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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9/02/19
    여성(주의)적 글쓰기..(6)
    은수
  2. 2009/02/17
    왜 글을 쓰는지..(18)
    은수
  3. 2009/02/14
    워낭소리_한줄로요약안됨(3)
    은수
  4. 2009/02/07
    성폭력과 도덕성(3)
    은수

여성(주의)적 글쓰기..

내 글쓰기 방식에 대해 생각하고..

댓글들을 보면서 생각하고..

여성(주의)적 글쓰기가 무엇일까 생각하고..

해답과 결론을 찾을 수는 없겠지만

무언가 상당히 다른 인식들이 혼재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여성적인 글쓰기를 누군가는 '여성스러운'  글쓰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혹은 여성적인 글쓰기가 '인품이 훌륭한' 글쓰기라고 인식되는 경향도 있는 듯..

 

 

그냥 내 경험에서 말하자면

내가 여성적인 글쓰기를 잘 못하는 것 같다고 했을 때의 의미는..

교육받아 오면서, 또 대학 이후에 운동을 하면서 만들어진 내 글쓰기 방식이..

한마디로 대자보, 성명서, 기사용 같다는 거였다..

어떤 팩트에 대해 의견을 내는거..(자체가 나쁜 건 아니지만)

논리, 이성, 합리적임을 추구하고, 결론과 대안을 제시해야만 인정받는 글쓰기..

감정이라고는 유일하게 공적인 감정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공분' 만이 용납되었고

연민, 안타까움, 슬픔, 기쁨, 외로움 같은 감정들은 

냉철한 판단에 걸림돌이 되는, 가지쳐야 되는, 것들로 생각했던 글쓰기 말이다..

그러다..언젠가..

버지니아 울프의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받았던 충격은..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비슷하게도 다시 학교에 들어와서 다른 백그라운드를 가진 친구들의 글을 보았을때,

블로그에서 다른 이들의 글을 보았을 때..받은 느낌도 유사했다.

그에 비하면 내 글은 차갑고 무미건조한 느낌이었달까..그런거..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글쓰기가 단순히 개개인의 인품의 문제가 아니라..

'남성적'인 언어체계, 문화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시작했다.

여성적인 글쓰기..여성주의적인 글쓰기..라는게 단일하고도 합의된 개념인 것은 아니지만..

페미니스트들이 '남근 로고스 중심주의'라고 하는 비판으로부터

나온다는 거..어렴풋이 경험적으로 알 것 같았다.

보편적임, 시민됨, 인간이라는 범주에 들지 못했던 여자들이 쓰는 글쓰기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주체로 간주되지 못했던 여자들의 글쓰기란..

남성 중심적인 상징질서와 언어체계에 익숙하지 못했던 여자들의 글쓰기란..

이 사회에서 봤을 때는 (치유하는 글쓰기, 라는 책에서 보았던) '미친년 글쓰기'에 가까운 것이다.

중얼거림, 알 수 없음, 논리적이지도 않고, 어쩌면  쏟아버리는 광기어린, 분노, 감정들이 뒤섞인

머리보다는 몸적인 언어들, '두 입술'로 말하는, 그 자체로 단일하지 않고 복수적인 글쓰기인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이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나쁜 여자'가 될 수밖에 없듯이

미친년 글쓰기가 용납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 이유일 것이다..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왜 자꾸 말이 바뀌냐, 앞뒤가 맞지 않다, '사실'이 무엇이냐고

따져묻는 것과 같은 것이겠지..하지만 그것이 폭력이라고 해도 그에 대한 기억, 사실, 감정은 바뀌는 건데..

어찌 되었든..그에 비하면 아직도 내 글쓰기는...'남성적/공적인 글쓰기'에서 아직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그렇다고 꽤나 논리적으로 쓰지도 못하지만 말이다.

늘 글을 쓰고도 개운하지 못한 이유...

진정으로 내 자신을 위한 것인지, 글을 위한 글을 쓰는 것인지 헷갈리는 이유는..

아마도 거기에 있는 것 같다.

익숙하지 못해서인지..이미 습이 생겨버려서인지..

아니면 쏟아놓을 감정들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가끔은..

글을 보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보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 친절함을 요구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물론 글쓴이의 목적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 감정을 이해하고 그 사람의 맥락 속으로 들어가보기를 노력조차 하지 않으면서..

단지 거칠다고..정제되지 않은 말들이라고 비난하는건...지나치게 가혹한 것 같다..

마초적인 공격성 댓글이 달리면, 여성적인 글쓰기로 확인된다는

어느 블로거의 말은 씁쓸하지만...가장 현실을 보여주는 단면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점에서 나도 예외는 아니고...내 글이 공격적이라는 건...비난이나 분노가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가슴보다 머리로 이해하는 건 아닌지, 무작정 비판의 날을 들이대려 한건 아니었나..생각이 들어서..

 

글쓰기는 늘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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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글을 쓰는지..

가끔은 왜 글을 쓰는지

정말 모르겠다.

 

예전에 언젠가 블로거들이

나는 왜 블로그를 하는가, 하는 걸로 한참 얘기한적도 있었고

글쓰기 부담감에 대해 또 한참 얘기한적도 있었다.

 

그런데 늘 원점인 걸 보면..

나만 그런가?

 

 

배려하는 글쓰기(http://blog.jinbo.net/kommunistka/?cid=1&pid=142)가 싫어서

한동안 블로그를 방치해두었다가

다른 블로그로 옮길까 또 생각도 해보았다가

그래도 그냥 두는 걸 보면

뭔가 미련(?)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워낭소리를 써놓고도 그랬다.

오프-온라인 모두에서 나를 아는 이에게 물어봤다.

-내 글이 너무 딱딱하니? 인정사정 없이 공격하는 것 같니?

 

솔직히 여성주의를 공부하지만

내 글이 소위 말하는 '여성적 글쓰기'에 전혀 가깝지 않다는 건

내 자신도 잘 알고 있다.

감정은 되도록 배제하려고 하고, 충분히 공격적이고 등등.

글쓰기도 일련의 '습'인데 나한텐 그런 습이 만들어졌나보다.

 

아무튼 여전히 내키지 않는것도 사실이다.
어느 한군데는 검열없이 쓰고 싶기도 하고

오빠는 필요없다, 에 나왔던 '설득노동'을 블로그에까지 가져오고 싶지 않으니까.

또 한동안 블로그를 방치할지도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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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낭소리_한줄로요약안됨

영화보고 다이어리에 끄적끄적..옮김.

 

 

누가 그랬다.

울고 나왔는데 묘하게 껄끄러운 감정이 든다고.

나 역시, 딱 그런 기분이다.

한줄평을 적으라는데 도저히 한줄로는 정리가 안된다.

보는 사람에 따라 완전히 다른 평이 나올 수 있을 듯하여.

 

모든 껄끄러운 감정들이 논란이 될 수 있을테인데

우리가 무언가를 생각할 때 깔린 전제-일종의 당연함이

무엇인가 질문하게 하게된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라면은

괜찮은 영화였던 것 같다.

 

난 영화를 잘 모르지만

이 영화는 철저한 극영화이다.

(물론 이 영화가 다큐냐 아니냐 하는 논란 뒤에는

연출과 개입없는 '사실만을' 보여주는 다큐가 있을거라는 믿음이 있을테다.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전달되는 그 순간, 촬영되는 그 순간 이미 사실,이 아닌데 말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별로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바로 그 점이다.

다큐와 사실이라는 관객의 기대를 철저하게 활용하면서

다른 것들을 보이지않게 만들면서도 의식하지 못하게 하는 함정.

 

오로지 소를 중심으로 한 얘기들을 부각시키기 위해

다른 일상과 관계들-특히 할머니와의 관계들은  지나치게 삭제되거나 조절된다.

할아버지의 삶에는 99.9% 소만 들어차있는 것 같이 보이고

할아버지는 반려동물로 소를 대접하는 사람처럼 보여진다.

할아버지가 소를 아끼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싶은 건 아니다.

하지만 오로지 소에 의한 소를 위한 사람처럼 보여질때

'농촌'이란 현실적인 공간은, 과도하게 낭만적으로  그려진다.

농촌에 조금이라도 살아본 사람이라면

이것이 철저한 낭만화라는 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군데군데 의도삽입된 '자연'의 모습과 소리는

더욱 관객들에게 자연이란 이런 것이다, 라고 말그대로 '자연화'시킨다.

 

IMF시절 무너지는 아버지의 어깨를 보면서 이 영화를 구상했다는 감독의 의도는

사실상 이 영화가 소에 대한 영화라기보다는 '아버지'에 대한 영화라는 점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듯하다.

근대화과정에서 이촌향도했던 사람들에게 농촌에 대한 원시적인 묘사와 고향 이야기를 통해

결국은 소로 동일시되는 아버지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데

이 영화는 생각 이상으로 성공한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시공간적인 차이는 있으되, IMF시절 유행했던 소설 아버지 류와 동일한 맥락에 있다고 본다.

소와 할아버지 뒷바라지 하시느라 고생하시고

영화 내내 스토리텔러 역할을 훌륭하게 해주신 할머니가 부차화될 수밖에 없는 것은

결국 이 영화의 의도에서는 당연한 것이다.

보통 성공한 '아들들'의 스토리 뒤에는 어머니의 희생이 부각되는데

요즘은 경제위기가 심각하다보니 오즈인가 모 대리운전 CF처럼 

'가장들'의 이야기가 나오고 또 그것이 공감을 사는게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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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과 도덕성

 

 

혹자는 이번 사태를 두고

민주노총이 갈데까지 갔다, 쪽팔린다고 얘기한다.

좀 더 고상하게 얘기하면 민주노조운동의 도덕성이 땅에 떨어졌다, 도덕적 해이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그런데 성폭력 사건을 접하는 이런 식의 도덕성 담론에

나는 사실 불편함을 느낀다.

 

조직의 도덕적인 기강이 무너지고 있다는

대표적인 예시로 '돈문제와 여자문제'를 함께 얘기하는 류의 인간들.

성폭력을 여자문제로 치환하는 작자들에 대한 분노는 치우고서라도

강승규와 김상완 사건을 모두 '도덕성' 문제로 생각한다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결과적으로 총연맹은 지도부 총사퇴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는 듯하다.

물론 사건을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하고 그를 도려내는 것보다는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직의 책임을 진다는 것은 무슨 목적으로, 무슨 내용 하에 이루어지느냐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 

혹자가 말하듯 이 사건은 어디까지 '부도덕한 개인'의 문제인데

왜 지도부 전체가 책임을 져야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이 사건이 진정으로 '조직적인' 문제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그들의 언어를 빌리자면 민주노총이 정말 '창피해야' 될 것은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총사퇴는 해당 사건을 시급히 마무리하려는 면피용이 될 수도 있다.

왜 사퇴하는가?

어느 부도덕한 인간이 간부였기 때문에 아랫사람의 과오에 조직의 대표자가

사퇴하는 것이라면 사퇴는 책임이란

우리 애 잘못은 애비인 내가 책임지겠소, 하는 또다른 가부장적 형태에 불과하다.

그러나 성명서에 나온 이번 사건의 전말은 처음부터 조직적인 문제였다.

남성 위원장을 여성 조합원의 집에 은닉했다는 그 사실 자체부터

피해자에게 은닉죄를 모두 전가하려고 했고,

성폭력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일단 무마해보고자 상부에 보고조차 않고 있었고,

결과적으로 피해자가 조직 외부의 지인에게 도움을 청할수밖에 없었다는

이 사건의 전말 자체가 모두 엄청나게 조직적인 문제이다.

80만 조합원이 있다고 하는 민주노총이라는 조직이

성폭력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고,

(여전히 피해자의 인권보다는 자본과 보수언론에 역공을 당할 '빌미'로 생각한다)

성폭력 사건의 해결을 위한 어떤 제도적인 장치를 갖추고 있었는가,

(그랬다면 사무총장이 개인적으로 피해자를 만났을 일은 애초에 없었을 것이다)

더 근본적으로 민주노총의 조직문화가 얼마나 남성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이었던가

이 모든 것이 한꺼번에 드러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왜 이 사건이 민주노조운동의 도덕성, 진보운동의 도덕성 문제가 되는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다.

김상완 같은 작자가 민주노조 운동의 도덕성을 갑자기 땅에 떨어지게 했다거나,

요즘 활동가들의 도덕적인 기강이 해이해져서 성폭력 사건이 발생한 것이라는 식의 얘기들.

솔직히 말해서 현장에서 술먹고 단란주점 가고, "여자끼고 노는 건" 문제 삼지 않으면서

이런 사건이 발발했을 때만 운운하는 도덕성은 위선에 불과하다.

그리고 '운동의 도덕적인 기강'과 '활동가의 도덕성'을 얘기하는 사람들은

일견 나아보이지만, 사실은 마찬가지로 위험한 사고방식일 수 있다. 

도덕성이라는 건 한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합의된 일련의 윤리적 가치를 말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도덕성이라는 건 기존의 것, 매우 보수적인 선/악 가치판단에 가깝다.

보수적인 기독교와 레닌같은 (금욕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이 교묘하게 만나는 지점이

바로 이 '도덕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상적으로 양극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이 

여성주의를 보수적이며 남성중심적인 도덕적 가치에서 성적 급진주의라고 비난하고,

성과 관련된 일련의 사안들에서 공통적으로 도덕적인 금지주의 입장을 가진다.)

 

도덕성은 지켜져야할 가치가 아니라, 논쟁되고 논쟁되어져야 하는 가치여야한다.

그리고 성폭력은 도덕성이 아닌 피해자의 인권과 권력관계, 

남성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노동운동과 조직문화의 문제에 대한 성찰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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