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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죽음, 민중의 부활(2)

 

신의 죽음은 이중적이다. 권력자들은 예수=신을 죽였다. 그리고 예수는 십자가상에서 신의 무능함과 불의를 성토한다. 어찌하여 나를 죽이십니까! 

 

예수는 신이었다. 그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듯, 그만이 성령으로 잉태된 유일한 신의 현현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신성을 가지고 있다. 모든 만물이 신성을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신성이란 곧 '살림'이다. 좁은 의미의 살림 뿐만 아니라 삶과 죽음의 순환을 통해 결국 만물이 살림으로 나아가는 것으로서의 '살림'에서 신성은 드러난다. 즉, 만물이 자연스럽게 살아가고 죽는 것이 신성한 것이다. 예수는 '살림'을 체화한 자로서 신이었다. 누가, 만물의 자연스러운 삶을, 즉 신성을, 즉 신을 죽이는가? 성서 이야기 속에서는 권력자들이다. 그들이 민중을 억압하고, 죽이고, 그리고 예수를 죽인다. 권력자들이 신을 죽인다.

 

그러나 또 하나의 신 죽음을 말해야 한다. 그것은 예수가 선포한 신의 죽음이다. 살림이 사라진 그 순간, 정의가 사라진 그 순간, 예수는 신의 죽음을 선포한다. 아들을 버리는 아버지 신, 그 무능력한 신, 죽어버린 신. 그 신은 본디 권력자들의 신으로서, 거짓 신이다. 그 신은 '인격적인 모습', 특히 '군주'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 그 신은 복종을 명령하며, 복종하는 자에게 사랑과 은혜를 베푼다. 그 신은 특히 권위를 존중할 것을 주장하며, 권력자들, 특히 성직자들이 그 신의 말씀을 해석하고 전하는 특권을 갖도록 한다. 그 신이 바로 예수를 버렸다. 예수에게 그런 신은 죽은 신이다.

 

고통당하고 있는 인간에게, 민중에게 "다 하나님의 높으신 뜻이 있다."고 말하는 성직자들의 신. 전지전능하고 무소부재하며, 선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한다는 초월자인 그 신은 실상 무능력하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데, 민중이 공수부대의 총격과 곤봉질로 쓰러져 가는데 아무 개입도 하지 않는다. 진짜 무능하다. 사실은 죽었다.

 

그러나 예수는 부활했다. 예수의 부활은 객관적인 역사로 나타난 것은 아니다. 성서에서도 부활한 예수를 목격한 것은 그를 따르던 민중들 뿐이다. 부활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객관적 역사가 아니라 민중의 소망을 만난다. 예수가 부활했다. 신의 죽음을 뚫고, 권력자들의 불의와 압제와 죽임을 뚫고 예수가 부활했다. 그 소식을 서로 이야기하며, 또 한 세대 뒤의 아이들에게 들여준 그 이야기들이 복음서의 부활 이야기로 남은 것이다. 마가복음을 정리한 이들은 70년 경의 유다 전쟁을 보면서, 또 헬라 세계에서 핍박받는 예수의 민중들의 상황을 목격하면서 예수의 부활 이야기를 글로 남겼다. 신 부재의 상황 속에서도 예수가 일어났듯이, 우리도 일어날 수 있다는 소망이 이 이야기에 담겨 있다.

 

그러므로 신의 죽음 속에 민중의 부활이 있다. '부활'이란 '살림'의 불을 다시 지피는 것이다. 이것은 권력자들의 죽임에 대하여서는 '저항'으로 나타나며, 저항을 넘어서서는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자연과의 태도에 있어서는 생명에 대한 존중으로, 자연과 인간의 새로운 관계맺음으로 나타난다.

 

광주의 소식은 죽임의 소식이었지만, 이내 부활의 소식으로 변하여 80년대 내내 그 부활의 '민중'들이 일어났다. 일어나면 또 죽임을 당했지만, 그들은 또 다시 부활했다. 민중신학은 부활을 교회와 교리 속에 가두지 않고, 바로 이 저항 사건 속에서 찾았다. 하느님인 우리를 죽이는 세상의 권력자들, 그러나 또 다시 일어나는 민중-예수들. 민중신학은 바로 이 민중-신의 고통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증언하는 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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