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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1/21
    배재로 가는 길
    풀소리

배재로 가는 길

배재로 가는 길

 

1.

여행은 오래된 나의 몇 안 되는 사치 중 하나다.

나는 주머니 속이 항상 비어 있어서인지 몰라도 편안하거나 호사스러운 여행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오래 전에 파키스탄 카라치에 갔을 때 내가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은 막막한 사막이었다. 하지만 좋은 기회였음에도 가보지 못했다. 사막을 가고싶어하는 사람은 일행 중 나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 내가 선택한 것은 그곳 시장이었다. 당시 카라치에는 연일 폭동이 일어나 하루에도 몇 명씩 죽곤 했던 시절이었다. 홀로 시장에 다녀온 나에게 초조하게 호텔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행은 질겁을 하였다. 하지만 그곳은 우리네 옛날 시장처럼 활기차고 평화롭기만 했고, 차도 없이 터덜터덜 걸어 생소한 나라의 삶의 냄새를 맡는다는 것에 나는 한없이 즐겁기만 했었다.

 

나는 홀로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여럿이 다니면 여러 면에서 편리하고 경제적이지만, 남들 눈치보느라 내 하고싶은 대로하지 못하는 일이 많아 항상 미진한 뒷끝이 남는다. 그래서인지 여럿이 다닌 것은 내 기억 속에 여행으로 남지 않고, 그저 어디에 다녀 온 것으로만 남는다.

아이가 생긴 뒤 몇 년 동안 제대로 된 여행을 못하였다. 하지만 나는 늘 여행을 꿈꿔왔던 것 같다. 내가 다시 여행을 시작하면 어디어디를 가야지 하는 구상을 놓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 구상 중의 한 테마가 오지의 비포장도로 도보여행이다.

90년대 초반 해남 화원반도에 갔던 기억은 나에게 너무나 강렬한 것이었다. 산도 없이 구릉으로 이어진 붉은 땅. 막 여물기 시작한 보리밭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 그 사이로 붉은 황토길이 진한 유혹으로 긴 꼬리를 놓고 있었다.

친구 어머님 장례 때문에 간 나는 그 유혹을 따르지 못했다. 서울로 돌아온 뒤 언젠가 다시 한 번 그곳에 가 붉은 황토길을 끝까지 밟아 보리라 다짐하였다. 그렇지만 끝내 가보지 못했고, 몇 년 지나자 그곳이라고 포장이 안 됐겠어 하는 생각에 아예 포기하였다. 그러면서 구상하게 된 것이 비포장도로 도보여행이었고, 그럴만한 곳은 오지밖에 없을 터이니 오지 비포장도로 도보여행이 되었다. 나는 지도를 보면서 몇 곳을 지목하였다. 배재도 그중 한 곳이다.

배재는 강원도 원주시 귀래면 운남리에서 충청북도 제천시 백운면 화당리를 잊는 고개이다. 이 고개는 어린 단종이 영월로 유배갈 때 유배길이었고, 나라를 바친 신라 경순왕이 수시로 올라 망국의 죄업을 참회하였던 곳이라고 한다.

이러한 역사성에다 이웃한 충주시 소태면에서 자라 이곳 귀래를 어릴 때부터 자주 지났던, 그래서 매우 익숙한 곳이라는 점이 더하여 나는 이곳을 첫 번째 여행지로 점찍고 있었다.

 

 

2.

마음속으로 늘 꿈꿔왔었지만 내가 이곳을 찾은 것은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오랜만에 시간이 난 나는 한 밤중에 술을 한잔하면서 여행을 가보고 싶다고 지나가는 투로 말했는데, 아내가 선뜻 허락(?)하였고 돈까지 주었기 때문이다.

급히 짐을 챙기고, 새벽 5:30에 알람을 맞춰놓았다. 하지만 전날 밤술이 과했는지 곧장 일어나지 못하겠다. 잠자리에서 뒹굴거리다 보니 7시, 한창 분빌 출근시간이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면서 인터넷으로 교통편을 검색해보니 서울 동서울터미널에서 9:50에 백운면을 지나는 버스가 있었다. 옳지 이 차를 타야지. 집에서 터미널까지 1시간 30분 잡고, 8시 20분에 집에서 출발하면 출근시간도 피할 수 있겠군 하고 즉각 계산서를 뽑았다.

그러나 세상사 뜻대로 되는 게 몇이나 되나. 서두른다고 서두른 게 출발시간 8시 33분이다. 과연 버스를 무사히 탈 수 있을까. 하지만 가봐야지. 다행이 마을버스는 바로 온다. 원당역 종점에서 뛰어서 계단을 오르니 열차가 전역을 출발하였다는 자막이 나온다. 오늘 뭔가 되나.

 

좋지 않은 징조는 을지로 3가역에서 처음 나타났다. 2호선으로 갈아타려 또 급히 서둘렀고, 팻말을 잘 따라왔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웬걸 반대 방향 시청행이다. 다시 급히 서둘러 성수방면 쪽으로 뛰다시피 오니 금쪽 같은 3분 허비, 시간은 9시 23분. 하지만 다행스럽게 열차가 곧바로 들어왔다.

이곳에서 터미널이 있는 강변역까지 11 정류장, 11X2 = 22분. 탈 수 있어.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열차가 한양대역 지하구간을 벗어날 때까지는 너무나 순조롭게 잘 달렸다. 하지만 곧바로 또 좋지 않은 징조를 만날 줄이야. 뚝섬역에 도착한 열차는 사람들이 내리고 탔는데도 문을 닫지 않는다. 잠시 후 방송으로 흘러나오는 멘트, '앞선 열차 회차관계로 1분간 더 정차했다 출발합니다'. 1분? 음-, 1분쯤이야. 하지만 문닫는 데만 1분일 줄이야. 문을 닫고 출발한 열차는 가다 멈추다 몇 번을 반복한다. 오 마이 갓!

 

3.

목적지인 강변역에 도착한 시간은 9시 49분. 아직 실망하기는 이르다. 코리안 타임이 있으니까. 하지만 이 무슨 좋지 않은 징조인가. 뛰려고 채비를 하는데 사람들이 많아 헤집고 나갈 틈이 없다. 겨우 매표소에 도착해

 

백운행 표 주세요.

10시 50분 차예요.

9시 50분 차 못 타요.

그럼요. 벌써 2분이나 지났는데요.

 

2분! 2분! 2분! 2분이 그렇게 큰 시간이란 말인가! 설마 하고 뛰어온 승강장엔 이미 다른 곳으로 가는 버스가 자리를 잡고 있다.

1시간 동안 뭘 하지? 신문 가게를 두리번거린다. 하지만 살만한 잡지도 책도 없다. 근처에 책방 없나? 없겠지. 1회용 카메라나 사자 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이게 웬걸 책방이 있네. 여기서 잠시 갈등. 카메라를 살까? 책을 살까? 여행에 카메라가 없다는 게 말이 되나. 아니야. 1시간을 뭐로 버티려고. 결국 나는 책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선택의 기로는 또 있었다. 책방이 하나도 아니고 두 개인 것이다. 원 세상에.

작은 책방을 미안한 마음으로 애써 외면하고 큰 책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기독교 관련 서적 일색이다. 한 귀퉁이에 있는 일반(?) 책들은 구색맞춤 장식 같았다. 무안한 얼굴로 맞은편 작은 책방으로 가니 아줌마가 마치 속내를 안다는 듯이 웃으며 맞는다.

아무리 들러보아도 선뜻 살만한 책이 없다. 하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남는 게 시간이니까. 꼼꼼하게 뒤지다 보니 신간(?) 소설들이 20권 정도 꽂혀 있다. 뭐를 살까? 오랜만에 남성작가의 소설을 사보고 싶었다. 하지만 남성작가는 이외수 정도, 여성작가 일색이다. 주인 아줌마의 취향인가. 아니면 고도의 마케팅 전략인가.

 

어찌 되었든 나는 두 권의 책으로 압축했다. 홍희담의 깃발과 은희경의 상속. 둘 다 소설집이다. 왠지 장편은 사고싶지 않다.

신문 광고 등을 보면서 홍희담의 책을 사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고른 것은 은희경의 책이다. 1988년 시사잡지에 실린 홍희담의 깃발이라는 단편을 접했을 때 그 많던 후일담 소설 중에 단연 돋보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런데 막상 고르려니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88년의 감동을 실망시킬까봐 지레 겁을 먹은 것일까?

 

책을 읽다 보니 시간이 의외로 금새 지나갔다. 출발 7분 전에 승강장에 가보니 차안에는 승객이 의외로 많다. 해가 들 방향을 피하고 전망이 좋을 자리에 찾아 앉았다. 문이 닫히고 출발하는데 시간을 보니 10시 49분. 아, 코리안 타임의 추억이여.

 

차를 타고서도 서울을 모두 빠져나갈 때까지는 책을 보았다. 오랜만에 소설집을 사서였기도 하지만, 여행을 가면서 때 절은 서울을 계속 보고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톨게이트를 지나면서 책을 덮었다. 절정으로 자란 잎새들이 잦은 비를 머금어서인지 너무나 싱그럽다. 하지만 시야가 좋지 않다. 공기 중 높은 습기 때문일 것이다. 아쉽다.

피로가 몰려온다. 잠깐 눈을 붙였는가 싶은데 내 코고는 소리에 놀라 다시 깬다. 나는 평소 코를 골지 않는데, 아주 피곤한 날에는 어쩌다 곤다. 그때마다 그 소리에 내가 놀라 깨곤 한다. 그렇게 피곤한가. 어쨌든 조금 개운한 것 같다.

 

직행버스라고는 하지만 설 곳은 다 선다. 이천 톨게이트로 고속도로를 빠져 나온 차는 현대전자 앞에 서고, 가남면 소재지 태평리, 장호원 육군 형무소 앞, 장호원, 감곡, 용포, 목계, 엄정, 산척 이렇게 지나는 곳마다 쉰다.

 

산척에서 높이 솟은 싸리재를 넘으면 백운이다. 싸리재는 천둥산 줄기에 있는 고개로 370여 M에 불과하지만 해발고도가 낮은 충주분지 중 일부인 산척에서 보면 매우 높게 보인다. 구불구불. 도로는 정말 구절양장이다. 옆으로 4차선 말끔한 도로가 터널을 파면서 뚫리고 있지만 나는 이 길이 훨씬 좋다. 그 이유는 굳이 비포장도로를 찾는 마음과 비슷할 게다.

산척 쪽에서 보면 높은 고개지만, 그에 비하면 백운 쪽으로는 고개도 아니다. 제천은 그야말로 고원(高原)이다. 고도가 높고, 여름이 서늘해 목화가 되지 않는 땅이라던 택리지의 글이 실제 땅 모습으로 나타난다.

 

4.

백운에 도착했다. 1시 30분. 식당을 찾았으나 영업을 하는지 안 하는지 셔터가 1/3은 내려와 있다. 시장통으로 들어서니 중국집이 두 집 나타난다. 낯선 곳에선 짜장면이 안전빵이지. 한 곳은 새 건물에 있고, 한 곳은 60-70년대 식의 낡은 집에 있다. 나는 그중 낡은 집으로 들어갔다. 전통이 있어 보였으니깐.

식당 안은 더 전통(?) 있어 보였다. 몇 십 년을 지켰을 다리 짧은 낡은 상들이 고르지 못한 비닐장판 바닥에 나란히 놓여 있고, 오른 편으로는 생 시멘트 거친 바닥에 조금 덜 낡은 의자와 상들이 놓여 있다.

손님은 아무도 없고, 주인인 듯한 건장한 남자가 홀로 TV를 보고 있다 흘끔 돌아본다. 나는 문가에 자리를 잡았다. 주인 남자는 지나는 투로 문는다.

 

뭘 드릴까요.

간짜장 주세요.

 

하지만 못 들은 것 같다.

 

뭘 드릴까요.

 

친절한 말은 외국어로 여기는 사람처럼 조금 더 큰 소리로 묻는 게 무뚝뚝하다.

 

간짜장 되면 간짜장 주고, 안 되면 아무거나 되는대로 주세요.

뭘 먹을 건지 확실히 하세요.

 

내 딴엔 장사 안돼는 주인장을 배려한다고 한 말이 무뚝뚝한 주인장의 비위를 상하게 했나보다. 뭐라도 시키는 대로 다 해줄 터이니 주문만 하라는 것이겠지만, 마치 싸움이라도 하겠다는 말투다. 기분은 나쁘지만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을 따라야지.

 

간짜장 주세요.

 

나는 주인장의 주문대로 확/실/히(!) 시켰다.

물을 따라 놓고 주방으로 들어간 주인장은 야채를 썰고, 짜장을 볶는다. 나는 책을 펴놓고 주방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소리로 모든 게 느껴졌다. 꽤 익숙한 솜씨 같았다.

, 벌써 하는 사이 간짜장이 나왔다. 비벼서 한 입 입에 넣으니 맛이 예사롭지 않다. 시장이 반찬이라지만 그 이상임이 분명하다.

돈을 내고 나서는데 뒤에서 들려오는 안녕히 가시라는 인사말은 훨씬 부드럽게 들렸다. 짜장 맛에 내 맘이 누그러진 때문에 그렇게 들린 것만은 결코 아니었다.

 

5.

밥을 먹고 목적지로 가기 위해 시장통을 휘적휘적 걸었다. 그런데 동네가 의외로 크다. 옛날 80년대 중반에 농활 때문에 이곳에 와본 적이 있다. 그때 기억으로는 이렇게 크지 않은 듯 싶었는데.

억지로 기억을 살리고, 묻고 하여 길을 잡았다. 백운중학교가 나온다. 여기부터는 내가 잘 알지.

 

지나가는 차를 얻어 타려고 하는데 차가 별로 오지 않는다. 트럭 한 대가 와 손을 들었더니 손사래를 치면서 지난다. 그러고 보니 시골 마을을 돌면서 생필품을 파는 장사차다. 영 지나는 차가 없어 이상하다 싶어 주변을 살피니 면소재지 위쪽으로 우회도로가 생겼고, 차들은 주로 그곳으로 다녔다.

 

우회도로 있는 곳까지 걸어 올라갔다. 7월 초 한낮의 햇볕은 한 뼘 그늘이 아쉬울 만큼 따갑고, 더웠다. 우회도로에는 차들이 자주 다녔다. 백운면에 사람들이 많이 살아서이기도 하지만 곧장 가면 원주 신림으로 고속도로가 있어 그리로 가는 차들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차가 지날 적마다 손을 들었지만 세워주지 않는다. 트럭들은 심심해서라도 태워줄 터인데 하고 기대하였지만 혼자 타고 가는 차가 없어서인지 그냥 지나친다. 에고, 이러다 끝내 걸어가야 하는 거 아냐 할 때쯤 서울 넘버를 단 아벨라 승용차가 내 앞에서 주춤거린다. 혹시라도 그냥 갈까봐 얼른 뛰어갔다.

아줌마 혼자 탄 차다. 뒷좌석에 앉으려 보니 막걸리 박스며 짐이 가득하다. 앞좌석도 짐이 있다. 자리에 놓인 짐을 들고 차 문을 닫았다.

 

어디까지 가세요.

화당리에요.

나는 덕동리까지 가는데.

그럼 가시는 데까지만 이라도 데려다 주세요.

 

나는 화당리가 더 먼 곳이라 짐작하고는 그렇게 말했다.

 

차들이 안 태워주네요.

낯선 사람 잘 안 태우지요. 사고라도 나면 내 책임이라 안 태워주는 게 원칙이래요.

서울 차라 지나는 줄 알았는데 이곳에 연고라도 있으신가 보네요.

남편이 덕동리에 집을 짖고 있어요.

 

차는 예전에 농활 왔던 방학리를 지나 도곡리에 닿았다.

 

내 요 위에 잠깐 들렸다 가야하는데 괜찮으시면 갔다 가시죠.

저야 좋지만 미안해서요.

 

시골에서 외간 남자를 태우고 다니는 아줌마를 좋게 볼 리 없을 터인데 오히려 당당하다.

동네길을 접어들어 꼬불꼬불 목적한 집에 다 왔다.

 

시골에서는 이렇게 장봐주는 것도 다 부주에요. 여기서 장보러 갔다 오는데도 하루가 걸린대요.

어디로 장보러 가는데요?

백운에요.

, 평동에요.

그 동네 이름이 평동이에요?

 

나는 장보고 오는데 하루가 걸린다 해서 제천이나 충주로 다니는 줄 알았는데, 차가 없으니 걸어갔다 오면 그렇게 걸린다고 한다. 나도 차 못 얻어 탔으면 한 나절 걸렸으려나.

눈치 빠른 객이 절간에서도 새우젓을 얻어먹는다고 하였다. 차가 마당에 서자 나는 빠른 놀림으로 무거운 막걸리부터 내렸고, 서둘러 내릴 짐을 모두 내려주었다.

 

6.

백운이 경치가 좋지요?

, 덕동리는 정말 좋아요. 너무 좋아서 그곳에 민박집을 내려고 해요.

민박집 좋지요. 요즘 글쓰는 사람들도 많은데 딱히 갈 곳이 없어요.

어머, 글쓰세요? 우리 아저씨도 글쓰는데.

아녜요.

이곳에 왜 왔어요?

여행 왔어요.

어머, 나도 여행 좋아하는데. 그런데 무서워서 혼자는 못 다녀요.

 

집이 어딘지, 여행은 자주 다니는지 등 이런 저런 것들을 묻고 답하는 사이 목적지인 화당리 입구에 왔다.

 

글 잘 쓰세요.

고마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그 아줌마는 나를 글쓰는 사람으로 아예 단정하고는 활짝 웃으며 인사한다.

 

드디어 나의 여행 출발지 화당리에 왔다. 화당(花塘)리, 우리말로는 꽃댕이다. 누가 이름지었을까. 참 예쁜 동네 이름이다.

꽃댕이는 백운 넓은 들이 끝나고, 높은 산으로 이어지는 곳에 있는 마을이다. 대개 이런 마을을 명당이라 하는가.

마을로 들어서자 초등학교가 있다. 화당초등학교. 나는 가까이 가 다시 자세히 보았다. 화당초등학교. 분명 초등학교였다. 분교가 있어도 놀랐을 터인데, 온전한 초등학교가 그곳에 있었다. 초등학교가 있다는 건 아이들이 많고, 아이들 부모가 될 젊은이들이 많다는 것이고, 그만큼 먹고 살만하다는 뜻이다. 그래서인가 집들이 제법 번듯번듯하고 과수원이며, 인삼이며, 농토들이 잘 가꿔져 있다.

잘 가꿔져 있는 시골 마을은 그 자체로 안심과 위안이 된다. 내가 어쩔 수 없는 촌놈이라는 증거인가. 가끔 마주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여자들인데 모두 외출복 차림이고, 젊은 아낙들도 끼어 있다. 오가는 차량들은 대개 남자가 아니라, 젊은 아낙들이 운전대를 잡고 있다.

그러나 저러나 비포장도로는 언제 나오나. 시멘트 포장길을 터덜거리며 걸었지만, 나쁘지 않다. 오염 안 된 경치가 참 좋다. 요즘 웬만한 시골에도 다 공장이 들어서고 해서 온전한 시골이 몇이나 될까.

 

7.

위로 올라갈수록 논은 줄어들고 밭은 늘어난다. 길이 냇물과 만나면서 나타난 첫 번째 마을이 작은개다. 길 옆 개울에는 커다란 반석이 있고, 보(洑)가 있다. 물은 한없이 깨끗해 먹어도 될 듯하고, 보는 눈이 없다면 옷 벗고 당장이라도 뛰어들고 싶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뜻밖에 문인석이 길섶에서 맞고 있다. 무덤도 아니고 길섶에 무슨 문인석? 콘크리트 대좌 위에 세워진 문인석은 위풍당당한 게 예사 솜씨가 아니다. 자세히 보니 옷매무새까지 조각한 게 기품 있어 보인다. 당대의 이름 있는 장인의 솜씨이리라.

이런 문인석을 해 세울만한 집안이라면 부와 권력을 동시에 가진 집안이 분명한데, 어찌 제자리를 잃고 이곳에 홀로 세워져 있을까.

 

길과 개울은 만났다 헤어지고, 만났다 헤어지고를 반복하는데, 만나는 개울마다 널은 반석과 비취빛 깨끗한 물이 어울리는 게 제법 운치가 있다. 집들은 대개 홀로 떨어져 띄엄띄엄 있는데, 새로 지은 양옥이거나 옛집이라도 규모가 있어 하나같이 당당하다.

길가에 비석이 나온다. 가까이 가보니 마을자랑을 하는 비석이다. 대호지(大虎地). 마을 이름치고 특이하다. 옛날 큰 범이 나와서 생긴 마을 이름이란다. 그냥 범골하면 될 것 같은데 대호지란다. 아마 유교가 일반 민중들에게까지 깊이 영향을 미친 조선 중기 이후에 지어진 이름이리라. 어쨌든 꽃댕이라는 예쁜 이름과 너무 대별되지 않는가.

 

비석을 지나자마자 느닷없이 풍차가 나온다. 이 산 속에 무슨 풍차람. 그러고 보니 옆으로 잇대어 지은 집도 화란풍이다. 밤색과 녹색으로 지붕부터 벽까지 통일한 집들은 추녀의 흰 송판에 물결모양으로 다듬은 것까지 사진 속에서 보던 화란의 집들과 매우 닮아 있다. 입구에는 풍차마을이라는 입간판까지 있다.

이런 집들은 대개 외지인들이 지은 집이다. 토박이들은 결코 이런 집들을 짓지 않는다. 이 깊은 산 속에 집을 짓고 살면서도 꼭 티를 내고싶을까.

 

조금 더 올라가자 옛 기와를 올린 당당한 한옥이 나온다. 그 옆으로는 정발산 옆에 있는 집들처럼 정성 들여 지은 집이 있다. 입구에는 쇠밧줄로 문을 막아놓았고. 틀림없이 외지인이 지은 집이다. 입구에 있는 편지함에는 우편물이 그득하다.

 

이곳은 산 속치고는 제법 넓은 들이다. 물살이 느려져서인가, 상류임에도 아랫녘보다 개울 폭이 넓고, 물도 깊다. 눈이 시리도록 맑고 푸른 물에 제일 먼저 떠오른 단상이 보리고개 굶주린 아이들이 물 속을 뒤지는 것이라니.... 물이 깨끗해 물고기도 별로 없을 것 같아서인가.

 

이곳도 여지없이 옛날 논자리임이 틀림없을 것 같은 곳도 밭으로 쓰이는 곳이 많다. 금전적 소출 차이 때문이리라. 마침 감자를 캐는 곳이 있다. 주인은 어디 가고 트랙터인지 커다란 기계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는데, 감자를 담은 자루가 모두 500kg짜리 일명 톤백자루다. 그런 자루마다 그득하게 담겨있는데, 감자 소출이 저렇게나 많을까 그저 놀랍기만 하다. 분명히 추수가 끝난 것 같은데 밭에는 버려진 감자가 톤백자루 하나는 넘칠 만큼 수북수북하다. 상품이 될 만큼 크지 않은 감자를 모두 버린 듯한데, 넘쳐나는 풍요가 오히려 가슴아프다.

 

조금 더 걷자니 인가 옆으로 문득 정겹게 가꾸어진 텃밭이 눈길을 잡는다. 전체로는 고추밭인데, 토마토, 참외, 수박을 고루 두어 두럭 심어놓았다. 아마 아이가 있는 집이리라. 문득 어린 시절 우리 시골집이 생각난다. 풍요치 않은 집안이었음에도 우리 집은 토마토며 참외, 수박 등 아이들 먹거리를 동네에서 제일 많이 심었다.

 

8.

제법 여러 집이 있고, 버스 정류장 팻말이 있는 마을이 나타난다. 배재와 너럭골이 갈리는 곳이다. 이 깊은 산 속에도 친절하게 팻말이 있다.

갈림길을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창고가 나오고, 포장길이 끝난다. 드디어 비포장길이다. 그런데 비포장길을 만난 것을 축하해주는 건가. 십오야 밝은 달이 둥실둥실 떠오르고∼, 아싸∼. 1톤 봉고트럭을 개조한 장사차가 예의 그 뽕짝테이프를 틀면서 나온다. 아까 백운에서 손사래를 치던 그 아저씨다.

 

비포장길이 시작하면서 화전민촌의 느낌이 완연하다. 길 옆 경사면에 버려진 돌밭은 오랜 침식으로 흙들이 모두 씻긴 채, 남은 돌들이 바닥을 덮어 풀 포기조차 제대로 자라는 게 없다. 그래도 한때는 누군가 저기다 밭을 일구고, 목줄을 의지했었으리라. 그러고 보니 이곳 비탈밭에는 유난히 돌들이 많다.

 

높은 산을 의지한 곳이라 물이 흔하다.

비탈에는 밭을 일구고,

펀펀한 땅에는 논을 만들었다.

산촌 외딴 집 옆 작은 개울에는 반석이 넓은데

서너 평 그늘이 있으니 한여름 더위 식히기 좋구나.

자족한 삶이란 이것으로 충분할 터이지만

빠르게 흐르는 세상사 어디 그렇게 살 수 있으랴.

 

길을 가다 한적한 인가를 보니 옛사람 흉내가 절로난다.

 

길은 또 두 갈래로 나뉜다. 한 쪽은 비포장 그대로이고, 한 쪽은 서너 집 인가가 있어서인지 포장길이다. 미리 공부한 대로라면 그곳은 주막거리일 것이다. 옛 남한강의 포구중 하나인 덕은리나 복여울에 내린 물품이 배재를 통해 제천 내륙으로 옮겨지고, 이곳 물품이 이 고개를 통해 또 한강으로 나아갔으리라. 그러니 왕래가 많았을 것이고, 고개 아래 마을에는 의례 주막거리가 생겼겠지.

어디로 갈까 망설이는데, 윗집에 기계를 손보는 노인이 있다. 그 노인에게 길을 물을 요량으로 올라가는데, 도랑 가 수풀 속에선 이름 모를 새가 사람을 보고도 멀리 날아가지도 않는다.

 

할아버지 배재로 해 귀래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돼요?

 

70은 넘어 보이는 할아버지라 의례 귀가 어두울 거라 짐작하고 큰 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 저 아랫길로 올라가야 돼. 그런데 무슨 조사 나왔나.

아니요. 그냥 여행 왔어요.

, 이리로 그냥 넘어가도 저 아랫길과 만나.

고맙습니다.

 

나는 고생할 걸 각오하고, 할아버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대개 토박이들은 너무나 익숙한 길이라 쉽게 이리 가라 얘기하지만, 그게 처음 오는 사람에게는 미로이기 십상이다. 그렇지만 할아버지의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그 정도 고생쯤은 당연히 각오하기로 하였다.

예상대로 길은 미로였다. 본능에 의지해 낙엽송 네 토막으로 엮어놓은 나무다리를 건너 논둑길을 돌아 올라가는데, 저 아래 길은 또 갈라져 맞는 길인지 아닌지 고민하게 한다.

 

9.

에라 모르겠다 하고 올라간다. 이곳부터는 유난히 묵은 밭이 많다. 묵은 지 오래되지 않는 곳은 한창 꽃을 피우는 개망초로 덮여있고, 오래 된 곳은 키 작은 나무들이 이미 산으로 변해가고 있다. 버던의 넓이로 보아 이곳도 한때는 꽤 여러 집 살았을 터인데, 인가는 그림자도 없다.

비탈의 큰 밭에는 뽕나무를 빽빽이 심었는데, 가꾸는 이 없어 잡초와 뒤엉겨 있다. 키가 2M도 채 안 될 것 같은 거로 보아 심은 지 몇 년 되지 않았을 성싶다. 많은 기대를 가지고 심었을 나무들이 버려진 채 산뽕밭으로 변해 가는 모습이, 마치 가정의 희생 속에 고등교육을 받았지만 제대로 꿈도 펴보지 못한 채, 잔혹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 몰라라 팽개쳐진 우리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아 슬프다.

 

묵은 밭 돌무더기에는 칡들이 엉키고 있는데, 한여름 더위에 힘찬 광합성으로 내뿜는 몽롱하게 달콤한 칡 향기가 그만이다. 조금 더 올라가니 제법 넓은 공간이 나오는데, 바위들로 가득한 게 너덜겅인지 밭인지 구분이 안 된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바위들은 하나같이 작은 돌들을 이고 있어 탑 모양이다. 화전을 만들면서 옮길 수 없는 큰 바위에다 작은 돌들을 올려놓아서 생긴 것이리라. 이곳까지 밀려 온 화전민들은 그렇게 한 뼘 한 뼘 땅을 늘렸을 것이다.

잡초를 제거해놓은 돌밭에는 자라는 게 없이 빈 밭이고, 한 가운데 늙어 고목이 된 뽕나무와 무너진 돌담만이 이곳이 집터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고개 막바지다. 뒤돌아 산밑을 보니 백운 넓은 들이 아득하다. 나는 이곳을 오면서 문경새재 옛길을 염두에 두어, 호젓한 옛 고갯길을 기대했었다. 하지만 이 고개 위까지 찻길이 있고, 최근에도 이용한 흔적이 완연하다. 조금 실망하고 있는데 고개 위쪽에서 기계음이 들린다. 산 넘어서 나는 소리겠지 하고 고개마루에 올라서서 사방을 살피니, 능선을 따라 난 임도를 보수하는 포크레인 소리다. 이곳도 한갓진 여행지는 아니구나 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배추를 실은 트럭이 올라온다. 실망하며 바라본 안내 간판에는 이곳 이름이 '배재'도 아니고, '뱃재'도 아니고, 노골적으로 소리나는 대로 적어 '배째'다. 마치 실망한 나를 보고 '그래서 어쩌라고. 배 째' 하는 것 같아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10.

고개를 넘으면 강원도 귀래 땅이다. 이쪽 백운이 고원지대라 고개마루까지 힘들지 않게 올라왔지만 여기부터는 급경사다. 옛날 나라 잃은 경순왕이 이곳에 올라 멀리 용화산(지금의 미륵산인 듯) 미륵불을 바라보며 참회의 절을 하였다고 하는데 습기 높아 뿌연 하늘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급경사라곤 하지만 내려가는 길은 어렵지 않다. 백운 쪽과 달리 이곳은 길옆으로 계곡은 깊고, 20미터 이상 자란 낙엽송은 하늘을 찌른다. 길 아래로 작은 포도알 만한 열매를 가득 연 키 큰 나무가 있다. 혹시 돌배(이곳 배재가 배나무에서 유래됐다는 설도 있으니까) 아닐까 해서 내려가 보니 말로만 듣던 개살구다. 혹시 식물관련 학자들에게는 연구가치가 있지 않을까 싶다.

이곳 길가에는 두룹이 유난히 많고, 잣나무에는 잣이 익어 가는지 모두 입을 벌리고 있다. 산딸기들이 한 창 열매를 맺는데, 비온 끝이어서 인지 당도가 떨어진다.

 

인가가 가까워지면서 왼편으로 길이 보이고, 집이 두 채 있다. 그곳으로 넘어가면 충주 엄정 땅이리라. 이왕 온 것 그리 가볼까 하였지만, 오늘은 계획한 대로만 가기로 했다.

고개 밑 첫 번째 집은 스레트 집인데도 알루미늄 샤시로 마루 덧문을 해 달고, 알뜰하게 가꿔진 텃밭과, 접시꽃, 다알리아, 장미, 능소화가 곱게 가꾸어진 게 제법 삶의 윤기가 나 보인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꽤 부촌인 듯 싶다. 집들이 모두 잘 가꾸어져 있다.

동네가 끝나는(시작하는) 지점에 마을유래비가 있다. 약 300여 년 전에 강릉에서 안씨들이 이곳으로 이주해왔고, 다래나무를 걷어내고 농토를 일궈 마을을 열었다고 한다. 그래서 동네 이름이 다래골>다리골 이란다. 거의 정확한 고증이리라. 택리지에 보면 강원도 산간지방이 본격적으로 개발된 때가 숙종 전후였으니, 이곳도 그 때 개발됐을 성싶다.

비석에서 눈을 떼고 다시 배재를 올려보니 까마득하다. 단종이 이곳을 지날 때는 이곳에 마을도 없고, 다래덩굴 덮인 산 속이었겠지.

 

조금 내려오니 요즘 보기 힘든 밀밭이다. 차가 내려온다. 피곤한 몸이었지만 태워달라고 손짓하지 않는다. 걷기로 한 곳까지 걸어야지. 이곳도 외지인들이 터를 잡기는 마찬가지다. 대궐같이 큰집을 짓고 살고 있다. 사는지 안 사는지 모르겠지만.

 

귀래 면소재지에 내려왔다. 이곳은 행정명으로 운남리이지만 토박이들은 너더리라 부른다. 옛날 경순왕이 이곳에 행차한다고 해 마을 사람들이 큰 개울에 널판자로 다리를 놓았다고 해 생긴 이름이란다.

 

고양시로 돌아오는 길은 원주를 경유하기로 했다. 이곳에서 원주행 직행버스는 수시로 있고, 원주에서 화정터미널 오는 고속버스가 있다. 원주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마침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이어 탈 수 있었다. 화정터미널까지는 2시간. 편안한 마음으로 창밖을 보니 땅거미가 진다. 한 여름 삼사십리 길을 걸은 피로감에 눈을 감는다.

 

-끝-

 

<2003. 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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