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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평론 29호_억압된 좌편향 상식들을 찾아서: 일상의 문화정치와 지금 여기 좌파 정치학


최세진, 『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 감춰진 것들과 좌파의 상상력』, 메이데이 2006.

 

 

억압된 좌편향 상식들을 찾아서: 일상의 문화정치와 지금 여기 좌파 정치학

 

 

 

너부리 (진보넷 블로거 http://blog.jinbo.net/neoburi)

 

 

 

오랜만에 ‘신나는’ 운동/욕망과 일상적 문화정치에 강조점을 찍은 ‘운동권’ 책이 나왔다. 여전히 우리 사회 ‘좌파’ 혹은 ‘진보’진영이 창백한 금욕(의 과학/운동)과 당위에 찌들어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최세진의 『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는 ‘운동’에 깊숙이 관여했던 저자의 ‘나’(확장해서 ‘우리’)를 춤추지 못하게 만든 운동 방식들에 대한 성찰이자 신나는 욕망의 좌파 정치에 대한 탐색이기도 하다. 덜 억압적이고 좀더 해방적인 딴세상을 여기로 가져오려는(bring elsewhere home), 20세기의 여러 움직임들을 다시 방문하여 고찰하는 작업이기도 한 이 책은 ‘운동권’ 저자의 ‘운동권’ 책을 넘어간다. 이 책은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편파적 왜곡과 숨김)의 결을 거슬러 우리네 일상을 파고든 문화-정치를 ‘편파적’‘으로 읽어낸 흥미로운 글들로 이루어졌다. 저자의 좌편향적 독법은 모든 읽기가 근본적인 의미에서 편파적이고 정치적이며, 읽기/해석이야말로 변혁을 위한 투쟁들의 가장 중요한 지점들 중 하나이자 그 출발점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지배이데올로기가 그토록 숨기려고 하는 것들, 숨기기 위해서 확대하고 축소하는 부분들이 무엇인지를 관찰하는 것, 그리하여 그 저류에 흐르는 지배의 불안, 그리고 불평등하게 경합중인 힘들과 욕망들의 관계들을 읽어내는 것. 좌파의 상상력은 바로 이 지점들에서 작동(해야)한다.

 




일상과 재현: 유물론의 분석지점, 좌파 정치의 민주적 실천들의 핵심 지점

 

일상생활은 유물론의 장소였으며, 욕망을 포함하여 우리의 일상을 조직하는 것들은 이론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었던 지점이었다. 머리말에서 혁명의 시간은 바로 오늘 지금 여기라는 점을 뒤늦게야 깨달은 과정을 짧게 서술하면서 저자는 “혁명은 나날이 계속되는 일상 속에, 지속되는 삶 속에서 계속되고 있었고,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었”(9)다고 밝힌다. 혁명은 부엌에서부터, 혁명은 일상에서부터라는 뒤늦은(belated) 깨달음은, 예컨대, 1부에서 게임에 대한 흥미로운 분석을 통해서 일상분석의 중요성을 다시금 강조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맑스주의 분석의 강조점이 주로 (생산)체제였다면, 이 책은 1부에서 그 체제를 가능하게 하며 그 체제가 강요하고자 하는 일상의 모습을 게임을 통해서 다시 본다. 좌파 활동가인 저자가 자신의 활동 경험으로부터, 그리고 부분적으로 성공하고 결국은 역사적으로 실패한 20세기 크고 작은 혁명들과 사회운동들로부터 다시 배운(unlearning) 것은 이렇다. 거대한 지배 구조는 미시적 영역들까지 파고들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 주체란 미시적인 일상 영역으로부터 형성되며 바로 그 영역에서 다시 다르게 형성될 수 있다는 것.
1부의 게임 분석들은 얼핏 보아 게임들 속에 농밀하게 녹아 있는 자본주의 세계(관) 비판이지만, 이 분석들의 심층에는 재현투쟁이 존재한다. 저자가 보기에, 주로 90년대 후반이후 우리 사회에도 유행했던 게임들은 오락상품의 장사(경제)를 통해서 관념의 장사(지배 이데올로기)가, 다른 무엇보다도 더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즉, 우리는 아주 재미나고 즐겁고 때로 중독에 이를 지경으로 지배 이데올로기를 당연시하게 된다. 오락을 즐기면서 말이다. 지배는 우리에게 고통을 가함으로써만이 아니라 우리를 즐겁게 함으로써 억압하고 착취한다. 그리고 이 즐거움과 지배가 별 개인 것 양 착시적 인식을 부추긴다. 게임 속에서 재현되는 세상은 게임 속이기 때문에 현실과는 별개인 별세상 같다.
게임은 현실의 권력관계를 좀더 폭력적으로 재현, 투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이버 게임세계는 지금 여기의 더 악화된 현실, 그러나 ‘당연’한 것으로 ‘정당화’된 현실이다. 또한 그것은 게임을 더 잘 하기 위해서 자기 주머니를 털리면서 때로 중독적으로 ‘학습’하고 ‘연습’해야 하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게임인가? 혹은 게임들에 재현된 세계들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으며 매우 편파적이라고 비판하는 것인가? 아니면 이미 우리의 일상 깊숙이 들어온 게임을 의식적으로 (힘겹게) 거부하는 것인가? 게임을 그만 두면 끝!인가?
게임처럼, 우리들이 가장 재미있어 하는 것, 그 재미 때문에 그 안에 적재된 가치들, 이데올로기들을 거의 의심하지 않도록 유통되는 것들. 바로 이런 것들이야말로 지배적 가치들이 아무런 의심 없이 당연한 것으로 재가공 되고 재생산되는 가장 강력한 재현투쟁의 지점이다. 그리하여 재현에 관해서는 끊임없이 문제제기 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상상력”(38)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억압된 좌편향적 상식을 찾아서: 예술과 정치

 

재현 투쟁이 가장 강렬하게 일어났던 예술장르는 바로 SF였으리라. 좌편향 작품이든 우편향 작품이든 간에 SF계열의 작품들은 지금여기(혹은 그때 거기, 즉 작가들의 지금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 가정법을 사용하여 다른 세계를 그린다. SF장르에서 재현되는 딴세상(elsewhere)은 지금여기의 다른 판본이라는 점에서 SF장르는 매우 사회과학적이고 정치적인 장르다.
흥미롭게도 (그리고 동시에 당연해 보이기도 했던 점은), 미래를 담보삼아 현재를 다르게 보는 작업으로서 SF 작가/작품들은 소위 전통적 영문학 연구의 정전 대열에서 종종 누락되곤 했었다. 특히 저자가 좌편향 계열로 뽑은 작가들은 (부분적으로 당대엔 잘 팔렸을망정) 이제는 거의 연구되지 않거나 학부, 대학원 수업에서 (즉 재생산의 핵심지점에서) 읽히지 않는 작품들이다. 쓰기에도 정치학/정치성이 있듯이, 읽기(를 통한 전통 설립, 그리고 그 전통의 확대재생산)에도 정치가 가동되기 마련이니깐. 저자가 거론하고 있는 작가들 중에서 최근 페미니즘 연구와 더불어 풍성하게 재발견된 작가로 어슐라 르 귄과, 필립 딕 정도가 현대문학을 전공하는 영문학 박사과정들의 논문예비시험 목록에 한두 권 들어가는 정도랄까. 또한, 더욱 강력하고 거대한 영화산업이 SF 작품들을 더 많이 써먹었다는 점은, 제도로서 문학의 불안과, 영화에 대한 질투를 부추겼으리라. 제도로서 문학은 고급문화/대중-저급문화라는 위계적 구분을 통해서 그 특권을 유지해 왔으며, 역사의 큰 흐름과 영향력이 문학/문자매체에서 영화/시각매체 쪽으로 기울어버리자 부분적으로는 마지못해서 그렇지만 재빨리 영화텍스트를 문학연구의 한 ‘분과’로 잡아놓으려는 담론적 정치게임도 있었고.
2부는 종종 주류 담론들에서 부정되어(책 부제를 따르자면 “감추어진”) 온, 예술의 정치성을 다시 보는 글들이다. 국시가 반공이었던 시대에, 어떤 한 부분만 강조되어 가르쳐진 현대 예술사의 거장들을 다시 보면서, 이들이 우리 시대 소비되어 온 이러저러한 사건들과 연결하는 2부의 글들은 ‘아름다운 것은 비정치적(transpolitical)이다’라는 (주류/부르주아) 미학 이데올로기의 은근한 가정을 후려친다. 사회주의 편향의 예술가들과 (전체주의적) 사회주의 정치 간의 긴장을 보여주는 대목 또한, 사회의 각 부문(여기서는 예술)이 정치에 기여하는 방식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꿈, 유토피아, 다른 생각들의 저장고이자 생산지이기도 한 예술은 정치에서의 대의(representation)만큼이나 중요한 재현(representation) 투쟁지이다. 이 중요성을 간파한 정치가 예술을 제도 정치에 종속되도록 강제할 때 일어났던 좌파 정치의 억압적 퇴행, 창조라 불리기도 하는 몽상의 시간과 여유를 확보해야 가능해지는 것인 예술의 ‘중산층성’을 노동계급 혹은 사회주의 정치의 이름으로 부정할 때 일어나는 예술가 억압, 그리고 차후 다른 맥락에서의 사후 복권 역시 (사회주의에서도) 재현과 상징투쟁이 매우 중요한 지점이라는 것을 일러준다.
존 레논, 피카소, 첨바왐바가 보여주듯, 사람들은 어떤 획일적인 잣대나 주의, 당위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자신의 힘이 닿는 한에서 ‘운동’을 한다. 필요한 것은 당위가 아니라 (당위는,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누구나 잘 알고 있다), 자신의 위치(location)에서 따로 또 함께 춤추면서 세상을, 스스로를 변혁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변혁은 남들을 억압하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저자도 20세기의 역사에 대해서 일갈하고 있는 대로, “누군가를 억압해야만 가능한 혁명이라면……결국 또 다시 누군가를 억압하는 사회”를 만들어내는 그런 비혁명이 되고 만다(9).


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 신나는 혁명, 욕망과 열망의 정치를 향해서

 

2부에 거론된 예술가들은 각자 자신이 처한 정황 속에서 협상(negotiate)하면서 (예술을 통해서) ‘운동’을 했다. 또한, 이들의 ‘운동’은 다시 예술가들이 속한 정황 속에서 재평가되고, 그 예술가들의 작품들이 후에 다르게 소비되는 정황 속에서 다시금 재평가된다. 히틀러와 니체에게 그리고 독일 민족과 이스라엘인들에게 바그너가 다른 의미였듯이, 40년대의 피카소, 60년대의 존 레논, 일본의 하야오와 한국에 건너온 이들은 다르게 소비된다. 또한, 예술가의 애초 (정치적) 의도가 진보적이었다고 할지라도, 다른 맥락, 다른 나라에 소개, 소비되는 순간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저자가 꼽고 있는 대로, 체 게바라의 ‘남성성’이 한국의 하이트 맥주에도 이용될 정도로, 자본주의 상품화 전략에 유리하게 다시 이미지화되어 팔리는 현상은 자본이 그 애초의 저항성을 탈색하여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부합되는 방식으로 전유해먹는 탁월한 예일 것이다. 지배적인 문화는 잔여적 문화(과거의 혹은 사그러들고 있는 문화)와, (예컨대 청년문화들에서 곧잘 보이는 저항성 짙은) 부상중인 문화를 자기 이익에 유리하게 융합하는 데 있어서는 최고로 영악하다. 잔여적인 문화의 경우 주로 향수심리를 이용하여, 부상중인 저항문화의 경우는 그 저항성을 탈색하여. 그리고 자본은 이윤을 창출할 수 있다면 “혁명전술도 팔아”먹을 뿐만 아니라, 저항의 동기이자 원동력인 고통도 자기에게 유리하게 재전유 한다.
예술이 사회적 억압과 검열에 맞서는 방식들 중 하나는 꿈처럼 상징과 압축, 치환을 사용하는 것이다. 꿈은 의식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서 대상을 슬쩍 바꾸고 여러 가지를 한 가지 속에 압축하며 다른 상황인척 연출하면서 비스듬하게 억압된 욕망을 표현한다. 꿈처럼 예술도 검열을 피하고자 딴청을 피우는 듯 하면서 검열을 포함한 사회적 억압을 비스듬하게 (즉 아는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 있게) 비판한다. 3부에서 저자가 다시 쓴 노래검열사는 군사독재 시절의 억압과 지배계급의 불안심리가 작동하는 방식을 재미나게 짚어낸다. 금지곡이 된 노래들/가수들의 사연을 다시 보노라면, 정당성 없는 지배계급의 불안이 얼마나 뿌리 깊은 것인지를, 그리고 지배계급이 불안할수록 억압도 일상 깊숙이 침투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내가 불안한 만큼 남들을 족치는 것이다.


새로운 광장/매체의 출현과 좌파 운동

 

나로서는, 4부에 실린 글이 가장 흥미로웠다. 2002년 광화문 촛불 집회를 네티즌 정치의 한 폭발점으로 정리, 분석하고 있는 4부의 첫 번째 글은, 새로운 매체, 그것도 소수에게만 향유되었던 정보가 다수에게 거의 동시에 전파될 수 있는 인터넷 매체가 등장했을 때 어떤 변화와 움직임들이 일어났는가를 보여준다. 또한 새로운 매체(정보의 동시적 대량 보급을 가능하게 한 인터넷)의 등장으로 새로운 움직임들이 가능했던 초기와 달리, 그 새로이 부상한 매체가 일상화되면서 부상 당시 가졌던 급진적 폭발력이 조금씩 상실된다는 점 또한 잘 관찰하고 있다. 근현대 역사에서, 매체의 “민주적” 보급 및 일상화 과정은 거의 대부분 자본의 매체 독점 내지는 상품화로 귀결되는데, 인터넷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럼에도,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매체로서 인터넷 공간에 대한 투쟁 역시 절박한 개입들과 상상력 넘치는 실험들을 필요로 하는 지점이다. 저자 역시 지적하는 대로, 인터넷의 일상화는 진보진영의 케케묵은 주체관(운동주체와 시민주체들의 분리)과 활동방식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비가시적이지만 분명한 정치적 주체들(이자 진보운동의 공동주체로 인식되어야 할 이들)인 네티즌의 등장은 대중 혹은 민중을 앞세워 오프라인 중심성을 고수하는 좌파 정치의 참을 수 없는 무거움과 굼뜸을 질타한다. 네티즌들은 당위가 아니라 설득을 요구하며 스스로를 대상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주체화하는 새로운 시민의식의 등장을 보여주기도 한다. (물론 모든 네티즌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10여년 간 네티즌의 변화과정이 부분적으로 이런 양상을 띤다는 것이다.) 네티즌은 소위 ‘진보’진영에 대해서도 내부로부터의 민주주의를 요구한다. 남을 향한 비판이 넘치는 동안 자기 안의 비민주성은 은폐되면서 여전히 지속되고 있지 않은가? 네티즌의 등장과 더불어 우리 사회에 성찰성과 책임성이 비판의식에 핵심어로 쓰이기 시작했다는 점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그럼에도, 진보진영 홈페이지를 보면 상대적으로 조용한 경우가 많다. 지역간 연결, 상호교육 및 교환을 통한 끊임없는 연대는 인터넷을 외면하고서는 더욱더 어려워질 것이다. 성차별주의, 연공서열주의, 조직보위중심주의, 동네골목대장주의(노선, 전망, 정치적 기획이랄 게 없는 정파간 알력다툼), 가족주의 등 온갖 부분에서 진보진영의 후진성은 인터넷 (정치)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이에 대한 자세한 예는 4부 두 편의 글을 보실 것).


일상에 대한 전복적 상상력: 세상야사적 읽기를 넘어서

 

전체적으로 이 책은 누구나 읽기 쉽게, 그리고 재미나게 쓰였다. 이 책의 최대 미덕은 쉬운 이야기, 일부러 어렵게 하려 들지 않고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풀어 쓴다는 점이다. 지배의 결을 거슬러 그 결 속에서 부분적으로 감추어지고 의도적으로 확대/축소된 것들을 끄집어  내어, 사람들이 널리 알고 있는 ‘상식’ 밖의 상식(나라면 ‘좌편향적 상식’이라 부를)을 짚어낸다. 농담컨대, 이러한 저자의 ‘편파적’이면서도 탁월한 (읽기)능력으로 인해 저자는, 아마 혁명이 일어난다면, 숙청 1순위가 되지 않을까 싶다(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하고, 국어사전/상식에서 제외된 것들을 말함으로써 사람들을 선동(incite)[정치의 1차적인 과제]하는 자들은, 20세기적 혁명이 이루어진 첫날 숙청당했다).
문화와 정치, 자본과 문화를 연결하여 비판적으로 읽어내는 글들을 모아놓은 이 책은 관념의 장사(지배 이데올로기) 곁에는 언제나 상품의 장사(경제)가 있다는 점을,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우리 일상에 깊숙이 침윤되어서 지배가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만든다는 점을 보여준다. 저자가 “일상에 대한 전복적 상상력”(9)과 좌파적 상상력(부제)을 내내 강조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기존을 바꾸는 일은 기존을 다르게 보는 것, 즉 상상력에서 시작된다. 맑스의 표현을 빌면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겠지만, 이를 위해서는 지금 여기를 지배적 관념들과 가치관들로부터 가능하다면 멀리멀리 떨어져서 다르게 보는 것이다. 80년대 프레드릭 제임슨도 <인식적 지도그리기>라는 논문 말미에서 이미 통탄한 바 있듯이, 좌파에게 부족했던 것, 좌파에게 절실한 것은 바로 상상력이다.
두어 가지 아쉬운 점은, 이 책에서 관념의 장사 곁에 상품의 장사가 결합하는 방식이 육체의 장사(성/젠더/섹슈얼리티)라는 점은 잘 분석되지 못했다. 저자가 남자이니 그러려니 하겠지만, 체 게바라의 낭만화 된 혁명적 남성성이 소비되는 방식들에 대해서도, 남미의 혁명들에 대한 소개에서도, 게임들과 로봇들에 대한 분석에서도 그 안에서 작동되는 젠더 권력 문제와 성차별주의를 유심히 본다면 지금 여기 지배의 방식들을 더욱 유물론적으로 분석할 수도 있었으리라.
저자의 ‘편파적’ 시각이야 나무랄 것 없지만, “그래서 그들은 사회주의자 혹은 좌파였다”는 사실을 소개하는데 머문다는 점은 매우 아쉽다. 억압된 사실들을 밝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부제가 시사하는 대로, “감추어진” 것들은, 미국의 페미니스트 작가 애드리안 리치라면 “지성의 훈련을 받은 가늠”(educated guess)이라 했을, “상상력”을 요구한다. 이러한 것으로서 저자가 말하는 상상력은 역사적 망각에 맞서는 대항기억(countermemory)이다. 대항기억으로서 (좌파) 상상력은 지배적 학문과 이데올로기가 감추고자 하는 다양한, 종속된 지식들을 발굴한다. 이런저런 명망 있는 예술가들이 반전주의자, 사회주의자 혹은 좌파였다는 점에 은근한 강조점을 찍는 글들(1부의 일부, 2, 3부)은 이러한 억압된 좌편향 사실들을 엮어서 지금 여기를 비추어 보는 “종속된 지식”들로 나아가지 못한 채, “오호~~ 이런 거였어?” 하고 어떤 (좌편향) 정보를 얻고 소비하는 데 그치게 한다. 저자의 좌편향적 읽기/상상력이, 거론하고 있는 예술가들/사건들/상황들의 현재성을 적극적으로 밝히는 쪽에 무게를 두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감추어진 것들이 좌편향 정보로 소비되고 나서 제기되는 ‘그래서?’(so what)하는 냉소적 질문에 감정이입(empathy)과 연대(compassion)를 끌어내는 읽기의 정치가 가동되기는 어렵다. 감추어진 것들을, 세상을 달리 보는 지식들로 구성하고, 재발견된 종속된 지식들이 지닌 현재성에 대한 해석이 필요하다.
이 책에서 노정되는 이러한 정보적 글쓰기 혹은 ‘세상야사’적 글쓰기는, 부분적으로, 저자의 사회주의/좌파 선호적 독법에 기인한 듯하다. ‘세상야사’적 글쓰기(이 책에 실린 글들 중 상당 부분은 노동자의 힘 기관지 『노동자의 힘』“세상야사” 코너에 연재되었던 것이다.)가 보이는 “사정이 워낙은 이러했다” 식의 대안적 풀이(description)에서 그친다. 저자의 좌파(선호)적 시각 자체를 나무랄 뜻은 전혀 없지만 (오히려 나는 편파적 시각이야말로 객관적 시각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주의나 혁명(의 나라들)에 대한 선호적 독해보다는, 거기와 여기, 그때와 지금의 특수성과 연결성을 동시에 부여잡고 씨름하는 교섭적인(negotiated) 독해가 더 많을수록 더 좋다고 생각한다.
페미니즘도 연대와 불충(내부비판)을 통해서 정치적으로 그리고 이론적으로 진화해 왔다. 한국인 페미니스트로서 나도 (서구) 페미니스트 저작들을 기본적으로는 선호적으로 읽지만 동시에 비판적으로 읽을 수밖에 없다. 나의 정황(situation), 이해관계, 욕망 등에 따라서 달라지는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경험들, 이웃의 경험들로부터 배우되, 배우려고만 하는 자세는 좋지 않다. 특히 우리 사회 좌파들에는 혁명의 나라들, 사회주의 경험이 있는 나라들의 인사들에 대한 묘한 선호감(을 넘어 종종 숭앙심)이 매우 강하다(예컨대, 노암 촘스키의 미국 비판 발언이 톱기사로 뜨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을 것이다. 혹은 우리나라 상황에 무지한 서구 사회학자들―예컨대 월러스타인―에게 한국 상황에 대한 ‘고견’을 구하는 엘리트-([친]좌파-)지식인들의 특이한 식민성). 특히 맑스의 저작들은, 의식적으로는 아니라고 할진 몰라도, 거의 ‘경전’수준에서 다루어지곤 한다. 또한 외부에 대한 비판은 과잉일 정도로 넘쳐나도 ‘우리’ 자신에 대한 비판은 ‘우리’ 사이의 온갖 위계적 관계들에 막혀서, 여기에 우리 자신의 공모적 욕망까지 합쳐서, 종종 마비되곤 하는 상황을 자주 보았다. 우리가 집단적으로 외치고 실천하려하는 민주주의란 집단 간에만 실천되는 것이 아니라 집단 내부로부터 실천되어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약력을 보니 민주노총 정보통신부장으로 약 10년을 일했던데, 다음 책은 저자의 활동 경험을 토대로 한, 일종의 축소판(90년대 후반 2천년대 초) 운동사면 어떨까하고 상상해 본다. 적극적으로 연루해 활동했던 이들이 직접 쓴 일종의 ‘운동사들’이 축적되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에서이다. 한국 20세기 사회운동들의 역사는 너무나 많이 억압되어 왔고 너무나 덜 쓰였으며 그리하여 왜곡된 편견들이 ‘상식’으로 통용되었다. 4부의 첫 번째 글도 논문(chapter) 판본의 운동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어디에선가 이런 작업들이 이루어지고들 있으면 차후 우리는 공식역사가 외면하는 다른 이야기들을, 더 많은 다양한 이야기들을 보고 듣게 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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