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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 동기들이전부,,,

노조일을한다..

좀 의아하다..

한놈은 그냥선배가시켜서 하고

한놈?은 그냥 엉겁결에 공공노조 대의원자리 빈다고 선거나가더니만 당선되었다..

아이러니하다..

내가 너 민노총 대의원하면 데모도 많이해야됨..하니까 절색을 하며 

그런줄몰랐다고 그냥 무슨무슨협회처럼 얼굴마담아니냐고 묻는다..

내반응: @@#$$%%^

 

얼마전에는 그놈들전부 이랜드 상암점에서 투쟁?하고왔댄다..

전혀 거기에어울리지않는

소시민적인

두사람이 노조일을 한다니까 이걸어떻게 해석해야할지,,두고볼일이다..

암튼 대기업노조가 이래서 욕먹는구나 생각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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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다...졸리다....

졸리다...점심은 안먹었다..

몸이 요즘너무 안좋다..

회사에서 각종 사이트를막아놔서 좀 짜증이다..

이러다 고매하신 울회사 CEO께서 진보넷까지 막지않을까 걱정이다..

고매하신 CEO가 울회사 기술가지고 민간기업에 이수하시는것같다..

듣기로는 엘뭐그룹 CEO였다는데,,

지금 삼청동 파란집에서 기말을 보내는 노뽕 하고 친구라나 뭐래나... 

결국 울나라는  에너지산업을 민간기업들이 좌지할것이다..

울회사가 그때 땅을치며 후회할것이다.

내 먹고사니즘이 울나라 에너지향방에 달려있다는게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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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삶이란

역시 건강한 삶이란 건 혼자만의 노력으로 쟁취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어떤 이들과 함께 어떤 형식의 공통의 관계를 맺고 있느냐가 그 사람의 건강한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국가는 확실히 가장 엉망인 상태는 아니지만 건강한 상태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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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이 골프장 건설취소하다

무주군에서 웬일로 골프장이 소송에서졌다..

소송에서 주민의생존권 환경권이  우선된 이례적 판결이 났다..

물론 하급심이지만 상급심에서 다시 원고패소를 내릴확률이 많지만..(거의 그럴듯)

 

마음이아프다..이런판결이 자주있는게아니라 이례적이라는게

말이다..

 

새만금이니 각종 도로건설에 국토가 신음하는데..

이런판결이 거의없다는게..사회의 저급성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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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와 기독교(펌)

자본주의와 기독교

중세 교회는 봉건 지배체제의 일부였습니다. 교회는 엄청난 땅을 소유했고 평민들에게서 세금을 걷고 사법권의 상당 부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하느님이 준 권력인 국왕과 하느님의 대리인인 교회에 복종해야 한다” “현실은 죄로 물든 고통스러운 것이며 인생의 진정한 목적은 천국에 가는 것이다.”

그럴싸한 말이지만, 이 설교에 따르면 모든 현실적 욕망(부도덕한 탐욕뿐 아니라 인간 해방의 욕망 같은 정당한 것까지 포함한)은 사악하고 부질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 자체로 봉건체제의 지배이데올로기였습니다. 성직자와 귀족을 제외한 전체 인구의 95%가 넘는 사람들이 그런 신앙의 사슬에 묶여 수입의 8할 이상을 귀족과 교회에 바치며 평생 죽도록 일만 했습니다. 죽어서 천국에 가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현실적 욕망을 사악한 것이라 설교하는 교회는 현실적 욕망에 가장 충실했습니다. 토지와 돈에 대한 교회의 탐욕은 그야말로 끝이 없었고 평민들의 불만도 점점 높아갔습니다.

상공업이 발달하고 도시가 생기면서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중세 사회는 성직자와 귀족이 제3신분인 평민들을 착취하는 사회였지만 평민들 가운데 일부가 새로운 중간계급을 이루기 시작했습니다. 이른바 부르주아가 출현한 것입니다. 부르주아들은 한편으로 저술가, 의사, 교사, 변호사, 판사들이었고 다른 한편으로 상인, 제조업자, 은행가들이었습니다. 부르주아는 무능한 귀족과 타락한 교회와 대결하기 시작했습니다. 부르주아들은 경제에서 자유방임, 사회적으론 ‘이성의 지배’를 표방하며 성장했고 자신들에게 마지막 남은 제약, ‘신분’을 해결합니다. 그게 바로 시민혁명입니다.

시민혁명은 프랑스 혁명, 영국혁명, 이렇게 일컬어지는 사건이지만 봉건사회가 부르주아에 의해 점령되는 수백 년에 걸친 과정이기도 합니다. 종교개혁은 그런 과정의 제1막입니다. 흔히 종교개혁을 타락한 교회에 대한 정당한 저항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종교개혁의 의미를 기독교라는 카테고리 안에서만 보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은 부르주아가 봉건 지배체제로서 교회를 자신들의 체제로 변화시키는 사건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을 통해 교회는 달라졌지만, 교회가 지배체제의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봉건시대의 교회는 부를 더러운 것이라 설교했지만 종교개혁가들은 부는 하느님의 축복이라 설교했습니다. 칼빈은 최초의 기업정신을 만듭니다. “사업으로 얻는 소득이 토지 소유로 얻는 소득보다 많아서는 안 되는 이유가 뭔가? 상인의 이윤이 그 자신의 근면과 성실에서 오는 게 아니라면 대체 어디에서 온단 말인가?”

막스 베버는 칼빈이 말한 근면과 성실, 그리고 금욕으로 요약되는 이른바 ‘프로테스탄트 정신’이 자본주의를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돈을 축적하는 일은 죄가 아니라 하느님이 축복하는 선한 일이 되었기 때문에 자본주의적 축적이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맑스주의는 생산력이 발달하고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만들어지면서 그에 조응하는 정신적인 가치들이 생겨났다고 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프로테스탄트 정신이 어떻게 생겨났는가가 아니라 그 정신이 현재 우리에게 무엇인가, 입니다. 프로테스탄트 정신이 봉건사회에 대한 저항으로서 갖는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의미보다는 그 정신을 담은 자본주의 사회가 어떤 사회인가가 더 중요합니다.

부의 축적은 칼빈이 말한 대로 여전히 근면과 성실, 그리고 금욕으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물론 성공한 자본가들은 자신이 정당하게 부자가 되었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 그런 선전들을 많이 합니다. 우리는 김우중 씨의 안경다리가 20년 된 것이라느니 정주영 씨가 근검절약이 몸에 밴 사람이라느니 하는 이야기들을 수도 없이 듣습니다. 그들이 ‘안경다리’가 아닌 개인 용도에 상상하기 어려운 돈을 쓰기도 한다는 점에서 그들의 근검절약은 그들의 호사 취미일 뿐입니다. 그러나 좀 더 본질적인 문제는 그들의 부가 근검절약으로 축적된 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평생 모은 돈을 대학게 기부하는 김밥 할머니가 아닙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가 부를 축적하는 원리는 어디까지나 노동자의 잉여 노동입니다. 즉 노동자의 100원어치 노동을 60원에 사 40원을 먹는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교회가 사회적 불평등에 참여하는 전통적인 방법은 이른바 자선입니다. 미국의 자본가들은 자선 사업에 기부함으로써 사회적 영웅 대접을 받습니다. 그러나 자선은 두 가지 문제를 갖습니다. 하나는 그 대상이 되는 사람들을 ‘불쌍한 인간’으로 만드는 것인데 이것은 전혀 신앙적이지 않습니다. 둘째는 자선이 가난의 부당함과 가난을 만드는 사회적 모순을 은폐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든 어떤 노동이든 사람이 일주일에 40시간 이상 노동을 하면 먹고 살 수 있고 얼마간의 인간적인 여가를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가 못하다는 것이고 우리는 그런 불공정한 상태를 고쳐내야 합니다. 자선은 바로 그것을 값싼 눈물과 감동으로 차단합니다.

우리는 워낙 반공주의 경향이 강한 나라에서 살다보니 흔히 자본주의는 다 같은 줄 알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미국은 우리보다는 나은데 유럽은 또 미국과 전혀 다릅니다. 우리 기준으로 보면 유럽 나라들은 사회주의 사회에 가깝습니다. 근래 미국의 제국주의적인 정책에 열심히 따른다고 비난을 받는 영국만 보더라도 의료와 교육이 전액 무료입니다. 독일이나 프랑스의 사회복지는 말할 것도 없고 북유럽 쪽의 사회복지는 서유럽보다 더 높은 수준입니다. 몇 해 전에 노키아의 부회장이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과속으로 걸려서 범칙금으로 1억 3천만원을 냈다는 이야기는 잘 아실 겁니다. 그런데 작년 말엔 같은 핀란드의 27살짜리 부자가 자동차 과속으로 2억 5천만원을 냈습니다. 우리는 이건희가 과속을 하건 40대 무주택 가장인 김 아무개가 과속을 하건 똑같이 3만원을 내는 걸 공정하다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유럽에서 기독교는 뚜렷하게 쇠락하고 있습니다. 현대 신학의 중심지라는 독일의 교회는 노인들만 몇몇 앉아서 예배를 봅니다. 반면에 미국이나 한국처럼 자본주의적 모순이 좀 더 노골적인 나라에선 교회가 차고 넘치지요. 이것은 현재 기독교의 정신이 자본주의적 모순이 좀 더 노골적인 사회에 부응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기독교 정신이 인류의 미래에 전혀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유럽 사회의 사회복지는 본디 자본주의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그 사회들은 러시아보다 더 먼저 사회주의 나라가 될 뻔 했고 그걸 막기 위해 사회주의자들과 타협을 했던 것입니다. 물론 사회주의는 유물론을 기초로 하고 유물론자들은 대개 하느님의 존재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떠받드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사람답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기독교의 본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기독교의 본래 정신은 프로테스탄트 정신도 종교개혁의 정신도 아닌 예수의 정신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는 건 기독교인에게 당연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만 강조하여 예수가 우리에게 가르친 삶의 방식을 외면하는 건 종교체제로서 기독교나 교회에 사로잡혀 예수를 다시 한번 팔아먹는 행위라는 것을 되새겨야 합니다. 예수는 단 한 번도 새로운 종교를 만들려고 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는 단지 어떻게 사는 게 사랍답게 사는 것이고 하느님을 섬기는 삶인지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교회는 그런 삶을 실천하고 전하기 위한 조직입니다.

기독교 정신의 가장 위대한 지점은 ‘하느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형제자매’라는 것입니다. 백인이든 흑인이든 여성이든 남성이든 어른이든 아이든 부자든 가난뱅이든 배운 사람이든 못 배운 사람이든, 심지어 기독교인이든 불교신자든 이슬람교도든 모든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형제자매입니다. 예수는 바로 그 사실을 몸소 보여줌으로써 유대인의 신으로 여겨지던 하느님이 온 인류의 신임을 가르쳐주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형제자매’라는 건 참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그 정신은 어떤 형태의 차별이나 착취도 불가능하게 합니다. 사회주의가 분배의 공정함을 목표로 한다면 기독교 정신은 분배의 공정함을 이룬 다음에도 남는 ‘내 형제에 대한 염려’입니다.

기독교인에게 남보다 더 좋은 것을 입고 먹는 일은 바로 헐벗고 가난한 내 형제에 대한 배신입니다. 8억이 넘는 사람들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그 가운데 3억이 어린 아이들입니다. 기독교인은 바로 지금 자기마치 3억 명의 제 새끼가 굶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은 어떤 맛있는 걸 먹을까 찾아다니고 돈을 들여가며 비만을 치료하고 지역마다 음식 쓰레기를 맡지 않겠다고 싸웁니다. 이역만리 어느 곳에 부당하게 고통 받는 사람이 단 한명이라도 있다면 기독교인은 편하게 잠을 이룰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바로 ‘내 형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사실에서 기독교가 사회주의를 훌쩍 뛰어넘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회주의는 공정한 분배체제를 만들 수는 있었지만 사람들에게 그런 마음을 키워내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것을 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런 마음에서 출발합니다. 교회는 그런 마음을 키우고 실현하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는 지난 2천년 동안 단 한 번도 제대로 이해받지 못했습니다. 그 중요한 원인은 예수의 정신이 너무나 현대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정신엔 사회주의, 여성주의, 생태주의, 아동인권을 비롯한 인류가 현대에 들어서야 깨달은 여러 소중한 정신들이 이미 들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예수의 일행엔 언제나 여성들이 여럿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류 역사의 어떤 현인이나 종교 창시자도 여자를 일행에 포함시킨 일이 없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자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2천년 전에 여자들과 동행했고 여자 가운데서도 가장 천한 성매매 여성과 인격적으로 교우했습니다. 예수의 그런 행동이 사람들을 얼마나 당혹스럽게 만들었을지 사회에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을지 잘 생각해보십시오. 오늘 기독교인은 과연 어떤 행동으로 사회에 당혹감과 충격을 주고 있습니까?

기독교는 예수의 정신을 되찾아야 합니다. 이기심과 사적 소유를 기반으로 한, 땀 흘려 같이 일하고도 남보다 수천 수만배의 돈을 벌어들이는 사람이 찬미되는, 계급적 착취와 제국주의적 착취가 공공연한, 사랑이나 존경까지도 돈으로 매매되는 자본주의는 기독교인에게 말 그대로 악마의 사회체제입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자본주의는 초기 자본주의의 야만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80년대 말 자본주의의 강력한 경쟁자이던 동구 사회주의들이 몰락하면서 더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지금 인류를 나락으로 떨어트리고 있습니다. 빈부격차는 급속하게 벌어지고 이윤을 차지하기 위해선 공공연한 침략전쟁도 불사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그런 현실에 대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응하기는커녕 오히려 그에 부응하고 있습니다. 그런 현상이 가장 강한 교회가 바로 한국의 교회입니다. 한국 교회가 이렇게 된 배경은 흔히 미국식 근본주의 기독교, 말하자면 지금 부시 일당이 믿는 그런 기독교가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맞는 얘기지만 보다 더 결정적인 배경은 세계 교회사에서 유례가 없다는 이른바 ‘한국교회의 놀라운 부흥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놀라운 부흥은 주로 박정희 개발 파시즘 기간 동안의 일입니다. 물론 그건 시간상의 우연한 일치가 아닙니다. 한국교회는 개발 독재의 가장 충직한 선전선동 장치였습니다.

“믿으면 받는다” 라는 한국 교회의 설교는 “하면 된다” 라는 개발 독재의 구호와 일치했습니다. 한국 교회의 무조건적 반공주의는 민주주의적 의견을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독재의 의도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또한 교회는 사람들의 자연스런 저항의식을 배설하게 하는 공간이었습니다. 관제 행사가 아니라면 여럿이 모이는 일조차 불편하던 시절, 교회는 사람들이 마음껏 소리치고 교제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습니다. 특히 파시즘이라는 사회적 억압에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식의 전근대적 가부장제에 시달리던 여성들에게 교회는 그야말로 해방의 공간이었습니다. 게다가 믿으면 남편도 자식도 잘된다는데 당시 여성들에게 그보다 더한 가치가 어디 있겠습니까. ‘아줌마’들은 교회 부흥의 돌격대가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의 놀라운 부흥사’는 그렇게 씌어졌고 오늘 한국 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저급한 신앙관을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90년대 이후 우리 사회는 파시즘이 물러나고 민주화와 개혁이 진행되었지만 파시즘이 있던 자리를 대신 자본이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자본의 지배는 파시즘의 지배처럼 폭력이나 억압을 통한 게 아니라 사람들에게 자본의 달콤한 욕망을 심어주어 스스로 복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돈이면 뭐든 다 된다는 생각을 심어주어서 사람들이 돈 앞에 무릎 꿇게 만드는 것이지요. 인간적이고 품위 있는 세상에 관심을 갖기 보다는 부동산과 통장 잔고에 집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교회는 새로운 지배자에게도 ‘준비된’ 선전선동 장치입니다.

제가 한국 교회를 욕하고 있지만 한국 교회에는 예수의 삶을 본받으려는 세계 교회사에 중요하게 기록될 만한 소중한 실천들도 존재했습니다. 70년대와 80년대 초에 모든 사회운동의 중심에 진보적인 교회가 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정신을 갖는 교회는 이제 거의 없습니다. 이젠 거의 모든 교회가 하느님 대신에 돈을 섬깁니다. 오늘 대개의 한국교회는 교회가 아니라 교회를 가장한 상점들일 뿐입니다. 그 살벌하던 파시즘 시절에도 살아있는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거의 없습니다. 파시즘보다 ‘자본의 신’이 기독교인에게 더 무서운 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는 예수가 살던 2천년 전 유대사회처럼 단순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차별과 착취는 언뜻 알아보기 어려운 복잡한 구조로 되어있고, 신문이나 방송 같은 주류 미디어와 여론을 가장한 온갖 이데올로기 공작, 특히 지배체제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는 네티즌의 활약은 그 복잡한 구조를 한 번 더 덮어 버립니다. 깊고 뜨거운 신앙심이나 영적 신령함이 그 구조를 자동으로 보여주진 않습니다. 자본주의를 들여다볼 수 없다면 예수의 삶을 실천할 방법도 없습니다. 오늘 기독교인에게 자본주의에 대해 공부하는 일은 성경 공부만큼이나 중요합니다. 부동산이나 주식 같은 공부를 말하는 게 아니라 이놈의 자본주의가 대체 사람들의 피를 어떻게 빨아먹고 있는가, 우리의 신앙을 어떻게 파괴하고 있는가를 공부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예수가 정치적 박해를 받았다는 사실, 예수가 당대 지배체제와 대결했다는 사실에 정직해야 합니다. 그 대결의 방식에서 나타나는 비폭력성만을 편의적으로 발췌하여 예수의 급진성을 모호하게 만들어선 안 됩니다. 교회가 다 돈을 섬기게 되었다고 말했는데 돈 대신에 다른 걸 섬기는 교회도 있습니다. 바로 ‘내 마음’을 섬기는 교회입니다. 그런 교회의 목사님과 신도들은 다 온화하고 도사들 같습니다. 수염 이렇게 기르고 개량한복 입고 조용히 앉아서 “부시나 라덴이나 똑같다”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 흉내를 내지만, 그 폭력의 현실과 내 형제의 고통을 ‘초월’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시 예수를 팔아먹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가 단 한 번도 현실을 떠나거나 초월한 어떤 가치를 말한 적이 없다는 것을 되새겨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가 이 천박한 자본주의 세상에 살았다면 어떻게 했을까 늘 고민해야 합니다. (평신도 아카데미 강의)

Posted by gyuhang at 2005.06.07 03:32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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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구르트(펌)

요구르트

1917 년 러시아혁명을 시작으로 지구 곳곳에 사회주의 나라들이 생겨났다. 그 나라들은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 나라들과 긴장하며 자본주의의 야만을 극복한 사회를 시도했다. 70여년 뒤, 그 가운데 동구 사회주의 나라들이 일제히 무너졌다. '현실 사회주의'의 그런 결과는 대개 사회주의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판단으로 이어진다. 사회주의란 실현 불가능하거나, 가능하더라도 끔찍한 것이라고 말이다.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약탈적 형태로 내달리는 오늘 우리는 10여년 전 그 일을 한번쯤 되새길 만하다. 그 사회주의는 우리가 확신하듯 그저 끔찍한 것이었나. 만일 그렇다면 모든 사회주의적 시도는 미망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회주의에 존중할 만한 구석이 있어서 그렇게 무너지고 만 게 애석한 일이라면, 우리는 사회주의에 대해 좀더 사려 깊게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 하나는 우리가 현실 사회주의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 사회주의를 판단하는 이런저런 정보들이란 대개 (CNN에 의해 걸러진 이라크처럼) 다시는 지구상에서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는 시도가 일어나길 바라지 않는 반공주의자들에 의해 걸러진 것이다. 사실 한 사회가 살 만한 곳인가를 판단하는 건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가장 쉽게 범하는 실수는 사회주의 사회를 자본주의 사회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른바 '자유'라는 말로 요약된다. 그러나 그 자유란 단지 자본주의적 자유다.

자본주의가 야만의 체제인 건 경쟁력 있는(잘나고 능력 있는) 소수의 인간은 한없이 안락하고, 평범한(정직하고 성실할 뿐인) 다수의 인간은 한없이 고단한 인생을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안락한 소수에겐 고단하게 살아볼 자유마저 보장되지만 고단한 다수에겐 고단하게 살 자유만 보장된다. 자본주의에서 자유란 어디에나 진열되어 있지만, 돈이 없으면 구매할 수 없는 상품이다.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적 자유가 제한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그 제한은 좀더 많은 정당한 자유를 위한 제한이다. 사회주의에선 경쟁력 있는 소수가 평범한 다수보다 몇백 몇천배 안락할 자유는 보장되지 않는다. 자본주의에선 그게 정당한 일일 수 있지만 사회주의에서 염치없고 부도덕한 일일 뿐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에선 제 아무리 경쟁력 없는 사람도 사회성원으로서 의무를 다한다면 최소한의 인간적 품위를 유지할 자유가 보장된다.

경쟁력 있는 소수에게 사회주의란 달갑지 않은 것이다. 나처럼 잘나고 능력있는 사람이 저런 평범한 멍청이들과 큰 차이없이 살아야 한다는 건 견딜 수 없는 모욕일 테니. 그러나 한없이 고단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사회주의란 여전히 희망의 근거다. 사회주의는 유식한 혁명가들의 고민거리가 아니라 나와 내 새끼들의 미래를 염려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고민거리인 것이다.

현실 사회주의를 진지하게 되새겨보는 일은 그런 고민을 푸는 한 갈래가 된다. 우리가 들어야 할 것은 반공주의자들의 목소리나 사회주의에 살았으되 자본주의적 자유를 갈망했던 특별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아니라, 사회주의에서 살았던 평범한 사람들의 목소리다. 우리가 이라크 전쟁의 진실을 이라크의 평범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서만 들을 수 있었듯 말이다.

불가리아의 장수마을(요구르트 먹고 장수한다는 광고에 나온 그 마을)엔 더이상 장수노인들이 없다. 마을 묘지엔 1990년즈음 세해 동안 죽은 사람들의 묘로 그득하다. 마을 사람들의 얘기는 이렇다. "사회주의 시절엔 안락하진 않았지만 적어도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하진 않았다. 소박하나마 집과 자동차도 나왔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사람들은 먹고사는 문제를 스스로 감당해야 했다. 노인들은 그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했다."

그 노인들의 장수비결은 요구르트가 아니라 사회주의였던 셈이다. 그게 그 마을에만 해당하는 이야기인지 아닌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우리는 그걸 알아야 한다.(씨네21 2003/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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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값 골프장 논란을 듣고, 지난 4년 간의 골프 논쟁을 되돌아 본다

"말 안 통하는 정부와 더 이상 논쟁할 수 없다"
  반값 골프장 논란을 듣고, 지난 4년 간의 골프 논쟁을 되돌아 본다
  2007-08-17 오후 9:29:58
  3년 전, "이헌재의 '골프 공화국' 음모에 반박한다"라는 글을 통해 골프장 건설을 통해 경기를 부양하겠다는 정부의 논리를 반박했던 우석훈 박사가 더 이상 '골프장 논쟁'을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무분별한 골프장 건설이 낳을 문제점에 대한 우 박사의 생각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니다. 정부의 입장이 바뀐 것도 아니다. 오히려 정부는 농지를 활용하여 '반값 골프장'을 짓겠다는 정책을 내놓았다.
 
  우 박사가 견디지 못 한 것은 지난 4년 동안 지속돼 온 정부의 일방적인 태도 때문이다. 정부가 더 많은 골프장을 짓는 것이 유익하다고 판단했다면, 구체적인 수치와 논리를 근거로 제시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 그저 "사람들은 골프를 원한다"라는 명제 이외의 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음은 우 박사가 노무현 정부의 골프장 증설 정책에 대해 던지는 마지막 기고 전문이다. <편집자>
 
  골프장 반대 운동은 '전패의 싸움'
 
  최근에 정부에서 반값 골프장을 농지를 활용해서 만들자는 얘기를 하면서 수면 밑으로 가라앉아있던 골프 논란이 다시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물론 골프 논쟁만 수면 밑에 있었지, 실제로 골프장 건설이 정지된 적은 한 번도 없다.
 
  나는 개인적으로 골프를 치지 않는다. 물론 내 주위에는 골프를 치는 사람이 많다.
 
  한국에서 환경단체는 반핵활동과 골프장 반대, 두 가지 축을 중심으로 다른 어떤 나라보다 빠른 시일 내에 급성장을 했다고 할 수 있는데, 약간 크게 본다면 서울에 있는 소위 중앙단체들은 반핵활동으로, 그리고 지방의 환경단체들은 골프장 싸움으로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그만큼 골프장은 지역에서 큰 사건이다. 이건 찬성쪽이나 반대쪽이나 모두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지난 4년간, 소위 골프장 싸움에 환경활동가들이 붙인 별명이 '전패의 싸움'이다. 알려진 바로는 단 한 건도 골프장을 막아본 적이 없다. 막을 수 없는 싸움이다. 그만큼 골프장은 힘의 균형이 건설 쪽으로 많이 이동했다.
 
  나는 지난 4년 동안 자의반, 타의반, 우리나라 골프장 싸움의 한 축을 형성하게 되었는데, 지금의 경제성 평가에 대해서 인용되는 수치들, 혹은 고용이나 지방경제에 대한 기여도 평가 등의 숫자들이 대체적으로 내가 산업연관표를 놓고 뽑았던 숫자들이다.
 
  지난 4년을 돌이켜 보면, 시민단체에서 사용하는 많은 숫자들이나 논리들도 내가 만든 것들이 많고, 동시에 청와대의 부탁을 받고 만들었던 보고서도 역시 내가 만든 것들이 좀 있다. 성격상 나는 우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고, 가능하다면 직접 계산해보고 수치를 제시해서, 진실이 어떤 것인지 알려고 하는 편이다.
 
  물론 가끔 잘못된 수치를 계산하기도 한다. 그래서 나중에 고쳤는데도, 예전 자료들이 계속 인용되기도 한다. 내가 다 맞는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한 번은 차분하게 골프와 한국경제라는 질문을 독자 여러분들과 상의하고 싶었다. 지금 나는 골프에 대한 찬성이냐, 반대냐에 대해서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어떤 상황인가에 대해서 차분하게 전달하고 싶을 뿐이다.
 
  <국내 골프장 수 추이>
  


 
 

1990년
 
 

1995년
 
 

1998년
 
 

1999년
 
 

2000년
 
 

2001년
 
 

2002년
 
 

2003년
 
 

회원제

퍼블릭

軍 골프장
 
 

43

9

3
 
 

79

16

4
 
 

92

30

4
 
 

103

34

4
 
 

108

40

4
 
 

110

44

4
 
 

113

48

4
 
 

122

55

4
 
 

합 계
 
 

55
 
 

99
 
 

126
 
 

114
 
 

152
 
 

158
 
 

165
 
 

181
 
 


  이헌재-이해찬-노무현 골프 삼각동맹
 
  우리나라의 골프정책은 2004년, 정확히 얘기하면 열린우리당이라는 한 정당이 총선을 치루기 직전까지는 억제정책이었는데, 일종의 소극적 균형정책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열린우리당은 당시 총선에서 골프장 건설을 공약으로 들고 나왔었는데, 정당에서 최초로 골프장이 공약이 된 사건이었다. 물론 열린우리당은 당시 탄핵열풍으로 압승을 했고, 이렇게 해서 열린우리당은 정책적으로 골프장 건설을 추진했다.
 
  이 정책을 정부에서 받았던 사람은 당시 경제부총리였던 이헌재였는데, 그 시절 '한국형 뉴딜'이라고 경제살리기에 매진하던 정부의 경기부양책은 기업도시와 골프장 건설이라는 두 축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런 재경부의 정책을 뒤에서 '규제합리화'라는 법률 및 제도 수정으로 뒷받침한 사람은 이후 총리가 된 이해찬 전 총리였다. 이들에게 골프장 건설을 독려한 사람은 대통령인 노무현이었다. 그렇게 해서 이헌재-이해찬-노무현의 골프 3각동맹체계가 완성되었다.
 
  후에 기획예산처에서 지방경제 살리기 차원에서 국공유지에도 퍼블릭 골프장을 만들어야 한다는 '선택 및 집중' 전략을 발표하는데, 이 논쟁에서는 정부가 졌다. 지금 논의되는 '반값골프장'은 이 퍼블릭 골프장 정책의 연장선에 서 있는데, 요번에 바뀐 것은 어차피 망할 것이 뻔한 농지에 짓자는 것이다.
 
  참고로 다른 정당의 정책을 살펴보면, 한나라당은 아직까지 개별 의원들의 입장과는 상관없이 골프장 찬성을 당론으로 정한 적이 없고, 민주당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민주노동당은 골프장 난개발 반대를 당론으로 가지고 있다.
 
  정책의 기조로만 보면,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이 골프장 건설의 주축이다.
 
  웬만한 사람 다 친다. 정말?
 
  우리나라 인구 중에 골프를 얼마나 치느냐는 것은 기본적인 통계의 문제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이제는 대중 스포츠다"라고 말하거나 "웬만한 사람은 다 친다"라고 하지만, 이건 과학적인 자세는 아니다. 읍면동 중 읍면에 해당하는 지역, 즉 농촌에 가면 골프치는 사람 정말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정부는 얼마나 골프를 치는지 아는가? 이건 아무도 모른다. 생활체육 참여인구라는 통계가 기초통계인데, 이건 연인원이고, 천오백만명 정도로 추정된다. 문제는 이게 연인원이라는 데에 있다. 정부는 연간 5회를 기준으로 5백만명이 골프 인구라고 주장하는데, 같은 정부통계이지만 사회통계조사 중 문화와 여가부문에서는 연 9.1회로 되어있고, 이를 적용하면 150만명 정도가 된다.
 
  2004년 갤럽조사에 의하면 전국 20대 성인 이상의 인구 5.8%가 아주 넓게, 즉 골프연습장까지 포함한 골프인구이고, 이 중 필드에 나가는 사람은 다시 37.8%라는 조사가 있다.
 
  골프가 출발한 영국의 경우에 인구 5% 정도를 골프인구로 추정하고, 여성 골퍼는 다시 여기의 1/10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대체적으로 인구의 5% 정도가 OECD 국가들에서의 골프 인구라고 볼 수 있는데, 특별한 사회적 편향이 없다면, 대체적으로 우리나라의 경우인 5%, 즉 250만명 정도가 소위 포화점(saturate point)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정도의 추정이 일관된 것이라고 보는게, 한국 레저연구소에서 우리나라의 적정 골프장 수를 350개 정도로 보고 있고, 실제로 골프장 회원권 시세표와 운영실적 같은 것을 검토하면, 현재 골프장 하나가 생겨나면 하나가 망하는 것이 실제 통계이다. 새로 좋은 골프장이 하나 생기면, 전국 어디에선가 오래되고 낙후된 골프장이 망하는 것이 현장에서 추정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시장의 특성이다.
 
  수요가 엄청나게 늘 것인가? 그렇게 보지는 않는다. 이미 현재로 늘만큼 늘었고, 지금 소득이 더 는다고 해서 골프인구가 엄청나게 늘 것이라고 볼만한 다른 통계가 별로 없다. 경제양극화라는, 정성적인 경제추세와 연결시키면, 부자가 된 상위 5%가 골프장에 나가는 횟수가 늘어날테니까 연인원은 약간 증가하겠지만, 실제로 필드에 나갈 수 있었던 중산층의 몰락이 더 빠를 것이라서, 수요가 급증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내 추정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투기목적으로 골프는 치지 않으면서 회원권을 구매하는 추세가 조금 생겨났다. 회원권 증가가 곧 골프 수요의 증가는 아니기 때문에, 정말로 숫자를 추정하는 게 일인 내 입장에서도 한국에서 얼마나 골프를 치는지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다.
 
  정부에서 현재로서는 나보다 더 정확한 골프 데이터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 것으로 알고, 나보다 오래 이 수치에 대해서 고민한 담당관도 없는 걸로 안다.
 
  국내에 골프장 지어서 외화 유출 막는다?…해외 골프 여행은 골프 인구에 비례
 
  해외에 골프치는 사람들을 국내에 유치해서 외화를 절약하면 좋지 않겠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골프관광의 패턴 분석이 필요하다.
 
  가장 간단한 패턴 분석은 계절별 분석인데, 정확한 골프인구는 아니고 골프채 반출인구는 2004년까지 관세청 통관통계가 있다. 그 이후로는 이 통계를 작성안하기 때문에, 현재의 추세는 아무도 모른다.
 
  2003년을 기준으로 보면, 1월 2월 그리고 11월 12월의 4계절, 즉 겨울철의 골프 관광객의 숫자가 60.27%로서 해마다 이 정도 숫자를 비록하고 있는데, 추세적으로는 증가추세에 있다. 추정이지만, 아마 2006년에는 65% 정도 되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하지만, 이건 아무도 모른다. 하여간 60% 이상의 골프관광이 겨울철에 이루어진다.
 
  이 숫자가 의미하는 바는 절반 이상이 겨울철에 골프관광을 간다는 것인데, 경제학적으로 가장 합리적인 것은 이 숫자가 골프인구의 1차 함수라고 설정하는 방법이다. 국내 골프인구가 더 많아지면, 이 숫자는 증가한다.
 
  어차피 겨울에도 골프를 치는 인구의 비율이 증가하게 된다고 보면 정확할 것이다. 정부에서 말하는 것처럼 골프를 더 대중화시키면, 이 겨울철 골프관광객의 외화지출 숫자가 더 늘어난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이 숫자를 보완하기 위해서 여름철을 보면, 7월과 8월의 해외 골프 인구가 16.54%이다. 이 숫자 역시 여름 휴가를 해외골프로 사용하는 사람들의 비율인데, 골프인구가 늘어나면 결국 이 숫자도 유지된다.
 
  2000년 이후 4년간의 겨울과 여름 해외 골프 인구 수치를 더하면 75% 정도가 나오는데, 봄과 가을에도 해외에 나가는 골프치러 가는 사람은 25%라는 얘기가 된다. 아무리 국내에 골프장을 많이 늘려도 대체 효과는 이 25% 미만의 효과만 나오고, 실제로 골프인구 자체가 늘면, 골프 관광이 늘 것이라는 것이 내 판단이다.
 
  예전에 이를 보완하겠다고 제주도에는 이미 허용총량을 넘어서 골프장을 지었는데, 이 추세가 전혀 완화되지 않았다. 게다가 몇 개의 제주도 골프장은 영업이 어려울 정도로 힘든 상태라고 알고 있다.
 
  경제학도 과학이라면, 이 수치를 가지고 국내에 골프장을 많이 지으면 외화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명제를 적어도 실증적으로 입증할 방법은 없다.
 
  레저연구소에서 가끔 보조적인 수치들을 제시하는데, 해외골프비용은 연간 5~6천억 정도로 추정되며, 이 중 특히 골프만을 위해서 지불된 돈은 1천억원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물론 이 추정이 신빙성은 없기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 태국 골프여행 5박 상품으로 추정해봤는데, 최대값이 3천억원 정도가 나온 계산을 해본 적이 있다.
 
  과학적으로 얘기한다면, 순수 해외골프 지출은 우리나라에서 연간 천억원에서 3천억원 사이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국내 골프장 1~2개 건설비 밖에 안된다.
 
  골프장 제초제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은 관심 없나
 
  골프장에 관한 생태적 문제는 워낙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지적한 것이라서 굳이 지적하고 싶지는 않다. 유사한 문제이기는 한데, 이 문제를 보건적으로 조금 지적하고 싶다. 이건 예방의학에 관한 문제이다.
 
  골프장의 보건적 효과에 대해서 정부에서 체계적으로 연구를 한 적이 없다고 알고 있는데, 예방의학 전공한 일부 의사들이 가끔 여기에 대해서 지적을 하기는 하지만, 공개적으로 글을 쓰거나 논문을 발표한 적은 거의 없는 걸로 알고 있다.
 
  농약과 제초제에 관한 문제인데, 워낙 골프장의 환경적 문제에 대해서 많이 지적을 해서 필드에서는 상당히 사용량이 줄었는데, 문제는 그린(잔디)에서 생긴다. 그린에서 사용되는 농약과 제초제는 1년에 두 번 환경부에서 잔류농약 검사를 하는데, 날짜를 알려주고 가기 때문에 사실 실효성은 없다. 그런데도 전체 골프장의 절반 정도가 매번 이 검사에 걸리고, 적발된 골프장 중에서 많이 쓰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 사이에는 열 배 정도 차이가 난다.
 
  보건적으로는 두 가지 문제가 생기는데, 주로 제초제에 집중되어 있다. 발암이 한 가지 문제이고, 기형아 출산 등 출산이 또 다른 문제이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나라에서는 한 번도 지적된 적이 없지만, 미국의 일부 주에서는 골프장 보건 매뉴얼을 만들어, 골프장에 임산부가 가지 않는 것이 좋다거나, 골프장에서 돌아온 뒤에는 꼭 손을 씻고 아기들을 만지라고 약간의 보건수칙을 나눠주는 것으로 들었다.
 
  골프장에서 사용하는 제초제의 경우는 기형아 출산과 관련된 과학적 논란이 종종 이는 물질이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골프장 내방객과 캐디에 대한 보건 대책에 대해서 아직 한 번도 정책이 수립된 적이 없다. 워낙 기초 데이터가 없고, 또 수년간 걸리는 코홀트 조사(특정 집단에 대한 장기 추적 조사)를 한 적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생태적인 문제와 환경오염은 2차적인 문제이고, 실제로는 보건 문제가 1차적인 문제인데, 우리나라 기초과학과 의학의 공적 역할이 붕괴된 나라라서, 경제학자가 숫자를 제시하면서 접근할 아무런 데이터가 없다. 그래서 나도 이 논쟁을 지난 4년간 열지 못했지만,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경고는 누군가 해야할 것이라는 그런 책임감을 나도 느낀다.
 
  가임여성과 골프장 사이의 연관관계에 대해서 누군가 논문을 낼 수 있다면, 한국에서는 특A급 논문이 될 것이다. 그러나 가장 간단하게 한다고 해도 수십억은 들 연구이고, 가장 단기라도 5년은 걸릴 연구이다. 그래서 최소한 지금 당장 정부에서 이런 연구를 시작한다고 해도 5년 간은 아무도 모르는 상태에서 가임여성이 여전히 골프장을 출입하고, 왜 자신이 기형아를 출산하게 되었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불행이 어디에선가 일정한 확률적으로 벌어지고 있을 것라는게 경제학자로서 이 사건을 오래 지켜본 내 소견이다.
 
  만약 골프장과 기형아 출산율 사이의 연관관계라는 데이타만 있으면, 그 다음에는 보건경제학에서 늘상 쓰는 추정방식으로 보건효과와 보건비용들을 뽑아낼 수는 있지만, 현재로서는 "예방적 원칙"을 거론하는 수밖에 없다.
 
  골프장 파동, 스키장 파동…굳이 따라할 필요 있나
 
  지금과 같은 골프장 난개발의 시대를 유럽이나 일본도 다 겪었다. 우리만큼 집중적이지는 않지만, 경제가 어느 정도 성숙하기 전단계에서 다 겪는게 골프장 파동과 스키장 파동이다.
 
  유럽은 1968년도 이후 난개발의 시대를 겪었는데, 1974년 석유파동을 거치면서 줄도산을 하고, 큰 홍역을 치루게 되었다. 물론 개발업자들 대부분이 망했다. 그래서 요즘은 경제 진작 방식으로 골프장 건설을 하지는 않는다.
 
  일본은 1987년 리조트법을 만들고, 지금 우리가 하는 것과 똑같은 모습으로 골프장, 스키장, 그리고 펜션까지 정부돈 받아가며 열심히 지었다.
 
  노무현 정부의 '균형발전' 정책은 20년 전 일본 정책의 재활용정책이라서, 그 미래를 예측하는 것도 쉽다. 일본은 2002년, 2003년, 연간 200개 이상의 골프장이 도산했다.
 
  이런 도산이 이유도 경제학적으로는 설명이 가능하다. 어떤 수치를 놓고 계산해봐도, 지금보다 골프장이 경제적으로 더 늘어나기는 더 어렵다.
 
  골프장 건설, 누가 이익보나
 
  골프장 논란은 누가 골프장으로 이익을 보는가를 생각해보면 가장 간단하다. 인근에 토지를 소유한 지역토호들과 대기업 순서대로 이익을 본다. 참고로 국내 골프장 보유현황을 간단하게 살펴보자.
 
  <대기업 골프장 보유 현황>

업체명
 
 

삼섬
 
 

LG
 
 

현대자동차
 
 

한진
 
 

롯데
 
 

규모(홀)
 
 

108
 
 

81
 
 

27
 
 

36
 
 

36
 
 

업체명
 
 

한화
 
 

금호아시아나
 
 

두산
 
 

대림
 
 

포스코
 
 

규모(홀)
 
 

99
 
 

54
 
 

27
 
 

36
 
 

27
 
 

업체명
 
 

CJ
 
 

동양
 
 

코오롱
 
 

KCC
 
 

한솔
 
 

규모(홀)
 
 

27
 
 

54
 
 

36
 
 

18
 
 

45
 
 

업체명
 
 

대한전선
 
 

농심
 
 

하이트 맥주
 
 

총계
 
 

규모(홀)
 
 

18
 
 

54
 
 

18
 
 

801
 
 


  가끔 골프장은 지역 건설사나 혹은 작은 기획사의 일이라고 택도 없는 주장을 하시는 분들을 만나게 되는데, 위의 통계는 약간 오래된 통계이기는 한데, 골프장 보유 등수가 거의 재계순위와 일치한다. 기본적으로 골프장은 이렇게 되어있는 시장이다.
▲ 경주 감포읍 골프장 건설 공사 현장. 토사 유출로 인근 어장에 심각한 피해를 주고 있다. ⓒ환경운동연합

  어쨌든 골프장 문제는 두 가지 방식의 해법이 있는데, 환경적 비용과 보건적 비용을 내재화한 적절한 정책을 수립해서 충격을 피해나가는 방식과, 노무현 정부의 방식처럼 하고 싶은대로 하고, 결국 국민경제에서 주기적으로 생겨나는 경제 위기국면에서 줄도산을 하면서 사회적으로 정리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그럴 리가 없다고? 경제학자들이 외국의 사례를 일일이 꼼꼼하게 시계열분석 자료로 만들면서 따져가는 이유는 구조와 주기성 사이의 과학적 연관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레저협회에서 추정한 숫자를 가지고 약간의 파라메타 조절을 해보면, 내가 제시할 수 있는 우리나라에서의 최대 골프장 숫자는 250~300 사이이다. 물론 18홀 기준이다.
 
  영국과 일본의 파라메타를 조절한 숫자이기 때문에 국민소득 3만불이 되더라도 그 이상 늘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내 견해이다. 그 이상 지으면, 이미 일반화되는 것처럼 오래된 골프장, 그리고 한계적 상황에 있는 골프장부터 망한다.
 
  여기에 노무현 정부가 만들어놓은 양극화를 가지고 지수조정을 조금 더 해보면, 200개까지 경제적 허용 골프장 숫자가 나오기도 한다. 비정규직 일반화로 중산층의 몰락 속도가 지금보다 더 빨라지면 아마 200개 정도의 골프장을 유지할 수 있는 극단적인 경우도 시나리오에서 전혀 배재하기는 어렵다.
 
  나의 개인적 정치적 소신을 다 빼고 기술적인 검토만 하자면, 이 허망한 골프 경제학은 노무현 정부가 물러나면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한나라당은 열린우리당과 달리 골프장을 당론 앞에 채택하지는 않았고, 농촌 지역에 연고가 있는 국회의원들이 많기 때문에 수도권에서 주로 국회의원을 많이 배출한 열린우리당과는 또 작동하는 방식이 조금 다를 수도 있다.
 
  골프장 지어도 좋고, 더 늘려도 좋다. 그러나 경제학자로서 노무현 정부에게 내가 바랬던 것은 그런 논의과정이 조금 합리적이고, 조금은 이론적이었기를 바랬다. 그러나 그들은 환경단체를 대변했던 나보다 훨씬 더 무지막지하게 "사람들은 골프를 원한다"는 문장 하나로 정책을 추진하려고 하는 듯이 보였다.
 
  덧붙이며 - "다시는 이 정부와 '골프장 논쟁'을 하고 싶지 않다"
 
  몇 가지 외부에 아직 발표하지 않은 수치들과 내 종합적인 생각을 <프레시안> 지면을 빌어 발표한 것은, 이 정부와는 더 이상 골프장과 관련해서 논의를 하거나 대화를 할 필요가 없다는 회의가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어느덧 내가 학위 받고 서울에 돌아온지 12년째이고, YS 정부를 거쳐 DJ 정부시절까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정부관료와 정부 전문가와 실무 논의를 많이 했었고, 내 손으로 대통령령도 만들어보고, 법도 만들어봤다.
 
  하지만 열린우리당처럼 근거없고 황당한 수치들을 디밀고 힘으로 밀어붙인 집단은 난생 처음 봤다. 다시는 이 정부와 골프 논쟁을 하고 싶지 않다.
   
 
  우석훈/금융경제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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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검 각부위 명칭

본문스크랩 칼자루 부품및 각부명칭 禪 그리고 무예

2007/04/23 09:47

 

http://blog.naver.com/turk182s/140037039252

출처 블로그 > 잠자기....-.-
원본 http://blog.naver.com/wind02ma/90004266765

 


 

 

http://blog.naver.com/peietta/60011827686

 

 

 

 

 

검명칭


- 세부 명칭 예제 -
명칭 : 한글 - 한자 - 일본 - 영어 
"O" : 표시는 마땅한 표현 단어가 없음을 표시 

1. 칼날 명칭

- 칼날끝 부분 명칭

1. 칼끝 - 鋒 - 키사키(kissaki) - point of sword
2. 칼끝선 - O - 후쿠라(fukura) - pointedge line
3. 칼끝날개선 - O - 코시노기(ko-shinogi) - diagonal point-line
4. 칼끝열선 - O - 보시(boshi,帽子) - tempered point-line
5. 칼끝절선 -  O - 요코테(yokote,橫手) -dividing point-line

 

- 칼면 부분 명칭

1. 칼날 - 刃(인) - 하(ha) - cutting edge
2. 열선 - O - 하몽(hamon,刃文) - temper pattern
3,4. 칼배,칼면 - (면) - 지(ji,) - blade surface
5. 홈,골 - 血漕(혈조) - (hi) - groove

 

2. 코등이,자루 명칭

- 코등이 부분 명칭

1. 코등이 - 刀瘢(도반),古銅(고동),심(심) - 쯔바 (tsuba) - guard
2. 덧쇠 - 切羽(절우) - 쎕빠 (seppa) - washer
3. 주석막이 - 銅護刃(동호인) - 하바키 (habaki) - metal collar

 

- 자루 명칭(자루 - (병) - 쯔카 (tsuka) - hilt)

 

1. 자루앞장식(앞매기) - O - 후치 (fuchi) -hilt collar
2. 못 - (정) - 메쿠기 (mekugi) - pin, peg
3. 자루내피 - 柄皮(병피) - 사메 (same) - rayskin
4. 자루끈 - 柄絲(병사),柄券(병권) - 쯔카이토 (tsukaito) -braid
5. 자루장식 - O - 메누키 (menuki) - ornaments
6. 자루뒷장식(뒷매기) - 柄頭(병두) - 카시라 (kashira) - butt cap
7. 십자매듭(가장 많이 쓰이는 자루끈 매듭법)

 

3. 칼집 명칭(칼집 - 刀室(도실),초 - 사야 (saya) - scabbard)

 

1. 칼집앞장식 - (봉) -고이쿠치 (koiguchi) - scabbard cap
2. 칼집고리 - 刀環(도환),栗形 - 쿠리카타 (kurikata) - cord knob
3. 칼집끈 - 족서(足緖),하서(下緖) - 사게오 (sageo) - cord
4. 칼집뒷장식 - 표 - 고지리 (kojiri) - scabbard cap
5. 은분처리(도검의 마무리 칠을 할 때 은가루를 섞어 본색을 은은하고
    품위있게 처리하는 공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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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정원,, 염정아,,,매력적이다.



 



영화 오래된정원을보았다..

지진희와 염정아의 연기 참 좋았다..

염정아는 처음에 내가 대학교때 미스코리아로나온여자인데..

처음에는 그저 얼굴이쁜 여배우 정도로만기엇했는데

점점 영화인이,,되가는것같다..


이 영화,,

황석영님의 소설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것...

예전에 황석영의  NL(national liberalism)적 성향이

그의 소설들의

백미를 잡아먹는다고  비판하던 한선배가 떠올른다..

내가 소설을 읽었을 때도

좀그런듯했는데..

이영화는 그런작가의 성향을  아는지모르는지

한 좌익전과자의

석방이후의 모습을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뼈저린 궤적을 그리고 있다..


그냥 맘이아프다..

시대가 남녀의 사랑을 가라놓는다 라는명쾌한

주제를 느끼면 좋으련만..

그런 감각도 안느껴진다..

그저예전의 아픔을 간직한채 현재를살아가는 한이상주의자?

의 몸짓인듯하다..

이전에 혁명구호도,최루탄도, 덤프트럭같은 이론적논쟁과

담배연기자욱한 동아리방에서의 피튀기는 운동권의 토론도

이제는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MP3를 들으며 걸어오는 딸 한테 희미하게웃으며 말을거는

남자 주인공,,,


영화초입에 감옥에서

석방당하는 주인공한테  교도소장은 말한다..

“세상이 많이 좋아졌네요,,선생(주인공)도 한몫을 했겠죠”



핸드폰,전자기기, 인권변호사,맛있는외식문화,아파트,땅투기

 이런 발전된 사회에서 괴거를회상하며 술을마시는 혁명 주인공들의 울음은

그저 과거회상주의자들의 넑두리에불과한것인가?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런 영화속에그려진 허무감에도 불구하고

FTA는채결되었으며

마틴슈만이 말한 8:2의사회에서 우리모두는 살고있다.,.


토지보상금,보유세,억대의상속금 첨단을달리는 교통,건축,영화,향락,

등 문명의 아케이드속에서 우리는

과연 행복한지....?

지금의 시대에

영화에서처럼 과연 이상주의자들은 박물관의 유물에불과한것이지..

 불행히도 아니 내주위는

보유세를내는사람은 거의99%없으며 많은이들이 비정규직이며  일부는 농부들이시고

또 일부는 외국인노동자이며,,또일부는 일요일도 일하는

노동기계로 전락해있는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들도 핸드폰이며 mp3며 자가용,KTX를 타고다니지만

예전과 지금이 무엇이 바뀌었을까..?


이런 첨단과 돈과 또 파렴치하기로 그지 없는 

역설의 영토에서

우리모두는 욕망에 지배당하며 

스스로를 갉아먹는것은 아닌지....



“난 사회주의자에요..”

과거속 주인공의 이 대사가


지금  살고있는

지금 현세상의

"세기말적이고  카프카적인 음산함” 속에서도

통용될지는 

앞으로 두고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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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바벨 감상했다..

 

 

한마디로

맛있는 영화다ㅡㅡMY하고 같이 본영화다,,
처음에는 좀지루했지만 후반부로갈수록 안타까움이랄까...

우선 내가느낀점은..
모로코의 풍경이 너무나 황량하다
MY와 농담으로 모로코만큼은 이민가서 정말로 살기힘들겠다할정도로 ,,

극도의가난과함께 일반민중들의 생활상도 그렇고 게다가 모로코 경찰의 파시스트적인 폭력성하며(세상에 애들한테 총쏘는 그 충격이란,,)
한미국인이 총격을당하여 그주위에
많은 모로코 농민들은 자국내 공무원경찰들에게 엄청난 고통과 구타를당하며 죽기까지한다.
한 강대국의힘이 비강대국 사람들의 삶에 어떠한 관련성을가지는지 보여주는듯하다..
마치우리나라의 미선효순사건,FTA 등우리를 떠올리게 한다,,

다음으로 멕시코,,
정말로 지저분하다는거
그러나 그곳 사람들은 적어도 일본이나 미국처럼 서로 단절이아닌 무언가 소통을 하는듯한
인간관계가 보이는듯하다..
특히나 결혼축하연을통한 사람들의 즐거움은
옛날 원주민들의 공동체문화를보여주는듯하다..
거기서 꼬마아이(브래드피트 자식들)들이 사람들의 축제장면을보며 굉장히 즐거운표정을지으며 웃는모습이인상적이었다..
아이들의미소는 미국내의 병폐인 중산계급가족이기주의를 조롱하는 듯했다..
그러나 남미적인 흥겨움도 ,,
미국이라는 국경선에도착하면 도망자
마약밀매자,불법체류인이라는 거대한
굴레에 아비지옥으로변하고만다..

과연 멕시코인들에게는 아니 제3세계인들에게
미국이란 나라는 어떤존재로 어떤 영향으로 다가오는지 ,,흡사
거대한 지옥의 블랙홀이요, 야비한 야누스요,또 하나님의 탈을쓴 "기회의 전지자" 가 아닌가 ?

 

일본,,,은
역시나 멕시코감독이 일본에 대해서도 공부를많이 한듯하다....

십대들의 도시적방랑을 그리며 접근하는모습은 나를 감동케했다..
말그대로 소통이 부적한 일본의십대들..
30층높이의 펜트하우스에살며 청각장애자인 일본여고생은
결국 일본의 사회의 소통과 의식의 부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동양의 유럽이라는 칭호를들으며

전후50년동안 눈부이부실정도의 한마디로 맛있는 영화다ㅡㅡMY하고 같이 본영화다,, 처음에는 좀지루했지만 후반부로갈수록 안타까움이랄까... 우선 내가느낀점은.. 모로코의 풍경이 너무나 황량하다 MY와 농담으로 모로코만큼은 이민가서 정말로 살기힘들겠다할정도로 ,, 극도의가난과함께 일반민중들의 생활상도 그렇고 게다가 모로코 경찰의 파시스트적인 폭력성하며(세상에 애들한테 총쏘는 그 충격이란,,) 한미국인이 총격을당하여 그주위에 많은 모로코 농민들은 자국내 공무원경찰들에게 엄청난 고통과 구타를당하며 죽기까지한다. 한 강대국의힘이 비강대국 사람들의 삶에 어떠한 관련성을가지는지 보여주는듯하다.. 마치우리나라의 미선효순사건,FTA 등우리를 떠올리게 한다,, 다음으로 멕시코,, 정말로 지저분하다는거 그러나 그곳 사람들은 적어도 일본이나 미국처럼 서로 단절이아닌 무언가 소통을 하는듯한 인간관계가 보이는듯하다.. 특히나 결혼축하연을통한 사람들의 즐거움은 옛날 원주민들의 공동체문화를보여주는듯하다.. 거기서 꼬마아이(브래드피트 자식들)들이 사람들의 축제장면을보며 굉장히 즐거운표정을지으며 웃는모습이인상적이었다.. 아이들의미소는 미국내의 병폐인 중산계급가족이기주의를 조롱하는 듯했다.. 그러나 남미적인 흥겨움도 ,, 미국이라는 국경선에도착하면 도망자 마약밀매자,불법체류인이라는 거대한 굴레에 아비지옥으로변하고만다.. 과연 멕시코인들에게는 아니 제3세계인들에게 미국이란 나라는 어떤존재로 어떤 영향으로 다가오는지 ,,흡사 거대한 지옥의 블랙홀이요, 야비한 야누스요,또 하나님의 탈을쓴 "기회의 전지자" 가 아닌가 ? 일본,,,은 역시나 멕시코감독이 일본에 대해서도 공부를많이 한듯하다.... 십대들의 도시적방랑을 그리며 접근하는모습은 나를 감동케했다.. 말그대로 소통이 부적한 일본의십대들.. 30층높이의 펜트하우스에살며 청각장애자인 일본여고생은 결국 일본의 사회의 소통과 의식의 부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동양의 유럽이라는 칭호를들으며 전후50년동안 눈부이부실정도의 경제성장과 테크노틱을보여준 일본은 급격한 서양따라가기와 가치관의 붕괴는 참으로 많은 문제를 안겨준다.. 애니 에반게리온에서 주인공이 보여주듯 엄청난 힘에대한 두려움과 단절,,공포심은 순간적으로 힘을 실체화시키며 인간의 현실을 전진시킨다.. 설사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어쩌면 그런것이 지금의일본을 끌어나가는 숨은저력 인지도모르겠다.. 주인공여고생이 마지막에 나신으로 아버지를끌어 안는장면은 완전히 발가벗고 모든것들과 통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젊은이의 애절한 몸짓 이랄까? 개인적으로는 그장면이 넓은 평야나 바닷가에서 했다면은 일본의 희망이있다라고 생각했을텐데.. 닫혀진 고층빌딩에서의 나신의 포옹이라 그런지 슬프게만느껴진다..도무지답이없는 어느 연약한 인간들의 깊은 슬픔,,,,, 일상에 묻혀있는 개인들도 결국 이 세계라는 굴레에서 살아간다... 서로가 서로에게 일상의 영양분을 제공하는 그런세계... 거기서 우리는 슬픔을느낀다.. 2007/봄 어느날...남훈이 생각 아래는 스크랩인데 간결명료하게 잘평가한 글이다... --------------------------------------------------------------------------- 극장의 예고편을 상상하며 보기 시작했던 영화인데 2시간동안 대사도 거의 없고, 특별한 소리 없이 진행되는 영화 예고편을 무슨 블록버스터액션물로 만들어 놓고, 이거 완전히 낚인 느낌이다. 이러니 예고편을 상상했던 사람들은 재미없다는 말을 할 수 밖에.. 그렇지만 초반 30분을 당황하고 나니 나머지 1시간반은 딴짓안하고 초집중하게 만들어주더라. 이 영화 재미없다고 소문내는 사람들에게 예고편 탓이니 오해를 풀라고 하고 싶다. 얼토당토않게 악으로만 치닫는 끊임없이 당황스러운 상황에 그러지말라 아무리 외쳐도 듣지 못하는 진공상태의 느낌인 영화 이게 도대체 어쩌겠다는 스토리인지 궁금해서 결국 영화해설을 뒤지고 말았는데, " 단절과 소통 에 관한 영화" 아, 그래서! 그리하여 그냥 잠자코 봤다 바벨에서 흐르던 음악 - 튀지않고 잔잔하니 영화에 잘 어울리네요. 아카데미를 비롯한 여러 영화제의 음악, 작곡상에 노미네이트되고, 수상했다고 하네요. Bibo no Aozora Ryuichi Sakamoto, Jacques Morolenbaum and Everton Nelson/ Endless Flight and Babel Gustavo Santaolalla Deportation/Iguazu Written by Gustavo Santaolalla 태초에 인간의 언어가 하나였다 인간이 하늘에 도전하여 탑을 쌓아 올리자 신이 분노하여 인간의 언어를 혼잡케하고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거기에서 온 땅으로 흩어버리시고 그 사이에 혼돈과 단절을 만들었다 그곳의 이름을 바벨이라 하였다. (창세기 11:1-9) 단절의 고통, 그리고 소통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영화 - 감독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1. 태초에 인간의 언어는 하나였다. 수세기동안 끊임없는 폭력과 갈등은 인종과 국적에 따라 달라지는 언어처럼 소통되지 않는 사고와 이념의 혼선때문일지도 모른다. 비악의적인 단순한 계기가 국제정치적 마찰로 번지며, 모든 사실을 알고 지켜보는 관객은 피흘리며 신음하는 개인의 구제보다는 국가의 정치적 보복이 먼저 논의되는 현실의 통증을 대면해야 한다. 2. 주인공은 완전한 소통이 불가능한 인간 쉽지않은 소통을 간단하게 포기해버리는 얄퍅한 인간들의 소통을 보여준다. 또한 , 모로코에서 시작된 장난이 미국, 멕시코, 일본까지 영향을 미치는 우리는 서로가 미약하지만 연관관계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TV 뉴스를 통해서 보게되는 그 현상안에서도 우리는 그런 사실을 접하고 영향받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나와 관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른채 그저 흘러가는 뉴스거리일 뿐이다. 이것은 인간으로써 자신과 무관한 소통에 관심을 지니지 않는 보편화된 이기심이다. 이 여배우 굉장했다. 연기도 그랬지만 일단 전라연기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그니까 꼭 한번봐 ㅋㅋㅋ) 골든글로브,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에 올랐다는데, 미국에서 상을 줄 것같진 않지만 개인적으로는 꼭 상을 수상했으면 바램이다. 3. 차별에 대한 갈등을 대화로 해결하지 못한자 의 이야기 동등한 인간이란 없다. 힘의 원리에 의해 우리는 민족과 국가의 열등함을 인식한다. 인종간의 차별과 갈등은 유색인종인 우리도 어디서든 겪을 일이다. 부당한 차별에 대한 발길질. 차별이라는 부당함이 발길질이라는 정당함으로 뒤바뀌는 모순 (- 테러가 만연한 사회에 살고 있지 않은가.) 결과적 피해를 얻는 것은 그와 무관한 이들 무너져내린 무역센터가 이라크를 점령하고, 비악의적인 사건은 테러리즘으로 과장되고 악용된다. 사실 영화가 전면으로 내세우는 것은 9.11테러이후 아랍과 서구의 대립이다. 브래드피트의 딸로 나오는데 실제로는 다코다패닝의 동생이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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