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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위기와 에콰도르 '사회주의 헌법'

경제위기와 에콰도르 '사회주의 헌법' (9월 30일)

 

- 베네수엘라, 볼리비아와 함께 남미좌파 3국중의 하나인 에콰도르

 28일 치러진 개현안 국민투표에서 64% 찬성으로 개헌안이 통과됐다.

개헌안의 내용은 이렇다.

 

* 석유 석탄 통신 분야의 국가 통제및 규제강화,

* 일부 외채 '불법'규정및 상환거부,

* 국가에 유휴농지 몰수및 재분배 권리 부여,

* 외국 군사기지 금지

* 동성 결합에 이성 결혼과 동등한 권리 부여

* 가정 주부, 비정규 직 노동자에 사회보장 혜택 부여  (한겨레 신문 9/30)

 

- 한편, " 고통이 없고 공평하며 정당한 에콰도르" 를 위한 토대를 마련하였다고 자평하고 있는 코레아 대통령은 그의  권한도 크게 강화시켰는데, 이를 두고 AP통신은 독재정치의 우려와 " 야심찬 사회보장 프로그램의 비용을 어떻게 조달할지 의아 스럽다" 로 논평한다. 빈국이고 석유의존도 크다는 우려가 포함되겠다.

 

- 그런데, '사회주의 바람' 이 불고있는 남미 반대편에 위치한  한국경제가 심상치 않다.

 

 

* 고삐 풀린 환율 한때 1200원 - 원화값 28원 떨어진 1188.80원 ----- 4년 9개월만에 최저

* 당분간 약세 예상 ---- 4분기 1300원 갈수도

-> '미국발 금융위기에 대한 불안 심리, 이에 따른 외화 유동성 부족상태, 매물은 없고 '사자' 만 넘치는 수급 불균형등이 작용하며 원화값이 단기간 더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 M&A 매룰로 나오는 건설사 - 유동성 위기로 중견없체 20-30곳 줄줄이 '대기'

 -> ' 미국발 금융소크 여파로 국내 금융회사들이 건설사에 대한 만기 연장이나 신규대출의 끈을 조이면서 건설업체들이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다.'

 

* 키코 중소기업들 " 더는 못견디겠네" - 원화값 1200원땐 10곳중 7곳 부도위기

-> ' 수출 중소기업 A사는 환율이 923원 정도인 시기에 930원 약정 환율로 100만 달러를 키코 상품에 가입했다. 녹인 환율은 947원, 녹아웃 환율은 905원. 환율이 내려가도 이회사가 수혜를 입을수 있는 금액은 연간 고작 3억원이다. 하지만 환율이 1200원 대로 급등한 29일 이 업체의 손실 규모는 64억 8000만원까지 늘어났다.

녹인 구간에 이르면 약정 금액의 2배에 달하는 달러를 낮은 환율로 은행에 상환해야 하기 때문이다. 29일 장중 한때 원달러 환율이 1200원을 넘어서자 통화 옵션상품 키코에 가입한 중소기업들도 혼란에 빠졌다. 환율이 1200원대를 넘어서면 중소기업 68.6% 가 부도에 이를수 있다는 조사결과가 현실이 되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급속도로 퍼지고 있는 것이다.'    (매일 경제 9/30)

 

 - 위 경제지표의 변화양상은 어떻게 발전할 것인가?!

이미,  미국발 위기가 한국 실물 경제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이후의 양상 말이다.    

그 경제적 영향이란 다수의 민중생존권과 직결된다는 측면에서 우리 전체문제다.

 

- " 이명박 정부가 세계적으로 이미 몰락의 과정을 밟고 있는 신자유주의를 추종하며 계속 시대 흐름에 역행할 경우 양극화를 더욱 심화 시켜 내수 기반과 성장 잠재력을 더욱 약화 시킬 전망" (유종일 한국 개발 연구원 국제 정책 대학원 교수) 은 당연하다.

그리고, " 특히 금산 분리 완화, 금융지주회사 규제완화, 투자은행 육성등은 실패한 미국 금융보다도 훨씬 위험한 길을 가겠다는 것" (유종일) 이라는 지적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 경제위기에 직면한 한국경제의 타개책으로,

다시말해, 이러 저러한 이유로 인한 자본주의 모순에 기인한 현재의 세계적이고 한국적인 경제위기적 사태에 대한 대안으로, '에콰도르류'의  헌법개정은 어떤가?!

비현실적인가? 오히려 가장 설득력 있어 보이지 않는가? 민중들의 보편적 가치가 추구되는 평등한 세계를 향한다고 했을때 ------.

 

 

* 석유 석탄 통신 분야의 국가 통제및 규제강화,

-> 한국형 : 석유, 가스, 전기등 에너지 부분의 국영화.

      (덧붙여, 물, 통신, 의료, 교육, 방송부분의 국가 통제및 규제강화)

 

* 일부 외채 '불법'규정및 상환거부,

-> 한국형 : 금융에 대한 엄격한 규제와 통제장치 강화

 

* 국가에 유휴농지 몰수및 재분배 권리 부여,

-> 식량주권론과 환경권에 근거한 농업 정책.

-> 비 농업 생산적 농지 몰수및 경자유전권 부여

 

* 외국 군사기지 금지

-> 주한 미군기지 철수

 

* 동성 결합에 이성 결혼과 동등한 권리 부여

-> 성적 소수자 권리 합법화

 

* 가정 주부, 비정규 직 노동자에 사회보장 혜택 부여  

-> 비정규직 양산하는 현행 비정규직 법 철폐.

-> 가정주부 노동자 인정법과 이에 준하는 사회보장 혜택 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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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단노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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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사내 현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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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단노회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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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었을때 나타나는 현상

끊었을때 나타나는 현상

 

- 끊음은 연결의 파괴행위이다.

곧, 상대에 대한  강력한  전쟁 선포이다.

 

- 절단의 유형은 여러가지이다.

10수앞을 내다 봐야, 아니 그이상을 내다봐야 그 끊음이 현실화 될수있는 경우의 수에서 부터,

 '일단 끊고보자' 의 단순 무식형에 이르기 까지.

그런데, 직접형에서부터 간접형까지, 혹은 단순형에서부터 복잡형까지 '끊음'(절단) 은 '이음'(연결)과 이율배반적이기 때문에 어떠한 식으로든 대립적 결론에 이른다.

 

-  그 결론은 3가지 뿐이다.  즉, 끊음으로 인하여 필연적으로 ' 파괴적 조화' 의 흥망성쇄를 거듭하면서 한판의 승부에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는바, 부분적으로 원인에 대한 결과는 3가지 뿐이라는 것이다.

  

- 우선, 연을 끊은 당사자가 목적하는 대로 달성되는 결론이다.

단순무식형 끊음의 최대성과는 눈앞의 노획물이다.

미래형 끊음의 노림, 그리고 그 투자의 최대성과는 당장의 노획물을 능가하는 거대한 자기 세력의 구축일 것이다. 직접형이든 간접형이든간에 그래서 끊임없이 '끊기' 에 열중하는 이유이다.

 

- 다음은 끊은 당사자의 헛발질이거나 역으로, 끊김 당한 상대방이 목적하는 대로의 결론이다.

단순 무식형 끊음이 원인으로 작동되어 흔히 발견되곤 한다.

끊음이란 연결에 대한 파괴행위이기 때문에, 필사적인 저항의 기세는 당연하다.

그리고, 응당 상대의 끊음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놓기 때문에 끊음 행위자의 뜻대로가 쉽지 않다.

수학적으로도 끊음이란 돌 2개에 대한 돌 1개의 비율이다.

 

- 마지막 결론은 끊음으로 인한 사태의 타협과 또 다른 확산이다.   

연결에 대한 파괴가 '끊음' 이지만, 대체로의 결론은 타협이다. 

한번의 끊음으로 모두가 파괴되거나, 승패가 결론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끊음의 결론이 곧 타협인가? 아니다. 끊음에 대한 타협은 현상일 뿐이다.  

  

작은곳의 끊음은 ' 관계맺기' 를 통하여 큰 곳으로 확산된다.

작은곳의 원인은 ' 어떠한 관계를 통하여' 반드시 여러 곳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더 큰 분쟁과 대립을 낳게 한다.

그렇다면, 끊음의 최종 결론은 타협이 아니라 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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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정당운동의 반성과 새로운 출발(jsj)

1. 민주노동당의 붕괴 - 진보정당운동 제1기의 해체

작년 대선 끝난 직후부터 민주노동당이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이더니 끝내 18대 총선을 앞두고 붕괴했다. 87년 민주화 이후 최초로 원내 진출에 성공한 진보정당이 무너진 것이다. 많은 이들이 ‘분열’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그보다는 ‘붕괴’가 맞다. 단순히 기존의 민주노동당이 잔류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으로 나뉜 게 사태의 핵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당으로서의 생명력 자체가 사라졌다.
물론 잔류 민주노동당은 18대 총선에서 5명의 당선자를 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어떠한 적극적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민주노동당의 죽음’을 선언하고 탈당한, 필자를 비롯한 전(前) 당원들은 18대 국회에서 민주노동당의 미래는 ‘좌민련’, 즉 ‘좌파 자유민주연합’일 뿐이라고 지적했었다. 국회에 몇 석의 의석을 갖기는 해도, 마치 과거 자민련이 그랬던 것처럼, 어떠한 미래의 전망도, 존재 의의도 찾기 힘든 정당이 되리라는 것이었다. 18대 국회에서 잔류 민주노동당이 이 운명을 벗어나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 도대체 민주노동당의 붕괴의 이유는 무엇인가? 혹자는 민주노동당이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전면에 내걸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다른 어떤 이들은 정반대의 입장에서 민주노동당이 사회주의 변혁의 입장을 분명히 하지 않고 의회주의에 경도된 것이 문제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교과서적인 진단만으로는 현재 한국 사회에서 진보정당운동이 맞부딪힌 구체적인 난점과 과제들을 제대로 직시하기 힘들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상황을 좀 더 분석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정당은 조직이면서 또한 정치적 프로젝트(기획)다. 그것은 특정한 어떤 방식으로 구체적인 어떤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집단 행위다. 게다가 한 정당이 꼭 하나의 프로젝트로만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정당들은 여러 개의 서로 다른 프로젝트들이 결합된 복합 프로젝트의 성격을 띤다.
민주노동당도 그랬다. 필자가 보기에 민주노동당은 3개의 주요 프로젝트가 결합된 복합 프로젝트의 성격을 띠었다. 그 3개의 주요 프로젝트란 무엇인가?
첫째는 ‘대중조직 기반 정당’이라는 프로젝트다.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의 조직적 지지‧지원에 바탕을 두고 창당했고, 이후에도 이것이 당의 존립과 발전의 주요 기반이 되었다. 그리고 2003년부터는 전농도 합류했다. 민주노총과 전농은 주로 상층 간부들을 중심으로 당에 입당했고, 때로 조합원이나 농민회원을 대상으로 입당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리고 선거 때마다 공직 후보군을 배출하고 재정 지원을 했다. 민주노동당은 중앙위원회와 대의원대회 그리고 최고위원회에 노동 및 농민 부문 할당을 실시해 민주노총, 전농 간부들이 이들 당 기관에 참여할 수 있게 했다. 민주노동당은 당과 민주노총, 전농 사이의 이러한 관계를 곧 민주노동당이 노동자‧농민의 정당인 근거로 내세웠다.
둘째는 ‘운동권 정파 연합 정당’ 프로젝트다. 민주노동당은 80년대, 90년대에 등장한 ‘운동권’(한국에서 오랫동안 좌파를 일컫던 말) 정파들의 결집체였다. 물론 ‘노동자의 힘’이나 한국사회당처럼 여기에 합류하지 않은 정파들도 있었다. 하지만 대체로 운동권의 8, 9할이 뭉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 그 동안 독자정당 창당 문제를 놓고 서로 이견을 보여 왔던 범NL 정파들과 범PD 정파들이 함께 했다는 것이 커다란 특징이었다. 이들 사이에는 여전히 심각한 노선 차이가 존재했지만, 일단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고 그 현실 대안을 추구한다는 수준에서 강령 상의 합의를 했다.
셋째는 ‘국회 진출 중심 정당’ 프로젝트다. 물론 제도권 정당이라면 다 국회에 진출하려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국회 진출 중심 정당’이란 활동의 중심이 어디까지나 국회의원 배출 쪽에 놓여 있는 정당을 뜻한다. 한국은 대통령 중심제다. 그래서 제도권 정당들의 활동 중심도 대통령 선거의 도전에 있다. 한데 민주노동당은 이러한 일반적인 경쟁의 대열에 속해 있지 않았다. 민주노동당은 87년 민주화 이후 10년도 더 넘게 진보 좌파가 의회 안에 독자 지분을 전혀 갖지 못한 상황을 타개하겠다는 일념으로 만들어졌고, 그 지분 확보 의지 하나로 비바람을 헤쳐 왔다. 국회 진출 전까지는 여타의 다른 제도 정치 활동(대선 도전이든 지방선거든)은 부차적인 관심사에 불과했다.
이러한 3개의 프로젝트들이 서로 결합된 복합 프로젝트로서 민주노동당은 2004년 총선에서 일단 성공을 거뒀다. 대중조직의 지원과 운동권 결집의 저력을 바탕으로 드디어 국회 진출에 성공한 것이다. 민주노동당 프로젝트는 2000년대 초반 상황 속에서 확실히 정세적 의의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해체는 역설적으로 바로 그 성공에서 비롯됐다. 이때부터 민주노동당의 쇠퇴와 몰락이 시작됐다. 애초에 민주노동당은 소수 의석의 한계를 대중운동의 활성화로 돌파한다는 ‘거대한 소수’ 전략을 통해 보수 양당에 맞설 대안으로 성장하겠다고 천명했다. 하지만 ‘거대한 소수’ 전략은 작동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 중에는 분명 원내 활동에 고착된 의원단 활동의 한계도 존재했다.
하지만 좀 더 근본적인 이유들을 함께 보아야 한다. 근본적인 이유들이란 곧 민주노동당이라는 복합 프로젝트를 이루던 3개의 프로젝트들이 각각 시대 상황과 결정적으로 어긋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우선 ‘대중조직 기반 정당’ 프로젝트를 보자. 사실 민주노동당과 대중조직 사이의 관계는 그 자체로 커다란 약점을 갖고 있었다. 전 세계 좌파 정당 중 대중조직 기반 정당의 전형은 영국 노동당이다. 영국 노동당이나 이 당의 영향을 받은 정당들(아일랜드 노동당, 캐나다 신민주당 등)은 ‘노동조합의 정치 부대’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노동조합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여기까지는 민주노동당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영국 노동당형 정당들은 민주노동당에는 없는 독특한 제도를 갖고 있다. 그것은 집단 입당 제도다. 노동조합이 일단 당 지지를 결정하면 그 노조의 조합원 전원을 당원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굉장히 기계적이며 형식적인 입당 방식으로서, 비판받을 소지가 많다. 하지만 어쨌든 영국 노동당형 정당들은 이를 통해 당과 노조의 유대를 일반 조합원 수준으로 확대하려 했다. 그런데 민주노동당에는 대중조직 기반 정당이면서도 이런 제도적 장치가 없었다.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에 기대어 창당했으면서도 겉으로는 좌파 정당의 좀 더 보편적인 형태, 즉 당 강령에 동의하는 개인이 스스로 입당하고 그 개별 입당 당원들의 활동에 기반하여 성장하는 정당을 표방했다. 하지만 실제로 이런 원칙을 적극 구현하지는 않았다. 당이 독자적으로 노동 대중 사이에 뿌리 내리려 하기보다는 민주노총을 통해 노동자들에게 다가갔다. 그래서 결국 민주노동당은 좌파 정당의 보편적 형태에도 미치지 못하고 그렇다고 영국 노동당형 정당의 장점을 구비한 것도 아닌 어정쩡한 조직 형태를 갖게 되었다.
역사상 이와 비슷한 사례가 이미 존재한다. 바로 일본 사회당이다. 일본 사회당도 당시 일본의 진보적 노총인 총평에 크게 의존했지만, 집단 입당 제도를 취하지는 않았다. 일본 사회당도 겉으로는 노조와 분리된 독자적 이념 정당을 표방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또 그 역할에 충실한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총평의 중개 없이 노동 대중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되었던가? 80년대 말 일본 노동운동의 우경적 재편 과정에서 총평이 사라지자 일본 사회당도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수 십 년간 제1야당의 자리를 점하던 당이 몇 년 만에 몰락하고 말았다. 그만큼 일본 노동계급 사이에 독자적으로 뿌리를 내리지 못한 탓이었다.
우리의 경우,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러한 당-노조 관계의 약점이 조기에 드러났다. 그것도 아주 치명적으로 말이다. 이것은 한국 노동운동의 기업별 노조 중심 구조와 노동 유연화 공세가 서로 맞물리면서 비롯됐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늘어나고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격차가 커지는 데도 불구하고 기업별 노조 중심의 한국 노동운동은 비정규직, 중소기업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데 실패했다. 그래서 노동조합 조직률은 10% 수준에 묶여 있고, 대다수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운동을 자신들의 무기로 바라보지 않는 (심지어는 ‘귀족 노동운동’이라는 보수 세력의 악선동에 공감하는) 형편이다.
이 상황에서 민주노동당은 덫에 걸린 신세가 됐다. 한때는 ‘민주노총당’이라 불리는 것이 노동계급의 당으로 인정받을 근거가 됐지만, 상황이 반대가 됐다. 대다수 비정규직, 중소기업 노동자들이 민주노총을 자신들의 조직으로 여기지 않으며, 그래서 ‘민주노총당’ 역시 자신들의 당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민주노동당이 민주노총에만 계속 의존하는 한, 미조직 노동자들에게 노동계급의 당으로 인정받을 가능성은 점점 더 봉쇄될 것이다. 아니, 더 나아가, ‘정규직당’, ‘대기업 노동자당’으로 치부돼 다수 노동자들 사이에 뿌리 내릴 가능성을 차단당할 위험이 높다. 이것은 ‘대중조직 기반 정당’ 프로젝트가 몰고 온, 의도하지 않은 비극적 결과다.
다음으로 그럼 ‘운동권 정파 연합 정당’ 프로젝트는 어떻게 됐는가? 원내에 진출하고부터 민주노동당 안의 강령적 합의라는 게 무척 취약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특히 2006년에 북한 핵 실험을 계기로 북한 문제가 불거지면서 이것이 더욱 극적으로 폭로됐다. 당 내 범NL 정파들이 종북주의 혐의로부터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게 분명해졌다. 사실은 이때부터 범PD 정파들 사이에서는 기존 정파 연합 구조를 계속 유지하는 데 대한 회의가 일기 시작했다.
문제는 당 안에서 노선 투쟁이 벌어진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게 너무 시대착오적이고 퇴행적이라는 데 있었다. 적어도 범PD 성향 당원들 사이에서는, 스탈린주의 체제의 한 변형으로서 북한 체제가 갖는 근본 문제나 최근 북한 정권 및 그 추종자들이 주장하는 ‘우리 민족 제일주의’의 퇴행성은 이미 평가가 끝난 사항들이었다. 하지만 민주노동당 안에서는 여전히 그 평가를 놓고 논쟁을 벌여야 했다. 게다가 이러한 논쟁에도 불구하고 범NL 세력은 민주노총 국민파와의 연합과 특유의 조직력을 바탕으로 당권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민주노동당이라는 울타리 안의 동거 구조가 미래의 대안 제시와는 인연이 먼 것이라는 점이 시간이 갈수록 더욱 더 분명해졌다.
마지막으로 ‘국회 진출 중심 정당’ 프로젝트를 보자. 막상 국회에 의석을 갖고 보니 소수 의석의 한계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대한 소수’ 전략에 따른다면 대중운동의 활성화로 이를 극복해야 했으나, 대중운동은 침체 상태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다. 2006년 지방선거에서는 그간 당의 지역 거점이었던 울산의 두 기초자치단체에서 패배를 맛보았다. 민주노동당은 대중운동에서든 지역 정치에서든 당의 토대가 아주 부실함을 새삼 절감했고, 그런 상황에서 의회 안에 약간의 지분을 갖고 있다는 게 얼마나 공허한지 뼈저리게 느꼈다.
이렇게 민주노동당이라는 복합 프로젝트 안에 점차 균열이 나타나는 가운데, 2007년 대선이 다가왔다. 당 안팎의 많은 이들이 이번 대선을, 민주노동당이 봉착한 위와 같은 한계들을 뛰어넘을 마지막 돌파구로 보았다. 아니, 대응 여하에 따라서는 민주노동당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고 기대를 걸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열린우리당의 쇠퇴로 열린 새로운 정치 공간이 예사롭지 않았던 것이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이 보여준 좌파 민중주의(left populism) 전략을 한국의 진보 세력도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민주노동당의 대선 후보가 일정한 대중적 바람을 일으킬 수만 있다면, 한국에서도 이것이 충분히 실현 가능하지 않을까? 물론 집권까지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비약적 발전은 기대해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기대가 자라났다.
이것은 보수 우파의 ‘미완의’ 수동혁명(아직 그 결과가 최종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미완의’라는 수식어를 붙였다)에 맞서는 진보 세력의 적극적 대응이 될 수도 있었다. 이명박 현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일군의 보수 우파 세력은 경제성장 제일주의를 무기로 우파 자체를 재편하고 새로이 헤게모니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2006년 지방선거가 그 시작이었고, 2007년 대선은 승리의 정점이었으며, 2008년 총선이 그 승리의 최종 인준 절차였다. 이 수동혁명 과정에서 노무현 정권과 열린우리당, 즉 중도 우파의 정치 공간이 붕괴하기 시작했고, 민주노동당 역시 이를 무력하게 바라만 보고 있었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이 대선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잘 하면, 이러한 무기력증에서 벗어날 수도 있었다. 보수 우파의 ‘미완의’ 수동혁명에 심각한 균열을 낼 수도 있었던 것이다.
허나 이러한 전망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리고 민주노동당 안의 많은 이들은 이 기대를 짓밟은 당사자가 다름 아니라 민주노동당 내부에 있다고 판단했다. 당 내 범NL 정파들이 별다른 근거 제시 없이 대권 3수생인 권영길 의원을 조직적으로 지지하기로 결정했고, 그들의 조직력에 힘입어 결국 권 의원이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로 나서게 됐다. 그리고 그 순간 민주노동당이 대선에서 바람을 일으킬 가능성은 차단됐다.
대선 직후 민주노동당을 떠난 당원들(최대 2만 명 수준)의 상당수는 범NL 세력의 이러한 선택을 납득할 수 없었다. 이런 선택을 하게 된 것은 범NL 세력이 민주노동당이라는 전체 프로젝트야 어떻게 되든 아랑곳없이 자신들의 당 내 패권 유지 가능성만 계산했기 때문 아닌가? 권영길 후보 이외의 후보들(노회찬, 심상정 의원)이 진보적 민중주의 전략을 구사할 무기로서는 더욱 유력했지만, 만약 이들 중에서 후보를 낸다면 그 후보에게 당권이 집중됨으로써 범NL 세력의 당 내 패권이 흔들리게 되기 때문에 그런 결정을 한 것 아닌가? 그렇다면 하나의 정치 조직이자 프로젝트로서 민주노동당은 그 존재 의의를 상실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즉 민주노동당은 생명력을 다했다. 죽었다. 이것이 지난 1, 2월에 민주노동당 탈당파가 도달한 결론이었다.
지난 몇 달간의 사건들은 민주노동당의 분당 과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그 사망을 선고하고 이를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은 아직도 다 끝난 게 아니다. 민주노동당이라는 정치 프로젝트가 시효 만료임을 좀 더 분명히 확인하기 위해 2-3년의 시간이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해체 과정이 이미 시작됐으며 그것은 결코 돌이킬 수 없다는 점이다. 이렇게 해서 진보정당운동의 제1기는 그 막을 내렸다.


2. 진보정당운동 제2기를 시작하기 전에 확인할 것들

진보정당운동의 한 시기가 이렇게 끝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동으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비록 진보신당이 출범했지만, 진보신당 스스로 표방한 것처럼, 이 당은 과도 정당이다. 진보정당운동의 제2기를 이끌 새 진보정당을 건설하기 위한 전 단계다. 진보신당은 창당할 때부터 총선이 끝나면 제2단계 창당 과정을 밟겠다고 약속했었고, 이제 그것을 본격 추진해야 할 시점이다.
게다가 진보신당 외에도 새로운 좌파 정당을 건설하려는 또 다른 흐름들이 있다. 한국사회당이 초록정치연대에 초록 좌파 정당 창당을 제안한 상태다. 그리고 ‘노동자의 힘’이 사회주의 노동자정당의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이와는 별도로 해방연대와 사회주의노동자연합도 각각 사회주의 정당 건설을 표방하고 있다. 가히 당운동의 백가쟁명 시기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진보정당운동의 제2기를 시작하기 전에 우리가 확인해야 할 점들을 짚고 싶다. 진보 좌파 내에는 여전히 개혁 정당과 혁명 정당을 선명하게 나누고 새로 건설될 당이 이 중 어느 한 쪽을 분명히 선택해야 한다는 입장들이 있다. 사회민주주의 정당인지 혁명적 사회주의 정당인지 확실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지금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게 이런 이분법인지에 대해 회의적이다. 물론 고전적인 개혁/혁명 논쟁은 앞으로 우리 운동에서 어떤 식으로든 반복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개혁/혁명을 놓고 입장이 갈린다는 것과, 그래서 이러한 입장 차이가 곧바로 개혁 정당과 혁명 정당의 분립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다.
어쩌면 미래의 어느 시점에는 개혁 정당과 혁명 정당으로 나뉘는 게 더 바람직할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이 그 시점은 아니다. 지금 시점에서 개혁 정당과 혁명 정당의 이분법을 고집한다는 것은 한국 사회의 구체적 분석에 따른 구체적 실천이라기보다는 낡은 교과서(그것이 사회민주주의판이든 코민테른판이든)의 추종으로만 보인다.
왜 그러한가? 우선 한국 자본주의의 현 상황이 어떤 교과서의 틀에도 딱 들어맞지 않는 독특한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한국 자본주의는 세계 자본주의의 전형적인 점이 지대에 해당한다. 이러한 점이 지대에서는 세계 자본주의의 중심부나 주변부에 비해 훨씬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모순이 지배한다. 그래서 세계 자본주의의 좀 더 전형적인 지역(중심부나 주변부)에서 발전한 교과서적 이론이나 노선이 현실에 잘 들어맞지 않는다. 이른바 보편 이론이 쉽게 통하지 않는 사회인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점이 지대는 흔히 새로운 이론‧노선의 배양지가 되곤 한다. 기존의 틀로는 다루기 힘든 상황에 다가가기 위해 새로운 설명이나 실천 방향을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 혁명기 러시아나 그람시 생전의 이탈리아가 그 좋은 사례다. 이런 상황에서 트로츠키는 불균등 결합 발전 법칙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람시는 국가-시민사회의 특정한 접합으로서 역사적 블록 개념을 고안해냈다.
그런데 한국 자본주의는 그러한 점이 지대 중에서도 유례가 없을 정도로 독특하다. 분단을 경험했고, 돌진적 산업화를 겪었다. 또한 제국주의 경험이 없는 비슷한 규모의 국가들 중 거의 유일하게 선진 자본주의의 반열에 올라섰다. 그런가 하면 노동계급 1세대가 계급 정체성과 연대감을 채 연마하기도 전에 신자유주의 노동 유연화 공세에 휩쓸렸다. 민주화 1세대가 미처 50대가 되기도 전에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와 피로감이 나타나고 있다. 한 마디로, 너무도 압축적인 자본주의 발전 때문에 한 사회 안에 서로 다른 시간대가 공존하고 있다. 복수의 시간대가 교차하며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이다.
이런 특성은 특히 대중의 경험과 의식 속에 뚜렷이 각인되어 나타난다. 불과 10년도 안 되는 시간을 단위로 서로 다른 역사적 경험을 하기 때문에 세대가 잘게 나뉠 뿐만 아니라 세대 사이의 의식 차이도 심대하다. 그래서 주체의 의식 측면에서만 보면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인구 집단이 파편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뚜렷한 공통성과 강한 연대감을 지닌 다수 집단이 형성되기가 쉽지 않다. 즉 민주주의와 사회 변혁의 주체가 형성되기 쉽지 않다.
이것은 노동계급의 형성이 중단되었다는 사실에서 가장 뼈아프게 드러난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한국의 노동자들은 스스로를 계급으로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과정이 채 초기 단계를 벗어나기도 전에 노동 유연화 공세가 몰아닥쳤다. 어느 나라나 노동 유연화가 진행되면 불안정 노동자가 늘어나고 노동계급 내에 원심력이 강화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 정도가 더욱 심각했다. 한국 노동운동의 기업별 노동조합 중심 구조와 불안정 노동자의 증가가 서로 맞물리면서 다수의 노동자들이 ‘구조적으로’ 노동조합운동 바깥으로 내몰리는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나마 초보적 계급 형성 과정을 거친 소수 조직 노동자들과 신자유주의 양극화의 최대 피해자인 다수 미조직 노동자들 사이에 객관적 차이 그 이상으로 의식의 골이 깊어졌다. 이 간극이 지금 노동계급 형성 과정이 계속되는 데 커다란 장애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고전적인 개혁/혁명 정당 도식은 과연 어떠한 답을 던져줄 수 있는가? 혁명 정당의 선전 선동의 정치는 과연 어떤 방식으로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 대기업 노동자와 중소기업 노동자 사이의 간극을 돌파할 수 있을 것인가? 도대체 이런 사회에서 교과서적인 선전 선동의 정치가 작동할 수 있겠는가?
또 다른 사례를 들어보자. 지금 한국의 중간층(여기에는 신중간계급뿐만 아니라 노동계급 상층도 포함된다)을 지배하는 화제는 자녀 교육과 부동산이다. 자녀를 어떻게든 대학 서열 구조의 상층부에 진입시켜 신자유주의 엘리트로 만들거나 정규직 일자리를 갖게 하는 것, 그리고 자가 소유 주택(아파트)을 장만하고 그 가격을 올려 노후 소득을 확보하는 것, 이것이 모든 중간층의 욕망이다.
이것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어느 나라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라지만, 한국에서는 유독 심하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에서는 이미 개발 자본주의 시대부터 자녀 교육과 부동산이 중간층에 진입하고 그 지위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두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중간층에게 입시 경쟁과 내 집 마련은 곧 가계 차원의 복지 확보 통로에 다름 아니었다. 그래서 한국의 중간층에게는 신자유주의의 엘리트 교육 열풍이나 만인 투기 문화가 결코 낯설지 않다. 한국 사회에서는 개발 자본주의의 유습과 신자유주의의 투기 문화가 서로 만나 전대미문의 사교육‧부동산 열풍으로 확대‧증폭되고 있다.
이 대목에서 다시 고전적인 개혁/혁명 정당 도식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묻고 싶다. 개혁 정당의 통상적인 레퍼토리는 사회 복지를 확대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에 호응해야 할 대중의 상당수는 이미 자신들만의 복지 수단(입시 경쟁과 부동산 투기)을 확보하고 있으며,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그것만이 생존의 길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공공복지를 통한 집단적 해결책이 더욱 바람직한 대안이라는 계몽이 과연 얼마나 호소력을 지닐 수 있을까? 지금의 한국 사회에는 혁명의 주체와 마찬가지로 개혁의 주체 역시 존재하지 않는 것 아닌가?
그래서 일체의 변혁이 불가능하다는 비관주의에 빠지자는 게 아니다. 교과서의 도식이 우리에게 해답을 던져 주리라는 오해와 착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앞에 놓인 ‘진보의 재구성’이라는 과제가 과거의 논쟁을 단순 반복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근본적인 접근을 요구한다는 점을 더욱 철저히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진보의 재구성’을 추진할 새로운 진보정당 역시 과거의 개혁/혁명 정당 도식에 얽매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국 자본주의의 독특성 말고도 또 우리가 잊어선 안 될 게 있다. 그것은 “발전된 자본주의-민주주의 사회에서 과연 변혁의 계기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라는 물음이다.
사회민주주의 개혁 정당의 입장을 따른다면, 이것은 애당초 고민거리가 못 된다. 이 입장에서는 ‘변혁’을 고민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선거로 집권한 뒤에 부분적 개혁 조치들을 추진하기만 하면 된다.
한편 코민테른의 혁명 정당 공식에서도 이것은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는 혁명이 전위정당의 단일한 기획으로 사고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전위정당이라는 주체가 확실히 존재하기만 한다면, 나머지는 이 당을 중심으로 배치되면 되는 어떤 객관적 요소들일 뿐이다.
하지만 적어도 발전된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이런 공식이 크게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코민테른 운동에 뿌리를 둔 정당들 중에서 실질적인 대중적 영향력을 확보했던 사례를 들자면, 이탈리아 공산당이나 프랑스 공산당이 있다. 그런데 이들 정당은 위의 도식에서 전제하는 ‘전위정당’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들은 실제로는 사회민주주의 정당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대중정당 형태를 취했다. 사회민주주의 정당보다 좀 더 급진적인 이념을 내걸었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한편 위의 공식을 고집스럽게 견지한 세력들(트로츠키주의, 마오주의 정파들)은 대중 정치 세력으로 성장하기 힘들었다. 이들은 대개 소정파 수준에 머물렀다. 선진 자본주의 사회의 이념적 추가 가장 왼쪽으로 기울었던 1960년대 말에도 이것은 예외가 아니었다.
과거의 공식들보다는 실제 역사적 사례가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 내에서 좌파가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도전에 가장 근접했던 사례를 든다면, 이탈리아의 잉그라오 좌파나 영국의 벤 좌파가 있다. ‘잉그라오 좌파’는 1960년대에 이탈리아 공산당의 대중 정치가 피에트로 잉그라오를 중심으로 당 내 좌파와 노동조합운동 내 좌파가 결집한 것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은 1960년대 당 내 논쟁 과정에서 등장하여 1969년의 대중파업(‘뜨거운 가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70년대에 이들은 공산당의 구조개혁 노선과 대중운동을 결합하는 데 앞장섰다.
벤 좌파는 영국판 ‘잉그라오 좌파’라 할 수 있는데, 이번에는 영국 노동당의 좌파 하원의원 토니 벤이 중심이 되었다. 1970년대에 벤 의원은 대기업의 국공유화 약속을 저버린 당 지도부를 과감히 비판하여 당 내 좌파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1970년대 말 대처의 신우파 정부가 들어서자 벤 의원을 중심으로 당 내 신좌파가 형성됐고, 여기에 다시 노동조합운동 좌파나 다양한 사회운동 세력들이 결집했다. 이들은 1980년대 초에 노동당의 당권에 도전하는 등 영국 역사상 최초로 대중적인 좌파 정치 운동을 펼쳤다.
이 두 사례로부터 우리는,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중적 영향력을 갖춘 변혁운동은 어떤 전위정당의 단일한 기획이나 자연발생적 대중운동으로 설명하기에는 사뭇 복잡한 양상을 띤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대중 정치인, 대중정당 내의 좌파적 흐름,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의 활성화 같은 다양한 요소의 특정한 접합으로 나타난다. ‘당-사회운동 접합’이라고나 할 이러한 특정한 배열과 결합이 대안적인 역사적 블록의 형성 과정이 시작되는 데 촉매이자 중핵 역할을 한다.
사실 위의 두 사례는 실제 변혁을 추진한 것은 아니었다. 그 전 단계에서 멈춰버린 사례들이다. 반면 라틴아메리카의 두 나라, 칠레와 베네수엘라는 위의 사례들보다 더 앞선 경험을 보여준다. 1970년-1973년의 칠레 인민연합 정부 그리고 현재 진행 중인 베네수엘라 차베스 정부의 볼리바리안 혁명이 그것이다. 이들의 경우에도 변혁의 길을 연 것은 잉그라오 좌파나 벤 좌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대중 정치인, 대중정당(들) 그리고 노동운동‧사회운동 사이의 어떤 결합이었다.
물론 칠레와 베네수엘라를 선진 자본주의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오랫동안 대의 민주주의가 뿌리 내린 나라들임에는 분명하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일정하게 발전한 나라에서 변혁의 순간에 다가가는 것은 ‘당-사회운동 접합’을 통해서임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에도 87년 이후 대의 민주주의가 정착됐다. 이런 사회에서 집권의 방식이 선거냐 아니냐 논쟁하는 것은 소모적이다. 선거를 통한 집권은 이제 상수이자 전제 조건이다. 다만 우리가 확인해야 할 것은 집권 자체는 선거를 통해서 할 수밖에 없되 변혁은 선거 결과만으로 시작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즉 이제 한국에서도 변혁 과정은 대중 정치가, 대중정당(들) 그리고 대중운동의 특정한 접합을 통해서만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바로 그러한 접합을 준비하기 위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당운동의 방향과 방식은 무엇인가? 새로운 진보정당운동은 개혁/혁명 교과서의 추종이 아니라 다름 아닌 이 물음에 답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이러한 우리의 논의에 유용한 단서 역할을 하는 것이 ‘사회운동 정당’ 구상이다. 이미 몇 년 전부터 민주노동당 안팎에서 개혁/혁명 정당의 이분법을 극복할 출발점으로 ‘사회운동 정당’을 이야기하곤 했다. 하지만 막상 ‘사회운동 정당’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불분명한 데가 많다.
혹자는 당이 사회운동을 집권의 수단으로 전락시키지 않고 대등한 동반자로 인정함으로써 당운동과 사회운동의 동시 발전을 추구하는 것 정도로 해석한다. 나쁘지 않은 전망이지만, 이것만으로는 다분히 수세적이고 도식적인 정의가 아닐 수 없다. 당과 사회운동 사이의 새로운 관계는 설명할 수 있을지 몰라도 당 활동 자체가 왜 ‘사회운동적’이라고 불려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게 핵심인데도 말이다.
그래서 이렇게 해명하기도 한다. ‘사회운동 정당’이란 ‘수권 정당’과 대비되는 말이다. 수권 정당에게는 집권이 절대적 목표인 데 반해 사회운동 정당은 그렇지 않다. 사회운동 정당에게 집권은 복수의 목표들 중 하나일 뿐이다. 사회운동 정당은 집권보다는 사회운동 전반의 발전을 더 중요시한다.
이것 역시 가능한 하나의 해명이다. 하지만 집권을 단지 부차적인 목표로만 바라보는 정당이 과연 정당으로 존립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과거 독일 녹색당이 비슷한 맥락에서 ‘반(反)정당적 정당’을 표방하기는 했으나 결국에는 다른 대중정당과 별반 다를 것 없는 모습을 보인 사례가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좀 더 솔직해져야 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에서 대중정당으로 존재하면서 집권이라는 본래 목표를 무시할 수는 없다. 적어도 ‘집권’과 ‘사회운동’을 서로 대립시켜 바라보는 입장에서 ‘사회운동 정당’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어불성설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우선 ‘사회운동’ 자체를 새롭게 정의 내려야 한다. 이제껏 ‘사회운동’이라 불려온 이러저런 조직들이나 대중 동원 등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는 정치적 상상력을 펼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사회운동’을 이렇게 정의 내려 본다. “기존의 자본주의-대의 민주주의 질서의 제약을 넘어서는 대중의 행위 능력들을 배양하고 성숙시키는 일련의 집단적 과정.” 이것은 로자 룩셈부르크가 자본주의 아래서 일상 개혁 투쟁의 목표로 제시한 “노동자계급의 인식과 의식의 사회화”를 나름대로 재구성해본 것이다.
‘사회운동’을 이렇게 정의할 경우, ‘사회운동 정당’이란 “집권 과정 자체를 사회운동적인 것으로 바라보며 실천하는 정당”이다. 즉 집권을 지향하되 그것을 일련의 제도 정치 과정으로 제약‧환원하지 않고 대중의 대안적인 행위 능력들을 발전시키는 과정으로 심화‧확장하는 정당이다. 이러한 대안적 행위 능력들이 발전해야만 자본주의를 넘어설 대안적인 역사적 블록의 토대를 구축할 수 있고, 집권이 집권 자체로 종료되는 게 아니라 변혁 과정의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운동 정당의 주된 정치 활동 방향은 계몽의 정치나 선전 선동의 정치가 아니라 예시적(prefigurative) 실천의 정치다. 사회운동 정당은 시민사회 내에 다양한 연대조직들(초기업단위 노동조합, 대안 협동조합, 민중의 집 등등)을 만드는 데 앞장서며 이들 연대조직들의 네트워크를 결성하는 데 촉매 역할을 한다. 그리고 당 활동 자체와 이들 연대조직의 네트워크를 통해서 대안 사회의 가치와 원칙(가령, 협동과 연대)을 바로 지금부터 현실로 구현한다. 비록 맹아적인 수준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사회운동 정당이 대중을 설득하는 것은 계몽이나 선전 선동이 아니라 이러한 예시, 즉 미리 보여주기를 통해서다. 21세기 현대 사회는 냉소주의가 지배하는 사회다. 통상적인 방식의 메시지 전달로는 도저히 이 냉소주의를 깰 수 없다. 현대 사회에는 차고 넘칠 정도로 메시지가 범람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메시지가 수신자에게 가 닿으려면 수신자가 직접 눈으로 볼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즉 제한된 범위와 수준에서나마 우리의 대안을 ‘행위’ 혹은 ‘현실’로 구성해서 제시해야 한다.
브라질 노동자당의 참여예산제 실험과 같은 사례가 당시 정세에서 커다란 의미를 지닐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였다. 포르투 알레그레 시의 노동자당 시정부가 펼친 참여예산제는 항상 먼 미래의 이상으로만 이야기해온 민중 참여와 자치를, 비록 초보적인 형태로나마, 지금 여기의 현실로 구성해서 보여주었다. 굳이 이렇게 지방자치제를 활용하는 형태가 아니라 할지라도, 사회운동 정당은 다양한 수단과 방식을 통해 예시적 실천을 펼쳐야 한다. 그래서 이 단단한 교착 상태, 즉 대중의 분열과 냉소주의를 깰 충격(들)을 던져야 한다.


3. 새로운 진보정당운동을 구성할 3개의 새 프로젝트들

어떤 이들은 보수 우파 정권이 최소 10년은 갈 거라고 이야기한다. 그럼직하다. 하지만 이게 비관주의의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비록 대안 부재 상황에서 보수 우파 집권 시대가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을지라도, 그들의 헤게모니는 그렇게 튼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지 고작 두 달밖에 안 된 지금, 서울 종로 거리에서는 수만 명의 10대, 20대가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개방에 항의하며 촛불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렇게 균열은 항상 존재하고, 어느 때든 우리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시기에 모순은 폭발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명박 시대에도 집단행동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88만원 세대도 거리에 나서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너무 흥분해선 안 된다. 문제는, 항상 그렇듯이, 어떻게 해야 이러한 일회적 동원을 일상적 참여로 전환하고 대중의 움직임에 방향과 형태, 지속성과 일관성을 부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전히, 정치운동이 중요하다. 비록 그것이 대중과 관계 맺는 방식은 과거와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할지라도 말이다.
진보 좌파는 이명박 정권 아래서 예기치 않게 폭발할 대중운동들에 긴밀히 결합하면서 동시에 진보정당운동의 제2기를 새롭게 구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 두 실천이 결코 서로 동떨어진 과정이 되어서는 안 된다. 대중운동의 새로운 등장과 새 진보정당의 건설이 함께 해야 한다. 그래야만 과거 대중운동의 침체기를 배경으로 등장한 민주노동당과 달리 튼튼한 내구성과 왕성한 생명력을 갖춘 좌파 정당을 만들 수 있다.
이렇게 새로 전열을 정비해야만, 2010년 지방선거로 시작될 이명박 정권 후반기의 제도 정치 과정을 보수 우파에 대한 대반격의 계기로 활용할 수 있다. 어차피 18대 총선에 그런 반격의 시작을 기대하기는 무리였다. 이번 총선은 우파의 ‘미완의’ 수동혁명의 끝자락이었다. 이제부터 진보 좌파는 원외에서 토대를 새로 쌓고 아래로부터의 반격을 준비해야 한다. 그것이 ‘진보의 재구성’의 요체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 새로운 진보정당의 구체적인 이념과 노선, 활동 방향과 조직 얼개까지 다 다룰 수는 없다. 아래에서도 계속 강조하겠지만, 이런 내용들은 대중적인 토론과 합의를 통해 만들어가야 할 것들이다. 다만 이 글에서는 과거 민주노동당이 대변하던 3개의 프로젝트와 대비하여 새 진보정당이 담보해야 할 프로젝트들은 무엇인지 짚어보겠다.
새 진보정당도 몇 개의 주요 프로젝트들이 결합된 복합 프로젝트의 성격을 띠게 될 것이다. 그 중 첫 번째는 ‘대안 형성’ 프로젝트다. 새 진보정당에도 물론 강령과 정책이 필요하다. 당장 제2창당 과정에서 강령 작성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런데 새 진보정당은 이러한 작업에 대해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과거의 방식은 통상적인 계몽주의적 태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지식인들 혹은 선진적 투사들이 사회주의의 궁극 목표와 그 당면 과제를 정리해 강령 문서를 만들면 당원들은 그것을 마치 교과서처럼 학습하는 방식.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기에는 빈 곳도 많고 의심할 대목도 너무 많은 시대다. 전 지구적 자본주의를 극복해야 인류 문명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만 분명할 뿐, 나머지는 불명확하다. 즉 자본주의 문명을 ‘어떻게’ 극복해나갈지는 숙제로 남아 있다. 물론 과거 사회주의 운동의 교훈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이제는 생태주의, 여성주의, 평화주의의 문제제기 역시 그와 동등한 근본적 중요성을 지닌다.
그래서 새 진보정당은 통상적인 이념 정당과는 달리 ‘대안 형성 정당’이어야 한다. '즉 궁극적인 대안은 공동의 실천과 토론을 거치면서 비로소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전제해야 한다. 이러한 전제에 따라 대중적인 실천과 토론 과정이라는 용광로 안에 사회주의, 생태주의, 여성주의, 평화주의 등등 우리 시대의 좌파 이념들을 녹여내야 한다. 그 결과물이 무엇일지는 우리도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러한 합금 과정을 거친 금속만이 21세기 자본주의에 맞설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대안 형성의 결과물도 중요하지만, 사실 그것만큼 중요한 것은 그러한 대안 형성 과정 그 자체다. 21세기 좌파는 누군가 먼저 이념을 만들면 대중이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식의 관점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념은 대중들 자신의 참여와 대화를 통해 만들어져야만 종이 위의 선언에 그치지 않고 처음부터 대중의 일상 세계에 녹아들어갈 수 있다. 새 진보정당의 강령 작성 과정이 이래야 할 뿐만 아니라 이후 일상적인 정책 생산 과정에서도 이러한 방식을 계속 반복해야 한다. 좌파 이념의 토착화에 아직 성공하지 못한 한국 사회이기에 이러한 노력의 중요성은 더욱 절실히 다가온다. 새 진보정당은 곧 이러한 참여․대화 과정의 실험장이 되어야 한다.
둘째는 ‘새 노동운동 육성’ 프로젝트다. 새 진보정당은 새 세대의 노동운동을 육성하는 인큐베이터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기업을 넘어서는 노동운동의 활동 메커니즘을 만드는 일이자, 기업 단위 임단협을 넘어서는 의제를 개발하는 일이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 대기업과 중소기업 노동자, 남성과 여성 노동자 사이의 새로운 연대의 전통을 만드는 일이다.
새 진보정당이 새로운 노동운동의 배양장이 되자면, 과거 민주노동당과는 달리, 당 안에 노동자 당원들의 독자적인 활동 구조를 갖춰야 한다. 당 지역조직과는 별도로 광역 단위의 노동자 당원 조직을 마련하는 게 그 한 방안이 될 수 있다. 이러한 노동자 당원 조직이 노동조합운동 내에서 새로운 노동운동의 가치와 방향을 몸으로 보여주고 확산시키는 진지 역할을 해야 한다.
그 동안 많은 이들이 갈망해온 사회운동적 노동운동의 등장은 기존 노동조합 구조만으로는 결코 실현될 수 없다. 노동자 당원 조직 같은 초기업적이고 탈조합적인 진지들을 구축하고 그 연계망을 만들어야만, 사회운동적 노동운동이 비로소 태동하고 확산될 수 있을 것이다.
셋째는 ‘진보적 지역 정치’ 프로젝트다. 과거 민주노동당이 ‘국회 진출’에 전략적 중심을 두었다면, 새 진보정당은 그와 달리 ‘지역 정치’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우리 앞에 놓인 가장 가까운 선거가 지방선거이기 때문이거나 혹은 보수 우파가 중앙정부를 장악한 상황에서 그나마 진보 세력이 도전하기 수월한 영역이 지역 정치이기 때문은 아니다.
지역은 그렇게 만만한 도전처가 아니다. 오히려 진보 좌파에게 지역 사회는 여전히 쉽지 않은 활동 무대다. 하지만 그럼에도 진보 좌파는 지역에 전략적 비중을 두고, 진보적 지역 정치를 일구는 것을 가장 중요한 당면 과제로 삼아야 한다.
그 이유는 우선 지역 사회야말로 87년 이후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민주화의 바람이 미치지 않은 영역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풀뿌리 토호 세력이 지역 사회를 지배하고 있고, 이들이 항상 보수 우파의 최종 피난처 역할을 해준다. 이들이 건재하는 한, 보수 우파는 어떠한 후퇴를 겪더라도 다시 재기할 수 있을 것이다. 지역 사회의 민주화는 곧 한국 사회의 제2단계 민주화다.
다음으로 지역은 이제 노동계급 형성의 기본 단위가 되었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점차 서비스 산업 비중이 늘어나면서 노동력 재생산뿐만 아니라 노동 과정 자체가 지역 단위로 이뤄진다. 또한 다양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서로 연대할 수 있는 단위는 개별 기업이 아니라 지역이다. 따라서 새 진보정당은 노동운동이 지역 중심의 활동 방식으로 전환하도록 자극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지역 정치는 대안 사회의 맹아를 형성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무대가 되어준다. 새 진보정당은 지역 사회에 다양한 연대조직들을 건설하고 ‘민중의 집’ 등을 통해 이들 연대조직 사이의 연합을 모색해야 한다. 이러한 연대조직들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국가 관료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적 행위 양식들의 묘목장이 될 수 있다. 또한 브라질의 참여예산제 사례처럼 지방자치제를 활용해 대안 사회의 이상과 원칙을 일정하게 구현할 수도 있다. 즉 지역을 무대로 예시적 실천을 펼칠 수 있다.
이 모두가 이명박 정권 시대, 전 세계적으로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물결이 역류를 맞고 있으나 한국에서는 그 최후의 절정을 향해 치솟는 이 시대에 진보 좌파가 벌여야 할 진지전의 핵심 과제들이다. 새로운 진보정당운동의 사명은 바로 이 진지전의 야전 사령부 역할을 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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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권에서 노동운동과제(kty)

1. 이명박정권 100일

1) 신자유주의 끝자락을 꽉 붙들고 있는 ‘MB노믹스’의 한계

출범 3개월 만에 이명박 정권은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경제를 살리겠다’고 큰 소리를 쳤으나, 한국경제는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취임하자마자 연간 경제성장목표를 6%로 낮추었으나 그것도 불가능한 상황이다. 5월 12일 한국개발연구원은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지난해 10월 내놓은 5.0%보다 0.2%포인트 낮춘 4.8%로 수정했다. 5월 8일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는 4.5% 이하에 머물 것이라고 했다.
한편 노동자민중의 생활은 더 어려위지고 있다. 지난 3월 이명박 정권은 물가대책을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4월 소비자물가는 작년 같은 달에 비해 4.1%나 급등했다. 소비자물가가 4% 오른 것은 2004년 8월(4.8%) 이후 3년 8개월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4월 생산자물가 지수가 작년 같은 달에 비해 9.7% 상승해 1998년 11월 11.0%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국제유가의 인상에 따라 전기요금 인상을 추진하기로 했고, 가스요금, 지역난방비, 교통요금 등의 인상이 예상되고 있다. 금년 1/4분기 가구당 월평균 사교육비는 16만5천원으로 관련 통계작성을 시작한 2003년 이후 가장 많았다. 이명박정권의 교육시장화정책은 물가인상의 가중요인이 되고 있다.
경제가 어려워지고, 노동자민중의 생활은 더욱 힘들어져도 자본가들의 몫은 더욱 늘어나고 있다. 2007년 한 해 동안 주식배당금을 10억 이상 받은 주식부자는 153명으로 사상 최다를 기록했다. 이중 100억원 이상을 받은 ‘주식부자’는 8명으로 2006년도의 4명에 비해 두 배로 증가했다. 2007년에 삼성전자는 전체 등기이사들의 보수로 802억원을 지출했다. 이중 사내이사 6명에게 797억7천6만원이 지급되었다.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 윤종용 부회장, 이학수 그룹 전략기획실 부회장, 이윤우 대외협력담당 부회장, 최도석 사장, 김인주 사장 등 7명은 1인당 평균 185억 5천 535만원을 가져갔다. 작년 반도체 경기악화로 인해 삼성전자의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14%나 감소했는데도 등기 임원에게는 오히려 3배에 달하는 연봉을 지급했다. 이런 상황에서 삼성특검은 삼성의 비자금 4조원을 합법화해 주었다.

2) ‘미친소’를 국민에게 풀어버린 ‘미친정부’

이명박정권은 한미정상회담 하루 전인 4월 18일, 한미 쇠고기 협상을 전격적으로 타결하여 5월 중순부터 광우병 위험 연령과 부위를 모두 포함한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기로 했다. 30개월 미만의 소는 눈, 뇌, 두개골, 척수, 척추뼈까지 포함하여 즉각 수입하고, 동물사료 강화조치 발표 시점에서 30개월 이상의 뼈있는 쇠고기를 수입하기로 했다. 미국은 4월 24일 동물사료 강화조치를 발표했다. 그러나 미국이 실제로 동물사료 사용금지를 시행하는 것은 1년후부터이다. 미국이 1년 후에 실시할 ‘강화된’ 사료 금지 조치에서도 여전히 30개월 미만 소는 뇌, 척수까지 닭, 돼지의 사료로 쓰인다. 30개월 이상 소의 뇌와 척수를 제외한 눈, 머리뼈, 등뼈 등도 닭, 돼지의 사료로 쓰인다. ‘주저앉는 소’라도 30개월 미만이라면 뇌, 척수를 포함한 모든 부위가 닭과 돼지의 사료로 쓰일 수 있다. 따라서 미국 쇠고기는 교차오염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또 미국의 농장에서 새로운 사료 정책이 제대로 이행될지도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이명박정권은 미국에서 인간광우병이 발생해도 한국정부가 수입금지조치를 할 수 없고, 90일 후에는 쇠고기 수출작업장 지정권을 미국으로 넘기는 조건으로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합의했다.
지난 10여년 간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저지투쟁에서 밀리기를 거듭해 온 운동진영은 미국 쇠고기 협상에 대해 신속하고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규탄성명을 내고, 기자회견을 하는 수준에 머문 채 적극적 대중행동을 조직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촛불집회에 중고생을 비롯한 수만 명이 모였다. 궁지에 몰린 이명박정권은 기만적인 추가협상안으로 국면을 돌파하려 시도했고 국회에서는 농림부장관 해임안이 다루어졌으나, 신자유주의 정당인 야당의 한계를 드러낸 채 불발로 끝났다.
그러나 미국 쇠고기 문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명박정권은 5월 말 고시를 할 예정이다. 그렇게 되면 작년 10월 검역중단 이후 용인 검역창고와 부산항 컨테이너야적장(CY) 등에 발이 묶여 있는 5천300t의 보관 물량이 검역 절차를 밟게 된다. 검역을 마치면 미국산 쇠고기는 6월초부터 시중에 유통될 전망이다. 학생과 시민 중심의 촛불집회에 뒤늦게 참가한 민주노총 등 노동운동 진영은 장관고시 강행시 총파업투쟁 전개와 미국산 쇠고기 하역 저지 등의 투쟁을 결의하고 있다.

3) MB식 밀어붙이기는 이제부터 시작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는 시작에 불과하다. 이명박 정부는 공공부문 사유화·시장화로 국민의 생존권을 말살하려 한다. 광우병 쇠고기 수입에서 보여준 MB식 밀어붙이기로 금융, 교육, 의료, 사회보험, 교통, 에너지, 물 등 모든 공공부문의 사유화․시장화를 강행할 것이다. 인간의 존엄과 생존을 보장할 최소한의 국가적 사회적 보호장치를 파괴하고 적자생존의 동물적 야만상태를 강요하려는 것이다. 미국 쇠고기 수입을 밀어붙인 것이 한미FTA 비준을 위한 것이고 이명박정권은 6월 국회에서 한미FTA비준을 강행하고, 한일FTA 실무협상을 재개할 예정이다.

<표1 > 이명박정권의 추진 일정

영역
정부 공세(상반기)
사유화
· 민영화계획발표(6월말) · 물산업진흥법안발의(6월) · 국립대법인화(6월)
연금
· 국민연금법개악안 발의(6월)· 공무원연금법개악안 발의(6월)
재벌,세금
· 금산분리철폐· 출자총액제한제 폐지· 법인세인하
FTA
· 한미FTA 비준 추진(6월 국회)
구조조정
· 공공부문 구조조정(안) 청와대 최종 보고(5.19)→구조조정 실행 착수(6월초 예상)



2. 노동운동 최대의 과제는 공공부문 사유화·시장화 저지

1) 이미 시작되고 있는 공기업 사유화·시장화·구조조정

이명박 정권은 305개 공기업 중 100여 개 이상을 민영화하거나 통폐합·청산하고, 나머지 공기업도 일부사업 매각·민간 위탁, 경쟁시스템 도입, 자체 구조조정 등을 추진할 예정이다. 6월초에 공기업 개혁안을 확정한 뒤 공청회를 거쳐 국회에 제출할 예정이다. 신용보증기금과 기술보증기금, 주택공사와 토지공사의 통폐합과 함께 산업은행·우리은행·기업은행 등 금융공기업과 이들의 자회사는 모두 민영화 대상이다. 코레일유통·코레일투어 등 코레일 자회사 5개를 비롯해 한국토지신탁·주택관리공단·한국자산신탁·한국기업데이타 등은 민간매각 대상으로 분류되고 있고 경북관광개발공사 등 지방자치단체와 밀접한 30여 곳은 기능을 지자체에 넘긴 뒤 청산하기로 했다.한국전력 본사와 남동·남부·동서·서부·중부발전 등 5개 발전 자회사, 한국수력원자력, 가스공사, 석유공사 등 에너지 공기업들은 민영화 대상에서 일단 빠졌다. 재정부 관계자는 “기후변화협약 적용과 에너지 가격 상승 등을 감안해 정부가 새 에너지 정책을 짜고 경영합리화를 추진한 뒤 민영화를 다시 논의할 계획”이라고 했다. 재정부 관계자는 “보다 과감한 민영화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어 마지막 순간에 한전의 발전 자회사들이 민영화 대상에 포함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최근 물가 압박을 감안하여 도로공사와 항만공사 등 사회간접자본(SOC) 공기업들을 일단 민영화 대상에서 제외했지만, 이 역시 공기업 전체의 단계별 민영화 전략 속에서 언제든지 추진할 가능성이 높다.“공기업에 필요 없는 인력이 절반 정도 된다, 밀고 나가야 할 부분이 공기업 민영화이다”. 이것이 이명박정권의 기본적 입장이다. 이러한 기조 하에 규제완화, 낭비요소제거, 세출예산 10% 감축 등을 통해 공공부문의 강도 높은 구조조정이 진행될 것이다. 그리고 공공기관 통폐합, 외주위탁, 인력감축, 수익성과 경영성과 중심의 경영혁신이 강행되고 있다. 공무원 3천5백명 감원방침, 3년 이내 1만7천여명 감원, 업무중복 대상 공무원 ‘규제개혁추진 작업반’ 배치 등을 통한 퇴출제 확산 등 공공부문에서 약 8만명을 퇴출시킬 것이라고 한다.
서울도시철도는 지난 2월 조합원들의 압도적인 파업결의에도 불구하고 집행부는 대책 없이 임단협 투쟁 마무리에 합의했다. 사측은 4월10일 인사발령을 단행했다. 이중 700여명은 창의업무지원센터와 서비스지원단으로 배치되었다. 창의업무지원센터와 서비스지원단은 서울시에서 공무원을 대상으로 추진하고 있는 퇴출제의 일종인 ‘현장시정지원단’과 같은 것이다. 54년생 이상 고연령 노동자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어 사실상 퇴출수순을 밟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4월 14일부터 5~8호선에 무인매표를 시작했다.
서울메트로도 일방적인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조직개편은 기구통폐합과 인력감축, 아웃소싱 확대를 목표로 하고 있다. 그리고 이에 항의하는 서울지하철노조 간부 16명을 직위해제하였다. 서울지하철 역시 언제 퇴출을 위한 인사발령이 발표될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이다.
4월 18일, 금융위원장은 산업은행 민영화 방안을 사실상 확정했다고 발표했다. 즉 산업은행과 자회사들을 지주회사로 전환한 뒤 지분 49%를 매각하는 단독민영화를 결정했다. 그동안 기획재정부가 초대형은행 방안을 제기했으나, 이는 시간이 많이 걸려 이명박정권의 밀어붙이기식 민영화에 차질을 준다는 것이다.
산업은행 민영화 만료시한도 당초 4년에서 3년으로 앞당기겠다고 했다. 이에 따라 대우조선해양, 현대건설 등 산업은행이 보유하고 있는 기업들의 매각이 앞당겨질 것이다.
이명박정권은 5월말-6월초에 ‘물산업지원법’을 입법예고할 예정이다. 물산업지원법은 초국적기업과 국제금융기구 및 재벌들의 민영화요구, 수자원공사의 상수도 사업진출 등을 배경으로 상수도의 민영화를 노리고 있다. 이는 공공재인 물을 기업의 이윤창출을 위한 경제재로 전환하고, 수도에 대한 인식을 공공서비스에서 산업서비스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2016년까지 11조원의 물산업을 20조원 규모로 확대하고, 세계 10위권에 드는 물기업을 2개 이상 육성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164개 지방상수도를 30여개로 통폐합하여 수자원공사 또는 민간기업에 위탁 또는 공사화한다는 것이다. 상수도의 민영화는 필연적으로 물값 인상을 수반하여 노동자민중의 생활고를 가중시킬 것이다. 그리고 민영화 과정에서 구조조정을 수반할 것이다.

2) 금융기관을 초국적자본과 재벌의 사금고로 만들려는 이명박정권

이명박은 말한다. “금융기관이 아니라 금융회사로 바꿔야 한다”라고. 금융은 자원의 효율적 배분을 통해 경제발전에 기여하는 사회공공적 기능을 갖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금융회사를 통해 금융의 공공적 기능을 박탈하고 금융기관을 돈 버는 회사로 만들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돈을 벌게 되는가? 재벌의 은행지배를 금지하는 금산분리제도를 폐지하는 것이 골자이므로 초국적 투기자본과 재벌들의 배를 불리려는 것이다. 97년 IMF 외환위기의 악몽을 상기하자! IMF 외환위기는 재벌들이 자회사인 금융기관을 사금고처럼 이용함으로써 국내 금융시스템 전반의 위기를 초래했기 때문에 터졌다. 대표적으로 대우그룹은 계열사인 서울투신운용을 이용해 불법적으로 7조6천억원을 사용함으로써 국내 금융시장 전체를 위기로 몰아넣은 바 있다.
그리고 이명박정권은 6월말까지 공정거래법을 개정하여 재벌기업의 출자총액제한제도를 완전히 폐지하겠다고 한다. 나아가 산업자본의 은행소유를 제한하는 ‘금산분리’ 원칙을 단계적으로 완화하겠다고 한다. 즉 대기업의 은행지분 의결권 한도를 현행 4%에서 15%로 확대하여 은행마저 재벌의 사금고로 만들려는 것이다.
금융은 사기업이 지배할 수 없는 사회공공적 영역이어야만 한다! 금융기관의 돈은 주주의 돈보다는 고객의 돈으로 운용된다. 2007년 9월말 기준으로 국내 금융기관의 총자산 합계액은 2,212조원인데 자기자본은 188조원에 불과하다. 금융자회사와 비금융자회사를 모두 지배하고 있는 현 재벌체제를 그대로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할 수 있도록 허용해서는 안된다. 지금까지 금산분리가 적용되지 않았던 제2금융권의 재벌지배도 금지해야 한다. 금융투자회사에 지급결제기능을 부여하는 자본시장통합법이 제정되어 2009년 2월부터 발효될 예정이고, 어슈어뱅킹을 허용하는 보험업법 개정안이 본격 추진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제2금융권에도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의 결합이 낳을 수 있는 폐해들을 차단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의 마련의 필요성이 더욱 높아가고 있다.

3) 교육 시장화

이명박정권은 대학교육의 완전한 시장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국립대 법인화, 사학법 재개정이 주요 골자다. 이는 대학교육에 대한 국가책임을 포기하고, 대학교육의 공공성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이다. 현재도 대학교육의 공공성은 약하다. 사립대 의존율이 기형적으로 높고, 대학교육 재정의 76.8%를 민간이 부담하고 있는데 이중 학생 등록금부담이 56.7%를 차지하고 있다.

<표 2> 사립대학교 비율 국제비교

OECD 평균
13.4%
EU 19개 국가 평균
7.1%
한국
전문대
85%
4년제대학
77.5%


국립대를 법인화하면 지방국립대학들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등록금을 인상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대학에 영리추구 자유가 강화되면 반드시 등록금 인상이 따를 수밖에 없다. 로스쿨의 경우 등록금이 2,000만원을 넘는다고 한다. 대학등록금 1,000만 시대 운운하고 있지만 이명박정권의 교육정책이 추진되면 노동자 자녀들은 대학가기 힘들어지게 될 것이다.
이른바 ‘고교 다양화 300 프로젝트’로 기숙형 공립고(150), 마이스터고(50), 자율형 사립고(100)를 도입한다고 한다. 자립형 사립학교가 확대되면 고교평준화는 와해된다. 자율형 사립고는 등록금책정, 학생선발, 교육과정편성의 완전한 자율권을 보장하고, 자립형 사립학교 확대를 위해 재단 전입금 비율을 현행 20%에서 더욱 축소하게 된다. 이는 등록금 대폭 인상으로 이어져 연간 2,000만 원 이상이 될 것이다.
영어몰입교육은 영어로 하는 수업을 받기 위한 사교육을 유발할 것이다. 조기유학 확대, 경제자유구역 확대, 제주 영어 타운 외국학교 설립, 미국단기어학연수 등이 봇물처럼 터질 것이다. 영어가 자본이며 계급화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대입자율화조치는 3불제도(본고사, 기여입학금제, 고교등급제)를 부활할 것이다. 고교등급제와 본고사는 단숨에 부활하고, 기부금입학제 도입은 시기를 저울질할 것이다. 대학과 고교의 서열화와 계층 간 교육격차가 심화되고, 자립형 사립학교와 특목고 출신 학생들이 상위권 대학에 진학하는 통로로 제도화될 것이다. 이미 일제고사부활, 4.15학교자율화 조치 등으로 교육의 시장화를 밀어붙이고 있다.
4) 의료도 산업이다! 돈 없는 자는 오직 죽을 권리만 있다!

한국은 현재상태도 민간병원중심 의료체계이다. 그런데도 의료 공공성을 약화하려는 정부 자본의 기도는 멈추지 않고 있다.

<표 3> 국공립 병원수 비교

한국(2002년)
미국(1999년)
일본(1999년)
독일(1999년)
프랑스(2000년)
호주(2001년)
129개(10.2 %)
2,058(35.4)
1,854(20.1)
753(37.4)
1,058(25.2)
749(59.2)


이명박정권은 ‘신성장 동력으로 의료산업 육성’을 선정했다. 노무현정권이 추진해 온 의료법 개악, 병원의 영리법인화, 건강보험 당연지정제 완화, 민간의료보험 활성화 등 의료산업화 정책들을 더욱 강력하게 추진하려는 것이다.
1998년, 2000년 요양기관 대표자들이 당연지정제 헌법소원을 제기했으나 기각된 바 있다. 그러나 ‘경제특구지역의 외국계 의료기관 당연지정제외’ 등 폐지 기도는 계속되었다. 촛불집회로 표현된 반이명박정권 여론 때문에 정부는 당연지정제를 유지한다고 하지만 당연지정제 폐지는 이명박 정권이 궁극적으로 노리는 바다. 당연지정제가 폐지되면 건강보험을 적용하지 않는 민간보험회사 지정병원이 등장하여 민간보험은 더욱 확대될 것이다. 나아가 현행 의무가입제도를 선택가입제도로 전환하여 특권층과 사각지대의 극빈자층을 시작으로 건강보험 미가입자 확대를 초래할 것이다.
다른 한편 이명박 정부는 공․사 의료보험 정보공유제도를 만들어 건강보험 가입자의 질병정보를 민간의료보험업자들에게 넘겨 민간의료보험을 키우려 하고 있다. 그리고 국민건강보험을 조합방식으로 변경하여 조합간 경쟁을 유발하고, 그나마 있는 소득재분배 기능을 없애려 하는 것이다. 조합간 경쟁은 필연적으로 운영 효율성의 강화를 위한 구조조정을 불러 올 것이다. 돈 안되는 건강보험제도는 죽이고, 돈되는 민간보험제도를 키우겠다는 것이다.
또한 병원의 영리법인 허용은 의료의 공공성을 완전히 파괴할 것이다. 조사에 의하면 제도 시행시 90% 이상의 병원이 영리법인으로 전환할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인건비감소를 위한 비정규직 확대, 이윤이 적은 필수의료서비스 제공 거부, 고급의료서비스 개발과 가격인상, 과잉진료 등 비정상적인 의료제공의 확대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5) 이제 노후보장을 위한 사회적 장치는 없다!

이명박 정권은 국민연금 무력화를 노리고 있다. 이명박정권은 기초노령연금과 국민연금을 통합하여 국민연금의 연금지급을 소득의 40% 수준으로 낮추겠다고 한다. 현실적으로 보면 40년 가입 기준이므로 한국 사람들이 평균 25년 연금에 가입한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실질적 소득대체율은 25%-30%수준에 불과하다.
또한 국민연금을 개악하여 소득재분배 담당 기능을 폐지하여 완전 소득비례방식으로 전환하려 한다. 국민연금이 사회공공적 기능을 담당하는 것은 소득재분배 기능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국민연금가입 회피가 더욱 확대되어 국민연금은 노후보장의 극히 일부를 담당하는 것으로 전락할 것이다. 칠레의 경우 국민연금 사각지대가 확대되면서 국민연금은 결국 민영화되고 말았다. 이명박정권의 정책이 관철되면 한국의 국민연금은 머지않아 바로 민영화 될 것이다.
한편 이명박정권은 국민연금을 공격하기 위해 먼저 공무원연금을 공격하고 있다. ‘국민연금과의 형평성’, ‘철밥통’ 운운하면서 공무원연금 개악안을 6월 임시국회에 상정할 예정이다. 현재의 공무원연금이나 사학연금은 국민연금이 지향해야 할 최소한의 조건에 불과하다. 국민연금은 현재의 낮은 연금지급율, 민주적 운영 등의 문제가 산적해 있다. 따라서 국민연금제도의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공무원염금과 사학연금에 대한 개악은 저지되어야 한다.

6) 대운하
서울대 교수 300여명이 한반도 대운하에 반대하는 운동을 시작했고 환경단체도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러나 아직 노동운동진영은 한반도 대운하 문제에 대해 적극적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 문제를 2008년 노동운동 과제에서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이명박 정권은 4월 총선 이후 대운하특별법을 제정하여 속전속결로 대운하를 건설하겠다는 입장이었다. 경제를 살리겠다고 호언장담하고 있는 이명박 정권이 경제위기를 돌파코자 가시적인 경기부양책의 일환으로 대운하건설을 밀어붙일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명박 정부가 실리주의 경제이데올로기를 앞세우고 있기 때문에 한반도 대운하가 경제적 실리도 없다는 점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한반도 대운하가 모델로 삼고 있는 독일의 MD(마인-다뉴브)운하의 경우 독일 전체수송량의 3% 정도를 담당할 뿐이고, 일자리 창출효과도 거의 없다. 3면이 바다인 반도국가에서 ‘경운기보다 느린 속도로 움직이는 운하의 화물선’이 물류수송의 대안이 될 수 없음도 명확하다.
대운하는 우선 건설토목 분야의 일시적 경기부양을 위해 전국토를 난개발과 부동산 투기의 광풍으로 몰아넣을 것이다. 이는 주택과 토지의 공공성 확대강화와는 정반대로 치닫는 길일뿐이다. 강줄기를 인위적으로 곧게 하고 바닥을 파내 수심을 깊게 만든다면, 지금의 환경조건에 적응하여 서식하는 많은 생명체들은 도태될 수밖에 없고 한반도의 생태계는 대격변을 겪게 될 것이다. 주요 취수원인 강에 보를 설치하는 방식으로 운하를 건설하면 그 속의 물은 반드시 썩게 될 뿐만 아니라 선박 운행으로 오염될 것이 뻔하다. 또한 대운하 예정지역에는 수많은 지정 문화재와 매장문화재가 산재하고 있다.
극소수에 불과한 건설자본, 땅부자, 땅투기꾼들의 배만 불리고, 엄청난 공공적 가치를 파괴하는 대운하 문제의 핵심도 바로 사회공공성 문제이다. 노동운동은 이런 관점에서 대운하 문제를 2008년 운동과제로 삼아야 한다.


3. 비정규직화 등 노동기본권 쟁취 투쟁

1) 비정규직 정규직화

이명박 정권은 비정규노동자를 더욱 확대하겠다고 이미 공언한 바 있다. 노동부는 기간제 노동자의 사용기간을 2년에서 3년으로 늘리고, 파견허용 업종을 현행보다 확대하는 방안을 제출한 바 있다. 사용기간 제한 없이 비정규직 노동자를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연령을 현행 55살에서 50살로 낮추겠다고 한다. 사용기간 제한을 받지 않는 연령이 50살로 낮춰지면, 악화된 조건의 질 낮은 비정규직만 늘어날 것은 명확하다.
2008년 7월부터 100인 이상-300인 이하 중소영세사업장까지 개악된 비정규악법이 적용된다. 당연히 기간제노동자에 대한 계약해지, 외주용역화가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공공부문 구조조정과 맞물려 간접고용 형태의 비정규직이 확대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2007년 비정규 현장투쟁의 성과로 인해 일정정도 가시화시킨 비정규악법폐기투쟁전선을 이명박 정권 원년인 2008년에는 반드시 구축해 내야 한다. 7월을 전후로 확대될 수밖에 없는 비정규현장투쟁 동력은 투쟁의 큰 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 주간연속 2교대제

금속노조의 2008년 핵심요구로 부각된 주간연속 2교대제 쟁취는 신자유주의의 공세 속에서 노동강도완화, 비정규노동자 정규직화 등과 직결되는 중요한 반신자유주의 현장투쟁의 쟁점이다. 주간연속2교대제 쟁취는 지난 10년간 신자유주의 하의 노동 강도 강화, 비정규직화를 노동이 반전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3) 공공부문 파업권, 집회시위권
2006년 노사정야합으로 인해 만들어진 필수공익사업장 필수유지업무제도는 공공부문의 파업권의 무력화를 노리고 있고 백골단 부활, 무관용원칙 등으로 민주적 기본권에 대한 탄압이 극심하게 진행되고 있다. 한편 노사민정위원회가 6월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될 예정이다. 이미 중앙 차원에서 양노총, 경총, 노사정위원회, 국회환노위, 노동부 등 6자회담이 제기되고 있다. 지방에서는 ‘거버넌스’ 등 다양한 이름의 지역 노사민정위원회가 추진될 것이다. 이를 통해 노사협조주의를 조장하고, 파업을 고립시키려 할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 노동운동의 대응은 매우 수세적이다. 사회공공성 쟁취를 위한 집회에 25,000여명이 모였으나 경찰의 방해로 여의도에 갇혀버렸다. 그러나 금속노조는 공세적 중앙교섭 쟁취로 나아가지 못하고 대각선교섭으로 합법성 확보에 매달리고 있는 형국이다. 정권의 대응은 80년대 식이라 분석하면서도 노동운동의 대응은 ‘세련된 21세’식인 셈이다.


4. 대응방향

1) 주체적 준비정도

진보 세력은 민주노총, 공공운수연맹, 전교조, 보건의료노조, 공무원노조, 언론노조, 사무금융연맹, 대학노조 등으로 ‘공공부문 시장화·사유화 저지, 사회공공성 강화 공동투쟁본부’(공공부문 공투본)을 구성하고, 5.24 집회를 조직했다. 6-7월 총력투쟁은 7월 3-5일 파업을 포함하는 총력투쟁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그 내용은 7월 4-5일 1박 2일 상경투쟁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4월 25일, 노동자의힘, 다함께, 물사유화저지·사회공공성 강화 공동행동, 범국민교육연대, 건강권실현을위한보건의료단체연합, 빈곤사회연대,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언론개혁시민연대, 에너지노동사회네트워크, 전국공무원노동조합, 노동전선, 환경운동연합 등이 이명박 정권의 사유화 추진에 대한 대응방안 토론회를 개최했다. 200여명이 참가하였고, 공공부문 사유화·시장화 저지에 대한 활동가들의 높은 관심이 확인되었다.
그날 토론회에서는 민주노총이 추진하기로 한 국민연대의 추이를 보면서 대응체제 구축을 모색하기로 했다. 그러나 국민연대는 참여연대 등의 시민단체 간에 이견을 보여 구성이 사실상 중단되었다. 5월말에 제연대단위는 다시 공공부분 사유화·시장화 저지를 위한 대응 체제 구축을 논의할 예정이다.
그동안 한미FTA저지 투쟁을 위한 대응체제에서 드러났듯이 지역과 노동현장을 중심으로 한 실천에 많은 한계를 보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역에서의 연대체 구성이 추진되고 있다. 즉 대구, 충남북, 경기, 전북, 부산, 강원, 서울 등에서 밑으로부터의 사회공공성 공투체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2) 대응방향

먼저 이명박 정권의 공세의 특징을 잘 파악하자
노동자민중 진영의 투쟁주체형성 측면에서 보면 파상적, 단계적 공세로 분할, 공격당할 수 있다. 국회입법안, 지자체 조례, 정부예산안, 지자체예산, 개별 공기업 차원의 경영혁신 등 다양한 수준의 공세 때문에 노동자민중 진영은 투쟁의 집중점을 잡아나가기 어려운 형국이다. 특히 교육부문은 제도논의도 생략하고 대교협, 교육청, 지방의회 차원에서 파상적 공세를 펴고 있다.
또한 중앙정부 권한을 지방정부로 이관하여 지자체 차원의 공세를 펴고 있다. 이는 지역경제 발전논리와 결합되어 진행 될 것이다. 따라서 2008년 이명박 정권의 공공부문 사유화 공세에 대한 대응이 자칫하면 고립분산된 투쟁으로 지리멸렬할 수도 있다.
둘째, 이명박 정권도 약한 고리는 있다. 집권 3개월만에 지지율이 20% 수준으로 급락한 것, 초기 정권구축 과정에서 드러나는 부패 권위주의, 급격한 교육시장화 정책에 대한 반대여론, 대운하의 딜레마, 경제위기 가중 등은 이명박 정권의 한계를 드러냈고 그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저항전선을 구축케 할 것이다. 미국 쇠고기 수입에 대한 저항은 이런 점에서 일시적이고 우연적인 것이 아니다. 이명박 정권의 친자본정책․반노동반민중정책에 대한 저항투쟁은 현실이 될 것이다.
셋째, 공세적인 투쟁이 필요하다. 130만 명이 넘는 누리꾼들의 이명박탄핵서명과 촛불문화제를 기점으로 주춤하고 있던 시민․학생․노동운동이 움직이고 있다. 과거 민주화운동의 선봉이었던 대학생들도 나서고 있는데, 5월 7일 고려대 총학생회는 기자회견을 갖고 투쟁을 선포했다. 이어 연세대, 한양대, 중앙대 등 16개 대학 총학생회도 속속 투쟁에 동참하고 있다. 5월 6일에는 1,500개 시민․사회․노동․정치단체들이 ‘광우병 국민대책회의’를 결성했다. 5월 6일, 7일, 9일, 16일 저녁 7시에 서울 청계광장을 비롯해 전국 각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촛불문화제를 개최하고, 22일과 23일에는 국회 앞에서 국민대회를 열기로 했다.
이 모든 투쟁에 뒷전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민주노총은 총력투쟁의 상을 분명히 하고 총파업을 포함한 더욱 적극적인 투쟁을 준비해야 한다. 공공운수, 금속 등 산별 차원의 투쟁이 구체적으로 가시화되어야 한다. 6-7월 임단투, 6월 임시국회 공공부문 사유화 공세(FTA, 공무원연금, 물사유화, 교육시장화 관련법 등), 7월 비정규확대가 맞물리는 6말 7초 투쟁은 총파업 수준으로 준비해야 한다.
넷째, 파상적 공세, 현장에 대한 공세를 연대투쟁으로 돌파해야 한다. 비정규투쟁, 도철․서지․대우조선 등의 구조조정투쟁, 교육시장화 반대투쟁 등에 대한 연대투쟁전선을 구축하여 대응해야 한다. 특히 교육시장화 공세는 이명박 정권의 아킬레스건이 될 수 있는 부분이므로 전국과 지역 차원의 대응투쟁이 시급히 진행되어야 한다. 4.15학교자율화에 항의하는 전국적 1인시위 투쟁 등을 계기로 5월에 출범한 평등교육민중학부모회를 전 지역적으로 조직해야 할 것이다.
다섯째, 사회공공성 강화를 위한 지역연대투쟁전선을 구축하자. 각 지역의 조건에 맞게 다양한 형식을 취하되, 민주노총 지역본부가 바로 나설 수 있는 지역은 ‘공공성강화를 위한 지역공투본’을 구성해야 한다. 민주노총 지역본부가 바로 나설 수 없는 지역은 ‘사회공공성강화를 위한 00지역네트워크’ 형식으로 출발해야 한다. 이러한 지역연대투쟁전선체는 노조조직, 노동사회단체, 현장조직이 밑으로부터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연대체이어야 한다. 투쟁의 내용으로는 지역 차원의 공공투쟁 중심쟁점을 포착하여 집중투쟁을 전개하고, 현장선전과 지역선전, 지역 토론회, 강연회, 현장교육을 추진하고, 전국 차원의 공공투쟁을 지역 차원에서 활성화하는 사업을 전개해야 한다.
여섯째, 반신자유주의 반자본 사회화와 지역을 축으로 한 연대전선을 구축하자. 민영화 저지를 넘어서기 위해 ‘사회공공성 강화’로 나아가자는 공동의 문제의식이 제기되고 있다. 사회공공성 강화 방안은 반신자유주의 반자본 사회화라는 지향점을 분명히 세우고 제기해야 한다. 그리고 한국진보연대 출범 후 무너진 민중연대체계를 지역을 중심으로 재구축해야 할 것이다.
일곱째, ‘사회적’ 요구의 실상과 허상에 대해 인식하자. 공공부문 시장화·사유화저지, 사회공공성강화, 사회화쟁취 등이 ‘사회적’ 요구로 불리고 있다. 사회적 요구임은 맞다. 그러나 이는 임금, 고용 등은 기업별(또는 노동계급적) 요구라는 인식을 전제로 하고 있다. 2008년 노동운동이 사회공공성 문제를 실질적인 투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사회공공성 문제가 ‘사회적’ 요구이기 이전에 노동자계급 자신의 요구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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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의 보수화와 진보의 좌절, 그리고 미래 (pyg)

 

1. 2007년 말, 그리고 2008년 초

시간의 흐름은 일정하지 않다. 너무나 더딘 보수적인 시간, 심지어 시간의 흐름을 거꾸로 되돌리는 반동적인 시간이 있는가 하면 때론 메시아의 재림처럼 너무나 일찍 우리 곁에 오는 미래의 시간도 있다. 현재라는 찰나는 이 시간의 역동적 뒤엉킴, 과거와 현재가 갈라지는 분기점 속에 존재한다. 2007년 말, 2008년 초 우리는 이 시간의 소용돌이 속에 존재한다. 2007년 말 대선은 분명 반동의 시간이었다. 2008년 초 현재는 반동의 시간과 미래의 시간이 뒤엉켜 싸우고 있다.
2007년 말 대선 이후 2008년 4.9총선 때까지만 하더라도 시간의 흐름은 더디고 반동적인 것처럼 보였다. 이명박 특검과 삼성 특검이 이 반동적 시간을 채웠다. 항간에서 떠도는 말처럼 한국 사회는 ‘미쳤다.’ 그러나 그 시간은 또한 미래를 품고 있었다. 메시아처럼 재림하는 미래의 시간은, 한나라당과 친박연대, 선진당을 포함한 보수 세력이 개헌선인 2/3에 육박하는 압승과 민주노동당의 열세, 그리고 채 피어보지도 못한 채 좌절해야 했던 진보신당의 실험이라는 ‘반동적 승리’와 함께 도래했다. 과거와 미래의 동시성은 ‘대중’의 잠재적 역동성과 함께 우리 곁으로 도적처럼 왔다.
대선에서의 실패 이후 사람들은 여러 가지 진단을 내어 놓았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같이 한국 진보 정치운동의 실패를 ‘좌파의 무능력’과 ‘정책 실패’, ‘현실적이지 못한 이상주의’, ‘몽상적이고 이상적인 좌파 운동’, ‘원칙을 고수하는 비대중적인 정치’ 등등에서 찾았다. 그러나 이런 진단은 다름 아닌 그들이 오늘날 왜 보수우파들이 이야기하는 ‘잃어버린 10년’의 바로 그 세력들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그들의 평가 자체가 지난 10년 동안 한국의 좌파 운동에서 잃어버린 정신과 태도, 관점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한국의 진보운동이 잃어버린 것은 그들이 실패한 원인으로 진단한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역사를 전혀 반성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들이 이미 ‘보수(保守)’ 그 자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말은 진보적이지만 그들의 관점과 현실 인식, 행위는 ‘보수적’이다. 한국 사회의 보수화는 바로 이들처럼 보수화한, 퇴행적인 진보로부터 온다. 그들에게 ‘진보’란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삶, 그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을 보수(補修)하는 것일 뿐이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엄연한 세계화의 논리, 신자유주의의 냉혹한 현실을 인정하라고 말한다. 대중의 욕망과 세계화의 현실, 거부할 수 없는 경쟁의 논리와 물질적 풍요 등등을 말하면서 마치 그것이 ‘현실’이며 과학적 인식인 것처럼 말한다. 따라서 그들은 이미 들뢰즈나 네그리가 말하는 ‘현행적인 것(the actual)’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에게 현실은 현재라는 시간을 구성하고 있는 과거 시간의 축적,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과거의 연속적 흐름 속에 존재할 뿐이다. 여기서 미래라는 시간은 언제나 그 과거 시간의 연속일 뿐이다. 그들은 그것을 ‘유물론’이며 ‘현실주의’라고 말한다.
지난 대선에서 소위 386세대의 보수화는 이명박의 ‘실용주의’로 표현되었다. 한때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의 연합이 이야기되기도 했다. 그들에게 실용은 역사도, 정치적 당파도, 이념도 가지고 있지 않은 오직 현재 주어진 것들 안에서 현실을 긍정하고 현실을 이기적으로 이용하는 것일 뿐이다. 현재 보이는 것, 현재 존재하는 것, 현재 경험하는 것들이 ‘현실’이다. 그러나 그 현실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자본’이다. 역사는 이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는 항상 미래와의 대화 속에 존재한다.
그것은 미래의 잠재적 가능성을 포착하는 ‘현재의 행위’ 속에 존재한다. 그래서 미래는 현재 주어진 것들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주어진 것을 파괴하고 해체하며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하는 행위’ 속에 있다.
그람시가 말했듯이 “……승리할 수 있게끔 노력할 때에도 그는 여전히 유효한 현실이라는 지평 위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 유효한 현실을 지배하고 초월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이때의 ‘있어야 할’ 것은 구체적인 것이며 사실상 유일한 현실적이고도 역사적인 현실해석이며, 또 그것만이 만들어지는 역사요 만들어지는 철학이며 또 그것만이 정치”이다. 진보의 진정한 원칙, 좌파의 정신적 우월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자본’이라는 현재의 시간, 현실의 공간을 부정함으로써 미래를 선취하는 것이며 미래를 여는 운동이다.
그러나 지난 10년 동안 한국의 좌파운동은 이런 정신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현장에서 노동운동이 실리주의를 쫓아 우경화하고 사회운동이 ‘노동운동의 중심성’을 비판하면서 노동운동과 대립하고 시민운동이 노동운동 내부로 들어와 사회적 합의주의와 사회적 조합주의를 만들어내면서 ‘위로부터 진행된 민주화’와 더불어 10년 동안의 신자유주의 지배블록의 체제 내적 파트너가 되어가고 있는 동안, 한국의 진보운동은 ‘있어야 할 것’으로서의 미래를 향한 진보의 정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문제는 한국 사회의 보수화가 아니다. 문제는 오히려 한국 사회의 보수화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진보운동 그 자체이다. 그것은 좌파 운동의 진보적 좌표, 이념의 상실이며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지평이 창출하는 생활과 욕망으로의 투항이다. 2007년 대선의 캐츠프레이즈였던 ‘부자’, ‘경제 대통령’의 꿈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자본의 지배적 헤게모니 하에서 생존 경쟁의 장으로 내몰리면서 ‘부자’를 꿈꾸는 대중의 욕망과 ‘현실’을 준거점으로 삼아 지배블록 내부로, 신자유주의적 생산성과 경쟁 논리에 투항하는 좌파 운동 전체가 만들어낸 것이다.


2. 대중소비사회와 ‘외설적인 아버지’의 귀환

2008년 대선과 2009년 4.9총선은 ‘외설적인 아버지’의 귀환이었다. 거기에는 법도, 도덕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지젝이 이야기하는, 라캉이 세운 욕망의 공식,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잉여-향락의 공식이 적용되고 있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도덕성이나 진실성, 정의로움 등등을 문제 삼지 않았다. 여기서 관철되는 것은 ‘부자 되세요’라는 욕망의 코드뿐이었다. 그것은 지젝이 말하는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a’였다.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권을 거치는 동안, 한국사회는 ‘대중소비사회’의 풍요로움에 젖어 있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이 풍요로움은 결코 ‘풍족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끊임없이 생산되는 ‘결핍, 결여’의 텅 빈 공백 속에 존재하는 ‘풍요로움’이었다. 풍요로움은 존재의 생명이 느끼는 풍요로움이 아니라 자본이 생산하는 ‘결핍’으로서의 풍요로움이었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단순한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전개되는 자본의 지구화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보면 5-60년대의 대중소비사회를, 기술적으로 보면 70년대 극소전자혁명을 기반으로 탄생한 것이다. 자본의 대량생산은 대량소비를 요구한다. 서구에서 자본의 시장 개척은 국내적으로 대량소비를 위한 시장체제로서 대중소비사회를 만들어냈다. 오늘날 전개되는 다품종소량생산체제는 대량생산체제와 근본적으로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유연생산체제는 표준적이고 획일적인 하나의 상품으로 대중의 소비욕망을 창출할 수 없는 자본이 상품을 다각화하고 다양화함으로써 대중의 욕망을 생산하려는 자본의 전략에서 나온 것이다. 생산체제는 대량생산이 아니라 생산의 하드웨어를 중심으로 다양한 소프트웨어를 결합시켜 상품을 다양화하는 유연한 생산체제, 포스트 포디즘으로 전환하였다. 이런 전환의 기술적 기반을 제공한 것이 70년대 초 극소전자혁명이다.
엘빈 토플러나 다니엘 벨은 정보사회의 특징으로 ‘노동과 문화의 결합, 일상의 미학화, 서비스업과 같은 3차 산업의 성장’을 이야기했지만 이런 지식산업, 또는 정보산업의 발전은 자본의 무한증식욕구가 낳은 소비사회의 욕망을 전사회적으로 확산시키는 전략과 맥락을 같이 한다. 기본적으로 물질적 형태를 가진 생산 형태에 근거한 자본의 생산체제는 더 많은 소비 시장의 창출을 위해 다양한 미적, 문화적 양식을 상품 생산 체제 내부로 끌어왔다. 그것은 대중의 욕망을 상품의 필요에 대한 욕망, 즉 사용가치의 수준에서가 아니라 기호적 측면에서 생산하려는 자본의 전략이다. 자본은 대중에게 그들 자신의 욕망을 미학화하고 차별화함으로써 그 자신의 정체성을 ‘상품 소비’에서 획득하도록 바꾸어 놓았다.
사람들은 그가 소비하는 상품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며 자신을 다른 사람과 구별 짓는다. ‘차이-차별화’의 욕망은 그가 소유한 것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그것은 자신의 본래적인 생명적 욕망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본이 불러일으킨 ‘의사-개별화’ 또는 ‘의사-개성화’로서, 상품소비의 욕망일 뿐이다. 브루디외의 ‘상징 자본’, 또는 하우크가 말한 ‘상품미학’은 대중의 소비욕망을 창출하기 위한 자본의 책략에서 나온다. 여기서 욕망을 생산하는 것은 자본이 만들어내는 이미지, 차별화, 정체성의 욕망이다. 브랜드와 이미지는 남과 다르다는 자신만의 개성, 남과 다른 자신의 욕망, 자신의 치장을 생산하는 상품적 욕망의 정체성일 뿐이다. 따라서 화려한 쇼윈도의 상품들은 자본의 유혹이자 개인의 욕망을 소비적 정체성으로 전환시키는 코드화의 산물로서, 스펙터클한 자본의 세계일뿐이다.
한국에서 이런 대중소비사회와 정보사회의 성장은 매우 압축적으로 전개되었다. 게다가 이런 전개는 87년 6.10민주항쟁 이후 이루어졌던 개량적이고 반혁명적인 ‘위로부터의 민주화’와 함께 이루어졌다. 대중소비사회의 성장은 1980년대 중반 3저 호황을 기반으로 한 내수시장의 확장과 70년대까지 지속되었던 자본의 형식적 포섭에서 실질적 포섭으로의 전환에 근거하고 있다. 80년대 중반 이후 민주화와 더불어 나타났던 소위 ‘X세대’의 출현과 대중문화의 성장, 그리고 10대들의 대중문화에서의 주류화는 이를 표현한다. 그리고 이런 대중소비사회의 성장과 더불어 90년대 중반 이후 본격화한 정보사회는 대중을 ‘욕망’의 도가니로, 본격적인 소비사회-레저문화-문화사회로 몰아넣었다. 따라서 풍요로운 대중소비사회에서 ‘욕망’은 결코 실현될 수 없는 욕망을 향한 질주를 낳았다.
‘외설적인 아버지의 귀환’은 이와 함께 이루어졌다. 그것은 더 이상 도덕이나 윤리적 코드를 지키지 않는다. 자본은 그 욕망을 부추기며 욕망을 향한 질주, 충동의 끝없는 질주를 낳았다. ‘즐겨라’라는 지상명령은 자본의 상품 코드 속에서 숨 쉬며 더 많은 상품과 더 많은 잉여-향락을 요구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은 이 욕망의 화신으로 등장했다. ‘경제 살리기’, 그 욕망을 실현시켜 주지 못한 과거 정권에 대한 무능력에 대한 질타는 ‘실용주의’와 함께 ‘국익=국부’의 논리를 따라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외설적인 아버지의 귀환’은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것이었다. 70년대의 고도성장이라는 신화 속의 박정희는 결코 이 외설적인 아버지가 실현시킬 수 없는 ‘텅 빈 존재’이기 때문이다. ‘대타자’는 없다.
그러므로 4.9총선이라는 박정희-이명박으로 이어지는 신드롬의 극성(極盛)은 곧바로 그것의 실체를 드러내는 과정이기도 했다. 4.9총선과 함께 대중의 욕망은 ‘텅 빈 존재’의 발견, 결국 아무 것도 해결할 수 없는 대타자(大他者)의 현실화 속에서 ‘욕망의 배반’을 경험해야 했으며 그 욕망의 주체로서 자신을 재발견해야 했다. 그것은 지젝이 말했듯이 “만약 개인이 (‘거대한 타자’에게 투사된) 믿음을 박탈당한다면, 그들은 사태 안으로 뛰어들어 스스로 직접적으로 믿음을 떠맡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유물론이라고 지젝은 말한다. “‘전체로서의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즉 전체로 본다면 그 안의 “모든 것은 없음(무) 내부에 존재한다.”는 것이 유물론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가 바라듯이 “제도적인 상징적 차원에서 개인의 ‘거대한 타자’에 대한 지지를 없애는 일”, 즉 “진정한 문화혁명”으로 발전하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 현재 벌어지고 있는 촛불집회와 같은 대중운동이 지닌 한계가 있다.


3. 자본의 욕망과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수용하는 대중들은 단순한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싸운다. 그러나 그 욕망이 오히려 그들을 ‘예속’으로 몰아넣기도 한다. 여기서 예속은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투쟁이 낳는 것이다. 빌헬름 라이히는 “왜 사람들은 마치 그것이 구원이라도 되는 듯이 그들의 예속을 위하여 싸우는가?”라고 물었다. 우리는 이것을 오늘날의 한국 정치 지형 속에서도 동일하게 물을 수 있다. 80년대 좌파에서 전향하여 포스트적 담론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알뛰세르의 이데올로기론과 라캉의 욕망이론에서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고자 했다. 알뛰세르는 ‘상상적 동일화’와 ‘호명이론’을 통해서 이것을 해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제 포스트 모던적 담론들은 지배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층위가 단순히 생존을 위한 필요로부터 오는 ‘결핍’과 ‘결여’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다품종소량생산체제-유연생산체제-대중소비사회는 분명 대중의 욕망을 ‘결핍’에 대한 충족을 통해서 포획하지 않는다. 대중의 욕망을 이데올로기로 포획하는 것은 ‘향유’이며 ‘향락’이다. 그것은 ‘필요(need)’가 아니라 ‘충동(drive)’이다. 자본은 ‘자기 가치를 증식하는 가치’이다. 그것은 멈출 수 없는 욕망의 기관차이다. 그것은 대중의 ‘욕망’을 생산하며 창조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교환 속으로 들어가야 하며 ‘소비’를 창출해야 한다. 생산물의 등가 교환, 화폐체계를 통한 가치의 실현은 자본주의 생산에 내재하고 있는 모순이며 ‘난점’이다. 생산/소비의 분리라는 이 이원적 체계의 고유한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 자본은 대중의 욕망을 ‘자본의 욕망’으로 생산해야 한다. 대중소비사회는 이런 자본의 욕망이 생산하는 사회이다.
그러나 오늘날 상품미학의 전면화 속에서 성장하는 문화산업과 정보화에 기반하고 있는 지식정보산업의 활성화는 대중의 욕망을 다양화, 다원화하지만 그것을 충족시킬 수 있는 분배체제, 소득체제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정보화와 자동화라는 과학기술혁명에 근거한 신자유주의적 공세는 지젝이 말하듯이 결코 획득될 수 없는 욕망의 ‘텅 빈 공백’을 확장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라캉-지젝식으로 결코 획득될 수 없는, 근본적으로 ‘공(空)’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본주의 그 자체가 지닌 내적 모순, 즉 이윤증식의 욕구 자체가 대중의 욕망을 배제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생산-소비의 이원적 체계는 대중들의 소득 분배, 자본주의적 부의 사회적 분배를 통해서 가능하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지구화는 생산력의 발전을 자본의 이윤증식체계로 바꾸어 놓는다. 여기서 배제되고 축출되는 것은 노동이다.
임노동은 자본의 고유한 한계이자 난점이다. “맑스의 기준에서 볼 때 전체로서의 자본은 모든 전제 조건과 모든 가정들이 결과물로 나타나는 완전한 총체가 아니다. 전체로서의 자본은 반드시 어떤 타자와 관계를 맺지 않고는 스스로 존재할 수가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임노동은 살아있는 노동자의 생명 없이 존속할 수 없다. 그들은 생명을 유지해야 하는 인간이며 살아있기 위해 생산하고 소비해야 한다. 소비를 위한 재화는 노동력의 가치인 임금으로부터 얻어진다. 따라서 노동의 배제는 임노동의 가치 저하와 함께 실질적 소득의 하락을 낳는다. 임금의 하락과 노동 강도의 강화, 광범위한 실업과 같은 산업예비군화, 소득의 양극화와 빈곤층의 확산이 이루어진다. 오늘날의 신자유주의화는 한편으로 생산의 유연화-노동의 유연화-다양한 시장의 창출과 더불어 대중소비사회의 욕망을 다원화하고 부추기지만 다른 한편으로 노동의 배제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소비욕망을 제한한다.
이것은 포스트 모던적 ‘욕망’ 이론이 보지 못하는 지점이다. 그들은 ‘노동패러다임’을 근대적 패러다임이라고 비판하면서 근본적으로 생산의 영역에서 발생하는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을 간과한다. 대신에 그들은 이런 자본주의적 생산의 절대적 자기 한계보다 ‘소비’-‘욕망’에 주목한다. 고진은 생산자로서의 노동자가 아니라 소비자로서의 노동자에 주목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교환 체계에서 변혁의 가능성을 찾는다. 들뢰즈는 ‘탈주’에서 가능성을 찾는다. 그러나 이것은 자본의 지배를 생산하는 내적 모순을 보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오늘날 신자유주의 지구화에서 국가에 대항하는 계급투쟁의 의미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지구화는 더 이상의 외부가 없는 자본의 세계를 창출하고 있다. “부르주아지는 모든 민족들에게 망하고 싶지 않거든 부르주아지의 생산양식을 채용하라고 강요한다. 그들은 소위 문명을 도입하라고, 즉 부르주아가 되라고 강요한다. 한마디로 부르주아지는 자본의 모습대로 세계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사람들의 삶을 규정하는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이다. 자본은 모든 존재를 상품의 가치로 표준화한다. 표준화하는 기제는 화폐이며 화폐는 그들의 삶을 규정하는 존재 조건이 됨으로써 삶을 조직한다. 그것은 외적으로 강제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현실적인 삶으로 주어진 것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이것을 전지구적인 존재 방식으로 바꾸어 놓는다. 따라서 여기서 현실적인 것은 언제나 ‘상품’적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중의 욕망 자체가 ‘상품의 욕망’이며 ‘자본의 욕망’이다. 대중 운동의 역동성과 한계는 바로 여기에 있다. 대중들이 보는 현실은 자본주의이다. 그들의 육체가 체현하고 있는 것, 그들의 생명이 숨 쉬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이다. 대중들은 이 현실만을 본다. 이것이 자본주의라는 현실에서 발생하는 계급투쟁과 대중투쟁이 지닌 양면성이다. 그들이 욕구하는 것은 ‘자본의 현실’ 속에서 욕구되는 것이다. 그들은 ‘자본의 욕망’을 통해서 자신의 욕망을 꿈꾼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현실이 그들의 욕망을 실현시켜 주는 것은 아니다. 자본의 욕망은 오직 자기 가치를 증식하고자 하는 가치, 탐욕스런 증식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중의 욕망과 같은 것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대중소비사회에서의 대중은 자본이 생산하는 상품과 화폐를 통해서 역으로 자신의 욕망을 생산한다.
그러므로 바로 여기에 대중들이 왜 그 스스로 예속되기 위해 싸우는지, 아도르노처럼 왜 대중들이 권력자의 품 안으로 들어가 안식을 느끼는지 등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상품-화폐-자본 물신성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체제 그 자체가 생산하는 현실적인 메커니즘, 권력의 사회 생활적 물질성에 있다. 아울러 바로 그렇기 때문에 대중의 역동성은 언제나 ‘자본의 한계’ 안에서 양면적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극히 자본적이면서 반자본적이다. 다만, 그들은 그 모순적인 자본주의적 현실 속에서 ‘부조리’와 ‘불합리’를 체득할 뿐이다. 계급투쟁과 대중투쟁의 과정은 이것을 ‘대중들의 몸’ 속에 각인시킨다.
신자유주의-정보화-자동화는 한편에서 대중들의 눈앞에 화려한 쇼윈도를 펼쳐 놓고 무수한 욕망을 풀어헤치며 유혹의 손길을 보낸다. 그것은 ‘자본의 욕망’이다. 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돈’을 필요로 한다.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 취직을 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자본은 더 많은 사람들의 더 많은 노동을 착취하고자 한다. 가치의 생산은 기계에 더 많이 의존하고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과 사람들 사이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진다. 욕망의 크기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것을 획득할 수 있는 ‘전쟁 같은 노동’은 더욱 강화된다. 더 많은 대중들이 자본으로부터 배제되고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무수한 욕망의 화려한 고리로부터 밀려나 주변인이 되거나 자신의 노동력을 팔 수 없는 생존의 위협 속에 놓이게 된다. 자본에 의해 생산된 욕망은 자본에 의해 배제된다.
대중은 그것을 모르지 않는다. 대중은 그 누구보다도 먼저 자본주의의 냉혹한 현실을 자각한다. 그것은 지식이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모순이다. 그들을 순진하게 아버지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는 어린 아이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은 단견이다. 그들은 그 권력이 그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준다거나 아니면 새로운 희망을 준다고 믿기 때문에 그들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차라리 그렇게 믿고 싶어 할 뿐이다. 그들은 이미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하에서 일상적인 방식으로 자신들이 삶이 나아질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그들은 자유주의-합리적 시장경쟁과 같은 자본주의적 규칙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오늘날 대중들이 ‘부친살해’ 이후 등장하는 ‘상징계’, ‘규칙과 법칙을 지닌 상징’ 안에서의 욕망의 실현이라는 도덕적 코드를 버리고 오히려 그 이전의 ‘외설적 아버지’로 돌아가는 것은 그들 자신이 이 현실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대중운동이 지닌 역동성과 반자본적 역능성이 있다.


4. 대중의 양면성과 좌파의 보수화

과거 80년대 민주화 운동 이후 끊임없이 현장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계급투쟁은 생산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투쟁이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의 공격에 대한 방어의 성격으로 형성되었다. 그러나 자본은 자유주의적 정치개혁과 더불어 신자유주의 경제를 전면화하였다. 과거 민주화 운동의 성과 위에 선 김대중-노무현의 신자유주의 정권은 이런 개인의 욕망을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쟁을 국가적 체제로 코드화하는, ‘국가 경쟁력 강화’와 ‘세계화’, ‘합리화와 효율성’이라는 논리를 내세우며 개인을 ‘무한 경쟁의 장’으로 몰아넣었다. 그들의 실패는 ‘무능력하거나 비현실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신자유주의 지구화라는 현실에 너무 충실했기 때문에 나타났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속에서 이루어진 국익의 논리는 공공성의 논리 또는 사회연대적 논리가 아니다. 그것은 특권적 계급인 자본의 논리일 뿐이다. 세계화는 불가피한 현실로 승인되었으며 자본의 경쟁력 강화는 국가경쟁력 강화로 전환되었다. 여기서 국가권력은 이미 자본의 시녀로 존재하며 개인들은 자본을 위한 수단이 되었다. 국가권력은 보편이해로 자신을 가장하는 외피조차 벗어던져 버렸다. 국가는 공공성과 대외적인 보호 장치들을 제거해 버렸다. 따라서 국가는 더 이상 ‘보편이해’를 가장한 ‘계급이해’의 장치로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 96-97년 노동법 총파업 투쟁을 비롯한 반신자유주의 투쟁이 곧바로 국가권력에 대한 투쟁으로 전화하는 것은 바로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
이 과정을 통해 대중들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의 공세를 몸으로 학습해 왔다. 대중들은 더 이상 자본의 규칙과 규범, 상징적 체계를 믿지 않는다. BBK나 ‘고소영 내각’, ‘강부자 내각’ 등 도덕적 이슈들이 힘을 발휘하지 못한 것도, 4.9총선이 ‘뉴타운 건설’ 공약 속에서 이기적인 아귀다툼이 되어버린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제도적 규칙의 영향력이 쇠퇴했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이런 대중의 자본주의적 상징체계의 와해가 자본 그 자체를 향한 투쟁과 반자본의 역동성을 생산하는 것은 아니다. 죽음, 파괴의 욕망이 작동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자동적으로 새로운 생성의 힘으로 전화되지 않는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삶을 살아가야 하는 대중이 자신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 ‘현행적인 것’들을 모두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실의 부정은 그들에게 ‘생존의 포기’와 ‘죽음의 공포’를 유발한다. 따라서 대중의 선택은 이중적이다.
한편으로 대중은 주어진 현실 속에서 그것이 무엇이었든 간에 자신의 삶이 보다 나아지길 바라는 욕망을 따라 움직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규범과 가치가 아니다. 맹자는 ‘항산(恒産)이 있어야 항심(恒心)이 있다’고 했다. 신자유주의 광풍 속에서 대다수의 대중이 지금 직면하고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생존’이다. 생존의 벼랑에서 그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욕망은 차라리 단순하다. 그것은 그 권력이 무엇이든 간에 그들의 생활이 개선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그 소박한 꿈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이 아니라 자기보다 더 강력한, 실제로 그 꿈을 실행시킬 수 있는 타자의 욕망을 통해서 자신의 욕망을 꿈꾼다. 그들은 자기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진 누군가에게 자신의 욕망을 동일화함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고자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대중들은 ‘도덕적 규범’을 포기할 정도로 강렬한 욕망에 비례하여 그 욕망의 대리적 구현자에 대한 의혹을 가지고 있다. 김영삼-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지는 ‘위로부터의 민주화’는, 그것이 신자유주의적 정권인 이상 애초부터 대중들의 열망을 실현하는 권력이 될 수 없었다. 그들의 신자유주의는 오히려 대중들의 열망과 욕망을 배반하면서 빈부격차의 확대와 빈곤, 실업을 양산하였다. 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지는 대중의 광적인 지지와 집단적 패거리화는 그들의 욕망을 반영했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배반’이었다. 그것을 통해 대중은 국민국가에 대한 믿음을 상실해 왔다. 규칙은 파괴되었고 이 사회의 법적-제도적 권위는 훼손되었다. 사상 최악의 46%라는 투표율, ‘찍을 사람이 없다’거나 ‘그 놈이 그 놈’이라고 보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보이콧을 행사한 유권자들은 이미 그것이 헛된 미망임을 알고 있다. 여기에는 적어도 반체제적, 반제도적인 도발성이 잠재되어 있다.
좌파의 정치학이 작동하는 곳은 바로 여기이다. 그러나 87년 이후 좌파 정치는 보수 우파의 담론 헤게모니에 스스로를 투항시켜 왔다. 보수 우파들의 논리는 언제나 주어진 현실을 기반으로, 현실주의의 논리를 전개한다. 그들에게는 미래가 없다. 주어진 현실이 영원하고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논리가 바로 그들의 전통-보수(保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의 좌파 또한 이 논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은 대중성을 외치며 비현실적인 길이 아니라 ‘현실적’인 길을 원했다. 대중적인 것=현실적인 것이라는 사고 속에서 작동하는 정치학은 언제나 주어진 것들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의 포로가 되어 있는, 그리하여 결국 자본의 욕망 속으로 포획되어 들어가는 ‘실정성의 정치학’이었다.
그러나 대중이 원하는 것은 주어진 현실을 승인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그들은 주어진 현실의 규칙과 규범이 오히려 그들 자신의 족쇄가 되며 그들 자신의 삶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거기에 대고 그들은 더욱더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길을 모색했다. 그러나 그 길은 결코 합리적이거나 현실적인 길이 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거기서 실질적인 주도권과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자본’이기 때문이다. 정리해고와 파견근로제 실시, 부당노동행위가 있어도 현장의 운동은 자꾸만 실리화되었다. 노조 간부는 이미 노조 관료가 되어 가고 있었다. 대중적인 욕망은 탁구공과 같다. 그것은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기 때문에 노조 간부는 그 욕망을 합리적으로 통제하고자 한다. 그들은 대중의 욕망을 전부다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현실’로 전제한 이후에 대중의 욕망을 적절하게 조절하고 통제하는 실리의 정치, 실정성의 정치학을 추구했다. 따라서 한국의 좌파운동은 이미 기존의 체제와 제도를 부정하는 대중적 행위보다 퇴행적이었다.
그들은 대중을 가르쳐야 할 대상으로 삼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대중은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자신의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좌파는 이런 희망을 대중에게 주지 못했다. 그것은 그들이 ‘실정성의 정치학’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서구의 합리적 시민-개인주의적 인간에 기반하고 있는 시민사회운동이 그러했으며 노동자의 경제적 이해를 정치학의 모든 것으로 이해하는 한국의 관료화된 노동운동이 그러했다. 게다가 좌파의 정치운동을 지향하는 정파운동은 80년대의 서클 운동과 연고적인 봉건적 운동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대중들이 이 시대에 요구하는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힘=권력’이다. 물론 이 ‘힘에의 의지’는 이중적이다. 대중은 모래알같이 흩어진 나약한 개인들이다. 여기서 권력은 생성될 수 없다. 문제는 그들의 힘이 결집되는 것이다. 만일 그와 같은 권력의 집단적 생성, 권력의지의 집합체가 생성되지 않는다면 대중의 ‘권력 의지’는 정반대의 ‘의지’, ‘권력의 품으로 안기는 길’로 전화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대중들의 권력 의지는 철저하게 양면적이다. 그것은 죽음 본능이 이중적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것을 파괴하고자 하는 죽음 본능은 기본적으로 ‘기존의 낡은 것들을 파괴할 수 있는 힘’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들의 힘으로 생성되지 않는 이상, 대중의 권력의지는 더욱더 강한 대타자를 요구하는, 파시스트적 권력을 요구하는 욕망으로 전화될 수 있다. 박정희-이명박으로 이어지는 한국에서의 파시스트적 권력에 대한 신드롬은 이런 욕망의 흐름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은 대중의 욕망이 지닌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대중의 권력의지를 대중 자신의 권력으로 전화시켜야 하는 좌파 정치운동의 문제이다. 지난 10년 동안 좌파는 그 권력의지를 잃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지난 대선과 4.9총선에서 그대로 재현되었다. 보수화된 것은 대중이 아니라 좌파운동 그 자체이다. 여기서 자유로울 수 있는 한국의 좌파는 없다.


5. 적대적 모순의 다원화와 좌파의 실패

좌파의 보수화는 87년 이후, 그리고 90년대 현실사회주의권의 몰락과 함께 지배체제의 재코드화가 진행되었던 ‘위로부터의 민주화’와 함께 진행되었다. 한국의 진보운동은 자유주의적 민주화와 대중소비사회의 다원화 속에서 진로를 잃고 오히려 주어진 현실에서 대중의 욕망을 좇아가는 ‘실정성의 정치학’으로 빠져들었다. 보비오의 자유주의적 시민사회론과 하버마스의 생활세계가 시민운동의 이데올로기적 담론을 제공하면서 시민사회의 주류로 등장하는 동안 이들과 대립했던 좌파는 자본주의적 지배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현대성의 지평을 탐색함으로써 자신을 더욱 발본적인 세력으로 만들어왔다. 그러나 그런 방향 전환의 기저에는 정치에 대한 니힐리즘이 내재되어 있었다. 그것은 87년 민주항쟁에 이은 ‘위로부터의 수동혁명’ 속에서 포획되고 자유주의적으로 구축되는 지배헤게모니에 대한 좌파의 좌절이 자리 잡고 있었다.
노동자계급을 비롯한 대중은 자본의 지배 헤게모니 안으로 코드화되어갔다. 자본의 강력한 힘은 대중을 조직했다. 좌파는 좌절했으며 대중의 욕망을 조직하는 ‘권력’에 공포를 느꼈다. 현실적으로 더욱 냉혹해지는 자본의 공세에도 대중은 자본의 지배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결핍’은 생산되었지만 그들은 ‘향유’에 젖어 있었다. 따라서 좌파의 현실 정치학은 생산과 권력의 거시적 메커니즘이 아니라 생활과 장소, 소비의 영역으로 대체되었다. 아울러 현실에 대한 비판은 대중의 욕망을 더욱 급진화할 수 있는 정치적 강령과 ‘권력 의지의 집합체’를 창출하는 행동적 급진주의와 정치적 급진주의가 아니라 대중의 사회문화적 소비와 욕망을 심리적이고 미학적으로 탐색하면서 근대성의 내면을 파헤치는 이론적 급진주의와 미학적 비판주의로 대체되었다. 여기서 좌파가 상실한 것은 ‘대중의 역동성’을 정치적 권력체로 조직하는, 유물론적 정치학의 ‘변증법적 예술’이다.
그들은 ‘대중’을 알자고 말한다. 한편에서는 ‘대중’을 숭배의 대상으로 만들고 다른 한편에서는 ‘대중’을 계몽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대중은 숭배의 대상도, 비판의 대상도 아니다. 왜냐하면 대중의 양면성은 곧 자본주의라는 현실, 자본이 내적으로 생산할 수밖에 없는 모순의 효과이기 때문이다. 분명 대중은 상품 물신성의 지배적 효과 속에 존재한다. 그러나 자본은 모든 세계를 자신의 내부로 완전하게 포획할 수 없다. 자본의 한계는 고진이 말했듯이 임노동과 자연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생산 메커니즘이 유지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자본은 그것을 온전히 포획할 수 없다.
자본은 기본적으로 생산과 소비라는 이원적 체계의 정치경제학적 지형을 벗어날 수 없다. 생산과 소비는 분리되어 있지만 서로 균형을 맞추며 맞물려 작동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본주의는 불황과 공황으로 빠져든다. 생산량에 맞추어 소비량이 조절되어야 하며 소비를 통해서 생산의 힘이 창출되어야 한다. 여기서 양자를 매개하는 것은 ‘임노동’이다. 자본은 ‘임노동’ 없이 생산을 가동할 수 없다. 임노동의 재생산은 소비로부터 주어진다. 따라서 임노동을 통해서 자본주의적 생산과 소비의 모순은 중첩적으로 응축된다. 대중소비사회는 자본의 이 모순을 임노동자에게 전가하면서도 다양한 소비 욕망의 창출을 통해서 지배를 구축했다. 이것은 물론 자본의 의식적인 의도에 의해 이루어졌다기보다 자본의 생산이 요구하는 내적 논리를 따라 이루어졌다. 대량생산, 거대하게 축적된 자본은 대중의 거대한 소비를 요구한다.
그럼에도 대중소비사회의 창출은 자본의 지배에서 이중의 효과를 낳았다. 첫째, 임노동을 더욱더 생산의 지배 메커니즘으로 끌어들였다. 다원화된 소비의 양태를 통해 ‘향유’의 메커니즘을 생산하고 이에 대한 욕망을 코드화함으로써 대중으로 하여금 그것을 소비할 수 있는 돈을 획득하는 생산의 장에서의 몰입, 자본주의적 생산의 지배를 자신의 필요로 바꾸어 놓았다. 사람들은 소비하기 위해 더욱 열심히 일을 한다. ‘돈만 있으면 이 세계는 정말 살만한 곳이다.’ 둘째로, 자본주의 사회의 대중, 모래알처럼 개별화된 개인을 소비하는 개인으로 바꿈으로써 정치적 지배의 억압성을 감추었다. 문화산업과 상품미학은 대중의 욕망을 다원화된 상품적 욕망으로 코드화함으로써 냉혹한 자본의 지배를 망각하고 사회적 갈등과 대립을 해소하도록 만든다. 여기서 ‘실사회의 종언’이, 보드리야르의 ‘시물라시옹의 세계’가 펼쳐진다.
그러나 이런 지배의 효과에도 생산과 소비의 이원적 체계, 그리고 자본 증식으로 자연을 착취하는 자본의 지배는 자본의 적대선을 공간적으로 확장하면서 모순을 중첩적으로 강화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예를 들어 소비욕망은 생산 내부에서 착취의 논리로 전환되며 노동자들을 자본의 지배에 순응시키는 기제가 된다.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유연생산체제는 다품종소량생산과 다양한 욕망의 스펙터클을 펼쳐놓지만 그런 욕망의 다원화는 생산의 영역에서 배제되고 박탈된다. 생산의 영역에서 모순은 노동강도 강화와 노동배제로 이어지고 소비자인 임노동의 소득을 박탈한다. 일시적으로 노/자의 단일한 모순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 노동자, 파견 근로와 변형노동, 파트타임노동으로 분산되며 이주노동자와 같은 인종적이고 민족적인 차별과 여성노동자에 대한 이중적 착취로 변형되며 노동자 내부의 대립과 갈등으로 분산된다. 그러나 그런 대립과 갈등은 궁극적으로 사회의 모든 구성원을 자본주의적 생산과 소비, 양자로부터 축출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하의 노동자들의 양면성에는 이런 내부 분할과 반자본의 일탈이 뒤섞여 있는 것이다.
특히 자연과 소비의 일상적 생활 영역에서 나타나는 자본의 내적 모순은 모든 생명에 대한 파괴로 나타나고 있다. 자본의 모순은 생산에서가 아니라 자연과 호흡하며 살아가는 일상적 삶의 차원에서 적대성을 생산한다. 그것은 적대적 모순이 사회운동 차원으로 확장됨을 의미한다. 미국 쇠고기 수입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대량생산을 하는 축산업이 낳은 광우병이었다. 그러나 어디 그것뿐이겠는가? 유전자변형생물체와 식품들이 우리의 식탁을 위협하며 환경호르몬이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 먹을거리 자체가 문제가 되고 있으며 인간의 생명 자체가 자본 증식의 도구가 되고 있다. 따라서 생산 영역에서 발생하는 인종적이고 성적인 착취의 구조뿐만 아니라 소비 영역에서 발생하는 교육, 의료, 먹을거리, 환경과 같은 문제들이 ‘반자본’의 문제로 비화되고 있다. 여기서 생산 영역에서 진행되는 계급적대의 구조는 사회 영역에서 진행되는 공동체의 생활적인 문제들과 직접적으로 중첩되고 있다.
따라서 문제는 생산이냐 소비냐, 또는 거시적 구조냐 미시적 생활세계냐, 국가냐 생활이냐의 대립에 있지 않다. 60년대 이후 서구의 소비자자본주의와 소비사회론을 비롯하여 고진까지 ‘소비’에 중심을 두고 ‘생활’의 영역에서, 일반 시민들의 삶의 영역에서 ‘변혁의 가능성’을 찾는 것은 이런 자본의 정치경제학적 모순, 즉 생산의 내부에 존재하는 적대의 메커니즘과 모순의 중첩성을 망각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존의 생산 중심의 노동운동, 또는 노동자계급 중심성만을 외치면서 소비의 영역을 쁘띠부르주아적 시민운동으로 치부하는 소위 ‘정통’적 맑스주의 또한 소비의 영역이 생산의 영역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생산의 모순을 전가시키고 분산시키는 또 다른 지배의 양식이라는 점을 보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자본의 지배에 대항하는 ‘대중적 힘’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의 결합, 노동운동의 정치화와 사회운동의 적색화, 적․녹․흑의 연정이 필요하다. 사실, 지난 10년간 한국의 좌파운동은 그전에 그들이 기반하고 있었던 노/자간의 단일한 적대에 기반하고 있는 정치적 지형을 상실하고 있었다. 이에 좌파들의 전략도 바뀌었다. 특히, 시민운동의 성장과 더불어 좌파 또한 다양한 영역으로 자신의 영역을 바꾸었다. 그러나 이 과정 속에서 좌파는 ‘권력 의지의 집합체’를 창출하려는 정치적 의지를 상실하는 대가를 지불했다. 그것은 과거의 시간을 고수하는 소위 ‘정통’ 맑스주의자들의 완고함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시민사회운동 영역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소위 진보운동 진영 내부에서 노동운동과 시민운동, 계급운동과 사회운동, 그리고 맑스주의와 무정부적 코뮌 운동의 대립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이런 대립은 역설적이게도 적대적 모순을 다원화하는 자본의 분산 전략과 지배적 책략에 말려드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확장되는 자본의 모순에 대한 대중적 열망을 결집시키는 ‘권력 의지의 집합체’에 대한 임무의 해체 또는 망각이었다.


6. 대중에 대한 공포와 대중의 권력

대중은 언제나 꿈을 꾼다. 유토피아는 그들이 꾸는 꿈의 이름이다. 그리고 그 꿈이 미래를 창조한다. 그러나 그들은 일상적인 삶에서 유토피아적 꿈을 꾸지 않는다. 그들은 각박하게 경쟁하면서 생존의 벼랑으로 몰아가는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이 아니라 상호 호혜적으로 교환하는 코뮌적 공동체를 상상한다. 그러나 그것은 상상일 뿐이다. 그들은 언제나 현실에서 그것을 ‘공상’이라고 느낀다. 그러나 ‘이상’이 ‘공허한 원칙’처럼 느껴지는 것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어딘가에 이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세계가 없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다른 세계가 가능할 수 있다는 믿음과 비전을 현실화할 수 있는 ‘힘’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혁명은 광기이며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다. 그 속으로 몰려드는 대중적 폭발력은 그 힘을 느끼는 순간, 점화된다. 따라서 현실화의 문제는 지금 경험할 수 있는가 아닌가에 있지 않다. 현실화는 지금 존재하는 현재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 힘의 문제이다. 대중들이 더 이상 다른 세계를 꿈꾸지 않고 자본으로 투항하는 것은 그것의 힘을 발견할 수 없거나 믿음을 줄 수 있는 비전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전은 단순한 관념 또는 이론적인 정책이거나 프로그램이 아니라 그것을 실제로 실현할 수 있는 결집된 힘이다. 한국의 좌파들이 ‘잃어버린 10년’은 바로 이것이며 다시 솟구쳐 오르는 대중투쟁 속에서 피어나는 미래를 창조해야 하는, 그들이 책임져야 할 것은 ‘권력의지의 집합체’를 창출하는 것이다.
대중의 권력 의지가 지닌 이 양면성에서 지식인들은 공포를 느낀다. 90년대 이후 한국의 소위 진보적이었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대중파시즘이라는 유령과 국가권력 장악이라는 제도적 신화가 유행했다. 지난 10년간 유포되었던 대중독재, 대중파시즘이라는 대중공포증은 진보적 지식인들의 제도권으로의 투항을 합리화하는 변호론이 되었으며 그들만의 엘리트주의를 생산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그들은 역으로 정치적 지배 권력을 정당화하고 적극적인 보수주의자들이 되었다. 반면 ‘현실성’을 이야기하면서 ‘제도권으로 투항한 지식인들’은 현재 주어진 지배 권력과 체제만을 현실적이라고 말함으로써 그들 스스로 자기 이익을 합리적으로 추구하는 개인주의자들이 되었다. 이들은 전혀 다른 방향에서 시작하지만 결국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그것은 대중 위에 서는 정치권력으로의 투항이며 엘리트주의자로서 지배자가 되고자 하는 권력자로의 변신이다.
그러나 좌파들 또한 이런 공포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다. 90년대 이후 한국의 좌파 운동은 이런 담론에 대한 대립 지점에 서 있었다. 제도적 포획과 코드화를 벗어나 대중 자신의 권력, 코뮌적 권력을 꿈꾸었던 비제도적 좌파들은 그 반대편에서 ‘국가=전체주의’라는 유령을 만들어왔다. 그들은 대중의 욕망을 전치시키는 대타자에 대한 환상을 파괴해 왔다. 그들은 부르주아 대의제가 생산하는 ‘재현=대표(representation)’의 코드화를 벗어난 민중 자신의 권력, 코뮌적 자치 권력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것은 대중의 양면성을 무시하거나 애써 부정하는 것일 뿐이다. 현실적으로 대중은 그들의 욕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권력을 요구한다. 그것이 때론 국가로, 정당으로, 과학자(황우석)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들이 대중의 욕망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무언가 출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이 사는 세계에서 그들의 욕망을 대변할 수 있는 권력을 요구한다. 물론 여기에 전체주의와 포풀리즘의 위험이 존재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의 욕망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데 있지 않다. 그들의 욕망이 그렇게 작동하는 것은 주어진 자본주의적 현실로부터 비상구가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대표=대리’가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민중이 자기 스스로 권력의 중심에 서고자 하는 권력 의지를 부여하는 것이다. 강력한 국가 권력에 대한 민중의 요구는 그들 스스로 노예가 되길 바라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 스스로 권력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희망과 열정을 현실에서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희망을 주어야 한다. 권력의 지평을 바꿀 수 있다면, 그리하여 부르주아적 헤게모니가 아니라 민중적 헤게모니를 창출할 수 있다면 그때부터 대중은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떤 경우, 예를 들어 베네수엘라처럼 국가장치를 장악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질 수도 있다. 문제는 의회를 통한 국가권력의 장악이냐 아니냐가 아니다. 원칙이 적용되어야 하는 것은 이런 전술적 문제가 아니라 그 권력이 사용되는 방향이다. 베네수엘라의 혁명은 비록 위로부터 국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에서 시작되었지만 그것의 성패는 그 권력을 민중들에게 돌려주는 것, 민중들 자신을 권력의 주인이자 자치적 권력체로 조직할 수 있는 민중권력을 창출하는 데 있다. 따라서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권력화에 대한 경계와 공포가 아니라 오히려 대중의 열망을 권력화하는 데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베네수엘라의 차베스’이다. 대중이 ‘영웅’을 요구한다고 벌써부터 두려워할 문제는 아니다.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길은 다양하다. 그것은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좌파에게 오직 하나의 원칙이 있다면 그것은 민중 스스로 정치가가 되고 ‘정치적 권력체’가 되도록 그들을 조직하는 것이다. 그것을 성취하는 길은 주어진 현실의 모순 속에 있다. 모든 운동이 그렇듯이 사회적 변혁의 과정 또한 하나의 길, 하나의 경로를 가지는 것도 아니며 한 번의 혁명으로 이룩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80년대의 좌파운동이 가지고 있는 지식인의 관념적 사고이거나 순진한 생각일 뿐이다. 한 번의 혁명으로 모든 것이 바뀌지는 않는다. 다만 혁명이 근본적인 것은 그것이 이전과 다른 새로운 질의 사회적 형태와 권력의 형식을 창조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혁명의 순간은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연속적이고 영구적인 혁명의 출발일 뿐이다.
그러나 여전히 좌파 운동 내부에는 이런 순진함이 존재한다. 순진함은 그것의 열정으로 표현될 때 힘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순진함이 현실의 뜻하지 않은 난관에 봉착할 때, 혁명을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반동적 권력이 될 수 있다. 소위 레닌주의자를 자처했던 ‘왕년의 볼셰비키’가 그러했으며 ‘이성의 화신’으로 전화된 스탈린주의적 당 독재가 그러했다. 그들은 새로운 세계의 개척자, 사회주의 혁명의 계몽가가 되었다. 그것은 그들이 원한 것이 아니다. 우매한 대중들이 혁명을 망치고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 권력자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모순적인 현실의 운동, 모순적이기 때문에 역동적인 대중의 삶을 직시할 수 있는 유물론적인 정치학이 필요하다. 만일 레닌주의적 원칙과 계급투쟁의 단순화로 현실을 재단하려 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의도와 무관하게 대중의 양면성을 자신의 과학과 이성으로 단죄하고 바꾸고자 하는 엘리트주의, 대리주의에 빠져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제도냐 반(反)제도냐에 있지 않다. 의회주의와 반(反)의회주의의 대립쌍은 동일한 오류를 반복할 뿐이다. 시민운동과 정치-정당, 경제-노조의 양날개론에 근거한 의회주의 노선을 따르는 전자는 ‘실정성의 정치학’에, 후자는 생디칼리즘적인 주의주의와 무정부주의의 오류에 빠져 있을 뿐이다. 이제는 이 대립을 벗어나 ‘반자본’의 대중적 권력의지, 집합적 권력의지를 창출하기 위한 좌파 공동의 정치 전략과 전술이 모색되어야 한다.


7. 집합적 권력의지를 향한 좌파의 정치

대중은 자본의 모순 속에서 자신의 모순을 반복적으로 생산한다. 대중의 역동성은 이 모순의 반복 속에서 예측불가능하게 튀어나온다. 따라서 언제나 그랬듯이 다시 희망을 만드는 것은 생산을 책임지고 있는 대중, 즉 민중이다. 4.9총선의 참패를 느낄 사이도 없이 대중의 반란은 시작되었다. ‘이명박 탄핵서명운동’과 ‘촛불집회’를 만든 것은 좌파가 아니라 대중이었다. 좌파가 한국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을 때 대중은 이미 행동으로 자신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제는 한국의 좌파가 그 행동에 대해 행동으로 대답할 때이다. 그러나 그 행동은 집회를 쫓아다니면서 촛불 하나를 더 켜는 것이 아니다. 민중은 이미 그 행동을 스스로 조직했다. 한국의 좌파들이 해야 할 일은 대중의 파괴적 힘을 ‘민중의 권력’으로, 민중 자신의 권력으로 조직하는 ‘권력 의지의 집합체’를 창출하는 것이다. 대중에게 목마른 것은 미래의 비전을 보여줄 수 있는 정치적 힘이다.
이 힘을 창출하기 위해서 좌파는 첫째, 오늘날 신자유주의 지구화가 펼쳐놓는 자본주의 사회의 내적 모순을 거시적으로 탐색하는 정치경제학적 지형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미학적이고 해석적인 근대성에 대한 탐색은 미시적 작동을 밝혀주지만 적대의 기본적인 선을 등한시하거나 은폐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오늘날 자본주의의 내재적 모순은 ‘노/자의 단일한 적대선’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계급적대의 모순은 다양한 적대의 선을 타고 분산되며 적대적 대립의 양축을 약화시킨다. 게다가 그런 적대적 모순의 다원화, 다양화는 자본의 내적 모순을 해소할 수 없으며 일시적으로 적대의 선을 분산시키며 궁극적으로 자본의 내적 모순을 확장시킬 뿐이다. 따라서 적대의 선을 분산하는 운동은 결국 자본의 책략에 말려드는 것일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둘째, 적대의 선이 다원화되는 생산-소비의 영역에서 중첩되고 응축되는 적대의 선을 다시 포착해야 한다. 적대의 선이 다양화하는 것은 곧 ‘반자본’적 운동의 지평이 확장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생산현장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 실업자와 노동자의 대립뿐만 아니라 사회운동과 노동운동, 적색과 녹색, 적색과 흑색의 대립을 넘어 함께 자본의 힘에 대항하면서 민중적인 권력, 민중의 힘을 만들어낼 수 있는 정치적 비전과 행동을 조직해야 한다. 그것은 적대적 모순을 분산시키면서 적대의 선을 약화시키는 자본의 전략에 맞서 확산을 새로운 사회의 창조적 힘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영역의 확장은 새로운 사회구성의 힘이다. 따라서 생산 영역에서의 다양한 계급운동과 생활 영역에서의 시민운동, 그리고 자본의 반생명적, 반인간적 지배에 대항하는 사회운동의 보편성을 반자본이라는 공통의 전략 속에서 묶어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것은 중첩되는 모순의 공통성을 통해서 연대의 틀을 짜는 것이자 새로운 사회의 비전과 정책을 제시하는 것이며 대중들을 대항적 권력체로, ‘권력의지의 집합체’로 묶어내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물론 코뮌이다. 자본의 적대적 모순은 다양한 형태의 코뮌을 생산한다. 문제는 이 코뮌을 반자본의 대항적 권력체로, 자본을 대체할 수 있는 권력으로 조직하는 것이다. 그것은 대리주의를 반복하거나 제도화, 권력화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기존의 국가 장치까지를 포함한 ‘민중 권력’을 강화할 수 있는 다양한 전술이 개발되어야 한다. 문제는 국가 권력이 아니라 그 권력이 전략적으로 향하는 지점이다. 따라서 의회전술을 포함하여 민중적 권력을 생산할 수 있는 공동의 전략과 전술, 아젠다를 개발하고 공동행동을 조직해야 한다.
셋째, 좌파의 유물론적 정치학을 복원해야 한다. 유물론적 정치학은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에 주목하며 그 모순에 의해 생성되는 변혁의 파토스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열정을 자본과 다른 사회의 질과 형식으로 주체화하는 정치이다. 대중의 양면성은 관념적으로 재단되거나 비판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되어야 할 형식 속에서 에토스적으로 조직되어야 할 대상이다. 대중의 양면성은 대중 그 자신의 본래적 속성이 아니며 자본주의라는 그들이 살고 있는 현실사회의 내적 모순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대중의 양면성은 끊임없는 혁명의 파토스를 만들어내는 현실적 기반이며 새로운 사회의 대중적 열망을 정치적 주체로서, 대중의 자기 통치 권력으로 조직할 수 있는 원천이다.
그러나 그런 대중의 열정은 결코 그 자체로 자본을 대체하는 사회적 권력이 될 수 없다. 대중들은 새로운 사회를 생산하는 형식 속에서 훈련되어야 한다. 그것은 대중만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의 이념을 쫓는 좌파들도 마찬가지이다. 좌파가 대중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새로운 사회의 권력적 형식, 새로운 주체화의 형식을 적극적으로 창안하면서 자본주의와 전혀 다른 질의 사회적 형식을 지금-여기서 만들어간다는 점이다. 그것은 자본의 내적 모순에 근거하지만 결코 그 내부적 형식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모순을 자본의 외부, 새로운 사회의 형식으로 바꾼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새로운 형식과 질을 가진 조직적 형식을 지닌다. 이것을 ‘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대중 위에 서는 권력이 아니라 대중의 권력을 창출하기 위한 권력적 체계와 위상을 가진 조직이 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권력 장악을 목적으로 의회정당 또는 스탈린적 정당 개념을 넘어서야 하며 비제도적인 정당이 되어야 한다. 비제도적 정당은 그 자체가 자본의 안에서 밖을 모색하고 밖을 생산한다는 점에서 모순적이다.
그러나 현실의 역사는 모순의 끊임없는 재생이며 그 재생의 과정 속에서 미래를 생산한다. 연꽃은 진흙탕 속에서 자신을 정화하여 꽃을 피운다. 진흙탕은 현실이다. 문제는 그것을 새로운 사회의 역동적 힘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하나의 결단이다. 행위는 무오류로부터 나올 수 없다. 행위는 오류를 검증하려는, 그리하여 스스로 추락하며 다치는 행위를 통해서 생산된다. 좌파의 관념화된 정치학이 전화되어야 할 지점은 바로 여기다. 대중에 대한 공포가 계몽을 만들고 지도자를 만들고 대리주의적 권력과 관료주의를 만든다. 그러나 로자 룩셈부르크가 말했듯이 “진실로 혁명적 운동이 범한 오류는 현명한 중앙위원회가 절대적으로 오류를 저지르지 않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성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좌파는 이 역사적 짐을 스스로 떠맡는 자들이다. 대중은 결코 그 자체로 혁명적이지도 반혁명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대중은 모순적이며 이 모순이 그들로 하여금 진실로 혁명적이게 만든다. 문제는 그 혁명성을 새로운 집합적 권력의지로 변환시키는 것이다. 좌파는 이 모순을 떠안기 때문에 모순적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또한 혁명적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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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프티에 와 자유무역

현대 FTA와 자유무역
 
채만수(소장)
 

"노사과연이 한미 FTA 반대운동에 참가하다니, 의외다." 지난 3월이든가, 4월이든가, 한미 FTA 반대단체들의 회의에 연구소를 대표하여 참가하고 온 회원이, 거기에 참가한 다른 단체의 대표 한사람으로부터 들은 얘기라며, '보고' 겸 웃으며 전한 말이다.

절로 씁쓰레한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얘기한 사람의 눈에 비친 우리 연구소의 상(像)이, 그의 주관적 관점과 상관없이, 과히 싫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어딘가 찌그러진 상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미 FTA'라는 당면 문제의 본질과 성격을 그가 어떻게 보고 있는가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짐작컨대, 그의 눈에 비친 '노사과연'의 상은 필시, 계급문제만 중시할 뿐, 민족문제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백안시하는 단체일 것이며, 어쩌면 나아가서는, 맑스주의적 원칙에 충실하려는 것을 넘어서 '교조주의적'이기까지 한 단체일지도 모른다.

그가 당면의 한미 FTA의 본질과 성격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에 대한 정보는 나에게 없다. 하지만, 다음과 같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지금 한미 FTA를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 대개의 사람들이 그러한 것처럼) 그가 이를 '민족주의적' 혹은 애국주의적 관점에서 그것을 바라보는 경우, 즉, "한미 FTA는 '국익'에 반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반대해야 한다"는 식의 관점에서 그것을 바라보는 경우 ― 이 경우, 우리 연구소가 한미 FTA 반대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것은 당연히 그에게는 의외일 것이다. 다만, 이 경우에도 그가 성실한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어? 노사과연에도 역시 '애국적인 측면'이 있었구나" 하고 제멋대로 재단하는 대신에, "혹시 이 한미 FTA라는 문제에는 내가 생각하는 것 말고, 노사과연이 그 반대에 참여할 만한 어떤 다른 측면, 다른 성격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다음에, (여러 정황으로 봐서 그랬을 것으로 생각은 안 들지만,) 그가 문제를, 애국주의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독점자본의 이익 증대, 따라서 독점자본에 의한 노동자․인민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공격이라는 관점에서 보는 경우 ― 이 경우에도 그가 의외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그가 우리 노사과연을 "맑스주의적 원칙에 충실하려고 하긴 하나, '교조주의적'"이라고, 즉 맑스의 진의를 잘못 파악하고 있다고, 판단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우리 연구소 내부의 일부 회원에 의해서, 물론 다른 형태로, 제기되고 있다. 다름 아니라, "맑스 자신은, 그리고 물론 엥겔스도, 자유무역을 지지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는데, 그렇다면 지금 한미 FTA에 반대하는 것은 맑스주의의 창시자들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 따라서 비맑스주의적, 혹은 반맑스주의적이 아닌가?" 하는 문제의식이 그것이다.

문제를 애국주의적 관점에서, 따라서 '국익'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고 반대하는 데에 대해서는 이미 간단히 비판을 가한 바 있다.1) 따라서 그러한 애국주의적, 혹은 (소)부르주아 국가주의적 관점에서 왈가왈부하는 데에 대해서 무언가 발언하고자 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이 글은, '지금 한미 FTA에 반대하는 것은 맑스주의적인 것인가, 아닌가' 하는 일부의 문제의식에 대해 간단히 대답하기 위한 것이다.



자유무역에 대한 맑스(주의)의 태도

  ― 맑스의 "자유무역문제에 관한 연설"을 중심으로


맑스주의의 창시자들, 그러니까 맑스와 엥겔스가 기본적으로 자유무역을 지지하는 태도를 취했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진실이다. 여러 기회, 여러 문건에서 그러한 태도를 표명하였지만, 우리는 특히, 1848년 1월 9일에 맑스가 '부뤼쎌 민주주의협회'에서 행한 "자유무역문제에 관한 연설"[이하, "연설"]에서 맑스의 그러한 태도를 선명히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지금 "한미 FTA를 반대하는 것은 (혹시) 비맑스주의적, 혹은 반맑스주의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의식도 바로 주로 이 연설을 근거로 제기되고 있는 것일 것이다.

실제로 맑스와 엥겔스가 이렇게 논란의 여지없이 자유무역에 대해서, 엥겔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궁극적으로 그리고 원칙적으로는 찬성의 뜻을 표명하고"2) 있기 때문에, 현하 한미 FTA 문제를 바라봄에 있어서 맑스주의적 관점에 충실하고자 하는 사람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맑스가 자유무역에 대해서 "궁극적으로 그리고 원칙적으로 찬성의 뜻을 표명했다"는 엥겔스의 서술은, 그 발언 자체만을 떼어내어 자칫 잘못 들으면, 맑스가 자유무역에 대해서 "절대적인 지지를 표했다"는 식으로 이해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맑스의 연설도, 엥겔스의 해설도 잘못 이해하고, 오해하는 것일 뿐이다.

맑스의 "연설"을 고찰하기 전에 우선 엥겔스의 이 문장부터 고찰해보자. 그 문장을 생략 없이 인용하자면, 이렇다.


일정한 사정 하에서는, 즉 당시의 독일에서는 보호관세가 산업자본가들에게 여전히 유리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자유무역이 결코 노동자계급의 모든 고통에 대한 만병통치약이 아니라는 것, 또한 반대로 이들 고통 자체를 증대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입증하면서도, 그는 궁극적으로 그리고 원칙적으로는 자유무역에 찬성하는 뜻을 표명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문제가 좀 더 애매해지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맑스가 "궁극적으로 그리고 원칙적으로는 자유무역에 찬성하는 뜻을 표명하고 있다"는 엥겔스의 말이, 맑스가, (오늘날 "한미 FTA를 반대하는 것은 맑스주의적 원칙에 어긋나는 것은 아닐까"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혹시 그렇게 믿고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지만 아무튼,) '어떤 경우에도 자유무역을 지지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일정한 조건 하에서는 자유무역에 대한 지지를 철회, 혹은 유보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지, 이 자체만으로는 명확하게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맑스의 "연설" 그 자체를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다.

그런데, 만일 독자가, 맑스가 문제의 "연설"에서 보호무역제도나 보호관세제도에 대한 비판을 세세히 전개했으리라고 기대했다면, 또는 혹시 더구나 맑스가 자유무역을 그 자체로서 긍정적인 것으로 평가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면, 그는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실 맑스의 "연설"은 자유무역론자들에 대한 비판, 특히 "자유무역이라는 천년왕국에서는 [노동자들의 ― 인용자] 빵의 크기가 2배로 될 것"3)이라고 주장하는 그들에 대한 비판에 가장 많은 시간, 혹은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기 때문이다.

맑스가 이렇게 자유무역론자들에 대한 비판에 "연설"의 대부분을 할애했던 것은, 당시 자유무역의 전도사였던 영국의 자유무역론자들의 대부분이, 자유무역을 통해서 수입이 자유화되고 그리하여 값싼 곡물이 수입되게 되면, 빵값이 싸져서 그만큼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이 상승한다는 식의 허위의 선전을 해댔기 때문이다. 영국 자유무역론자들의 그러한 허위선전은 물론 자유무역을 위한 투쟁에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지원을 획득하기 위해서였다.

참고로 말하자면, 맑스가 논박하고 있는 것은 당연히, 자유무역제 하에서는 빵을 비롯한 식료품이나 기타 다른 상품의 가격이 내려갈 것이며, 따라서 동일한 화폐액으로 더 많은 상품, 즉 생활수단을 살 수 있다는 주장이 아니다. 오히려 맑스는, "의문의 여지없이, ... 모든 상품의 가격이 내려간다"면서, "이것이야말로 자유무역의 필연적 귀결이며, 그리하여 나는 1프랑으로 이전보다도 훨씬 많은 물건을 마련할 수 있을 것"4)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점과 관련, 맑스가 비판하고 있는 것은, 예컨대 노동자 생활수단의 가격 하락은 필연적으로 임금을 하락시킨다는 것에 대해 경제학자들이 침묵하고 있는 것, 혹은 그것을 인정하더라도 다시 물가의 하락은 소비를 증대시킬 것이며 이는 생산을 증대시켜 다시 임금을 상승시킬 것, 운운하는 주장에 대해서이다.

아무튼 자유무역 찬양에 대한 맑스의 비판이 얼마나 신랄한가는 다음과 같은 발언에서 명백할 것이다.


 오늘날의 사회상황에서 자유무역이란 무엇인가? 자본의 자유입니다. 아직 자본의 자유로운 발전을 제약하고 있는 약간의 국민적 장벽을 제거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자본의 활동을 완전히 해방한 것이 될 뿐입니다. 자본에 대한 임노동의 관계를 존속시켜두는 한, 설령 상품의 교환이 가장 유리한 조건에서 수행된다 하더라도, 착취하는 계급과 착취당하는 계급은 언제나 존재할 것입니다. 자본을 보다 유리하게 사용하면 산업자본가와 임금노동자 간의 대립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고 믿는 자유무역론자들의 자만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전적으로 그 반대입니다. 결과는, 이 두 계급의 대립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라는 것일 것입니다.

...

노동자는, 자유로워진 자본도, 결코 관세장벽에 의해서 시달리는 자본에 못지않게, 자신을 노예로 삼는다는 것을 볼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자유라고 하는 추상적인 말에 감동해서는 안 됩니다. 누구의 자유인가? ... 그것은 자본이 누리는, 노동자를 압살하는 자유입니다.

이 자유라는 관념은 자유경쟁에 근거한 상태의 산물일 뿐인데, 어떻게 해서 여러분은 이 자유라는 관념에 의해서 자유경쟁을 승인하려 합니까?

... 전세계적으로 형성되는 착취를 보편적인 우애(allgemeine Brüderlichkeit)라는 이름으로 부르려는 것은 단지 부르주아지의 품속에서만 발생할 수 있는 관념입니다. 자유경쟁이 한 나라의 내부에서 불러일으키는 모든 파괴적 현상은 세계시장에서는 더욱 거대한 규모로 재현됩니다.5)


그런데, 이렇게 자유무역, 혹은 그 찬양론자들에 대해서 신랄한 비판을 가하면서도 맑스는, 앞에서 본 것처럼, "궁극적으로 그리고 원칙적으로는 자유무역에 찬성하는 뜻을 표명하고 있다."

무슨 이유에서일까?

맑스 자신의 발언을 들어보자.


여러분, 우리가 무역의 자유를 비판한다고 해서 우리의 의도가 보호관세제도를 변호하려는 것이라고 믿어서는 안 됩니다.

입헌주의와 투쟁한다고 해서, 절대주의의 편인 것은 아닙니다.

게다가 보호관세제도는 단지, 한 나라 내에 대공업을 육성하는, 즉 그것을 세계시장에 의존시키는 수단일 뿐이며, 세계시장에 의존하게 되자 마자 이미 많건 적건 자유무역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보호관세제도는 한 나라 내부에서 자유경쟁을 발전시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예컨대 독일에서와 같이, 부르주아지가 계급으로서의 세력을 얻기 시작하는 나라들에서는 그들은 보호관세를 획득하기 위해서 커다란 노력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로 그 보호관세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봉건제나 절대주의 국가권력에 대항하는 무기이며, 그들에게 있어 그것은 자신들의 힘을 결집하고 국가 자체의 내부에 자유무역을 실현하는 한 수단인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Aber im allgemeinen) 오늘날, 자유무역제도는 파괴적으로 작용함에 반해서, 보호관세제도는 보수적입니다. 자유무역제도는 종래의 국민성(Nationalität)을 해체하고,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대립을 극한까지 밀어부칩니다. 한 마디로, 무역자유라는 제도는 사회혁명을 촉진합니다. 그리고 오로지 이 혁명적인 의미에서만, 여러분, 나는 자유무역에 찬성합니다."6)


"무역자유라는 제도는 사회혁명을 촉진합니다. 그리고 오로지 이 혁명적인 의미에서만, 여러분, 나는 자유무역에 찬성합니다"(Und nur in diesem revolutionären Sinne, meine Herren, stimme ich für den Freihandel.)!!! ― "연설"의 마지막 문장이다!

우리는, 이 마지막 문장에 대해서 얘기하기 전에, 그러나 이 마지막 문장을 염두에 두고, 위의 긴 인용문에서 몇 가지를 확인해보자.

우선, "우리가 무역의 자유를 비판한다고 해서 우리의 의도가 보호관세제도를 변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 마찬가지로, 우리가 한미 FTA를 반대한다고 해서 우리는 '보호무역'을 옹호하고 변호하려는 게 아니다.7) 하물며, [조선일보]를 비롯하여 일부 한미 FTA를 광적으로 옹호하고 추진하려는 자들이 악의적으로 떠들어대는 것처럼, "시대착오적인 쇄국"을 주장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다음으로, "부르주아지가 계급으로서의 세력을 얻기 시작하는 나라들에서는 ... 바로 그 보호관세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봉건제나 절대주의 국가권력에 대항하는 무기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오늘날 ... 보호관세제도는 보수적이다." ― "일반적으로는 보호관세제도는 보수적"이기 때문에 맑스의 경우 이에 반대하는 것이 두말 할 나위없이 당연하겠지만, 보호관세가 "봉건제나 절대주의 국가권력에 대항하는 무기"가 되는 어떤 특수한 경우에, 맑스는 그 보호관세에 대해서 과연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그러한 경우 그가 기꺼이 보호관세에 찬성했으리라고 말한다면, 잘못된 판단일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곡물법(1815-46)을 폐지하기 위해서 자유역론자들과 한패가 되어 지주들과 싸운 영국의 노동자들에 대한 맑스의 언급도 판단에 도움을 줄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영국의 노동자들은 영국의 자유무역론자들에게, 자신들이 그들의 기만이나 거짓말에 속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토지소유자들에 대항하여 자유무역론자들의 편에 섰을 때, 그것은 봉건제도의 최후의 유물을 해체하고, 나아가 더 상대할 적을 단 하나밖에는 없게 하기 위해서였다.8)


"봉건제도의 최후의 유물을 해체하고, 더 상대할 적을 단 하나밖에는 없게 하기 위해서"!

더구나 맑스는 다음과 같이 계속한다.


노동자들은 계산에 착각을 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주들이, 공장주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노동자들과 협력하여, 노동자들이 30년 동안이나 요구해왔으나 허사였던 10시간[노동]법안을 통과시키려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법은 곡물법이 폐지된 직후 통과되었다.9)


이러한 논의를 보면, 맑스가 보호관세제도에 무조건 반대하고, 자유무역을 무조건 찬성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 즉, 그는, 그 자신의 표현을 빌면, 자유무역 그것이 "종래의 국민성을 해체하고,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대립을 극한까지 밀어부치는" 경우에만, "한 마디로, ... 사회혁명을 촉진"하는 경우에만, "그리고 오로지 이 혁명적인 의미에서만" 자유무역을 찬성했던 것이다.10) 그리고 그가 보호관세제도를 "일반적으로" 반대했던 것은 당시 그것이 "일반적으로 보수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말은 당연히, 만일 어떤 경우에, 즉 예컨대, 보호관세(제도) 그것이, "봉건제나 절대주의 국가권력에 대항하는 무기"이며, "부르주아들의 힘을 결집하고 국가 자체의 내부에 자유무역을 실현하는 한 수단"인 경우, 그리하여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대립"을 발전시키고, 그리하여 "사회혁명을 촉진"하는 경우에는 그것을 지지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따라서, 예컨대 "맑스는 자유무역을 찬성했는데, 한미 FTA를 반대하는 것은 문제이지 않느냐" 하는 식의 문제제기는, 우선 그것이 신자유주의 시대인 현재 그 한미 FTA라는 것이 과연 "사회혁명을 촉진"하는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묻지 않고 있다는 의미에서도, 정당한 문제제기라고 보기 어려울 것이다. "무역자유라는 제도는 사회혁명을 촉진합니다. 그리고 오로지 이 혁명적인 의미에서만, 여러분, 나는 자유무역에 찬성합니다"(Und nur in diesem revolutionären Sinne, meine Herren, stimme ich für den Freihandel.)!!! ― 이 마지막 결론적 발언이야말로 이 경우 가장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한미 FTA의 반동성과 반대투쟁의 혁명성


그러면 과연 한미 FTA는, 혹은 일반적으로 자본주의 선진국, 특히 미국 주도의 FTA, 즉 '자유무역협정'은 그 자체로서 사회혁명을 촉진하는 것인가? 그리하여, 그것을 반대할 필요가 없거나, 반대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찬성해야 하는 것일까?

우선 문제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 "FTA, 즉 '자유무역협정'은 그 자체로서 사회혁명을 촉진하는 것인가" 하는 식으로, 즉 "그 자체로서"라는 말을 삽입하여 문제를 제기하는 문제제기 방식 자체에 대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내가 문제를 이렇게 제기하는 이유는, 현재 FTA 그것은 '대체로 봐서' 사회혁명을 촉진하고 있지만, 그것은 주로, 그 자체에 예정된 목적의 기능으로서가 아니라, 거꾸로 그것에 반대하는 투쟁을 통해서 노동자․인민을 혁명적으로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나는 다시 그것이 "대체로 봐서" 사회혁명을 촉진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왜인가?

그것은 다름 아니라 그 반대투쟁 내부에는 다분히 반동적 성격의 반대투쟁도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의 모두(冒頭)에 "문제를 애국주의적 관점에서, 따라서 '국익'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고 반대하는 데에 대해서는 이미 간단히 비판을 가한 바 있다"고 썼지만, 실제로 예컨대, "한미 FTA는 공화국 주권을 미 제국에 실질적으로 할양 양도하고자 하는 주권 반환 협정의 성격"(최형익 교수)11) 운운하는 식의 '반대투쟁', 즉 한미 FTA에 대한 그러한 애국주의적 관점에서의 비판과 반대, 반대투쟁은 극히 반동적이다. 맑스의 표현을 빌면, 해체해야 할 "국민성"(Nationalität)을 해체하기는커녕, 애국주의적으로 그것을 더욱 강화시키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선동은, 그것이 아무리 [조선일보] 같은 극우를 분노하게 만들더라도, 사실은 그들과 국가주의․애국주의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고, 그만큼 노동자들을 오도하는 극히 해악스러운 것이다.12)

다시 우리의 본래의 문제로 돌아오면, 나는 우선, 맑스가 19세기 중엽에 "여러분은 자유라고 하는 추상적인 말에 감동해서는 안 된다"고 했던 말을 본떠서, "자유무역이라고 하는 기만적인 말에 속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다. "오늘날의" 자유무역협정, 즉 FTA는 말 그대로의 '자유무역' 협정이 아니라 그 반대물, 즉 대표적으로 이른바 '지적재산권'에 대한 보호나 의약품 등의 특허권 강화․연장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독점자본의 가장 반동적이고 기생적인 독점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고, '자유무역'이라는 기만적 이름의 '보호무역' 장치이기 때문이다. 특히 "FTA란 WTO 체제 내에서의 상품 및 자본시장의 독점과 배제 전략에 다름 아니고, 이는 당연히 전반적인 과잉생산․과잉축적에 의해서 자극되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블록(bloc) 경제이다."13)

사실 신자유주의의 '자유주의'가 그러한 것처럼, 자유무역협정의 '자유무역' 또한 기만적이고 "희극적"인 것인데, 그것은 이미 1880년대에 엥겔스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이미 오래 전에 "자유무역은 그 자원을 다 소진해버렸기"14) 때문이다. '자유무역'이 '자유무역'으로서 진보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조건이 이미 사라져버린 지 오래인 것이다.

주지하는 것처럼, 1930년대의 파괴적인 블록 경제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반성으로서 제국주의 열강은 제2차 대전 후에 자유무역을 지향하는 GATT를 창설했다. 하지만, 주요 가맹국의 산업이 제2차 대전을 통해서 철저히 파괴된 결과 각 "국가 내에 대공업을 육성"15)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비예외'보다 훨씬 더 많은 '예외'를 두어 고율의 보호관세 등, 보호무역제도를 용인해오다가, 막상 그 대공업들이 건설되자 '우루과이라운드'를 거쳐 GATT는 소멸되었다. 그리고 '자유무역'으로서는 기만적이며, 동시에 제국주의적이고 반동적인 성격을 보다 강화한 WTO가 그 자리에 들어섰다. 이는, 현대 자본주의의 생산력과 그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의 격화된 모순 때문에 더 이상 19세기적인 자유무역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이러한 FTA는, 지난 1930년대의 블록경제가 그랬던 것처럼, 전반적․만성적 과잉생산과 그에 따른 전반적 위기를 해소시키거나 경감시킬 어떤 조건이나 수단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독점자본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고 폐지함으로써 자본주의 경제의 불안정성, 따라서 그 위기를 격화시킬 뿐이다."16) 그리고 그러한 한에서 그것은 부분적으로 "사회혁명을 촉진"시키는 것이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그에 대한 노동자․인민의 투쟁이 전제될 때에야 성립되는 이야기이다.

결국 한미 FTA는 그 자체로서는 결코 사회혁명을 촉진하지 않으며, 오로지 그에 대한 반대투쟁을 통해서만 사회혁명을 촉진하는 것이다.

우리는 한미 FTA의 이 측면, 즉 그것이 그에 대한 반대투쟁을 통해서만 사회혁명을 촉진시킨다고 하는 측면을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이는 특히 두 가지를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로는, 무엇보다도 그것은 우리에게 그에 반대하여 투쟁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만일 누군가가, "맑스는 자유무역에 찬성했고, 그 때문에 자유무역 협정으로서의 한미 FTA 반대투쟁은 오류"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결국 지금 제국주의에, 신자유주의에, 독점자본의 횡포․억압의 강화에 반대하여 일어나 투쟁하고 있는 노동자․농민에게 투쟁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이는 당연히 반혁명적이다. 너무나도 당연해서 오히려 진부할 정도의 얘기지만, 노동자․인민은 투쟁을 통해서 혁명적으로 된다.

둘째로는, 그 반대투쟁을 노동자계급적 노선에 입각하여 올바로 전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투쟁을 벌이되 그 투쟁이 국가주의적․애국주의적인 것일 경우에는 노동자들을 혁명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반동적인 민중주의, 국가주의, 애국주의로 이끄는 것이기 때문이다.

민족문제를 백안시하라는 뜻이 전혀 아니다. 제국주의에 대한 인식․투쟁의 경우 그것이, 민족주의적․국가주의적․애국주의적인 관점과 노선에서가 아니라, 노동자계급적 관점과 노선에서 수행되어야 진보적이고 혁명적인 것처럼, 민족문제 또한 그에 대한 인식과 투쟁이 그렇게 노동자계급적 관점과 노선에서 수행될 때에만 진보적이고, 혁명적이다. (참고로, 민족문제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그것은 비현실적이고, 관념적이다.) <노사과연>



현대 FTA와 자유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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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24일 - 위기에 국가딜레마

신자유주의 금융위기에

직면한 국가의 딜레마

[논설] 미국 정부는 시장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나

김성구(편집위원장, 한신대)  / 2008년09월23일 14시43분

작년 여름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에서 비롯된 미국의 금융위기는 양파껍질 벗기듯 새로운 부실과 위기가 연이어 드러나 끝 모르게 전개되면서 세계금융시장을 충격으로 몰아가고 있다. 가히 1930년대 대공황을 능가하는 자본주의 최대의 위기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베어 스턴스의 매각, 인디맥 파산, 패니 매와 프레디 맥의 국영화, 리먼 브라더스 파산, 메릴 린치 매각, AIG 구제금융 등 올해 들어 금융위기에 속절없이 쓰러진 대형 금융기관들만 거론해도 전율이 일어날 정도다. 대형 기관들의 위기가 드러날 때마다 금융시장은 폭락하였고, 미국 정부는 그때마다 공적자금 투입과 유동성 공급을 약속하면서 위기를 진정시키고자 안간힘을 써 왔다. 시장의 위기와 국가의 개입이 마치 힘겨루기를 하는 양상이며, 그때마다 증권시장은 폭락과 폭등의 널뛰기를 보여 왔다.

 

신자유주의 모국이자 최고 선도국에서 벌어지는 최악의 금융위기로 인해 시장의 자유와 규제 철폐가 자본주의 최고의 성장과 복지를 가져다준다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교리는 이제 극도의 불신의 대상이 되었다. 반면 국가의 개입을 철폐해야 한다고 목소리 높였던 신자유주의자들이 앞다투어 금융시장의 규제와 국가개입의 불가피성을 설파하며 공적자금 투입을 정당화하고 있다. 금융시장의 자산계급들도 자신들이 보유한 금융자산의 가치 유지를 위해 정부의 개입 조처에 목을 매고 있고, 보다 강력하고 전면적인 정부 지원책을 쌍수 들어 환영하는 상황이 되었다. 지난 30년간의 신자유주의적 규제 철폐와 금융화가 현재의 위기를 가져온 장본인이었으며, 신자유주의 교리는 대중들을 눈멀게 한 사악한 신앙이었음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파생금융상품에 입각한 주택대출 채권의 증권화와 가공자본의 운동은 어떻게 자립화한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주택경기와 실물경제에 제약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증권화와 재증권화의 금융혁신은 주택시장의 침체와 실물경제의 위기 시 오히려 금융상의 연쇄위기라는 부메랑으로 증폭되어 돌아올 수밖에 없다. 이는 금융자본 분석에서 맑스주의 경제학의 기본명제에 속하는 것이며, 부르주아 경제학과 저널리즘은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규제 철폐라는 신자유주의 기치 하에, 특히 파생금융상품 거래에 대한 금융당국의 감독과 관리가 극히 미진한 상태에서 투기와 탐욕으로 몰아간 이 금융거래의 부실 규모가 도대체 얼마가 되는지 미국 정부는 가늠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지금까지 투입되거나 약속한 공적자금과 유동성 공급의 규모는 다만 그 일부를 나타낼 뿐인데, 이것 또한 이미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올해 들어 미국 정부가 투입하기로 한 공적자금만도 9천억 달러에 이른 상태다. 즉 패니 매와 프레디 맥에 2천억 달러 구제금융, JP모건 체이스의 베어 스턴스 인수에 300억 달러 지원, AIG에 850억 달러 구제금융, 은행과 투자은행에 2400억 달러 대출, 주택압류 증가 방지를 위한 3000억 달러 지원, 심지어 MMF 보증을 위한 500억 달러 등등. 이와 같은 천문학적인 자금 투입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는 금융시장의 안정에 실패하였고, 급기야 모기지 관련 부실채권 전부를 떠안겠다며 새로 7000억 달러 규모의 공적자금 투입 법안을 의회에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FRB를 비롯한 6대 선진국 중앙은행은 이들 국가의 금융시장에 달러 유동성을 1천8백억 달러나 증대시키기로 합의하였다.

 

부시 미 대통령 말대로 그야말로 미국 역사상 “전례 없는 위기”에 대한 “전례 없는 대책”이 나온 것이다. 미 연방정부의 새해 예산 규모가 3조 달러임을 감안하면, 추가로 요청한 공적자금 7천억 달러는 예산의 1/4에 육박하는 규모인데, 대선을 두 달 남겨놓은 임기 말 대통령이 이런 중대한 사안에 대해 신속하고 과감한 결단을 내려야했던 것에서 현재 진행되는 금융위기의 심각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자본주의 위기에 직면해서 국가가 개입하는 것은 1930년대 대공황 이래 국가독점자본주의가 성립한 이후 더 이상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케인스주의 시대뿐 아니라 신자유주의 시대에도 국가의 개입과 위기관리는 국가독점자본주의를 구성하는 주요한 일 요소이다. 주지하다시피 경제위기의 근저에는 과잉자본의 문제가 있고, 금융공황이든 실물공황이든 공황은 이 과잉자본을 청산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공황을 통한 과잉자본의 청산을 통해 비로소 새로운 축적의 조건이 형성된다. 부르주아 저널리즘에서 말하는 자본주의의 자생적 회복력이란 이 폭력적 파괴를 통한 축적의 재개를 왜곡, 미화하는 것이다. 문제는 19세기 자유경쟁자본주의 단계와 달리 20세기의 독점자본주의 단계에서는 점점 더 위기 시에 과잉자본의 청산을 시장의 자발성에 맡기기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국가의 개입과 위기관리가 불가피하게 요구되었고, 이로써 자본주의는 국가독점자본주의로 성장전화하였다.

 

현재의 금융위기에서 보는 바처럼, 거대 금융기업의 부실과 파산은 과잉자본 청산의 시장기제이지만, 시장의 청산과정은 그 파급 효과가 너무도 위험해서 시장기제에 맡겨둘 수가 없다. 왜냐하면 과잉자본 및 위기의 청산이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의 청산이 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관념적인 부르주아 변론가들이 “도덕적 해이”라는 헛소리로 국가개입을 반대하고 시장의 순결성을 찬양한다 하더라도 진정한 자본주의 수호자들이 공적자금을 들고 시장에 들어오는 것은 이런 위험을 막기 위함이다. JP모건 체이스의 베어 스턴스 인수에서처럼 사적 기업 간의 시장 거래조차 국가 지원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개입과 공적자금의 투입도 위기를 진정으로 극복하는 길이 아니다. 국가개입은 과잉자본의 청산을 지체시키고 위기를 지연시켜 그만큼 경제회복의 동력을 약화시킨다.

 

또한 국가의 개입으로 과잉자본과 부실자본이 저절로 청산되는 건 아니다. 과잉자본과 부실자본은 청산되는 게 아니라 많은 부분 전가되는 것이며, 누군가가 그 비용을 부담하여야 한다. 공적자금, 국민의 세금이 바로 그것이다. 사적 자본의 부실을 자본가 계급 즉 주주와 채권자 그리고 경영자의 손실 하에 전액 털어내는 것이 아니라 공적자금의 투입을 통해 납세자에게 그 손실을 전가하는 것, 이른바 손실의 사회화가 구제금융의 핵심을 이룬다. 우리도 지난 외환위기 때 겪어본 바처럼, 공적자금의 투입을 통해 사기업과 금융기관을 공기업으로 전환하는 자본주의적 사회화는 이처럼 자본투자자들을 구원하고 손실을 사회화하는 기본 메커니즘이다. 이를 통해 대중들에 불리한 방향으로 소득이 재분배되고 그것이 실물부문의 침체를 심화시킬 것임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다.

 

공적자금 또한 무한정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설령 채권발행을 통해 공적자금을 조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국가재정에 의해 부담될 수밖에 없다. 이달 말로 끝나는 2007-2008 회계연도에 미국의 재정적자는 기록적인 4070억 달러로 추산되는 바, 내년 회계연도에는 4380억 달러의 적자가 예상되고 있다. 이런 적자 규모에 비추어 볼 때, 이미 투입하기로 약속한 9천억 달러와 추가 요청한 7천억 달러(전자의 일정 부분이 후자에 의해 충당되겠지만)가 미국 재정에 얼마나 감당하기 버거운 금액인가를 추측할 수 있다.

 

더욱이 공적자금 투입이 이것으로 충분한가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는 가운데, 구제금융과 공적자금 투입에도 불구하고 금융위기가 본격적으로 실물경제로 파급되어 2001년 시작된 미국 경기 사이클은 조만간 주기적 공황으로 끝맺을 것으로 보인다. 전후 미국자본주의 역사를 보면, 정부와 중앙은행의 시장개입에도 불구하고 주기적 공황을 예방한 적도, 또 주기적 공황을 피한 적도 없었기에 새로운 공황에 따른 추가적 재정압박도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재정적자의 심화 속에서 달러 가치의 하락 경향도 강화될 것이다. 헤게모니 통화로서의 지위도 그만큼 위협받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한편, 목하 진행되는 미국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위기 속에서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의 주요 명제들은 확연히 빛을 발하고 있다. 독점과 금융자본을 위한 국가개입, 국가와 독점-금융자본의 결합, 공적자금 투입과 손실의 사회화, 위기를 통해 진전되는 자본주의적 사회화 등 위기 시의 이러한 국가개입의 현실, 특히 개별기업과 금융기관에 대한 직접적 지원까지 분석하는 이론은 맑스주의 이론 내에서도 국가독점자본주의론만이 독보적이다. 나아가 금융위기의 결과 미국의 대표적인 투자은행들이 몰락하고 골드만 삭스와 모건 스탠리까지 은행지주회사로 전환하여 미국에서도 겸업은행의 지배가 확립되고 있다. 때늦은 감이 있지만, 이로써 미국형 투자은행이라는 특수한 모델을 20세기 자본주의의 이념적 모델로 둔갑시켜 레닌의 금융자본론을 비판, 폐기한 국내의 국가독점자본주의론 청산파도 더욱 설 땅을 잃게 되었다. 국가독점자본주의론 없이 현대자본주의의 위기 분석은 과학적일 수 없다. 국가독점자본주의론에 입각하지 않고 미국자본주의의 위기를 논하는 자가 있다면, 자신의 이론적 토대, 정체성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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