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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1/21
    수단 항구 (PORT - SUDAN) (1994)
    풀소리
  2. 2005/01/20
    장모님과 함께 매실을 따며...(1)
    풀소리

수단 항구 (PORT - SUDAN) (1994)

이 한 권의 책을 권하며.

제목 : 수단 항구 (PORT - SUDAN) (1994)
올리비에 롤랭 지음 / 우종길 옮김
도서출판 열린책들에서 1999년 8월 초판 간행

‘수단항구’는 세상과 사랑하는 여인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을 그린 소설입니다. 사랑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이별의 이야기, 단절의 이야기이기도 하지요. 이 소설을 구상하고 집필하면서 내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이 시대와 이제는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 감정, 느낌, 관념들을 지닌 인물을 그려 내는 것이었습니다. ……. 실패한 혁명에 대한 미련과 나르시스적인 향수가 이 소설의 동기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역사가 진정으로 우리 삶 속에 파고들었던 그 시절, 유럽의 도덕적 몰락을 다 함께 염려하던 그 시절, 살기와 쓰기의 접점을 추구하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작가의 말

위의 글은 이 소설책 맨 뒷장에 나오는 작가의 말이다. 혹 이미 읽으신 분들도 있겠지만 예민한 분들은 읽지 않고 위의 작가의 말만 읽고도 어떠한 소설이라는 것을 짐작하실 게다.

이 소설은 68혁명을 함께 겪은 두 남자와 이후 세대인 한 여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이다. 한 남자는 혁명실패 후 자청하여 유배를 떠나듯 외항선에 올랐고, 한 남자(A)는 소설을 계속 썼으며, 한 여자는 A를 사랑하다 끝내 그를 버리고 떠나버린다. 외항선에 오른 남자는 더 이상 배를 탈 수 없어 스스로 택한 유배지 수단항구(영어명 Port of Sudan)에 정착한다. 그러던 어느날 A가 죽었다는 소식과 함께 ‘여보게 친구’로 시작하였지만, 더 이상 글을 잇지 못한 그 친구의 편지를 받아보고는 25년 만에 프랑스로 떠난다.

유배.
그렇다 유배다. 우리도 동시에 겪은 유배다.
애국적 사회 진출이다 뭐다 온갖 화려한 수식어가 붙는다고 하더라도 80년대를 몸으로 겪은 사람들이라면 자본주의 사회질서에 편입된다는 게 유배가 아니고 무엇이랴.
수십 년째 내란으로 무정부상태에 빠져 있는 나라.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무역선이 오고 가기도 어려운, 그 나라 유일한 국제항구. 살인과 폭력이 난무하고, 마약과 인신매매가 횡횡하는 곳. 뜨거운 누비아 사막의 모래바람이 수시로 불어오고, 시체를 찾아 헤메이는 독수리떼가 어슬렁거리는 곳. 이곳이 유배지 수단항구의 모습이다.
여러분은 어떠한가. 현재 그대들이 가 있는 유배지는 어떠한가. 이보다 형편이 좀 나은가.

'여보게 친구’. 그리고 더 이어지지 못한 편지. 자살.
A가 택한 유배지의 삶은 어떠할까.
항구의 사나이는 편지 한 통을 들고 프랑스로 향한다.
‘여보게 친구’ 다음에 썼을 편지 내용은 무엇일까. 항구의 사나이는 생략된 부분을 재구성 해보고자 한다. 재구성해가는 과정, 그것이 이 소설의 줄거리이다.
그러기에 항구의 사나이가 스치는 프랑스에서의 여정은 A가 택한 유배지에 대한 순례이며, 동시에 엄숙한 참배이기도 하다.

‘우리, 즉 A와 나는 약 25년 전(1968년)에 서로 알게 된 사이였다. 우리는 그 당시에 원대하면서도 막연한 희망을 공유하고 있었다. 세상을 변화시켜 보겠다는 그 이상에는 모험으로 가득 한 삶에 대한 기대감이 뒤섞여 있었다. 나는 그 시절을 결단코 경멸하지도 않을 것이고, 그것을 비웃는 사람들에 합류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 후로 갖가지 심각하고 까다로운 일들을 수도 없이 겪게 되었지만, 그 당시 우리의 사전에는 두려움도 시기심도 비겁함도 없었다. 우리는 신을 믿지도 않았지만, 우스꽝스럽게도 부르주아라는 화신을 가진 악마를 신봉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지극히 대담했으며 다감했다. 우리의 젊음을 욕되게 하지 않기에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이윽고 그것도 끝이 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무기력한 세계가 승리를 거두었고, 그런 세계에 대항하던 우리의 젊은이다운 활력은 이미 고갈되었으며, 다른 시대에도 그랬듯이 절대적인 신념은 정치로 썩어 들어 갔고, 관객들은 뻔해진 싸움의 결말에 박수를 보냈다.’

소설은 이렇듯 기죽을 만치 현란한 수사로 가득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이책을 다 읽고 나면, 이것은 작가의 문장력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A에 대한 조사(弔辭)임을 알게 된다. 그렇게 이 책은 A에 대한, 한 시대에 대한 조사로 시작된다.

한 때는 모두 한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고 믿었으나, 이제는 황량한 벌판에 추락한 비행기의 생존자들처럼, 먹을 것인가 먹힐 것인가 서로 노려보며 으르렁거리는 곳. 그곳은 작가의 말대로 오히려 ‘정직’한 곳인가. 연봉이 인격이 되고, 인격이 명성이 되고, 명성이 다시 돈이 되고…. 놀이판은 미친 듯이 돌아가고, 그곳에서 떨어질까봐, 그곳에 끼이지 못해 안달을 하고…. 온갖 외면과 자기 합리화로 떡화장을 하고, 판단을 가진자들의 도박판이 되어버린 여론에 맡겨둔 채 패배가 예정된 싸움일지라도 한 번 싸워보지도, 준비해보지도 못하고 격류에 휩쓸려가는 곳. 혹시, 그곳에…..

그렇다고 이 소설은 결코 정치적인 선전을 담은 팜플렛은 결코 아니다.
예견되었기는 하지만, 동구와 소비에트의 붕괴와 자본의 전 세계적인 승리와 한 놈에게 모두 몰아주자는 신자유주의의 득세는 사회주의자들에게는 넋 놓을 충격 그 자체였다. 1990년대 초반은 그 충격을 추스리는 시기였다면, 이 책은, 그런 충격으로부터 벗어나면서, 우리에게 이제 우리는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를 진지하게 묻고 있다.

<2003.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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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모님과 함께 매실을 따며...

장모님과 함께 매실을 따며…

지난 연휴 기간동안 아내의 고향에 가 매실을 땄습니다.
아내의 고향은 경남 하동 섬진강 근처에 있는 궁항(弓港) 이라는 마을입니다.
처갓집은 지금 진주 시내로 이사하여 살고 있지만, 부지런한 장인 어른은 이곳 마을 뒷산에 과수원을 가꾸었습니다.
이곳 산은 우리 고양시에 있는 펑퍼짐한 산들하고 매우 다릅니다.
대개 평야와 산이 곧바로 만나는데, 경사가 급한 게 마치 바다에 떠 있는 섬들과 비슷합니다.
처갓집 산도 그렇게 마을 뒤에 가파르게 붙어 있습니다.

작년까지 나는 이곳에 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곳에 가지 않아도 철이 되면 매실이 올라오고, 알밤이 올라오고, 단감이 올라왔습니다.
부지런하신 장인께서 가꾸고, 거두어 정성껏 보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올 해는 한 달 전부터 장모님이 아내를 조르기 시작했습니다.
5월 말이나 6월 초에 꼭 좀 내려오라고. 매실 좀 따 가라고.
장인 어른이 지난해 연말 위암 수술을 해서 이제 매실을 딸 사람이 없었습니다.
주렁주렁 달려 있을 매실이 너무 아까워 우리라도 와서 따갔으면 한 것이지요.

아내와 나 그리고 성연이는 지난 6일 진주로 출발했습니다.
연휴(?)의 시작이어서인지 고속도로는 무척 막혔습니다.
5시간이면 충분할 터인데 7시간 걸려 진주 처갓집에 도착했습니다.
피곤하였지만 처남과 동서부부의 거나한(?) 접대술을 기꺼운 마음으로 받았습니다.

다음날 장모님은 새벽부터 서둘렀습니다.
자루도 챙기고, 모자, 수건, 도시락에 생수까지 챙겼습니다.
그래도 게으른(?) 아내 덕분에 7시 30분쯤 느지막이(?) 하동으로 출발했습니다.
처남과 동서는 출근하였고, 처갓집 산이 험해 아이들과 아이 엄마들은 집에 남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장모님과 나 단 둘이 떠나게 되었습니다.

남도의 풍경은 언제 보아도 색다릅니다.
특히 빽빽한 대숲은 추운 중부 내륙에서 자란 나에게는 언제나 이국적입니다.
국도를 이용해 하동방향으로 접어들었습니다.
나는 초여름 남도의 풍경을 감상하며 천천히 갔으면 했는데, 아침 출근이 바뿐 차들은 편도 일차선 60km 제한속도 도로를 80-90km로 질주합니다.
마음 약한 나도 이 차들을 따라 80-90km로 달렸습니다.
덕분에 일찍 도착하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처갓집 산은 동네 바로 뒤에 있었습니다.
차를 산 밑 끝집 앞에 세워두고 짐을 챙겨 올라갔습니다.
장모님은 벌써 걱정이 많습니다.
사랑스런(?) 막내 사위가 험한(?) 산에 오른다는 게 영 안타까웠나 봅니다.
그래도 산타기는 한 때 빨치산 소리를 들은 난데 말입니다.

산 입구에 대밭이 있습니다.
맹종죽이라 불리는 아주 굵은 대나무입니다.
굵은 대나무 사이로 이제 막 솟는 죽순, 몇일 전까지 죽순 소리를 들었을, 이제는 하늘로 찌를 듯 커가는 새 대나무.
남도에 단합대회 갔던 때가 생각났습니다.
새벽 일찍 대나무밭에 들어가 한 참을 돌아다니다가 아침시간에 맞춰 돌아 왔더니 그 곳이 고향인 사람들이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무척 걱정들을 했습니다. 대숲에는 뱀들이 많이 산다나요.
그래도 나는 지금도 대숲이 좋습니다.
대숲 옆으로 뻥 뚤린 공간이 나옵니다.
밤나무가 군데군데 서있고, 바닥을 보니 키 작은 차나무들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습기 머금은 남도의 검은 산 흙은 보기만 해도 비옥해 보였습니다.
어떤 나무, 어떤 식물도 건강하게 키울 것만 같은데 제일 먼저 눈에 거술리는 건 귀화식물인 자리공이었습니다.
비옥한 토양 탓인지 나무처럼 굵고, 어떤 놈들은 사람 키를 훌쩍 넘을 정도로 키 크게 자란 게 징그럽게 까지 보였습니다.
이제 지난해 태풍에 쓰러져 길을 막고 있는 커다란 밤나무를 자를 차례입니다.
이 촌놈을 샌님으로 알고 계시는 장모님은 톱을 빼든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봅니다.
많이 해봤습니다 하였지만 그래도 여전히 걱정이십니다.
쑥싹 쑥싹 다행이 톱은 아주 잘 들었습니다.
굵은 밤나무 토막을 내 길 한쪽으로 치웠습니다.
그제서야 믿음이 가는지 장모님은 뿌리 쪽으로 한 토막 더 자르라고 합니다.

불과 몇 걸음 더 가니 매실나무가 나왔습니다.
와. 이렇게 커 하고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나는 매화나무가 커 봐야 사람 키 정도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5-6m도 넘어 보였습니다.
우리는 높은 곳부터 내려오면서 매실을 따기로 했습니다.
얕은 가지는 장모님이 따시고, 나는 높은 가지를 갈고리로 휘어잡고 땄습니다.
혼자 안 되는 건 힘을 합하고 그래도 안 되는 건 톱으로 잘라 땄습니다.
두 개 따면 하나를 흘리네 하고 장모님은 당신의 늙으심을 한탄하셨지만, 나도 10에 하나 둘은 흘렸습니다.
가지에 매실이 주렁주렁 열렸어도 흘린 매실이 아까워 가지를 놓고 주우러 갑니다.
99마리의 양떼보다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을 더 생각한 것이 예수님의 편애인줄 알았는데 그게 그렇지 않음을 깨달았습니다. (사실과 다르더라도 기독교인 여러분들의 넓은 이해 있으시길)
모두를 아끼고 사랑하면 자연 그렇게 되겠지요. 그게 또 농부의 마음이기도 하고요.

오후 1시 30분이 넘어서야 점심을 먹었습니다.
하나라도 더 따야겠다는 욕심에 시간가는 줄 몰랐기 때문이지요.
매화나무 가시에 긁힌 상처마다 길게 피자국이 남았는데도 아픈 줄 모릅니다.
장모님과 나는 장인어른이 만들어 놓은 샘물 옆 그늘이 시원한 통나무 평상(?)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장모님은 반찬이 부실하다고 연신 미안해 했지만 나는 맛있기만 했습니다.
도시락을 후딱 비우고, 주먹만한 토마토 하나를 다 먹고, 큼지막한 매실자루 하나를 메어 밑으로 내려 놨습니다. 그리고 길도 없는 비탈을 타고 산을 올랐습니다.
장인 어른이 가꾸어 놓은 산을 온전히 보고도 싶었고, 등성이에 올라 사방을 조망해보고도 싶었습니다.
한 해 동안 손길을 타지 않은 산은 이미 풀들로 우거져 있었습니다.
없는 길을 헤치며 산으로 올라가니 그곳은 조그마한 밭도 있고, 한결 평평했습니다.
커다란 밤나무 사이 사이에는 조그마한 차나무들이 잔뜩 심어져 있었습니다.
참으로 부지런한 장인이십니다.

내려와 다시 매실을 따기 시작했습니다.
군말 없이 매실을 따고, 아버님이 가꾸어 놓으신 산을 돌아보는 막내사위를 보면서 아음이 편해지셨는지 장모님 말씀이 한결 늘었습니다.
둘째 아들 속썩이는 얘기부터, 큰 아들 고생하는 얘기. 큰아들 집 산 장한 얘기. 앞으로 재산은 어떻게 하겠다는 얘기.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시면 어떻게 사시겠다는 얘기. 너희는 어떻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얘기. 얘기는 끝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렇게 속에 있는 얘기를 다 하니 시원하시다고 하십니다.
노래를 못하는 사람이 더 많이 병에 걸린다고 난 알지도 못하지만 그럴듯한 얘기를 하십니다.
아버님이 매사 속으로만 삭이시니까 암에 걸렸다는 얘기도 덧붙이십니다.
이제 내려가자 하시는데 시계를 보니 4시 30분 경이었습니다.
매실을 메고 내려가기 좋을 크기로 자루에 담아 메고 내려왔습니다.
앞서 가지고 내려간 것 빼고도 네 자루. 네 번을 져 날랐습니다.
차 대논 끝집 마당에서 자리를 펴고 매실을 골라 다시 자루에 담고 무게를 재어보았습니다.
20kg짜리 자루가 세 개, 22kg짜리 자루가 한 개, 도합 82kg입니다.
속으로 대견했습니다.
장모님도 흐뭇해 했습니다.

돌아 오는 길에 장모님 말씀이 갑자기 없어졌습니다.
돌아 보니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젊은 나도 피곤한데 오죽하시겠습니까.
말씀 안 하신다고 맨날 그냥 넘어가는 게 우리들이지요.

올라오는 차에 장인어른이 매실을 잔뜩 실어 보내셨습니다.
달라고 미리 맞춰 놓은 곳에 나눠 주고, 나머지는 모두 술을 담그고, 진액을 만들겠다고 아내는 말합니다.
사겠다는 사람들이 많은 데도 팔지 않겠다고 합니다.

비록 농장에서 나온 것처럼 굵고 매끈하진 않아도 생전 소독 한 번 하지 않은 무공해 매실입니다.
술독에 술이 익을 때 한 번 모여 술 한 잔 합시다.
<2003년 6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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