 협력업체직원들은 그나마 그것도 없다. 노래패원 중에도 협력업체직원이 있는데 그는 연장수당도, 상여금도 없으며 임금인상은 꿈도 꿀 수 없다고 한다. 게다가 협력업체직원들은 같은 매장에서 일하는 사람들끼리 연애하기도 어렵다고 한다. 백화점이 월1회 밖에 쉬지 않으니 맘 편하게 만날 수 있는 날이 딱 월1회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최소의 인원으로 매장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둘이 같은 날 쉴 수가 없다는 것이다. 백화점 직영사원들이 임단협 사안에 대해서 이런 저런 비판을 하고 있으면 “그래도 너덜은 그래도 행복한 줄 알어~”라고 한다.  

  그럼 임단협을 통해 문화패 활동을 근무시간 중에 쟁취한 사회보험노조(이후 사보노조) 문화패는 어떻게 활동하고 있을까. 단협을 통해 문화패 활동을 근무시간 중에 한다는 정말이지 파격적인 단협을 체결한 사보노조 문화패는 지금 활동하고 있는 단일노조 문화패 중에 가장 인원도 많고 활동력도 높다고 알고 있다. 지역의 크고 작은 행사에서 늘 앞장서서 문선활동과 연대활동을 하고 있으며, 패별로 년1회식 수련회를 열어서 서로의 활동을 공유하고 있다. 근무시간 중에 모이기 때문에 결혼을 하고 아이가 있어도 활동하는데 별 부담이 없고, 연간교육과 강사들의 일상교육을 통해 교육내용도 채워지고 있고, 해서 커다란 문제점이 없을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가장 큰 어려움은 전체적으로는 숫자가 많지만 지역, 지부로 들어와서 단위패로 들어오면 인원이 없다는 것이다. 회사에서 신입사원을 거의 뽑지 않고 있고 뽑는다고 해도 적은 인원인데다가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으니 문화패활동에 관심을 두는 사람도 거의 없다는 것이다. 문화패 막내들의 나이가 제일 양호한 곳이 20대 후반, 보통이 30대 초중반이다. ‘경로당 노래패가 될 때까지 우리는 노래할 꺼다’ 라고 말할 정도로 노래패에 대한 애정과 활동력은 높지만 사람이 채워지지 않으니 자연 분위기는 의기소침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로 북적 북적거리고 신입패원 맞이하는 설레임도 있어야 패모임이 신이 날 텐데 그게 정체되어 있으니 걱정될 수밖에 없다.

2004년! 다 같지는 않지만 현장의 노래패들은 노조간부들의 잘못된 시각으로, 제대로 시행되지 못한 주5일제로, 비정규직이라는 굴레로, 노동문화의 침체로, 노동조건의 열악함으로 그야말로 다각도로 고통을 받고 있다. 이 문제들은 사실 노래패만으로는 해결할 수없는 문제들이다.  

  그럼 강사인 나는...  노조가 처음 만들어지던 시기, 그 역동적인 시기에는 힘든 조건 속에서도 하루하루 늘어 가는 것이 노래패요, 문화패였지만 지금은 활동하고 있는 노래패들을 꼽는 게 더 쉬울 정도로 그 수도 감소했고 활동도 예전 같지가 않다. 게다가 노조가 조합원을 교육하지 않음으로 인해 강사는 이전보다 훨씬 많은 내용들을 담아내야하는데 과연 일주일에 한번 모이는 모임에서 그럴 수 있겠는가. 게다가 어쩔 때는 간부들과 싸우기까지 해야 한다. 조합 활동에서 느끼고, 일하면서 느끼고 그래서 노동가요를 통해 노래로 세상을 느껴야하는데, 노래로 다른 세상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야 하는 요즘 강습이 힘들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그래서 아주 힘든 강습을 갔다 오면 나는 내가 섬 안에 갇힌 슈퍼우먼이 된 듯 한 느낌이 든다. 강사들도 조직적으로 교육이 담보되지 않고 있으니 더더욱 그렇다.    

‘최후의 1인이 되어서라도 나는 노래패를 할 테야’라고 말하는 노래패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나는 행복하다. 또 눈을 지그시 감고 노래를 부르는 노래패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나는 행복하다. 열심히 공연을 준비하고 있는 노래패 사람들의 분주한 움직임을 보고 있으면 나는 행복하다. 열심히 문선대를 하고 내려와서 힘들다고 투덜거리지만 뿌듯한 표정의 노래패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나는 행복하다. 또한 다른 노래패를 만나면 자기 피붙이를 만난 것처럼 좋아하는 그들을 보고 있으면 나는 행복하다.

  하지만 산재해 있는 이런 저런 문제들을 생각하면 이것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막막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쌓여 있는 문제점을 나열하기보다 그 문제점을 분석하고 대안을 내와야하는데 언제부터 인가 우리는 그것을 실천하는데 너무나 힘들어하면서 그냥 방치해 두고 있다. 이제 노동문화교육운동과 노동자문화패의 발전경로를 어떻게 가져가야 할지 준비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나의 행복은 그냥 여기서 끝나버릴 지도 모른다.

(박미영-노래교사, 노동문화정책정보센터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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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엘리슨 "A Question of Class"중에서

어제 지역노동문화센터 워크샵 모임에서 신선생님이 번역중인 글 중에서 발췌한 것을 주었다.

그책이 언제 번역되어서 나올지는 모르겠으나..몇구절만으로도 너무 강렬했다.

가난한 백인 가정의 레즈비언인 작가이며, 양부의 성폭력을 어렸을 때 겪었던 그녀가 전하는 말 중에서..내 가슴을 친 문구를 블로그를 만든 기념으로 적어본다.

 

"나는 가난하고, 미움 받으며 육체적, 정서적, 성적 폭력의 희생자로 성장했다. 나는 고통이 고상하게 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파괴한다.

파괴, 자기혐오, 좌절에 저항하기 위해서 멸시당하기의 학습을 던져버리고, 경멸적인 '그들'로 얘기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던져버려야 하며, 거짓 신화와 안이한 도덕률을 거부해야 하고, 우리 자신을 인간적이고, 결함을 갖고 있고, 예외적이라고 보아야 한다.

우리 모두는  예외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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