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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11/25
    윤도현 교토에서 '강제연행' 박물관 재건 콘서트
    ♨성애의혁명
  2. 2010/11/25
    명품 가방 들고 시위 나선 공산주의자
    ♨성애의혁명

윤도현 교토에서 '강제연행' 박물관 재건 콘서트

11월 27일 일본 교토(京都)회관에서 윤도현 밴드(이하 YB) 콘서트가 열린다. 한국가수가 일본 내에서 공연을 하면 상당한 수익을 내기 위해 대개 도쿄에서 하기 마련인데 YB는 도쿄가 아닌 쿄토에서 콘서트를 개최한다. 게다가 고즈넉한 교토의 분위기와 YB같은 락밴드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게만 느껴진다. 그런데 왜 굳이 쿄토를 선택했을까?

윤도현밴드의 교토 콘서트 포스터.



YB의 이번 콘서트는 일본 교토에 있는 탄바(丹波) 망간기념관 재건을 위한 자선 콘서트다. 탄바 망간기념관은 일본 ‘탄바(丹波)’라는 지역에 있는 기념관이다. 이곳은 1900년대, 약 100년 동안 1만5000~2만개의 갱도가 만들어질 정도로 망간이 다량 매장되어 있는 일본 제1의 망간 광산지였다.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메이지시대에 채광이 시작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대량으로 채굴됐다. 철을 단단하게 하기 위해 사용되는 망간은 철에 보통 3~8%정도 섞는데 총이나 대포를 만들 때는 25~35%까지 섞는다. 망간 함유율이 낮으면 대포를 쏜 후 화력으로 포신이 녹아버리기 때문이다.

망간기념관 외관.



당시 단기간 내에 필요한 망간을 채굴하기 위해 주로 조선인과 중국인이 강제동원되었다. 강제 동원으로 단파지역으로 온 한국인 중에는 한국에서 끌려온 사람들도 있었지만 일본 내에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도 상당수였다고 전해진다. 약 3000명이 가혹한 채굴 노동을 강요당했고 그곳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전쟁 후에도 후유증인 진폐증으로 고통 받았다. 진폐증은 직업병의 하나로 공장 등에서 발생한 먼지가 폐에 끼어 폐섬유증이 생기면서 호흡 기능에 장애를 일으키는 병이다. 숨이 차고 심장 기능 장애를 일으키며 체력이 빨리 소모되고 식욕 부진이 동반하기도 한다.

망간기념관을 찾은 사람들.



‘탄바 망간기념관’의 초대관장인 고(故)이정호씨 역시 이 진폐증으로 고통 받았다. 경제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어려운 환경 속에서 1989년에 탄바 망간기념관은 개관했다. 그것은 일제에 강제 노동을 강요당하는 등 기본적 인권조차 박탈당하면서 비참하게 살아왔지만 억압한 가해자와 억압받은 피해자가 있었다는 역사만큼은 잊지 말고 전해 나가야 할 것이라는 고인의 강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이루어 질 수 있었던 것이다. 고(故)이정호씨가 세상을 뜬 후 그의 아들 이용식씨가 그 뜻을 물려받아 16년 동안 운영해왔다. 개관 초기에는 기부금을 받기도 했지만 운영비에 보태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매년 500만~600만 엔 정도의 적자를 감당하지 못해 2009년 5월 31일에 결국 폐관하게 되었다. 개관한지 딱 20년째 되는 해였다.

망간기념관에 대해 기념관 관계자가 설명하고 있다.



일본 전국의 약 5000 개의 역사기념관과 박물관 가운데 탄바 망간기념관은 전쟁피해자가 직접 세운 유일한 ‘강제연행’ 기념관이다. 독일과 달리 일본에는 ‘전쟁에 의한 가해’의 역사가 남겨진 박물관 혹은 기념관이 한 곳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탄바 망간기념관의 폐관은 더욱 안타깝다.

2008년 말 폐관 소식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기념관을 지키려는 일부의 노력이 있었으나 널리 확산되지 못했다. 그러나 재일동포들 사이에서는 ‘우리’의 역사를 지키려는 노력을 해 왔으며 올해 5월 ‘탄바 망간기념관 재건위원회(이하 재건위원회)’를 발족하게 됐다. 그들의 기념관 재건과 운영 이념은 다음과 같이 건설적이고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하나,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전쟁에 의한 가해의 역사를 남기고 전해간다.
하나, 재일동포와 피차별부락(被差別部落) 사람들이 겪은 피해의 역사를 남기고 전해간다.
하나, 역사를 직시하고 바르게 대응하여 일본과 한반도 사람들 간의 진정한 화해와 우호를 구축한다.


탄바 망간기념관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 1000만 엔이 필요하다. 이에 YB는 흔쾌히 공연을 수락했고 일본 교토에서 공연을 하게 됐다. 그리고 이날 공연의 수익금 전부를 재건위원회에 기증하기로 결정했다.

수십 년 동안 일본과 한국에서 차별 받아온 재일동포들이 외롭게 ‘우리’의 역사를 지켜 나가고 있다. 그런 그들에게 우리는 미안함과 고마움을 느끼곤 한다. 이젠 우리가 말할 차례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그리고 이젠 외롭지 않을 거라고.

일본에서/박성철/인터넷 경향신문 대학생기자 (웹場 baram.kh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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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 가방 들고 시위 나선 공산주의자


사용자 삽입 이미지1968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여성공산주의자들의 시위 현장.이브 생 로랑의 꽃무늬 치마를 입고 보석장신구로 치장한 아가씨가 시위행렬 속에서 단연 두드러졌다. 다음날 신문에 대서특필된 이 여성은 훗날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 프라다의 수석 디자이너가 된 미우치아 프라다였다.

《프라다 이야기》는 1978년 파산 직전의 가업인 '프라다 상점'을 물려받은 미우치아 프라다가 비(非)전공자 디자이너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세계적인 패션 기업을 일궈낸 과정을 들려주는 평전이다.

저자에 따르면 미우치아 프라다의 성공 비결은 기존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 창조적 도전과 휴머니즘이다. 그는 대학 시절,공산주의자는 화려한 옷을 입으면 안 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명품을 걸친 채 시위에 참여했다. 패션업계에 진출한 뒤에는 명품 가방은 최고급 가죽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아무도 패션 소재로 사용하지 않았던 낙하산 천으로 가방을 만들어 세계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의류 쪽으로 사업 영역을 넓힌 뒤에도 그의 도전은 계속됐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옷이 대세였던 당시 그는 "옷은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입는 것"이라며 단순하고 편한 옷을 선보였다. 패션업계 전문가들은 혹평했지만 여성들은 '편하지만 결코 촌스럽지 않은' 프라다의 옷을 선택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운명의 파트너 베르텔리와의 만남과 사랑,둘이서 이룬 명품 신화의 창조과정과 열정도 책에 담겨 있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0072134711

 

아직까지도 배고프고 불쌍한 모습으로 시위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위에글 에 나오는 1968년도에나 존재했던 .. 사치라고 말했던 그 사상 말이다. 거리에 왜 나오는가?? 나와 우리의 메세지를 시민들에게 전달하려고 나오는 것은 아닌가?? 그럴려면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를 보게 만들어야 하는데.. 그 배고픈 코스프레의 투쟁 얼마나 흥행했나?  현실은 너무나 신기해서 좀 쳐다보고 말거나, 아예 관심 없거나 ,무서워 하는게 대다수 였다..밖에서 당신들의 투쟁을 시민들 옆에서 지켜본 그 결과는 그랬다.. 그런 현실은 모른체 세상을 바꾸겠다고하니.... 시민들을 사로잡을 마케팅은 없이..나가서 무작정 '투쟁'만 외치니.....68년도에도 얼마나 시민들이 구질한 모습에 짜증냈으면 저 마케팅이 통했겠나??(진보슈퍼맨,꼴통 아저씨 이글보고 또 그러겠지..그럼 명품입고 나가서 투쟁해야 하냐고.....너 외모지상주의자 냐고....보수꼴통들만 왜곡하는게 아니야.. 남의뜻을).. 그래..그런식으로 또 나한테 자본주의, 노빠 라고 비난을 한다면.. 남들이 보지도, 듣지도 않을 투쟁 할바엔... , 나 명품하나 대여해서 집회 가렵니다..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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