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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펙과제국주의] 중국의 대 아펙 정책


 

별첨 1

 

중국의 대 아펙 정책

 

중국이 아펙에 가입한 해는 1991년이다. 가입할 때만 해도 중국은 동아시아 내에서 아펙에 가장 회의적이었다. 중국은 아펙을 미국과 일본의 대립 속에서 태어난 기구 정도로 여겼던 듯하다. 따라서 아시아를 자신의 텃밭으로 만들려는 미국의 전략에 대해서도, 미국을 견제하면서 아시아 시장에서 주도력을 유지하려는 일본의 전략에 대해서도 시큰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중국이 아펙에 가입한 이유는 중국에게 중요한 시장인 미국한테서 최혜국 대우를 받기 위해서였다. WTO 가입을 원활하게 추진하기 위한 작업 정도의 의미를 넘어서지 못했다.

 

한편, 미국의 압력 때문에 EAEC(동아시아경제협의체)에 분명한 입장을 표하지 못하던 일본과는 달리, 중국은 마하티르 구상에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아세안(ASEAN) 시장에 적극 개입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를 더욱 굳히고자 했다.

 

그러나 아펙에 대한 중국의 수세적 태도는 1990년대 후반부터 급격하게 달라졌다. 결정적으로, 2001년 개최된 상하이 아펙회의 전후로 아페에 대한 중국의 태도가 바뀌었다. 장쩌민은 "중국 건국 이래 최대의 국제회의"임을 부각시키면서 13개국 정상들과 특별 외교를 했다. 2001년은 미중관계에서도 전환점을 맞이한 시기였다. 이 때 부시는 장쩌민과 10월 19일 양자간 정상회담을 열어 '테러와의 전쟁'을 토대로 "건설적인 협력관계"를 구상하기로 합의했다. 부시는 "중국은 미국의 적이 아니라 친구"임을 역설했다. 장쩌민은 "일관되데 테러와의 전쟁을 지원한다"고 밝혔다. 부시는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했고 장쩌민은 미국 보잉사의 항공기 30대를 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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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펙과제국주의] 일본의 아펙정책과 미일간의 긴장과 갈등

 

2. 일본의 아펙 정책과 미일간의 긴장과 갈등

 

일본의 아펙 정책은 '미국과의 공존과 견제'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일본이 처음으로 아펙 구상을 발표한 '개발연구회 보고'를 보면, 일본 지배자들은 미국과의 공존을 중요한 전제로 삼았다. 그러나 그 공존은 미국의 압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만은 않겠다는 의지도 담고 있었다. 일본 지배자들은 미국과 공조하지만 미국 경제력 쇠퇴의 한 상징인, 미일 경제 마찰에서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확보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1988년부터 아펙에 관한 정책들을 차근차근 준비한 일본은 정작 아펙 창설을 직접 제안하지는 않았다. 왜 그랬을까? 당시 일본은 "아시아 침략 역사와 경제면의 지배적 지위를 고려해서 돌출하지 않고, 북미와 아시아 쌍방에 대해 폭넓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일본보다는 경계를 받지 않는 호주에 주도권을 쥐게 하는 편이 효과적이라는 전술적 배려"(김원중, 1998, '일본과 동아시아 경제통합 - APEC과 EAEC를 둘러싼 갈등', <경제와 사회> 1998년 가을호(통권 39호))를 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아펙호'의 닻을 올린 국가는 호주와 일본이었다.

 

1988년 최초로 아펙 구상을 발표한 일본 통산성을 위와 같은 전략을 '개방적 지역주의'(Open Regionalism)라고 표현했다. '개방적'이라는 말과 '지역주의'라는 말은 분명 모순처럼 들린다. 그러나 당시 일본 정부에게 이것은 전혀 모순이 아니었다. 일본은 1985년말 이후 아시아 등지에서 일본 산업의 국제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은 엔고 때문에 해외투자를 아시아 나라들에 집중했다. 당시 일본의 해외투자 가운데 약 13% 이상이 이 지역에 집중됐다. 일본 통산성은 이 구조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도록 하기 위해서 1991년부터는 아시아 각국과 일본의 각료들이 참가하는 경제정책 조정 포럼인 '아세안 경제각료회의와 일본 통상대신간의 정기회합'을 출범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일본 자본가들이 아시아 지역에서 만든 제품이 수출되는 지역은 상당 부문 미국이었다. 만약 미국이 일본산 수출품에 규제를 가한다면 그야말로 큰 일이었다. 일본 정부는 자국 사넝의 국제적 네트워크가 원활히 움직이게 하려면 북미에서도 새로운 시장을 계속 창출해야 했다. 그래서 북미 시장에 대해 폐쇄적인 지역주의가 아닌 '개방적 지역주의'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아펙에 대한 일본의 이런 태도는 미국이 아펙을 단지 우루과이라운드의 보조자 정도로만 여겼을 때까지만 해도 큰 견제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이 아펙을 적극적인 도구로 삼으려 하자 상황은 달라졌다.

 

클린턴 정권의 대외정책 입안자 구실을 한 미국 국제경제연구소(Institute of International Economics) 소장인 벅스텐(Bergsten)과 그가 만든 아펙 저명인사 그룹(Eminent Persons Group; EPG)은 1993년 시애틀에서 열린 1차 아펙 정상회의에서 '아시아태평양 경제공동체를 위한 아펙 비전'을 내놓았다. 주되게 역내무역 자유화, 무역투자 원활화 조치 등 여러 분야에 걸친 미국의 공세적 무역정책을 천명하는 것이었다. 클린턴도 1993년 7월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한 연설을 통해 '태평양공동체' 구상을 내놓았는데, 여기에는 무역과 투자의 자유화와 지적 소유권 보호 등을 강력하게 추진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한 마디로 말해 아시아를 미국 주도의 자유무역지대를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질세라 일본은 미국의 '자유화' 방안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래서 당시 EPG 의장인 벅스텐은 일본 정부가 미국을 지나치게 견제하려 한다고 불평했다. 미국을 얼마만큼 견제해야 하는지 또 견제할 수 있는지를 놓고 통산성과 외무성이 분열을 겪기도 했다. 미국과의 공존 유지가 더 중요한가, 아니면 이른바 '탈미아시아주의'가 더 중요한가를 둘러싼 논쟁이었다.

 

아펙의 경제적 목표들이 사실상 이뤄지지 못했다는 지적들이 광범한데, 그 이유 가운데 하나로 아펙 내에서 벌인 미국과 일본 사이의 갈등을 들 수 있다. 1997년에 터진 아시아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1998년 11월 콸라룸푸르 회의에서 아펙의 무역 자유화 논의는 미국과 일본이 벌인 심각한 갈등과 말레이시아 마하티르와 당시 미국 부통령 앨 고어 사이의 설전 때문에 주요 의제들이 표류하기도 했다. 1998년에 미국과 일본이 무역장벽을 둘러싸고 첨예한 갈등을 빚었을 때 일본은 중국, 인도네시아, 태국, 말레이시아 등의 지지를 등에 업고 미국은 호주와 뉴질랜드의 지지를 받으면서 입장 차이만을 계속 확인했다. 당시 일본은 당분간 더 이상의 시장 개방 계획을 중단하자고 했고, 그럼으로써 회의는 사실상 종결됐다. 일본의 외무장관은 "미국이 악의 정신에 사로잡힌 나머지 국경개방이 더는 불가능할 정도로 취약한 나라들의 목구멍에 억지로 시장개방의 기준을 밀어넣음으로써 이 지역의 취약한 경제 기반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고 비난했다. 마하티르 총리는 그가 "집시 자본"이라고 부른 것이 더는 말레이시아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한 자본 통재 조치를 취하려 했고 당시 클린턴 대신 참여한 미 부통령 앨 고어는 말레이시아 국민이 마하티르를 타도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하면서 마하티르와 정면 충돌했다.

 

결국 다음해 말레이시아와 미국은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열린 1999년 아펙 무역장관회담에는 참석조차 하지 않았다. 1999년 뉴질랜드에서 열린 정상회의 결과를 다룬 한 기사의 제목은 이랬다. "아펙에 관한 유일한 쟁점이 있다. 아펙이 비틀거릴 것인가 아니면 골골거리면서 죽을 것인가."

 

이 모든 사실들은 아펙의 '하나의 공동체'라는 표어 이면에 제국주의 강대국들 사이의 치열한 이해다툼과 갈등이 도사리고 있음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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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펙과제국주의] 아펙에 대한 제국주의적 전략 (2)


 

1. 아펙에 대한 제국주의적 전략 (2)

 

또한 미국의 아펙 정책은 시간이 갈수록 경제 분야에만 머무르지 않고 있다. 미국은 아펙에서 단지 무역과 경제뿐 아니라 소위 안보 쟁점들을 결합해 다루고 있다.

 

이미 미국은 동티모르 문제와 같은 아시아 내의 정치적 분쟁에도 아펙을 활용했다. 당시 아펙에서 호주는 동티모르에 군대를 파견할 수 있는 정당성을 거머줬다. 1999년 아펙 정상회의 때 동티모르에 파병할 다국적군 구성이 논의되기도 했다. 그리고 지난 2001년 아프가니스탄 침공의 정당성을 국제적으로 얻은 공간도 바로 아펙이었다.

 

미국 대외정책에서 결정적 조언자 구실을 하고 아프가니스탄 침공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한 바 있는 브레진스키는 일찍이 아펙이 미국의 '지혜로운' 패권 전략 추진의 공간이 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중동만큼이나 정치적 역동성과 위험성을 지니고 있는 아시아야말로 미국의 패권을 제대로 보여 줘야 할 공간인데, 그에 비하면 아펙은 너무 느슨하다고 투덜댔다.

 

"아시아는 세계경제의 중심이 돼가는 것과 동시에 정치적 휴화산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아시아에는 유럽에서처럼 전통적인 영토적/인종적/민족적 분쟁을 희석/흡수/봉쇄할 수 있는 다변적 협력 구조가 없다. 아시아를 대표하는 세 가지 지역협력기구, 동남아의 아세안, ARF(Asian-Pacific Economic Cooperation, 아시아지역포럼, 아세안이 주도하는 정치안보 협상 기구), 그리고 APEC 등은 모두 유럽을 묶어 주는 다변적인 지역 협력 연대망에 춸씬 못 미친다.

 

오늘날의 아시아는 전세계적으로 가장 역동적인 대중적 민족주의가 집결된 곳이다. 아시아의 대중적 민족주의는 대중 매체에 대한 갑작스런 접근에 힘입어 가열되고 있고, 경제 성장과 그에 따른 사회적 부의 격차로 인해 팽창되는 사회적 기대감으로 더욱 높은 휘발성을 보이고 있다. 아울러 폭발적인 인구 증가와 도시화는 이러한 대중적 민족주의가 정치적 동원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높여 준다. 증대되는 아시아의 군비 규모는 이러한 상황을 더욱 위태롭게 만든다.

 

요컨대 동아시아는 펄펄 끓는 역동성을 지니고 있다. 현재까지 이러한 역동성은 이 지역의 급속한 경제 성장 속도로 인해 평화적인 방향으로 분출되었다. 그러나 비록 하찮은 것이라 할지라도 활화성이 높은 점화점에 불이 당겨지면서 제어력을 상실한 정치적 열정이 그러한 안전 밸브를 압도하게 될 가능성은 상존한다. 잠재적인 점화점은 많은 분쟁 지역에 상존하며, 각기 흑색 선전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농후한 잠재적 폭발성을 지니고 있다."(Z. 브레진스키, <거대한 체스판>, 삼인 202쪽)

 

브레진스키의 말대로 아시아는 가장 많은 주요 강대국들이 집중해 있는 곳이자 가장 군비경쟁이 치열한 곳이다. 국제전략문제여구소는 이 지역이 2005년에 유럽과 중동을 뛰어넘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무기를 수입했다고 발표했다. 미국은 바로 이 곳에서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아펙을 효과적인 무기로 활용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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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펙과제국주의] 아펙에 대한 미 제국주의의 전략 (1)


 

<1장>  아펙의 탄생 배경과 주요 회원국들의 이해관계

 

2005년 부산 아펙의 공식 표어는 "하나의 공동체다." 그러나 아펙의 창설 과정은 이 표어가 얼마나 위선적인지를 보여 준다. 아펙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과 일본은 아펙을 둘러싸고 제국주의적 긴장과 갈등을 빚었다.



1. 아펙에 대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전략 (1)

 

아펙은 1989년에 창설됐다. 처음 아펙 창설을 주도한 나라는 일본과 호주였다. 1989년 11월 캔버라에서 1차 회의가 열렸을 때만 해도 일본 정부와 기업들은 아펙을 자신들의 무역 블록을 안전하게 보호할 임시 도구로 여기는 정도였다.

 

일본 정부와 기업주들로서는 당시 막 생겨난 유럽공동체(EC) 경제블록 및 나프타(NAFTA; 북미자유무역지대) 같은 미국 중심의 경제블록과 벌이는 경쟁에서 뒤지지 않기 위한 대책이 필요했다. 예를 들어, 호주가 동티모르와 솔로몬군도에 파병을 공표한 것도 아펙 회의를 통해서였다.

 

한국 정부도 아펙의 주요 창설국 가운데 하나다. 당시 호주 노동당 내각 총리 봅 호크는 도쿄에서 일본의 장관들을 만난 뒤에 한국을 방문해 아펙 창설을 제안했다.

 

이 때 미국은 왜 빠졌을까? 아펙 결성이 일본과 호주 주도로 이뤄졌다는 사실은 아펙에 대한 미국의 관심 정도를 짐작하게 한다. 아펙은 출범 당시만 해도 미국은 자신을 '왕따'시키는 아시아 경제권의 형성을 미연에 방지하고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을 타결하기 위한 보조 수단 정도로 아펙을 인식했다. 한 마디로 말해 소극적 개입 정책이었다.

 

그러나 1993년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그 동안 미온적인 미국의 태도는 돌변했다. 당시 미국 정부는 각료급 수준이던 아펙 회의를 정상급 수준으로 격상시켰다. 미국의 대 아펙 계획이 바뀐 배경은 무엇일까?

 

첫째, 미국은 아펙을 통해 유럽연합을 견제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1993년 당시 유럽 국가들은 유럽 단일 시장을 만들고 안보정책 분야를 통합할 유럽연합을 창설했다. 미국 지배자들은 유럽연합 출범을 미국의 세계 패권을 위협하는 사건으로 여겼다.

 

당시 미국 대통령 클린턴은 '신태평양공동체 구상'과 '아태지역협력 강화' 방안을 내놓았다. 일련의 발표는 유럽연합을 겨냥한 것이었다. 한편, 클린턴의 아시아 구상도 유럽연합을 자극했다. 유럽연합의 지도자들은 '무척이나 이질적인 아시아를 미국이 통제할 수 있다면 유럽이 하지 못할 이유는 무엇이겠는가'라는 명분에 더 매료됐다. 그래서 유럽연합은 클린턴이 '신태평양공동체 구상'을 발표한 다음 해인 1994년에 대아시아 전략(NAS)을 발표해 아시아에 더 깊이 개입하려는 의지를 내비쳤다.

 

둘째, 미국 지배자들은 일본과, 동아시아 경제권의 역동적인 주체로 부상할 한국과 중국을 아펙이라는 틀 속에 둠으로써 아시아의 주요국들을 적절하게 견제할 수 있다고 여겼다.(박종귀, , 새로운 사람들, 398~404쪽) 유럽을 견제하는 한편 국제경제의 또 다른 강자인 일본을 미국의 영향권에 묶어놓는 효과도 누릴 수 있다면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셈이 될 것이었다.

 

일본을 견제하겠다는 미국 지배자들의 구상은 '확대 나프타' 계획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1992년 8월 나프타 협정을 통과시키고 얼마 뒤 미국은 '확대 나프타 구상'을 발표했는데 이 계획의 핵심은 나프타를 아시아 지역까지 확대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유독 일본만이 제외돼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해 '확대 나프나 구상'의 진정한 의도는 동아시아 경제성장의 이익을 일본이 독점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아시아의 '2인자'들을 확실히 제압하기 위해 여러 가지를 시도했다. 예를 들어, 미국은 한/중/일이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가 제안한 '동아시아 무역블럭'을 지지하지 못하게 하려고 갖은 수를 다 썼다. 그래서 1990년 우루과이라운드 교섭이 결렬된 직후 말레이시아 총리 마하티르가 제안한 '동아시아 무역블록'의 애초 구상에 한국/일본/중국 3개국이 포함돼 있었다. 미국은 자신이 빠진 동아시아만의 무역블록을 어떻게 해서라도 막아야 했다. EAEC(East Asia Economic Caucus; 동아시아 경제협의체)로 불린 이 구상은 미국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그룹'이 아니라 느슨한 모임 정도라고 할 수 있는 '코커스'(협의체)로 최종 명칭이 변경됐다.

 

미국은 일본이 말레이시아 같은 국가의 지지를 받아 아시아 경제블록을 만들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미국 지배자들한테 미국이 빠진 동아시아 경제공동체는 용납하기 힘든 것이었다.

 

미국은 일본한테 여기에 참여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촉구했다. 한국 정부에 대한 압력도 있었다. 당시 미국 국무장관 베이커는 1991년 아펙 서울회의에서 "40년 전에 한반도에서 피를 흘린 것은 미국인이었지 말레이시아인이 아니다"라고 한국 정부에 일침을 놨다.

 

'남반구초점' 소장 월든 벨로는 아시아의 산업 엘리트들이 일본 자본가들과 깊숙한 전략적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미국이 아펙을 통해 일본을 견제할 필요를 절실히 느꼈다고 지적했다.(월든벨로, '일본 중심의 무역블록의 실상과 미국의 아펙 구상', <역사비평> 33호 1996년 여름호) 클린턴 행정부 시절에 미 하원 청문회에서 미국의 무역정책 및 교섭 자문 위원단 관계자 폴라 스턴은 이렇게 경고했다. "아시아 국가들 간의 무역이 동아시아 무역총량의 약 45%를 차지하고 있는 이 때 일본이 주도하는 아시아 국가 간 통합은 미국과 동아시아의 무역관계가 가지는 중요성을 침해할 수도 있다."

 

셋째, 아시아 경제와 시장 자체도 미국 지배자들한테 매우 중요했다. 1988년까지만 해도 동아시아는 미국 수출 총액의 12%를 점하고 있었으나, 1993년에는 그 비율이 20%로 높아져 유럽연합, 캐나다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는 규모의 시장으로 성장했다. 당시 미국 정부 산하의 주요기구들은 '대규모 신흥시장 전략보고서'(BEMs; Big Emerging Markets; 한국, 중국, 인도네시아, 인도, 남아프리카, 아르헨티나, 브라질, 폴란드)에서 아시아 시장에 개입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거듭 확인했다. 1990년대 중반에 이르자 세계 총생산에 기여하는 비율 면에서 북미지역과 아시아가 각 4분의 1을 차지함으로써 두 지역의 비중은 동등해졌다.

 

미국 지배자들은 아시아 시장이 미국계 다국적 기업들에게 "기회의 창"이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무역 자유화와 시장개방을 위한 여러 정책들과 방향들을 아펙 회의에서 제안해 왔다.(이것에 관해서는 뒷장에서 서술하겠다.)

 

아시아 경제가 미국 지배자들한테 갖는 중요성은 단지 무역 정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최근 미국경제는 아시아 정부들이 빌려주는 돈에 의존하고 있다.동아시아가 2005년에 미국에 빌려줄 것으로 예상되는 돈은 3천1백억 달러(약 3백27조 9천8백억 원)로, 이는 미국 정부 연간 적자의 거의 절반이다. 동아시아의 정부들이 사들이는 미국 채권의 규모는 미국의 누적 국제수지적자의 43%에 달한다. <파이낸셜 타임스> 말마따나 "군 자금은 아시아에서 나오고 있다."

 

특히 대규모 외화흑자를 보고 있는 동아시아의 3대 경제 - 일본, 중국, 한국 - 는 미국에 수출해서 벌어들인 달러를 다시 미국에 빌려줘서, 미국 기업들과 소비자들이 이 경제들로부터의 수입품을 구매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런 교역 흐름이 세계경제를 떠받치고 있다. 일본/중국/한국은 2004년 말 미국 국채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나라 1/2/4위에 올라 있다. 아시아의 주요 3국이 미국의 재정적자를 메우는 데서 결정적인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의 다국적기업이 포진해 있고 페덱스(FedEx) 경영자가 회장으로 있는 아펙기업인자문회의가 최근 콸라룸푸르에서 열린 회의에서 "아시아에서 채권시장을 더욱 활성화하라"고 주문한 것이다.

 

1993년 시애틀 정상회의를 전후로 한 미국의 태도 변화 배경과 미국의 아펙 정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유럽연합과 일본과 중국 견제를 위한 도구로서 아펙, 미국 경제를 지탱하는 주요 버팀목으로서 아시아와 아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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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펙과제국주의] 머리말

 

머리말

 

11월 12일부터 11월 19일까지 부산에서 아펙(APEC) 회의가 열린다. 아펙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21개국을 포괄하며 전 세계 GDP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나라 정부들의 국제기구다.

 

노무현 정부는 2005 APEC 정상회의에 커다란 기대를 걸고 있다. 노무현 정부는 앞으로 10년 동안 한국에서 있을 최대의 국제회의라며 "한반도 평화를 진전시킬 중요한 계기"가 될 거라는 기대감까지 부추기고 있다.

 

부산시도 "부산 경제를 활성화하고 도시 브랜드 가치를 높일 절호의 기회"라며 APEC 정상들의 접대와 행사장 주변 치장에 시민들의 혈세 2천7백언 원을 아낌없이 투자하고 있다. APEC 정상들한테 깨끗한 부산을 보여주겠다며 부산역 노숙자들을 임시 수용소에 수용하고 노점상을 철거하고 있다.

 

한편, 정상회의가 진행될 "세계의 꼭대기"라는 뜻을 가진 누리마루의 APEC 하우스는 해군함정까지 동원돼 철통 보호를 받고 있으며 올해 초부터 '테러 대비'를 구실로 한 각종 훈련들이 줄을 이었다.

 

우리는 묻고 싶다. 도대체 APEC이 뭐길래? APEC이 내거는 "하나의 공동체"라는 표어에 담긴 진실은 무엇인가? APEC은 왜 태어났는가? APEC이 노리는 것은 무엇인가? 왜 APEC에 반대해야 하는가? APEC이 한반도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을까? 아펙이 제국주의적 도구임을 논증하는 이 소책자가 이런 여러 궁금증을 해결해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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