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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자치정책센터 지음,『풀뿌리는 느리게 질주한다 - 자치운동의 현재와 미래』(갈무리, 2002)

“민주주의라는 나무가 자라려면 그 뿌리가 튼튼해야 하고, 그 뿌리를 이루는 것이 바로 ‘시민자치운동’이다. 뿌리에서 뿜어올리는 영양분 없이는 아름다운 꽃도, 푸르른 잎새도, 빼어난 줄기도 있을 수 없음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진중권은 『풀뿌리는 느리게 질주한다 - 자치운동의 현재와 미래』(갈무리, 2002)의 표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그런데, 정말 자치운동은 뿌리일 뿐일까? 아름다운 꽃이랑 푸르른 잎새랑 빼어난 줄기는 다른 데 있을까? 본의는 아니었겠지만, 난 이 소개글이 이 책을 제대로 소개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이 이야기하는 자치운동은 작은 풀꽃이다. 뿌리뿐 아니라, 잎도 줄기도 꽃도 다 갖춘 작은 풀꽃이다. 해바라기나 코스모스처럼 사람들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키큰 꽃들이 아니라, 땅바닥에 붙어사는 짐승들, 곤충들에게 정작 소중한 작은 풀꽃이다.
이 책이 안타까워하는 현실은 “지역 사람들끼리 모여도 지역 현안 얘기할 때는 하품하다가 대선 주자들의 동향과 같은 전국적 이슈, 9·11 테러 같은 세계적인 정세에 관해서 토론할라치면 밤을 새며 불꽃튀는 논쟁을 전개”하는 현실이다. “한편으로 그 관념성 탓에,” “다른 한편으로 중앙파적 사고 탓에” 실천적인 실용주의 정신이 질식하고, 탈중앙적 활동이 천시받는 우리 운동의 현실이다. 이 책은 단언하기를 “관념성과 중앙파적 사고, 정확하게 이 둘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계급이니 민족이니, 민중이니 시민이니, 진보적 민주주의니 사회민주주의니 사회주의니 하는 대립적 개념들도 동전의 양면일 따름이다. “90년대 <경실련>과 <참여연대>의 운동은 인간에 대한 신뢰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인간을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제도 바꾸기로 전환된 것이다. 옷을 바꿔입긴 했지만 80년대 변혁론의 관점에 그대로 서 있는 것이다.”
이미 2년 전에 쓰여진 책인지라, 이 책이 소개한 사례들은 이미 많이 전파되었으며, 더욱 희망적인 사례도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 마포 성미산 사람들이 그렇고, 뉴타운 광풍에 맞서고 있는 풍동 지구도 그렇다. 전국을 뒤흔든 삼보일배도, 부안 방폐장 반대 투쟁도 지리산 사람들과 공동체와 부안 주민운동에 빚지고 또 빚갚고 있는 운동이다. 그런데, 이런 유의미한 사례들은 만들어지고 전파되지만, 그 사례들로부터 이 책이 끄집어내려던 이야기들은 얼마나 전파되고 있을까? “낮 시간을 지역사회 밖에서 보내야 하는 남성들은 반일시민(半日市民)이고, 지역에서 생활하는 전업주부인 여성이 전일시민(全日市民)”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사회적인 변화가 서서히 이루어지는 반면, 관여하는 개인의 일상이 아주 혁명적으로 변한다는” 것을 자랑하는 자치운동의 가치는 얼마나 전파되고 있을까?
그래서 이 책에 소개된 사례가 아니라, 이 책이 말하고자 했던 가치들, 그리고 그 가치들을 품고 키워가는 사람들이 모인 시민자치정책센터(http://www.grassroot.or.kr)라는 단체를 우리 지구당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민주노동당 관악갑지구당 소식지 창간준비 2호
1975년 6월 19일, ‘평등·발전·평화’를 캐치프레이즈로 한 세계 여성대회가 멕시코시티에서 열렸다. 유엔이 정한 ‘세계 여성의 해’ 행사의 일환으로 열린 대회에는 반다라나이케 스리랑카 총리와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 테레슈코바 등 세계 138개국에서 2000여명이나 되는 여성들이 참석, 성황을 이뤘다.
그러나 여성의 지위 향상이라는 공통의 목표는 같았지만 국가마다 여성이 처한 상황이 달라 관심분야에 큰 편차를 보였다. 여성대회였음에도 35명의 대회 최고위직 중 여성은 사무총장이 유일할 정도로 주요직을 남성들이 차지한 것도 문제가 됐다. 특히 멕시코는 남성을 대표로 파견하고 그를 대회 의장으로 선출해 빈축을 샀다.
첫 대회인 탓에 눈에 띄는 성과는 거두지 못했지만 세계 여성이 처음 한자리에 모였고 미스·미세스로 불리던 여성을 ‘미즈’로 통일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대회였다.
- 조선일보 2003년 6월 19일자 중
그렇게 쓰고 있으나, 이 대회는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부르주아 여성의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하는 이상의 수준으로 나아갔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남성과 여성 사이의 평등을 이루고 교육과 기회의 제공과 경제적 권리에서 성차별을 받지 않도록 세계행동계획(a World Plan of Action)을 채택하였던 정도의 성과는 있었다.
UN 여성대회가 본격적으로 성주류화의 관점으로 나아간 것은, 나이로비의 제3회 대회였으며, 이후 제4회 북경대회에서는 더욱 발전된 행동강령을 작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목련, 혹은 미미한 은퇴
- 마종기
1
젊은 봄날에 우리는
먼 외국에서 도착했다.
구식이 된 거리의 실내악.
집 잃은 사람은 구라파로 가고
목련이 구름처럼 피어 기가 질리던
그 계시의 영상을 믿기로 했다.
이사 온 나라는 달기만 해서
목련의 색깔은 더 엷어지고
시계 초침 소리는 더 빨라지고
나는 몸을 감추기 시작했다.
단번에 칼처럼 매워지고 싶었지만
정신 나간 목련은 계속 피면서 지고
여름이 되기 전에 맨발이 되었다.
나는 가벼운 물에 떠돌기 시작했다.
2
당신이 같이 걸어주어서
내 길이 얼마나 험했는지
나는 끝까지 모른다.
당신의 이마에서 눈과 목으로
가슴으로, 배로, 그 밑으로
상처 자국의 다리를 쓸어내려도
황막하게 슬프지 않은 곳 어디 있으랴.
젖어서 시리지 않은 곳 어디 있으랴.
지도를 펼쳐보면
기억 나니? 오래전
그 큰 나무 그늘에서 나를 부르던
미열의 연보라색 눈동자.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다 알 수 있게 되었다.
당신이 혹시 쉬고 있는 목성과 토성 사이.
오늘도 당신에게 가지 않았다.
아무리 울어도 표나지 않는
비 오는 날에 보는 목련꽃 벗은 몸.
3
평생을 어딘가에 취해 살았다.
행방이 묘연한 내 살림살이.
꽃을 먼저 피워 날리고 난 후에야
뒤늦게 나뭇잎을 만들어 달고
꽃씨 간직할 방도 마련하기 전에
아이들은 차를 타고 제각각
어색한 언어의 나라로 떠났다.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가까운 친구는 병이 들었고
일요일에는 낙엽이 날렸다.
낙엽은 나무의 눈물,
쌓인 눈물을 다 씻어낸 뒤에
당신에게 들어가 열매가 되었다.
4
- 이다지도 좋을까, 이렇게 즐거울까! 형제들
모두 모여 한데 사는 일(구약 시편: 133)
새벽잠 없어진 것이야 나이 탓이겠지만
그래도 서둘러 내 잠 깨운 창 밖의 새는
누가 잃어버린 추운 인연일까.
나는 그래서 매일 아침 몸이 아팠다.
이제 내 짐도 내려놓고
내 하던 일도 내려놓는다.
앞이 보이지 않는 일상의 일탈
국경의 저쪽에 당신 침묵이 보인다.
죽은 꽃나무 짊어지고 산정을 향하는
당신 연민의 옆얼굴이 밝아온다.
피 흘리는 미혼의 집에서
몸부림하던 문들이 열린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말과 글이
당신의 몸에 눌려 질식하고
땅과 바다는 다 걷혀 가버렸다.
한때 사람은 심장으로 생각했다.
그 시절에는 나도 가슴이 뛰었다.
기적같이 당신의 극치에 왔다.
세상에 필요한 단 하루의 아침에
내게 확신의 눈길 보내준 당신과 함께.
마종기 시집 <<새들의 꿈에서는 나무 냄새가 난다>>
한일회담 반대로 조국을 떠나 30년 넘는 미국생활이 무색하게도 (아니 어쩌면 바로 그 때문일까?) 마종기의 모국어에는 늘 옷깃을 여미게 된다.
금화터널을 지나며
강형철
매연이 눌어붙은 타일이 새까맣다
너는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적어
그 곁에 보 고 싶 다 썼고
나는 정차된 좌석버스 창 너머로
네 눈빛을 보고 있다
손가락이 까매질수록
환해지던 너의 마음
사랑은 숯검댕일 때에야 환해지는가
스쳐지나온 교회 앞
죽은 나무 몸통을 넘어 분수처럼 펼쳐지는
능소화
환한 자리
- 강형철 시집 《도선장 불빛 아래 서 있다》 중
예전에 한 사람과 헤어진 후 금화터널을 지날 때마다 버스 창밖을 내다보며 보고싶다고 되뇌었던 적이 있었다. 내 경우는 장소랑 결합된 기억이 참 오래 간다.

[과테말라=EPA]31일(현지시간) 과테말라 시에서 1980년 1월 스페인 대사관 대학살 희생자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모형 관들 사이를 한 소년이 지나고 있다. 과테말라의 도나르도 알바레즈 전 내무부장관은 당시 원주민들이 스페인 대사관을 점거농성하자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39명이 사망하고 스페인과 단교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과테말라 내전의 원인은 사회전반의 빈부 격차와 이데올로기 갈등때문이다. 정부의 군부 우익세력과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촌 및 산악지역의 원주민과 농민들을 대표하는 좌익게릴라 세력이 서로 충돌한 것이다.
1944년 오랜 군사독재로부터 벗어나 민주정부가 수립된 과테말라는, 그러나 국민의 2%가 국토의 72%를 소유할 정도로 사회적 모순이 극심한 나라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대지주는 정작 미국 기업인 유나이티드 푸르츠 컴퍼니(UFCO)로 대서양 연안에 22만 헥타르의 땅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그 중 85%를 이용하지 않고 있었다. 또한 그 회사는 과테말라의 철도를 장악하고 있었다.
1951년 65%의 득표로 대통령에 당선된 야코로 아르벤스 구스만은 민주주의의 강화, 불공정한 경제체제 및 토지분배의 개혁을 추진했다. 1952년 6월 27일 발표한 훈령 900호는 모든 이용하지 않는 땅을 유상 수용, 재분배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대통령 자신의 땅을 포함하여 총 60만 헥타르가 국유화되었고, 그 수용 비용으로 830만달러가 소요되었다. 62만 8천불의 국채를 받고 8만5천 헥타르의 땅을 몰수당한 UFCO는 본국에 연락을 취하기 시작했고, 미국 정부는 1,590만 달러의 보상을 요구했다.
아르벤스가 이 요구를 거절하자, 아이젠하워 정부는 과테말라를 소련의 동맹국으로 낙인찍기 시작한다. 53년 8월 미 정부는 아르벤스 정부 전복을 위한 비밀공작 비용으로 270만 달러를 푼다. 결국 주변국과 자국 대지주들도 아르벤스 정부에 등을 돌린다.
민주정부 수립 후 온두라스로 망명을 간 군부 지도자 카스티요 아르마스는 망명군을 창설해 조국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아르벤스 정부는 국방을 강화하고자 했으나 미국은 과테말라의 무기 수입을 봉쇄한다. 결국 아르벤스 정부는 체코와 협력했으며, 이는 아르벤스 정부를 친공 정부로 낙인찍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54년 6월 18일 아르마스는 쿠데타를 일으켰고, 미 CIA는 라디오 방송국과 일부 정부 기관을 접수하여 쿠데타를 돕는다. 군대도 정부에 협력하지 않자, 6월 27일 아르벤스는 망명의 길을 떠난다.
아르마스는 무자비한 우익 독재를 펼치면서, 아르벤스의 사회개혁 조치들을 무효화했다. 이에 저항하는 수많은 농민 및 좌익 반란군이 35년간 미국과 정부군에 맞서 끈질긴 내전을 벌였다. 이 내전 과정에서 수많은 생명이 사라졌다.

1994년 6월 23일 오슬로에서 설립된 역사규명위원회가 18개월간의 조사를 통해 1999년 발표한 보고서 "과테말라 : 침묵의 기억"은 과테말라 정부가 마야 부족의 말살 및 여타 시민들에 대한 학살과 인권침해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위원회에 확인된 바에 따르면 약 20만명이 사망 및 실종되었고, 확인된 대량학살 현장만도 630건에 달했다.
그 학살 중 1980년 1월 31일 스페인 대사관 점거 시위에 참가했다가 불타 죽은 마야 부족 우스판탄 부락의 족장 비센티노 멘추의 딸인 리고베르타 멘추는 당시 정부군의 잔학상을 생생하게 증언해 세계 여론을 움직이고 과테말라의 민주화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그 공로로 그는 1993년 노벨상을 타게 된다.
1991년 세라노 대통령이 선출되면서 3월에 과테말라 민족화해위원회(CNR)와 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URNG) 사이에 평화협상이 시작되었으나, 군부의 반발로 실패를 거듭하고, 결국 1994년 1월 10일 정부와 URNG간의 평화협상이 재개되어, 3월 인권관련 합의 및 6월 난민송환 합의, 1995년 3월 원주민의 정체성과 권리에 대한 합의를 이루어 냈다. 1996년 1월 평화협정을 우선 정책으로 둔 아르수가 대통령에 취임하자, 이에 힘입어 3월에는 교전 중단을 합의하였고 그 해 12월29일 마침내 영구평화 정착에 합의함으로써 남미에서 가장 오래된 내전이 공식적으로 종식되었다. 1997년 5월, UN 군사참관단의 입회하에 URNG의 무장해제가 완료됨에 따라 과테말라 정부도 총 군전력의 33%를 감축하였다. 따라서 1962년부터 1990년까지 총 10만명의 사망자와 5만명의 실종자, 20만명의 난민이 발생한 내전이 끝나게 되었다(UN위원회는 20만명 이상이 내전기간중 사망하거나 실종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99년 1월, 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URNG)은 11월 대통령 선거에 후보를 공천하기 위해 정당을 설립하고 등록하였다.
그러나 1998년 4월에 교회 차원에서 정부의 만행을 심층 연구한 보고서를 발표했던 후앙 호세 게라르디 주교가 군부에 의해 살해되었다. 2001년 이 사건에 관련된 3명의 군인이 유죄를 선고받았으나 이 재판에 관련된 판사와 검사, 증인들이 협박을 받고 국외로 도피한 것은 과테말라 민주화의 길이 순탄치 않음을 보여준다. 아직까지 보수 정당의 정권이 유지되고, 중남미에서도 특히 미국의 영향력이 강하게 남아있는 국가 중 하나이다.

1991년 6월 17일, 남아공은 주민등록법을 폐지함으로써 적어도 제도적으로는 인종차별 시대의 종지부를 찍었다. (그 전 달에 재판없는 구속과 언론검열을 허용해온 국가보안법을, 그 달 초에는 인종간의 주거지를 구분해 놓은 집단거주지역법과 전국토의 87%를 백인에게 할당한 토지법을 폐지했다) 1950년 제정된 남아공의 주민등록법은 모든 주민을 4개의 인종으로 구분하여 등록하게 하고 있었다. 이를 통해 각종 차별을 정교하게 시행했다. 도대체 어떻게 모든 사람을 4개의 인종으로 구분할 수 있는지.
사실, 이런 제도의 극단은 나치 시대의 유대인 가족 번호다. 영화 신들러리스트에서 이 제도를 엿볼 수 있다. 유럽에서 일찌감치 국가의 개인정보 수집을 금지해온 것도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우리 주민등록법도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단적인 예로 우리 주민등록법은 남성과 여성 외의 어떠한 구분도 허용하지 않는다. 다른 성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을 이 둘 중 하나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이들에게 양심의 자유란 적어도 주민등록번호 앞에서는 보장되지 않는다. 물론, 그들의 성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는 번호체계가 만들어지면, 그들은 더욱 고통받을 거다.
남아공은 인종차별 폐지투쟁과 함께 주민등록법을 폐지했고, 헝가리는 현실사회주의 독재를 철폐한 후 주민등록번호 제도를 위헌으로 규정했다. 그러고보면, 주민등록법 뿐 아니라, 지문날인이나 국가보안법도 (비록 모습은 다르겠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당당히 존재하고 있다. 헌법재판소로부터 합헌판결 받아가면서 말이다. 이것이 해방을 경험한 나라와 경험하지 못한 나라 사이의 차이인가보다.
대통령 비방글을 올린 현직 경찰관이 서울지검 컴퓨터 수사부에 의해 구속되었다. 죄목은 정보통신망이용촉진및정보보호등에관한법률 상의 명예훼손죄. 최고형이 징역 7년, 자격정지 10년 또는 벌금 5천만원이나 되는 무시무시한 죄목이다. 야간 근무중에 술먹고 취한 김에 정권에 대한 불만을 "대통령이 고정간첩"이니, "미국에 의해 참수될 날이 멀지 않았다"느니 하는 막나가는 표현을 사용하여 표출한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고정간첩이라니, 물론 허위의 사실을 유포하여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공인 중의 공인인 대통령의 활동에 대해 지나친 방식으로 불만을 표현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렇다면, 구속까지 하는 것은 취중에 "김일성 만세" 외쳤다 끌려가던 막거리 보안법 시절과 뭐가 다른가? 이미 파면까지 당한 마당에. 참고로, 국가보안법 제7조 찬양·고무죄도 징역 7년이다.
구속의 과도함과는 별도로 이 사건이 재미있고도 어이없는 것은 우리 공직사회의 실상을 단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론 전부는 아니겠지만, 일부 경찰들이 야근 중에 술먹고 근무하고 있음이 분명하며, 규정에는 어긋나는 일이지만 별 문제 아니라고 덮어두는 분위기가 지배적일 것이다. 그러니, 정작 근무 중에 술 먹은 건 놔두고, 명예훼손으로 구속한 것이다. 술 먹은 거야 그럴 수 있지만 (사실 자기들도 맨날 먹는 게 낮술이니까) 감히 경찰이 대통령 욕을 하다니 싶었던 게다. 구속된 경찰도 마찬가지다. 술 먹고 쓴 글임을 자백했을때, 그 심리는 뻔하다. 대통령 비방한 건 중죄라는 생각이 든 반면, 술 먹은 건 별로 큰 죄라고 생각 안했던 거다. 그래서, 술 먹고 한 짓이라고 변명해보고 싶었던 게다. 잡아가둔 쪽이나 잡혀간 쪽이나 의식 수준이 똑같다. 근무기강은 오간데 없지만, 권위주의는 유지된다. 덕분에 정보통신망법이 엉뚱한 데서 고생하게 되었다.
참고로 상황은 다르지만 뜻하는 바는 비슷한 이야기 하나..
경찰이 민주노동당 천영세 의원 차량을 수색해서 문제가 되었다. 공무원 노조 파업 관련 수배자를 숨겨주었을 거라는 이유에서이다. 파업 와해를 위해 이미 블랙리스트에 위치추적 등 온갖 불법적 수단들이 동원되고 있다고 폭로된 바 있다. 이 경우도 분명 영장이나 본인 동의 없는 불법 수색이었을 것이다. 문제가 되어 마땅하다. 그런데,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사건이 보도되는 방식이다. "경찰, 현역 국회의원 차량 수색 파문" .. 국회의원 차량이어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강제 수색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설령 범죄용의자의 차량이라도 현행범이 아니고서는 영장없이 수색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불심검문, 불법 수색이 워낙 만연한 사회다보니, 현역 국회의원 차량 정도 되어야 겨우 파문이 인다.
함께하는 시민행동 웹사이트 <정보인권 레이더> 게재 (2004.11.17)
미국의 정보화 이론가인 하워드 라인골드는 지난 해 발표한 저서 「참여 군중 Smart Mobs」에서 일본의 휴대폰 문화를 관찰하면서 발견한 흥미로운 현상 하나를 이야기한다. 여러 사람이 함께 만나기로 약속을 하면, 제 시간에 나오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먼저 나온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이 늦게 나오는 것에 크게 불만이 없다. 아직 서로 만나지 못했지만, 그들은 문자메시지로 서로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말한다. "이제 약속시간에 늦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휴대폰을 집에 두고 나오거나 아니면, 배터리가 닳아서 휴대폰을 받지 않는 것, 이것이 진짜 '잘못'이다."
유비쿼터스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언제 어디서나 네트워크에 접속 가능할 정도로 정보통신 그물망이 가득 들어차 있는 세상이 눈앞에 다가온다.
20세기 중반, 정보화 사회가 예견되면서 거대한 감시 사회에 대한 공포 또한 예견되기 시작했다. 더불어 감시를 막기 위한 시민사회의 노력도 곧바로 시작되었다. '자기정보통제권,' 즉 자신의 정보를 자기가 통제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한 요구가 나타났다.
처음에는 계약, 즉 개인에게 자기 정보의 사용에 대한 '동의'의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 해결책으로 제시되었다. 프라이버시 이슈가 등장할 때 간간이 언론을 통해 듣게 되는 1980년 'OECD 가이드라인'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그러나, 국가 권력의, 그리고 최근 신자유주의 시대의 도래와 함께 더욱 커져가는 기업 권력의 힘 앞에서, 개인의 동의가 얼마나 무력한지가 명백해졌다. 때문에, 최근에는 감시자에 대한 시민사회의 통제권을 의미하는 역감시권이 제안되었다. 시민사회의 집단적 권력으로 자기정보통제권을 보장할 대항 권력을 창출하자는 것이다.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적인 감독기구를 명문화한 1995년 EU 지침이 그 예이다.
유비쿼터스 시대의 프라이버시가 단순히 권력에 의해 위협받는 것이라면, 지금까지의 해결책으로 충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산형 네트워킹을 지향하는 유비쿼터스가 특정한 감시 권력을 확대할 것인지는 미지수다. 역사적으로 감시는 오히려 민주화되고 감시를 행하는 권력은 분산되어 왔다는 것이 많은 사회학자들의 주장이기도 하다. 오히려, 유비쿼터스 시대의 문제는 감시의 대상이었던 시민사회가 스스로 감시의 주체가 되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한 가지 상상을 해 보자. 머지않아 화상 휴대폰이 상용화되면, 누구나 그걸 들고 다니게 될 것이다. 아마도, 개인의 선택권을 보장하기 위해 그 휴대폰에는 화상이 전송되지 않도록 하는 장치가 부착될 것이다. 그런데, 당신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상대방의 목소리만 들을 수 있고 화상은 전송되지 않았다고 하자. 당신은 생각할 것이다. "도대체 뭘 하길래 화면을 꺼 놓은 거야? 어디 못 갈 곳에라도 간 것 아냐?" 화상 전송장치를 끄는 것은 결국 뭔가 떳떳하지 못한 것으로 간주될 것이다.
유비쿼터스 시대의 본질은 시민사회가 온라인 상태를 강요하기 시작한다는 데 있다. 중세 시대의 교회처럼, 오늘날 자본주의 시대의 직장처럼, 유비쿼터스 시대에 온라인은, 가지 않으면 주위 사람으로부터 떳떳할 수 없는 곳이 되어갈 것이다. 때문에, 온라인 상태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하는 '개인의 선택'이란 의미가 없어진다. 거대 권력이 아닌 시대 정신 자체가 문제인 만큼, 시민 통제 역시 의미가 없어진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감시의 눈길에 몸을 맡기고 자기 검열을 내면화하는 것, 이것이 유비쿼터스 시대에 프라이버시가 겪을 위기의 본질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개인의 선택권'도, '시민통제'도 의미가 없어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가? 아직 뚜렷한 해결책은 없다. 다만 한 가지, 어떤 법제도적 장치, 기술적 장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방식이 필요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다행히 시민 사회는 해방을 위한 싸움의 과정에서, 무죄 추정의 원칙이라는 것을 발전시켜 왔다. 지금까지 국가 권력에만 요구해왔던 그 원칙을 서로에게 적용할 시점이 온 것이다. 자기 검열이 내면화되는 만큼, 무죄추정의 원칙을 내면화해야 한다.
중앙대 대학원신문 제190호(2003년 10월 8일)
실제로는 분량이 넘쳐 조금 잘린 채 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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