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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07/11/19

5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11/19
    으흠
    공돌
  2. 2007/11/19
    안재성의 말
    공돌
  3. 2007/11/19
    양동봉
    공돌
  4. 2007/11/19
    첩자
    공돌
  5. 2007/11/19
    남재희->이병박
    공돌

으흠

뭔가가 새롭게 시작된다는 것이 성취감을 줄 수도 있지만 꼭 그렇지 않을 때도 있지요. 현재의 상황에서 재구성되는 일들이 굉장히 많다는 말씀이고. 그런데 뭔가 계획한 것이 돌파되지 못한 상태가 익숙않다면, 조급해하고, 실패한 느낌에 좌절하기도 하지만 그건 일시적인 상태에 불과한 것이고.


물론 그러한 어정쩡하고 불쾌한 느낌, 허탈하면서도 불안한 심정은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정확하게 평가해본 적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구요. 다른 사람과 나를 현재의 지점에서 상대적으로 평가하게 되면 더욱더 그런 느낌이나 생각이 강하게 들지만 그러한 비교가 자신에게 앞으로도 별 도움이 안된다는 사실을 알고있다면, 의도적으로 그런 비교를 배제하는 훈련을 해야할 것이고.

 

그러나 지금 당신의 상태에서 느끼고 있는 것은 왠간한 대학원 졸업생들은 비슷하게, 혹은 거의 동일하게 느끼는 심정일 것이고. 그래서 그러한 상태는 통과의례적인 측면이 있으니깐, 일단 흘러가는 대로 두고 유심히 관찰할 필요가 있는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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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성의 말

안재성 : (웃음) 내가 다른 얘기를 하나 더 해보겠다. 좀더 취재를 해봐야겠지만 실제로 '전태일은 대학생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말한 적이 없다. 당시 상황에서 전태일이 거의 접해보지 못했던 운동권 대학생 친구에 대한 기대가 있었을 것 같지 않다.
  
 전태일의 마지막 편지는 박정희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박정희 각하, 옥체 만강하시냐. 혁명 과업을 달성하는 데 대한 각하의 노력을 존경한다. 노동자들이 이렇게 어렵게 사는데 돌아봐 달라', 이런 내용이다. 그게 바로 당시 노동자들의 생각이었다. 운동권 대학생들에 대한 환상이 있을 수 없었다.
  
아마 전태일이 죽은 후 대학생들이 많이 와서 장례를 치르고, 시위도 하면서 나중에 이소선 여사가 '우리 태일이에게 이런 친구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말했던 게 시간이 지나면서 전태일이 직접 한 얘기로 전해진 것 같다.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41208113742&s_menu=문화

 

* 이소선 어머니께 이 사실에 대해 여쭈었으나, 답변은 안재성과 다른 답변이 나왔다.

 

"엄마 친구 자식들 중에 대학생이 있으면 꼭 하나 소개 시켜 주소." 그리고 이소선 어머니는 백방으로 주변 사람 중에 대학생이나 대학 나온 사람들을 찾아 다니다가 국수집 아저씨를 소개시키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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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봉

양동봉은 누구? 치과원장 접고 과학·수학책 3000권 독파

 

“전설적인 수학자로 알려진 인도의 라마누잔을 연상케 한다”고 말했다.

라마누잔은 정규 수학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뛰어난 수학 실력 덕분에 영국의 수학자 하디의 눈에 띄었다. 그의 도움으로 라마누잔은 케임브리지 트리니티칼리지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했고, 하디와 함께 정수학(整數學)의 발전에 공헌했다. 인도인으로는 처음으로 영국 왕립학회 회원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라마누잔은 직관과 명상으로 수많은 수학 공식을 발표했고, 후대의 수학자들이 뒤늦게 그의 진가를 인정했다.

 

양 원장과 라마누잔이 직관으로 숱한 난제를 풀어냈다는 점에서는 비슷할지 몰라도 삶의 궤적에선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1954년 경남 진해에서 태어난 양 원장은 마산고등학교를 나와 조선대 치과대학에 입학했다. 1992년 그가 불현듯 삶에 관한 영감을 얻기 직전까지 그는 남부러울 것 없는 치과의사였다. 회사원 평균 월급이 40만~50만원이었을 때, 그의 월급은 600만원이 넘었다고 한다.

관련기사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5&oid=262&aid=000000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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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자

'역사를 훔친 첩자' 의 서평기사.

 

고구려는 상당히 이른 시기인 기원 전부터 첩자를 썼다. 중원 왕조나 북방 민족과 국경을 접한 지정학적 조건에서 비롯한다. 고구려는 주변국과의 혼인관계를 첩자 활용의 수단으로 삼거나 승려들을 첩자로 적극 이용했다. 자신의 아내를 첩자로 둔갑시킨 호동왕자, 비수를 식기에 숨겨 적장을 암살해 나라의 위기상황을 타개한 유유, 심리전에 능숙했던 을지문덕, 백제를 멸망으로 몰아넣은 위장간첩 승려 도림, 당 태종에게 사로잡혀 그 이름을 남긴 연개소문의 첩자 고죽리 등 문학소재로 삼기에도 넉넉한 사건과 사례가 적지 않다.


신라는 7세기 이후 고구려와 백제의 협공에 시달리며 생존 돌파구를 모색했다. 그 결과 신라는 당과의 연합을 성사시켰고, 결국 삼국을 통합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일찍이 첩자의 중요성을 인식한 김유신의 구실이 상당히 컸다. 첩자에 관한 한 김유신은 군계일학이었다. 왕의 동생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고구려와 왜로 간 박제상의 행적, 역사의 전기를 마련한 김춘추의 고구려행과 양국간 치열한 첩보전, 젊은 날 고구려에 잠입해 첩보활동을 벌인 거칠부 등 극적인 첩자가 많다.


백제의 첩자 활동이 성공해 신라를 낭패에 빠뜨리고 결국 김춘추를 궁지로 몰아 고구려행을 결행케 만든 대야성 전투 등 중대 사건도 있다. 특히 이 사건에는 신라 내부의 치정관계를 백제가 이용하는 등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요소가 다분하다. 고구려와의 칠중성 전투에서 신라가 패하는 데 결정적 원인을 제공한 신라인 이중간첩 비삽 등도 흥미를 더한다.


첩자와 관련한 백제의 기록은 열악하다. 그러나 백제는 고구려와 수의 2차 전쟁 때 수와 고구려를 동시에 내통하는 줄타기 외교로 국가적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왜에까지 첩자를 심어놓는 등 첩자 활용이나 첩보력이 만만치 않았다. 나라가 멸망한 뒤에도 부흥군 조직을 가동, 첩보 활동을 계속했다.

 

출처: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3&aid=000020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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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재희->이병박

"미국의 빌 게이츠는 전세계적으로 최고인 액수를 자선사업에 기부하여 신선한 화제가 되고 감동을 자아냈다. '새로운 자본주의' 운운하며 그의 역량을 빈곤 해결에 쏟겠다고 방향을 잡았다. 이 후보도 연령, 재력, 위치 등 모든 것을 고려할 때 이제 통 크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그러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며 하등 어색할 것이 없다고 본다. 특히 땅, 누구의 말마따마 '그놈의 땅'을 그렇게도 많이 갖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한국사회에 있어서의 '땅의 정의'가 어떠해야 하는 것인가를 숙고하여 모범을 보일 필요도 있을 줄 안다. '땅의 정의'라 말할 때 땅 과다 소유의 결과적인 대중 수탈구조를 염두에 두고서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 오마이뉴스에서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70829143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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