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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9/28
    근래의 생각들
    공돌
  2. 2007/09/28
    음악감상
    공돌

근래의 생각들

1. 먼저 책을 많이 읽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안타깝지만, 책을 읽는 시간 만큼 보내는 시간이 소모되는 시간이 아니기 때문에 별 걱정은 없다. 책은 언제든지 읽을 수 있다. 다만 읽을 책을 추스려보고, 통장 잔고를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다.

 

2. 대화의 양이, 절대적인 양이 줄어든다고 해서 생각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때로는 뻑뻑하게 지나가는 시간을 대화로 채우려는 시도 만큼 우울한 일도 없다. 생각을 움직이고 있다면 말이 없다고 하더라도, 관계에는 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존 가트맨도 늘 종달새처럼 떠들어야 좋은 관계가 유지된다기 보다는 어떤 말을 어떻게 하고 어떻게 듣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한 근거에 따라, 나는 아주 좋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3. 시간.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그것은 한편, 24시간 주어진 시간 내에 압축적으로 나에게 주어진 일을 소화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일테다. 다시 말하면 시간이 부족한 측면보다는 내가 그 시간에 맞춰서 일을 할 수 있는 에너지의 부족. 뭔가의 충전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결론.

 

4-1. 공부. 애초 공부의 시작은 '훈련에 따른 자기단련'이라는 점이라고 못박았다. 박홍규 교수가 이 시대에는 전문가는 많아도 사상가는 없다는 말, 그 말에 깊은 함의가 있음을 느낀다. 적어도 먹물이라면, 그 먹물의 본질이 뭔지를 먼저 생각해봐야 하지, 먹물의 쓰임새만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점. 특히 돈의 흐름에 따라 먹물도 같이 흐른다면, 결국 공부는 애시당초 종속노동과 다름없다. 물론 노동과 비슷한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4-2. 그래서 드는 생각. 공부는 하는데, 무엇을 목적으로 쫒기며 하지 말자. 다만, 집중적으로 해야 할 시기에는 포기해야 할 것이 있다는 것도 염두해 두자는 결론. 그러나 쉽지 않겠지.

 

5. 사랑. 나이가 차들어 가면, '자와 콤퍼스'로 사람을 재어보고 조건을 넘겨짚어 보는 습성이 생기는데. 그런 습성의 근저에는 '상대방의 덕'을 보겠다는 심뽀가 숨어있다. 그러면 일단 사랑의 반틈은 조건화되버린다. 조건화된다는 것은 사랑의 대상이 전이됨에 있다. 다시 말하면, 상대방 존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 상대방의 조건을 사랑하게 된다는 점. 실제 그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조건을 확인한 후, 비로소 '안심'을 하는 것이고 '미래'에 대한 '보장'을 스스로에게 약속받는다는데 있다는 것이다.

 

5-2. 그러나, 아직 그런 부분이 없어 '다행이다'. 상대방이 진실로, 내 스스로가 진실로 존재에 대한 사랑을 갈구할 때 그러한 조건은 산산히 부서지는 법이고, '언제 가장 행복한가'와 같은 '찬라'와 '순간'에 집중하게 되면서 그것이 연속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태도를 유지하여야 한다는 점. 중요하다. 누군가에게 과시하고자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며, 오직 상대와 나 둘 사이에 과시하는 사랑만이 진실한 것이라는 점. 또한 중요하다.

 

그렇게 되고 있다는 점. 더더욱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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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감상

"부르디외는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데에 반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가 재미있다. 음악에 관한 담론은 가장 인기 있는 지적 과시의 기회 가운데 하나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음악에 관해 말하는 것은 자신의 교양의 폭과 해박성을 표현하는 훌륭한 기회인데, 그는 그것이 못마땅하다는 것이다. 음악에 대한 기호만큼 그 사람의 ‘계급'을 확인시켜 주는 것도 없으며, 또한 그것만큼 확실한 분류 기준도 없다고 하는 그의 주장은 귀담아 들을 만 하다. 한 개인의 기호 또는 취향이 그토록 많은 것을 폭로할 수 있는 것인지 의아하게 생각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르디외는 미적으로 편협하다는 것은 가공할 폭력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기호는 혐오와 분리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다른 삶의 양식에 대한 혐오는 계급 사이의 가장 두터운 장벽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부르디외가 보기에, 우리가 예술작품에 대해 취하는 태도는 미학적 느낌의 자발적 결과가 아니라, 교육과정의 사회적 산물이다. 거기서 미적 판단은 계급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강준만, 선샤인뉴스에서.

http://sunshinenews.co.kr/detail.php?number=475&thread=30r01r02r01

 

피에르 부르디외가 취향이 독특한 건 알지만 나름대로 통찰력있는 시각을 가진 이이므로 그의 판단이 전적으로 동감가는 대목이다.

사실 음악이라는 원래 목적은 감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연주하는 이는 연주하는 곡을 나름의 사고체계에서 해석하여 출력하고, 듣는 이는 그 해석에 충실해서 듣고 평가하는 일이다. 그러나 주저리 주저리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고, 몇 번 결혼했고, 하는 등의 일들은 사실 그의 음악을 이해하는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회사에서 음악감상하자고 덤비는 사람이 있어 한탄스러워 글을 옮겨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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