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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펙과제국주의] 일본의 아펙정책과 미일간의 긴장과 갈등

 

2. 일본의 아펙 정책과 미일간의 긴장과 갈등

 

일본의 아펙 정책은 '미국과의 공존과 견제'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일본이 처음으로 아펙 구상을 발표한 '개발연구회 보고'를 보면, 일본 지배자들은 미국과의 공존을 중요한 전제로 삼았다. 그러나 그 공존은 미국의 압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만은 않겠다는 의지도 담고 있었다. 일본 지배자들은 미국과 공조하지만 미국 경제력 쇠퇴의 한 상징인, 미일 경제 마찰에서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확보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1988년부터 아펙에 관한 정책들을 차근차근 준비한 일본은 정작 아펙 창설을 직접 제안하지는 않았다. 왜 그랬을까? 당시 일본은 "아시아 침략 역사와 경제면의 지배적 지위를 고려해서 돌출하지 않고, 북미와 아시아 쌍방에 대해 폭넓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일본보다는 경계를 받지 않는 호주에 주도권을 쥐게 하는 편이 효과적이라는 전술적 배려"(김원중, 1998, '일본과 동아시아 경제통합 - APEC과 EAEC를 둘러싼 갈등', <경제와 사회> 1998년 가을호(통권 39호))를 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아펙호'의 닻을 올린 국가는 호주와 일본이었다.

 

1988년 최초로 아펙 구상을 발표한 일본 통산성을 위와 같은 전략을 '개방적 지역주의'(Open Regionalism)라고 표현했다. '개방적'이라는 말과 '지역주의'라는 말은 분명 모순처럼 들린다. 그러나 당시 일본 정부에게 이것은 전혀 모순이 아니었다. 일본은 1985년말 이후 아시아 등지에서 일본 산업의 국제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은 엔고 때문에 해외투자를 아시아 나라들에 집중했다. 당시 일본의 해외투자 가운데 약 13% 이상이 이 지역에 집중됐다. 일본 통산성은 이 구조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도록 하기 위해서 1991년부터는 아시아 각국과 일본의 각료들이 참가하는 경제정책 조정 포럼인 '아세안 경제각료회의와 일본 통상대신간의 정기회합'을 출범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일본 자본가들이 아시아 지역에서 만든 제품이 수출되는 지역은 상당 부문 미국이었다. 만약 미국이 일본산 수출품에 규제를 가한다면 그야말로 큰 일이었다. 일본 정부는 자국 사넝의 국제적 네트워크가 원활히 움직이게 하려면 북미에서도 새로운 시장을 계속 창출해야 했다. 그래서 북미 시장에 대해 폐쇄적인 지역주의가 아닌 '개방적 지역주의'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아펙에 대한 일본의 이런 태도는 미국이 아펙을 단지 우루과이라운드의 보조자 정도로만 여겼을 때까지만 해도 큰 견제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이 아펙을 적극적인 도구로 삼으려 하자 상황은 달라졌다.

 

클린턴 정권의 대외정책 입안자 구실을 한 미국 국제경제연구소(Institute of International Economics) 소장인 벅스텐(Bergsten)과 그가 만든 아펙 저명인사 그룹(Eminent Persons Group; EPG)은 1993년 시애틀에서 열린 1차 아펙 정상회의에서 '아시아태평양 경제공동체를 위한 아펙 비전'을 내놓았다. 주되게 역내무역 자유화, 무역투자 원활화 조치 등 여러 분야에 걸친 미국의 공세적 무역정책을 천명하는 것이었다. 클린턴도 1993년 7월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한 연설을 통해 '태평양공동체' 구상을 내놓았는데, 여기에는 무역과 투자의 자유화와 지적 소유권 보호 등을 강력하게 추진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한 마디로 말해 아시아를 미국 주도의 자유무역지대를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질세라 일본은 미국의 '자유화' 방안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래서 당시 EPG 의장인 벅스텐은 일본 정부가 미국을 지나치게 견제하려 한다고 불평했다. 미국을 얼마만큼 견제해야 하는지 또 견제할 수 있는지를 놓고 통산성과 외무성이 분열을 겪기도 했다. 미국과의 공존 유지가 더 중요한가, 아니면 이른바 '탈미아시아주의'가 더 중요한가를 둘러싼 논쟁이었다.

 

아펙의 경제적 목표들이 사실상 이뤄지지 못했다는 지적들이 광범한데, 그 이유 가운데 하나로 아펙 내에서 벌인 미국과 일본 사이의 갈등을 들 수 있다. 1997년에 터진 아시아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1998년 11월 콸라룸푸르 회의에서 아펙의 무역 자유화 논의는 미국과 일본이 벌인 심각한 갈등과 말레이시아 마하티르와 당시 미국 부통령 앨 고어 사이의 설전 때문에 주요 의제들이 표류하기도 했다. 1998년에 미국과 일본이 무역장벽을 둘러싸고 첨예한 갈등을 빚었을 때 일본은 중국, 인도네시아, 태국, 말레이시아 등의 지지를 등에 업고 미국은 호주와 뉴질랜드의 지지를 받으면서 입장 차이만을 계속 확인했다. 당시 일본은 당분간 더 이상의 시장 개방 계획을 중단하자고 했고, 그럼으로써 회의는 사실상 종결됐다. 일본의 외무장관은 "미국이 악의 정신에 사로잡힌 나머지 국경개방이 더는 불가능할 정도로 취약한 나라들의 목구멍에 억지로 시장개방의 기준을 밀어넣음으로써 이 지역의 취약한 경제 기반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고 비난했다. 마하티르 총리는 그가 "집시 자본"이라고 부른 것이 더는 말레이시아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한 자본 통재 조치를 취하려 했고 당시 클린턴 대신 참여한 미 부통령 앨 고어는 말레이시아 국민이 마하티르를 타도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하면서 마하티르와 정면 충돌했다.

 

결국 다음해 말레이시아와 미국은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열린 1999년 아펙 무역장관회담에는 참석조차 하지 않았다. 1999년 뉴질랜드에서 열린 정상회의 결과를 다룬 한 기사의 제목은 이랬다. "아펙에 관한 유일한 쟁점이 있다. 아펙이 비틀거릴 것인가 아니면 골골거리면서 죽을 것인가."

 

이 모든 사실들은 아펙의 '하나의 공동체'라는 표어 이면에 제국주의 강대국들 사이의 치열한 이해다툼과 갈등이 도사리고 있음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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