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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12/22
    12월 22일 오후 3시 52분에 든 생각.
    공돌
  2. 2007/12/18
    삼성
    공돌
  3. 2007/12/04
    대선
    공돌
  4. 2007/12/04
    가을옷 한 벌
    공돌
  5. 2007/12/04
    새로운 옷의 기원
    공돌
  6. 2007/12/04
    도끼를 갈아서 바늘을 만들다
    공돌
  7. 2007/12/04
    인연
    공돌
  8. 2007/12/04
    창세기
    공돌
  9. 2007/12/04
    감기몸살
    공돌
  10. 2007/12/04
    짝사랑부터 시작하자
    공돌

12월 22일 오후 3시 52분에 든 생각.

"상황에 따라서 일어나는 마음, 그때그때의 심정만으로 사랑한다고 말하지 말자. 그것은 잘 대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내가 불편하지 않으려는 것일 뿐이다. 늘 상대방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생각하고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 때로는 준비되어 있는 것만으로도, 준비하려는 그 마음 자체로만으로도 상대방의 마음을, 사랑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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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삼성, 참 큰 일 많이 치른다...

 

이번 대선에는 결국 태안 기름 유출로, BBK 관심을 최대한 옮기주시려나 부다. MK 동영상 보다 순진한 국민들은 그걸 볼 시간에 태안으로 가거나, 그것을 보고서 태안에 가거나, 태안에 가야될 것인데 라고 고민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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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대선

 

난리법석입니다. 애시당초 예상했던 바이지만, 가는 곳 마다 선거포스터에 홍보물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각 후보들이 저마다 내세우는 공약들만 실현되어도 세상은 엄청나게 바뀔 것 같습니다. 공약대로 된다면야, 저는 기표용지에 1번부터 12번까지 잉크가 마를 때까지 죄다 찍고 싶습니다만. 선거가 자판기는 아니죠.

 

한 두 번 속는 장사가 아니라서 이제는 그 공약들이 딱히 신뢰는 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누굴찍을 것인가를 고민하기 보다는 투표장에 갈까말까를 고민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딱히 찍을 후보자도 없을뿐더러 자기들 마음대로 뭉쳤다가 헤어졌다가 나왔다가 들어갔다가 하니 지금 마음 속에 누굴 하나 정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조급하게 서두를 필요도, 호들갑을 떨 필요도 없습니다. 투표날이 지나고 대통령이 선출된다고 하루 아침에 경제가 보일러 돌아가듯 뜨끈뜨끈하게 돌아가지도 않으며, 막힌 하수구가 뻥하고 시원하게 뚫리지도 않습니다. 라이터 불 하나로 세상을 밝힐 수 없고, 성냥불 하나로 온 방을 데울 수는 없습니다.

 

쇼펜하우어란 철학자가 바늘두더지 일화를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찬바람이 부는 어느 겨울날, 바늘두더지 한 쌍은 너무나 추운 나머지 얼어붙은 몸을 녹이기 위해 서로를 끌어안습니다. 그러자 뾰족하게 돋아난 털이 서로의 몸을 찌르게 되고 그 둘은 다시 떨어집니다. 다시 몸이 얼어붙자 서로를 끌어안지만 털이 서로의 몸을 찔러 그 고통으로 다시 떨어집니다. 결국 바늘두더지 한 쌍은 얼어죽고 맙니다. 이게 소위 ‘바늘두더지 딜레마’라는 겁니다.

 

신문을 보는데 눈을 바짝 갖다 댄다고 해서 신문의 작은 글자가 잘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적절한 거리가 유지될 때 신문의 작은 글자가 눈에 선명하게 들어오는 법입니다. 사람과의 관계도, 사물을 바라보는 태도도, 어떤 일을 판단하는 일도 그것과 적절한 거리를 두고 바라봐야 비교적 정확하게 볼 수 있습니다.
술집에 들어가도, 아주 친한 친구를 만나도, 간만에 부모님을 만나도, 생판 모르는 보험외판사원을 만나도 하나같이 하는 이야기는 “누굴 찍을 겁니까”입니다. 죄다 대선 외에 다른 이야기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럴 때는 사람과도, 대선과도 거리를 두는 게 좋을 듯합니다. 어차피 대통령이 당선되면 국민들은 “저럴 줄 알았다”는 탄성을 쏟아내기 마련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후보가 당선이 되어도, 혹은 당선이 되지 않아도 걱정하실 필요없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후보가 당선되면 “나는 저 사람 찍었으니 욕해도 돼”라고 하시면 되고, 자기가 원하지 않은 후보가 당선되면 “저럴 줄 알고 나는 안 찍었으니깐 저 놈은 욕먹어도 싸”라고 하시면 됩니다.

 

인도의 정치인인 네루는 ‘정치는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근데 선거광고를 보면 정치인, 저네들이 울고 자빠졌습니다. 가끔씩 눈물을 닦아주기도 하지만, 이번에는 뭘로 닦아주실지 솔직히 겁부터 납니다. 이번 대선, 너무 걱정하시지도 마시고 너무 깊이 관심을 가지시지도 말고, 그냥 실눈을 뜨고 모르는 척하고 지나치는 게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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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옷 한 벌

가을옷 한 벌

 

낙엽이 들어갑니다. 신림동 관악산에도, 종로의 인왕산에도, 여의도 거리에 늘어선 가로수에도 수줍은 듯 붉게 낙엽이 타들어가고 있습니다. 밤거리를 지나면 형형색색 즐비한 네온사인이 비추는 색들은 동공을 자극

 

하기만 하지만, 자연 스스로가 온 몸을 물들인 색들은 인간의 시야를 맑게 합니다.
그런 이유에 오래전부터 인간은 자연이 만들어낸 천연의 색을 이용하기 시작했지요. 천연의, 자연의 색들은 눈 뿐만 아니라 몸을 보호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쪽물이나 홍화물을 들여 옷을 염색했습니다.

 

그러다 염색 기술이 발전하게 되면서 고려시대 때부터는 오늘의 공기업에 해당하는 ‘관영직조’에서 염색을 전문적으로 하게 됩니다. 그리고 더욱 빗깔나는 옷을 위해 염색을 하고 수를 놓게 됩니다. 물론 왕족이나 벼슬이 높은 사람들이 주로 입는 옷이 되었지만요.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다 장인들 손에서 빚어졌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되겠지요.

 

아참, 그리고 천연염색하면 그 옷에 항균기능, 냄새제거기능, 항알러지기능이 강해진답니다. 요즘 어린이들의 아토피 때문에 천연소재와 천연염색을 한 웰빙의류가 히트를 치고 있는 것도 아마 그 탓이겠지요. 우리 ‘수다공방’에서 아줌마들의 손을 타는 그 옷감들이 천연염색을 한 옷감들이니 앞으로는 어른, 아이할 것 없이 그 옷들이 살갑지 않겠습니까.

 

가을바람이 이마를 타고 넘어갈 때 즈음이면 옷장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천연의 옷을 입고 거리를 나서는 행복을 상상해 봅니다. 수다공방이라는 이름의 천연색을 빛과 바람으로 엮어 만든 그 옷을 입을 날만 손꼽아 기다려봅니다. 

 

가을이 되면서 ‘참 신나는 학교’도 새 단장을 했습니다. 지난 13일에는 한 기업과 하비타트라는 사랑의 집짓기 봉사단체에서 우리 학교의 속살을 다듬어 주셨습니다. 게다가 책상, 의자, 예쁜 메모지 판까지 달아주셨다고 하니 정말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새롭고 말끔한 옷을 갈아입고 우리 학생들을 맞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는 학교를 생각하니 흐뭇하기 그지없습니다. 학교 몸단장에 도움을 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드리고, 또한 학교 선생님들께서도 항상 헌신적인 열정을 쏟아붓고 계시니 제 마음마저 훈훈해집니다.


며칠 있으면 11월입니다. 꺼내놓은 선풍기도 어느 덧 창고에서 동면을 준비하고 있고, 이불 아래는 전기장판이 자리를 틀었습니다. 계절 탓이야 하겠지만 몸도 따스함을 원하고 있지만 마음도 그렇습니다. 하고 있는 일들도 많아졌지만 서서히 정리해야 할 일도 생기고 있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마음이 시큰해지지 않게 서로의 마음을 포근하게 안아줍시다. 그러나 그럴 준비가 다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안겨줄 옷을 만들어 솜씨를 뽐낼 날도 얼마 남지 않았고, 새 단장을 해서 좋은 분위기에서 우리 학생들을 품어줄 수 있는 공간도 있으니깐요. 그럼, 가장 좋은 천연의 가을 옷을 한 벌 준비하면 어떨까요? 그게 진짜 옷이어도 좋고, 서로의 따스한 마음이 옷이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그 옷 하나면 칼바람이 불어도 무섭지 않을테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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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옷의 기원

새로운 옷의 기원

 

사실, 제목은 그럴싸하지만 옷의 기원, 은박지처럼 얇은 지식으로는 도저히 필자가 설명할 길이 없다. ‘옷’이라는 말의 어원이 윗옷을 가리키는 말로 ‘우티’에서 연유했다는 설 정도 밖에는. 그것도 정확한지 모르겠고,

 

옷의 기원을 설명하는데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냥 상상력으로, 옷의 기원, 파고 들어가 본다.
옷. 이거 사실 본질은 ‘가리개’가 아니다. 벌거벗고 다녔던 것이 인류의 본질적인 모습이다. 속된 말로 다들 벗고 다니니깐, 쪽팔린 줄 몰랐던 것이다. 근데 날씨의 변동이 생기고, 춥고 덥고, 또 사냥하다가 긁히고. 그러니 몸을 보호할 뭔가가 필요했던 것 아닐까.

 

성경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처럼 ‘사과’를 먹자마자 부끄러워 황급히 나뭇가지로 중요부분을 가렸다는 것은 조금 억척스럽기는 하다. 여하간 몸을 보호하기 위해,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 사용했던 옷의 대용품들이 등장한다. 그 중에 최고는 동물의 가죽 아니겠는가.

동물의 가죽을 얻기 위해서는 사냥을 해야했고, 사냥을 통해 얻게 된 동물의 가죽을 도려내기 위해서는 날카로운 칼같은 도구를 필요로 했다. 그러한 도구의 발명. 이것도 옷의 기원과 중요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다시 말하면 날카로운 도구의 발명은 인간의 손기술이 그 만큼 발전해갔다는 의미이고, 그렇게 얻어진

 

동물의 가죽을 이어붙이기 위해서는 또 다른 도구를 만들 수 있었음을 추측케 한다.
선사시대의 유적지에서 발견된 유물을 보면, 주로 낚시에 사용된 것들이 많다. 돌칼, 낚시바늘, 뼈바늘, 바늘통 등이 대표적이다. 낚시그물을 엮는 것은 옷을 짜는 것과 유사한 부분이 많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옷의 기원은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아니겠나.

옷을 보편적으로 입고 다니게 되는 시기부터는 옷이 ‘가리개’라는 본질과 더불어 ‘신분’을 상징하는 용도로 드러난다. 특히 신분을 드러내는 기능을 가진 옷을 만들게 되면서, 옷감과 옷을 만드는 기술은 더욱더 발전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러한 과정 이후에는 옷도 시대의 요구와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게 되면서 신분을 탈피하고 자유롭게 되지만, 그것은 사실 오래된 일은 아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 옷의 모양과 경향들이 급속하게 변하고 있다는 점은 그 만큼 옷에 대한 기능적 부분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과 개성을 표현해내는 중요한 수단이 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옷의 본질이 이제는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으로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정체성과 개성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옷을 찾는다면 그에 맞는 옷이 있어야 할 것인데.

그러한 대안으로 수다공방이 만들어내는 옷이 유력할 수 있다. 수다공방이 빚어내는 옷이 자신의 정체성과 개성, 게다가 인체에 유익하기까지 하다면 옷의 기능을 총망라한 최고의 옷이 아니겠는가. 옷은 제2의 피부이자, 이제는 자기 자신의 얼굴이 되고 있다. 수다공방의 자부심으로 만든 옷이 ‘새로운 옷의 기원’을 여는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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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끼를 갈아서 바늘을 만들다

도끼를 갈아서 바늘을 만들다

 

중국 당나라 시인 이태백씨. 이 양반 어릴 때부터 안 해본 것 없는 사람이었답니다. 그러면서 공부도 곧잘 했다죠. 그에 대한 일화가 있습니다.


이태백이 어릴 때 산에 들어가 공부를 한 적이 있습니다. 공부를 하다 보니 너무 싫증이 나 그만 공부를 때려치우고 산에서 내려갑니다. 그런데 산기슭 아래 냇가에서 어느 할머니가 도끼를 바위에 갈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래서 이태백이 묻습니다.


“할머니, 도끼를 갈아서 뭘 하시려는 겁니까?” 
“바늘을 만들려고 하고 있네.”
할머니의 어처구니없는 대답을 들을 이태백은 어떻게 도끼를 갈아서 바늘을 만들 수 있냐고 반문합니다. 그러자 할머니의 사자후와 같은 한 마디가 이태백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후려칩니다.
“중단하지 않는다면야 도끼를 갈아서 바늘을 만들 수 있지.”
마부작침(磨斧作針). 결국 이태백은 산으로 다시 들어가 제대로 된 공부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당대 모방할 수 없는 최고의 시를 써내려갑니다.


모든 일을 제대로 하는 과정은 고통이 따르는 법입니다. 어떤 일을 하는데 고통이 따른다는 것은 그 일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신호이지요. 중도에 포기해버리거나 아예 시작도 하지 않는다면 당장의 고통은 피할 수 있습니다.

참터가 올 하반기에 들어 할 일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수다공방 디자인 공모전이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고, 패션쇼 준비에도 여념이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중요하고 큰 행사들이라 몇 사람의 힘으로 이 모든 것을 이끌어 가는 것이 버거울 때도 있었습니다. 물론 처음 참터가 이런 큰 행사를 시작한다고 했을 때, 부정적인 시선이 압도적이었죠. 그러나 수다공방 교육과 패션쇼는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들어 본 셈이죠. 그러나 마냥 바늘만 만들고 있을 수는 없지요. 이제는 그 바늘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시기입니다.

작년과 달리 올해는 주변에서 관심을 보이시는 분들도 많을뿐더러, 이제는 본격적으로 우리 봉제노동자들이 만든 옷을 당당히 판매하여 소비자의 냉정한 평가를 받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진검승부를 해야 한단 말이죠. 물론 그 길이 쉽지 않지만, 중도에 포기해버리면 지난 시간 동안 도움을 주신 분들의 노력과 수고가 수포로 돌아가고 맙니다.

그렇게 고생해서 만든 바늘로 실을 꿰어 한땀 한땀 수를 놓아 우리 봉제노동자들이 만든 옷이 세상 밖으로 얼굴을 내밀 날까지 너무 기다려집니다만. 그래서 참터는 수다공방 교육생님들과 회원님들의 진심어린 관심과 참여를 너무나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중단할 수 없다면야 함께 끝장을 봐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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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인연

 

‘인연’이라는 게 참으로 묘합니다. 우리들이 맺고 있는 인연은 몇 천 겁(劫)에 걸쳐 단 한 번 이어지는 거라죠. 그 한 번도 짧은 울림으로 시작됩니다. 우리가 ‘필 꽂혔다’고 하는 말이 그런 것이겠지요. 그게 찰라(刹那)입니다.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겁’은 산스크리트어에서 나온 말인데, 겁이라는 시간은 상상이 가지 않는 시간일 겁니다.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각 10km 정도 되는 큰 바위를 상상해보세요. 그리고 어떤 한 사람이 그 바위를 비단으로 스쳐서 그 바위가 완전히 닳아 없어지면 그게 1겁이라는 시간입니다.

 

이에 반해 ‘찰라’는 아주 짧은 시간을 말하는데 이것도 상상이 안갈 겁니다. 2명의 남자가 여러 가닥의 명주실을 팽팽하게 당겨 잡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남자가 날이 매섭게 선 칼로 단숨에 명주실을 자릅니다. 그 때 그 한 번의 내리침으로 명주실 한 가닥의 허리가 끊어지는 그 시간이 64찰라 정도입니다. 누군가 그것을 계산해보니 75분의 1초 정도라고 하네요. 계산한 그 분도 대단하십니다. 여하간 1 찰라에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정해지고 바뀐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는 일은 일생에 단 한 번 주어지는 우주 간의 만남입니다. 그 만남의 시작은 순식간에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많은 인연을 놓치고 삽니다만. 모든 인연을 감당하기는 어렵기 때문이죠. 그래도 단 하나의 인연은 삶이 끝날 때까지 지키고 살아갑니다.

 

가끔씩 참터의 회원이 되십사 권유하다보면 저에게 이런 질문을 많이 합니다. ‘너 그 일을 왜하냐’고요. 심지어 이 일을 돈받고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물론 수다공방에서 만든 옷을 팔러 다닌 적이 있어 ‘보따리 장수’로 생각하셨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여하간 그렇게 물으면 인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인연에는 나쁜 인연이 있습니다. 나쁘게 맺어진 인연은 평생 서로의 골을 파고 상처를 안기며, 증오하고 복수심에 가득차게 합니다. 나쁘게 맺어진 인연은 번식력이 좋아서 증오에 증오를 낳고, 복수에 복수를 낳습니다. 늘 다가올 인연을 맞이하려면 나쁜 인연부터 청산해야겠지요.

 

참터와의 인연. 모든 사람들은 좋은 인연을 원합니다. 인연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만들어지지만, 사람이 아닌 물건이나 사건, 집단과도 맺어지기도 합니다. 그러한 인연은 과학적인 뭔가도 아니며, 다만 숙명에 가까운, 그 분이 오셔서 맺어주는 ‘계시’에 가깝다는게 제 생각입니다만. 농담같은 이야기 같지만 것도 그럴 것이, 좋게 맺어진 인연도 번식력이 좋아서 또 다른 좋은 인연을 만듭니다. 그렇게 만나고, 또 만나서 하는 일들이 인연이 닿아서 하는 일인데 어떻게 그것을 뿌리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인연이 다가왔다면 오랫동안 유지하고 가꿀 수도 있어야 겠지요. 우리 소식지도 그런 인연을 만들고, 가꾸는 소임을 다하려고 합니다. 한 달에 한 번, 우리 소식지가 회원님들과 참터 식구들 간을 잇는 인연의 실타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달콤한 인연으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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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창세기

 

우리『참신나는 소식』이 횟수를 거듭하면서, 창신동 이야기들은 저에게 각별한 의미로 다가옵니다. 오도엽 선생이 만나는 ‘아줌마’들의 ‘가슴앓이’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점점 불편하게 다가왔습니다. 그 가슴앓이가 그이들의 인생에 성장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랜 ‘지병’이자, 삶의 ‘관절염’같은 존재로 늘 자신들을 눌러왔습니다. 그래서 그이들의 삶을 읽으면 읽을수록 답답하고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머리 속에 먹물이 끼어 이제는 씻어도 잘 탈색되지 않는 저 같은 사람은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시다의 고통도, 남편의 폭력도, 외환위기의 충격에도 그이들은 몸부림쳤지만 그런 가시덩쿨을 빠져나오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이들은 오늘 우리와 함께 살아있고, 함께 웃고 있습니다. 그들을 이해하지 못한 것 중 하나는 삶이 자신을 지치게 할 지라도 포기하지 않는 그 정신 때문이었습니다. 그 ‘정신’은 먹고 살만한 사람들이 ‘잘’ 살기 위해 번지르르한 지식으로 칠갑한 가식덩어리가 아니었습니다. 금방금방 포기하고, 새로운 것에 쉽게 현혹되는 저와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매일매일 ‘나는 살아야 한다’, ‘나는 살아내야 한다’고 주문을 외치며 수많은 절망의 손목을 끊어내면서 시퍼렇게 멍든 손발로 미싱을 돌려야 했던 우리 언니, 누이, 형님, 오빠들.
 70년대 혼돈과 폭압의 역사를 뒤집으면서, ‘나’라는 존재는 ‘우리’의 또 다른 표현이 되었고, 그이들의 몸은 ‘한 몸’이 되고 ‘한 정신’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깨달았습니다. 그이들이 창신동의 ‘창세기’’를 연 주인공이며, 우리 봉제의류 산업의 알파요, 오메가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창신동의 역사는 ‘하얀 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미싱바늘에 손가락을 찔려 새 살이 차오르는 고통을 이겨낸 손들이 만든 역사입니다. 그 손으로 조막만한 엷은 가슴이 찢어질 때마다 짜깁고, 또 이어붙이며 이윽고 너덜해졌다고 하지만 이제는 그 마음의 색깔은 오색의 찬란한 모양으로 다가옵니다.

오늘 밤에도 창신동, 아니 미싱 아래 가느다란 바늘에 초점을 모아 한 올 한 올 수를 짓는 이 땅의 모든 창세기 주인공들이 있습니다. 단박에 세상을 열어내진 못하지만 열 번 스무 번 절망을 이겨내며 엮어낸 희망이 비단융단처럼 세상을 빛나게 만듭니다. 그 비단융단같은 세상을 꼼꼼히 지어내는 사람들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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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몸살

감기몸살

 

제 몸을 함부러 다룬 탓일까요. 한 몇 일, 제 몸에 바람이 불고 혹독한 불덩어리가 목구멍을 기어올랐습니다. 아프다는 것은 고통입니다. 고통스러운 시간 동안, 제 몸을 비난하고 미워했습니다. 평생동안 몸과 정신은 서로를 길들여가며, 의견을 맞춰가면서 살아갑니다. 아프다는 것은 몸과 정신이 반목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함께한다는 것이 내 몸에서도 이렇게 어려운데 이 사회는 오죽할까요.


문수사리(文殊師利)가 유마거사(維摩居士)에게 그이의 병이 왜 생겼는지 묻습니다. 그러자 유마거사는 ‘세상이 병들어서 나도 병이 들었다’고 말합니다. 병이 드는 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몸이 제 것이 아닌데 어찌 몸에 드는 고통스러운 물건마저 나만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몸의 병이든, 마음의 병이든, 사회의 병이든 모든 이의 아픔이고, 고통일 때 그 병은 완전히 치유될 수 있습니다.

 

37년 전, 철옹성 같이 버티고 서 한 치도 양보하지 않을 듯한 세상 사이로 제 몸을 불살라 인간다운 삶의 길을 낸 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이의 죽음을 모두의 죽음이라고 생각했고, 결국 모두가 인간으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몇 일전 제 몸이 불덩어리가 된 날, 한 택시노동자가 온 몸에 불을 당겼습니다. 그 또한 우리 민중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흔들 ‘한미FTA’를 반대하여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고 말았습니다. 제 몸을 불살라야 사회적 발언권을 획득하는 사회가 정상적인 사회일까요.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것, 그것도 함께 살아가기 위해 목숨을 던져야 하는 비정상적인 이 나라가 원망스럽습니다. 그이를 설득할 능력도 없이 한미FTA를 과연 했어야 했는지 의문입니다.

 

열사달력의 매일 칸마다 빼곡히 차 있는 열사들의 이름을 보고 있노라면 갑자기 마음 깊은 곳에서 묵직한 뭔가가 올라옵니다. 그 뭔가는 희망도, 절망도 아닌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시대에 대한 분노심과 배반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분노심과 배반감은 쇳불로 벌겋게 달아오른 채 좀처럼 삭아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죽음으로 근근히 획득한 ‘사회적 발언권’을 통한 생존의 소리를 현 정부가 듣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감기몸살에는 걸리지 않았는지, 그런 ‘사회적 질환’을 방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말해도 듣지 않아 생기는 ‘속병’은 늘어만 가고, 들어도 모른 척하는 ‘이명증’은 더욱 심해져가고 있습니다. 감기몸살에 합병증까지. 감기몸살도 정복될 수 없는 병이지만, 이 병을 그냥 방치해 두었다가 큰 병이 되면 수술로도 완치될 수 없습니다.

 

제 몸에는 건강이라는 평화가 다시 찾아왔지만 우리 사회의 평화는 언제 찾아올지 답답하기 그지 없습니다. 이 달의 참신나는 소식을 전하는 마음이 그리 편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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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사랑부터 시작하자

짝사랑부터 시작하자

 

“너랑 나랑 가는 길은 다르지만 한번 끝까지 가보자”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얼마 전 ‘하얀거탑’이라는 MBC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그의 라이벌인 친구에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주인공이라는 작자는 야망에 눈이 멀다 못해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출세욕이 강한 사람이고, 그의 친구는 맹한건지 착한건지는 몰라도 친구의 과도한 출세욕을 경계하지요. 그래서 가는 길이 다를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렇게 서로의 궁합이 절망에 가까운 수준이라도 친구랍시고 깊은 우정을 과시합니다.
프랑스 속담에 ‘관심은 친구를 만들지만 무관심은 적을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정반대의 인생을 산다고 하더라도 ‘관심’이 있다면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말이겠지요. 저 또한 지긋지긋하게 오래가는, 말마따나 ‘안보면 보고싶고 보고나면 이 갈리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만나면 서로 못잡아서 먹어서 안달입니다. 그렇지만 그 친구들은 참으로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무엇보다 늘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 식으면 상대방에게 무관심해집니다. 사랑의 반대말이 ‘증오’가 아닌 ‘무관심’이라는 말이 이해갑니다. 상대방에게 끊임없이 관심을 구하는 경지에 다다르면 상대방에게 관심을 얻게 되고 결국 사랑이 이루어지기 마련입니다. 짝사랑 요거 돈 안들고 상대방을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다는 매력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태껏 우리 ‘참신나는 소식’은 명랑하고 즐거운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근데 고민에 빠졌습니다. ‘참신나는 소식’이 친구처럼 여러분 곁에서 잔잔한 소식을 어떻게 하면 제대로 전할 수 있을까하고 말이죠. 이런 고민의 시작에는 반성도 함께 따르더군요. ‘참신나는 소식’을 ‘라면받침’으로 사용했다는 죄책감. 회개하는 마음으로 우리 소식을 제대로 전하자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면 먼저 짝사랑, 짝사랑부터 하자. 우리 회원들과 독자들을 먼저 짝사랑하자. 관심받기 보다는 먼저 관심을 가지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친구도 되고, 사랑도 받을 수 있지 않을까해서요.
우선 점수를 좀 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참신나는 소식’은 빗질도 하고 옷매무새도 새로 고쳐가며 새단장을 했습니다. 아직은 100만 볼트 ‘삘’이 꽂혀 감전될 정도는 아닙니다. 하지만 조금씩 조금씩 하나하나 수줍게 가다듬기로 했습니다.

 

여러분을 짝사랑하기로 한 ‘참신나는 소식’, 짬이 날 때면 가끔씩 곁눈질해 주세요. 뜯지 않은 봉투 안에 ‘참신나는 소식’은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숨쉬는 ‘참신나는 소식’, 봉투를 여는 순간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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