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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글]야구광 대통령은 필요 없다

  • 등록일
    2009/03/30 20:34
  • 수정일
    2009/03/30 20:34

이 글은 야구블로그 '야구라(http://yagoora.tistory.com)에서 퍼온 글임.

'야구 칼럼'이란 일부 기자들이 내뱉는 '독심술' 수준의 글이 아니라,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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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구 보느라 잠도 못잤다"
"대표팀처럼 악착스럽게 경제 살려야"
"한국야구 덕에 우승보다 더 값진 자신감 얻었다"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준우승 만들었다"
"WBC 결승 진출 힘은 애국심과 명예다"
"나쁜 조건에서 뜻밖의 결과 내는게 한국인이다. 대표팀도 그러지 않았느냐"
"한국 야구 실전에서 강하듯 한국은 어려움 닥치면 세다"
"대표팀이 경제 위기 해법을 보여줬다"
"WBC 정신으로 경제 위기 극복하자"
"대표팀이 좋은 성과를 거둔 것은 그들 가슴에 '대한민국 승리'라는 큰 목표가 있었기 때문"
"한국 경제도 야구처럼 뜻밖의 성과 낼 것"

어느 야구 '오덕후'의 블로그 포스팅 목록이 아니다. 야구팬들이 잔뜩 모인 사이트의 게시물 목록도 아니다. 다름아닌, 청와대 수장 이명박이 이번 WBC 기간에 했던 발언을 모아놓은 것이다.



발언들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명박은 대회 기간 내내 입만 열면 야구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야구와는 별 관련이 없는 주제를 이야기할 때도(가령 경찰 기강 해이를 질타하거나, 공무원들의 도덕성을 강조할 때) 어떻게든 발언 내용 중에 야구 대표팀 얘기를 끼워넣었다. 야구 얘기를 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처럼 보인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정도가 심한 야구광이 몇 명 있긴 하지만, 그들도 저 지경으로 매사를 야구와 연결지어 말하지는 않는다. 이정도면 한국 대통령은 야구팬 수준을 넘어 '야구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게다.

야구광이 대통령이 되었으니 야구계에 뭔가 좋은 일이 생길까? 한 가지 있다. 지난해 베이징 올림픽 끝난 뒤에도 그랬지만, 이번 WBC 대표팀도 귀국하자마자 청와대에 초대되어 밥 얻어 먹었다. 말로만 듣던 파란 기와집에서 식사도 하고, 최고 권력자와 악수도 나누고, 사진도 찍었다. 그리고 "병역 혜택 주세요"랑 "인프라 만들어주세요", 요렇게 두 가지 청원도 넣었다(물론 이건 지난해 한 선수의 "돔구장 만들어 주세요"와 마찬가지로 대답없는 메아리다).

그 외에는 좋은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야구광이 대통령이 되었는데도 야구계는 아무런 혜택 받을 것이 없다. 왜 그럴까? 야구광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일반 국민으로서의 야구광에게 프로야구 선수들은 가까이 다가가기 힘든 대상이다. 그가 아무리 밥 사준다, 선물 준다고 해도 야구 스타들이 상대해줄 가능성은 희박하다. 하지만 최고 권력자가 된다면? 그 좋아하는 선수들을 바로 눈앞에 불러놓고 사진찍고 얘기하고 함께 식사하는 일이 가능하다. 싸인을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도, 유니폼을 얻어입는 것도, 전부다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일반 야구팬이라면 꿈도 꾸기 힘든 최고의 체험을, 대통령이 된 야구광은 마음껏 누릴 수 있다는 얘기다(이게 쓰레빠 신은 아들놈을 히딩크와 함께 사진 찍힐 때 하던 짓과 뭐가 다른지는 잘 모르겠다).

결국 문제는 대통령이 '야구광'이었다는 점이다. 차라리 야구를 적당히 좋아했거나 별 관심이 없었다면 야구계가 가진 문제점에 대해 듣고 개선책을 만들어줄 정도의 '여유'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명박은 야구를 너무, 미치도록, 입만 열면 야구 얘기만 할 정도로 좋아하다보니 막상 선수들이 눈앞에 나타나자 그런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사진찍고 악수하고 얘기 듣는데 정신이 홀딱 팔려, 그야말로 '팬'으로서의 욕구에만 충실했던 것이다. "나 이종범 아자씨한테 싸인 받았다~"라고 자랑하는 초딩 아이와 야구광 대통령 사이에는 아무런 근본적인 차이도 없다. 초딩 아이가 야구계의 미래에 아무 관심이 없듯이, 야구광 대통령도 야구계의 복잡한 골치거리에는 관심이 없다. 같이 밥먹고 시간 보내서 행복하면, 그걸로 장땡이다. 게다가 그걸로 지지율도 올라가고 공안통치가 가져오는 공포감을 희석시킬 수 있다면, 더욱 좋지 아니한가.

부연. 내년에는 대통령의 '야구광' 증세가 축구 쪽으로 옮겨가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월드컵으로 또 1년 대충 뭉개면 임기 반은 지나간다. 이 얼마나 축복받은 군주인가.

부연 2. 청와대까지 가서 밥만 먹고 돌아올 거라면, 그 앞에 있는 '큰기와집'에서 제 돈 내고 밥 먹는 것과 다를게 무엇인가. 음식 맛도 청기와집보다는 큰기와집이 훨씬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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