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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고 비현실적인

진보신당, 진보신당, 요새 진보라는 사람들 입에서 진보신당이라는 이름이 떠날 줄을 모른다. 노회찬과 심상정이라는 두 평등파 스타 플레이어의 분당이 그토록 희망이었던가 보다. 아니면 어떻게든 당이라는 범주 안에 있고 싶어 안달이 난 몸부림이거나(다소 악의적으로 진보신당에 별 관심이 없는 나로선 이렇게 보인다).

 

전진이라는 정파가 진보신당 안에 들어갔고, 소위 계급정당을 준비하는 사람들도 진보신당에 같이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했고, 해방연대라는 정파가 그걸 비난하는 성명을 낸 모양이다. 일종의 사건개요랄까. 참세상에 뜬 두 개의 글은 진보신당이라는 아이콘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듯 많은 리플이 달렸다.

 

사실 두 정파가 어떤 입장을 냈는지는 내 알 바 아니다... 어차피 내가 아는 혁사 정파들 중에 진보신당에 들어가려는 정파는 없으니까. 근데 밑에 달리는 리플이라는 것들이나, 같은 태그를 가진 블로그 포스트라고 뜨는 것들을 보면 쓴웃음이 나온다. 어찌 (의식적/무의식적) 개량주의자들의 레토릭이란 이토록 바뀌는게 없는지...

 

일단 일차적으로 "그래서 너희들이 뭘 하는데"라고 묻는다. 여기선 참 헛웃음이 나온다. 각종 언론에 뜨고 대단한 뱃지나 명함 같은 걸 차고선 으리으리한 성명을 내지 않으면 뭘 하는지조차 모르는 자신의 과문의 탓을 누구한테 돌리는겐지. 혁사 정파들 내부에선 노힘이 중도주의네, 해방연대가 일을 안하네 하는 식의 상호 비난이 있을지라도, 의회주의 개량정당을 희망이라 말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건 일단 인간의 도리가 아니다. 그럼 실제로 현장에서 파업날 때, 네들은 뭐하는데? 의원들이랍시고, 지구당 위원장이랍시고 와서 연설 한 번 해주는 것 정도?

 

그 다음엔 "맨날 구호나 외치지 구체적이질 못하다"라고 비난한다. 구체? 그들이 말하는 구체란 대체 뭔가. 엑셀과 차트, 온갖 통계자료를 들이댄 후 그래서 우리 정규직 보험료에서 좀 떼서 비정규직 좀 줍시다 라고 말하는게 구체? 그들이 보는 구체적 현실이라는게 딱 그 수준이니 그렇겠다만, 아무리 그래도 타 정파가 인식하는 구체적 현실까지 왜곡해서 없는양 말하는 건 좀 수준 이하 아닌가? 구체적 착취의 현장에서 구체적 노동자들과 구체적 투쟁을 허구헌날 벌이는 게 누군데, 누구 앞에서 구체 얘기를 꺼내는건가?

 

백번 양보해서 그들의 정치노선이 구체적이지 못하다는 비판으로 받아들인다고 쳐보자. 뭐 사실 구체적이지 못한건 맞지. 그래서 사노련에선 대중행동강령 같은 실험도 하고 하려던데, 뭐 그것의 충분함이나 부족함 같은 건 일단 차치해 두자. 헌데 구체 없는 추상은 미발전 상태지만, 추상 없는 구체는 뿌리 없는 잡놈이라는 걸 정말 모르는 걸까? 다시 말해 추상을 어떻게 구체화시킬 것인가에는 발전의 여지가 있지만, 아무렇게나 갖다붙인 온갖 '구체'들의 집합체는 아무리 주물럭거려봤자 통일되고 체계적인 세계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걸 구체적인 거라고 자화자찬하고 있는 꼬라지라고는...

 

마지막으로 "때가 어느 땐데 아직도 지하당 놀이나 하고 있냐, 낡았다"라는 비난을 덧붙인다. "때가 어느 땐데 아직도 진보.."라는 저쪽 동네 꼰대들의 상투어랑의 상동성은 그냥 좀 웃긴 수준이고,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꺼내놓는다는 것 자체가 자신들의 개량성과 중간계급적 입맛(정치의식이나 계급의식이라기보단 입맛이라는 단어가 적절하겠다)을 얼마나 잘 표현해주고 있는지는 모르는 모양이다. '볼셰비키 감성'이랄까, '80년대 놀이'랄까 하는 비꼬는 말들이, 자신들이 인간이 가장 고귀해질 수 있었던 시점을 어떻게 모욕하고 있는건지 정말 모르는 것일까?

 

그리고 지금 계급정당 말하는 사람들치고 지하당 만들려는 사람 아무도 없다. 최소한 내가 아는 범위 안에서는. 게다가 지하당이라고 말할 때 대체 무슨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고작해야 서울 1945에나 나오는 그런 상투적인 이미지? 되도않는 혁명적 수사나 찍찍 읊어대면서 뻑하면 총이나 뽑고 이 반동 종간나새끼를 외치는 반공주의적 쌍육년도 초등학교 교과서에나 나올? 1905~1917년까지의 볼셰비키만큼 당내 논쟁과 상호 비판, 정세에 따른 판단의 수정과 대중과의 융합력이 뛰어났던 정당이 있다면 내 눈앞에 제시해 봐라. 그러고 나서야 볼셰비키 놀음이니 뭐니 하는 말을 씨부리시길.

 

근대 인류의 정치사에서 사민주의가 사회주의로 발전하거나 한 적이 과연 있었나? 사민주의는 원래부터 사회주의 패배의 사산아일 뿐이었다. 그 사산을 이제 와서 한국 사회의 대단한 새로운 실험이기나 한 양 씨부리는 꼬락서니도 가증스럽지만, 제아무리 사산아라도 낳아준 에미애비조차 못 알아봐서야 쓰겠는가.

 

전위정당, 노동자 계급, 혁명, 대중투쟁... 이런 걸 8~90년대에 '너무 많이 했다'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해당 시기의 인생선배들이 사실 많이 거북스럽다. 지금 우리의 2000년대를 만든 것이 그것들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너무 적게 너무 어설프게 했기 때문인가. 내가 20대로서 살아가는 2000년대 전에 움직였던 선배님들께서 그렇게 나오시면 속이 대략 더부룩해지는 것이 나도 참 선배 존경할 줄 모르는 습성은 어디 안 가나 보다.

 

'낡고 비현실적인'. 상투적인 비난이다. 시기적 선후행의(따지고 보면 선후행도 거꾸로 뒤집어져 있지만서도) 근거 없는 권위를 잘 써먹는 저들에게 나도 똑같은 걸 써먹어 드려야겠다. 오늘의 20대인 제가 보기엔 '시대가 어느 땐데' '아직도 개량놀음인' '뭘 하는 건지도 모르겠는' '맨날 정책쪼가리만 내세우지 세계관이 결여되어 있는' 당신들이 바로 '낡고 비현실'적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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