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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병과 위생병

피플타임즈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무례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그렇다 -_-;;;

 

왜 피플타임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지는 이 글의 초점이 아니고...

 

그 피플타임즈에서 가끔 괜찮은 글을 본다. 이번 글이 그런 예다. '동지'님의 '상처와 좌파'라는 글이었다.

 

'치유'에 대한 말에 대부분 동의한다.

 

하지만 촛불집회에 대한 생각엔 별로 동의할 수 없다;; 개인적으로 나도 촛불집회에 나갔지만 별로 뭐가 치유되는 것인지 못느꼈기 때문에...

 

그리고 이제는 치유를 코드로 해야 대중에게 다가선다는 것에도 동의할 수 없다.

 

일전에도 쓴 바 있지만 난 기본적으로 운동을 전쟁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그 전쟁에도 위생병이 필요하다는 데에는 반대할 수 없을 것 같다.

 

운동을 하다 보면 굳이 좌파가 아니더라도 지친다. 안 지치는게 이상하다.

 

힘이 되어주는 사람이 곁에 있는 것이 나쁠 리 없다.

 

칼을 든 전사들이 지혜롭게 칼끝을 내릴 필요가 있는 것도 당연하다.

 

전노투 게시판에서 가끔 일어나는 개싸움은 정말 보기가 싫었다;;

 

좀 시사점이 많았던 글 같다.



1. 아시아를 한류가 강타했습니다. 상업적 조작의 냄새가 짙게 풍긴다고 하지만, 상업적 조작이란 것은 "대중의 코드"를 읽었기 때문에 성공하는 거 아닐까요?


2. 피타 오프에서 간만에 무릎을 탁치게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취한데다 딴데 신경쓰느라 꽤 길었던 그분의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는데도 그 단어를 듣는 순간 귀가 번쩍 뜨였습니다. 바로 "힐링"이란 단어.


3. 문화에 무지한 저지만, 주변 좌파들이 극찬하는 혹은 보라고 권하는 영화들의 대부분이 비극적입니다. 반면 포레스트 검프류의 영화들은 혹평을 당합니다.


4. 카프 문학들도 대부분, 피가 철철 넘치거나, 불을 지르거나, 죽음이 등장합니다. 형제는 갈라지고, 개인은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그나마 카프에서는 "저항"을 통해 고통을 극복하는 누군가에 초점이 맞춰지기라도 하지만, 현대의 좌파 문학들은 "저항"마저도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이런 특징을 리얼리티, 혹은 비장미라고 평가하더군요.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런 좌파 문학들이 "상처"를 강조하기 위해 리얼리티와 비장미를 동원하는 것 같습니다.


5. 달콤한 사랑이야기나, 멋진 성공기를 보면 좌파들이 뭐라고 평가할지 뻔합니다. "저것은 마취제이다. 깨어나서 너의 고통을 생생하게 느껴라." 맞습니다. 그것은 마취제에 불과하며 상처는 여전합니다.
그러나 마취마저도 하나의 의료 행위라는 것도 사실입니다.


6. 상처 보여주기는 아마 일종의 좌파의 문화 전술일 것입니다. 상처보여주기를 통해, 분노를 자극하고 결연히 떨쳐일어나기를 선동하기 위한 전술. 그런데 어느틈에 이런 상처 보여주기 전술이 상처에 대한 숭배로 발전해버린 것 같습니다. 상처를 두려워하고, 상처주는 폭력에 대해 분노하고 상처를 치료하기를 이야기 하는 것보단, 상처를 동경하는 듯한 분위기. 그리고 남에게 상처주는 것에 대해 전혀 거리낌이 없는 분위기. 일단 저 자신부터가 그런 것 같습니다.


7. 언어가 의식을 지배한다는 말이 있지요. 전부터 좌파의 이런 상처 문화에 대해 많은 고민과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치료"란 단어 자체를 떠올린 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저와 알고 지낸 어떤 좌파도 상처만 이야기할뿐 치료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힐링"이란 단어에 무릎을 탁친 것입니다. 무릎을 칠 만큼 힐링이란 단어가 제겐 생소하며, 생소한만큼 충격적이었습니다.


8. 꽤 지난 듯 하지만, 붉은 악마 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을 모아낸 행사가 있었습니다. 바로 촛불집회지요. 촛불집회에 많은 좌파들이 당황하고, 적응안되 혼란스러워했었습니다. 아직까지 촛불집회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지요. 저는 촛불 집회에 대한 어떤 정치적 해석과, 이데올로기 부여. 계급적 분석과 상관없이 거기에 참여한 분들이 "좋았다"라고 이야기한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좋은지 "같이 하고 싶어서" 다른 사람들 까지 끌어들일 정도 였습니다.


9. 이 "좋았다"란 말은 혹시, 치료받았다란 말이 아니었을까요? 조용히 타오른 촛불과, 나즈막히(목이 상하지 않아도 되는) 노래를 부르며 느낀 공명. 그게 그들의 마음을 달래주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들을 하나되게 하고 그토록 열정적으로 만든 것은 어떤 "파쇼"나 "민족 감정" "계급적 불만"따위가 아니라, 편안함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요?


10. 인터넷에 떠돌던 수 많은 구호따위가 아니라 촛불을 들고 있는 아이의 차분한 눈망울이 찍힌 사진이 그들을 자발적으로 그곳에 가게한 것이 아닐까요?


11. 이제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단순한 분노와 정의감 혹은 어떤 당위가 아니라 치유의 힘이 아닐까요?


12. 촛불 집회 이야기는 원래 제가 하려던 이야기가 아니니 이만 접고, 좌파의 상처 주기로 다시 돌아가봅시다.


13. 좌파가 가진 검은 너무나 날카롭습니다. 자신의 칼을 좀더 예리하게 하기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 좌파의 숙명인양 갈고 또 갈아왔으니까요. 거기다 툭하면 얻어 터지고, 툭하면 따 당하고 그러니 성격마저 드러워졌습니다. 세상일 뜻대로 된다는 좌파가 어디있습니까? 다들 하루에도 몇 번씩 좌절하며 살고 때론 사는 이유마저 흔들리는 게 현 남한의 "정세"아닙니까. 이러니 다들 그 날카로운 칼을 꺼내놓고 다녀야 합니다.
이러니 좌파가 마주치면 서로 상처를 주는 받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겁니다. 날카로운 칼에 드러운 성격, 거기다 칼을 칼집에서 꺼내 놓고 다녀야 하니 아무리 조심해도 지 몸에 남의 몸에 상처를 주는 건 너무 쉬운 일이며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14. 그래서 더욱 힐링이 필요한 듯 합니다. 상처투성이로 전진해야 할 때도 있는 거지만, 그래서 몇 발자국이나 가겠습니까? 지가 무슨 이반이나 아카도도 아니고.


15. 이깟 상처에 죽기야 하겠냐, 혹은 죽기 밖에 더하겠냐는 호사는 그만 부립시다. 칼의 날카로움은 그만 자랑합시다. 그러다 진짜 죽습니다. 진짜 투사는 "응급처치"와 "자기 보호"에도 능한 법입니다. 이제 치료가 필요합니다. 치료법을 알아야 합니다. 이미 우리는 "진단 딱 나오는" 지랄 같은 시츄에이션에 있지 않습니까.


16. 방금 떠오른 생각입니다만, 그 방법중 하나가 "담에 이야기 하자."식의 논쟁 종결도 괜찮은 방법인 듯 하며, 그게 피타 논쟁의 분위기로 자리잡히면 참 좋을 듯 합니다. 칭찬하기도 좋고, 감싸주기 좋고... 피해야 하는 "형용사"들은 피해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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