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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를 든다는 것은.......?

2005년 5월 30일.

여느 날처럼 화장실에 앉아서 담배를 물고 신문을 펼쳤다.

10여 분 뒤 1면에 난 기사에 나는 숨을 멈췄다.

(나는 신문이든 잡지든(책만 빼고) 일단 뒤에서 부터 읽는다.)

 

아는 얼굴이 신문 1면에 있었다. 부고 기사였다.

 

김형률.

 

나는 생전에 그를 두 번 만났다.

20004년 어느 여름, 그는 아버지와 함께 푸른영상을 찾았었다.

그리고 그해 가을의 막바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그를 만났었다.

 

원폭2세환우회 회장인 그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어했다.

원폭 피폭자의 2세로 태어나 알 수 없는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만들고 싶어했다.

 

나는 독립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사람이다.

권력과 자본의 영향을 받지않고, 공중파가 다루지 않는 이 세상 낮은 곳의 이야기,

그러나 꼭 필요한 이야기가 독립다큐멘터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생전에 그는 여러 텔레비젼 보도프로에 출연하여 자신과 같은 원폭2세들의 문제에

우리 사회가 관심을 갖기를 주장했었다.

 

나는 푸른영상이란 곳에 있다. 독립다큐를 만드는 곳.

<상계동 올림픽>과 <송환>이란 다큐멘터리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알려진 곳.

 

어지간히도 더웠던 2004년의 여름. 푸른영상을 아버지와 함께 찾아던 그의 모습은

나를 흠칫하게 만들었다.

내 나이 또래로 보였던(나는 신문기사에서 그가 내 동생과 같은 나이란 걸 알게 됐다)

그는 애처로움을 느낄 정도로 말라있었다.

작은 키에 삐쩍 마른 그는 열심히, 정말 열심히 이야기했다.

부산에서 만났을 때도 그는 원폭2세의 문제에 대해 열심히, 정말 열심히 이야기했다.

 

2005년 5월 30일 저녁 11시, 나는 카메라를 들고 부산으로 가는 막차를 탔다.

31일 새벽 4시 11분 나는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대학병원 영안실 입구에는 수무개 남짓한 화한이 놓여져 있었다.

새벽 5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이라 영안실에는 조문객들은 없었다.

유족들이 영안실에 잠들어 있기에 나는 잠시 밖에서 담배를 피면서 기다렸다.

어색했고, 불편했다.

30분쯤 영안실 밖에서 서성이던 나는 조문을 하러 영안실 안으로 들어갔다.

조문을 끝내고 아버님이 어디서 왔나고 묻기에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푸른영상에서 왔습니다.

아버님의 눈에 가득 물기가 고였다.

불편했다.

 

영안실을 나와 조문객들이 식사하는 곳에 잠시 앉아있었다.

나는 왜 카메라를 들고 왔는가?

 

잠시 후 아버님이 나오셔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생전에 형률이가 다큐멘터리를 꼭 만들어 싶어 했다는 말씀을 하셨다.

무어라 답할 말이 없었다. 죄송하다는 말 밖에.....

 

장례식을 찍어도 되냐고 여쭸던것 같다.

늦었지만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될 지는 모르겠지만......

죄의식일지도.....

 

아버님은 찍어도 된다고 말씀하셨고, 이른 아침이라 조문객들도 별로 없기에 나는 카메라를

들었다.

 

영안실 밖에서부터 촬영을 시작했다.

영안실 안의 그의 사진도 촬영했다. 사진 옆에는 한 구절의 글이 있었다.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숨이 막혀왔다. 카메라를 끄고 싶었다.

다시 밖으로 나와 담배를 물었다.

 

일곱시가 가까워 오자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방송국 카메라도 오고......

북적이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뒤에만 있었다.

발인이 시작되었다.

여러 단체 사람들, 방송국 사람들, 기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나는 여전히 뒤에 있었다. 카메라를 들고......

 

화장장으로 가는 버스 안.

열려진 창문으로 바다냄새가 들어왔다.

그와 나는 같은 차에 타고 있다.

그러나 그는 더이상 열심히, 정말 열심히 말하지 않는다.

서른다섯. 그는 더이상 말이 없다.

그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던 것을.....

그래서 그렇게 열심히, 정말 열심히 이야기 했나 보다.

 

독립다큐멘터리를 만드는 나는, 카메라를 든 나는,

내내 뒤에서만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찍었다.

부끄러웠다. 염치가 없었다.

그는 그렇게 열심히, 정말 열심히 이야기했는데.....

 

더이상 말이 없는 그를 찍는 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더이상 말이 없는 그를 찍는 다는 것이 염치없었다.

 

사람들 뒤에서만 카메라를 든 나.

 

나에게 카메라를 든다는 것은 무엇인가?

 

생전에 그가 준 책 두 권, 자료집 하나, 그리고 많은 메일이 남아있다.

유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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