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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 22주년

1.

 

6월항쟁 22주년이 되는 오늘

서울시청 광장이 봉쇄될 것인지 아닌지가 뉴스의 초점이 되고 있다.

 

22년 전 그날

내가 다니던 학교는 당시 전교생이 7천명이 채 안되었었는데, 4천명 이상이 집회에 움집했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모였는지, 캠퍼스가 집회에 모인 학생으로 가득 덮혔었다.

 

도로변 학교 담장은 모두 무너지고, 경찰은 물러나고, 학생들은 줄을 지어 전철역으로 갔고, 전철을 전세내다시피해서 시내로 갔다. (그날 뉴스에는 학생들이 전철을 탈취했다고 나왔다.)

 

나는 아쉽게도 다수의 학생들이 줄을 지어 타고간 전철을 함께 타지 못했다.

당시 이른바 '오르그'를 통한 집결장소가 따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집결장소에 나가니 사복경찰들이 쫙 깔려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태도가 이전과 달랐다.

 

'여긴 정보가 샜으니 다른 데로 가.'

 

그들은 고압적이지도 않았고, 적대적이지도 않았다.

그들은 우리들보다 더 초조해보였고, 단지 우리가 빨리 다른 곳으로 이동해 책임을 모면해보려는 듯이 보였다.

우리도 굳이 그곳에 머물 필요가 없었다.

수시로 전해지는 소식에 의하면 서울시내가 온통 시위대로 꽉찼기 때문이다.

 

그렇게 6월항쟁은 시작됐다.

 

박종철 열사 흉상

 

 

2.

 

1987년 초 서울대 학생 박종철이 고문을 받다 숨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박종철 열사의 죽음은 젊은 학생들 뿐만 아니라 다수의 지식인들에게 매우 많은 부채의식을 남겨주었던 것 같다. 그의 죽음 이후 저항이 많은 이들에게 삶이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집권당인 민정당과 전두환은 정권 막바지에 권력을 유지하기에 급급했고, 데모는 급증했다.

 

다수의 시민들은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했지만, 민정당은 4월 13일 호헌조치를 선언했고, 6월 10일 전당대회를 열어 차기 대통령 후보를 지명하기로 했었다.

 

6월 10일 대규모 집회는 민정당 전당대회를 겨냥한 것이니, 날짜는 어떻게 보면 민정당이 잡아준 것이기도 했다.

 

당시 지도부(?)였던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는 6월 10일 국민 대회를 개최를 선언하였고, 행동요강을 발표했다. 그 행동요강에는

 

.. 2. 오후 6시 국기 하강식을 기하여 전 국민은 있는 자리에서 애국가를 제창한다. 애국가가 끝난 후 자동차는 경적을 울린다. 전국 사찰, 성당, 교회는 타종을 한다. 국민들은 형편에 따라 만세 삼창(민주헌법 쟁취 만세, 민주주의 만세, 대한민국 만세)을 하거나 제자리에서 1분간 묵념을 하며 민주주의 쟁취의 결의를 다진다....

 

등이 있었다.

 

그러나 오후 6시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시내 곳곳에서는 애국가가 아침이슬과 함께 울려퍼졌고, 차량은 일제히 경적을 울려댔고, 거리를 가득 메운 이른바 넥타이부대는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쳤다.

 

 

3.

 

6월 항쟁 기간 내내 서울시내는 해방구나 다름 없었다.

시장 상인들은 숨겨주는 것은 물론 먹을 것, 마실 것을 주었고, 젊은 아가씨들도 우리에게 음료수를 사먹으라고 돈을 주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6월은 갔고,

 

7,8,9 대투쟁이 갔다.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냐, 독자후보냐를 놓고 치열한 논쟁이 있었고,

그해 겨울에 있은 대통령 선거에서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가 승리했다.

 

선거개표 때 부정선거 혐의에 분노한 시민들이 구로구청을 점거했지만, 그러나 그것 뿐이었다.

대다수의 시민들은 항쟁이 실패한 것을 알았고, 침묵으로 분노를 삼켰다.

 

대통령 선거 다음날 명동 롯데백화점 앞 도로를 점거해서 시위를 벌였지만,

시민들은 냉담하기만 했다.

그렇게 6월항쟁은 끝났다.

 

 

4.

 

6월항쟁은 실패한 항쟁인가?

난 물론 실패한 항쟁이라고 생각한다.

 

권력은 시민들로부터 멀어졌고,

지금도 광장은 시민들에게 봉쇄되어 있다. 

그것만으로도 항쟁이 실패했다는 증표는 충분하다.

 

그렇다고 6월항쟁이 우리에게 아무 것도 남기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올리비에 롤랭의 말대로 '우리는 그 당시에 원대하면서도 막연한 희망을 공유하고 있었다. 세상을 변화시켜 보겠다는 그 이상에는 모험으로 가득 한 삶에 대한 기대감이 뒤섞여 있었다.'

 

세상에 대해 아무런 사심없는 애정을 쏟았고, 함께 공유했다는 집단기억은

반동에 저항하는 근원적 힘이 되었으며,

우리 사회를 사람 중심 사회로 재구성하고자 하는 노력하는 이들의 신념을

지금도 마르지 않게 적셔주는 샘물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겐 그러하고, 세상도 그렇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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