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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폭력은 있는가?

 

폭력의 합리화


  7살 때쯤으로 기억한다.

  손재주가 남다른 아버지께서 나에게 장난감 칼을 만들어 주셨다. 단단한 형광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그 칼은 친구들 사이에서 부러움이었다. 그 당시 형광 플라스틱을 구하기 힘든 이유도 있었지만, 친구들의 장난감 칼과 나의 장난감 칼이 맞부딪히면 친구들의 칼이 휘어지기 일쑤였고, 나무로 만들어진 칼들은 부러지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는 동네에서 골목대장을 도맡아 할 수 있었다.

  “나를 따르라”에서 느껴지는 의기양양함은 그렇게 어린 마음 속에 ‘작은 영웅’을 만들고 있었다.


  그 칼은 내 몸의 분신과 같았다. 언제 어디서나 그 칼은 내 허리에 꽂혀 있었다. 친구들과 놀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혹은 어쩌다 친구들과 약속이 어긋나 혼자 놀게 되었을 때 그 칼은 나를 심심하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팔랑거리며 날아 가는 배추흰나비는 ‘적’의 대용이었다. 정확하게 겨누어 내리치면 배추흰나비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한 쪽 날개를 잃고 땅으로 떨어졌다. 배추흰나비가 어떻게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확한 칼놀림에서 느껴지는 만족감과 ‘적’을 쓰러뜨렸다는 성취감이 뿌듯할 뿐이었다. 하루 종일 뙤약볕에 시달린 버드나무 가지가 이제는 힘이 겨워 땅으로 축 늘어져 있다. 그 가지는 나의 앞을 막고 있는 ‘적’일 뿐이다. 버드나무 가지의 중간 부분을 겨누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칼부림을 한다. 가지가 꺾여 허공으로 튕겨져 나간다. 또 하나의 ‘적’을 제거하고 난 후의 걸음걸이는 득의만만이다. 하늘 높이 뻗지 못한 이유 하나만으로 가지가 꺾여 버린 버드나무는 중요하지 않다. 그 칼로 ‘적’을 쓰러뜨렸다는 자체가 어린 소년에게는 만족스러울 뿐이다.

  칼 끝에서 무너지는 ‘적’을 보며 그렇게 어린 마음 속에 ‘폭력의 합리화’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아무렇지도 않았다.

  베트남 전에서 람보가 자신의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적’에게 무차별적 살상을 저질러도....영화 ‘영웅본색’에서 주윤발이 성냥을 입에 물고 쌍권총으로 ‘적’들을 아무런 표정없이 죽여도...역사 드라마에서 이성계가 왕권을 노리며 반대편 ‘적’들을 거침없이 죽이는 장면들에서도...영화에서 깡패가 의리나 사랑을 위해 또 다른 깡패인 ‘적’들을 화려한 칼놀림으로 무차별 죽여도...그들은 영웅이고 그 영웅들의 폭력은 정당한 것이었다.

  이미 ‘우리 편’은 ‘선(善)’이고, ‘우리 아닌 편’은 ‘악(惡)’이 되어 있다. ‘우리 편’의 ‘선(善)’은 폭력조차도 의심해서는 안 되는 정당성을 부여받았고, ‘악(惡)’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폭력’ 그 자체도 이미 정당화되어 있다. ‘우리 아닌 편’은 이미 ‘악(惡)’이기 때문이다. 그 ‘악(惡)’은 이미 ‘적’이기 때문이다.


  주변을 돌아 본다.

  인터넷 게임에서 ‘악(惡)’들은 제거될 대상일 뿐이다. 내 손 끝에서 마우스를 통해 가해지는 것은 폭력이 아니란다. 그저 재미일 뿐이란다. 그 뿐이란다.

  인터넷에서 마음에 안 드는 대상들은 ‘악(惡)’이다. 그들에게 가해지는 악성 댓글은 폭력이 아니란다. 그저 개인의 감정일 뿐이란다. 그 뿐이란다.

  더운 여름 날씨에 여성들의 옷차림은 더욱 얇아지고 짧아진다. 여성들의 다리와 가슴을 훑고 지나가는 시선들이 바쁘다. 이것은 폭력이 아니란다. 그저 한 번 보는 것일 뿐이란다. 그 뿐이란다.

  지하철 안에서 자리다툼이 생긴다. 나이가 더 많아 보이는 중년의 어른이 말한다. “나이도 어린 젊은 사람이...”라고 충고하듯 한 마디 던진다. 이것은 폭력이 아니란다. 그저 장유유서(長幼有序)의 미덕일 뿐이란다. 그 뿐이란다.

  장애인들이 이동권을 주장하며 전철의 선로를 점거한다. 지나가던 시민이 한 마디 던진다. “왜 시민들을 불편하게 만들면서....” 이것은 폭력이 아니란다. 그저 시민들의 편의를 위한 것일 뿐이란다. 그 뿐이란다.

  지하철 노동자들이 파업을 한다. 모 방송국 뉴스 시간에 기자가 말한다. “시민의 발을 볼모로....” 이 것은 폭력이 아니란다. 그저 시민을 위한 것일 뿐이란다. 그 뿐이란다.

  이미 ‘나’는 ‘선(先)’이다. 그렇기에 저쪽은 ‘악(惡)’이 된다. 그래서 저쪽은 ‘적’이 된다. ‘적’에게 가해지는 모든 유형의 ‘폭력’조차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나는 개별적 존재들에 대해 이런저런 기준으로 이러쿵저러쿵 따지고 싶지 않다. 모든 것은 나와는 별개로 그 자체로서 의미와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개별적 대상 자체가 상징적 의미를 가질 때에는 나에게 다르게 다가올 수 있다. 대상이 가진 상징적 의미가 무의식적으로 무언가를 강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강요는 폭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어떤 회사의 맥주를 마시다보면 재미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맥주병이나 맥주캔에 시원한 정도를 알 수 있다는 표식이 그려져 있다. 그 표식이 분명히 드러날 때가 그 맥주를 가장 맛있게 마실 수 있는 온도라는 것이다. 어느 순간엔가 나는 강요받는다. 나의 개인적 취향과는 상관없이 그 표식이 분명히 드러날 때 마시지 않으면 별로 맛없게 맥주를 마시는 꼴이 된 것이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그 표식 덕분에 난 둘 중에 하나를 강요받게 되었다. 그 표식을 충실히 따르면 맥주를 맛있게 먹을 줄 아는 사람이고, 그렇지 않으면 맥주를 맛있게 먹을 줄 모르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에게 이 표식은 서비스라는 이름으로 다가오는 무언의 폭력일 뿐이다.


  광화문 도로 한가운데에 서 있는 이순신 장군의 경우도 그렇다. 이순신 장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따지고 싶지 않다. 부족하게나마 내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는 이순신 장군은 적어도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았던 인물이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기에 그 자체가 상징적이어서 나에게 다르게 다가온다.

  이순신 장군은 무장(武將)이다. 이순신 장군의 개인적 인품과는 상관없이 이순신 장군은 ‘무(武)’를 상징한다. 우리에게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때 장렬히 전사한 군인으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무(武)’는 ‘우리 편’의 ‘무(武)’이다. 그래서 그 ‘무(武)’는 ‘선(善)’이다.

  그러나 ‘무(武)’는 기본적으로 (방어적이든 공격적이든) 폭력이다. 그렇다고 ‘무(武)’의 기본 정신이 평화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 속성이 그렇다는 것이다. 더더욱 이순신 장군을 폄하할 생각도 없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은 ‘우리 편의 무(武)’이기에 우리 편의 ‘폭력’을 정당화, 합리화한다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에 대한 숭배(?). 자칫 우리 편의 ‘폭력’을 정당화는 과정을 통해서 폭력의 합리화가 내면화되는 또 다른 과정은 아닐까?

  이순신 장군은 ‘무장(武將)’으로서 이미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기에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은 나의 마음 속에 폭력의 합리화를 내면화한다. 폭력에도 좋은 폭력과 나쁜 폭력이 있다고 말이다. 내가 인터넷 삼국지 게임에서 발휘하는 ‘무(武)’가 폭력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 편의 폭력’이기 때문이다. 과연 그런가? 폭력은 어디까지나 폭력일 뿐이지 않은가?

  내 몸 안에 유유히 흐르고 있는 폭력의 합리화.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에게서 그것을 보는 것은 너무 지나친 것인가?


  ‘나(우리 편)’ 아닌 ‘너(우리 아닌 편)’를 배타적으로 배제하고 대상화하는 모든 유형은 폭력이다. 그 곳에는 개별 존재에 대한 인정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나(우리 편)’의 ‘욕망’이 전제될 뿐이다. 본인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여성의 몸을 훑는 남성의 시선은 그 여성을 욕망 충족의 대상으로 보는 폭력이다.

  좋은 폭력은 과연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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