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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민주노총 자유게시판을 뒤적이며 하염없이 가슴을 쓸어내리다가..
이글을 보고..거의 폭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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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민주노총 상근활동가의 고백
3년전 어는 날 저녁, 내가 일을 하고 있는 사무실에 남루한 옷차림의 중년 사내가 찾아왔다. 그 사내는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말을 꺼낼 듯 말 듯 한참 동안을 그렇게 보내던 사내는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자기가 일하는 회사의 노동조합 위원장이 조합원 몰래, “사납금 인상”에 합의를 해주고 잠적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택시 노동자였던 것이다. 그는 흐느꼈다. “기름값도 오르고, 승객은 줄었는데... 사납금이 오른 액수를 채울려면 1시간을 더 해야 하는데... 지금도 집에 가져가는 돈이 월 백만원도 안되는데.. ”.
해결 방법이 있냐고 그는 물었고 나는 없다고 대답했다. 다만, “다음번에는 노동조합의 조합원을 배신하지 않을 사람을 노동조합이 대표자가 될 수 있도록 하세요. 아니면 지금이라도 노동조합 위원장을 만나서 잘못된 부분을 변경할수 있도록 요청해보세요.”라고 대답했다. 그 사내는 돌아갔고, 나는 이틀후에 그를 신문의 지면에서야 다시 볼수 있었다. 중년의 그 사내는 “불쌍한 택시노동자”라는 말을 남기고 자신이 속해있던 회사의 노동조합 위원장을 살해했다.
나는 너무나 공포스러웠다. 노동조합이 사람의 운명까지도 좌지 우지 할수 있다는 사실자체만으로도 공포로 다가왔다.
민주노총의 수석부위원장이고 전 민주택시노련 위원장이었던 강승규씨의 추악한 행위가 드러났다. 택시사업주연합단체의 임원에게 돈을 요구하고, 상대방은 사업주들의 이익을 지켜줄수 있도록 돌봐달라는 청탁을 하며 돈을 건넸다는 것이다. 아! 정말로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졌으리라고 상상이나 해볼수 있는 일인가! 강승규! 그 이름만으로도 택시노동조합의 수많은 역사를 대변하고, 택시노동자의 희망이었던 그가, 어떻게 그런 파렴치한 행위를 할 수가 있었다고 상상이나 해 볼수 있는 일이었던가!
사업주는 노동조합을 대하는 손쉬운 방법으로 노동조합 대표자를 매수하고, 노동조합 대표자는 못이기는 척 하며 투쟁상대인 사용자와 부화뇌동하는 현실! 정말로 눈물이 난다. 노동조합을 믿었던 그 많은 사람들.. 잘못된 유착에서 피해를 고스란히 떠앉아야 했던 노동자들 앞에서 우리 노동운동가들은 무슨 말을 할 수가 있을까! 아직도 고단한 노동을 개선하기 위해, 온몸으로 행동하고 저항하는 그 수많은 노동조합의 활동가들이 느낄 충격과 배신감을 어떻게 위로해 준단 말인가!.
다시 3년전의 그 중년사내가 생각이 난다. 지금도 어디서 수감생활을 하고 있을 그가 느낄 증오가 생각이 난다. “강승규”,“노동조합”, “민주노총”, 이 이름을 곱씹어 보는데, 마냥 눈물만 흐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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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간만에 가리봉역에 내려본다.
늘 가리봉5거리 문화공간에서 연습하다가,
오늘은 다른 패와 연습이 겹치는 바람에
천지노조에서 패모임을 한다고 했다.
좀 여유있게 시간을 잡고 구로 3공단을 걸어본다.
이런.... 어둑해지는 공단길을 보고 있자니 만감이 교차하는군
여기 이곳 구로공단에 내가 온지가 벌써13년째...
그동안 같이 울고 웃으며 노래했었던 그 동지들은 지금 모두 어디에 있는지..
중원전자, AMK, 슈어프로덕츠, KDK, 나우정밀,
그리고 고향같은 사람들, 구노련 사람들...
수많은 노래패가 만들어지고, 해체되었는데,
나는 오늘도 여전히 이 거리에 서있다.
불타 없어져 버린 가리봉 시장, 하나씩 문을 닫고 있는 상점들,
거리의 수많은 이주노동자들, 무수히 생겨나는 중국상점
이제 패션거리의 변해버린, 공단4거리
하지만 여전히 구로공단노동자들은 무심히 그 길을 걸어
일하러가고, 오고, 그렇게 살아간다.
나도 무심히 그 길을 걸어 강습가고 오고, 술먹고, 노래하고.....
하지만 오늘 따라 공단길이 정겹다 못해 슬프다.
이제 곧 천지산업노래패에서 노래테잎이 나온다.
8년째 구로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어있다,
미남이, 영진이, 상곤이, 형원이, 정훈이...20대 초반에 만난 그들이
이제 30을 눈앞에 두고 있다. 10대 후반에 만나 이제 20대 중반을
바라보는 승렬이, 종문이......내게 너무나 소중한 사람들....
이제서라도 그들의 목소리를 담을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
너무 힘들었지만 비록 또 해를 넘겨버렸지만,
2002년 출발부터 결실을 맺는 듯하여 뿌듯하다.
(박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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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장 뱀발--젤소미나
박미영 선배는 십여년 구로공단에서 노래강습을 하고 있습니다.
노문교협을 해산할때까지 함께 하였고, 노문센터 초기 논의부터 준비위, 창립을 하는 과정에서도 아낌없이 힘을 다하였구요..
2000년에 독립하셔서 노래강사로서 역할을 더 열심히 하고 있어요.
음..나이보다 훨씬 감각이 젊어서 신입들과 말이 잘 통했고..나이 많은 선배들과이 갭을 줄여주는 들어주는 선배이셨답니다.
노문센터 준비위때..처음 문화단체에 들어와서 일하기 시작한 젤소미나가 이래저래 많이 기댄 선배이죠. 늘 고마운 선배..미영언니...이 글로 진짜 노래 한곡 만들어봐요..
(2002.1.23)
[사진] 2003년 노문센터 연대의 밤에서 노래하고 있는 서울은행 한울타리 노래패 |
몇 주 전 기업은행 노동조합으로부터 참으로 황당한 전화한통을 받았다.
‘노래패가 3명밖에 모이지 않아서 회계감사가 들어왔다. 8월 달에도 거의 모이지 않던데, 그렇게 저조해서는 더 이상 노래패를 지원해 줄 수 없다’,
그래서 내가 ‘아 그런가요, 그럼 노래패 사람들이랑 얘기해보겠습니다’
그랬더니 ‘아니, 앞으로 노래패가 더 모이든 안모이든 지원을 하지 않겠다’.
이 이야기의 경과는 이렇다.
기업은행 ‘새울림’노래패는 전 집행부가 만든 노래패다. 물론 나도 그때 강사를 맡게 되었다. 선거를 통해 생각이 다른 집행부로 바뀌면서 제일 우려했던 것은 ‘과연 노래패를 그대로 둘 것 인가’였는데 (이전에 ‘한울림’이라는 노래패도 집행부가 바뀌면서 지원을 하지 않는 정도가 아닌 엄청난 탄압을 받았었다), 처음에는 별로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독자적으로 준비하고 있던 노래패공연을 집행부 초기라는 이유로 11월로 연기해달라고 하면서 만약 연기하지 않으면 노동조합 차원에서의 어떠한 지원도 해 줄 수 없다고 했다. 후원에 노동조합이라는 이름도 넣지 말라는 것이다. 이미 홍보도 되었고 한 달 밖에 남지 않은 공연을 연기할 수는 없었다. 노래패는 공연을 올렸고, 집행부는 좀 머쓱했는지, 부분적인 지원을 해주었다. 그런데 여기부터가 시작이었다. 금융노조 대의원대회 때 금노 산하 노래패들이 연합으로 공연을 하자고 의견이 모아졌고, 다른 노조에서도 좋은 일이라고 했는데, 유독 기은집행부는 기은노래패는 무대에 세우지 말라고 하면서, 활동까지 못하게 했다.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게다가 노래패원이 모이지 않으니 사람들을 모우기 위해 한 달에 두 번 대중가요를 가르치라고 했다. 문화패활동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며 내가 그렇게 못하겠다고 했더니, 독자적으로 신입패원을 모집했고, 한명도 사람이 모이지 않자 집행부들 보고 노래패 활동을 하라고 했으나, 이도 여의치 않자 결국은 결별을 선언했다. 자기 사람들로 노래패원들을 채우고 싶었는데, 그게 쉽지가 않자 껄끄러운 노래패를 떼어내고 만 것이다. 이에 새울림 노래패는 자체적으로 모임을 하기로 결정했다.(하지만 30대 중후반의 기혼자들인데다가 일하는 지점이 평촌, 인천인 사람도 있고, 새로운 전산시스템 도입으로 퇴근이 보통 9시, 10시인 상황에서 어렵게 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앞으로도 노래패 활동이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기업은행 노조가 아주 심한 경우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대다수 노조 간부들은 문화패가 문선대이기를 바란다. 노래패는 2년, 3년의 자신들의 임기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노래패가 활동하는 동안은 얼마든지 지속될 수 있고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는 독자적인 소모임이다. 그런데 문화패가 하나둘 사라지고 그 활동이 예전 같지 않은 지금 그 진리는 다시 위협받고 있다.
또 다른 노래패 이야기를 해보자. 현대백화점 노래패는 주5일제가 시행되면서 전원이 모인 적이 거의 없다. 남들처럼 일요일, 공휴일에 쉴 수 없는 백화점 노동자들은 주중에 개인이 시간을 조정하여 이틀을 쉬게 되는데(대체휴일), 퇴사는 하는 사람은 있어도 더 뽑지는 않고, 이틀을 쉬기 때문에 필요인원이 늘 부족하고 그래서 자기가 일하는 날은 죽고 싶을 정도로 바쁘다고 한다. 이는 노래패 뿐 만이 아니고 매장 안에서도 다같이 얼굴 보는 날이 거의 없다고 한다. 그래도 직영사원들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늦게까지 일하면 연장수당도 있고, 일할 때 힘들어서 그렇지 이틀이라도 쉴 수 있지만 백화점 내의 비정규직 사원들이나, 협력업체직원들은 그나마 그것도 없다. 노래패원 중에도 협력업체직원이 있는데 그는 연장수당도, 상여금도 없으며 임금인상은 꿈도 꿀 수 없다고 한다. 게다가 협력업체직원들은 같은 매장에서 일하는 사람들끼리 연애하기도 어렵다고 한다. 백화점이 월1회 밖에 쉬지 않으니 맘 편하게 만날 수 있는 날이 딱 월1회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최소의 인원으로 매장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둘이 같은 날 쉴 수가 없다는 것이다. 백화점 직영사원들이 임단협 사안에 대해서 이런 저런 비판을 하고 있으면 “그래도 너덜은 그래도 행복한 줄 알어~”라고 한다.
그럼 임단협을 통해 문화패 활동을 근무시간 중에 쟁취한 사회보험노조(이후 사보노조) 문화패는 어떻게 활동하고 있을까. 단협을 통해 문화패 활동을 근무시간 중에 한다는 정말이지 파격적인 단협을 체결한 사보노조 문화패는 지금 활동하고 있는 단일노조 문화패 중에 가장 인원도 많고 활동력도 높다고 알고 있다. 지역의 크고 작은 행사에서 늘 앞장서서 문선활동과 연대활동을 하고 있으며, 패별로 년1회식 수련회를 열어서 서로의 활동을 공유하고 있다. 근무시간 중에 모이기 때문에 결혼을 하고 아이가 있어도 활동하는데 별 부담이 없고, 연간교육과 강사들의 일상교육을 통해 교육내용도 채워지고 있고, 해서 커다란 문제점이 없을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가장 큰 어려움은 전체적으로는 숫자가 많지만 지역, 지부로 들어와서 단위패로 들어오면 인원이 없다는 것이다. 회사에서 신입사원을 거의 뽑지 않고 있고 뽑는다고 해도 적은 인원인데다가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으니 문화패활동에 관심을 두는 사람도 거의 없다는 것이다. 문화패 막내들의 나이가 제일 양호한 곳이 20대 후반, 보통이 30대 초중반이다. ‘경로당 노래패가 될 때까지 우리는 노래할 꺼다’ 라고 말할 정도로 노래패에 대한 애정과 활동력은 높지만 사람이 채워지지 않으니 자연 분위기는 의기소침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로 북적 북적거리고 신입패원 맞이하는 설레임도 있어야 패모임이 신이 날 텐데 그게 정체되어 있으니 걱정될 수밖에 없다.
2004년! 다 같지는 않지만 현장의 노래패들은 노조간부들의 잘못된 시각으로, 제대로 시행되지 못한 주5일제로, 비정규직이라는 굴레로, 노동문화의 침체로, 노동조건의 열악함으로 그야말로 다각도로 고통을 받고 있다. 이 문제들은 사실 노래패만으로는 해결할 수없는 문제들이다.
그럼 강사인 나는... 노조가 처음 만들어지던 시기, 그 역동적인 시기에는 힘든 조건 속에서도 하루하루 늘어 가는 것이 노래패요, 문화패였지만 지금은 활동하고 있는 노래패들을 꼽는 게 더 쉬울 정도로 그 수도 감소했고 활동도 예전 같지가 않다. 게다가 노조가 조합원을 교육하지 않음으로 인해 강사는 이전보다 훨씬 많은 내용들을 담아내야하는데 과연 일주일에 한번 모이는 모임에서 그럴 수 있겠는가. 게다가 어쩔 때는 간부들과 싸우기까지 해야 한다. 조합 활동에서 느끼고, 일하면서 느끼고 그래서 노동가요를 통해 노래로 세상을 느껴야하는데, 노래로 다른 세상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야 하는 요즘 강습이 힘들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그래서 아주 힘든 강습을 갔다 오면 나는 내가 섬 안에 갇힌 슈퍼우먼이 된 듯 한 느낌이 든다. 강사들도 조직적으로 교육이 담보되지 않고 있으니 더더욱 그렇다.
‘최후의 1인이 되어서라도 나는 노래패를 할 테야’라고 말하는 노래패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나는 행복하다. 또 눈을 지그시 감고 노래를 부르는 노래패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나는 행복하다. 열심히 공연을 준비하고 있는 노래패 사람들의 분주한 움직임을 보고 있으면 나는 행복하다. 열심히 문선대를 하고 내려와서 힘들다고 투덜거리지만 뿌듯한 표정의 노래패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나는 행복하다. 또한 다른 노래패를 만나면 자기 피붙이를 만난 것처럼 좋아하는 그들을 보고 있으면 나는 행복하다.
하지만 산재해 있는 이런 저런 문제들을 생각하면 이것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막막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쌓여 있는 문제점을 나열하기보다 그 문제점을 분석하고 대안을 내와야하는데 언제부터 인가 우리는 그것을 실천하는데 너무나 힘들어하면서 그냥 방치해 두고 있다. 이제 노동문화교육운동과 노동자문화패의 발전경로를 어떻게 가져가야 할지 준비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나의 행복은 그냥 여기서 끝나버릴 지도 모른다.
어제 지역노동문화센터 워크샵 모임에서 신선생님이 번역중인 글 중에서 발췌한 것을 주었다.
그책이 언제 번역되어서 나올지는 모르겠으나..몇구절만으로도 너무 강렬했다.
가난한 백인 가정의 레즈비언인 작가이며, 양부의 성폭력을 어렸을 때 겪었던 그녀가 전하는 말 중에서..내 가슴을 친 문구를 블로그를 만든 기념으로 적어본다.
"나는 가난하고, 미움 받으며 육체적, 정서적, 성적 폭력의 희생자로 성장했다. 나는 고통이 고상하게 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파괴한다.
파괴, 자기혐오, 좌절에 저항하기 위해서 멸시당하기의 학습을 던져버리고, 경멸적인 '그들'로 얘기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던져버려야 하며, 거짓 신화와 안이한 도덕률을 거부해야 하고, 우리 자신을 인간적이고, 결함을 갖고 있고, 예외적이라고 보아야 한다.
우리 모두는 예외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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