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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적 폭력과 역사의 구원

 

발터 벤야민의 메시아적 정치신학 

(신학사상 2010 겨울호) 

 

성문이 일곱 개인 테베를 누가 건설 했던가? / 책에는 왕들의 이름만 적혀 있다.

왕들이 손수 바윗덩어리들을 끌고 왔을까? / (중략…)

역사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승리가 하나씩 나온다. / 승리의 향연은 누가 차렸던가?

십 년마다 한 명씩 위대한 인물이 나타난다. / 그 비용은 누가 지불했던가?

그 많은 사실들. / 그 많은 의문들.

-B. 브레히트, “어느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

 

 

1. 들어가며

한참 이 글을 쓰고 있을 무렵, 이명박 정부는 마치 광주를 연상케 하듯 G20 시위의 경호를 위해 도심 한복판에 군부대를 동원하기 위한 특별법을 통과시켰다. 촛불집회를 경찰력으로 진압하고, 이내 철거민들의 외침에 ‘죽임’으로 응답했던 이명박 정부의 모습은 우리에게 폭력과 주권, 그리고 역사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87년 이후 민주화라는 역사의 ‘진보’를 몸으로 경험했던 대중이 그 진보의 반대편에 있어 보이는 이명박 대통령을 압도적인 지지율로 선출하고, 그가 ‘민주공화국’의 대통령으로써 ‘합법적으로’ 저항자들에 대한 폭력을 수행하는 것을 우리는 보아야 했던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 ‘주권과 폭력’의 문제와 ‘역사’의 문제를 세속적 의미의 ‘신학’의 차원에서 다루어봄으로써 부족하나마 사유의 한 돌파구를 마련해 보려 한다. 

 

폭력이란 무엇일까? ‘폭력’의 반대는 흔히 이야기되듯 ‘비폭력’인가? 언뜻 보면 자명해 보이는 폭력과 비폭력의 대립은 조금 자세히 그 모습을 들여다보면 폭력을 목적을 위한 어떤 ‘수단’의 자리에 위치시켰을 때만 가능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이 권력의 유지이든, 아니면 어떤 ‘정의’를 위해서건, 그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 폭력과 비폭력을 사유하게 될 때 양자는 대립된 것으로 나타난다. 폭력을 이렇게 사유하는 것은 사실상 폭력 자체에 대한 사유 없이 오직 폭력의 ‘적용’에 대해 논하게 됨으로써 사실상 어떤 목적이나 현행질서를 승인하는 효과를 가져오게 된다. 

 

따라서 폭력에 대한 비판은 수단으로써 무력행사가 있느냐 없느냐를 넘어선 폭력 그 자체에 대한 사유를 요구한다. 대체 폭력이란 무엇인가? 왜 어떤 행위는 실상 별다른 힘을 발휘하지 못해도 ‘폭력’으로 인지되고, 어떤 행위는 매우 강압적이고 강력함에도 ‘폭력’으로 인지되지 않는 것인가? 폭력에 대한 질문은 이러한 내용을 포함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텍스트가 바로 발터 벤야민의 «폭력 비판을 위하여»이다. 벤야민의 이 글이 우리에게 특히 더 중요한 것은 그의 폭력에 대한 분석, 혹은 폭력 비판이 하나의 신학적 사유로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여기서 신학이란 하나의 세속에 대한 신학적 사유를 말한다.1)

 

통상 신학이란 곧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등의 유일신 종교의 자기 정체성을 해명하는 어떤 학문이나 혹은 교리 정도로 이해된다. 혹은 아주 좁게는 ‘신에 대한 형이상학적 학문’으로 이해될 때도 있다. 그러나 신학의 오랜 역사를 되돌아보면 오히려 신학이 그렇게 사용되고 이해되었던 기간이 거의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미 각국에서 정치와 종교의 분리가 보편화된 이후에야 신학은 오늘날 우리가 통속적으로 이해하는 그 영역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계몽주의는 신학을 성공적으로 교회 속으로 추방했다고 믿었다. 세계를 지배하던 신학은 교회의 예배 속으로 퇴각했으며, 과학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삶은 더 이상 신을 원인으로 하지 않고도 해명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계몽주의자들은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여, 신의 계시에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인간적이고 자연적인 차원에서 정치를 생각하려 했다.2) “신학은 […] 왜소하고 흉측해졌으며, 모습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 것”이 된 것이다.3)

 

그러나 정작 서구 근대의 역사를 돌이켜 보건데, 신학은 계몽주의 시대 이후에도 정치세계 속으로 끊임없이 재침투를 감행해 왔다. 그것은 더 이상 ‘기독교 신학’의 모습으로가 아니었다. 신학은 하나의 ‘세속 신학’으로, 혹은 ‘신학적인 것’으로 재출현했던 것이다. 로베스피에르의 ‘최고 존재의 제전(祭典)’으로부터 소렐과 아나키즘, 볼셰비즘 등의 ‘신화적 정치이론들’을 거쳐 파시즘 독재에 이르기까지, 어떤 면에서 “근대 국가이론의 중요 개념은 모두 세속화된 신학 개념이었다.”4)

 

20세기의 초입에 이러한 세속적 ‘정치신학’에 대한 성찰은 두 명의 사상가, 칼 슈미트와 발터 벤야민에게 이르러 정점에 다다르게 된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한 사람은 나치의 계관법학자로, 또 한 사람은 유대인으로서 나치에 쫓기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혁명적 비평가로 살았던 인생의 모습만큼이나 정치신학에 있어서도 다른 길을 걷게 된다. 하지만 벤야민의 정치신학은 슈미트의 반대편에 놓여 있지 않다. 오히려 벤야민은 슈미트의 정치신학의 논의를 깊이 성찰하고 받아들였고, 그것을 넘어선다. 이 글의 전반부에서는 폭력과 주권에 대한 논의를 중심으로 슈미트와 벤야민의 정치신학을 각각 ‘주권자의 정치신학’과 ‘메시아의 정치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정식화하여 비교해보려 한다. 그리고 후반부에는 신적 폭력의 논의와 결부된 벤야민의 역사의 구원에 대한 탐구를 다루어 볼 것이다.(그리고 어쩌면, 그것을 통해 “파시즘에 대한 투쟁에서 갖는 우리의 입지가 개선될 것이다.”)5)  

 

 

2. 주권자의 정치신학 VS 메시아의 정치신학

 

“정상은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하나 예외는 모든 것을 증명한다.

예외는 원칙을 보장할 뿐이지만 원칙은 대개 예외에 의해서만 생존한다.

-칼 슈미트, «정치신학»

 

신화적 법 형식들의 마력 속에 머무는 이러한 순환 고리를 돌파해내는 대에서,

법과 더불어 그 법에 의존하는 폭력들처럼 그 법이 의존하는 폭력들 전체,

즉 종국에는 국가권력을 탈정립하는 데서, 새로운 역사 시대의 토대가 마련된다.

-발터 벤야민, «폭력비판을 위하여»

 

1) 칼 슈미트와 ‘정치신학’

칼 슈미트가 신학을 정치사상에 있어 중요한 주제로 다루게 된 것은 자유주의에 기초한 의회주의와 법치주의의 철저한 무능과 위기 때문이었다. 개인들의 자유로운 토론과 공개성에 기초한 의회주의는 1919년의 스파르타쿠스단의 혁명 기도를 비롯하여 1920년대 내내 좌우 양쪽에서 발생하는 대중봉기와 정치적 소요에 의해 위협을 받고 있었다. 의회란 의론과 반론에 의한 공개 토론 속에서 진리와 정당함이 가장 확실하게 발견되어야 하는 장소였지만 각종의 대중민주주의의 발흥 앞에서 공개토론은 쓸데없는 정식으로 화하고, 모든 중요한 문제는 비밀 위원회에 맡겨졌다. 의회는 사실상 민주주의의 기구가 아니라 과두제의 기구로 전락한 것이다.6) 법치주의 역시 이러한 상황을 적절하게 해명하고 다룰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근대 법치국가의 이념은 하나의 이신론으로서 관철되었으며, 따라서 예외(기적)를 거부하는 합리주의적 신학의 기초 위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법치국가의 이론들에서 자연적 질서(와 법적 질서)를 폐기하는 여러 가지 비상사태들은 법학적으로는 무의미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이것은 혁명적인 소요 앞에서는 철저히 무능했다. 

 

슈미트는 이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 특히 러시아에서 어떻게 근대 대도시의 산업 프롤레타리아트의 사상이 지배적일 수 있었는가를 묻는다. 그가 볼 때 그것은 어떠한 종류의 ‘합리성’이나 근대의 대중교양 덕택이 아니었다. 그러한 사고는 자유주의의 몽상에 불과한 것이었다. 혁명적 소요의 원인은 “폭력행사의 새로운, 비합리주의적인 동기가 작용하고 있었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유토피아를 꿈꾸는 합리주의뿐만 아니라 자코뱅 식으로 교육독재에 의해 인간을 토론으로 성숙케 하는 것도 거부하는, ‘본능과 직감에 대한 새로운 신념’이었다. 그것은 곧 ‘신화의 정치이론’이었던 것이다.7) 따라서 슈미트는 맑스나 레닌이 과학적 사회주의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주장할 때 그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것은 과학이 아니라 신화라고 주장한다. 특히 모든 질서와 합리성을 거부하는, 오직 생의 충만함의 발현으로서의 정치를 구상한 아나키즘(푸르동, 바쿠닌)과 생디칼리즘(조르주 소렐)이야말로 모든 혁명 사상의 근저에 흐르는 신화였다.

 

그리하여 프루동과 바쿠닌은 생디칼리즘의 창시자가 되었다. 이와 같은 전통으로부터 소렐은 베르그송의 철학에서 따온 논의에 입각하여 그의 사상을 형성하였다. 그 논의의 핵심에는 신화의 이론이 존재한다. 그것은 절대적인 합리주의와 그 독재에 대한 가장 심한 대립을 의미한다. […] 위대한 열광, 위대한 도덕적인 결단과 위대한 신화는 어떤 이성적 판단이나 합목적적인 고려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본능의 깊이에서 생겨난다. 열광한 대중은 직접적인 직관에 의해서 신화적 관념을 창조한다. […] 오늘날 그 위대한 신화의 담당자는 누구인가? 소렐은 산업 프롤레타리아의 사회주의적 대중만이 하나의 신화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그들이 믿고 있는 총동맹파업 속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한다.8)

 

슈미트는 이러한 신화적 혁명이론에 대항하는 정치신학을 구상했다. 그것은 주권적 독재의 이론인‘정치신학’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결단’의 이론이었다. 혁명적인 결단의 이론들 앞에서 필요한 것은 대화와 합리성이 아니라 또 다른 결단이어야 했던 것이다. 이것을 위해 그는 법학 안에 법학의 외부를, 즉 비상사태의 이론을 도입한다. “주권자란 비상사태를 결정하는 자이다.” 그는 주권과 비상사태의 개념은 긴급명령이나 계엄상태와 같은 법 안의 개념이 아니라 한계와 극한의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평상시에 법규로서 효력을 지닌 일반적인 규범은 절대적인 비상사태를 결코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9) 물론 이것은 기존의 주권의 정의, 즉 ‘최고이며 연역할 수 없는 지배권력’이라는 정의를 바꾸지는 않는다. 그러나 슈미트가 보기에 기존의 법철학은 이러한 주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전혀 해명해주지 못했다. 국민의 합의? 투표를 통한 최고권력의 선출? 이것은 주권자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주권자가 누구인가는 누가 “지금이 극도의 급박상태인가의 여부를 결정하는 동시에 이것을 제거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지를 통해서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주권자는 평상시의 현행 법질서 밖에 서 있으며, 더구나 헌법의 일괄정지 여부를 결정하는 권한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현행 법질서 안에 있다.”10)

 

때문에 슈미트에게 비상사태와 주권에 대한 이론은 근본적으로 법학이 아니라 신학이다. “근대 국가이론의 중요 개념은 모두 세속화된 신학 개념이다. 전능한 신이 만능한 입법자로 전화되었듯이 […] 법학에 있어서의 비상사태는 신학에서의 기적에 비유할만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슈미트는 특히 19세기의 ‘반혁명적 보수주의 사상가들’의 신학에서 자신의 정치신학의 기초를 끌어오고 있다. 17,8 세기의 군주제를 정당화했던 초월적 유신론이 국가 이성 혹은 일반의지의 이신론으로, 그리고 마침내 법실증주의의 이론으로 ‘세속화’됨으로써 발생한 정당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그들은 초월적 유신론 자체를 세속화해 버렸다. 즉 그들은 군주제가 폐기된 대혼란의 시대에 남은 단 하나의 길, ‘독재’로 나아갔던 것이다.

 

토론의 반대는 독재이다. 항상 극단적인 경우를 상정하며 최후의 심판을 기다린다는 것이 코르테스와 같은 정신의 결정주의에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코르테스는 자유주의자를 경멸하지만, 다른 한편 무신론적, 무정부적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불구대천의 원수로서 경의를 표하며, 거기에 악마적인 위대함을 인정한다.11)

 

따라서 슈미트의 정치신학에서 핵심은 주권의 정당성이나, 일상적 형식이 아니라 ‘예외’에 있다. 정상적 상태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하지만 예외는 모든 것을 증명한다. 예외는 원칙을 보장하며, 원칙은 예외에 의해서만 생존한다.12) 즉 일상의 질서와, 정치적 공동체의 동일성을 보장해 주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해 안정적이고 질서 잡힌 국가를 창출해내는 것은 예외를 결정하는 세속의 신인 주권자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학을 통해 소렐 등의 신화의 정치이론은 반박된다. 사실상 러시아의 혁명이란 순수하게 계급투쟁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강력한 국민적, 민족적 동일성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지 않은가, 또한 질서와 신, 국가에 대한 저항을 선동한 무정부주의자들 역시 결정에 반하는 ‘결정’을 내리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결국 그들이 도달한 지점은 러시아의 새로운 독재자(레닌)와 무솔리니의 파시즘이 아니었던가.

 

2) 신화적 폭력과 신적(메시아적) 폭력

벤야민의 정치신학은 슈미트가 다다른 이 지점에서 다시 생각하기를 요구한다. 데리다가 이야기했듯 벤야민의 논문, «폭력 비판을 위하여»는 슈미트의 «정치신학»과 마찬가지로 1920년대의 반의회주의적이고 반계몽주의적인 흐름 위에 위치하고 있다.13) 벤야민이 보기에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비폭력적인 대화를 통한 갈등의 해결은 오직 사적 인격들 간의, 그것도 진심의 문화 속에서만 가능하다. 하지만 이러한 비폭력은 언제나 위태위태한 타락의 위험에 직면하여 있다. 만일 누군가가 거짓말을 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상대방의 분노를 일으켜 폭력을 행사하도록 만든다면. 법은 바로 - ‘예외’라고 할 수 있을 - 이러한 상황을 막기 위해 사적 개인들의 관계 속으로 침투해 들어온다. 로마법과 고대 게르만법은 기만을 처벌하지 않았던 반면에, 근대의 법은 기만을 금지함으로써 비폭력적인 수단의 전적인 사용을 제한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들어온 법은 법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합법적인 폭력을 행사한다. 즉 벤야민의 논의를 따르면 법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폭력이 함께 서있는 것이다. 의회주의는 결코 이러한 상황 바깥에 존재할 수 없다.

 

어떤 법적 기관에서 폭력의 잠재적 현존에 대한 의식이 사라지게 되면, 그 기관은 퇴락한다. 이에 대해서는 요즈음 의회들이 좋은 본보기를 제시해준다. 의회들은 그들 자신의 존재를 빚지고 있는 혁명적 힘들을 스스로 깨닫지 못한 채로 있었기 때문에 익히 알려진 한심한 연극을 펼치고 있다. […] 의회들에게는 그것들 속에 대표되고 있는 법정립적 폭력에 대한 감각이 부족하다. 의회들이 이러한 폭력에 합당한 의결들에 이르지 못하고 오히려 타협 속에서 정치적 사안들에 대한 짐짓 비폭력적인 처리 방식을 선호하게 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 의회의 퇴락 때문에 정치적 갈등에 대한 비폭력적 중재라는 이상으로부터, 어쩌면 전쟁 때문에 이 이상을 받아들인 경우만큼이나 많은 정신들이 등을 돌린 것 같다. […] 사람들은 원칙적으로 정치적 합의를 위한 비폭력적 수단에 대해 논의할 때 의회주의를 다룰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의회가 필수적인 사안들에서 성취하는 것은 원천과 결말에서 폭력이 점착된 법질서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법은, 그리고 법을 통해 성립되어 있는 국가는 애초부터 폭력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이것은 반대의 예로도 증명이 된다. 우리가 때로 자연재해를 겪거나, 혹은 아이가 태어나면서 어미가 겪는 엄청난 고통을 ‘폭력’이라고 부르지는 않기 때문이다. 분명히 어떤 ‘힘’이 행사되었고, 그것은 엄청난 육체적 정신적 고통과 위해를 낳지만, 그것은 “윤리적 관계들과 관련을 맺을 경우에만 비로소 단어의 충만한 의미에서 폭력이 되”며, ‘법과 정의’라는 개념이 바로 이 윤리적 관계들의 영역을 특징짓는다.14) 그런 점에서 벤야민은 자신의 폭력 비판의 과제는 폭력이 법과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서술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벤야민은 이 관계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 법의 정립을 낳는 폭력을 ‘법정립적 폭력’으로, 법을 보존하는 폭력을 ‘법보존적 폭력’으로 부른다.

 

이러한 두 종류의 폭력에 대한 구분이 슈미트의 ‘예외’와 ‘정상’의 구분에 상응한다는 점을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를테면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벌이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파업권은 분명 법에 의해 보장되고 있는 것이지만, 우리가 익히 경험해 왔듯이 국가는 그것을 어떻게든 불법과 폭력으로 규정한다.(총파업이 실정법을 어기지 않는 경우에도!) 여기서 부딪히는 것은 일상의 법을 지키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국가가 총파업을 ‘폭력’으로 규정하는 이유는 노동자들이 현재의 법적 상황 자체를 근거 짓고 수정하는 행동에 나선 것이기 때문이다. 슈미트의 표현을 빌리면 노동자들은 총파업에서 예외를 결정하고 있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총파업의 규모나 힘이 약할 때조차도 국가 자체와 맞서고 있는, 혹은 새로운 법을 정립하고 있는 것이 된다.

 

총파업의 예가 너무도 우연적이고 산발적인 것으로 보인다면, 전쟁권이라는 다른 예는 좀 더 슈미트의 논의와 통한다. 법주체들이 승인하는 전쟁의 선포에는 언제나 ‘평화’가 그것의 상대자로 나타난다. 즉 전쟁은 그것 이후 어떤 새로운 관계를 만들게 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전쟁 중의 폭력은 처음부터 아주 직접적으로, 강탈적 폭력으로서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지만, ‘평화’라는 단어가 모든 승리에 필수적인 - 그리고 다른 모든 법적 관계들로부터 독립해 있는 - 선험적인 승인을 가리키고 있다. 즉 전쟁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주권자의 결단 아래 전쟁이 치러진다. 그리고 전쟁 이후 만들어진 새로운 관계들(평화?)이 존속하기 위해 어떤 법적 보증이 필요한지의 여부와 관계없이 새롭게 만들어진 이 관계들 자체가 새로운 ‘법’으로 인정되는 것이다.15) 즉 이 두 경우에서 보듯이 정상적인 법적 상태는 언제나 그 기초에 예외를 두고 있다. 그리고 정상적인 법적 상태는 그 예외를 목적으로 하여 일상적인 법보존적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 노동자들의 파업을 통제하는 각종의 법률들과, 병역 자원을 계속해서 동원하는 수단인 국민개병제 등은 그런 예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주권의 외부란, 국가의 외부란 완전히 불가능한 것일까? 혁명적 총파업조차 법을 정립하고, 국가를 새롭게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언제나 폭력의 악순환 속에 놓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더욱이 «폭력비판을 위하여»는 한걸음 더 나아가 법정립적 폭력과 법보존적 폭력이 서로 얽히고설켜 구분될 수 없는 지대를 다루고 있다. 그 스스로 법을 제정하고 보존하는 경찰권력의 도래가 그것이다.

 

경찰 안에서는 법정립적 폭력과 법보존적 폭력의 구별이 지양되어 있다. 법정립적 폭력은 그것이 승리를 통해 입증되기를 요구받는 반면, 법보존적 폭력은 그것이 새로운 목적을 설정하지 않는다는 제한에 묶인다. 경찰의 강제력은 이 두 조건들로부터 해방되었다. 경찰의 강제력은 법정립적인데, 그 이유는 그것의 특징적인 기능은 법률을 공표하는 일이 아니라 그것이 입법적 권리를 갖고 반포하게 하는 모든 법령을 공표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경찰의 강제력이 법보존적인 이유는 그것이 그러한 목적을 수행하는 데 이용되기 때문이다. […] 따라서 경찰은 법적 목적과 관련이 전혀 없는데도 법령에 의해 규제된 삶을 통해 무자비하게 괴롭히는 존재로서 시민을 따라다니거나 또는 시민을 완전히 감시하거나 아니면 명백한 법적 상황이 주어져 있지 않은 무수히 많은 경우에 ‘치안 유지 때문에’ 개입한다.16)

  

이러한 문제 앞에서 벤야민의 해법은 ‘예외’에 대한 사유를 더 극단으로 끌고 가는 것이었다. 그것은 어떠한 종류의 목적의식적 ‘결단’과 구분되는 예외, 구분되는 폭력을 사유하는 것이었다. «폭력비판을 위하여»의 후반부에서 논의는 ‘법정립적 폭력과 법보존적 폭력’에서 ‘신화적 폭력과 신적 폭력’이라는 주제로 옮겨간다. (법보존적 폭력 또한 정립하는)법정립적 폭력이 근거하고 있는 지점은 사실상 ‘신화적 폭력’이다. 신화적 폭력이 보여주는 것은 폭력이 어떤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발현(Manifestation)’이라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일상에서 먼저 증명된다. 분노의 감정은 사람을 극명하게 드러나는 폭력의 폭발로 이끈다. 이 폭력은 이미 어떤 확정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발현이다.17)

 

벤야민은 자신의 자녀들을 레테 여신의 두 자녀(아폴론과 아르테미스)보다 낫다고 자랑하다가 자녀 모두를 잃는 벌을 받은 니오베의 신화에서 신화적 폭력의 발현을 발견한다. 니오베의 교만은 그것이 법을 침범하는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운명에게 도전했다는 점에서 자신 위에 내릴 숙명을 불러낸다. 신들의 폭력은 니오베의 자녀들은 피 흘려 죽게 하지만 니오베 앞에선 멈춤으로써 그녀를 영원히 죄 받은 존재로 남겨두며, 그것을 통해 인간과 신의 ‘경계’를 설정한다. 벤야민은 바로 이러한 신의 분노의 ‘발현’으로서의 폭력이 법정립적 폭력보다 더 근원에 놓인 ‘권력의 정립’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이 후자의 원리를 국법에 적용하면 거대한 결과가 생겨난다. 왜냐하면 이 영역에서 경계의 설정은 모든 법정립적 폭력의 원초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 직접적 폭력의 신화적 발현은 가장 깊은 차원에서 모든 법적 폭력과 동일한 것으로 드러나며 법적 폭력의 문제성에 대한 예감을 그것의 역사적 기능의 타락상에 대한 확신으로 만들어준다.”18) 바로 이것이 곧 모든 정립적 폭력과 보존적 폭력이 자리 잡은 장소이다. 그것은 사실 어떠한 목적적 결단이 아니라 말하자면 ‘운명’의 폭력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법정립은 목적한 것을 법으로서 투입하는 순간 폭력을 물러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법 자체를 정립적인 폭력으로 만드는 것이 된다. 이것을 통해 벤야민은 슈미트의 주권이론이 결국 “상례화된 비상사태”로 귀결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바로 뒤이어 벤야민은 자신의 독특한 정치 신학, 즉 신화적 폭력에 대항하는, “이 역사적 기능을 파괴하는 것”으로서 ‘신적 폭력’을 제시한다. 그것은 말하자면 정상을 규정하는 예외(비상사태)나 상례화된 비상사태가 아니라 오직 예외일 뿐인, ‘진정한 비상사태’(«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 대한 사유이다.

 

“모든 영역에서 신이 신화와 대립하는 것처럼, 신화적 폭력은 신의 폭력과 대립한다. […] 신화적 폭력이 법정립적이라면 신적 폭력은 법 파괴적이고, 신화적 폭력이 경계를 설정한다면 신적 폭력은 경계가 없으며, 신화적 폭력이 죄 값을 치르게(sühnen) 한다면, 신적 폭력은 죄를 사해주고(entsühnen), 신화적 폭력이 위협적이라면 신적 폭력은 내리치는 폭력이고, 신화적 폭력이 피를 흘리게 한다면 신적 폭력은 피를 흘리지 않은 채 죽음을 가져온다.”19)

 

벤야민은 구약성서 민수기에 나오는 고라 일족의 심판 이야기를 니오베의 신화와 대립시킨다. 이야기 속에서 신은 어떤 경고도 없이, 그리고 피 흘리는 절차도 없이 모세에 대립하여 특권을 요구하던 고라 일족 전체를 몰살한다.20) 그런데 일견 두 이야기는 별반 구분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고라의 심판이 죄값을 치루게 하는 폭력과는 다른 ‘죄를 사하는 폭력’이라는 것이 무슨 말인가. 벤야민의 논의에서 양자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결정적인 것은 ‘피’이다. 신화적인 법의 폭력은 피를 흘리는 존재, 즉 순수하고 단순한 생명 자체에 폭력 자체를 위해 가해지는 피의 폭력이고, 이와는 반대로 순수하게 신적인 폭력은 모든 생명에 대해 행사되지만, 이것은 생명체를 위한 면죄라는 것이다.

 

여기서 벤야민이 다루고 있는 것은 역사의 구원에, 혹은 혁명적 봉기에 있어 누군가의 목숨은 죽어야 하는 그 곤혹스러운 상황이다. 벤야민은 여기서 ‘살인하지 말아야 할’ 대상이 되는 ‘생명’을 ‘목숨’과는 다른 관점에서 바라봄으로써 우리에게 한 가지 힌트를 주고 있는 듯하다. 구약성서의 면죄하는 폭력에는 언제나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함께 주어진다. 그러나 벤야민은 이 계명이 판단의 척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계명은 무엇보다 “이미 실행된 행위에 적용될 수 없는 것”이며, “행동하는 인격체 또는 공동체에 대해 행동의 지침으로 있다. 행동하는 인격체나 공동체는 홀로 있으면서 그 계명과 대결해야 하며 예외적인 경우들에서 이 계율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한 데 대한 책임을 스스로 떠맡아야 한다.”21) 더 나아가 벤야민은 이 계명이 환기하는 것은 단순한 목숨이 아니라 ‘삶의 신성함’에 대한 것이라 주장한다. 생명은 ‘단순한 목숨’으로 표상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목숨 너머의 것이다.

 

“‘현존재의 행복과 정의보다 […] 현존재 자체가 더 상위에 있다는 점을 고백한다.’(쿠르트 힐러) […] 이 문장은 ‘현존재’가(혹은 ‘생명이’) ‘인간’이라는 대체 불가능한 전체 상태를 의미한다면 엄청난 진실을 내표한다. […] 인간은 어떠한 경우라도 인간의 단순한 생명과 일치하지 않으며, 그 인간 속의 단순한 생명과도, 그리고 인간의 어떤 특정한 상태나 특성과도, 심지어 인간의 신체적 존재의 유일무이함과도 일치하지 않는다.”22)

 

그렇다면 신적 폭력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단지 ‘목숨’을 살리느냐 죽이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신적 폭력은 때로 날것으로서의 목숨을 끊어놓는 내리침의 사건 속에서 인간 전체라는 ‘생명’을 사하며 살리는 그런 폭력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신적 폭력의 사유를 구원하는 폭력에 관한 것으로, 즉 메시아의 정치신학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 사유에서 운명과 투쟁하는 ‘영웅’과는 달리 유대주의의 사유에서 메시야는 언제나 심판함으로써 구원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폭력이 상례화된 예외상태를, 그리고 법이 무너지더라도 또다시 법정립이 발생하고야 마는 운명의 악순환을 돌파한다.

 

신화적 법 형식들의 마력 속에 머무는 이러한 순환 고리를 돌파해내는 데에서, 법과 더불어 그 법에 의존하는 폭력들처럼 그 법이 의존하는 폭력들 전체, 즉 종국에는 국가권력을 탈정립하는 데서, 새로운 역사 시대의 토대가 마련된다. 만약 현재 여기저기서 신화의 지배가 이미 무너지고 있다면, 법에 대한 반대가 불가능할 만큼 새로운 시대가 까마득하게 멀리 있지는 않을 것이다.23)

 

역사에서 이러한 신적 폭력의 이미지에 상응하는 것은 무엇일까? «폭력비판을 위하여» 안에 있는 근거들을 탐색해보자면 일차적으로 그것은 소렐에게서 영감을 받은 ‘프롤레타리아 총파업’이다. 소렐은 프롤레타리아 총파업을 법정립적인 법정립적 총파업, 즉 입법적이고 제헌적인 정치적 총파업의 폭력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는 법을 파괴하는, 따라서 국가를 파괴하는 총파업이며, 순수 수단으로서 비폭력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24) 그러나 벤야민이 신적 폭력을 곧장 프롤레타리아 총파업과 연관 지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정작 신적 폭력을 다루는 마지막 문맥에서 ‘프롤레타리아 총파업’ 자체는 다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혁명적 폭력’ 역시 조건법으로 말해지고 있다.25) 벤야민은 어쩌면 ‘신적 폭력’은 실정적인 방식으로는 말해질 수 없는, 즉 폭력이 행사되는 그 순간에는 알 수 없는 폭력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신적 폭력과 신화적 폭력은 “OO 혁명은 신적 폭력이고, OO 혁명은 신화적 폭력”이라는 식으로 도식화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실제로 슈미트의 논의 속에서 살펴보았듯 소렐 이후의 프롤레타리아 총파업과 혁명적 폭력의 이론은 역사 속에서 공산당 일당지배의 논리로 이어지지 않았던가. 결국 벤야민의 서술 속에서 신적 폭력은 여전히 다른 예로 제시될 수 없는 ‘신적 폭력’ 그 자체로 남는다. “특정한 경우에 순수한 폭력이 언제 실제적으로 있었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똑같이 가능하지도 않고, 똑같이 시급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비할 바 없이 큰 영향을 속에서가 아니라면 신적인 폭력이 아니라 오로지 신화적인 폭력만이 그 자체로서 확실하게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폭력이 인간에게 주는 면죄하는 힘은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폭력에 대한 비판은 폭력의 역사에 대한 철학이라고 말한다. “역사의 ‘철학’인 이유는 그 역사의 결말이라는 이념만이 그 역사의 시대적 자료들에 대해 비판하고 구분하며 결정하는 입장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26) 즉 역사의 결말은 어떤 사례나 모델로서 우리에게 올 수는 없는 것이다. 맑스가 «독일이데올로기»에서 살짝 보여주었고, 뒤를 이은 수많은 좌파들은 아주 분명한 어떤 것으로 제시했던 것과 달리. 벤야민은 어떤 실정적인 것으로 이 신적 폭력이 말해지는 것을 차단함으로써 그것의 퇴락을 막으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전태일과 광주라는 우리의 역사적 기억을 다루어보는 것은 어떨까. 전태일이 자신의 목숨에 불을 붙였을 때, 그것은 1970년대 전체의 ‘생명’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광주도청의 마지막 총성이 울렸을 때 그 역시 80년대의 모든 ‘생명’을 구원하는 폭력이 그곳에서 일어났던 것이 아닌가. 결국 신적 폭력을 통한 구원은 실정적인 방식으로 말해질 수 없지만, 분명히 역사 속에 존재했던/할 어떤 폭력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그가 역사를 바라보았던 방식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일 것이다.   

 

 

3. 역사와 메시아

 

과거, 더 적절하게는 과거에 존재했던 것을 이제까지처럼 역사적으로 다루는 대신 정치적으로 다룰 것, 정치적 범주들을 이론적 범주들로 만드는 것, 즉 오직 현재적인 것에만 적용할 수 있기에 오로지 실천이라는 의미에서만 그것들을 적용하는 가운데 그렇게 만드는 것이 과제이다.

-발터 벤야민, “최초의 초고”, «아케이드 프로젝트», O°5

 

1) 역사주의에서 역사의 ‘변증법적 이미지’로

발터 벤야민의 정치신학은 후기로 갈수록 역사철학적 사유로 나아간다. 벤야민의 유고가 된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의 첫머리에서 벤야민은 체스 게임에서 언제나 이기는 자동기계를 소개한다. 그러나 사실 그 자동기계는 장기의 명수인 꼽추 난쟁이가 그 속에 들어가 인형의 손을 끈으로 조종하고 있는 것이었다. 벤야민은 체스 기계에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이름을, 그리고 난쟁이에 “신학”의 이름을 붙인다. 신학은 오늘날 왜소하고 흉측해졌으며, 모습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 것이 되었지만, 그것이야말로 파시즘과의 싸움에 있어 역사적 유물론에 새로운 활력을 공급하는 것이었다.27)

 

발터 벤야민은 신학적으로(그리고 변증법적으로) 역사를 보는 방법을, 즉 역사를 구원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는 여러 텍스트에서 당대의 ‘역사주의’와 강하게 맞선다. 역사주의는 과거를 하나의 영원하고 고정된 이미지 속에서 바라보며, 역사가 시대마다 층층이 쌓여 진보해왔다고 보는 관점이다. 역사주의자들에게 역사는 보다 선하고 완전한 것으로 전진해가는 것이며, 그것은 부르주아 시민사회와 민족국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의 확립을 통해 현실태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이러한 역사 인식은 근본적으로는 칸트적인 인식론에 기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칸트에게 있어 인간이 세계를 경험하는 것은 ‘종합’이라는 인식론적 기능을 통해 정초된다. 인식 주체는 직관에 부과되는 잡다한 것들을 선험적 종합능력을 통해 인식한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은 시간과 공간의 단일성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지각이 규칙에 적합하고 완전한 연쇄 속에서처럼 표상되는 곳에서만 하나의 경험이 가능한 것처럼, 모든 형태의 현상들이 발생하는 것은 하나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이다.”(칸트, «순수이성비판») 이러한 관점은 역사적 경험 역시 연쇄적 표상, 즉 연대기적 경험이라는 것을 말해준다.28)

 

«수집가이자 역사가 에두아르트 푹스»에서 벤야민은 특히 ‘문화사’의 개념을 문제 삼고 있다. 당시 일단의 문화사가들은 개별 분과들의 연구가 인류가 오늘날까지 보전해온 자산에 대한 연구로서 문화사의 연구에 합류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29) 이것은 각 분과별로 연구되어 왔던 역사들, 이를테면 문학과 예술의 역사, 법의 역사, 종교의 역사 등을 통합한 종합적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멀리 있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주의 시대”라는 명칭 속에서 문화사적 이해는 여전히 존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벤야민은 이러한 문화사라는 단위를 “가장 문제성이 있는 하나의 단위”라고 비판한다. 어떤 구성물의 총체가 그것들이 생겨나게 되는 생산 과정이나 그것들이 존속하게 되는 과정으로부터 독립되어 ‘문화’라는 이름으로 불릴 때, 그것은 하나의 물신적 특성을 갖는, 즉 인간의 의식 속에서 아무런 진정한 경험(그리고 정치적인 경험)에 의해 헤집어진 적이 없는 하나의 ‘기념비적인 것들’로 이루어진 침적물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30)

 

벤야민에게 역사 유물론은 진보와 점층으로서 역사를 이해하는 이러한 방식과 정면으로 대립하는 것이었다. 문화사가들이 예술과 과학에서 발견하는 모든 것들은 “그것들을 만들어 낸 위대한 천재들의 노고에 뿐만 아니라 그 천재들과 함께 살았던 무명의 동시대인들의 노역에도 힘입고 있다. 동시에 야만의 기록이 아닌 문화의 기록이란 없다.”31) 역사가들이 문명의 진보라고 부르는 것들은 기실 누군가에게는 야만의 경험일 뿐이다. 문화사라는 진보의 기록은 이러한 억압받는 자들의 기억을 은폐해버린 기록이며, 결국 그 문화의 ‘보화들’을 뒤흔들어 진정으로 수중에 넣을 수 있도록 할 힘을 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보화들은 결코 문화사가의 서술 속에서 완결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과거의 작품이 결코 진보의 역사 서술 속에서 완결될 수 없으며, 그것은 언제라도 그러한 역사를 파괴할 수 있는 것으로서 다시 도래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벤야민은 그것을 “역사의 변증법적 이미지”라고 부른다. 여기서 벤야민이 변증법이라는 용어로 이해하는 것은 헤겔적인 종합의 개념이 아니라 대립과 충돌을 극단화하는 부정변증법적 개념이다. 변증법적 이미지란 점진적인 역사의 과정이라는 외양을 부수는 역사의 파국적 순간에 나타나는 과거의 새로운 얼굴을 의미한다. “과거의 진정한 이미지는 매 현재가 스스로를 그 이미지 안에서 의도된 것으로 인식하지 않을 경우 그 현재와 더불어 사라지려 하는 과거의 복원할 수 없는 이미지이다.”32) 그 이미지는 문화사와 진보의 역사철학에서 사물화 되어있는 ‘역사적 연속성’을 폭파하여 구원한다.

 

2) 역사와 정치

이러한 역사 이해는 근본적으로 정치적인 행위라 할 수 있다. 발터 벤야민이 진보의 역사철학을 문제 삼는 이유는 그것이 당시 파시즘에 대한 투쟁을 가로막는 장벽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볼 때에 파시즘이 승산이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 적들, 즉 당시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역사적 규범으로서 진보의 이름으로 그 파시즘에 대처하기 때문이다.33) 특히 그들을 열광하게 했던 것은 기술의 발전에 대한 낙관이었다. 19세기 말에 독일 사민당이 커지고 많은 노동자들이 참가하게 되자 교육의 문제가 중요하게 부각되게 된다. 더 이상 단순한 잉여가치론이나 진화론 등을 가르치는 것으로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대중 교육’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당은 노동자들에게 정치경제학뿐만 아니라 문화사의 교육, 정신과학적 지식, 그리고 기술과 관련된 자연과학의 교육을 강조했다. 특히 자연과학은 그것의 실제적 응용성에 있어 높이 평가 되었으며, 기술의 발전은 칸트의 한계를 넘어 인간이 ‘물 자체’를 인식할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기대가 생겨났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기술의 진보 과정 속에 있는 공장 노동이 정치적 업적을 나타낸다고 생각하는 환상에 이르는 것은 단 한 걸음이면 족한” 것이었다.34) 이들에게 노동은 역사의 진보의 원천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벤야민이 볼 때 그러한 노동개념은 해묵은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의 세속화였으며, 무엇보다 파시즘에서 나타나게 될 기술주의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35)

 

이러한 노동과 기술발전에 대한 낙관은 사회민주주의자들로 하여금 노동자 계급에게 미래 세대들의 구원자 역할을 부여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주장 속에서 구원은 미래에 올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와 기술의 진보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 된다. 그들에게 진보는 곧 ‘인류의 진보’였으며, 저지되거나 되돌아갈 수 없는 진보였다. 사회민주주의, 혹은 사회주의자들은 부르주아의 역사관인 보편사의 이념에 투항했으며, 우리가 알다시피 러시아의 사회주의자들은 부르주아지보다 더욱 더 보편사의 이념에 충실한 스탈린주의의 역사관 - 역사발전단계론 - 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노동자 계급이 지닌 가장 강력한 힘에서 그 힘줄을 잘라버리는 것”36)이었다.

 

따라서 벤야민은 역사를 “역사적으로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다룰 것”을 요청한다.37) 그것은 보편사가 아니라 노동계급의 입장에서, 혹은 “억압받는 자들의 전통” 속에서만 이뤄질 수 있는 것이다. 역사가 “균질하고 공허한 시간”으로, 그리하여 진보하는 단선적 이미지 그려질 때 그것은 언제나 승리자들의 기록으로 채워지고 만다. 그러나 억압받는 자들의 전통 속에서 역사란 역사라는 ‘연속체’를 폭파하는 것이며, 하나의 ‘구성’된 시간, 언제나 ‘지금 시간(Jetztzeit)’으로 충만된 시간이 된다. 진보의 역사철학 속에서 억압되고 은폐되었던 억압받는 자들의 기억은 이러한 경험 속에서 해방되어 “모든 현재에 대해 어떤 근원적인 경험이 되는 그런 역사의 경험”으로 작동한다.38)

 

과거를 역사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그것이 ‘원래 어떠했는가’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순간에 역사적 주체에게 예기치 않게 섬광처럼 나타나는 ‘과거의 진정한 이미지’를 붙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주체는 투쟁하는, 억압받는 계급 자신이다.39) 벤야민은 당시 사회민주주의자들과는 달리 마르크스에게서, 잠시 독일을 격변으로 물들였던 스파르타쿠스단의 투쟁 속에서, 또 19세기의 혁명가 블랑키의 투쟁 속에서 억압받는 계급이 과거에 때려눕혀진 자들의 이름으로, 최후의 복수를 수행하는 이들로 나타났다고 말한다.

 

3) 유행이라는 영원회귀, 그리고 범속한 각성

이러한 혁명적인 분출은, 혹은 «폭력비판을 위하여»의 개념을 빌리면 ‘신적 폭력’은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 것일까? 벤야민에게 그것은 역사의 진보 끝에 자연스럽게 도달할 수 있는 것이나, 계획된 프로그램을 통해 일어날 것이 아니다. 그러한 프로그램 속의 혁명적 주체는 이미 혁명적 주체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벤야민에게 대중에 대한 연구는 기술에 대한 연구와 더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이나 «아케이드 프로젝트» 등 그의 연구와 비평의 많은 부분이 대중이라는 현상을 다루고 있다. 특히 그는 19세기 파리, 보들레르 시대의 풍경 속에서 대중의 탄생을 보았다. 19세기는 부르주아지들이 자신들의 업적과 역량에 한껏 고취되었던 시대였다. 19세기의 수도 파리는 백화점, 만국 박람회, 각종 기념비들과 광고들, 최신 유행의 패션들, 인테리어 양식 등으로 구성된 하나의 판타스마고리아(환등상)이었다. 보들레르는 자신의 시에서 이러한 파리를 거닐며 꿈을 꾸는 ‘거리산보자’들을 담아낸다.

 

“거리산보자는 군중 속에서 은신처를 발견한다. 거리산보자에게 군중은 베일이 되는데 그에게 친숙한 도시가 그 베일을 통해 판타스마고리아로 변한다. 이 판타스마고리아 속에서 도시는 때로는 풍경이, 때로는 방이 된다. […] 거리산보자라는 인물에 이르러 지식인들은 시장에 친숙해진다. 거리산보자는 둘러보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이미 구매자를 찾기 위해 나선 것이며 이로써 시장에 종속된다. […] 거리산보자는 동시에 군중 탐색가이기도 하다. 군중에 몸을 내맡긴 사람에게 군중은 아주 특별한 환상을 동반하는 일종의 도취를 만들어낸다.40)

 

거리산보자로서 나타난 대중은 근본적으로 사적 개인들의 집중화 현상일 뿐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소비대중이 파시즘에 의해 조작되는 대중이다. 때문에 군중을 이루는 다양한 계급을 도외시한다면 군중 그 자체는 아무런 일차적인 사회적 의미도 갖지 못하게 된다. 자본주의는 군중을 급속도로, 그리고 거대한 규모로 증대시키며, 전체주의 국가들은 이러한 군중을 모델로 받아들여 ‘민족공동체’를 지향한다.41) 

 

거리산보자들은 언제나 근대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판타스마고리아 속에서 “새로운 것”, 유행을 추구한다. 새로운 것은 더는 어떠한 해석도, 또 어떠한 비교도 허용하지 않는 절대적인 사용가치를 표상한다. 그런데 이러한 유행은 기실 유사하거나 심지어 동일한 테마의 부단한 반복이다. 아무리 혁명적으로 보이는 유행현상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언젠가 유행했던 것의 회귀에 불과하다. “도대체 분간이 되지 않는다. / 똑같이 지옥에서 온 / 그 백 살 난 쌍둥이들은.”42) 그런데 이러한 유행이라는 ‘영원회귀’는 진보의 환상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유행의 시간은 시간의 구석구석에 숨겨진 과거의 잔해들을 현재에 접목시키는 시간이며, 자연적이고 신화적이며 그리하여 삶의 맥락에서 탈각되어 있을수록 사물들은 훨씬 더 용이하게 유행목록에 올라갈 수 있다.43) 근대는 사실 유행을 유행시킨다. 그리고 근대의 기술은 맹렬하게 새로움과 진보를 추구하면서도 그것은 언제나 고대의, 아니 태고의 원사(Urgeschichte)의 요소들, 즉 “계급 없는 사회”의 요소들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벤야민은 19세기에 아케이드를 주거양식으로 구현한 푸리에의 유토피아적 기획 속에서 이러한 유행의 영원회귀적 성격을 발견한다.44) 그리고 그것은 블랑키의 소설을 인용하여 ‘진보’, 혹은 ‘새로움’이라는 판타스마고리아의 영원회귀가 근대를 가능케 하는 조건임을 지적하는 데에까지 나간다.

 

그러나 대중의 이러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시장과 국가는 화해할 수 없는 적대자를 만나게 된다. 그것은 곧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이다. 혁명적 프롤레타리아는 자기 계급의 현실을 통해 군중이라는 가상을 추방한다.45) 그러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와 대중(혹은 군중)은 완전히 구분된 존재일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그는 계급과 대중을 분리시켜 생각하는 태도를 비판한다. 대중 개념을 포기하고 계급 개념으로 대체하게 될 때 그것은 계급의 생성과 계급 속에서 일어나는 과정들을 서술할 도구들 중 하나를 탈취하는 셈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벤야민의 과제는 근대의 환상을 제공함으로써 “정치를 심미화”하는 국가에 맞서 대중을 자각하게 만드는 “예술의 정치화”를 위한 전략을 세우는 것이었다.46)

 

벤야민은 1920년대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운동을 분석한 글에서 그것을 “범속한 각성(profane Erleuchtung)”이라는 개념으로 포착한다. 그것은 언뜻 종교적 체험이나 환각제의 사용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벤야민은 그것을 일상의 영역으로 가져온다.

 

“우리는 일상을 꿰뚫어볼 수 없는 것으로, 그리고 꿰뚫어볼 수 없는 것을 일상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변증법적 시각의 힘으로, 그 비밀을 일상 속에서 재발견하는 정도로만 그것을 꿰뚫을 수 있다. […] 독서하는 자, 사유하는 자, 기다리는 자, 거리산보자는 아편 복용자, 몽상가, 도취된 자와 마찬가지로 각성한 자들의 유형들이다. 그것도 후자의 사람들보다 더 범속한 자들이다.”47)

 

벤야민에게 이러한 범속한 각성의 개념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집단적인 것이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의 문학이 결국 다다르는 곳은 혁명이었다. 그것을 위해 그들은 전방위적인 염세주의를 조직한다. “문학의 운명, 자유의 운명 […] 계급, 민족, 개인 간의 모든 소통을 불신, 불신, 불신하기” 벤야민은 이러한 염세주의는 정치의 공간에서 백 퍼센트의 “이미지 공간”을 발견하며 그것은 더 구체적으로는 “신체공간”이다. 48) 그것은 근대의 진보라는 환상에서 각성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대중이 행동하는 공간이며, 억압받는 자들의 기억이 돌아오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이 공간에서 기술은 진보의 프로젝트에서와는 다른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는다.

 

기술 속에서 집단에게 조직되는 자연(Physis)은 그것의 정치적이고 객관적인 현실에 따라 볼 때 저 이미지 공간 속에서만, 즉 범속한 각성이 우리를 친숙하게 만드는 그 이미지 공간에서만 생성될 수 있다. 그 자연 속에서 신체와 이미지 공간이 서로 깊이 침투함으로써 모든 혁명적 긴장이 신체적인 집단적 신경감응(kollektive Innervation)이 되고 집단의 모든 신체적 신경감응이 혁명적 방전이 되어야만 비로소, 현실은 «공산주의자 선언»이 요구하는 것처럼 그 자체를 능가하게 될 것이다.49) 

 

때문에 벤야민은 당시 새로운 기술과 함께 진행되었던 여러 예술적 실험들 속에서 범속한 각성의 가능성들을 찾았다. 앞서 이야기한 역사의 연속체를 파괴하는 것으로서 ‘변증법적 이미지’의 역사 개념은 문학, 영화, 사진 등의 예술적 작업 속에서 자동기술법, 프로타주, 데칼코마니, 콜라주, 몽타주 등의 기법에 대한 분석으로 이어진다. 유행 역시 ‘범속한 각성’과 ‘변증법적 이미지’의 관점에서는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벤야민은 프랑스 혁명이 스스로를 다시 귀환한 로마로 이해했던 것에 주목한다. 로마의 스타일이 돌아옴으로써 로베스피에르로 하여금 역사의 연속체를 파괴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 벤야민은 유행이 현재적인 것을, 혹은 지금 시간(Jetztzeit)을 알아채는 감각을 갖고 있으며, 그것은 지배 계급이 지휘를 하고 있는 경기장 한복판에서 일어나는 호랑이의 과거 속으로의 도약이라고 말하는 데로 나아간다.50)

 

4) 역사의 구원과 메시아주의

지금까지 살펴본 벤야민의 반-역사주의적 역사철학이 다다르는 곳은 결국 하나의 신학적 역사개념인 메시야주의이다. 그의 마지막 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는 난쟁이 신학자를 말하는 첫 테제부터 “메시아가 들어올 수 있는 작은 문”을 예언하는 마지막 부록에 이르기까지 신학적인 정조로 가득 차 있다. 역사의 진보라는 환상에 젖어 있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구원을 끊임없이 유예시킴으로써 사실상 메시야의 도래를 막아서고 있다. 그러나 벤야민에게 역사는 앞서 살펴보았듯이 “구성의 대상”이다. 그리고 이 구성의 장소는 균질하고 공허한 시간이 아니다. 시간이 균질하게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하나의 성좌(星座, Konstellation)의 형태로 체험된다. 역사 유물론자는 사건들의 순서를 차례로 헤아리는 일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 한 시대는 언제나 과거의 특정한 시대와 함께 등장하며, 그것을 통해 그는 메시아적 시간의 파편이 박혀 있는 ‘지금시간’으로서의 현재를 새롭게 바라본다.51) 그는 우리에게 과거를 읽는 다른 시각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 유물론자’는 과거를 하나의 “희미한 메시아의 시간”(2테제)으로 읽는다. 역사는 무수한 구원의 사건이며, 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단선적으로 진보해 온 과정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섬광처럼 지나간 과거의 진정한 이미지를 붙잡는 것이 된다.  때문에 혁명은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세계사의 기관차’가 아니라 진보라는 ‘기차’를 멈춰 세우는 “비상 브레이크”인 것이다.52)

 

그러나 문제는 언제나 적들은 이 시간을 진보의 시간으로 가져가려 한다는 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전승된 것을 제압하려 획책하는 타협주의로부터 그 전승된 것을 쟁취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53) 사실 이것은 우리가 지난 20여 년간 익숙하게 경험해 왔던 것이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광주에서 섬광처럼 지나간 메시아의 도래를 붙잡아버렸다. 그리고 그 사건을 ‘민주화’라는 진보의 도정 속에 기입했다. 커다란 기념탑을 세우고, 매년 국가 기념행사를 열고, ‘유공자’들에게 보상을 해줌으로써. 노동운동은 ‘전태일’이라는 ‘희미한 메시아’를 애도함으로써 그를 ‘민주노조운동’의 역사 속으로 성공적으로 끌어들였다. 그러자 전태일과 그를 이었던 7,80년대 여공들이 보여주었던 메시아적 힘은 조직 속으로 용해되어 버린다. 그리고 지난날 광주를 기념한다던 민주 정부는 여전히 민중의 삶을 옥죄었고, 전태일을 기념하는 그 조직은 한 여성 노동자에 대한 성폭력을 은폐하며 ‘진보’와 ‘민중’을 이야기했던 것이다. 때문에 메시아는 구원자로서만 오지 않는다. 그는 “적그리스도”를 극복하는 자로서 온다.54) 메시아는 자신들이 메시아인 채 하는 진보주의자의 시간을 중단시키며 도래하는 것이다.

 

 

4. 결론

 

발터 벤야민은 역사의 신학적 차원을 그 메시아적인 극단까지 사유했던 사상가였다. 역사가 진보해간다는 근대의 환상에 대항해서 그는 진보에 파국을 불러오는 메시아의 도래, 혹은 대중의 혁명적 분출을 사유했다. 그것은 어떤 미래에 오게 될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과거에 이미 도래했던 억압받는 자들의 핍박과 구원 속에서 불러일으켜지는 것이다. 역사란 시간 순서나 연대기의 기록이 아니라 이렇게 다양한 구원과 파국의 이미지들이 한 순간에서 성과구조를 이뤄, 현재의 우리를 구원하는 메시아적인 어떤 것이 된다.

 

그는 “억압받는 자들의 전통은 우리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비상사태’(Ausnahmezustand, 예외상태)가 상례임을 가르쳐준다.”고 말한다. 앞서 살펴보았듯, 비상사태의 개념은 주권에 대한 이해와 중요하게 결부되어 있다. 칼 슈미트의 «정치신학»은 주권개념을 비상사태에 근거를 지운다. 주권자는 예외의 경우(비상사태)를 결정하는 자이다. 비상사태는 무정부 상태나 혼란과는 다른 법률적인 의미에서 여전히 법질서는 아니지만 하나의 질서로서 존재한다. 평화 시에도 주권자가 자신의 주권을 주장하고, 법질서의 수호자를 자처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언제든지 예외상태를 선언할 수 있는 자라는 점에서 그 근거를 얻게 된다. 주권자는 곧 세속의 ‘신’인 것이다. 그러나 벤야민은 이러한 ‘정치신학’의 전복을 시도한다. 억압받고 있는 자에게 비상사태는 언제인가? 그것은 매일 매일이다. 그들에게는 매일의 삶이 예외적이고,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삶인 것이다. 때문에 우리의 과제는 “우리는 이(상례화된 예외상태)에 상응하는 역사의 개념에 도달하는 것”이며 그것은 곧 “진정한 비상사태를 도래시키는 것”이다.55) 주권자의 신학은 이렇게 메시야의 신학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미래를 회상 속에서 가르치던 유대인들에게서와 같이 미래는, 미래 속의 매초는 메시아가 들어올 수 있는 작은 문이다.56)

 

오늘날 우리는 상례화된 비상사태가 아주 가시적으로 드러난 모습을 ‘용산참사’를 통해 바라보아야 했다. 진보주의자들은 여전히 “이 모든 것이 이명박 때문이다!”라고 외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과연 이명박 때문일까. 그는 대한민국의 진보를 과거로 되돌리려는 독재의 망령일까? 지난 10년 동안의 ‘민주정부’의 통치가 ‘억압받는 자’들에게 어땠는지 진보주의자들은 진지하게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대우자동자 공장 앞에서, 부안에서, 여의도에서, 울산에서, 차디찬 아스팔트와 한겨울의 굴뚝 위에서, 황새울 들판 위에서, 그리고 각종 재개발/재건축 현장에서 지난 10년 동안 억눌린 자들이 무엇을 겪었는지. 그들에겐 지난 10년도 지금과 같은 “비상상태”였을 뿐이다. 그러나 그들이 투쟁할 때 지난 10년의 “진보주의자”들은 그것을 민주화된 시대의 집단 이기주의로 몰아붙였다. 투쟁은 촌스러운 과거의 유물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 ‘민주화’도 촌스럽게 생각한 대중은 ‘선진화’라는 더 멋있는 역사의 진보를 제시한 지금의 대통령에게 달려갔다.

 

메시아는 언제나 그런 적그리스도들의 극복자로서 도래한다. 2008년 5월 2일, 그리고 6월 1일의 새벽. 갑자기 거리로 뛰쳐나온 소녀들의 시간을, 물대포를 맞으며 모두가 섞여 있던 그 시간을 우리는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그 시간은 분명 “촛불집회”이라는 하나의 지속의 시간으로 명명되는 시간을 초과하는 사건적 시간이었다. 촛불이 거리로 흘러나왔을 때 진보주의자들은 온갖 찬사를 쏟아놓고, 그들을 민주화의 새로운 도정에 기입해버렸다. 그리고 촛불이 사그라지자 이후엔 온갖 비판적 평가를 내 놓으며 그것의 한계를 지적한다. 그러나 “과거의 진정한 이미지”는 그러한 찬사와 평가 중 어디에도 없다. 오직 우리가 경험했던 그 시간이 메시아의 시간이었음을 기억할 때, 그리고 진보주의자들이 오히려 그 시간을 닫아놓고 말았음을 기억할 때, 우리의 미래는 다시금 “희미한 메시아”가 들어올 수 있는 열려진 작은 문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시간이야 말로 벤야민과 우리가 지금시간에서 만나는 지점이며, 동시에 스파르타쿠스와, 뮌처와, 상퀼로트들과, 파리꼬뮨의 전사들과, 로자와 그녀의 동료들과, 쿠바의 민중들과, 베트남 전사들과, 사파티스타와, 3.1절의 민중들과, 광주꼬문의 시민군들과, 전태일과, 5월 2일의 소녀들과, 또 이름 없는 수많은 촛불들과, 그리고 “예수”와 예수의 오클로스들과, 그 수많은 메시아(들)이 지금까지 우리가 기억했던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오직 혁명적일 뿐인 방식으로 한 성좌에서 만나는 지점이 아닐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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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1) 두 논평자는 이 글에서 전개되는 벤야민(과 슈미트)의 정치 신학에 대한 분석이 이 주제와 관련된 다른 연구들과의 관련성 속에서 충분히 제시되지 않고 있으며, 특히 오늘 우리의 사회와 역사의 문제를 탐구하면서 우리 안의 ‘정치신학’의 성과들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필자는 이 지적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이 글에서는 한국에서 전개된 민중신학의 성과, 특히 87년 민주화 이후의 민중현실에 천착한 소위 ‘3세대 민중신학’의 성과나, 벤야민을 위시한 현대 유대주의의 종말론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전개된 서구의 ‘희망의 신학’(몰트만)이나 해방신학 등의 정치신학을 거의 다루지 못하였다. 다만 여기서는 이후 20세기 내내 전개된 정치신학들의 한 근원이 됨에도 그간 한국 신학계에서 거의 다루어지지 못했던 벤야민(과 슈미트)을 신학의 빛 아래서 비추어 본 점에서 학술적 의의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 정치신학에 있어 벤야민의 수용에 대한 연구나, 발터 벤야민의 사상이 한국의 정치신학의 맥락에서 갖는 의의에 대해서는 아쉽지만 추후의 연구과제로 남겨둔다.

2) 계몽주의자들의 정교분리 시도의 성공과 실패의 역사를 다룬 책으로는 마크 릴라, 마리 오 옮김, «사산된 신»(서울: 바다출판사, 2009) 참조.

3) 발터 벤야민, 최성만 옮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발터 벤야민 선집 5권»(서울: 도서출판 길, 2008), 330.

4) 칼 슈미트, 김효전 옮김, «정치신학 외»(서울: 법문사, 1988)

5) 발터 벤야민, op.cit., 337.

6) 칼 슈미트, “의회주의와 현대 대중민주주의와의 대립”, «정치신학 외», 85.

7) 칼 슈미트, “신화의 정치이론”, «정치신학 외», 70.

8) ibid., 72-72.

9) 칼 슈미트 “정치신학”, «정치신학 외», 17.

10) ibid., 18.

11) ibid., 63.

12) ibid., 25.

13) 자끄 데리다, 진태원 옮김, «법의 힘»(서울: 문학과지성사, 2004), 66; 슈미트와 벤야민의 관계에 대한 문헌으로는 Susanne Heil, 'Gefährliche Beziehungen' Walter Benjamin und Carl Schmitt - Studien zur Modernetheorie politischer Gegenspieler(Tutzing: Mikrofische Ausgabe, 1993); Fritz Güde, "Der Schiffbrüchige und der Kapitän. Carl Schmitt und Walter Benjamin", Kommune(Form für Politik und Ökonomie, Bd.3, Nr.6. 1985); Jacob Taubes, Ad Carl Schmitt. Gegenstrebige Fügung(Berlin: Merve-Verlag, 1987), Samuel Weber, "Von der Ausnahme zur Entscheidung. Walter Benjamin und Carl Schmitt", E. Weber/ G Tholen(Hg.), Das Vergessen(e). Anamnesen des Undarstellbaren(Wien: Turia+Kant, 1997); 고지현, “발터 벤야민의 초기 주 저작 «독일 비애극의 기원»에서의 칼 슈미트의 비판적 수용”, 「사회와 철학」 제9호(2005); 조르조 아감벤/ 김항 옮김, «예외상태»(서울: 새물결, 2009); 지오반나 보라도리/ 손철성 외 옮김, «테러시대의 철학, 하버마스, 데리다와의 대화»(서울: 문학과 지성사, 2004) 참조. 특히 아감벤의 책 4장 “공백을 둘러싼 거인족의 싸움”은 문헌학적으로 슈미트와 벤야민의 사상이 마주치고 대결하는 장면들을 연구하고 있다. 아감벤은 벤야민의 “폭력비판을 위하여”가 “정치신학”에 대한 응답인 것이 아니라 “정치신학”이 “폭력비판을 위하여”에 대한 응답이라고 주장한다. 벤야민이 순수한 폭력이라고 부른 법 바깥의 공백(혹은 아노미 상태)을 슈미트는 “정치신학”에서 다시금 법 내부로 끌어올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신화적 폭력과 신적 폭력 사이의 구별을 뭉뚱그려 '순수한 폭력'의 문제로 사유함으로써 “폭력비판을 위하여”의 내용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다. 

14) 발터 벤야민, “폭력 비판을 위하여”, «발터 벤야민 선집 5권», 80.

15) ibid., 87-90.

16) ibid., 95-96.; 진태원의 번역이 좀 더 분명하게 의미를 나타낸다. “경찰의 폭력은 법정립적 - 왜냐하면 경찰의 폭력의 특징적인 기능은 법률을 공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입법적 의도로 온갖 법령을 제정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 이면서 법보존적인데, 왜냐하면 이는 이러한 목적들을 임의로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태원 옮김,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 자끄 데리다 «법의 힘» 부록.

17) ibid., 106., 그러나 단지 ‘분노’에 의한 것만을 어떤 ‘발현’으로서의 폭력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마치 감정의 문제인 것처럼 느껴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앞서 잠시 살펴보았던 예, 아이가 태어나면서 어미에게 가하는 고통이나 자연재해를 이것과 멀지 않게 볼 수 있지 않을까? 거기서 확인되는 것은 어떤 ‘존재의 확인’으로서의 폭력이다. 만물은 서로에게 힘을 행사하고 있으며, 때로 그것은 고통을 수반하는 폭력인 것이다. 아래에서 살펴보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러한 폭력의 발현이 법정립적으로 작동하는가, 아니면 법파괴적으로 작동하는가에 있다.  

18) ibid., 109-110.

19) ibid., 111.

20) “그들이 딛고 선 땅바닥이 갈라지고, 땅이 그 입을 벌려, 그들과 그들의 집안과 고라를 따르던 모든 사람과 그들의 소유를 삼켜 버렸다. 그리고 그들과 합세한 모든 사람도 산 채로 스올로 내려갔고, 땅은 그들을 덮어 버렸다. 그들은 이렇게 회중 가운데서 사라졌다.”, 구약성서 «민수기», 16장

21) 발터 벤야민, op.cit., 112-113., 문장은 문맥에 맞추어 조금 수정

22) ibid., 116., 굵은 글씨는 필자

23) ibid., 116., 진태원의 번역을 참고하여 수정

24) ibid., 102-103.

25) 자끄 데리다, «법의 힘», 73.

26) 발터 벤야민, op.cit., 115쪽

27) 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발터 벤야민 선집 5권», 330.

28) 김홍중, “문화적 모더니티의 역사 시학”. 「경제와사회」, 제70호(2006), 92.

29) 발터 벤야민, “수집가이자 역사가인 에두아르트 푹스”, «발터 벤야민 선집 5권», 274.

30) ibid., 276.

31) ibid., 275-276.

32) ibid., 260.

33) 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발터 벤야민 선집 5권», 337.

34) ibid., 341.

35) 그러나 벤야민이 결코 기술을 비판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벤야민은 혁명적인 집단적 신체를 조직화는 과제를 ‘기술’에 부여한다. 벤야민이 ‘제 2의 기술’이라고 칭하는 이 기술은, ‘제1의 기술’이 인간의 자연 지배에 목표를 두었던 것과는 달리, ‘자연과 인간의 어울림’에 목표를 둔다. 그리고 이 제2의 기술은 “사회의 근원적 힘들을 제압하는 일이 자연의 근원적 힘들과의 유희를 가능케 할 전제가 되는 체제”를 가리킨다. 즉 혁명이 일어나 “인류의 상태가 ‘제2의 기술’이 가능케 한 새로운 생산력에 적응하게 되어야만” 인간이 “그 도구에 봉사하는 일에 노예화되는 대신 그 도구를 통하여 해방되는 것이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제 2판”, «발터 벤야민 선집 2권»(서울: 도서출판 길, 2007), 최성만은 벤야민이 지적하는 사회의 근원적 힘들을 제압하지 못한 채 기술이 인간의 노예화의 도구로 전락한 예를 프롤레타리아트의 빈곤과 억압, 환경 파괴, 전쟁, 더 나아가서는 대중기만으로서의 계몽이라는 역기능을 수행하는 “문화산업”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최성만, “발터 벤야민의 인간학적 유물론”, 「뷔히너와 현대문학」 30호(2008. 5월). 242-243.

36) 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관련 노트들”, «발터 벤야민 선집 5권», 364.

37) 발터 벤야민, 조형준 옮김, “최초의 초고” O°5, «아케이드 프로젝트 5권», 서울: 새물결, 2008, 322.

38) 발터 벤야민, “수집가이자 역사가 에두아르트 푹스”, «발터 벤야민 선집 5권», 262.

39) 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발터 벤야민 선집 5권», 343.

40) 발터 벤야민, “19세기의 수도 파리(1939)”, «발터 벤야민 선집 5권», 238-240.

41) 최성만, op.cit., 245.

42) 보들레르, “일곱 노파”; 발터 벤야민, “19세기의 수도 파리(1939)”, 239.에서 재인용. 벤야민은 보들레르의 이 시에서 개인의 수가 불어나면서도 항상 동일인으로 나타나는, 즉 아무리 새롭고 특이한 모습을 취할지라도 개인은 ‘시민’이라는 전형의 마법적인 고리를 깨뜨릴 수 없다는 도시적 불안감을 발견한다.

43) 김홍중, op.cit.

44) 발터 벤야민, “19세기의 수도 파리(1935)”, «발터 벤야민 선집 5권», 188.

45) 발터 벤야민, “J. 보들레르, J 81 a 1”, «아케이드 프로젝트 2권» 346.

46) 최성만, op.cit., 247.

47) 발터 벤야민, “초현실주의”, «발터 벤야민 선집 5권», 163.

48) ibid., 165.

49) ibid., 167.

50) 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345.

51) ibid.

52) 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관련 노트들”, 356.

53) 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334.

54) ibid.

55) ibid., 337.

56) ibid., 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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