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금강산에 다녀와서...

금강산을 다녀왔다.
말로만 듣던 북녁땅이다.

 

운수노동자 남북자주교류사업 실무협의 대표단의 일원으로 갔다.
지난 5월 5일 출발했다. 어린이날이라 지역에서 아이와 아내와 함께 어린이날 행사를 마치고 난 서울역으로 갔다. 오후 3시에 약속장소인 서울역으로 갔다. 3시 30분 드디어 우리는 짐을 챙겨 차량에 나눠 타고 휴전선 바로 밑 금강산콘도로 향했다.

 

남북 실무회담을 하러 가지만 우리는 크게 부담스럽지 않았다. 이미 팩스와 민주노총 방북단을 통해 어느 정도 사전조율이 되었기 때문이다.
날씨는 매우 좋다. 들에는 모내기를 위해 갈아놓은 논에 물이 가득하다. 우리는 맥주 캔을 돌리며 소풍가는 아이들처럼 편하게 길을 재촉했다. 핸들을 잡은 김용옥 철도노조 통일위원장은 솜씨 좋게 운전을 한다. 아무래도 승용차보다 성능이 떨어지는 15인승 승합차임에도 예정된 시간보다 계속 빠르게 목적지로 향한다.

차창 옆으로 펼쳐진 논들/ 모내기 준비가 한창이다.

 

양평 - 홍천 - 인제 - 원통 - 진부령을 넘는다. 배고프다며 밥 먹고 가자는 일부의 요구를 7시 정각에 먹겠다는 한 마디로 일축하고 가다보니 진부령을 넘을 때까지 해가 남아있다. 설악산 자락인 진부령은 역시 고산지대답게 벚꽃이 이제 핀다. 백담사계곡으로부터 흘러내린 북천에는 맑은 물 사이사이로 기암괴석과 철쭉이 잘 어울린다.

 

진부령을 넘어 간성읍내를 지나 목적지를 목전에 두고 우리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목적지에 다 왔다는 안도감에 우리는 저녁으로 나온 생태탕과 북어찜에 소주 한잔을 곁들인다. 맛이 기가 막히다.

 

금강산콘도에서 우리는 통일부직원으로부터 방북교육(? 필수적으로 받아야 한다. 어떻게 받았는지는 비밀이다.^^)을 받고, 실무진들은 방북준비를 하고 나머지는 둘러앉아 술 한잔씩 나누며 서로 소개와 각오를 한 마디씩 했다.

 

다음날 아침 5시 30분이 기상예정시간이었으므로 모두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여기저기서 자명종 알람소리가 난다. 일어나 보니 5시 20분이다. 이런. 10분씩이나 일찍 일어났군. 다시 자려고 보니 이미 날이 샜다. 심호흡 한번하고 창밖 베란다로 나서니 동해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카메라를 가지고 바로 앞섬 사진을 찍고 멀리 대진항 등대를 줌인하는 순간 카메라작동이 안 된다. 왜 그러지? 이크 배터리가 나갔다. 낭패다. 배터리 수명이 긴 건 좋은데, 이렇듯 방심을 하게 하는 단점이 있다.

금강산 콘도에서 내려다본 동해/ 섬이 참 예쁘다.

 

아침을 먹고 6시 50분에 셔틀버스에 올랐다. 이윽고 남측 CIQ(세관)을 통과하고 또 다른 셔틀을 타고 휴전선을 넘었다.
휴전선에는 이미 2차선 아스팔트길과 철로가 이어져 있다. 4Km 휴전선을 통과하는데 드는 시간은 불과 5분이다. 차량 제한 속도가 매우 느린데도 그렇다. 남쪽 최전방 초소와 북쪽 최남방 초소 사이는 분명 4Km도 채 되지 않는 듯하다.
이어 북측 CIQ통과. 우리는 일반 관광객과 달리 사업자로 분류된다. 뭔 뜻인지 잘 모르겠지만 북측 관계자와 직접 만나는 사람들을 그렇게 분류한다고 한다. 패찰 색깔도 관광객들은 푸른빛인데 비해 우리는 분홍빛이다.
사업자들 통과는 까다롭다. 관광객들은 짐들을 X-ray투시기가 설치된 롤러에 올려 통과시키면 끝나지만 사업자들은 짐 속에 뭐가 있는지 꼼꼼히 적어내야 했고, 실제 짐을 모두 꺼내 검사를 맡아야 했다. 통일사업을 위해 방북을 한다고 해서 예외는 없다.

 

세관을 통과하니 우리 방북단을 위해 25인승 미니버스가 나와있다. 시간을 보니 겨우 9시 조금 넘은 시각, 너무 일찍 왔다. 회담은 오후 2시부터이기 때문이다. 난 현대직원에게 무선으로 김홍명 형을 호출해달라고 했다. 형은 현대아산 직원으로 금강산관광 관련 차량을 총괄관리책임을 맡은 사람이다.

 

세관에서 금강산호텔로 가는 길에 북측의 풍경이 보인다. 비가 내려 시야가 좋지는 않다. 산들은 휴전선 일대 산불(금년에도 탄 흔적이 보인다)로 큰 나무들이 거의 없다. 논들은 남쪽과 마찬가지로 모내기 준비가 한창이다. 전신주는 남쪽 60-70년대 흔히 보던 나무로 된 T자형으로 키가 작다.

 

금강산호텔에 도착해서 잠깐 기다리는 사이 형이 왔다. 약 5년 만에 보는데도 하나도 안 변했다. 그러나 난 많이 변했나보다. 형은 날 보자마자 '영감이 다 됐네' 한다.
형과 나는 반갑게 1층 로비에 있는 커피샾에 자리를 옮겼다. (그 사이 다른 대표들은 북축 대표들과 연락을 취했다.) 금강산호텔은 일급호텔임에도 전기가 나가 있고, 겨우 몇 군데 전등만 켜져 있다. 북측 전기사정이 좋지 않아 전기가 나갈 경우 자가발전으로 일부 전등을 밝힐 뿐이라고 한다. 가슴이 짠하다. 북측의 경제문제는 에너지 문제라고 하더니 실감이 난다.

 

형과 저녁에 소주 한잔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그 사이 북측 대표들과 연락이 닿았다고 한다. 북측 대표들도 전날 이곳에 와서 점심을 함께 하자고 하였다고 한다. 호텔 퇴실이 12시라 우리는 그 시간까지 2층 로비에서 또는 식당에서 기다렸다. 2층 로비는 가을 금강산 그린 그림으로 사방 벽을 채웠다. 식당 책임자(한영숙 동무)는 북측을 자주 드나드는 박민 통일국장과 구면이라 반갑게 맞아준다. 커피도 내오고, 생수도 내온다. 북측에서는 커피를 마시고 꼭 물을 마신다고 한다.

상견례 자리에서 모두발언하는 직총 통일위원장 최창만 선생/ 선생의 유머는 탁월하였다.



짐을 풀고 2층 로비에서 북측 대표를 기다리니 11시 30분쯤 북측 대표들이 나타났다. 북측 대표단 단장은 우리로 보면 차관급에 해당하는 분이었음에도 금강산에 파견나와 있는 북측 담당자는 영접은커녕 '너는 너 나는 나' 식으로 거들떠도 안 본다. 솔직히 충격이었다.

 

우리는 2층 식당 별실에서 서로 상견례를 했다. 서로 인사하고 소개하고 회담의 목적과 기대에 대하여 밝혔다. 그리고 남측의 요구사항을 주로 전달하고 북측은 듣고 간간이 묻는 자리였다. 상견례가 끝나고 12층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북측에서 만찬을 낸 것이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다.
12층 식당에도 불이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양초로 불을 밝혔다. 그러고 보니 촛대가 고정적으로 있다. 어려운 전력사정은 가슴아픈 일이지만 분위기는 몹시 좋았다.

 

점심임에도 술이 함께 나왔다. 북측 사람들은 술 먹는 것도 특이하다. 도수가 높은 술(40℃짜리 인풍술이 나왔다.) 15℃ 정도의 중간 정도의 술과 맥주가 함께 나왔다. 그것을 섞어먹는다. 물론 우리처럼 폭탄주는 아니다. 경험자들에 의하면 그렇게 먹으면 속이 훨씬 편하다고 한다.

점심 만찬에서 인사말을 하는 최용수 운수수산직맹위원장/ 사업을 실행할 책임자로서 시종 신중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만찬에는 듣도보도 못한 많은 음식들이 나왔다. 유일하게 이름이 기억나는 것은 무지개송어찜이다. 코스요리처럼 조금씩 조금씩 만찬이 끝날 때까지 계속 음식이 나왔고 술잔에 술이 조금만 비어도 접대원 동무들이 와서 채워주었다.

 

이곳 접대원들은 대부분 평양에서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해 자부심이 매우 높다고 한다. 대부분 20대 처녀들이었는데 남남북녀라는 말이 사실인지, 아니면 특별히 선발했는지 화장기도 보이지 않는데 모두가 미인이다. 출발하기 전 그들을 부를 때 '접대원 동무'라고 불러주길 간곡하게 부탁 받았다. 그들은 그 말을 제일 좋아한다고 한다.

연신 이어지는 건배/ "쭉 내밀기야요"

 

2시간 가까이 만찬이 이어졌다. 북측 대표들은 소문대로 술이 쎘다. 연신 건배를 제안했고, 자리를 옮겨가며 잔을 권했다. 낭패다. 오기 전에 지독하게 앓은 감기몸살 때문이 기력이 매우 약해져있었기 때문이다.
북측 대표들은 내가 음식을 많이 먹지 않는 것을 낯을 가려서인 줄 오해한 듯하다. 연신 '많이 드시라오요.' '이거이 북에서도 귀한 무지개송어임메다.' 한다. 건배를 할 때에는 원샷을 의미하는 말로 '쭉 내밀기야요' 한다. 여지없이 몇 잔을 쭉 내미니 입안이 얼얼하다.
술잔이 오고간 만큼 회담 내용도 격의 없이 주고받았다. 일종의 만찬회담인 셈이다.
만찬이 끝나자 4시에 1층에서 만날 자고 하면서 헤어졌다. 북측에서 특별히 삼일포 관광을 시켜주겠다고 한다. 북측 제의에 박민 통일국장은 예전에 없던 일이라고 즐거워한다.

 

삼일포는 북측대표들이 타고 온 25인승 버스로 이동했다. 비가 많이 내린다. 삼일포에서 막걸리를 마시기로 했는데, 마침 다 떨어지고 없다. 빗속에서 호수 옆에서 마시는 막걸리는 생각만 하여도 운치가 있을 터인데...

삼일포 휴게소에서 잠시 쉬는 남북 교섭 대표들

 

삼일포는 매우 큰 호수다. 둘레가 약 8Km에 달한다고 한다. 주변으로는 금강산 미인송들이 빼곡한데, 금강산은 산도 좋지만 소나무가 일품이다. 다만 호수 저편으로는 소나무 밑으로 맨땅이 비치는 게 북녘의 어려운 살림을 보는 듯해 마음이 짠하다.
호수 옆에 있는 휴게소에서 보면 바로 앞에 있는 큰 섬이 와우섬이다. 위에서 보면 소가 누어있는 듯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송이가 많이 난다고 한다. 그 옆으로 바위섬 두 개가 더 있고, 그 하나에는 정자가 있는데, 사선정이라고 한다.

 

우비를 입고 북측 대표를 따라 호수 옆으로 난 산책로로 나섰다. 빗발이 가늘어질 줄 모른다. 우리는 바지가 흠뻑 졌어 중간에서 되돌아왔다. 집단으로 움직일 때의 단점이다. 난 마음 속으로 호젓한 빗길에 좀 더 가봤으면 했지만 집단을 따를 수밖에...

언덕 위에서 본 삼일포/ 우리가 간 날은 비가 와 이런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남이 찍은 것이다. 멀리 보이는 큰 섬이 와우섬이고 그 옆으로 사선정이 있다. 삼일포는 최고 깊은 곳이 6m에 이른다고 한다.

 

돌아와 저녁 6시 만찬회담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북측은 그동안 서로 협의된 것을 바탕으로 합의서만 작성하면 끝나는 것 아니냐고 했다. 하지만 6시에 만난 실무회담은 난항을 겪었다. 북측도 직업총동맹(약칭 '직총'. 우리의 총연맹과 경총을 합친 것에 해당) 통일위원장(최창만)과 운수수산동맹(약칭 '직맹') 위원장(최용수) 사이에 약간의 이견이 있었다. 통일위원장은 어지간하면 남측 요구대로 수용하자는 입장이고, 실질적으로 사업을 책임지고 조직할 직맹 위원장은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당연한 것이리라.

 

결국 실무회담에서는 남측의 요구가 대체로 수용되었다. 합의문 낭독은 공동으로 했다.
이어진 만찬은 점심에 비해 조금은 맥빠진 분위기였다. 남측에서 대접하는 만큼 남측 대표들이 나서서 흥을 돋워야 하는데, 북측만큼 소탈하게 분위기를 잡지 못한다. 그렇다고 몸이 좋지 않고 술이 약한 내가 나설 수도 없는 일이다.

 

나는 평양의 대중교통 담당자라는 리정남 선생 옆으로 자리를 잡았다. 교통체계를 공공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재편하는 걸 연구하는 나로서는 사회주의 사회인 북의 교통체계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남북공동합의문 낭독

 

점심과 저녁, 그리고 삼일포를 다녀오면서 북측 대표들과 대화하는 동안에 그들이 참으로 소탈하다고 느꼈다. 사회주의는 단순히 체제, 즉, 사회·경제·정치적 체제일 뿐만 아니라 의식체제이기도 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에 기반한 양육강식 식의 천박한 자본주의 사회인 남측과 달리 인간의 능력을 자유로이 발전시키는 것을 사회적으로 뒷받침하는 사회에서 성장하고 형성된 고상한 인격은 비록 물질적인 결핍이라는 장애와 분단과 강력한 외세와의 대립에서 오는 경직성이 있음에도 대화 곳곳에서 드러났다. 사회주의는 양보할 수 없는 가치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였다.

 

북측 대표들은 술 한잔 더 하자는 남측 대표들의 간곡한 청을 완곡하게 거절했다. 오늘 평양으로 떠나야 한다는 게 그 이유였다. 우리는 더 이상 잡을 수 없어 아쉬운 작별을 하고 우리끼리만 뒤풀이를 했다. 뒤풀이의 제일 남는 기억은 북측 접대원 동무들의 노래를 들은 것이다. 노래 제목을 정하여 부탁을 하자 흔쾌히 불러주는데 기성가수 뺨친다. 어릴 때부터 특기적성 교육을 하는 사회주의 교육의 성과가 저런 것이구나 하니 부럽기도 하다.

 

다음날 아침, 술을 제일 조금 한 난 일찍 일어났다. 아침 식사가 8시에 예약되었는데 관광객들은 7시에 이미 다 나와서 밥을 먹는다. 난 김홍명 형에게 전화를 했다. 관광 할 수 있도록 차편을 보내달라는 부탁을 했다. 형은 흔쾌히 허락했다. 9시까지 호텔 앞으로 차량을 보내겠다고 한다.

 

시간이 남는 난 호텔문을 나섰다. 앞서서도 말했지만 금강산 소나무는 너무나 멋있다. 몸통은 곧게 자라 위에서 가지가 옆으로 또는 밑으로 벗어있고, 굵은 몸통은 위로는 붉은빛을 띠고, 밑은  검은빛을 띠는 게 그림에서 보던 것이 사실이구나 하고 느끼게 한다.
눈을 들어 앞산을 바라보니 멀리 산 위로부터 폭포가 이어졌다. 금강산은 돌산이라 비만 오면 온 천지가 폭포라더니 전날 내린 비로 산 위로부터 물길은 폭포처럼 쏟아진다.

 

주변을 돌아보는 것도 마음 편한 일만은 아니다. 오고가는 북측 노동자들과 부딪치는 게 왠지 미안하고 쑥스럽기 때문이다. 그들이 뭐라 하지 않지만 마른 체형에 국방색 일색의 옷차림을 하고 있는 그들이 혹시 자존심이라도 상하는 일이 있을까 하는 우려를 하였기 때문이다.

 

호텔로 돌아오니 일행들은 대부분 잠자리에 있다. 몇몇과 함께 아침을 먹고 9시에 금강산 관광을 위한 차량이 옴을 통보했다.
9시가 되자 아침을 먹지 않은 사람들 포함 10명이 모였다.  2명은 전날 술로 여전히 사망이다. 우리는 김홍명 형이 내준 25인승 버스를 타고 구룡연 계곡으로 향했다. 호텔을 벗어나자 우람한 소나무들이 여기저기서 죽어가고 있었다. 혹시 남측에 창궐하는 제선충이 아닐까 자세히 봤더니 불에 타서 죽어가는 것 같았다. 세상에 불이 금강산 전체로 번졌으면 어찌할거나? 여기서 멈췄으니 천만 다행이다.

비봉폭포/ 카메라 배터리가 없어 다른 사람이 찍은 것을 인용한다.

 

구룡연 계곡 입구에 내리니 일행은 중간까지만 올라가자고 난리다. 우리는 패를 나눠 조선의 3대 폭포라는 구룡폭포까지 갈 팀을 꾸렸다. 나까지 넷이다. 우리는 부지런히 산을 올랐다. 금강굴을 지나고 옥류동을 지나 비봉폭포에 다다랐다. 비봉폭포는 봉황새가 날아가는 듯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족히 200m 가까이 되는 것 같다. 이곳을 지날수록 바위의 글씨들은 줄어든다. 금강산이 예부터 유명했고, 선비들이 즐겨 찾았음은 바위라는 바위마다 가득 새겨진 글씨들에서, 주로 이름이지만, 새삼 느낀다.

 

구룡폭포는 나뭇꾼과 선녀의 전설이 있는 상팔담, 하팔담에서 내려온 물이 만들어진 폭포다. 상팔담을 다녀오려면 1시간이 더 소요된다. 아쉽다.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상팔담으로 이어지는 갈림길에서 구룡폭포까지는 불과 5분 거리다. 폭포 앞에는 특별히 감상할 수 있도록 정자가 지어져 있다. 폭포는 장쾌하다. 높이 약 80m라고 하는데, 전날 내린 비로 수량이 많아 떨어지는 물길이 내 짧은 상상과 관념을 압도한다.

구룡폭포 앞에서 일행들/ 우리 후발대라 우리는 사진을 찍지 못했다.

 

아쉽다. 사진을 찍을 수 없으니... 내 카메라 배터리가 나간 것도 모자라 같이 간 지하철노조 최동준의 카메라 배터리도 나가버렸다. 최동준의 주선으로 현대아산 관광책임자에게 부탁하여 한 장 찍고, 명함을 주었는데 언제 보내줄 지는 그분도 장담하기 어렵다고 한다.

 

이제 내려갈 차례다. 우리는 맘편하게 내려오는데 일행들이 삼삼오오 올라온다. 못 올라오겠다고 버티더니 모두 올라오고 있었다.

 

오고가는 길에 관리인인지 안내원인지 북측에서 나온 이들이 있다. 대부분 성격이 활달한 것 같다. 묻는 말에 적극적으로 답변한다. 총각인 최동준은 묻는 게 많다.

내려 와서는 금강산 온천에 들렀다. 금강산호텔이 있는 동네 이름이 온정(溫井)리다. 예부터 온천이 있었기 때문에 얻은 이름이다. 물 좋기로 소문났다고 모두 가자고 한다. 별로 가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혼자 튀고 싶지는 않다. 노천탕이라고는 처음 와보는데, 노천에서 온천을 하며 금강산을 바라보니 그 또한 색다르다.

다른 분 홈페이지에서 따온 구룡폭포/ 수량이 비슷하여 우리가 본 구룡폭포와 비슷한 것 같다.

 

 

남녘으로 내려오기 위해 마지막 준비를 하는데, 일행은 선물 장만에 여념이 없다. 금강산지구에서는 물건값이 대부분 같지만 북측에서 직영하는 2층 식당에서 사기로 하였다. 난 돈도 별로 없지만 딱히 물건을 사고 싶지 않았다. 선물을 하지 않는 습성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남측으로 내려오는 차를 타기 위해 온정각으로 갔다. 전날 북측과 만찬이 늦어져 술 약속을 지키지 못해 얼굴이라도 보고 갈 겸 김홍명 형을 찾았다. 형은 미안하게 술 두 병을 사준다. 현대 직원은 20% 할인이다.

남으로 출발한 시각은 3시 30분이다. 그리고 집에 도착한 시간이 밤 1시 30분이었으니 가는 길과 달리 오는 길은 매우 먼 길이었다. 여기저기 들려야 할 곳이 많았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길에 보니 비 갠 들녘에는 트랙터가 지나고, 농부들이 논일을 한다. 산에는 아이들이 나물을 뜯는 것 같다. 토요일 오후라 일찍 돌아왔나 보다. 그러고 보니 불에 타 큰 나무가 없는 산들은 산나물이 지천일 것 같다.

북측 세관이 있는 곳은 휴전선 바로 북쪽이다. 최전선이라는 얘기다. 멀리 북측 군인들이 특별한 중장비 없이 삽으로 차량이 몇 대는 들어갈 만한 대형 참호를 파고 있다.

 

짧은 기간이지만 북측을 다녀오면서 북은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남측과 격차가 너무 나겠구나 생각했다. 이미 군사경쟁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의 핵무장에 대하여 생각을 했다. 북측 협상대표들은 핵무장의 불가피성과 미사일의 우수성에 대해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였다. 북의 핵무장은 비핵화를 선언한 남북합의 위반이며, 반핵 평화 상호공존을 중시하는 진보주의자의 사명을 벗어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북의 핵무장은 쌀과 생존의 문제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북의 핵무장은 초국적 제국주의 미제국주의라는 강력한 물리력에 의한 군사적·경제적 봉쇄와 그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 특히 에너지 난으로 파생되는 결핍과 식량난, 군사적 침략 위협으로부터 생존 등을 담보할 수 있는 방안 강구에서 나온 불가피한 선택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북측이 남측보다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을 때 남북 군축 문제 등을 주도적으로 펼치지 못했기 때문에 남측에 군사·경제적으로 절대 열세에 있는 현실에서는 선택할 수 있는 평화공세 방안이 제한적이라는 것은 일정부분 북측의 책임이다. 하지만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또 하나는 역시 사회주의가 대안이겠구나 생각했다. 의식혁명은 사회체제의 변혁이 없이는 불가능하겠구나 생각했다. 북측 사람들이 엄혹한 남북대립, 강력한 미 제국주의의 위협과 봉쇄 속에서 경직된 면은 있겠지만 남과 비교했을 때 소탈하고 고상한 인격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낭만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북측을 다녀오면서 내 의식도 약간 변한 것 같다. 그동안은 북측에 대하여 좋지 않게 보았던 감정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통일 문제도 북측은 북측 사정에 충실하게 일관된 방침을 가지고 해결하려는 것 같았다. 남측의 통일운동은 남측의 문제일 뿐이다. 통일운동을 주도하는 사람들의 몰이성적 행태는 남측의 책임일 뿐이지 북측과 무관하구나 하는 점을 느꼈다. 지난번 정치포럼 때 중앙당 김진환 연구원이 북측에서도 일부 주사파를 부담스럽게 생각한다는 말이 자꾸 뇌리에 맴돌았다. 그리고 우리가 남쪽 통일운동을 주도하는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어 사태를 올바르게 보지 못하는 측면도 있지 않은가 반성을 해봤다.

 

북은 북이고 남은 남이다. 자주적인 평화통일과 그 과정에서 민중 주체의 민주주의 관철이라는 원칙을 고수하기 위해 남측 활동가들은 남측의 시민들을 설득할 논리를 만들어야 하겠다. 그리고 북측의 체제가 보전되고 경제적으로 개선될 수 있도록 최대한 도와야 할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