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들어가며
미국 노동통계사무국의 자료에 따르면 2001년 전체 제조업에서 보고된 손상과 질병 가운데 노동손실을 초래한 질병의 비율은 6.3%였다. 전자 산업에서는 이 비율이 9.5%에 이르고, 특히 반도체 산업에서는 15.4%로 한층 높았다. 반도체 산업이 태동한 실리콘 밸리가 있는 미국 캘리포니아 직업병 보고 현황 연구에 따르면 반도체 회사들의 업무상 질환 보고율은 50%에도 미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반도체 산업에서 유해화학물질과 관련된 건강 문제의 중요성은 위 통계 이상으로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정작 반도체 제조 현장에서 발생한 질환은 물론 사용되는 화학물질이나 노출 양상에 대한 지식과 정보는 오랫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기업들이 정보를 공개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실리콘 밸리 뿐 아니라 유럽과 아시아 등 반도체 산업의 주요 제조시설들이 거쳐간 세계 모든 지역에서 공통된 것이었다.
이들 지역에서 반도체 산업과 관련된 노동보건, 환경보건 문제를 세상에 알리기 시작한 것은 거의 언제나 피해자들과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지역사회의 노동, 보건, 환경 운동가들이었다. 1980년 실리콘 밸리의 전자 제조업 최초로 이루어졌던 시그네틱스 공장의 건강유해성 평가는 지역사회의 노동보건운동 소그룹 ‘전자산업 안전보건위원회(ECOSH)’가 1970년대부터 화학물질 노출에 의한 건강 문제를 제기해왔기 때문에 시작된 것이었다. 이 지역의 지하수가 트리클로로에틸렌 등의 유해화학물질에 심각하게 오염되었고 오염 당시 인근 지역 주민들의 유산과 자녀의 선천성 질환 발생률이 다른 지역 주민들보다 높다는 사실을 확인한 캘리포니아 주 정부의 조사도, 선천성 질환을 지닌 딸을 출산한 여성 로렌 로스와 그녀를 도운 지역사회 언론 및 노동환경운동가들의 노력에 기인한 것이었다. 2001년과 그 이후 10년에 걸쳐 영국 안전보건청에서 스코틀랜드 그리녹에 있는 내셔널 반도체 공장 노동자들의 암 위험에 대한 역학연구를 시작한 계기도 그리녹 시에서 노동상담소를 운영하면서 암 피해자들의 모임을 꾸리고 지원한 스코틀랜드 노총과 피해 당사자들의 요구와 투쟁 때문이었다. 타이완 신주과학산업단지의 공장들이 ‘합법적으로’ 환경을 오염시키도록 허용해주었던 법 제도와 환경영향평가의 한계를 뛰어넘어 실제적 폐수처리 방식의 개선을 가져온 것도 지역 주민들과 환경운동가, 학자들이 합심하여 일상적인 ‘냄새’와 관련 정보를 체계적으로 조사, 기록하여 세상에 알렸기 때문이었다.
2007년 11월, 삼성반도체 백혈병 피해 노동자 가족과 20여 개의 노동사회운동단체들이 모여서 시작된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이하 반올림)’도 한국 최초로 반도체 공장의 ‘청정 이미지’에 의문을 제기하고 실제 노동현장의 문제점들을 세상에 알리는 역할을 해왔다. 이를 계기로 노동부는 2008년도에 반도체 가공공정이 있는 6개 업체의 9개 공장을 대상으로 ‘반도체 제조공정근로자 건강실태 역학조사’를 통해 림프조혈기계암 사망 및 발생 위험율을 평가하였고, 이를 통해 구축된 코호트를 추적하는 10년간의 연구 계획을 발표하여 진행 중이며, 2009년부터는 ‘반도체 제조 사업장에 종사하는 근로자의 작업환경 및 유해요인 노출특성 연구’를 3개 년도에 걸쳐서 진행했다. 삼성과 하이닉스, 앰코테크놀로지 등 세 개 반도체 제조업체들이 2009년 서울대학교 산학협력단에 의뢰하여 사업장 위험성 평가 자문 연구를 실시하기도 했다. 삼성전자의 경우 2010년에 인바이런이라는 컨설팅사를 고용하여 1년간 반도체 작업환경에 대해 재조사를 시행하기도 했다. 피해자들의 노력에 의해 이삼십년 동안 아무런 조사도 조치도 없이 가동되어 온 반도체 공장에 대해 돌아보기 시작한 것이다.
다만 최근 몇 년간 한국에서 이루어진 조사와 연구는 그 과정과 결과 및 이와 관련한 의사결정의 과정이 사회구성원들에게 투명하게 공개되지 못하였고, 그러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이해당사자 및 독립적인 제3자에 의해 검증되고 확인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기업과 정부가 이러한 '소통'을 거부한 이유는 주로 근로자 개인정보 보호, 기업의 영업비밀, 그리고 의사결정에 참여한 전문가들의 프라이버시 보호 등이었다. 앞으로 이런 장애물들을 어떻게 해결해가느냐는 사회 각 주체들의 큰 숙제가 아닐 수 없다.
반올림이 피해 당사자들이나 가족, 지인들의 제보를 통해 수집한 반도체 전자 산업 노동자들의 질병 피해 사례들은 2012년 2월 현재 155여 명, 사망 사례는 이 가운데 61명에 달한다.
이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업장은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이며, 질환 중에서는 백혈병과 림프종 등을 포함하는 림프조혈기계 암이다. 다음 표에서 볼 수 있듯이 1998년에서 2006년 사이 삼성반도체 기흥공장 림프조혈기계 암 발병 제보자들의 경우, 발병 연령이 매우 낮고, 오래된 수동 가공라인에서 근무했거나 라인 가동 초기의 불안정한 환경에서 근무한 이력들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황유미(1985~2007) 2003~2005 3라인 확산/식각공정, 2005 급성백혈병
이숙영(1976~2006) 1995~2006 3라인 확산/식각 공정, 2006 급성백혈병
황민웅(1974~2005) 1997~2004 1라인 백랩, 5라인 CMP, 2004 급성백혈병
김경미(1980~2009) 1999~2003 2라인 식각 공정, 2008 급성백혈병
주교철(1960~2010) 1983~2006 1~7라인 확산 공정, 2006 급성백혈병
윤◯진(1980~2003) 2000~2001 10라인 초기 식각 공정, 2003 급성백혈병
나◯순(1977~) 1993~1998 1라인 식각 공정, 1998 악성림프종
김◯경(1975~) 1993~2004 1라인 확산 공정, 2004 악성림프종
물론 제보하지 않은 피해자들의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조차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이 자료만으로는 정확한 실태를 추정하기란 매우 어렵다. 이들의 작업환경에 존재하는 잠재적 유해요인을 파악하는 일은 더욱 어렵다. 왜냐하면 질병에 걸린 노동자들 상당수는 이미 사망한 상태이며, 다른 사업장들과 달리 근무 당시 함께 일한 동료들의 진술을 확보하는 것조차 거의 불가능한 조건이고, 생존한 피해자들 대다수는 근무 당시 작업장 안전보건에 대한 교육을 받은 적이 없고 취급 화학물질의 이름을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글은 삼성을 비롯하여 반도체 산업 노동자들의 정확한 질병 실태와 작업환경에 대한 정보가 아직 완전하게 소통되지 않고 있는 지금,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반도체 직업병 문제에 대해 조금이라도 구체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개별 노동자들의 기억과 경험, 그리고 지금까지 알려진 정보들을 종합하여 개괄한 것이다. 개인의 기억과 경험에만 의존하는 것은 매우 한계가 명확하지만, 서로 다른 시점에서 다른 공정에 종사하였던 독립적인 개별 노동자 수십 명의 경험에서 어떤 동일성을 추출해낼 수 있다면, 이것 또한 중요한 자료임에는 틀림없다. 특히 반도체 생산 기술이 다른 어떤 산업 기술보다 고속으로 변화해왔기 때문에 현재 시점에서 과거의 작업환경을 정량적 기법으로 평가하기 대단히 어렵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오히려 실제 작업환경을 경험한 이들의 기억을 종합한 질적 연구가 과거 노출 추정에 좀더 믿을만한 자료를 제공할 수도 있다.
1. 직업병 피해자들의 증언 - 반도체 가공공장을 중심으로
1) 누출사고에 대한 증언
삼성 반도체 노동자들의 암이 직업병인가를 다투는 과정에서 언론이나 법정 진술을 통해 사측이 일관되게 주장해 온 것은 화학물질 관리가 완벽하기 때문에 누출사고는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반도체 가공공장 오퍼레이터로 일했던 노동자들 대다수는 근무 중에 종종 화학물질 냄새를 맡았으며, 누출사고가 일어나 긴급히 대피하는 일도 있었다고 진술했다. 다만 누출사고가 일어나도 어디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려주지 않아 오퍼레이터들은 화학물질 누출 사고에 대해 구체적인 정보를 갖기 어려웠다. 공급 라인이나 생산설비에서 화학물질이 누출되는 사고가 일어나면 유지보수를 담당하는 엔지니어들이 누출 지점을 확인하고 처리하게 된다. 따라서 이들은 오퍼레이터에 비하여 좀더 구체적인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서로 다른 시기에 삼성 반도체 가공공장에서 근무했던 여러 엔지니어들로부터 그들이 수행한 업무 내용을 각각 청취하였는데, 나중에 이들의 진술을 비교한 결과 각각 독립적으로 인터뷰하였음에도 상당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들의 진술에 따르면 화학물질 누출 사고는 어떻게 그 발생 빈도를 줄이고 피해를 최소화하느냐의 문제일 뿐, 근본적으로 불가피한 것이다. 산(acid) 류를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배관의 부식을 피할 수 없으며, 화학물질을 소분하거나 생산설비에 투입하는 과정에서 유출되는 인적 에러를 완전히 제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화학물질이 누출되면 경보음이 울리기도 하지만, 그 전에 작업자가 냄새를 감지하여 발견하는 일도 있었으며, 일단 화학물질이 설비 외부로 누출되면 순식간에 작업장 전체로 확산된다는 점도 여러 엔지니어들이 동일하게 진술하였다. 누출사고의 빈도나 처리 과정에 대해서는 근무 공정에 따라 조금씩 다른 경험을 가지고 있으나, 일반적으로 화학물질 누출 사고의 경험, 경보 시스템의 한계, 전 공정 내로의 확산이라는 점은 공통된 경험으로 보인다.
2) 식각/세정공정의 경우
식각과 세정 공정은 반도체 가공 과정에서 계속 반복되는 작업이며, 웨이퍼에 묻은 화학물질을 다른 화학물질로 씻어내는 공정의 특성상 여러 종류의 화학물질들이 복합적으로 사용된다. 암 피해제보가 밀집되어 있는 공정이기도 하다. 삼성 반도체의 경우 현재 이 공정은 거의 밀폐된 자동화 설비로 교체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를 바탕으로 수년 전 개방된 수동형 설비를 취급하던 암 피해자들의 과거 노출을 추정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는 문제제기가 지속되어왔다. 이에 대하여 사측은 개방형 수동형 설비라 하더라도 국소 배기 장치가 완벽하게 가동되었고, 클린룸 내의 공기가 탑-다운 방식으로 흐르기 때문에, 호흡 위치보다 낮은 작업대에서 화학물질이 이를 거슬러 올라가는 노출은 불가능하며, 또한 완벽한 개인 보호구를 착용하고 있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식각, 세정 공정에서 실제로 근무했던 오퍼레이터들의 진술은 이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설비에) 보호 커버가 없어서 냄새가 심했다. 비릿한 황산 냄새, 찌린 암모니아 냄새, 아세톤 같은 휘발성 냄새 등 온갖 냄새가 짬뽕되어 진동했다’는 식으로 냄새에 대한 경험은 매우 구체적이었고, ‘기계 챔버를 열고 뭔지 모르지만 휘발성 화학물질을 뱅커트(먼지가 나오지 않는 종이 휴지)에 묻혀서 손으로 클리닝했다’는 등 생산설비를 직접 닦는 과정에서의 간헐적 노출을 시사하는 진술들도 여러 오퍼레이터들에게 공통된 것이었다. 개인 보호구의 경우 인체의 이물질로 인한 클린룸의 오염을 막기 위한 방진복과 일회용 종이마스크, 그리고 비닐장갑 정도가 전부였으며, 호흡기 보호구를 착용했던 경험은 단 한 사례도 없었다.
3) 포토공정의 경우
포토공정은 전통적으로 고위험 작업으로 인식되어 있다. 이 공정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감광제는 기본적으로 벤젠 고리를 함유하고 있는 폴리머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강력한 자외선 조사를 통한 감광제의 화학적 변성을 통해 공정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특히 생식독성의 경우 다른 공정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들에 비해 포토공정 노동자들에서 자연유산율이 높다는 사실이 미국 반도체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를 통해 밝혀진 바 있다.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는 포토공정 근무자들도 ‘남자 선배들이 이것(감광제) 때문에 ‘아이 못 낳는다’는 농담을 했다’, ‘생리불순이나 유산은 워낙 흔해서 특별히 입밖에 내어 얘기할 만한 일도 아니었다’는 식으로 경험적으로 생식독성에 대한 위험을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는 감광제가 완벽히 밀폐되어 사용되고, 발암성분은 없으며, 자동 공급장치를 통해 생산 설비에 공급되므로 작업자가 노출될 수 없으며, 노출되더라도 그 수준이 지극히 미미하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서울대 산학협력단에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삼성 반도체의 일부 라인에서는 감광공정에서 유기용제를 포함한 28종의 화학물질이 사용되고 있었으며, 감광제 중 6개를 임의 선정한 결과 벤젠과 2-메톡시에탄올 등이 검출된 바 있고, 작업자들은 ‘PR에서는 톡 쏘는 듯한 독특한 냄새가 났다’, ‘흑갈색 유리병에 담겨 있었고 손잡이가 있는 병에 'photoresist'라는 라벨이 붙어있었다. 감광제는 매일 교체하여야했고, 한 번에 2병씩 부어야 하였으며, 원래 남성 엔지니어들이 교체해야 하지만 주 2~3회 정도는 여사원이 직접 교체했다’, ‘PR용액을 도포하는 설비가 밀폐되어 있지 않아 고개를 숙여서 기계 안을 들여다보면 육안으로 PR용액이 도포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배기 장치는 보지 못했다’라고 진술하고 있다. 노출을 시사하는 구체적인 경험 묘사가 아닐 수 없다.
4) 이온주입공정의 경우
이온주입공정에서는 실리콘 웨이퍼에 불순물을 넣어주기 위하여 그 재료가 되는 물질을 고 에너지의 이온 플라즈마 상태로 만들어준다. 재료로 사용되는 아르신이나 포스핀 등 고독성의 가스상 물질, 이온을 형성 주입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X선, 그리고 부산물의 생성되는 비소 등의 유해물질 등이 일반적인 유해요인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은 부산물들이 이온주입설비 내에 잔류할 경우 제품의 품질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유지 보수를 맡는 엔지니어들은 직접 대형 설비 안으로 들어가서 부품을 해체하여 각 부품에 묻어있는 물질들을 물리적, 화학적 방법으로 제거해야 한다.
여러 제보자들 가운데 매그나칩 반도체에서 십년 이상 이 업무를 해왔던 엔지니어의 진술을 통해 상당히 상세한 작업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그에 따르면 '방 크기 만한 장비의 도어를 열고 들어가서 부품을 떼어낸다. 부품 표면에 가루 형태 혹은 표면에 뭔가 코팅된 것처럼 묻어있고 역겨운 냄새가 난다'고 하며, '긴급 상황 등 비정기적인 유지보수 업무를 할 때는 설비 안(에 남아있는 잔류 화학물질)을 클리닝하지 못한 채 오픈'해야 한다. 그리고 '챔버를 열고 머리를 집어넣은 채 부품을 뜯는데, 약 2008년 이후에야 방독면이 지급되었'으며, '떼어낸 장비는 초록색 수세미로 박박 문지르고, 헝겊으로 닦고, 에어를 불어서 먼지를 날려버린 뒤 과산화수소나 IPA로 클리닝하는데, 보호구나 환기시설은 전혀 없다'.
또한 '가스누출 경보기가 있지만 고장이 나 있는 걸 엔지니어들이 찾아내곤 했다'는 진술이나, 'X선 누출을 막기 위한 인터락 장치가 있지만 간단한 소규모 정비를 편하게 하기 위해 엔드 스테이션(오퍼레이터가 작업하는 곳) 쪽 인터락은 늘 해제해두고 일한다. 웨이퍼를 로봇이 나르다가 에러가 나면 글래스(설비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문)로 들여다보기 때문에 X선 차단이 안된다'는 진술 등을 통해 이온주입공정의 오퍼레이터들도 유해화학물질이나 X선 노출의 위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2. 노출 예방관리에서 고려할 지점들
일반적으로 작업장에서 화학물질이나 유해요인 노출을 관리하기 위해 고려해야 할 몇 가지 점들이 있다. 크게 요약하면 노출이 일어날 수 있는 공간의 특성, 노출될 수 있는 사람들의 특성, 노출될 수 있는 유해인자의 종류, 그리고 실제 작업 현장에서 이런 것들이 종합적으로 어떻게 관리되고 있는지 등이다. 화학물질 고유의 유해성(hazard)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이러한 노출 여건과 특성이다. 이에 따라 유해성이 낮은 물질이라도 노출 관리의 허점으로 인하여 위험도(risk)가 커질 수 있고, 상대적으로 독성이 큰 물질이라도 철저한 관리를 통해 위험도는 작게 유지할 수 있다. 기존에 알려져 있는 전자산업의 특성들과 앞에서 소개한 반도체 공장 노동자들의 진술과 경험들을 바탕으로 이런 고려 지점들을 검토해보았다.
1) 노출이 일어날 수 있는 공간의 특성
소위 전자제품이라고 하는 건 매우 다양한 생산물을 뜻하며, 따라서 제조 시설들 또한 다양하다. 전자산업에 대해 얘기하면 사람들은 몇몇 유명한 대형 브랜드 회사들을 떠올리곤 하지만, 전체 생산망 속에는 훨씬 더 많은 업체들이 존재한다. 가령 영국의 전자산업은 80~90%가 10인 미만의 영세 업체들로 이루어져있다.
이런 영세, 소형, 중형 회사들은 보통 안전보건 문제를 다룰 만한 충분한 역량이 부족하다. 각 분류의 기준이나 정확한 분율은 나라들마다 다르겠지만, 소규모 사업장에서 위험 관리에 한계가 있다는 점은 공통된 사안이다. 전자제품 생산의 또다른 중요한 특징은 복잡한 하청 사슬에 기반해 있다는 점이며, 또한 세계적인 네트워크에 기반을 두고, 개발도상국이나 경제변환국에서의 대량생산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을 비롯하여 이런 국가들은 화학물질 관리에 대한 법이 상대적으로 약하고 역량도 취약하다. 최근 중국에 있는 애플 하청업체 폭스콘이나 윈텍 등에서 화학물질 누출사고와 폭발사고가 문제되고 있는데, 수천에서 수십만 명을 고용하고 있는 이들 대기업들에서 기본적인 안전 관리가 되지 않았던 까닭은 국가 차원에서 사업주의 안전보건조치에 대한 법적 규제나 관리 감독이 느슨하거나 불충분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한국의 경우도 이런 크게 자유롭지는 못하다.
한 예로 2011년 8월 고용노동부에서는 지난 7월 14일 삼성반도체가 자체적으로 마련하여 발표한 보건대책과 관련하여 몇 가지 추가로 대책을 촉구하는 한편 앞으로 노동부에서 이 시행여부를 모니터링하겠다고 발표했다. 환영할 일이기는 하나 반도체 산업의 특성상 삼성전자의 ‘자율적인 노력’을 독려하고 모니터링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자율 관리의 역량이 충분치 않은 다수 기업들의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지도, 지원해야 하며, 현실적으로 법적인 규제가 안전보건관리의 '상한선'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감안할 때 반도체, 전자산업과 관련한 안전보건규제를 새로이 만들고 강화하기 위한 노력에 나서야 한다.
2) 노출될 수 있는 사람들의 특성
둘째로 고려해야 할 지점은 전자제품 생산 과정에서 화학물질에 노출되는 사람들이 누구냐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전자산업은 고도로 유연화된 노동력을 특징으로 하며, 생산직 노동력의 다수는 시골의 가난한 가정에서 자라난 젊은 여성들이다. 1980년대와 90년대에 조사한 아일랜드 전자산업 여성 노동자들의 작업별 분포 비교를 보면, 화학물질에 노출될 잠재적 위험을 갖고 있는 ‘오퍼레이터’ 업무는 대부분 여성들이 맡고 있다. 이는 다른 지역들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는 일반적인 특징이다.
바꾸어 말하면 유해요인에 대한 노출 위험이 가장 높은 직무에 종사하고 있는 노동자들은 연령의 위계, 성별의 위계에서 가장 하부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유해요인에 대한 노출 위험을 통제하고 스스로를 보호하기에 충분한 정보와 역량을 갖추는데 이중으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한편, 산업안전보건법 상에 보장되어 있는 노동자들의 몇몇 권리들은 일반적으로 '근로자 대표'를 통해 행사하도록 되어 있는데, 전자산업에서는 이러한 집단적 권리의 행사도 매우 제한적이다. 한국 전자산업의 대표 기업인 삼성의 경우 ‘무노조 경영’으로 유명한데, 이는 역사적으로 단 하나의 노동조합도 존재한 적이 없었던 미국 실리콘 밸리 전자산업의 특성과도 일맥상통한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작업환경에 대한 고민이나 불편함, 건강상의 문제점 등을 드러내거나 문제의 개선을 요구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구조적 특성이라 할 수 있다.
3) 노출될 수 있는 유해인자의 종류
전자산업에서는 극도로 광범위한 화학물질들이 원재료 뿐 아니라 공정 화학물질로 사용되어 왔다. 삼성 반도체를 예로 들면 단일 가공라인에서 99종의 화학물질이 사용되고 있는데, 회사는 언제부터 이 물질들을 썼는지 기록하지 못했고, 화학물질들의 성분에 대한 점검도 없었다고 한다. 반도체를 생산하는 국내 파운드리 공장에서 사용 중인 화학물질을 금속산업노동조합에서 조사한 결과, 생산공정에서 사용되는 화학물질들 중 17% 이상에서 발암성분이 함유된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반도체 공장에서 화학물질을 공급하는 시스템에는 매우 다양한 형태들이 있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상이한 예방 방법을 적용해야 하며 이에 대한 현장 노동자들의 지식과 역량을 충분히 제공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한편 반도체, 전자산업은 급속도의 기술 혁신을 특성으로 하는데, 기술혁신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보니 노출에 의한 급성, 만성 건강영향 모두를 연구할 만한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가 없다는 문제가 있다. 미국 IBM사에서 산업보건의로 근무했던 마이런 해리슨은 <반도체 공정의 유해성>이라는 1992년의 글에서 "기술 변화 속도가 너무 빨라지다보니 새로운 제조공정을 도입하기 전에 안전보건 전문가들이 건강 유해성을 검토할만한 기회가 없어지고 있다. 대규모 제조 설비에는 수천 가지 화학물질들이 사용되고 있지만, 이 모든 화학물질들의 독성을 검토하려는 노력은 쓸데없는 일처럼 여겨지고 있다"라고 썼다. 이러한 산업의 특성을 고려한다면 '알려진 유해물질에 대한 노출을 통제하기'에 초점을 맞추어 왔던 기존의 전통적인 노출관리는 실효성을 거두기 대단히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포괄적인 사전 예방의 원칙에 입각하여 획기적인 노출관리의 변화를 고려해야 한다.
4) 현장 노출관리의 실제
위험도 관리를 위해서는 화학물질이 갖고 있는 본래의 유해성 뿐 아니라 노출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 대한 고려가 함께 이루어져야만 한다. 작업장을 실제로 관리하기 위해서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며, 이런 고려가 없는 한 결코 성공할 수 없다.
반도체 공장에서는 산업안전보건법에 기초한 정기 작업환경측정에 심각한 한계가 있음이 확인되었다. 삼성반도체의 경우 실제로 사용하는 83종의 단일화학물질 가운데 24종만이 모니터링되고 있었다. 산안법상 작업환경 측정의 또다른 한계는 대개 간헐적인 단기 노출을 포괄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과거 접촉형 스위치 공장에서 일어난 2-브로모프로판에 의한 생식독성과 골수 이상 분석 사례를 보면, 33명 가운데 23명의 노동자들이 생식독성이나 골수 문제를 얻었는데, 지속적인 노출 수준은 낮았으나 단기간 노출은 발병을 유발할 만큼 충분히 높았다.
게다가 일반적으로 모니터링 시스템은 심각한 급성 독성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가령 삼성반도체 공장의 경우, 생산에 사용되는 가스 중 일부는 매우 낮은 농도에서도 치명적일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가스에 대한 모니터링 시스템은 거의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었으나 여러 유기용제들처럼 만성 독성을 가진 화학물질의 경우에는 그 사용량이 가스보다 훨씬 많음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모니터링 시스템이 없다가 2007년 경부터 비로소 시범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하였다.
이런 상황은 특별한 게 아니고 일반적인 현상이다. 애플은 하청업체 중 하나인 윈텍에서 137명의 노동자들이 중독된 사건 등을 겪으며 하청업체 책임 리포트를 발간하기 시작했는데, 이 보고서에 따르면 그들이 조사한 97개 업체들 중 80곳에서 유해 화학물질을 올바르게 저장하거나 취급하지 않았다. 또한 많은 노동자들이 적절한 개인보호구를 착용하지 않고 있었다.
기존 노출관리의 또다른 한계는 '법적으로 허용되는' 노출 수준 이하에서도 엄연히 유해성이 존재하지만 이에 대한 관리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국 디지털 이큅먼트 공장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는 같은 회사 내 대조군의 자연유산율이 17.8%임에 비하여 포토공정 노동자들은 31.3%, 확산공정에서는 38.9%의 자연유산율이 확인되었고, 미국반도체산업협회에서 수행한 연구에서도 가공공정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자연유산 위험은 대조집단에 비하여 1.43배 높은 것으로 확인되었는데, 이 모든 결과들은 법적 노출허용농도 이하로 관리되고 있는 환경에서 나타난 것들이다. 건강문제는 확인되었으나 이에 대한 조치는 취해지지 않고, 그 이유가 지나치게 느슨한 노출허용농도 때문이라면, 노출허용농도를 강화하거나 이것 이외의 보건관리 기준을 마련해야만 한다.
사실 노출허용농도는 매우 제한적이다. 미국 환경보호기금에서 1997년에 수행한 연구에 따르면 백만 파운드 이상 생산되는 화학물질 100가지 가운데 만성 독성에 대해 전혀 검사를 거치지 않은 것이 절반을 넘었다. 지금도 이런 상황은 전혀 개선되지 않은 상태다. 한국의 경우에도 2020년까지 발암물질을 30% 저감하겠다는 계획 하에 정부에서 우선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이 '유해성을 확인하는' 작업이다. 절대 다수의 화학물질은 유해성이 확인되지도 않은채 사용되고 있고, 따라서 당연하게도 노출허용농도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법적으로 노출 관리를 강제할 수단이 없다. 수십에서 수백 종의 화학물질이 사용되는 반도체 전자산업의 경우 이 문제는 보다 심각하다.
3. 삼성반도체 백혈병 사건을 통해 본 쟁점들
지난 몇 년 간 삼성반도체 백혈병 노동자들의 업무관련성이나 작업장의 유해성에 대한 여러 가지 논란들이 이어져왔다. 크게는 유해요인의 존재 여부와 종류, 노출 수준 평가 방법과 결과 해석, 그리고 산재보험 보상 판단 과정에서 이 평가 결과의 적용에 대한 논란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피해 노동자들은 어떤 유해요인에 노출되었나를 둘러싼 논란
ㄱ. 정부에서 수행한 역학조사에서는 작업장에서 어떤 화학물질이 사용되고 있는지 공개하지 않은 채 제한적인 몇 가지 발암물질의 존재 유무만을 확인하였다. 대상 물질이 실수 혹은 고의로 누락될 수 있다. 또한 회사조차 화학물질 정보를 정확히 확인한 적 없기 때문에 회사가 제공한 자료에만 기반한 연구 자료 자체가 매우 제한적이다.
ㄴ. '사용하지 않고 있다’고 믿고 있는 화학물질과 실제 작업환경에 존재하는 화학물질은 다를 수 있다. 삼성의 경우 화학물질 납품업체가 영업기밀로 주장하고 있는 성분을 파악하고 있지 않았으며, 공정에서 발생하는 각종 부산물 및 화학물질 간 상호작용 등은 검토된 적 없었다. 따라서 사용화학물질 목록에 발암물질이 없다고 해서 실제 작업장에 발암물질이 없다고 간주할 수는 없다.
2) 노출 수준은 어느 정도였나를 둘러싼 논란
ㄱ. 현재 작업환경을 측정하여 과거 작업환경에서의 노출을 추정할 경우, 특정 장소와 일정 시점에서 측정한 농도가 다른 장소나 다른 시점에서의 노출을 대표할 수 있는 타당한 표본임을 입증해야 한다.
ㄴ. 설비 고장, 사고성 누출, 혹은 일상적인 설비 유지보수(PM) 등의 상황에서 일어나는 간헐적인 노출이 평가되지 않았다.
3) 측정된 결과를 합리적으로 해석하였나를 둘러싼 논란
ㄱ. 노출허용농도는 이 수준 밑에서는 대부분의 노동자들에게 건강 영향이 없을 것이라고 사회적으로 합의된 농도이다. 따라서 그 이하의 노출 수준으로 관리되고 있다면 ‘법적 규제 범위 안에서 관리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뿐, ‘질병이 발생할 수 없다’ 혹은 ‘노출이 일어날 수 없다’고 단언하는 것은 과학적이지 않다.
ㄴ. 특히 발암물질의 경우에는 ‘역치(threshold, 이 수준 밑에서는 건강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과학적으로 알려진 농도)’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노출기준 이하라 하여 암 발생 위험을 배제할 수 없다.
4) 이런 측정 결과와 결론이 산재보험 보상을 판단하는데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가를 둘러싼 논란
ㄱ. 사회보장제도로서의 산재보상보험법의 취지는 업무상 사고나 질병으로 고통받는 노동자들과 가족들에게 치료와 생존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하여 “발병 경로가 의학적으로 명백히 밝혀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각종 유해화학물질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백혈병이 발병하였거나 적어도 그 발병이 촉진되었다고 추단할 수 있으므로 업무와 상당인과관계가 있”다고 본다는 2011년 6월 23일 서울행정법원의 판결에서도 이러한 제도상의 취지를 확인할 수 있다.
ㄴ. 한국 사회에서 산업재해로 공식 인정받는다는 것은, 개별 노동자와 가족에 대한 보상 뿐 아니라 해당 사업장이나 업종에 대하여 미래 피해 사례를 예방하기 위한 조치를 개시하게 만드는 중요한 계기이자, 제도적으로 유일한 경로이다. 지나치게 보수적인 기준으로 업무관련성을 판단할 경우 “다치고, 병들고, 죽은 노동자들은, 적어도 법적으로는, 의학적으로는, 기술적으로는, 사회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예방도, 치료도, 보상도 받을 수 없다”라고 울리히 벡이 <위험사회>에서 썼듯이 현재의 피해자 뿐 아니라 미래의 피해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아무런 조치도 취해질 수 없다.
4. 나가며
반도체 전자산업은 한국 경제에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이 산업의 규모와 비중에 걸맞지 않게 그동안 이 산업 노동자들의 안전보건 문제는 제대로 알려진 바 없었다. 삼성반도체 직업병 논란을 통해 지금이라도 이 산업의 노동자 건강 현실이 주목받기 시작하였고, 이에 대한 기업과 정부의 사회적 책임이 토론되기 시작한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런데 이 과정은 산업보건 일반의 패러다임에 대해서도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반도체 전자산업 현장에서의 화학물질 노출과 그 유해성에 대한 연구는 거의보기 어렵다. 즉 '과학적으로' 알고 있는 지식이 알지 못하는 지식보다 훨씬 적은 것이다. 때문에 알려지지 않고, 관리되지 않고, 따라서 누구도 설명하지 못하는 노출과 누구도 설명할 수 없는 질병 피해들이 속출하고 있다. 그리고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기존 산업보건 과학과 지식의 한계는 다른 업종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 한국 삼성반도체 사건을 통해 국제적으로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지점은, 과학의 이러한 한계를 받아들이고 위험도를 낮추기 위해 사전예방의 원칙을 적용하자는 입장과, 확인되지 않은 위험은 위험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과학에 대한 '신앙' 사이에 있다. 사전예방의 원칙을 포괄적으로 적용하자는 주장에 대해 그 사회경제적 비용에 대한 부담을 호소하며 저항하거나, 규제와 저항이 적은 국가나 지역으로 이전해 온 것이 지금까지 반도체 산업 및 여타 산업의 '세계화'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개별 사업주나 그들의 집단적인 조직, 혹은 그들의 이해를 반영하는 이들이 관철해온 입장이기도 하다. 그 대척점에서 피해자들이나 현장 노동자들, 그리고 그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이들은 비용의 내부화( internalization of the cost ; 기업이 비용을 감당해야 한다), 생산자의 책임확대(extended producer responsibility ; 기술 및 경제적 역량을 가진 브랜드 기업들의 책임을 확장해야 한다), 그리고 사회구성원으로서의 노동자 권리와 존엄을 보호해야 하는 정부의 책임 등을 요구해 왔다. 산업보건 전문가들은 어느 지점에 서 있는지 질문받고 있다.
이런 문제를 제기할 때마다, 자연과학적 주장과 사회과학적 주장을 나누어 논해야 한다, 산업보건은 자연과학적 사실에 입각해야 한다는 반박에 부딪히곤 한다. 그러나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이동이 단순한 자연과학적 발견은 아니었듯이, 모든 새로운 발견과 연구는 자연과학인 동시에 사회과학이며 정치적인 영역이다. 저농도의 벤젠이 건강에 유해한가 아닌가를 확증하기 이전에 이미 과학자들은 판단과 주장을 해야 했다. 하나는 ‘확증되지 않았으니 규제를 통해 보호하자’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확증되지 않았으니 그대로 내버려두자’는 것이었다. 각각의 주장은 노동자의 건강과 생명, 인권과 기업의 이익과 국가경제에 미치는 혜택, 두 가지 중에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의 문제로 이어진다. 게다가 소위 과학적 연구들은 피해자들의 문제제기 뒤를 따르기 마련이고, 상당한 시간이 걸리며, 또한 기업의 정보 비공개나 과거 작업환경에 대한 자료의 제한 등의 이유로 거의 언제나 “확실하지 않음” 혹은 “후속 연구가 필요함”으로 마무리된다. 이를 바탕으로 소위 자연과학적 근거가 없다고 하며 산재를 인정하지 않거나 유해성을 배제하는 것은, 노동자 건강과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미래지향적 방향을 가로막게 된다. 전문성이란 일부 전문용어를 해독하고 기기를 다룰 줄 아는 능력과 신속성을 갖춘 단순 기술이 아니라, 바로 이처럼 민감하고 어려운 판단을 내리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지는 사회적 역할에 부여하는 이름이다.
또한 이런 주장에 대하여 전문가는 두 이해관계의 중간에 서야 한다는 주장에 마주치기도 한다. 그러나 산업보건은 본질적으로 노동자 편에 설 수밖에 없다. 노동자가 기업주에 비해 정보나 권력 등 모든 면에서 사회적인 약자이기 때문에, 노사 이외의 사회적 주체들이 모두 중립에 서게 되면 노동자의 권리와 존엄을 지킬 도리가 없다. 돈보다 생명, 돈보다 건강이라는 ‘이념’은 산업보건의 본질이다.
<끝>
영문 초록
Information of chemical in electronics industry has not been known enough, although workers' health hazards by chemicals in this industry have been regarded serious. The who always contribute to reveal and control the health hazards and risks in electronics industry were not the industry but the occupational or environmental victims and grassroot organizations. The similar phenomena can be observed in Korea.
The first part of this article is largely based on the memories and experiences of individual workers of semiconductor factories, mainly from Samsung. Common features of those experiences can be a good resource for detail understanding of the workplace, especially under the situation without any transparent disclosure of information by the governments or the companies.
The second part of this article deals with several factors to be considered for control of exposure in workplace; characteristics of workplace and workforce, types of chemicals used, and the way of using the chemicals. Then the current social issues on work-relatedness of cancers of Samsung semiconductor workers are presented briefly.
As a conclusion, current OSH situations and issues in Korean electronics industry raise the need of changes in OSH culture. General adaptation of precautionary principle, internalization of costs, and extended responsibility of producers is needed urgently. The OSH professionals both in public and private sectors should support these agendas under their social obligation to protect workers' health.
참고문헌
테드 스미스 외, Challenging the Chip;세계 전자산업의 노동권과 환경정의, 도서출판 메이데이, 2009.
Barry and Brunt, Female employment in the multinational electronics industry in Ireland's south-west planning region, Irish Geography, Vol35(1), 2002, 28-39.
Corporate for All et al., 2010 Parliamentary Audit - Civil Society Report; Problems of Chemical Exposure Control at the Samsung Electronics’ Semiconductor Plant in Giheung, 2010.
Nimpuno et al., Information on Chemicals in Electronic Products, 2011.
OECD Environment, Health and Safety Publications Series on Emission Scenario Documents Number 25, EMISSION SCENARIO DOCUMENT FOR CHEMICALS USED IN THE ELECTRONICS INDUSTRY, 2010.
Park JS, Park DU, et al., An outbreak of hematopoietic and reproductive disorders due to solvents containing 2-bromopropane in an electronic factory, South Korea: Epidemiological survey, J Occup Health,39:138-143. 1997.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