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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1/07
    그래 나는 싸가지가 없다. (2)
    kirehiais
  2. 2008/12/04
    파시즘의 행보
    kirehiais
  3. 2008/11/25
    생각좀 하자 생각!
    kirehiais
  4. 2008/11/07
    placebo effect
    kirehiais
  5. 2008/11/05
    역시 잠이 안오면 어떻게든 잠을 청해야 한다. (2)
    kirehiais
  6. 2008/10/24
    삼킴
    kirehiais
  7. 2008/10/14
    배가 부르다
    kirehiais
  8. 2008/09/27
    one way ticket (1)
    kirehiais
  9. 2008/09/26
    허무의 제왕(2)
    kirehiais
  10. 2008/09/19
    헛소리 (1)
    kirehiais

그래 나는 싸가지가 없다.

 

누구나 마음속에 이상을 품고 산다. 만약 없다면 다시한번 생각해보라. 분명 있을 것이다.

 

그렇듯 나에게도 여러가지의 이상들이 있고 막연히 불가능한 것들이라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 이상이 무엇이든 간에 자신만의 것이라서

 

남에게 강요하거나 우월하다고 이야기하기에는, '매우 주관적이기 때문에', 무리가 따른다.

 

 

그래서 절대로 자신의 이상이 객관적인 사실들에 근거한 논리적 결과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사람들, 특히 어떤 위치에 있는자들, 그러니까 오래된 권위를, 녹슨 때처럼 스며들어 있어

 

대패로  박박 밀어내도 잘 벗겨지지 않는 그래서 이제는 잘 쓰지도 않는

 

철제 사무용 책상 같은 그런 권위를

 

마치 자신의 이룩한 것인냥 정작 새로운 느낌도 없어서 대단한척 하고 있는 모습을 볼때마다

 

그냥 계속 립싱크나 하지 왜 갑자기 라이브를 한다고 해서 보는 사람 마음 졸이게 만드는

 

어느 아이돌 가수를 보는 것과 같은 민망함과 죄송스러움이 마구 다가올 때

 

왜 내가 이런 거북한 기분을 '돈'씩이나 내고 느껴야 하는지 아득하게 정신이 멀어지는 것 같은

 

그런 권위를 짊어진 사람들은 항상 타인에게 이상을 강요한다.

 

 

뭐 늘 그렇듯 다 그런 건 아닐 것이다.

 

 

어쨌든!

 

 

그런 사람들(즉 이상을 강요하는 자)은 항상 인정의 욕구에 시달리는데

 

인정의 욕구가 매우 못된 감정은 아니다. 아니 못된 것도 아니다.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이 욕구를 이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다시말해서 당연한 감정인데 당연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이면 누구나 느끼는 것인데

 

이들은 자신들에게만 해당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정받고 있음을 당연히 여기고 그 인정을 통해 자신의 이상이 견고해지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렇게 되면 그 이상은 자신의 것이 아닌 보편적인 이상으로 탈바꿈하게 되고

 

자신의 머리속에서 완성된 것인데 세상이 완성시켰다고 착각하게 된다.

 

 

만약 이 세상이 한세대로 이루어져 있는 다시말해서 한세대가 끝나면

 

다른세대로 리셋이 되는 세상이라면 이런 자들의 이상이 그렇게 주관적이지도 않을 것이다.

 

즉 어느정도 보편성을 획득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은 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끊임없이 누군가 죽고 누군가 태어난다.

 

 

여튼 이들은 그들 마음대로 보편성을 획득한 이상을 그냥 혼자 간직하고 잘 살아가면 되는데 

 

문제는  강요를 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보아라 나의 이 위대한 이상을'

 

 그래서 대답했다.  

 

 "당신이 얼마나 '위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어리석은 제가 받아들이기는 어렵네요."

 

 

 

 

 

 그래 맞다.

 

 나는 싸가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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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의 행보






무엇이 보이는가?

두손을 꼭잡은 시장 아주머니의 감동에 찬 표정?

아주머니를 꼭 안은 이명박의 애틋한 표정?



배추 500포기?






이제 우리는 저열한 파시즘과 맞서 싸워야 할 '임무'마저 '부여'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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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좀 하자 생각!


최근에 서울시 교육청에서 서울시내 고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근현대사 특강 강사 배정을 놓고 이런저런 말들이 많다.

기사 일부를 살펴보면 왜 이번 특강이 문제가 되는지 대충 짐작 할 수 있는데

"특강 강사에는 교과서포럼 공동대표인 서울대 박효종 교수와 충남대 차상철 교수를 비롯해 김광동 나라정책연구원 원장,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 이대근 성균관대 명예교수, 이인호 명지대 석좌교수, 이주영 건국대 명예교수, 이택휘 한영외고 교장 등이 포함됐다.

류근일 전 조선일보 주필, 류석춘 연세대 교수, 소설가 복거일씨,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 이명희 공주대 교수, 제성호 중앙대 교수 등 지명도 높은 보수인사들도 강단에 서게 됐다."


그리고는

"윤종배 전국역사교사모임 회장은 "정부가 좌편향 이념을 내세워 교과서 검ㆍ인정을 문제 삼더니 이제는 우편향 이념교육을 통해 국가관 확립에 나서 너무 없이가 없다"고 비판했다.

이어 그는 "강사 면면을 보면 누가봐도 정치색 짙은 보수논객들"이라며 "이들을 여과 없이 학교 현장에 투입할 경우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이 완전히 훼손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올해 심상찮게 제기되던 역사교과서 논란이 이렇게 치졸한 형태로 확장되는 것을 보면 대체 이나라 교육을 짊어지고 있는 사람들의 머릿속이 어떨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문제는 좌편향 역사교육도 아니고 우편향 역사교육도 아니다.

언제 대한민국에서 좌편향 역사교육이 이뤄진적이 있으며 그런 교육이 중 고등학생의 역사인식에 대단한 영향을 미친 적이 있었는가?

또 이번 특강 논란의 핵심이 천박한 계몽주의의 연장이자 입시로 얼룩진 교육현실에 대한 철저한 외면이라는 것을 어느 언론도 지적하고 있지 않고 있다.

오로지 좌와 우의 대립구도로 몰고 갈뿐.....

인간이란 존재가, 아니 온갖 정보가 교통되고 있는 지금의 현실속 우리들이, 입시설명회 개최하듯 진행되는 몇번의 특강으로 역사인식이 변한거나 '중립성'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서울시 교육청 이하 이 특강을 준비한 모든 사람들의 '인간'에 대한 인식은 너무나 저급하다.

장담하건데 그 특강을 들으며 '아 내가 왜 이렇게 빨갱이 역사책에 속아나고 있었지' 라고 생각하는 학생은 단 한명도 없을 거다.

그런데 쓸 돈 있으면 공공교육시설을 얼마나  확충할 것인지나 더 고민해라 이 멍충이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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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cebo effect

 

나는 내가 조금 씩 해방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 것은 현실의 고통으로부터가 아닌

 

나의 욕망과 욕구 혹은 다른 이름으로서의 인정이었다.

 

무엇을 하든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한정돼 있고

 

어떤 꿈을 꾸든 그 것은 고요히 맴돌고만 있을 것이다.


 

 

다른 이를 바라보던 내 눈동자의 힘이 약해져 가면서

 

내가 잘 보지 못했던 것들을 느끼게 되었다.

 

실소와 허무함으로 가득 찼던 일상은 더이상 가벼운 깃털처럼 떠다니지 않을 지 모른다.


 

 

그래도 조금씩 해방구로 향하는 나를 바라본다.

 

적어도 나를 바라 볼 수 있게 해준 것에 감사한다.


 

 

무척이나 놀라운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너무나 감동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나는 내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저 바라보고 싶을 뿐이라는 것을

 

그렇게 삶을 받아들여 왔다는 것을

 

이제는 조금씩 알게 되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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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잠이 안오면 어떻게든 잠을 청해야 한다.

 

그래도 잠이 안온다면 책장에 꽂혀 있는 아무 책이나 집어들자.

 

인터넷 '따위'는 건들지 않는 것이 정신 건강에 이롭다.

 

왜냐하면 별 거지 같은 놈을 다 만나 기 때문이다.

 

김동성......

 

내가 정말 미쳐....

 

아.... 좀더 시간이 지났더라면 클릭할 일 없이 지나쳤을텐데

 

정말 포털 사이트 들어가기가 두려워진다.

 

내가 한 때 성동 구민 이었다는게 이토록 치욕스러울수가

 

작년 이맘 때 제주도 독립 운운하던 똘아이보다 더 똘아이가 있을 줄은 몰랐다.

 

 

최근에 '상상력의 부재'란 화두를 집고서 머리를 싸잡아 가며 고민하고 있는데 뭐 이런 '상상력의 부채' 같은 놈이 국회의원을 한답시고 나돌아 다니는 판국이라니.

 

이제 어느만큼 떨어져서 세상을 보고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다고 그래서 나를 돌이켜보는 '마인드'를 겨우 겨우 품기 시작했다고 여기며 열린 마음을 향해 나가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 하고 있건만  

 

다 도로아미타불이다.

 

 

ㅠㅠ 다시 정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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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킴


 모두가 그 자리에 한결같이 앉아 있는데

 왜 하필, 살며시 다가와 말을 건네야 했을까

 여기저기 슬픈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수도없이 눈과 귀에 채이는 '이유'

 툭하고, 내던지지 못하듯

 만취해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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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부르다

 

촬영차 내려온 내 고향 제주도.

 

간만에 고기국수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매번 먹을 때 마다 느끼는 거지만

 

너무 배가 부르다.

 

국수'따위'를 먹고 배가 터질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 민망할 정도다.

 

고기국수 먹어본적 있으삼?

 

안 먹어 봤으면 얘기를 하지 마삼 ㅋㅋ 

 

 

 

고기국수는 제주도에서만 즐길 수 있는 향토 음식이........라는 것을 한반도에 상륙하고 나서 알았다.

 

처음에는 그냥 그러려니 했다. 어딜 가나 그 지방에서 즐길 수 있는 음식이 있는 것처럼

 

하지만 서울에서 흔하게 춘천 닭갈비집을 만날 수 있지 않은가?

 

 

고기국수는 푹 고운 육수에 국수를 삶아 제주도 토종 흙돼지의 오겹살을 '듬성듬성'(딱히 표준어로 대체할 말이 없군) 썰어  그 위에 얹어 먹는 데 기호에 따라 양념장을 풀어 넣기도 한다.

 

매운고추를 같이 곁들어 먹으면 그 맛이 더욱 일품이다.

 

술마시고 다음날 해장할때도 참 좋다.ㅋㅋ

 

 

 

서울에 고기국수집 안생기나....쩝 (있는데 모르는지도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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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way ticket (1)

 

  처음부터 기차를 고집한건 아니었다. 사실 바다를 건너는 가장 빠른 방법은 비행기였고, 그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였기에 5시간이나 걸리는 기차, 그리고 다시 반나절이나 걸리는 여객선을 탈려고 계획한 것은 그저 치기에 불과 했는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 낭만에 젖어들면, 쇠파이프를 손에 쥐듯이 다시한번 기억을 더듬어 가는 공사를 할때 처럼, 그 만큼의 각오가 필요한 법이다.

 

  적어도 그렇게 자위했다.

 

  다시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고를 수 있다면, 아니 도려내어 버릴 수 있다면 신을 조롱하는 마음은 접어두고 조그만 사당을 지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시작된 '삶'이다. 울고 웃을 수 있는 권한 마저 박탈 당하였지만 이 모든게 너무나 자연스럽기에 누구를 탓할 수도 끝나기를 기다릴 수도 없다.

 

  나에게 2008년은 10년 전과 너무나 비슷하리 만큼 몰입하기 좋은 해다. 19살이 되던 그때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세계에 몰두 하고 있었다.

  나도 역시 완전히 한통속이 되어 있었다. 앞으로 당분간 혹은 다시 1세기 동안  기록될  20은 사람들을 매료하기에 충분한 숫자였다.  그렇게  모든 것을 사로잡을 새로운 천년이 오기 바로 한해전  1999년은 종말과 창조의 쇼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고 그 모순된 상황속에 나의 고3 생활은 끼어 있었다.

 

  나는 당시 달콤한 영웅주의로 세기말의 대한민국 서점가를 유린했던 한 작가의 에세이에 취해 있었고 섬마을 컴플렉스에 나의 영혼을 팔아 치울 만큼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다.

 

  노력의 결과는 만족스러운 수준이었다. 나는 진부한 속담의 한 모서리에 안착해 있었고 그 것으로 다 된 줄 알았다.

 

  그리고 거짓말 처럼 10년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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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의 제왕

 

 

 

먼길에서 그러니까 내가 서 있는 곳에서 아주 먼

 

 

가로수가 있어 보도위인 줄 알고

 

깨진 술병이 있어 어제를 기억한다면

 

노래가 멈추고 마지막 흥이 다할 때

 

다시는 걸리적 거리는 노을을 보고

 

소중한 너의 마음을 내비치지 마라

 

 

그 곳에서 보이는 모든 귀퉁이들의 오래된 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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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소리

 

요즘에는 항상 뉴스를 보면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바로

 

나같은건 없어도 되지 않을까?

 

왜 이렇게 고통 받으면서 혼자서 온갖 잡생각들하고 아웅다웅 하고 있을까?

 

그러면 무진장 허무해지곤 하는데

 

딱히 해답이 있어서 기분이 나아지지는 않는다.

 

그런데 음악을 들으면 꽤나 나아지는데, 아직까지 왜 음악을 들으면 나아지는지(정확히 뭐가 나아지는지도 모르겠다. 기분인지 뭔지...)

알지 못하고 있다.

 

다만 그저 그냥 음악은 삶을 풍요롭게 하고 있다는 말만 되뇌일뿐 풋...

 

바보같다는 생각은 무진장 하고 다닌다. 그러면서 남들도 다 바보같다는 생각 역시 하고 다닌다.

 

너도 역시 별 수 없는 바보야! 이 멍청이

 

뻥쟁이...ㅋㅋㅋㅋ

 

그러면 역시 열라 허무해진다.

 

대체 무엇이 사람들을 저렇게 살게 끔 하는 것일까?

 

헤겔 아저씨는 인정의 욕구라고 했다는데(맞는지 틀린지 모르겠다)

 

고작 그거란 말인가?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뭘위해서 대체 뭘 위해서 인정을 받아야한단 말인가?

 

그러면 항상 불가의 한 전래동화가 떠오른다.

 

부처(현재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석가모니)의 전생과 관련한 설화

이름하야


<설산(雪山)동자>

 

옛날 어느 마을에 어떤 동자가 살았는데 동네 사람들은 그 동자의 현명함과 도량에 존경과 경의를 표해 마지 않았다.

 
그는 설산동자라 불리었는데 세속의 모든 부귀영화를 뒤로 하고 오로지 해탈의 길에 이르기 위해 하루도 수행을 게을리 한적이 없었다.

 

그래서 하늘의 제석천(불가의 신중 하나)이 이 청년의 이런 의지가 진심인지 시험하고픈 생각이 들었다.
 

그날도 참선에 여념이 없는 설산동자 앞에 제석천이 흉칙한 괴물(식인 나찰)의 모습을 하고서는 나타났다.

 
그리고는 뜬금없이

제행무상(諸行無常)하니 시생멸법(是生滅法)이라."는 *게문(偈文)의 반을 읊었다.

 

* 부처의 공덕이나 가르침을 찬탄하는 노래인 가타(伽陀)의 글귀. 네 구(句)를 한 게(偈)로, 다섯 자나   일곱 자를 한 구로 하여 한시(漢詩)처럼 짓는다.

 

풀이하자면

                                           "이세상의 모든 존재는 항상함이 없이 변화하는 것으로
                                                  이 것이 바로 생하고 멸하는 우주의 법칙이다."


갑자기 들려온 게문을 듣고 설산은 무한히 밀려오는 기쁨에 반색을 하며 주위를 둘러 보았다. 하지만 흉칙한 나찰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설산: 진정 이세상의 모든 만물은 생하고 멸하지 않는 것이 없다. 이 것이야 말로 내가 그토록 구하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나찰이여 어디서 이토록 귀중한 게문을 알게 되셨습니까?

 

제: 너는 나를 보고도 무섭지 않느냐

 

설산:......

 

제: 나는 지금 몹시 배가 고플뿐이다. 미치도록 허기가 져서 헛소리가 나온 것일뿐 그딴 게문은 나의 배고픔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

 

설산:..... 아닙니다. 이 게문의 의미는 삼세에 걸쳐 부처가 한결같이 가르친 바른길입니다.  

 

제: 지랄!  난 지금 당장 먹을 것이 필요하다.

 

설산: 나찰이여 저에게 나머지 게문도 읊어 주실 수 있습니까?

 

제: 너무 배가 고파 나머지를 읊을 기력도 없다.

 

설산: 제가 가진거라곤 제 몸뚱어리 밖에 없습니다.

 

제: 호 그래 그 거 잘됐네 난 인간의 피와 살을 아주 좋아하지

 

설산: 그렇다면 나머지 게문을 들려 주신다면 기꺼이 저를 먹으십시요. 

 

제: (허 이놈 봐라.이놈이 나를 농락하려 하는 구나 어디 내 입속으로 들어가는 순간에도 그런 헛소리    를 할 수 있나 보자)
   
    그으래? 좋아 그럼 읊어 주지


                       생멸멸이(生滅滅已)이면 적멸위락(寂滅爲樂)이니라

                          그러므로 생하고 멸하는 것 마저 멸한다면
                          고요하고 진정한 열반의 락을 얻게 되리라

   

    자 이제 식사 시간인가...크크크

 


게송의 반을 듣고난 설산동자는 한없이 기뻐하며 나무 가지 위로 올라가 괴물로 변한 제석천의 떡 벌어진 입을 바라 보았다. 그러더니 바로 입속을 뛰어드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설산동자가 도착한 곳은 괴물의 입속이 아닌 제석천의 팔위였다.
본모습으로 돌아온 제석천이 사뿐히 그를 안아 조용히 땅위에 내려 놓았다.

그리고 다른 모든 천신들과 함께 그 앞에 머리를 조아려 예배를 드렸다. 

 

훗날 그 청년은 '석가여래'가 되었다.

 

여기까지 대략적인 내용이다. 워낙 어릴때 읽었던 거라 잘 기억이 나지 않아. 여기 저기 내용을 찾아 짜집기를 했다.

뭐 어쨌든 이런 이야기다.

 

욕망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에서조차도 벗어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어릴때 부터 이 '헛소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럼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인데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본능과 이성에서 벗어나는 것은 오로지 죽음뿐이 아닌가?

 

죽으라는 얘긴지 원....

 

 

그래서 이렇게 고통받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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