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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의 사랑을 읽고

지난 달 손석춘님의 <유령의 사랑>을 감명깊게 읽었다. 찔찔 짜면서 책을 읽었다는 뜻이다. 그 책의 주인동은 마르크스네 하녀였고, 그 책은 헬레네데무트라는 이름의 마르크스와 또다른 사랑을 나눈 여인의 일기를 형식으로 구성돼 있었다. 손석춘님의 글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분간하기 어렵다는 거다.

우선 직업이 기자인 주인공 한민주는 마치 손석춘 님 자신인 듯한 착각을 일게 만들었고, 이리 저리 들어보니 빨치산의 아들이란 얘기도 있는 걸 봐서 절반이상 자신을 그려놓은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아름다운 집을 본 뒤 내가 가졌던 물음표를 약간 해소해주는 대목에서 더욱 그렇다. 왜 북한사회, 북으로 올라간 사람과 그 사회를 뚫어지게 보려했던가? 아름다운 집도 일정정도 사실에 근거한 픽션이라고 할 때 집요하게 추적했던 이유는 무엇을까 늘 궁금했었다.

그 책에서 보면 아버지의 존재를 찾고자한 갈망과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운동하기 어려웠던 사회적 분위기와 조건 들에서 어렴풋 궁금증이 해소된다. 또한 마르크스에 대한 갈증도 마찬가지같다. 어느 정파적인 입장 때문이라기보다는 변혁운동의 순수성을 간직하고픈 그런 것 아닐까. 주인공 헬레네데무트는 노동자였고, 그의 시각으로 본 마르크스는 부단히 시대와 자기와 투쟁하고 안주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인물이었다. 마르크스가 노동자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보여준다. 선물로 들어온 한 여인이 노동자로 성장하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노동자가 계급성을 갖기위해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듯하다. 또 쓰고 또쓰고 고쳐쓴 마르크스의 책을 나는 제대로 읽었봤는가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단지 천재이기 때문에 당연시했던 작품들이 하나 하나에 얼마나 깊은 애정과 노력을 쏟아 부었는지 세심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이 픽션이 일지라도 작가는 마르크스의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면서 닮으라 얘기하는 것 같았다.

오늘도 겨우 마감을 끝내고 기운이 쭉 빠져서 집에 가기 힘들 정도다. 조금 전 만두 2개와 밥을 한 숟가락 뜨고 몸을 움직여야 하는데...미뤘던 지인들에게 전화하고, 얘기 좀 하다보니 벌써 시간이 너무 흘러가 버렸다. 나는 얼마나 노력하며 사는지, 변혁을 꿈꾸는 자, 노동자로서 나는 무엇을 지금 실천하고 있는가? 비교하며 스스로를 돌이켜보게 한 책이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중년의 사랑과 마르크스의 사랑을 연관지어 좀 어색했다. 사랑이라는 제목때문에 그랬을까? 마르크스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싶었던 나에겐 억지로 꿰어놓은 듯한 느낌이 강해서 데무트와 그 아들의 이야기가 끝난 뒤부터는 책장이 잘 안넘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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