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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짝사랑을 버리다

날짜 2002-02-24

 

 

  올 한해는 무척 다양한 일들이 가득 펼쳐지게 될 것이다.
  민주화 투쟁의 한 상징으로만 알고 있던 김대중이 훌륭한(?) 정치인이 되어 고령의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이제 임기의 마지막 해가 시작되었다.
  올해는 또다시 대통령을 뽑게 될 것이다.
  

  오랜 꿈은 반드시 성취되는 것일까?
  3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암울함을 넘어 참담하기만 했던 70년대부터 대통령 꿈을 키워온 사람들, 김영삼과 김대중은 끝내 대통령이 되고, 그 자리의 영욕을 한없이 체험했다.
이제 남은 것은 김종필 뿐인가?
  하지만 이제 우리 나라 사람들의 정치의식이 김종필까지 대통령을 시켜줄 만큼, 더 이상은 어리숙하지 않다.

  

  다만 이럴 것이다.

  

  '김대중도 별 수 없네'
  '역시 구관이 명관이야'
  '지들끼리 다 해 먹으라고 해!'

 

  물론 정치와 정치하는 사람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말은 아니다.
  우리 이웃들의 말이고, 생각이고, 또 그 말과 생각은 머지않아 행동으로 옮겨질 것이다.
아니, 행동하도록 강요받을 것이다.
  법조문이 보장한 국민 방청권까지 무력하게 만들며, 국민을 정치로부터 소외시키고, 무시하는 정치권이 유일하게 국민들의 정치적 각성과 참여를 독려하는 때가 온 것이다.(물론 이러한 최소한의 배려조차 받지 못했던 오랜 시간을 때론 싸우고, 때론 견뎌낸 결과로)

  그런데 이러한 강요는 기존 정치권보다는 신진 정치세력으로부터 더 심하게 받게 된다.
  특히 상대적으로 자신들이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 의해서......
  마치 선거에 참여하지 않거나, 무관심한 국민들의 대다수가 자신들의 편이라고 생각하는 듯 말이다.
  맞는 생각일 수 있다. 정치적 무관심(?)을 보이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어쨌든 찍어야 한다면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쪽에 표를 줄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나 역시 항상 그렇게 해왔다.

  하지만 국민을 대상으로 정치적 무관심에서 벗어나 선거에 참여하라고 독려하는 사람들은 여기에 또 다른 자신들의 욕심 하나를 더 보탠다.

 

  '그 중에서도 가능성 있는 사람을 찍어야 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거기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을, 생각 없이 과격한 행동만 일삼는 '단순무식 과격분자'로 몰거나, 현실을 외면하고 공허한 구호만 외치는 '몽상가' 쯤으로 치부해 버린다.

 

  진지하게 생각하는 배우로 한때 나를 매료시켰던 문성근이 지난해부터 노무현을 다음 대안으로 내세우는 활동을 하고 있다.
  그가 전남의 한 대학에서 자신의 솔직함을 하나도 감추지 않고 '노무현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을 얼마 전, 컴퓨터에 떠다니는 동영상으로 보게 되었다.
  그의 이야기는 나를 설득하기에 충분했다.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에 성공했음에도 이 땅의 정치가 한치의 발전도 없는 것은 모두 우리 사회에 팽배한 '지역주의' 때문이다.
  그러니 다음 대통령은 이 지역주의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 정치사에서 지역주의의 벽을 넘어서서 실천해온 정치인은 '노무현' 하나밖에 없다.
  이제 노무현을 우리의 다음 대안으로 삼아야 한다.

 

  정치 이전에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문제들에 대한 노무현의 생각과 말과 실천들을 잘 알고 있고, 또 그것들에 대해 높은 점수를 주고 있는 나로서는 이 동영상을 이곳 저곳 퍼나르며, '나는 이 사람을 착하다고 생각한다' 라는 말을 덧붙이는데 한치의 망설임도 없게 했다.

  그런데 며칠 전 강준만 교수가 '말'지와 나눈 인터뷰 기사를 보면서 나는 나의 판단과 행동이 경솔했음을 가슴 아프게 후회하고 있다.(강준만 인터뷰 기사 보기)
  '김대중 죽이기'를 비롯해 많은 책과 말로 김대중 만들기에 큰 공헌을 한 강준만은 그 인터뷰에서 문성근과는 다른 '현실론'을 강조하고 있었다. 물론 그를 비롯해 그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현실론'을 내세우지 않은 적은 한번도 없었고, 그걸 다시 한번 확인한 것은 나에게 별로 큰 충격도 아니어야 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 덕분에 나는 그토록 빠지기 싫었던 '현실론'에 나 역시 빠져들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스스로에게 하고 싶은 욕을 대신 강준만에게 보내고 있었다.

 

  지난 90년대부터 선거 보이콧이나, 현실적 대안으로 나를 설득하는 많은 동료 친구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백기완, 권영길 그리고 진보정당의 후보들에게 표를 던진 나의 생각은 이것이었다.

 

  '현실론도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 내가, 가장 철저하게 평등사회를 향한 실천에 매달리는 사람들을 지지하지 않는다면, 곧 우리에게는 그 어떤 현실적 대안들도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진보를 꿈꾸면서도 현실을 핑계로 진보의 편에 서지 않는다면 더 이상 우리에는 꿈도 희망도 없다'

  '현실 정치에는 희망이 없다고 나도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의 꿈을 실현하는 과정에 소중한 공간인 선거를 포기할 수는 없다. 우리의 꿈을 대변할 사람이 국회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해도, 그들이 선거공간을 통해 말하고, 실천하는 것까지 무의미하지는 않다'

 

  오래 전부터 가져온 노무현에 대한 나의 짝사랑을 반성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노무현의 현재를 너무 생각하지 못한 나의 경솔함을 반성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이제 현실론에 힘입어 현실 대통령이 되고자 나서고 있다.
  그런 그가 싫어진 것도 그런 그를 나쁘다고 이야기 할 생각도 아니다.
  그는 어차피 현실 정치인이니까.......
  그 역시 현실 정치인일 수밖에 없고, 그런 그가 이제 김대중을 마침내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현실적 대안론에 힘입어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현실적 대안'일 뿐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오랜 경험 속에 만들고 지켜온
나의 꿈과 원칙을 어처구니없게 잊을 뻔한 나를 꾸짖고 싶은 것이다.

 

  나는 문성근의 강연을 퍼나르면서 이렇게 말했어야 한다.

 

  '노무현이라도 좋고, 김근태라도 좋다. 현실에 안주해서 결국 보수를 대변할 수밖에 없는 현실 정당으로부터 나와서, 민주당의 대표가 아닌 진정한 민중의 대표로 대통령 선거에 나서라.'

 

  그리고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끼자마자, 나는 노무현에 대한 짝사랑을 바로 버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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