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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몸을 보아야겠다..

아 이러다 정말 절망할지도 모른다.

계속해서 잠도안자고 영화나보고,,

운동도 안하고 음식도 먹다 안먹다..

의사 말이 한5년은 조심하랬는데

이거뭐 완전 엉망으로살아도 마치아무이상없다고 스스로 생각하는지

어주 엉망이다..

몸은 마르고,,

얼굴의광채도죽고,,

아무리 교대근무라지만 이럴바엔

저 지옥같은 사무실로 들어가서 차라리 반노예의상태로 사는게 더낮다..

굴종속의 규칙과 건강이

자유속의 방종과 불건강보다 낳을것이다.

 

이거 뭐하자는건지..

의사말또는 현대의학을 내가다신뢰하는건 아니지만

어쨋든

날살려준게 현대의학이다.

 

몸이편안해야마음이 편안하고 강인해야

무슨일이라도한다는것은 정말로 지고의 인류의 진리인데,

요즘 머리속도 조금 복잡하다,

어디 운신을 하고싶은데

종잡을수가없고,,

그냥 서울에서 살며 각종 단체라도 기웃 거릴까?

환경연합?녹색평론 이런데나 다니며 차차 지평을 넓혀가는방법

그냥 수유같은 학술단체 들어가서한번 비제도적 공부를하는것..

 야간 사회대학원 진학해서 가는법..

시골로 그냥 귀촌해서 거기에서 배추나심고 지역생태운동에 참여하는것..

 

어떤방법으로든 "참여"라는 행위는 이루어질듯한데 이거 

인간이 정치적이고 사회적동물이라는거 정말진리같다.

헨리소로우나 부처같은사람이야 홀로 몇년이나 숲속에서 살지모르지만

나같은 범인은 사람들하고 술도마시고 밭일도 같이하고

또 공부하고 토론해야 남은인생을 잘산다.

 

근데문제는..

나다!!!

 

왜이리 가슴속에 배포가 안생기고 두려운건지..

아직도 수술 후유증인지..

 

확실하게 마음먹어야 된다..

강해진다.

 

이제 새벽조깅도 하고

오후에는 필라테스도 하고 밥도 3끼다먹고,

저녁에는 명상도 하고,,

 

정신차리자..

이러다 정말로 죽는다..또다시 의사한테

내몸을 맡겨 항암치료니 뭐니하는 소리를 듣기싫다..

 

더욱이 다가오는  총자본의 시대에 오래살아서 재밌는 구경을 많이 해야한다.

 

 

하루일과..

 

오전   5시기상 -조깅3.6km

오후  5시  Pilates

저녁 8시-10시 taich  ,meditaion 

밤 11시 취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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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기독교인라서 이명박으로찍었다..!!

울회사 어떤 선배가 한말이다.

확 열이받지만 어쩌겟나..

그냥 그렇게 살다죽겠다는데

 

이유는하나란다..

"난 기독교인이야,문제가있는 사람이지만 양심상 종교적 신앙상  그래서 MB를 찍었어.."

 

할말이없다..

뭐 명색이 민주노총 조합원이 그랬다고 욕하기도 싫다..

에라이 그냥 자야겠다.

 

민노당이나 사회당,녹색당들이 언제나 집권할까?

환상인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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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님글 퍼옴

'김훈-김규항-고종석의 문체에 대한 생각'이란 제목으로 재작년 6월 모스크바통신에 올렸던 글을 정리해서 창고에 넣어둔다. 고종석에 대한 부분만 따로 떼내어 보강하려다가 '자료' 차원에서 글 전체를 다시 옮겨놓기로 한 것이고, 대신에 이미지들을 보강해 넣기로 한다. 문학비평가 롤랑 바르트가 정의한 바대로 문체가 '양파' 껍질 같은 것이라면, 내가 여기서 다루려고 하는 것은 김훈, 김규항, 고종석이라는 세 종류의 양파가 되겠다.  

문체에 대한 나의 몇 가지 생각을 적고자 한다. 먼저, 자신만의 독특한 ‘얼굴’ 혹은 ‘손가락’을 가진 작가로 제일 먼저 손꼽을 수 있는 사람이 김훈이다. 그는 소설가이기 전에 에세이스트였고, 에세이스트이기 전에 언론사 기자였다. 그는 자신의 직업과 표정을 그렇게 변화시켜가고 있지만, 나에게 소설가로서의 김훈은 좀 낯설다. 문학판의 각광에도 불구하고(그는 두번째 장편으로 동인문학상을 수상했고, 첫번째 단편으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그런 건 그들만의 ‘비즈니스’이다. 작품이 있으니까 상을 주는 게 아니라, 상이 있으니까 작품을 찾는 것이 문학/출판계이다), 그는 본질적으로 ‘소설가의 손가락’이 아니라 ‘에세이스트의 손가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가 주제를 모른다거나 어리석은 것은 결코 아니다. 에세이로서는 ‘밥벌이’를 할 수 없는 나라가 한국이며, 그는 ‘밥벌이’의 신성함을 누구보다도 ‘지겹도록’ 맹신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현재 오랜 기자생활을 그만 둔 그에게 소설쓰기는 그의 밥벌이, 즉 그의 비즈니스이다. 도둑질을 하거나 사기를 치는 게 아닌 이상 남의 밥벌이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것은 좀 우스운 일이다. 그건 각자의 문제이다. 그래서 예컨대, 화장실 청소원에게 혹 “그것도 밥벌이냐?”고 묻는 것은 우스운 일을 넘어서 아주 무례한 일이다. 세상의 밥벌이에는 귀천(貴賤)이 없으므로.

 

 

 

 

나는 김훈의 에세이들을 ‘숭배’하지만(나는 그것들이 국어교과서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소설들은 아직 한편도 읽지 않았다. 그의 에세이들은 출간되자 마자 사들였지만(어떤 건 몇 권씩), <빗살무늬 토기의 추억>, <칼의 노래>, <현의 노래> 세 장편 소설에 대해서는 무심하게 대했다. <빗살무늬>는 품절된 이후에야 사려고 돌아다녔는데, 결국 내가 샀는지 못 샀는지도 기억나지 않으며, <칼의 노래>는 대폭 할인할 때에야 ‘싼 맛’에 샀고, <현의 노래>는 사두지 못한 채 모스크바에 왔다. 그러니 내가 그의 소설들에 대해서 말할 ‘지분’은 별로 없는 셈이다.

대신에 나는 북매거진 <텍스트>(2004년 4월호)에서 <현의 노래>에 대한 두 편의 서평을 읽었고, 이 소설에 대한 그림을 대충 그려볼 수 있었는데, 그건 읽지 않은 상태에서 그린 것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이하의 인용은 모두 두 서평으로부터의 재인용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나는 그를 잘 안다고도 말할 수 있다(하긴, 소설을 제외한 그의 글과 인터뷰 대부분을 찾아 읽었으니까). 단적으로 말해서, ‘장편소설’이라고 표지에 박혀 있더라도, 그런 걸 세 권이나 냈더라도 그는 아직 단 한편의 ‘소설’도 쓰지 않았다. 그가 쓴 건 에세이스트의 손가락이 쓴 역사 ‘에세이’이고, 혹은 그에 대한 ‘판타지’이거나 ‘모노드라마’들이다. 그건 박상륭의 ‘잡설’들이 ‘소설’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어떻게 해도 감추어지지 않는, 그의 ‘문체’ 때문이다. 흔히 ‘아름답다’ 혹은 ‘현란하다’고 일컬어지는 것 말이다. 요컨대, 그의 문체는 소설이란 장르, 품위 없고 잡스러운 장르가 요구하는 바 일상적 디테일, 저자거리의 언어를 담기에는 너무 고상하며 품위가 넘쳐난다. 그래서 어색하다. 마치 장미희가 떡장사를 연기하는 것처럼. 그래서 그가 아무리 “소설이요!”라고 외쳐도 내겐 “똑 사세요!”로 들린다.

<텍스트>의 두 서평은 ‘모노톤의 복화술’(김용필)과 ‘문체의 아름다움이 놓친 몇 가지’(조은영)란 제목으로 돼 있는데, 서평자들이 지적하는 바나 내가 지금 얘기하는 거나 같은 얘기이다. 그의 소설은 ‘모노드라마’이며, 문체의 아름다움 때문에 소설을 ‘망쳤다’는 얘기니까. 조은영 기자의 서평은 “그렇다면, 김훈의 진정한 3인칭 소설, 최초의 3인칭 소설은 아직 씌어지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라는 조심스러운 진단으로 마무리되고 있는데, 나는 그것이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다(물론 신중함은 기자로서의 조건이다). 그는 3인칭 소설은커녕, 소설 자체를 쓴 일이 없고, 앞으로도 별로 쓸 일이 없을 거라는 게 내 생각이다.

 

 



 

예컨대, 김훈은 한 에세이에서 이렇게 말한다: “악기를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그 구멍과 줄과 떨림판과 건반 어디에도 소리의 흔적은 없다. 악기는 소리의 집이지만, 소리는 그 집에서 살지 않는다. 소리는 어디에 있느냐. 소리는 어디에서 태어나 어디에서 죽느냐. 나는 소리의 거처를 알지 못하지만, 소리는 악기와 그 악기를 연주하는 인간의 몸 사이에서 아날로그 방식으로 태어나고 죽는다.”(<밥벌이의 지겨움>, 19쪽) 이런 건, 그의 에세이들에서 흔하게 만날 수 있는 아름다운 사유이고, 문장이지만, 소설로는 옮겨질 수 없는 문장이다(뿐만 아니라 번역되기도 곤란한 문장들이다. 박상륭의 잡설들이 번역 불가능한 것처럼, 김훈의 에세이들도 번역 불가능하다).

그것이 <현의 노래>에서 “소리는 몸속에 있지 않다. 그러나 몸이 아니면 소리를 빌려올 수가 없다. 잠시 빌려오는 것이다. 빌려서 쓰고 곧 돌려주는 것이다. 소리를 곧 제자리로 돌아간다. 그 자리는 적막이다. 그 짧은 동안만 흔들리고 구르고 굽이치는 것이다. 소리를 거스를 수 없다.”라는 우륵의 말로 가장(假裝)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게 김훈의 목소리임을 이미 알고 있다. 요컨대, 그의 소설의 언어는 에세이의 언어를 “잠시 빌려오는 것이며, 빌려서 쓰고 곧 돌려주어야 할 것”이다. 그 에세이의 자리는 그가 <풍경과 상처>나 <자전거여행>에서 적었듯이 물론 ‘적막’이다(이 적막으로는 밥벌이가 되지 않는다!). 나는 그가 “짧은 동안만 흔들리고 구르고 굽이치다가”(빨리 한몫잡고서!) 곧 제자리, 에세이스트의 자리로 돌아오기를 바란다. “에세이를 거스를 수는 없다.” 그 정신, 그 문체, 그 손가락, 그 적막을!



김훈의 보수주의를 이문열의 보수주의와 비교하는 시각도 있는데(하긴 쿤데라와 이문열도 양립 가능하다고 동렬에 놓는 시각에서라면야), ‘보수주의’에 대한 얘기를 잠시 미뤄두고, 일단 ‘소설가’ 김훈과 이문열을 비교하는 것 자체는 흥미롭다. 일단 둘 다 ‘소설가’가 아니라는 점, 즉 ‘소설가’를 연기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김훈은 이제 막 소설로 밥벌이하고 있으며, 이문열은 소설로 밥벌이를 할 만큼 하자 딴짓을 하고 있다(사실, 한때 소설가이긴 했지만, 요즘도 소설가 이문열 운운하는 것은 좀 우습다. 그의 대표작은 <삼국지>이며, 이번에도 동아일보에 <초한지>인가를 연재하는 듯하던데, 그걸로 미루어도 짐작할 수 있는 바이지만 그의 본업은 ‘고전 번역가’이다). 근래엔 둘 다 내가 아직 읽지 않은 소설들만 썼다는 것도 공통적이고, 그 소설들이 ‘에세이 정신’으로 충만해 있다는 점도 공통적이다(가령, 이문열의 <선택> 이후의 ‘소설들’). 차이라면, 문체에 있어서, 품위에 있어서, 그리고 언변에 있어서 김훈이 한 수 위라는 것 정도(그런 이문열도 국어교과서에 실려 있다!).

그리고, 보수주의. 요즘 좀 특이한 한국사회의 풍경은 자칭 보수주의자들, 즉 ‘자각적인’ 보수주의자들이 (특히 젊은 세대에서) 늘어나고 있는 것과 동시에 한편에서는 ‘B급 좌파’들이 ‘보수주의자’란 딱지를 마치 이전에 ‘보수꾼’들이 ‘빨갱이’(혹은 ‘사회주의자’)란 딱지를 적대자들에게 갖다 붙이듯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술어논리에 의하면, ‘B급좌파’나 ‘보수꾼’이나 똑같게 된다). 그런 식으로 보수주의나 진보주의(혹은 사회주의)의 외연이 넓어지는 것은 ‘언어의 경제’상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보수주의’나 ‘진보주의’란 말의 의미가 불분명해지는 탓에 앞에다 수식어를 더 붙여야 하기 때문이다. 가령 노무현 정부는 한쪽에서 보기엔 좌파 사회주의 정부이고, 다른 쪽에서 보기엔 우파 보수주의 정부이다. 그런 ‘딱지’들이 가리키는 바는 대개 “당신은 우리편이 아니다!” 내지는 “우리는 당신이 싫다!”는 정서적 상관물이자 자기정체성의 확인이지 지시적 연관성을 갖는 논리가 아니다.

김훈과 이문열의 보수주의란 말도 마찬가지이다. 그건 대국적 견지에서의 ‘통찰’이긴 하지만, 섬세하지는 않다. 김훈은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더라도 근본적으로는 허무주의자이기 때문이다(이문열도 허무주의자인가?). “아마도 소리와 병장기는 같은 것인 모양이구나”(<현의 노래>)라는 통찰, 즉 악기와 무기는 등가이며, 펜과 칼은 같은 것이라는 그의 주장 혹은 자기암시는 대립물의 통일이라는 변증법적 논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그게 그거라는 허무주의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허무주의야 말로 모든 것을 ‘풍경’의 자리에 갖다 놓는 그의 에세이스트 정신에 부합한다. 풍경의 자리에 놓일 때, 봄 여름 가을 겨울, 자연의 사계는 그 자체로 아름답고 충만하며 허무하고 부질없다. 역사 또한 그는 그 ‘풍경’의 자리에다 놓고 묘사할 따름이다.

<현의 노래>의 한 장면에서 김훈이 “이 질퍽거리는 구멍은 대체 무엇인가? 이 빨아당기는 속살이 어째서 왕의 무덤 속에 들어가 쇠와 함께 썩어야 하는가. 야로는 식은땀을 흘리며 기진맥진하였다.”(117-8쪽)라고 묘사할 때, ‘야로’는 김훈 자신이며, “이 질퍽거리는 구멍”이야말로 그의 ‘허무주의’의 근거이고, 그의 표현을 빌자면, 풍경의 ‘적막’이다. 그는 언제나 그 풍경 앞에서, 허무 앞에서, 적막 앞에서 기진맥진하였고, 그러면서 마치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이 험난한 사투 끝에 돛새치의 뼈다귀만을 건져 올리듯이 자신의 문체를 길어냈다. 언제나 칼로 깎은 연필을 손가락에 쥐고 원고지에 쿡쿡 눌러써가면서 말이다(왜 칼과 펜이 등가가 아니겠는가!). 때문에, 그의 ‘기진맥진’에, 그의 ‘문체’에 나는 언제나 경의를 표한다.

반복하자면, 내가 보기에 김훈에게서 더 핵심적인 건 그의 보수주의가 아니라 허무주의이다. 그가 ‘보수주의자’라면, 그에겐 ‘보수’나 ‘진보’가 무의미하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그가 가부장(家父長)적인 사고의 틀을 고수한다는 의미에서일 뿐이다(언젠가 이 때문에 ‘김훈 파동’이 한번 있었다). 그는 무어라고 말하는가? “내가 무어라 말했을 때, 그 반대로 말을 해도 다 말이 되는 것 아닌가. 언어를 다루는 일의 힘겨움을 생각한다면 등에서 식은땀이 날 지경이다.” 이 고백에 그의 진실이, 핵심이 담겨 있다.

“내가 무어라 말했을 때, 그 반대로 말을 해도 다 말이 되는 것 아닌가.”가 뜻하는 바는 말의 허무주의, 의미의 허무주의이다. 그래서 그에겐 그러한 의미(=기의)보다 말의 뼈(=기표), 말의 잔해, 말의 화석이 더 중요하다. 그가 일상적 시간(=밥벌이의 시간)이 아닌, 역사적 시간, 더 나아가 지질학적 시간에 언제나 매혹되며 거기에 붙들려 있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예컨대, <현의 노래>의 구상 또한 국립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우륵의 가야금에서 얻어졌다고 하지 않는가? 그 천년의 ‘적막’이 곧 그의 ‘질퍽거리는 구멍’이다.



작가는 ‘천년의 적막’을 탐사하고 있지만, 사실 그의 문체를 낳은 허무주의는 좀더 실제적인 기원을 갖고 있다.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고백한바 있지만, 그는 5공 때 한 일간지의 젊은 기자로서 군사정권에 대한 ‘용비어천가’에 앞장섰던 경력이 있다. 그가 신념(=이즘)을 갖고 그 일에 나섰던 거였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것이 ‘신념’이 아니라 ‘처세’였더라도 마찬가지이다(그랬더라면 이후에 다른 ‘기자들’처럼 금배지라도 달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를 그 일에 내몬 것은 ‘신념’도 ‘처세’도 아닌 ‘체념적 자학’이고 ‘허무’였다. 당당하게, 폼나게 사표를 던질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의 논리는 좀 다르다. 그 대신 다른 누군가가 결국 그 일을 해야 했을 거라는 것. 즉, 한 사람이 폼나는 대가로 또 다른 누군가가 오물을 뒤집어써야 하는 것이다. 그럴 거라면, 자신이 하겠다는 것이 그의 논리이다. “내가 무어라 말했을 때, 그 반대로 말을 해도 다 말이 되는 것 아닌가.”라는 건 그러한 ‘자발적 부역’에 대한 변명의 논리이다. 그의 ‘부역’은 오직 그가 문장에서 ‘의미’를 버릴 때에만 가능했다. 그것이 그의 의미론적 허무주의의 기원이다.



 

 

 

한편으로, 대장부의 길과 가장(家長)의 길은 좀 다른 길이다. ‘질퍽거리는 구멍’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달리 식구(食口)들의 ‘입구멍’이다. 한 가장이 해야 할 최소한이란 그 구멍을 채워 넣을 밥벌이를 하는 것이다. 유구한 일이지만, 대장부의 ‘명분’은 우리를 한번도 밥 먹여주지 않았다(밥 먹여주기는커녕 죽이지만 않아도 다행이겠다. 오, 계백이여!) 후배 박래부 기자와 한국일보에 연재되었던 <문학기행>이 책으로 묶여 나왔을 때, 김훈이 썼던 서문에는 그의 가족사 한 자락이 들어있는데 대략적인 내용은 이렇다. 그의 아버지는 아주 엄하고 혹독한 분이었는데, 자주 ‘세상을 저버린 자’처럼 세상에 대한 분노와 허무를 무지막지한 술로 달랬다. 그리고 그런 날 새벽이면, 소년 김훈은 해장국 심부름을 가야 했다고. 어느 추운 겨울날 새벽에도 그는 해장국 심부름을 다녀오다가 그만 뚝배기를 바지와 길바닥에 다 엎지르고 말았다. 새벽녘 길바닥에서 그는 목놓아 엉엉 울면서 절대로 아버지와 같은 삶은 살지 않으리라고 다짐한다.

아버지와 같지 않은 삶? 그건 대장부의 삶이 아니라 충실한 가장의 삶이다. “내가 무어라 말했을 때, 그 반대로 말을 해도 다 말이 되는 것 아닌가.”라는 것은 대장부의 논리가 아닌 바로 가장의 논리이며(대장부는 한 입으로 두 말하지 않지만, 가장은 한 입으로 두 말 해야 할 때가 있다), 가장으로서의 김훈이 발명해낼 수밖에 없었던, 발명해내지 않으면 안되었던 논리이다(자신의 아들에게 주는 편지에서 그가 가장 강조하는 바도 ‘자기 밥벌이’라는 건 그런 의미에서 지극히 당연하다. 그 ‘밥벌이’에 그의 오욕과 영광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허무주의는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가장(家長)의 허무주의’이다. 그 허무주의는 결코 겉멋이나 잘난 체가 아니며, 젊은 치기나 늙은 달관도 아니었다. 그것은 기자 김훈이 밥벌이를 하기 위한, ‘유능한’ 가장이 되기 위한 허무주의였다. 어찌 그의 허무주의를 무시할 수 있겠는가?

“지금도 나는 6하원칙의 신성함을 믿는다. 다만 6하의 가치와 존엄을 인정하되, 6하로서 충족될 수 없는 진실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뿐이다.”라고 그는 또 말한다. 복습하자면, 그가 말하는 ‘6하원칙’이란 ‘밥’과 동의어이다. 기자 김훈은 어떤 원칙의 신성함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밥의 숭고함과 밥벌이의 신성함을 믿는 사람이다. 그리고, 기자의 밥벌이란 ‘6하원칙’에 맞게 기사를 쓰는 일이다. 하지만, 그는 또한 ‘6하원칙’이라거나 ‘밥벌이’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안다. 그건 앎일 수도 있고, 직관일 수도 있고, 양심일 수도 있다. 그것은, 정신분석학의 개념을 가져오자면, ‘죽음 충동’이라 지목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이 죽음충동은 삶 혹은 생존에의 의지를 ‘전부가 아닌(not-All)’ 것으로 잠식하며, 거기에서 기자 김훈이 아닌 에세이스트 김훈이 태어난다.

 

 

 

 

가장은 자기 식구들의 밥벌이를 하는 것으로 충분히 존엄하지만, 한편으로 세상은 그가 다 먹여 살릴 수 없는 ‘구멍들’ 천지이다. 그 구멍들 앞에서, 어느 봄날 전군가도(全群街道)에 무지막지하게 흩날리는 ‘사쿠라’ 꽃잎들 앞에서, 그는 할딱이며 기진맥진이고 속수무책이다. ‘6하’로 기술될 수 있는 세상의 진실들은 몇십 년 기자생활의 ‘짬밥’으로 어떻게든 카바한다지만, 그걸로 충족되지 않는, 그걸 넘어서는 진실들은 다 어찌한단 말인가? 에세이스트 김훈은 그 ‘충족될 수 없는 진실’들을 (‘가부장적’ 책임의식을 가지고!) 기록하고자 분투하지만, 그의 자백대로 언제나 ‘백전백패’이다. 그의 문체는 그 싸움에서 얻어진 전과이되, 패장(敗將)의 그것이어서 아름답지만 속절없다. 아마도 김훈 자신이 그걸 가장 잘 알고 있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에세이스트 김훈의 허무주의는 기자 김훈의 그것과 같이 ‘가장의 허무주의’이되, 이 대책 없는, ‘무능한’ 가장의 허무주의이다. 어찌 그 허무주의가 안쓰럽지 않겠는가? 하여 그 ‘허무주의들’에 비하면, 보수주의란 딱지는 사소하다.



 

 

 

<문학이란 무엇인가>의 사르트르에 의하면, 현실과 지시적 연관을 갖는, 그러니까 현실을 ‘앙가제’하고, 현실에 ‘앙가제’하는 문학은, 곧 소설은 ‘어떻게’가 아닌 ‘무엇을’에 복무해야 한다(그는 총구를 제대로 겨냥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무엇을’을 달리 ‘의미’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순수한 음악의 상태, 무의미의 상태를 지향하는 시와는 달리, 산문(=소설)은 무엇보다는 ‘의미’해야 하며, 의미-지향적이어야 한다(그것이 시와 산문의 차이이다). 비록 그 의미가 단선적이거나 독백적이지 않다고 하더라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카뮈와의 논쟁에서 사르트르-장송이 지적했던 바는 카뮈의 아름다운 문체가 ‘앙가주망’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달’이 아니라 ‘손가락’만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김훈의 소설에도 똑같은 말을 할 수가 있다. 그의 아름다운 문체, 그리고 그걸 뒷받침하는 허무주의적 세계관(“내가 무어라 말했을 때, 그 반대로 말을 해도 다 말이 되는 것 아닌가.”)은 소설에 적합하지 않다. 소설가의 문체는 적당히 아름다워야 한다. 다르게 말하면 적당히 지저분해야 한다. 그것이 ‘산문적 일상’을 묘사/기술하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즉 소설가가 자신의 얼굴, 필체, 문체를 갖는 건 바람직하며, 동시에 좋은 소설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긴 하지만, ‘너무 아름다운 문체’이어서는 안된다(<내겐 너무 예쁜 당신>이란 프랑스 영화의 문제의식이기도 한데, ‘너무 아름다운 여자’는 ‘아내’로서 적합하지 않다. 결혼생활은 ‘산문적’이기 때문이다).



<현의 노래>의 서평이 들어 있는 <텍스트>(4월호)에는 ‘여성’을 주제로 한 서평들도 여러 편 모아져 있는데, 그 중 하나는 한국어로 ‘아름다운 페미니스트’란 부제를 달고 나온 <글로리아 스타이넘>이다. 플레이보이의 바니걸로 위장취업할 정도로 미모가 뛰어난, 미국의 이 대표적인 ‘스타’ 페미니스트 운동가의 평전인데, 스타이넘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그녀의 ‘너무 아름다운 외모’는 페미니즘에 혼란과 지장을 초래한다. “곧 그녀는 페미니스트이기에는 너무 예쁜 여성인 것이다.” 그래서 튄다. 다르게 말하면, 그녀는 ‘문체적/문채적’이다. 가령, 그녀의 50세 생일파티 풍경. “보스턴의 부동산 부호가 파티준비를 돕겠다고 나섰고, 파티 장소는 월도프 아스토리아호텔 그랜드볼륨이었다. 베트 미들러의 축하공연이 있었으며 스타이넘의 어린 시절과 젊었을 적 사진이 실린 생일 책이 전시되었다. 언론 또한 이 파티를 크게 다루었다. 스타이넘은 일에서나 개인적으로나 인생의 정점에 서 있었다.”

페미니스트의 삶이 불행해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성공적인’ 페미니스트란 건 뭔가 어색하다. 결국 페미니즘은 그녀의 미모와 상승작용하며 스타이넘이란 한 여성에게 ‘성공한 삶’을 가져다 준 것이지만, 그것이 전체 페미니즘, 혹은 억압받는 여성 전체의 삶과는 과연 얼마만큼의 관계가 있을까? 그녀를 비판하는 일부 페미니스트들의 주장대로, 차라리 스타이넘이란 ‘스타’ 없는 페미니즘이 더 낫지 않았을까? 페미니스트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못생겨야 할 필요는 없지만, 적당히 못생길 필요는 있다(그래야 얼굴을 보는 게 아니라, 주장을 듣는다). 즉 적당히 예뻐야 한다. 그건 다른 모든 ‘산문적’ (정치적)운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시적인’ 외모는 ‘산문적’ 일상에 적합하지 않다.


 

 

 

이건 너무 ‘마초적인’ 생각인가? 가부장적인 김훈은 ‘마초적’이란 비판을 받기도 했는데(그 자신은 거기에 굳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흥미로운 것은 이념적으로 그와는 좀 거리가 먼 ‘B급 좌파’ 김규항조차도 똑같이 ‘마초적’이란 비판을 받곤 한다는 점이다(술어논리에 따르면, ‘보수주의자’ 김훈과 ‘진보주의자’ 김규항은 똑같다). 그건 그가 성모순보다 계급모순이 우선한다고 생각하는 데서, 그리고 그런 생각을 공개적으로, 공격적으로 드러낸 데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사실 나로선 그의 비판자들보다는 그의 의견에 공감하는 바가 더 많다. ‘중산층 페미니즘’, 즉 “계급과 사회구조의 문제를 건드리지 않는 페미니즘은 ‘허드렛일을 대신해줄 누군가(다른 여성, 빈민, 식민지인)’를 착취하는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다.”(벨 훅스, <행복한 페미니즘>)는 의견에 동의하기 때문이다(<텍스트>의 서평에서 인용).

그런 의미에서 이 페미니즘은 민주주의와 똑같은 딜레마를 갖고 있다. 민주주의 또한 허드렛일을 대신해줄 누군가를 착취하는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민주주의의 기원으로서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의 바탕은 노예제였다). 미국, 프랑스, 영국 등 대부분의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경영국가, 제국주의 국가였던 사실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라크 침공을 거론하면서 이런 것이 미국의 민주주의냐고 비판하는 것은 따라서 예리하지 못하다. 미국의 민주주의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반민주주의적, 제국주의적 행태이기 때문이다.

다른 데서 착취해야지만, 자국의 민주주의를 유지할 수 있다(한국의 민주주의도 예외가 아니다. 국내적 ‘평등’은 국외적 ‘차별’에 의해서 지탱된다). 민주주의가 고상하고 고급스런 제도라는 건 그런 뜻에서이다(어느 정도의 경제적 바탕, 가령 1인당 국민소득 1만불 이상이라든가 하는 토대가 마련돼야지만, 민주주의란 제도는 작동한다). 이러한 사정은 ‘고상한’ 페미니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고상한 것들이란 원래 그 모양이다). 나는 다른 민주주의, 다른 페미니즘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며, 자신할 수 없다.


 

 

 

내가 김규항을 처음 알게 된 건, 그러니까 그의 글을 처음 읽게 된 건 <씨네21>의 ‘유토피아/디스토피아’ 지면을 통해서였다. 공동으로 연재하던 몇 사람의 필자들 가운데에서 유독 그가 눈에 띄었는데(그는 아마도 ‘유토피아/디스토피아’ 지면이 낳은 최고의 ‘스타’일 것이다), 그건 그가 자신의 ‘문체’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의 이름이 공개되지 않더라도 그의 문장들은 ‘김규항’을 입증하는 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비유컨대, 김훈의 문체가 아름답고 유장한 ‘패장(敗將)의 문체’라면, 김규항의 문체는 ‘자객의 문체’이다. 백전백패를 ‘자랑하는’ ‘패장의 문체’와는 달리, ‘자객의 문체’는 ‘무엇을’에 ‘어떻게’가 복무하는 문체이다. 마치 자토이치의 검술처럼, 그는 짧게 끊어서 군더더기 없이 급소들만을 공격한다. 그래서, 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때에라도 그의 문장(=수사학)에는 매료되었다. 이후에 내가 가급적이면 그가 쓴 모든 글을 챙겨 읽고자 한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최근에 인터넷에서 그가 쓴 글을 읽고 다소 실망했다. 유시민에게 보수주의자란 딱지를 붙이는 글이었는데, 내용에 실망한 게 아니라(“나는 유시민을 보수주의자로 본다”는 데 어쩔 것인가?), 문체가 예전의 문체가 아니라는 사실에 실망했다. 온라인 글쓰기의 특수성을 고려한다고 해도(설마 그런 류의 글들이 공식적으로 출판되는 걸까?) 그의 글은 더 이상 김규항의 ‘얼굴’도 ‘필체’도 보여주지 못했다. 덕분에, 나는 ‘손가락’ 대신에 글의 ‘내용’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 보게 되었다.

김규항의 문체를 ‘자객의 문체’라고 했는데, 그의 칼끝이 유독 예리하게 겨냥하는 것은 우파(=보수주의자)가 아니라 자신이 유사-좌파(=진보주의자)라고 생각하는 이들이다. 그것이 좌파 전체의 ‘이익’에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유시민을 전여옥과 ‘똑같은 놈’이라고 배제함으로써, 좌파는, 혹은 민노당은 어떤 이익을 챙기는지) 모르겠지만, 유사-좌파들을 걸러내는 일을 이 ‘B급 좌파’는 자신의 소명으로 간주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하지만, 단순하게 말해서, 민노당을 지지하지 않은 90% 국민들, 혹은 요즘 지지율이 좀 올라갔다고 하니까 한 70%의 ‘불순한’ 국민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이들을 어떻게 걸러내고 순화/훈육/계몽해야 하나?). 그것은 한국의 논객 중 가장 ‘좌파적’이라 할 만한 자신의 입지/주장을 ‘B급’이라고 공언하는 그의 ‘결벽’에 이미 새겨져 있기도 하다. 그는 자신을 좌파의 ‘최소한’이라고 간주하고 있으므로, 그러한 기준에 미달한다면, 모두 ‘보수주의자’란 딱지를 뒤집어써 마땅한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기준에 따를 때, 제도권 좌파, 즉 개량주의적 ‘의회주의 좌파’는 진정한 좌파인가? 동급의 의원으로서 한나라당 의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의정을 논할 민노당 의원들은 과연 좌파다운 좌파인가? 대학에 몸담고 있는 제도권 좌파, 자칭 ‘좌파’ 교수들은 과연 진짜 좌파이며 진보주의들인가? 일부일처제를 고수하면서 ‘아빠’로서 자녀들의 교육을 책임지는 일(“너희는 이렇게 바르게 살아라!”)은 진정 얼마나 좌파적인가? 혹은 한국의 자본주의라는 ‘식인체제’ 하에서 구차하게 계속 살아가는 일은 과연 얼마나 좌파적인가? 등등.

‘자객식’으로 말하자면, 사실 “살겠다고 버둥거리는 놈들”은 전부 보수주의자이고, “죽지 못해 안달인 놈들”이 진보주의자이다. 유기체의 생존은 ‘항상성(호메오스타시스)’이라는 걸 조건으로 한다. 항상성이란 건 ‘기브 앤 테이크’, 즉 주고받는 타협을 통해서 유지된다. 단칼에 자결하지 않고 자신의 생존을 도모하는 일은 언제나 그러한 ‘타협’을 전제로 한다. 그것이 인간조건이다. 그럴 경우, 급진적인 진보주의 혹은 절대적 진보주의(‘숭고한 A급 좌파’란 게 있다면)란 그러한 타협과 인간조건으로부터의 ‘단절’을 뜻한다. 즉, 결코 타협하지 않으며, 죽음을 무릅쓸지언정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 것(지젝 같은 좌파가 ‘죽음충동’에 그토록 매혹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당연하다. 그에게 유일한 ‘행위(act)’는 상징적 ‘자살’이다). 지젝과 네그리 같은 좌파들은 모두 기계-인간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고려하는바, 그것은 현재의 인간조건이 극복되어야지만 진정한 ‘진보’가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김규항도 그러한지?).



 

 

 

사실, 새로운 사회를 위한 ‘새로운 인간’이란 테마는 러시아문학에서는 이미 고전적인 테마이다. 체르니셰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1863)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1864)가 정면충돌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문제를 둘러싸고서이다. 1917년 혁명 이후에 역사는 한동안 체르니세프스키의 편이었다. 사회주의 인간형, 혹은 공산주의 인간형이 인민들에게 요구되었고(그러한 요구에 부응하지 못할 경우 ‘벌레’로 낙인찍혔다), 인간개조론이 제기되었다. 요컨대, 일차적 본성이든(공병호가 얘기하는), 이차적 본성이든(아도르노가 얘기하는), 현재의 ‘이기적인’ 인간본성을 가지고는 사회주의 유토피아(=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공산주의는 ‘인간들’이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라 ‘천사들’이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모두가 평등한 사회에서 왜 누구는 대학교수를 하고, 누구는 탄광노동자를 해야 하는가? 그걸 누가 결정하는가? 제비뽑기로 결정하는가? 혹은 로테이션을 하는가? 그런 질문들을 허용해서는 사실상 사회주의 건설이 불가능하다. 모든 것은 자발적인 ‘의무감’에 따라 마치 ‘기계’처럼 처리되는 수밖에 없다. 즉 인간-기계, 기계-인간들을 만들어내는 도리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좌파적 휴머니즘’이란 말은 ‘듣기 좋은 소리’이거나 넌센스라고 생각한다(그런 얘기를 들먹이는 좌파를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그들은 C급이다). 휴머니즘을 가지고는 ‘좌파’를 할 수도 없고, ‘좋은 세상’을 만들 수도 없기 때문이다. 진보가 변화/변혁에 대한 요구를 의미할 때 가장 먼저 변화/변혁되어야 할 것은 바로 인간 자신이며, 인간조건 자체이다(기계-인간이 되기 전이라도 최소한 ‘강철 인간’은 돼줘야 한다. ‘스탈린’이란 이름에 새겨진 것처럼).



그런 의미에서 인간복제라거나 유전자 조작을 가장 앞장서서 환영해야 할 사람들은 라엘리안들이 아니라 좌파들이다. 그리고, 인간본성 운운하며, 인간복제에 반대하는 하버마스 같은 철학자야말로 유사-좌파, 즉 보수주의자이다. 진정한 좌파가 되기 위해선, 모성을 버리고, 부성도 버리고, 인간성 자체를 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유토피아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리라(모스크바-유토피아의 ‘새로운 러시아인’들처럼). 좌파, 혹은 ‘에덴의 기계들’에게 입력된, 프로그래밍된 행복!

말이 좀 길어졌다. 요점은 보수주의자니, 진보주의자니 하는 딱지 붙이기가 얼마만큼의 준거성, 혹은 의미연관성을 갖는지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급진적 환경주의자들에 따르면, 환경문제의 해결은 이 지구의 암종인 인간이란 종이 완전히 사라질 때에야 가능하다. 거기에 무슨 타협의 여지가 있는 게 아니다. 그러한 관점에 서면, 좌파니 우파니 하는 구분은 사소하다. 좌파 박테리아와 우파 박테리아가 아웅다웅하고 있는 것이기에. 빨간색이건 파란색이건 박테리아는 박테리아일 뿐이다. 거꾸로 그런 게 아니라면, ‘작은 차이’를 중요하게 간주해야 한다. 좋은 사회, 혹은 유토피아를 만들고자 하는 강박관념이나 순수에의 결벽에 들려 있지 않다면 말이다.

김훈과 이문열은 다르며, 유시민과 전여옥도 다르다. 그리고 전두환과 김대중이 다르며, 노무현과 이회창도 다르다. 그리고 부시와 케리도 다르다. 그들은 아주 조금 다를 뿐이지만, 그 다름을 인정하는 게 내 상식이고 정치적 감각(이기 이전에 일상적 감각)이다. 나는 우리사회가 ‘더 좋은 사회’가 될 거라고 믿지 않지만 적어도 ‘덜 나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덜 나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러한 상식과 감각이 필요하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덜 나쁜 사회’의 의의를 가르쳐준 이는 기자(요즘은 편집위원이던가?)이자 에세이스트이며 소설가인 고종석이다(자칭 ‘자유주의자’인 그가 복거일의 제자를 자처하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그 또한 ‘문체’를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 문체는 화려하지도 간결하지도 않으며 그저 담백하다. 그리고 상식적이다. 그는 허무주의자(혹은 보수주의자)도 아니고, B급 좌파도 아니다. 그는 개인주의자이고, 자유주의자이다. 이념의 스펙트럼 속에 굳이 자신을 분류해 넣어야 한다면, 나는 그와 같은 칸에 분류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즉 나의 정치적 입장은 그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그것은 내가 그만큼 그에게서 감화를 받은 바가 많은 탓일 것이다(그에 따를 때, 외모에 의한 서열화는 지성에 의한 서열화보다 더 나쁘거나 억지스럽지 않다. 이것도 마초적인가?).

김훈, 김규항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나는 고종석의 (모든 글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글들을 읽었고, 읽고자 했다. 전라도 사람으로서의 ‘서얼의식’은 갖고 있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특별한 트라우마나 결벽을 갖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래서 그의 사유는 논리적이지만, 모나지 않고 둥글다. 따라서, 그런 그의 문체가 소설이란 장르와 잘 어울리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김훈이 소설을 못 쓰고, 김규항이 소설을 안 쓰는 데 반해서, 고종석은 소설을 잘 쓴다(이 세 ‘글쟁이’를 내 식대로 분류하자면, 김훈은 ‘예술가’이고, 자칭 ‘출판인’이어서 ‘출판운동’을 하는 김규항은 ‘운동가’이며, 고종석은 ‘지식인’이다). 더불어, 그에게선 기자와 에세이스트와 소설가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이 아름답지도 날카롭지도 않지만 담담하면서 유려한 그의 문체 덕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문체는 그렇게 그 사람이 된다…

06. 03. 19 -20.

P.S. 언젠가 김규항의 홈피에 들렀다가 인상깊게 읽은 것이 그의 '문장론'이다. 작년 8월에 씌어진 것인데, 이상하게도 9월에 나온 그의 책 <나는 왜 불온한가>(돌베개, 2005)에는 실려 있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그의 '문체'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필히 읽어볼 필요가 있는 글이다. (저작권이 문제되지 않는다면) 여기에 옮겨놓는다(부분 발췌하고자 했으나 저자의 뜻이 훼손될 우려도 없지 않아 그냥 그대로 옮겨놓는다). 여기서도 군말과 강조는 나의 것이다.

-이따금 “문장론이 뭐냐”는 식의 질문을 받는다. 그런데 나는 글을 쓰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내가 글 쓰는 사람이라는 현실에 익숙하지(하고 싶지) 않아서 늘 대답을 흐리곤 한다. 사실 나는 어떤 문장론을 갖고 글을 쓰진 않는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즉 내가 단어와 단어를 꿰고 이어 붙여 사람들에게 보이는 이유는 단지 세상에 대한 생각을 나누기 위해서다. 나는 글의 소재를 얻기 위해 세상을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세상을 들여다보기 위해 글을 쓴다. 어쨌거나, 문장론이 있든 없든, 내가 초고를 써놓고 퇴고를 거듭하는 걸 보면 나에게도 문장에 대한 어떤 태도는 있는 것 같다. 아마도 그건 두 가지일 것이다. 간결함과 리듬.(*그러니까 그에게 글, 혹은 문장들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소통을 위한 수단이다.)

-내가 쓰는 글의 8.5할쯤에 해당하는, 공을 들여 쓰는 글은 초고를 쓰면 적어도 서너 번 이상은 퇴고를 한다. 군더더기라 느껴지는 건 망설임 없이 없애거나 좀 더 간결한 표현으로 바꾼다. 나는 중언부언 하는 것만 군더더기라 생각하는 게 아니라 쓸데없이 화려한 표현도 군더더기라 생각한다. 그리고 부러 반복 효과를 내려는 게 아니라면 같은 글에선 같은 단어를 쓰지 않는다. 10매 이하 칼럼에선 반드시, 30매가 넘어가는 긴 글에선 되도록 그렇게 한다. 동시에 리듬을 만들어간다. 거창하게 말해서 운율을 맞추는 건데, 눈으로 소리 내어 읽으면서 리듬감이 흐트러지거나 호흡이 끊기는 부분은 글자 수를 고치거나 단어를 바꾼다.(*'간결함'이 그가 첫손에 꼽는 글의 요건이다. 앞에서 나는 그의 '자객의 문체'가 '자토이치의 검법'을 연상시킨다고 적었다.)  

-간결함과 리듬이 덜 다듬어진 글을 내놓는 것처럼 불편한 일은 없다. 어쩌다, 내 글의 1.5할쯤에 해당하는 글에서, 이런저런 실용적인 이유 때문에 도리 없이 그러곤 하는데 그런 글들은 그저 실용적인 이유를 위해 일회용으로 존재한 것일 뿐, 내가 썼지만 더 이상 내 글은 아니라 여긴다. 간결함과 리듬 말고 또 하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쉽게 쓰는 것이다. 나는 왜 거의 모든 글쟁이들이 글은 쉬우면 쉬울수록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다. 배운 사람들이나 알아먹는 어려운 말을 이유 없이 쓰지 않는 건 물론이려니와 되도록 한자말을 줄이려고 애쓴다.(*하지만, 모두가 간결하고 쉽게 쓴다면 '간결함'과 '쉬움'이라는 미덕 자체가 증발해 버릴 것이다.)

-그러나 간결함, 리듬, 그리고 쉬움 같은 문장에 대한 내 모든 태도들은 오로지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명료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존재한다. 나는 이오덕 선생이 말씀한 ‘삶을 가꾸는 글쓰기’를 믿는다. 모름지기 글은 그런 것이라고 믿는다. 글을 씀으로서 내 일상의 에피소드들은 비로소 내 생각으로 정리되며 그렇게 정리된 생각들은 다시 내 일상의 에피소드에 전적으로 반영된다. 내 삶과 내 글은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순환한다. 내 삶을 더 낫게 만들지 않는다면, 나라는 인간을 더 낫게 만들지 않는다면 내 글은 아무 것도 아니다. 결국 문장에 대한 내 태도는 삶에 대한 내 태도와 같다.

앞에서, 김규항은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즉 내가 단어와 단어를 꿰고 이어 붙여 사람들에게 보이는 이유는 단지 세상에 대한 생각을 나누기 위해서다"라고 적었지만, 이 마지막 문단에 의거할 때 그건 그의 문장론으로서 불충분하며 부정확하다. "문장에 대한 내 태도는 삶에 대한 내 태도와 같다"고 할 때 '문장'은 '삶'과 등가화되고 있으며, 그럴 때 '문장'은 단지 수단에만 머물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글은 그의 삶이다. 그러니, "문체는 곧 사람이다"(뷔퐁)라는 고전적인 명제에 기대지 않더라도 나는 그가 '문체주의자'라고 정당하게 말할 수 있다. 그 또한 'B급 좌파'이면서 동시에 '양파'인 것이다.

덧붙여 지적하자면, '양파'는 롤랑 바르트의 그것처럼 그저 텅빈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러시아 정교회 사원 지붕들에서 보듯이 신성함에의 의지와 염원을 담고 있다. 내가 문체주의자들을 존중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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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의자>

-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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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이야기가 아무래도 엊그제 선거를 치러가지고, 선거 얘기부터 실마리를 풀어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신문이나 매체에서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가 하고 여러 가지 분석이 나왔는데, 다들 알고 있다시피 한마디로 경제, 경제를 살리겠다는 이명박씨가 대통령이 되었다. 심지어 투표 전날 어머니께 전화 걸었더니, 어머니 누구 찍을 거냐고 물으니 ‘이명박이 이명박이 찍어야지’ 이래. 어머니는 내 감옥시절부터 석방운동하고 야당인데 말이야 ‘이명박이를 왜찍어?’ 하니 ‘경제를 살린대잖아’ 할 말이 없더라고. 어머니의 그 한 마디가 대한민국 민중들의 기본적인 인식. 도대체 경제가 뭐길래,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길래 경제를 살리겠다는 그 한 마디에 이명박에게 표를 몰아주게 되었는지... 일단 이런 얘기를 나누고 싶어요. 대한민국 평균인 민중이라고 할 수도 있고, 서민이라고 할 수도 있고, 중산층이상의 엘리트라든지, 중산층이상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대한민국 평균인이 생각하는 경제라는 것이 뭐길래 투표결과가 이렇게 나왔는가에 대해서.. 그것부터 먼저 좀 짚어봤으면 좋겠어요. 강교수님은 국민들이 알고 있는 경제, 경제라는 것이 뭐라고 생각하시는지...


강 : 좋은 말씀하신 것 같고요. 이번에 화두가 경제 살리기가 된 것은 분명한 것 같고, 실물경제 기업인 출신이 성공적인 기업경영을 했다. 했는지 안했는지 팩트 자체가 정확하지도 않는데, 어떤 후광효과에다가 청계천이니, 버스전용차선이라든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성과 이런 것들로 말미암아, 앞으로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경제를 잘해줄 것 같은 환상 이런 것들이 결합되었다고 본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많겠지만, 서민들의 평균적인 인식으로 가지고 있는 경제는 한 마디로 돈벌이 경제다. 개인경제는 월급이나 소득이 많아지는 것을 말하고, 기업은 이윤이나 수익성을 올라가는 것을 경제가 잘 돌아간다고 알고 있고, 나라 전체적으로 보면 수출을 많이 해서 달라를 많이 벌어들이는 것을 경제라고 알고 있는 것이죠. 돈벌이 경제인데, 제가 생각하는 것은 이 돈벌이 경제와 상반되는 것이 살림살이 경제다. 큰 흐름으로 쫓아 올라가면 칼 폴라니가 이론적으로 정리하고 있는, 기존의 사회로부터 독립되어있지 않는 경제. 그것이 살림살이 경제거든요. 제가 즐겨 쓰고자 하는 표현이죠.. 예전에 김지하 선생이 살림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단순한 집안 살림살이가 아니라, 죽임에 대척되는 살림이다’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저는 그 맥락에 동의를 하면서 경제를 구분하는 개념으로 응용을 하고 싶어요. 칼폴라니 용법으로 사회, 인간사회, 인간욕구로부터 이탈되어 떨어져나간 경제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돈벌이 경제. 그 이전에 결합되어 있는 모습이 살림살이 경제라고 보는 것이죠. 그래서 그런 과정들이 한국에서도 역사로 따지자면 농업 중심의 사회로부터 공업화, 산업화가 진전되는 과정에서 드디어 돈벌이 경제가 살림살이 경제로부터 분리되어 나와 마침내 살림살이 경제를 지배하는 형태로 되었고, 특히 노동시장을 통해서 직장에서 출세해서 더 많이 돈을 벌 수 있는 위치로 상승하는 것이 우리들의 일반적인 욕구로 내면화된 것이죠.


황 : 아까 뭐로부터 분리된 것이라고 했는데..

강 : 사회로부터 혹은 인간적 욕구로부터 분리된 돈벌이.

황 : 돈벌이 경제를 달리 말하면, 사람의 구체적인 삶 보다는 돈을 벌기 위한 가치.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이 어떻게 되건 말건 간데. 그런데 살림살이 경제를 추구해야된다, 혹은 살림살이 경제가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경제라고 말할 때.. 다른 용어로 우리말에 적합한 말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생계경제라는 것이 있는데 영어로 subsistence economy라는 것이 있는데,

강 : 저는 같은 맥락으로 봅니다.

황 : 대개 녹색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계경제... 근데 생계경제라고 표현해요? 우리말로?

강 : 네 그렇게 표현하기도 하고 혹은 자립경제라고도 한다. 원래 사전적인 뜻은 생계경제인데. 좀 표현이 말갛지 않잖아요?

황 : 간신히 먹고사는 경제를...

강 : 생존경제처럼...

황 : 이것을 주장하게 되면 사람들이 거부감을 느끼고, 일반 대중들은 뭐라고 하냐하면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야 너네 ?같이 살아라’ 이런 소리를 듣거든. 이것을 좀 구분할 수 있겠어요? 살림살이 경제하고 뭔가 좀 푸어놓은 느낌이 드는데.. ‘내가 그러면 잘사는구나’하는 웰빙 개념도 조금 들어가 있는 것 같고, 근데 subsistence economy 라고 하면 굶어죽지 않을 정도로 간신히 먹고산다는 느낌이 들어가지고..

강 : 뭐 굳이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그런 뉘앙스가 풍기는 것 같고, 좀 더 적극적으로 의미부여를 하자면, subsistence가 생계위주이고 자립형이고 하지만, 좀 빈곤하다고나 할까 양의 수준으로 볼 때 좀 낮은 차원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살림살이 경제는 양의 낮음이나 높음을 포괄할 것 같아요. 그 어느 것을 따지지 않고, 그 속에서 좀 추상적인 표현이지만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더불어 살고, 삶의 구체성이 구현되는.. 그러니까 추상적인 돈벌이나 어떤 지위상승이나 권력 획득이나 하는 그런 욕망이 깔려 있지 않고, 삶의 풍요로움, 관계의 풍요로움 그리고 어떤 삶의 결들, 다양한 무늬나 결들, 지각 이런 것을 느끼며 살아가는 경제를 말하는 것이죠. 이런 의미에서 subsistence economy를 분명히 포괄을 하는데, 거기에만 국한되지는 않은 측면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황 : 제 느낌에도 우리가 돈벌이 경제에 대한 대안으로 얘기를 할 적에, 아무래도 대중의 감각, 느낌을 무시할 수 없다. subsistence 경제라는 말 보다는 살림살이경제 혹은 생명살림경제. 뭔가 대중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용어를 하나 만들 필요가..

강 : 저도 뭐 거칠게 life economy. 이렇게 써보기도 한다.

황 : 근데 뭐 합의된 용어나 많이 쓰이고 있는 용어가 있나요?

강 : 스탠다드가 없어요. 만들어야 되더라고요.

황 : 그런 것부터 정리를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대중적을 설득시키려면

강 : 맞습니다. 원천적으로는 economy의 oikos 개념에서 그 속에 이미 호응이라고 하는 살림살이. 가정은 사랑의 보금자리의 상징 아니겠습니까? 그 사랑으로 사람을 살리고 식구를 살리고 자연을 살린다고 하는 것이 그 속에 들어 있다 말입니다. 그래서 사실 구태여 oikos 속에 들어 있기 때문에 살림살이 oikos 라고 표현할 필요가 없는데, 워낙 돈벌이로 규정되는 oikos로 변질되다 보니, 거기에 대한 대척으로서 살림살이 경제라고 강조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황 : 원래 말뜻은 그렇더라도 말이 어용되거나 오염되었을 때 거기에 대처를 해야할 것 같다.

강 : 그렇습니다.

강 : 앞으로 좀 열심히 이런 관계에 대해서 용어를 논의를 좀 해서 경제학자들이나 운동하는 사람들 사이에 우리 앞으로 약속해서 이 용어를 줄기차게 밀고나가자 그래서 지금의 주류경제학에 대해서 대안전선 혹은 대중들이 알기 쉽게.. 그런 작업들이 필요한 것 같아요.

강 : 네 그렇습니다.

황 : 저도 사회활동을 하면서 늘 답답함을 느끼는 것이 저들이 말하는 경제에 대해서 할 말이 있는데, 용어가 없는거야.

강 : 어떤 현상이든지 자기자신의 요구나 가치를 표현할 수 있는 적절한 용어를 찾는다는 것이 이미 정치적인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그 속에 우리 스스로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토대가 있기 때문에.. 특히 여성주의 이론에서 그런 표현을 많이 쓰지 않습니까.. 여성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진실하게 표현할 수 있는 용어를 찾는데 수십년이 걸렸다. 그것 자체가 정치적인 싸움의 과정이었다고 하는 표현들을 본 적이 있는데 저는 적극 동의한다.

황 : 돈벌이 경제를 대신할 수 있는 용어들을 아시는대로.. 뭐뭐가 있습니까? 살림살이경제, 생명의 경제.. 등

강 : life economy를 어떻게 표현하는냐... 영어로 쓸 때는 이것이 제일 간단할 것 같다. 그랬을 때, 이것을 살림살이라고 할 수 있고, 생명살림의 경제라고 할 수 있고, 살림의 경제라 할 수 있고, 생명경제라 할 수 있고.. 저는 life 라는 뜻 안에 그런 것들이 들어있을 것 같다. 생명의 경제는 죽음의 경제가 아닌. 명사형 자체도 되고, 그 다음에 생명살림의 경제라고 하면 일종의 과정이거든요. 액티브한 액션이 들어가는 것이죠. 내가 땅을 일구더라도, 즉 유기농 채소를 생산, 유통한다고 하면, 화학농에 비해서 생명의 경제라 하겠지만, 생명살림의 경제라고 한다면, 예를 들면 지렁이를 넣고 하는 과정들, 움터 올라오면서 땅을 열어 제끼고, 이러는 과정들이 생생하게 살아 날 거라고 생각한다.

황 : 생명살림 하면, 인간의 인위적인 노력이 가미되는 느낌이 있는 것 같아요. 생명의 경제라고 하면 자연생태계에서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

강 : 우리의 적극적인 액션이 깃들어간다는 의미에서 긍정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황 : 옛날에 영국에서 생명농업 논문 쓸 때, 그냥 life agriculture 하니까 생태계에서 일반적으로 쓰는 용어 같더라. 그래서 life intense 그러니까 생명살림이죠. 그리고 또 하나가 무소유의 경제라는 개념이 있는데 이것은 간디 연구하는 사람들의 용어이기도 한데, 무소유라고 하면 너무나 자본주의 경제와 동떨어진 개념이라 들이대기는 좀 어렵지만, 경제 개념의 좀 승화시키면 무소유까지 가지 않을까

강 : 무소유의 경제를 다르게 표현하면, 집착으로부터 탈피한다. 해방된다. 그런 개념이라고 본다. 생명 과정 자체가 살고 죽고 성장하고 사라지고, 사그라들고 그 속에서 또 새로운 싹이 올라오고 하는 것이 집착이 없는 과정이거든요. 도교적으로는 무상의 경제 무상함의 경제.

황 : 원래 그곳에 소유의식이 들어설 자리는 원래 없는데, 인간의 소유의식이 들어서면서 억압의 문제가 만들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강 : 근대 노동력을 규정할 때, 근대 자유인의 권리, 개인의 인권을 규정할 때, 존 로크가 얘기했지만 ‘인간은 자신의 노동력의 소유자이다.’ 이렇게 규정한다. 자신의 몸뚱이마저도 생명살림의 과정으로 보는 존재 내지 관계의 개념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소유의 개념으로 본다. 그러면서 내 노동력에 대한 소유의식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재산이 되고, 그래서 그 재산의 가치를 높여야 하고, 높이는 수단이 교육이나 훈련이고 기술이 들어 가고, 남과 경쟁해서 나를 높여야 된다. 그러다 보니 약육강식의 생존경쟁. 팔꿈치사회. 남을 쳐야하는 경쟁적인 경제가 강화되는 토대 밑에는 말씀대로 가장 근본적으로는 물질적인 소유의식과 더불어 자기 몸뚱이마저도 소유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자리잡고 있다.

황 : 지금까지 돈벌이 경제와 그 대안적 개념으로 살림살이 경제의 원리적인 측면을 일단 살펴봤고, 녹색과 관련해서 경제 얘기를 좀 나누자면, 강교수님 책이라든지 글이라든지 평소에 열심히 읽는 편인데.. 최근에 또 일중독이라는 책을 내셨더라구요. 사실 지금같이 돈벌이 위주로 경제를 추구하다 보면 백이면 백 일중독에 걸릴 수 밖에 없는 이런 사회인데.. 그 책을 읽으면서 자본주의 사회가 일뿐만 아니라 중독의 사회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일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중독이다. TV 보는 것, 관계 맺는 것, 여행가는 것, 기호품부터 스포츠.. 중독사회이다. 이게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사회에서 가능할까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이렇게까지 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면 왜 자본주의가 인간을 중독에 빠지게 만드는가? 자본주의의 어떤 속성이 도대체... 그점에 대해서 좀 얘기를 부탁드린다.

강 : 좋은 말씀이고요. 선생님의 ‘야생초 편지’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가장 근원적으로 생명살림의 경제를 생각하게 해주는 것이에요. 이미 그것이 삶의 제한된 공간 속에서 역설적으로 그 삶을 더 깊이 생각하게 해주는.. 그래서 우리에게 울림이 있는 것 같아요. 중독사회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삶의 제한성 속에서 깊이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무한대를 추구하는 욕망과 경향성을 깔린 것이죠. 자본주의가 중독사회라고 표현하시는데 저는 적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하고요.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은 돈이나 지위나 권력이라고 하는 것은 만족을 모르는 시스템이거든요. 10억을 벌면 행복할 것 같아서 10억을 벌면 100억을 벌어야 할 것 같은.. 끝없는 무한을 추구하는.. 저 멀리 떠 있는 무지개를 잡기 위해 뛰어가는 .. 그런 과정이 깔려있고요. 그런 과정에 사람들이 왜 동참하느냐? 더 기본저긍로는 진정한 자기 내면을 상실했기 때문에.. 진정한 자기와의 만남과 접촉이 이루어지는 만큼 중독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습니다. 산골짜기 생활해보면 알잖아요. 내가 나를 만날 수 있는 만큼 세속적인 욕구나 욕망이나 무한대적인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거든요. 내가 나를 찾지 못하는 상황에서 외적으로부터 그 공허함을 채워낼려고 노력하는 것은 채울려고 노력하면 많이 소유하고 확보하면 할수록 금방 만족에 이르는 것 같지만 금방 공허해진다 말이에요. 그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서 소비중독에 빠지고, 일중독에 빠지고, 여행중독에 빠지고, 관계중독에 빠지고 한다 말이에요. 사람은 진정한 친구를 한 사람만 사귀면 더 많은 친구가 필요없어요. 근데 진정한 친구가 없으니까 끊임없이 사람을 챙겨보려한다

황 : 핸드폰에 전화번호부를 보면 20년 전 전화번호부 하고는 비교가 될 정도로 많이 적혀있다. 여기 몇백 개씩 적혀있는데, 그것을 쭉 눌러 보면서 함석현 선생이 말하는 질경이선생 시 있잖아요. 그런 친구를 가졌는가 하고 쭉쭉 눌러보면 전화번호부에 수 백개가 찍혀있어도 진정한 인간관계를 맺은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생각해보게 된다. 이것이 전화번호부뿐만 아니라 모든 관계가 그렇단 말이에요. 이것이 좀 있다가 경제 얘기를 나눌 때 나오겠지만, 자본주의에서 이렇다고 얘기했는데, 예전에 공부할 때 정치경제학, 현대자본주의, 맑스주의 등..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안되더라. 그래서 더 깊이 들어가야된다 해서 나중에 인류학까지 공부하게 되었다. 깊이 들어가보니 자본주의로 인해 특이하게 극대화된 것은 맞는데, 우리 인간의 문명의 시작부터가 이쪽으로 발전되어왔다는... 아까 말한 내명 상실이라는 것이 우리가 문명의 반지를 끼울 때 자꾸 외부에서 뭘 찾으려고 하는 문명을 계속 발전시켜온 것이라.. 그래서 자본주의에 와서 극단적으로 꽃을 피운 것이라 생각한다.

강 : 결정적인 것은 땅으로부터의 인간의 이탈 같아요. 소위 말하는 땅이라는 생산수단과 사람이라는 노동력이 분리되면서 땅의 경제에서는... 땅이 결국은 생명 아니겠습니까.. 땅의 경제에서는 사실 그 땅과 사람이 더불어 사는 경제인데, 땅으로부터 이탈되는 경제가 되다 보니 결국 땅을 확대해보면 생명이고, 또 확대해보면 자연의 환유, 상징이잖아요. 자연이 nature라고 하는 사전에 찾아보면 본성이라는 뜻도 있다. 자연과 가까이 하는 마음은 본성과 맞닿아 있단 말이에요. 만물일체, 물아일체가 가능한 경제가 땅의 경제인데, 그것으로부터 이탈하는 경제가 바로 중독사회로 접어드는 것이고, 만족을 모르는 것이고, 무한대를 추구하는 것이고, 구체성을 잃어버리고 추상적인 무한대를 쫓아가는 것이죠.

황 : 땅으로부터 분리되는 순간 인간들이 결국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었다는 말..

강 : 오늘날 아이들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목적이 뭐냐하면 ‘얘들아 땅 파먹고 살기 싫으면 공부해라’ 공부하는 목적 자체가 이미 땅으로부터 이탈을 위한 것이다.

황 : 결국 우리가 이 얘기를 이렇게 하면 지금 현재 세상에 대한 대안을 찾는 것도 결국은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 된다. 옛날에는 땅이 인간의 내면하고 하나의 통일된 생각이었다는 말이지요.

강 : 땅을 어머니라고 보는 것도 결국 우리가 그 속에 들어있던 어머니고, 그 속에서 내가 형성되는 토대이고, 나의 내면과 외면이 분리되지 않는 것이죠. 갈수록 이게 분리가 되는.. 그래서 크게 보면 사회와 경제의 분리도 그 확장과정,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죠

황 : 얘기를 현실로 좀 돌아와보면, 우리가 이명박대통령을 만든 것도 한국국민들의 정서나 살림살이 자체가 많이 땅에서 분리된 ??속에서 뭔가를 많이 가지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 차 있는데 이명박이라는 사람이 이것을 충족시켜줄 수 있다고 환상을 가지고 찍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렇게 굴러가는 한국 경제가 과연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이건 미래학과도 관련되는 문제고.. 이미 노무현정권 시절에 신자유주의를 충실히 이행하면서 이명박의 경제정책을 바로 들이댈 수 있게끔 토대를 만들어 잘 놓았다고 생각해요.

강 :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국민들이 경제를 살려줄거라고 이분을 뽑은 것이 너무나 흥미로운 거에요. 신자유주의 부정적인 결과로서 현재의 대량실업 사회양극화 생겨서 고통에 시달리는 것은 분명한데, 불행하게도 신자유주의를 더 가속화시키겠다는 사람을 통해서 이 문제를 풀어 달라고 하니.. 결과는 뻔한 것이고 너무나 웃긴 사태가 벌어진 것이죠. CEO형 대통령에 대한 환상과 우리가 돈벌이 경제에 대한 내면화 과정이 얼마나 심하게 전개되고 있는가를 거꾸로 알 수 있는 흥미로운 현상이라고 봐야죠

황 : 대선 얼마 전에 김근태의장이 국민이 노망이 들었나하는 발언을 해서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었는데, 일부에서는 맞는 말이냐 하는 얘기도..

강 : 대놓고 이야기하기는 어렵지만 솔직히 토론하는 수준에서는 그런 이야기도 해야지요

황 : 그런데 나는 그 말을 하는 열린우리당 의원들 자체도 그런 말을 하는 자격이 없어요. 이 사람들의 세계관이나 경제를 보는 관념이 똑같거든. 똑같은데 자기들한테 표를 안준다고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왜냐면 자기들이 그런 정책을 펴서 국민들의 마음을 이렇게 만든 것이거든.. 그렇다면 신자유주의를 더욱 철저하고 밀고나가는 대통령이 나왔는데, 이것의 미래에 대해서는 상당히 비관적으로 본다 이거 아닙니까?

강 : 경제적인 성과 차원에서는 상당히 비관적인데요. 학생운동과 사회운동을 부활시킬거라는 점에서는 정말..

황 : 또 다시 저항의 시절이...

강 : 생명살림의 저항이...

황 : 10년 동안 잠잠했어...

강 : 그 동안 많이 죽여놨죠... 어찌보면 추상적인 농담으로 얘기했지만 그런측면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가졌던 환상으로부터 깨어날 수 있는 계기. 아니구나 라고 하는 것을 학습하는데 한 5년이 필요할 거라는 거죠

황 : 사실 노정권이 망쳤다 망쳤다 욕하지만 뭘 망쳤냐고 물어보면 딱히 대는게 없어요. 이 사람들이 잡아도 이 이상 잘할 것 같지는 않거든요...

강 : 그런 점에서 정동영씨가 안된게 개인적으로 다행이다. 그 사람이 되면 대책이 없잖아요.

황 : 한나라당이 한 번 휩쓸고 이 기조 한번 해봐라 니들은 다른 거 만들 수 있겠는가?

강 : 어차피 어려운 민중들이야 누가 잡아도 마찬가진데, 환상으로부터 깨어날 수 있는 일정한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냥 놔두고 볼 일은 아니고, 끊임없이 이런 건강한 문제제기 대안적인 이야기를 해나가는 작업이 필요하겠죠

황 : 그저께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선거 인터뷰를 봤는데, 저 달동네에 있는 할머니와 인터뷰를 하는데, 기자가 누구찍었냐고 물으니 ‘이명박이 찍었지’ 달동네 서민 중에 서민인 그 할머니가.. ‘왜 찍었어요?’고 물으니.. 이 할머니가 또 말을 잘 하시더라고.. 대답은 우리 어머니가 한 말과 똑같더라 ‘경제를 살린데잖아.. 그 사람이 당선되도 우리 같은 서민이야 별 달라질 것은 없겠지만, 그 사람이 대통령이 돼서 나락 잘 살게 되면 덕분에 우리도 조금 잘 살게 되지 않을까?’ 이게 경제학에서 말하는 트리클 다운[Trickle Down] 아니겠습니까? 이 말이 할머니 입에서 나오는 것인데.. 서민들이 그런 생각을 갖게 된다는 것은 어떻게 해서 그렇다고 생각합니까? 트리클 다운이 60년대부터 경제개발계획하면서 미국의 경제학자들이 제시해서 한국의 정치인들을 쇄놰시켜 이런 것 아닙니까?

강 : 크게 보면 트리클 다운 이팩트는 제가 해석하기에는 하나는 국익중심의 사고를 강화하고, 두 번째는 대기업중심의 사고를 강화하는 것. 위에서 잘 되고, 돈벌이 경제를 말하는 것이죠.. 전형적으로 돈을 잘 벌면  그것이 흐르고 흘러넘쳐서 밑에 떡고물이 많이 떨어질 것이다 이런 이야기이죠. 결국 이런 사고방식은 국가주도적인 경제개발이 되면서 나라가 잘 살아야 우리도 잘 산다고 하는 식으로 수십년의 과정에서 사회화된 학습과정이라고 저는 생각하지요.

황 : 단순한 논리인데. 이것을 틀렸다고 딱 말하기 어렵다라고요. 집안이 잘 되야 너도 잘 사는 것이 아니냐...

강 : 좀 차분하게... 1960년대 초에 우리의 1인당 GNP가 따지면 80불이었는데, 지금은 2만불 시대니까 200배 이상 나라 전체가 잘 살게 되었는데, 할머니가 예전에 비해서 훨씬 행복하게 잘 사느냐 하면 아니거든요..

황 : 다들 그러잖아요. ‘그래도 예전이 좋았지. 그때는 인정이라도 있었지.’

강 : 바로 그거죠. 인정이라고 하는 것이 이른바 민중복지거든요. 그 사이에 수준은 높으냐 낮으냐를 따지지 말고, 낮은 수준이라 하더라도 마음이 편하고 정이 흐르고 그래서 이게 삶의 감정들의 흐름이 자연스러워서 중간에 탁탁 숨막히는 스트레스가 없는 것이죠. 절벽 보고 말하는 듯한 느낌이 없는 것이죠

황 : 인정이라는 것이 없는 이웃들 끼리 상부상조하는 이런 것은 있었다는 것이죠

강 : 지짐 하나라도 조금씩 나눠먹고 지나가는 사람 이리 오라고 함께 먹고 해야 마음이 편한.. 자기 혼자 먹으면 불편한... 그런 것으로부터 이제는 자기 혼자 먹어야 편한...

황 : 아까 민중복지라고 표현했는데, 민중 스스로의 복지. 민중이 자기 스스로 만들어낸 복지.. 그런 용어 있습니까?

강 : 그것도 지금 만들고 있는 중이지요..

황 : 민중자율복지..

강 : 풀뿌리목지 내지 민중복지 이렇게 표현해보는 것이지요.. 굳이 복지 개념을 가지고 가면 시장복지라는 것이 있고, 영미식의 시장을 통해서 웰빙을 사겠다는... 국가복지는 국가가 교육이나 노후나 그런 것들을 대신 해주는 것이고, 민중의 자율복지는 self organizing이라고 하는 것이고 solidarity를 통해 해결하는 것.

황 : 복지의 세 가지 모델을 얘기했지만 어느 것이 전적으로 지배하기는 힘들 것 같고, 우리같은 경우는 사실 독재시절에는 국가복지 중심으로 사고를 하다가 기업이 사회를 전적으로 지배하면서 시장 쪽으로 맡기다가.. 예전에는 민중자율복지로.. 신경 안 쓰고 니들이 알아서 살아라.. 근데 이것이 점점 축소되어서 시민운동차원으로 떠넘겨졌다고 보는데, 앞으로의 국가 내지 시장 복지의 경향화의 개념으로서의 민중자율복지를 점차 확대시켜나가야 하는데, 어떤 측면에서는 국가도 참 투박해요. 이런 NGO나 민중자율복지를 잘 된다 싶으면 국가가 그것을 따먹더라. 자기네 속알음만 만들려고 하더라고요

강 : 그렇기 때문에 장기적인 전망을 가지고, 민중의 자율복지에 있어서 첫 번째 주도권과 두 번째 내용을 채우는 것은 풀뿌리가 확실히 잡고 있어야해요. 그리고 자원의 재분배 라던지, 위험으로부터의 보호 즉 기득권으로부터의 저항 그런 역할을 국가가 해주는 정도로 분담이 된다면 그것은 OK. 그러나 내용을 가져가고 주도권을 가져간다면 그것은 저항해야 되는 것이죠

황 : 그러나 이 지점이 참 어렵다. 제가 인도의 간디경제를 좀 연구하다보니, 간디주의자들이 민중자율복지를 추구하더라. 국가의 간섭이 굳이 없더라도 자기들끼리 상부상조하고 자급자족하면서 잘 사는 것을 축으로 했는데, 국가가 확대되니까 세금을 걷어 돈이 많으니 국가에서 학교를 지어주고 보건소를 지어주고 이것저것 시설을 지어주니까 NGO나 시민단체가 자발적으로 하던 것들을 자꾸 놓게 되는거에요. 그러니까 그 힘이 약화되니가 내용이나 주도권을 하나하나 국가가 떠안게 되면서 민중들이 국가에 의존적이 되고, 운동이 점점 소멸해버리는 형상이 빚어진다. 오늘날 인도에 간디가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이 국가가 상대적으로 비대해지면서 그리 되는 것이다.

강 : 그게 규모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조직방식의 문제이기도 하다. 자율적인 조직이 아니라 국가가 지어준 타율적인 조직 의존되고.. 저는 규모의 문제와 조직방식의 문제가 같이 결합된 것이라고 봐요. 국가의 개념적인 이야기 보다 기능적인 면을 보면, 크게 자원의 분배 역할이나 조정역할 갈등의 조정역할 이런 것을 국가가 해야 하는데, 그것을 중앙집권적인 조직원리하에 배치하다보면 분명히 소외되고 의존되요. 마을 자체적으로.. 굳이 표현하자면 마을 국가지요. 마을 자체적으로 직접민주주의의 방식에 걸맞게 의논하고 조율하고 조정해나가는 그런 형태로 나가면 그때는 규모도 소규모이지만 그게 크게 보면 국가의 역할인데, 이미 우리가 생각하는 국가의 틀은 사라지고 민중자율적인 조정시스템으로 가는 것이죠. 그랬을 때 소외되지 않을 수 있는 것이죠

황 : 하지만 그것이 한국식 문화전통에서 상당히 어렵다는 것이죠. 새마을운동 이래로 물론 일제시대부터 그 기원을 따져야겠지만, 리 동 단위까지 관료주의적인 인맥이라던지 기구를 섭렵해나가지고, 우리 민중이 굉장히 관의존적이 되어버렸어요. 뭘 하더라도 시민운동하는 사람이나 자원봉사하는 사람들이 이거 좋다고 하면 콧방귀도 안뀌지만 공무원이 와서 자금 지원해줄테니.. 이러면 굉장히 열심히 와서 달려들어 하거든요. 마을의 자율적인 자치기구를 만들고 정치사회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한국의 실정에 너무나 어렵다는 거죠.

강 : 결국은 아까 중독사회와 맞닿아 있는데요. 결국은 우리 내면을 상실하고, 그 내면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자기 삶에 대한 자기 책임성. 다른 말로 하면 자율성이거든요. 삶의 자율성. 내 삶을 내가 스스로 이끌어나가고, 스스로 조절하고, 스스로 수정 변화시키기도 하고, 결과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진다라고 하는 의미. 신자유주의시대에서 국가나 시장이 져야하는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의미로서 자율성. self responsibility. 이게 상당히 중요하다고 본다. 그것을 복원시켜 나가는 과정이야말로 신자유주의 내지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에 맞설 수 있는 근본 토대라고 봐요. 그런 삶의 자율성과 더불어 유대감, 연대정신, 상부상조의 관계망 이런 것을 복원해내는 노력. 이런 것이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모든 면에서 이루어져야하는 것이죠.

황 : 현재의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항해서 어떻게 나아가야하는지 말씀을 해주셨는데, 사실 전세계적으로 대안운동의 방법론이라던지 이념이라던지... 해답은 다 나와 있는 것 아닙니까?

강 : 그 해답이 크게 두 가지로 수렴되죠. 하나는 막강한 정치세력화를 통해서 국가권력을 장악해서 볼리비아 쿠바 베네수엘라가 보여주는 모델이 있잖습니까? 내용적으로 그런 것들을 극복해가면서 최근에 보이는 새로워진 사회주의 모습으로 가자하는 담론이 있는 반면, 두 번째가 풀뿌리 자율로 분권화된 형태, 소규모 공동체, 땀과 함께가까이 하는 경제, 작은 담론으로 수렴되고 있어요. 저는 방점을 후자에 두고 싶어요. 과도기적으로는 전자의 국가권력화의 민주화가 필요하다고 보지만, 근본적으로는 그것마저도 풀뿌리로 돌아간다는 것을 합의할 수 있을 때 성공하는 것이지 안그러면 국가권력체가 자체가 독립해버려서 궁극적으로 풀뿌리를 다시 억압해버린다는 거죠. 그게 기존 소련, 동구사회의 사회 사례의 결정체라고 봐요.

황 : 국가사회주의 모델이라고도 하고, 심하게는 국가자본주의 모델이라고도 하죠. 소련의 경험에 대해서 학자들의 논쟁이 끊이질 않지만.. 애초부터 그것은 국가자본주의였다는 얘기부터 시작해서 말이죠.. 결국은 얘기나온 대로 그것대로 극복대상일 뿐이다. 국가가 이런 파괴적인 자본주의로부터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과도기적으로 그런 형태를 취했다고 볼 수도 있는데, 결국 궁극적으로 소규모 공동체 속에 사는 개개인의 자율성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가야하는데, 소련이 일단 그 과정에서 국가공동체가 무너지고, 소규모 공동체 방향으로 가지 않고, 천민자본주의로 가고 있단 말이에요. 중국도 마찬가지로..

강 : 자본주의 시장체제에 천박하게 재편되고 있죠.

황 : 중국이나 현재 러시아에서 이런 소규모 공동체를 지향하는 자립적이고 자율적인 사회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진다는 소식은 별로 들리지 않고 있어요. 그렇게 본다면 세계적으로 볼 때, 상당한 기간은 서구나 미국을 중시으로 하는 신자유주의의 격랑속에서 상당 기간은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예측을 할 수 있는데요.

강 : 최근에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의 엠마 알트파트 교수가 ‘자본주의의 종말’이라는 책을 써냈거든요. 그 책 속에서 그런 얘기를 하죠. 구야마식의 역사의 종말이 아니라 자본주의 종말을 이야기해야 한다. 오일피크 피크오일 이야기와 더불어서 자원이나 생태적인 한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이윤, 잉여가치를 추구할 토대가 많지 않다는 것이죠. 쉽게 생각해보면, 자동차를 이렇게 급속하게 많이 생산해서 세계시장에 쫙 깔렸다고 했을 때, 새로운 시장이 더 이상 개척되지 않을 때, 이것을 그 다음에 만들어지는 잉여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는 맑스의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가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더불어 더욱 극명하게 나오고 있는거죠. 그랬을때 알트파트 교수의 이야기는 페르낭 브로델이 편 논리를 따라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세계사회 곳곳에서 신빙성 있는 대안, 싹들이 이리저리 터져 나와야 된다. 그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런 생태적인 자립경제형의 공동체 이런 것이거든요. 저는 그것만이 대안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태초부터 시장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태초부터 국가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굳이 말하자면 저는 태초에 마을이 있었다고 말하고 싶거든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가족을 핵심으로 하는 것이 커지면 마을이 되는 것이데, 그 잃어버린 것. 그게 그야말로 오래된 미래인 것이죠. 그게 장구한 역사적 과정 속에서 잃어버린 것. 어쩌면 자본주의 이전에 노예제나 봉건제 때도 경우에 따라서는 잃어버린 부분도 있을 거에요. 크게 보면 자본주의가 결정적으로 망가뜨렸지요. 그런 것을 찾아나가는 전형적인 답은 없지만, 공동체적인 관계망을 만들어내고, 땅과 가까이 하고, 자립순환형으로 만들어가고, 타인의 기생 위에 나의 웰빙이 보장되는 그런 경제가 아닌, 자기 땀과 자기 노력에 기초해서 나를 복되게 하고 타자를 복되게 할 수 있는.. 그런 건강한 경제를 만들어내는 것. 구체적으로 말하면 오일에 기초한 경제가 아니라 자연에너지라던지 아니면 에너지를 극소로 이용하는 그런 경제. 밥이 똥이 되고, 똥이 밥이 되는 생명살림의 순환의 경제. 간소하면서도 검소하고, 만족을 알고, 충분함을 알고, 삶의 결을 느끼고, 무늬를 만들고, 향유할 수 있는, 삶의 여백과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그런 살림살이 그런 것을 찾아내는 것이 과제라 할 수 있죠.

황 : 결국은 대안운동을 하는 사람이나 땅에 뿌리를 박고 살려는 사람들의 의견들이 그렇게 모아지는데, 이쯤에서 이런 이야기를 해봅시다. 파괴적인, 스스로 파괴적이기도 하고 다른 모든 것을 파괴하는, 자본주의에서 우리가 말하는 대안적인 세상으로 이행의 문제. 정치경제학에서 보면 이행의 문제가 포괄적인 논란거리 중 하나인데, 이게 자연스럽게 이행이 될 수 있는가, 그런 방향으로 이행이 객관적으로 가능한가? 이런 것을 얘기해보고고 싶네요. 강연 같은 곳에 나가면 그런 얘기를 하거든요. 사람들이 ‘너무 꿈같은 얘기 아니냐? 그래서 어떻게 사람들을 먹여살리냐? 소규모공동체에서 손을 일해서 어떻게 사람들을 먹여 살리냐?’ 이런 반론들을 많이 해요. 그러면 저도 궁해지죠. 이게 뭐 말을 그렇게 해도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은 분명히 아니고, 굉장히 장구한 시간이 걸려 이행이 되어야 하는 건데, 많은 사람들이 현체제에서 소외감을 느끼고 떨어져 나올 것이라는 거지. 또 하나는 극악한 자본주의를 견디다 못한 지구생태계가 뭔가 작동할거라는 거지. 이것은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가 없는 것이라서 당해봐야 아는 것 아니냐 뭐 학자들이 예측은 많이 하지만... 앞으로 신자유주의가 상당 시간 더 갈 것이라고 하지만 이것이 무한정 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무한정 가지 못하는 것이 결국 지구생태계의 파괴적인 몸부림하고 대충 중복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가 싫더라도 우리가 말하는 이런 속으로의 재앙에 분산적인 경제로 나가지 않을 것인가하는.. 저는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하고 그런 얘기하는데, 강 교수님은 이 이행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설명을 합니까?

강 : 저는 삶의 질 중심의 구조조정이라는 용어를 쓰죠. 현재 말하는 구조조정은 경쟁력 중심의 구조조정이잖아요. 자연과 인간을 다 파괴하고 갈구는 구조조정인데, 삶의 질 중심의 구조조정은 기존의 기업이나 국가의 역할이나 기능을 사회 생태적으로 변모시켜 나가자 그것이 핵심입니다. 그래서 민주적인 정책에 맡겨야 할 분야와 민중자율에 맡겨야할 분야, 시장에 맡겨도 좋은 분야를 좀 분류하고, 특히 주거문제 교육 육아문제, 의료문제, 농업, 에너지와 같은 분야는 민주적인 결정 내지 민중자율의 영역으로 가면 갈수록 많이 줘야하고, 시장영역은 소비재 영역,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것. 그런 분야는 갈수록 줄여나가는 커다란 차원의 방향성의 설정이 1번이구요. 2번은 1차, 2차, 3차산업 모든 분야를 떠나서 하루에 목표치로 4시간 정도의 과감한 노동시간 단축. 목표치죠. 헬렌 스코트 니어링처럼 하루에 12시간 활동을 한다면, 먹고 살기 위한 그야말로 subsistence를 위한, 생존을 위한 노동으로 한 4시간 정도 일하고, 농업이든 글쓰기든, 연극이든. 4시간은 자기계발이나 수양이나 사회활동에 쓰고, 나머지 4시간은 이웃이나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과의 친교활동. 이렇게 삶의 시간을 재구성하는. 그 다음 세 번째는 일정하게 과도기적이니까 국가의 자원 재분배 측면에서 노동시간 단축을 하더라도 사람들이 먹고는 살아야 하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정말로 현관계에서 누진세를 좀 더 가파르게 해서, 가파르게 해도 부자들이 굶어 죽지는 안하잖아요. 그 부분의 국방비로 줄이고, 탈세든 누세든 잡아내고 이러는 자원 재분배 기능을 좀 더 해서 결국은 민주적인 정책이나 민중자율로 맡기는 부분에 투자를 하고, 그것이 자원의 재분배가 되죠. 그러면서 개별기업이나 경제 분야에서 삶의 질을 더 높이데 필요한 부분은 살려나가고, 삶의 질을 망가뜨리고 환경을 오염시키고, 퇴폐향락적이고, 필요없이 과잉투자 되는 분야는 축소시켜나가고 없애나가야지요. 그런 식의 구조조정을 저는 삶의 질 중심의 구조조정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죠.

황 : 문제는 그것을 누가 집행하는 것이냐 하는 것이죠?

강 : 그것을 집핼시킬 수 있는 밑바탕은 풀뿌리에 우리가 이런 마인드를 공유하고 확산해서 그야말로 선거국면이나 선거국면이 아니더라도 이런 것을 공론화해서 나의 삶의 가치로 공유하는 정도만큼 희망이 나오는 것이고, 끊임없이 나의 개별적인 것에 집착하고, 기득권층이 그어놓은 스탠다드에 따라가려한다면 변화는 안오는 것이죠.

황 : 결국은 그렇게 변해가야되는데, 국가기구를 장악하는 사람들이 그런 마인드를 가져야 되고, 그 사람들이 그런 마인드를 갖고 정책을 펼려면, 국민들, 풀뿌리 차원에서 거기에 대한 강력한 지지이 있어야 되고...

강 : 지지뿐만 아니라 견인해낼 수 있는 정도의 파워가 커져야하는 것이지요. 셀프 임파워먼트 그게 정말로 풀뿌리가 선거를 통해서 똑똑한 사람들 보고 좋은 정치를 해달라고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 힘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이런 요구를 하는데, 너희 하는 것 보니까 안되겠어. 우리 말 안들을래. 예를 들면 세금도 안내고.

황 : 그 지점에 다다르게 되면 갈등이 나올 수 있어요. 국가가 이것을 통제해서 그렇게 나가야 된다고 하는, 국가권력중심적인 그룹이 있을 것이고, 조금은 아나키적인... 우리는 그런 중심권력이 필요없다 우리는 자체적으로 해결하니까하는 그룹. 이행의 과정에서 그런 마찰이 나올 것 같다.

강 : 충분히 그럴 것 같다.

황 : 미국으로 치면 예전의 연방파와 자유주의파(민병대)들간의 갈등이 아직도 있잖아요.

강 : 그런 현상이 분명히 나타날 수 있겠지요. 저는 중앙집권화된 권력을 지양해야 된다고 보면서도.. 아나키즘, 자율권력, 셀프 오토노미죠. 자율성. 개인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집단적인 차원에서 마을이나 지역을 스스로 다스려 나가고, 옆마을이나 이웃과 항상 협의하고 조정해나가면서 같이 나가겠다고 하는 연대의식, 그것이 작은 대안인것 같지만 그런 원리가 세계화될 적에 세상에 평화도 오는 것이고, 기존의 인종적으로, 국가경쟁적, 기업별, 성별로 나뉘어져 있는 분열의 경계선들을 넘어갈 수 있는 새로운 원리가 바로 자율과 연대의 원리.

황 : 현대의 제국의 논리나 신자유주의의 논리가 개인이나 집단의 자율성 내면..?? 이미 지난 일대기 동안 대중들을 철저히 쇄뇌시킨거 아닙니까 학습시키고.. 너희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강 :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아까 어머니나 할머니의 말처럼 ‘그 사람이 경제를 살린대잖아’ 이런 이야기 인데, 그런 의미에서 또 5년간의 학습과정에서 또 환상이 깨질 수 있다는 저는 그런 말씀을 드렸는데. 결국은 삶을 살아가면서 경험 속에서 실천 속에서 나오거든요. 문제는 기득권층들이 가리고자하는 노력들. 이데올로기적인, 말의 눈가리개처럼 분명히 문제가 싹터져나오고 대안의 싹들이 올라오는데 문제도 못 보게하고, 대안도 못보게 하고 저희들이 끌고 가는 곳으로 따라가게 만드는.. 거기에 속지 않는 지혜와 통찰력. 그리고 그것의 공유. 이런 것들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대안적인 운도의 요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황 : 크게 말하면 제국의 논리. 거기에 대항하는 거대한 싸움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일상적인 차원에서부터 국가적, 세계적인 차원까지. 그래서 우리가 늘 그런 얘기하잖아요. 영성을 얘기할 때 내 개인이 가족과 공동체와 경제, 우주와 하나되는 느낌이라고 할까. 이런 얘기를 하지만은 지금 얘기하는 대안세계를 넘어가고자 하는 사회운동조차도 똑같은 원리가 적용되는 것 같다. 내 내면에서부터 국제적인 차원까지. 결국 하나라는 것이죠. 자율대 제국의 논리. 싸움에 있어서. 그렇다고 본다면 우리가 운동선상에서 나오는 분파나 노선 차이 때문에 서로 사움질 하는 것들을 지양할 수도 있지 않으냐 설득시킬 수 있지 않느냐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지난 70년대 80년대 어떤 운동의 관성들이 여전히 시민운동권에서도 뿌리 깊게 남아있어서 이번 선거가 이분들한테 상당한 철퇴를 내리면서 그런 예전 방식에. 전체를 보지 못하는 운동방식에 대한 일정한 정도의 반대의 시각을 마련해줬다고 생각하는데, 과연 반성을 하고 서로 대화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앞으로 주어질런지..

강 : 그런 것이 일종의 우리가 할 수 있는 역할이겠지요. 우리 하나가 세상을 다 구제하겠다는 욕심을 가지는 것은 좀 무모하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실천은 고집스럽게 해나가는, 비록 한꺼번에 못 바꾼다 할지라도 내가 그 속에 신념을 걸고 순수한 마음으로 이것이 진리고 답이지 않겠느냐 하는 답이 있다면 일관되게 밀고 나가면 그게 울림으로 공명이 생기거든요. 기존의 사회운동 혹은 정치운동이 가졌던 부분을 저 나름대로 보면요. 김영삼 대통령은 말할 것도 없고, 김대중 대통령이나 노무현 대통령조차도 그 당시 운동하던 때의 이론적인 지평이나 철학적인 배경. 그게 그 당시에는 유효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것 가지고 세상을 바꾸는 이론적인 차원은 아닌 것 같아요. 제가 볼 적에는. 정말로 지금 우리가 얘기나눈 바와 같은 인간문명 사회문명 시스템 깊숙이 스며들어있는 이런 문제들에 터치하고 고민하고 토론하고 이런 부분들이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어떤 시스템을 구축하고 정책을 만들고 해도 될까말까인데, 국제적인 관계도 있고 저항세력도 있기 때문에.. 그런 것도 없이 표면적인 정도의 개혁성 이런 것을 가지고...

황 : 정권을 계속 잡아도 뭐 우측이 한푠데..

강 : 차라리 그럴 때는 넘겨주는 것이 속편하죠. 그리고 까발려보는 것. 이것을 매개로 해서, 또 타인의 까발림을 통해서 나도 까발려 볼 수 있는 것. 그런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사회적인 학습이 될 수 있는 것. 저는 그런 차원에서 좀 길게 보면 될 것 같고요. 그리고 갈라지고 한다고 하는데.. 그것이 이중성이 있는 것 같애요. 운동에서 보면, 아니다 싶으면 끝가지 붙들고 울고불고 같이 가자고 하는 것 보다는 차라리 조용하게 별도로 집을 새로 짓는게 낫지 않냐하는 이런 노선에 있고, 통큰 당별의 입장에서 보면, 그래도 우리가 제국의 세력이나 자본의 세력에 맞서 갈려면 함께 가야되지 않느냐, 저는 둘 다 맞다고 보거든요.

황 : 상황에 따라, 바람에 따라

강 : 싸워야할 때는 같이 싸워야하고 하지만 내부의 차이가 존재하고 하니까. 영원히 적대적 관계로 돌아서기 보다는 항상 열어놓는, 갈라설 수도 있지만, 따로 이면서도 같이. 같이 가면서도 또 따로 갈 수 있는 그런 열린 자세로 운동을 할 때 전망이 있다. 그야말로 적처럼 담을 쌓아버리면, 결국은 자기 고립을 자초하게 된다.

황 : 하나 덧붙이자면 무엇보다도 열린 마음. 또 어떤 새로운 세계관을 가지고 어떤 진영을 만들어가고 확대하고.. 이런 것도 중요하지만, 구체적인 작은 사례들이 무수하게 여기 저기 만들어지는 것이 가장 큰 핵심이라고 봐요.

강 : 역설적이게도 그런 작은 시도들이 자본주의를 넘어가겠다고 하는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별로 없어요. 오히려 덩어리화 되어서 블록으로 존재할 뿐이에요. 최근 대안이라고 하는 볼리비아, 쿠바, 베네수엘라에서도 국가라는 덩어리 안에서 보이는.. 역설적이게도 가장 자본주의적인 미국사회에 안에 암시 공동체라든지, 오크 공동체라든지, 유럽의 브로드호크라든지, 핀드혼이라든지. 이런 다양한 사례들이 오히려 자본주의 속에 있다는 것은 어찌보면 자본주의가 절망적이기도 하지만 또 희망적인 부분을 보여주기도 하지요. 어쩌면 자본주의 자체가 만들냈다기 보다는 빈틈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죠. 완벽한 것 같지만 자본주의가 스스로 완벽하지 못해요. 예를 들어 인간 노동력을 산 노동을 죽은 노동으로 전환시켜야지 자기가 배불린다고 표현하잖아요. 근데 죽은 노동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라도 죽여서는 안되거든요. 살려두고 부려먹어야 되거든요. 바로 살려둔다는 그 점에 저항할 수 있는 토대도 같이 있기 때문에, 결국은 자본이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확실히 잡을려면 죽여야 하는데, 죽이면 자신이 죽으니까. 그러기 때문에 빈틈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황 : 미국이 지금 빚더미 경제가 빚을 왕창 져가지고 내가 망하고 니들 다 망하더건가. 미국과의 관계를 끊을 수가 없어. 중국이나 일본이, 미국에 돈을 엄청나게 빌려준 나라들이 다들 공동운명체 아닙니까? 결국은 크게 보면 두 가지로 정리가 되지 않을까 싶으네요.  하나는 운동의 연대와 소통이라는 측면. 신자유주의 혹은 제국의 논리에 대항하기 위해서. 또 하나는 구체적인 실현지를 만들어가는 작업. 이 두 가지가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가능성이 있다는 거지요. 이 실현지가 상당히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 지금 볼리비아나 쿠바라던지 이런 얘기를 했지만, 이런 나라는 만약 정치 지도자가 바뀌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지요.

강 : 그리고 우리가 모르는 정치사회적인 억압이 존재할 수도 있어요. 대외적으로는 민중무역이니, 미국에 대항하는 모습이니 하는 것을 보면 아름답게 보일 수 있지만, 내부적인 사정은 또 알 수가 없는 것이지요.

황 : 중국을 보면 알 수 있지요. 첨예한 사례 아닙니까?

강 : 그래서 선생님이 말한 것처럼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모순적인 현실에 저항하는 노력을 하면서도 그들을 닮아가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 나름의 고유한 대안을 만들어내고, 저항과 대안의 변증법이라고나 할까 그런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대안을 많이 만들수록 그 속에 새로운 길을 발견하기 때문에, No라고 말할 수 있는 저항의 토대가 더 커지거든요. 그리고 저항을 거세게 하면서도 정말로 새로운 세계를 열기 위해서라도 그 대안의 실험과 ?들을 많이 만들어내야지요.

김 : 아까 초반에 말씀하신 내용 중에서, 성장이라는 것이 거의 모든 자본주의의 속성의 핵심적인 내용처럼, 끊임없는, 멈출 수없는. 과연 성장이 유럽같은 경우 제로성장이 되고 마이너스성장까지도 성장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서 제로성장 혹은 마이너스로 가야하는 것 아니냐 성장이라는 관점에서 보면은.... 그것을 깨야만.... 여러 가지 한계들을 봐서는... 우리나라는 아직 토목을 중심으로 하는 성장. 이명박이 중심으로 내세우는 지금 이렇게 가고 있단 말이죠. 성장이라는 것을 짚어보는 것...

강 : 소위 말하는 성장 중독증이 가동되고 있다. 우리의 사회경제 시스템에. 그래서 오죽하면 마이너스가 되어도 마이너스 성장이라고 표현하지요.

강 : 성장이라고 표현을 해야하는 거지요. 그래야 사람들에게 먹히니까. 간소화라든지 축소라든지. 그야말로 작은 것이 아름답다 할 때의 ‘작아진다’라던지. 이렇게 표현해도 될 것을 마이너스 성장이라고 표현하는 것 자체가 정말 흥미롭게도 성장 중독증을 여실하게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쩌면 삶을 간소화 하고, 작아지고, 그 속에서 자율적으로 조절해나가고, 스스로 통제할 수 있을 때, 행복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부로부터 심어진 성장 강박증, 나 스스로도 외형적으로 드러난 부분에 집착해서 끊임없이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더 커져야 된다하는 의식, 집단적인 성장 강박증이 사회경제적인 토대로 깔리고 세계전체적으로 보편화되었다고 봐야. 그리고 선진국은 이런 성장의 과실로서의 일종의 기득권이랄까 많은 소비 많은 소유의 중독되어서 그것을 떨쳐내지 못하고, 아래쪽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후진국 사람들은 선진국 모델에 환상에, 누구나 다 될 수 있는 것 처럼, 허리띠 졸라매기만 하면 할 수 있을 것처럼 환상에 젖어, 그런 모델에 대한 집착증으로부터 탈피하지 못하고. 상하가 다 얽매여 있다는 것이지요. 한 나라 안에서 계층적으로도 그렇고 전세계적으로 선진국, 중진국, 후진국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선진국으로 가야하는 것을 전제한 개념이지요. 성장도 굳이 마이너스 성장으로 표현하는 것이 모두 하나로 꿰뚫을 수 있는 그런 이야기라고 보구요.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경제나 사회의 외적인 성장 내지는 강한 국가, 세상에서 최고로 좋은 국가라고 하는 외적인 성장을 우리가 염원하는 것만큼 부실한 것이 우리의 내면적인 성장인 것 같다. 내면적인 성장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 만큼 외적인 성장에 집착하는 것 같다. 중독 이야기와 같은 맥락. 황선생님이 말씀하셨지만 자기 삶과 우주적인 삶과의 영성적인 관계 연관성, 그물망 이런 것에 대한 생각 보다는 끊임없이 타자를 제치고, 나를 키워야 되겠다고 하는 존재론적인 발상이 사실은 세상을 망가뜨리는 길이다.

황 : 지금 문제는 전 세계 190여 개국의 나라에서 초등학교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모든 학교에서 성장중독 교육을 시키거든. 모든 나라에서 선거할 때 마다 ‘성장하지 말아야한다. 계속 성장하면 다 죽는다’고 이런 말하는 사람들은 매국노가 되거나 또라이가 되거나 정치지도자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성장중독에 걸린 이 지구공동체 혹은 인간공동체가 벗어날 길이 없는 것이다. 성장중독으로부터. 실질적으로 모든 나라 정치판을 보면 한국과 똑같은 상황이니까. 정도의 차이만 있지. 여기서 지금 이런 얘기를 하는 것 자체가 또라이 취급을 받는 거야. 성장하지 말자 얘기하면,

강 : ‘작은 것이 아름답다’의 맥락하에서 대화하니까 대화가 되지. 다른 곳에 가서 말하면 미친놈이라고 그래요.

황 : 난 동창회 나가면 할 말이 없다. 그렇다고 이 성장중독에서 과연 어떻게 깨어나고, 국가를 저성장이나 마이너스성장으로 축소하는 것으로 끌고 가는 것이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인데, 이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을 대중들이 거부하는 것 아니냐 지금. 비관적인 얘기지만 망할 수밖에 더 있느냐 우리가. 그래서 요즘 이렇게 말하고 다닌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망할 수밖에 없다. 여러분의 사고방식, 생활방식, 세계의 흐름 등 모든 것이. 나같이 이런 얘기 하는 사람이 또라이 취급받고 있는 상황에서.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될 것이 뭐냐. 난 요새 여러분들은 지금 죽음에 대한 철학을 가질 때다.’

강 : 죽음에 대한 철학이 진짜 필요하지요.

황 : 왜 참 없이 망하는데, 이 망하는 시간을 알 수 없다는 거죠. 언제 어디서 한꺼번에 망할지, 하나씩 망할지, 집단적으로 망할지 아무도 모른다는 거죠. 그래서 늘 이 생태위기의 시대에, 경제 위기의 시대에는 죽음의 철학을 가져야된다는 거지요.

강 : 좋은 말씀이지요. 이런 위기의 시대가 아닐지라도 우리가 죽음을 생각하는 것만큼 삶을 진지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생명공학자에게 어거지로 바라는게 하나 있다면 제발 생명연장하려고 노력하지 말고, 누구나 공평하게 80 정도 되면 삶을 마감할 수 있게 칩을 장착한다거나 하는 그런 연구나 해줬으면 좋겠다. 그러면 억울하게 교통사고로 죽는 이도 없고, 의미 없이 100살 200살 살 필요도 없이 70세 정도 되면 내가 이제 10년 정도 남았으니까 가지 전에 이런 일 이런 일은 꼭 하고 싶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잖아요. 그런 뜻에서.. 세상이 망하는 것이 가까워졌으니까 준비하자는 의미도 있지만 꼭 그렇지 않아도 필요하다고 보구요. 아까 토목국가 얘기했는데, 개발하고 발전하고 성장하기 위해서 토목국가 논리를 펴는 것이 현재의 단계라면, 토목국가라는 용어를 써서 토목국가를 넘어가자는 얘기인데요. 토목국가 좋다 이거에요. 이것을 사회생태적으로 건강한 모습으로 돌리기 위한 토목을 해야 된다는 거지요. 예를 들자면, 아파트를 허물어야 된다는 것이지요. 시멘트 건물을 허물고, 흙집이나 돌집이나 주변의 소재로부터 쉽게 구할 수 있는. 그런 의미의 질적으로 다른 토목. 그것을 통해서 일자리가 정말 많이 나와요. 토목공사를 통한 일자리 창출인데. 질적으로 다른. 그래서 우리가 전세계가 사회생태적인 혁신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지금 우리가 이루어놓은 에너지로부터 자연소재, 이런 집이나 옷이나 온갖 살림살이 경제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건강한 것으로 되돌리는 노력. 그것이야말로 지금 절실히 필요한 살림살이 경제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황 : 토목이니, 성장이니 하는 모든 것들이 살림살이를 살리는, 보강하는 이런 쪽으로 맞춰줘야 하지만 정반대로 가고 있으니까.

황 : 얼마 전에 난 태안 앞바다 원유유출사건. 그것을 좀 저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노무현 정권이 이명박 대통령 될 사람이 정책을 펴나가기 쉽게 잘 기초를 만들어 줬다는 말을 했는데. 이 정권교체기에 나타난 오일사건이 상징적으로 볼거리를 주는 것 같아. 왜 오일이 그 앞에서 엎어졌냐는 이거지. 오일로 대변되는 석유산업. 극단적으로 밀어붙인게 신자유주의 정책 아녀? 계속 밀어붙이면 터진다 이거지. 그것을 태안 앞바다에서 딱 보여준거지. 하필 동해안도 아니고 새만금 바로 위에서. 더 극대화해서 보여줄려고. 해안생태계가 어떻게 파괴되는지를. 그 짐은 이제 이명박씨가 진다는 것이지요. 이명박씨는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를 앞으로 우리가 봐할 사항이지만. 이 사람도 말끝마다 환경을 얘기해요. 틀림없이 경부운하 건설하면서 플랭카드가 이미 다 나와있어요. 환경친화적인 운하를 건설하겠습니다. 생태계를 살리는 운하를 건설하겠습니다. 고속도로에 그렇게 걸려있거든요. 환경친화적인 유조선을 만들겠습니다. 환경적인 석유산업을 건설하겠습니다. 전부 정치적인 레토링만 있고, 내용은 하나도 없고, 이런식으로 가게 된다는 말이지요. 석유츄출사건이 내가 보기에는 상징적다고 생각해요, 경제정책의 연속선상에서. 축복이 아니고 영어로 말하면 오맥이라는 거지. 신자유주의 정책의 오맨으로서 이 석유츄출사건을 봐야한다는 말이지요.

강 : 저도 태안사건을 보면서, 오늘 4명인가 구속되고 그랬지요. 삼성중공업이 주 회사고, 삼성물산 소속의 삼성중공업기계인가 그렇고, 보험은 삼성화재에 들어있고, 언론에 돈을 뿌렸는지 많이 알려지지 않았더라고요. 그 네 명이 직접적인 책임이 있어서 구속하고 했지만, 단순히 부주의해서 재수없이 발생한 사건이라고 바라보기 보다는 우리가 오일문명에 기초해서 우리의 소비생활과 산업생산과, 농업, 1, 2, 3차산업, 그리고 우리의 전면적인 소비생활이라는 것이 오일문명에 기초해있고, 이렇게 대량으로 생산해서 대량으로 소비하는 시스템 자체가 말씀대로 상징적인 의미로 새만금에서 가까운 태안에서 터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언젠가는 터질 수밖에 없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좀 더 사고를 조심하고, 예방하고, 초동대처를 잘하고, 이런 사태로 해결책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근본적으로 우리의 생활문명과 생활세계와 경제세계를 좀 더 근본적으로 되돌아보고, 대안적인 어떤 삶의 방식을 생각하고 토론하는 계기. 그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황 : 그런 점에서 지식인들이 활발하고 글도 쓰고, 방송에 나가서 대담도 하고, 직접적으로 작업했느니 그런 것이 아니라..

김 : 좀 더 구체적으로 생태적 경제라고 했을 때, 개념적으로 설명은 많이 하셨는데, 그것이 나타는 구체적으로 와닿는... 경제라는 영역과 생태라는 영역이 많이 다른데, 완전히 별개인 것처럼 ,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가능한가? 아까도 토목을 해체하는 방안을 얘기할 때도.. 지금 당장 가능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우리 후세대가 그 짐을 다 떠안을..

강 : 담장허물기가 시행되고 있잖아요.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잖아요.

김 : 그것을 좀 더 생태와 경제라는.. 접목대상으로... 서로가 피부에 와닿는.. 생태와 경제라는 것이 접목해서 실제로 우리의 삶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가는구나 하는 것을 피부에 와닿게 하는 것이 가능하지..?

강 : 가능하다고 보고요. 우선 경제라는 말에, 아까 황선생님과 초두에 이야기했지만, 오이코스 노모스트에서 왔다면, 살림살이의 원칙 혹은 살림살이의 관리라는 어원을 갖고 있다면, 경제 자체가 살림의 과정이기 때문에, 굳이 생태적 혹은 살림살이 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원래 의미가 온전하게 산다면, 그것을 모두 담아내고 있다... 자본주의 돈벌이 경제가 원래적인 의미로부터 이탈되어 나와서, 그것이 자체적으로 독립하고, 인간의 내면의 건강한 욕구로부터 분리되서, 오히려 인간의 욕구를 조장하고, 부풀리고, 끊임없이 확장시켜나가는 과정에서 변질되어갔기 때문에, 이것을 좀 더 원래적인 의미로 돌리고자 하는 의미에서, 살림살이 또는 생태적 또는 생명 이런 수식어를 붙일 수 밖에서 없다. 안타깝지만..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생태적인 경제가 무엇이냐? 저는 흔히들 사람과 자연의 조화를 생태적이라고 이야기 하는데, 거기에 더해서 사람과 사람의 조화도 같이 들어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가장 대표적인 것이 유기농생산물을 생산하는 농민과 그것을 소비하는 소비자들이 직거래를 통해서 서로 생명살림을 해나가는 과정. 그것이 공동체적인 관계망의 복원에 가장 상징적인 예라고 생각해요. 유기농법이라는 것은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를 직접 보여주고, 또 그것을 직거래를 통해서 생산자와 소비자가 만나다는 것은 사람과 사람의 생태성, 공동체성을 복원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런 의미에서 직거래나 유기농산물의 거래라고 하는 독립된 자본으로 동떨어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관계망 속에서 다양하게 활성화 될 수 있을 때, 건강한 생태경제가 된다고 생각하고요. 그 다음에 집이나 옷이도 마찬가지요. 숨 쉬는 집, 숨쉬는 옷, 건강한 먹거리. 이것이 가장 기본빵 아니겠어요? 그리고 문화를 즐긴다라고 할 때도 그런 문화의 내용도 우리의 정신세계나 잃어버린 감성이나 생태적인 감수성을 예민하게 다듬어주기도 하고, 눈물도 한 번 흘려보고, 정말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쁨을 느껴보기도 하는 그런 문화를 만들고 향유하는 것. 저는 이런 것들 모두가 생태적인 경제라고 보는 것이죠.

황 : 요새 외국에서는 그린비지니스라는 것이 유행하고, 네츄럴 캐피탈리즘 이런 책들도 많이 읽히고 하는데, 지금 얘기하는 것들은 소규모의 옛날에는 비공식 부문으로 치부해왔던 도농공동체라던지, 작은 마을에서 주고 받던 것들을 확대해나가자고 하는 것인데, 외국에서 지금 나오는 산업주의를 어떻게 이것을 생태적 원리에 의해서 재구축하느냐? 어떻게보면 그것이 과연 가능한 개념인가? 산업화라는 것 자체가 생태주의를 파괴하고 들어선 것인데, 산업화라는 것을 어떻게 생태적 원리에 의해서 재구성할 수 있는가? 여기에 대해서 논란이 꾀 있어요. 예를 들면 포르켈이 말하는것. 산업화 대공장에서 생산하는 물품이 다음에 재활용될 것을 미리 예상하고 생산해야된다는 것이지. 이것을 법적으로 비전을 해야한다는 것이지. 전체 산업시스템이 순환될 수 있게, 그런데 설사 이렇게 만들어 놓는다고 할지라도, 결코 순환되지 않는 자원들이 혹은 생산물들이 너무나 많다는 거지, 현대 문명 자체가 자연상태에서 절대 용해되지않고, 순화되지 않는 물질을 너무 많이 쓰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정말 생태경제로 나가기 위해서는 그런 물질들의 생산을 금지시켜야 된다는 것이지. 그것을 금지 시켰을 때 현대사회가 유지가 되냐는 말이지. 다른 종류의 사회인거지. 그리고 금지시킨다면 현재 우리가 누리는 여러 가지 문명의 이기와 편리한 시스템이 작동이 안될 수 있다는 것이지.

김 : 근데 실제로 기후변화협약이라든지, 이후에 교토의정서체제로 가잖아요. 향후 몇 년 내에 CO2 의무감축대상국이 되고, 그런 체제가 되면, 이런 것들이 이행이 되지 않으면 수출이 되지 않는것잖아요. 우리나라의 물건들이 FTA의 체제에도 그런 것들을 전제로 깔고 있는데, 실제로 오염물질이 아예 접근 조차도 안되게 하는.. 그런 것들이 전제가 되는 산업이.. CO2거래, 감축이 안된 나라들은 사야되는 거잖아요. 선진국은 이미 감축했으니까 그만큼 안된 나라에 권리를 팔고..

강 : 새로운 국제 논리로 남용되는 그런 위험성이 있고, 그것이 부분적인 땜방이지 근본적인 처방은 아니잖아요. 그러니 지연의 효과는 있을지 모르지만, 아까 말한 말씀하신.. 지금 망해가고 있는데, 소용이 있느냐 이런 차원이거든요. 그래서 사실 그런 논의도 분명히 이런 관점에서 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데, 그럴 때 핵심은 이런 것 같애요. 과연 지금 현대, 근대인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방식, 누리고 있는 것. 크게 보면 기득권이죠. 문명적인 기득권을 포기할 수 있느냐? 포기에 대한 두려움. 그 부분을 직면해서 우리가 토론하고 넘어갈 수 있을 때, 새로운 대안이 가능해요. 진정으로 지구생명계 전체가 망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둔감하고 무감하면서도, 눈앞에 보이고 있는 문명적인 기득권이 상실될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나 강한, 이 이중의 모순. 이것을 넘어가야지만 다른 이야기가 가능한 거에요. 그 속에 갇혀서는, 예를 들어 지금 위기가 오고 있다는 것을 모험 기술로 넘어갈 수 있고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일부의 과장이야 이런 식으로 말하는 부분들은 기존의 것을 계속 가겠다는 거 아니에요? 또 지금 두려움에 떨고, 지금 놓치기를 포기하는 것은 강박증과 집착증과 중독증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크게 보면 그 두 가지가 같은 동전의 양면을 보여주는 것인데, 진정한 위기는 못 느끼고, 눈앞에 보이는 혜택은 놓지 못하는. 이 현상이 어찌보면 우리가 토론할 수 있는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것이 부분이 아닐까 싶어요. 그 부분을 관통해서 ‘도대체 이것이 뭔데?’라고 헤쳐서 그렇게 살아보기도 하고, 그러면서 새로운 차원을 열어낼 수 있다면, 그 때 비로소 새로운 희망의 싹이 나올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맨날 그 수준에서 맴돌고 만다 그렇게 생각해요.

황 : 결국 어떻게 보면, 개인의 각성, 깨달음. 그것을 중심에 둔 얘기로 볼 수 있는데, 근데 이 개인의 각성에 개인적 취향이나 개인이 공부하고 깨닫는게 아니고, 내가 노력을 안해도 사회전체의 사회적 압력이라고... 그 원인이 누가 지적을 했거나 내가 공부해서 깨달은게 아니고, 사회적 생태적 압력으로 인해서 나도 모르게 그렇게 사고를 하는거에요. 그런데 이 생태적 압력, 사회적 압력이라는 것이 인간들이 만들어 나가는 측면이 있고, 자연이 스스로, 자연이 자체가 살아 있는 유기체니까, 스스로 만들어서 그런 압력을 넣기도 하기 때문에...

강 : 지구온난화가 대표적인 것이죠.

황 : 지금 갑작스레 들이닥친 집중호우라든지, 제주도에 천 년에 한 번 날까말까한 호우를 맞았는데, 여기서 사람들이 ‘천 년에 한 번 올까말까한 것이니까 앞으로 천 년 뒤에 다시 오겠지’ 이게 아니거든. 지금 상황이

강 : 근데 그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렇다’라고 ‘천년에 한 번 오겠지’, ‘재수 없어서 이번에 터졌지’, ‘그렇게 심각한 거 아닐거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거지요. 무감성, 둔감성

황 : 이것을 정점으로 놓고 볼 때 이런 일이 사방에서 터지기 때문에, 이것이 하나의 생태적 압력으로 개인에게 느껴진다는 것이지, 관행적으로 생각을 하더라도, 그래서 결국은 개인들의 깨달음이 옛날과 비교해서 상당히 전면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이지. 비과학적인 얘기인지 몰라도 이게 일어나면은... 빨리 깨중 일어난다는 것은 그 만큼 위험하다는 거지. 왜 사람이 죽기 직전에 ‘아 내가 잘못했구나’하고 깨우치는 거와 비슷한 현상이 벌어지지 않는가 하는 느낌이 들어요. 사회적 생태적 압력이 뒤로 갈수록 거세지니까. 그렇지 않고, 서구 일각에서 일고 있는, 이 산업자본주의 시스템을 좀 바꿔서 면피해 보려고 하는 것들은 결국은 기득권을 놓지 않겠다는 몸부림으로 봐야 할거에요.

강 : 지연의 효과와 더불어 새로운 제국 지배 효과.

황 : CO2감축한다고 하더라도, 전부 공장은 현지화 해서 제3세계는 법률이 허술하잖아.

김 : 지금 현재 그렇게 하고 있잖아요. 미국이나 유럽이나 모두 중국으로 집중해 있잖아요. 중국은 의무감축대상국가에서 유예된 상태라서.. 결국은 그런 이해관계를...

황 : 그런 것이 국제적으로 통용 될수록 제3세계는 죽어나가는거지. 이번에 인도를 다녀왔는데, 내가 거기서 한 마디로 뭐라했냐면, 내연기관은 인류의 재앙이라고. 내연기관 어떤놈이 발명했는지, 물론 나도 타고 다니지만, 제3세계 도시 한 복판에 있으면 숨을 못 쉰다. 인류의 재앙도 이런 재앙이 없다. 선진국이 주도가 되어서 기후협약을 하든, 경제협약을 하든지 뭐든 하면, 제3세계는 죽어난다는 거지. 우리는 그것은 그것대로 거부할 명분은 없으니 철저하게 우리는 풀뿌리 차원에서 이런 운동을 적극적으로 해나가는 것 외에는.. 이 일을 제껴두고,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떠들 필요가 없다는 거지. 물론 외국에서 공부해서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하게 내버려두고, 그렇게 박사학위 딴 사람들이 많잖아. 그런 사람들은 그걸 해야지 돈벌이가 되니까. 내가 외국에 있을 때, 한국에서 환경운동 하다가 유학 온 친구들이 이 친구들이 대부분 이런 식의 전문가의 길로 가더라고. 환경운동하던 사람들도 저렇게 되나? 저거 좀 문제가 있다. 환경운동해서 키워 놓았더니, 외국에서 학위따서 그런 곳에 쳐박혀 있으니까. 인력이 필요한데 현장에서 길러진 사람들 까지 다 기어들어가서... 이건 아니라고 보거든. 점점 우리도 서구사회처럼 전문화가 필요하기도 하지만 너무 닮아가는 것이 아닌가? 너무 기회주의적인 접근으로 환경문제도...

김 : 어쨌든 우리가 주류로 다 가고 있는 흐름은 사실 너무나도 ??? 깨닫게 되는 시점이 올 수도 있겠지만, 큰 흐름 자체는 여전히 큰 힘을 갖고, 밀고나갈 것이 보이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갈대로 가라. 그렇게 얘기하면 너무 큰 흐름을 지켜만 보는 것은..

황 : 지켜만 보는 것은 아니지. 아까 소통, 연대 이런 얘기가 다 그런 국가의 책임있는 사람들에 대해 견제하고, 이쪽 방향으로 견인해 내는 노력을 함께 해야지

강 : 정항과 문제제기를 하면서도 거기에 에너지를 다 소진할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대안을 꾸준히 실현하고 개발하고 창조해야지요.

황 : 아까 내가 환경운동하다가 연구소 들어간 사람들 이야기를 잠깐 했지만, 사실 이런 사람들이 중간에서 그런 역할들을 잘 해야되. 왜냐면 이 사람들은 권력 내부에서 본 사람들이 때문에 직격탄을 날릴 수 있는 위치에 있거든.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욕하면, ‘니들이 여기 들어와봐라’ 하거든. 그러나 권력 내부에서 그런 숫자를 만들어주고 하는 사람들은 그런 얘기를 할 수 있단 말이에요. 근데 거기 들어가면 얘기를 못해요. 월급을 받기 때문에. 그래도 이런 사람들을 끌어안고, 권력을 자꾸 이쪽으로 견인해내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 쉬운 일은 아닌데, 일단 권력쪽으로 들어가면 대화가 잘 안돼.

김 : 정치적 결정과정에서도 발언권이 없고, 그런 것들을 담아내는 열려있는 정치구조도 마련되어져 있지 않은 것이지요.

황 : 저 사람들은 답답한게 있더라고. 자기들은 이런 쪽에 몸을 담아서 생각은 있는데, 이것을 권력자한테 솔직하게 전하지를 못하는 것이지. 그리고 전해도 이것이 내키지가 않은 것이지. 그 사람들이 그 자리에 있으면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월급받아먹고 계속 속에 불만 만들어 놓는거지

김 : 이번 토목성장, 돈벌이 경제.. 이런 것들의 흐름들 속에서 생태와 경제를 접목해서 대안이 될 수 있다고 하는 매력적인 제안. 그 사람들도 받아들일 수 있는 법제도는 없겠냐는 말이지요.

강 : 저는 오히려 지난 3년 동안 마을의 고층 아파트 반대를 하면서 느낀 것이, 결국은 권력의 결정과정에 관한 문제인데, 어느 행정 단위든 기본적으로 이런 중독사회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개발과 돈과 성장이 같이 간다. 그 마인드로 추진하기 때문에 중간에 좀 더 눈이 뜨인 학자나 전문가가 제안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한편으로 씨알도 안먹히는, 따로 노는.. 더 심하게는 구색맞추기에 아주 도움을 주는 것이 되어버린다. 우리는 이런 이런 훌륭한 사람들의 자문을 듣고 다 걸러낸 것이다라는 말에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것이 되버린다. 그 역할이 더 나쁘다.

황 ; 노무현 정권 들어서 제일 변화된 것이 자문위원단을 엄청나게 만든 것

김 : 민주, 노동운동했던 사람들을 모두,,

강 : 기본 패러다임이 개발과 성장이나 중독 이런 패러다임이 아니라, 생명살림이고, 생태고, 더불어 단위이고, 무소유 등 그런 차원에서 건강한 살림살이 경제를 하겠다는 차원이라면 이 분들도 힘들 싣고, 뭔가 제대로 된 역할을 할거란 거에요. 오히려 그런 속에서 개발 논리를 배척할 수도 있는데, 기본 가락이 개발과 성장으로 가다보니까 알리바이 역할밖에 할 수 없는 것이 눈앞에 보이더라구요. 자리를 차고 나오는 것이 답이에요. 그럴 때는 내가 공범역할을 안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이 유일하게 사회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먹고사는 부분이 달려있기 때문에 그런데, 진정한 의미의 생태경제는 아니죠. 자본종속적이고 권력의존적이고.. 저도 크게 보면 대학자본에 종속되어 있지만 내가 할 말은 다 한다. 아무래도 대학은 자율적인 분위기가 있어서.. 민주화의 효과

황 : 노무현 정권 들어서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것이 만들어져서 진보세력이라든지 환경학자나 많이 들어갔거든 실질적으로 한 일은 거의 없다는 말이에요. 철저하게 구색맞추기밖에 못한 거지. 작년인가 얼마 전에 지구의 날에 쓰레기 앞에서 지속가능한 개발을 하겠다는 선언문을 낭독했는데, 그 선언문을 그 위원 중에 아는 친구가 작성했는데, 그 친구가 상당히 오랫동안 고심해서 작성했어, 마지막에 나한테 검토해달라고 해서 쭉 읽어봤는데, 서구에서 지속가능한 발전에 대한 내용들을 좋은 것만 취합해서 만든 거여. 우리 현실에서 자생적으로 만들어 낸것 아니라. 이것을 어떻게 썼냐? 노무현이 그냥 티비 앞에서 읽고 끝이야. 이것이 어떤 산업이나 경제 전반에 걸쳐서 이렇게 될 수가 없었어. 위원회에서 반영할 수 없는 구조니까. 결국 그런 위원회 활동들이 특히 예민한 부분 일수록 구색맞추기가 될 수밖에 없다. 나도 개인적으로 제작년인가 영어마을 종합개발사업 평가위원 자격으로 1년 정도 활동을 했는데, 거기 전부 대학교수야. 박사 아닌 사람은 나밖에 없어. 그런데 활동을 하다보니, 나 혼자 또라이 같은 소리만 하는 거여. 같이 다니기 불편하고 해서 1년 하다가 그만 두었는데, 결국은 경제개발 박정희 이래로 해오던 방식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점점 더 세련되게 구색맞추기 식으로 계속 하고 있는 것이지, 지식인들이.

강 : 나오셨어요?

황 : 나왔지. 농림부에서도 도움이 안되지. 계속 개발하지 말자. 왜 관광을 하려고 하냐 이런 소리

강 : 전남 장흥인가 거기는 ‘손대지 말자’

황 : 슬로우 퀵퀵 한 곳이 세 곡이 있어

강 : 그래도 우리 군은 향후 10년만 개발 안하면 경쟁력이 있어요. 밑에 참모들이 그래도 괜찮은 사람들이. 진안군인가 그곳에서는 구자인 박사가 많은 역할을 많이 했다고.. 그나마 건강한 활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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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의 민영화 바람

누가 SBS 아니랄까봐

우리회사 민영화 1순위라고 크게보도한다.

우선 지역독점체제인 중소 도시가스사들을 물리치고 대기업세력을 거기에 박는다는 얘기인데..

썩을 ~~놈들..

아예 우리회사를먹기에는 너무크니까 아예 과실만을 가지겠다는 얘기인듯한데..

오늘 임사 동기들하고 얘기한결론은 우리30대들으 이상이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민영화 ,개혁 해봐야

나이많은신분들만 짤린다는말이다.

그럼 우리는 평생 안늙는 약먹어야겠네..?

그런약이 근10년내로 개발될지는 미지수다...

고로 나도 10년후에 짤린다는말이다.

 이런 변화의움직임 있으면 살아남기위해 노력을 해야지 겁먹지말라고

팀장이상의 간부들은 그러지만

쩝,,주인이 시키는거 잘해서 객사하지말라는말같은데..

우리가 개냐? ..

 

오늘들은얘기인데..

 

GS 칼텍스 노조파업시 참가자들이  대부분구속및 나머지는

회사에서 무급으로 정직처리받으며 각종청소,아침인사,정신교육등등을 받는다고한다.

후일에 정식채용을 미끼로

 아침회사정문에 일렬로서서 들어오는 간부들을보고 "안녕하십니까 !" 오늘도 근면하게!!!"

를외치며 회사내의 각청소 잡일등등 도맡으며 쉬는날에도 무슨훈련등을받는다고한다.

 

이무슨 아오지탄광같은 얘기인지..

 

이런,,

이게 21세기 한국의 모습이다.

    조만간 노조에 합류하고 싶당..

근데 거기가서 뭘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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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너스 상여금 나왔다..

흠  좀 나왔다..

통장에 상여금 인센티브라는명목으로  다소간 입금되었다.

 

현장직들은 이번에도 역시나 별로 안나왔다,.

대체로 임금 갈라먹는 수준이

본사가 제일많고 그다음 각지사에 경리쪽 부서가 많고

다음이 그이외에 기술사무팀들 그리고 마지막이 현장직들이다.

이러니 다들 투덜거림이존재한다.

현장직은 특히나 명절주말없이일하는데 성과급을차이두면 일할맛이 나겠냐고 그러고

사무실에선 스트레스없는 현장직들 돈 많이 줄필요없다고 말한다.

 

결국 돈줄을 틀어쥔 본사만 가장 좋은듯하다..

이놈의성과제도라는것이 아마도 경영기법 가운데 하나인듯한데

결국 노동통제를위한 서로간의갈등을위한 아주 싹쑤노란 제도다.

 

 

대통령이

맹바기가 되었다.

앞으로 공공기관들  족친다는데

 어떻게될라나..

아마도  고매하신 울회사의 관료들께서는 복지부동 죽여주십쇼하며 이명박한테

설설 길것이다.

 

그런 꼴보기 싫어서  사무실에 더 가기싫다.

정확히는

 명바기적으로 사고하고 생각하게되는 그런 노동문화, 통제문화에

목매는 사무실분위기가 싫다.

 

가봐야 별별인간들 상전들한테 아부도해야되고 또 가끔씩 암투도 벌여야하고,,

까마귀노는곳에 백로야 가지마라 하며 나만 깨끗이 조용히살며 만고땡이냐?

라는 질문에 답하기는 어렵지만,...

 

나의 에너지를 그런곳에 자꾸만 소비하고싶지는 않다.

 

앞으로 한반도운하, 개발컨셉 등등..

제밌어질것이다.

김대중이나 노무현정부때는 자유쥬의 개혁주의자들이 그런개발주의

환경파괴에대해 도리어 침묵하는 형상이었는데

맹바기가 되니까

이 자유주의 우파들이 환경문제를 거론하며 뱅바기를 공격해댄다.

아마도 진실은 환경문제가 걱정인게 아니라(그렇다면 새만금을 내비두지않았을것이다.)

맹바기에대한 불신이 심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쟀든

앞으로 5년은 시민운동, 노동운동등이 맹바기에 대해서  환경문제로 대응하며 ,

더불어

경제개발이 아닌 대안사회시스템에대한  고민이 더많아져야겠다.

 

예전에 나  병원에서 퇴원할때 병원마당에 축조된 성모상을 보고 맹세한게 있다.

 이제는 인간뿐아니라 비인간도 ,세상의 유정물, 무정물 모두를 아우르는  사람이되겠다고...

 

근데 아직도 실천이 안된다.

지금은 대안경제나 대안체제에대한 공부를조금씩 하려 하지만

시간은 한정적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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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회사가 미쳐간다.

대기업 GS,SK 에서 우리회사 배관과 저정탱크를 거의무상으로 20년동안사용하기로 했단다.

세상에나 수조원아니 십조원짜리 공공재산을 대기업자본이 코도안풀고 사용한다.

 

우선은 개인적으로 내가속한 회사라는조직이 그렇게 국회의원들의 농간과 대자본의

로비에 놀아나는것이 참을수 없지만  조금 냉정하게말해서

그냥 가스노조에서 앵무새처럼 되뇌이는 에너지 안보라던지,공공부문 사유화라는 틀로 말하기에는

나의 지식이 적었다.

 

역시나 노조사이트에는 에너지안보니뭐니하며 별다른 선언문수준의 글만올라와있지만..

 

결국 내가다니는 회사라는 곳도 우석훈박사가 말한 95%의 안좋은직장과 5%의 좋은직장중에서

후자인 5%에들어가지만  자본의힘에의해

언제든지 길거리에 나앉을수있다는 현실감이 참으로 무력하게 밀려왔다,

회사람들은 그냥 주식이니뭐니 하며 떠들지만

갑작스레 본조에 들어가 일하겠다는욕망이 생겼다가

퇴근하면서 사라졌다.

 이런 답답한 상황에 주식이니 대선이니 하며 담담하게 응하는

조합원들의 귀족적작태에 짜증이났다고할까?

다시 좀냉정해져서 공기업라는 자본은 과연 민중적인가.?공기업이 민영화가되면

얼마나 반민중적으로 대중을 착취할것인가?

볼리비아의수도사업,멕시코,영국의철도 ,미국의 전력회사처럼

그렇게 사람들한테 거대한 경제적 부담을준다면 그것은 도리어

후대에 사회변혁을하는데 중대한 "모순"중하나가되지않을까?

 

경제학적으로 아직 잘모르겠다..

 

 내가속한 "공공기간자본"이란것의 정치경제학적 정의는무엇인지..

잘모르겠다.

내가 민노총 공공연맹 활동을 할것도아니고,,

 

내몸도 그렇고 난 그저 시골에가서  땅이나파며 대체에너지쪽으로 공부해복 또 먹고살고싶다,

 

그런데 지금의 나의 존재론적 정의는 "공공연맹"인지라

아무래도 한번정도는 회사의 그쪽사람들하고 술자리라도 가끔해야하지않을까싶다..

뭐 내같은사람이 뭔도움이 되겠냐만,,

작금의 대자본의모습을보니 그냥 화가 나기도하고,,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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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감상문 펌

 뒤늦은 'Rome' 감상
오락거리 | 2007-10-18 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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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지지난주에 끝나버린 드라마 'Rome'의 감상을 이제 올리는 것이 좀 그렇긴 하다. 원래는 끝나고 바로 올릴 계획이었는데, 쓴 글이 날아가버렸다. --^ 한동안 제껴두고 있던 주제였는데, 아무래도 쓰긴 써야 할 것 같다.

'시오노 나나미'라는 괴(怪) 저술가의 괴작(怪作)-<<로마인 이야기>>때문인지 요 근래에 우리나라에서 부쩍 '로마'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이때 HBO와 BBC의 합작으로 이뤄진 드라마 'Rome'도 이러한 유행 덕을 조금 본 것 같다. (블로그 등을 보면 시오노의 책과 이 드라마를 같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사실 드라마 'Rome'은 시오노 나나미와 전혀 다른 관점에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제국을 이룩하려다 실패한 일본 귀족의 퇴행성과 과거 제국이었던 그리고 지금 제국인 나라의 시민들이 갖고 있는 반성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시오노에게 있어 로마제국과 카이사르는 '위대함' 그 자체이다. 시오노의 로마는 외국인에게 개방적이며, 개인을 위한 건축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건축을 하는 나라이며, 가장 발달된 도로망과 사회기반시설을 갖추었고, 현명하고 강인한 지배층이 다스리는 강력한 제국이었다. (개인적으로는 괴상한 답변이라고 생각하지만)그녀가 생각하기에 '팍스 로마나'는 '팍스 아메리카나' 보다 우월한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제국이다. 과도한 추측이라고 할 지 모르겠으나, 학습원을 나온 일본 귀족의 퇴행적인 귀족놀음, 제국향수라고 보인다. 일본은 한때 만주국을 세우면서 '오족협화'(五族協和)를 내세웠다. 그러나 그들의 제국은 개방적이지도 않았고 강력하지도 않았고 오래 지속되지도 않았다. 마지막 한방울의 국력까지도 쥐어 짜냈지만, 상대편은 한쪽으로는 독일과 싸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가볍게 그들을 굴복시켰다. 마지막 남은 전쟁의지까지도 두방의 원자폭탄으로 날려버렸다. 따라서 이 책은 전형적인 일본인들의 서구취향과 퇴행적인 흉내내기 정도로 보아야 옳다. 아무리 시오노의 책이 사료에 대한 이해와 흥미로운 문체라는 장점이 있다고 해도 그 세계관은 너무나 천박하다.

그러나 HBO와 BBC의 관점은 과거의 제국, 현재의 제국이 역사라는 거울을 통해 본 경고와 반성이다. 제국이 되려다 좌절한 일본의 우익귀족은 어떨지 몰라도 이미 탄탄한 제국을 운영했거나 운영하는 나라의 관점은 그 너머를 보고 있다. 보레누스와 풀로의 배경을 살펴보자. 보레누스는 금욕적이며 엄격한 카토파이며 조상이 '자마전투'에 참가했음을 긍지로 아는 전형적인 로마 전사이다. 풀로는 어릴때부터 온갖 험한 일을 겪다 군대에 입대한 거칠고 천박한 (로마의 하층부를 지탱하던) 하층민의 전형이다.


(여자복은 지지리도 없는 두 사람. ㅠㅠ)

로마의 두계층을 대변하는 전형성을 갖고 있는 인물들이지만, 공통점은 별로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두사람은 티격태격하다가 결국은 형제 이상의 진한 우정을 갖는다. 왜 일까?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 두 남자 다 지지리도 여자복이 없는 인간들이서가 아닐까? 이 두사람의 우정은 이들의 불행과 어려움 덕에 강해진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 두사람의 불행은 어디에서 온 것 일까?

보레누스는 귀족은 아니지만 분명 '자마전투'에 참가했던 조상을 자랑스러워 했듯이 중류층 가정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카이사르의 불장난으로 보레누스는 오랜기간 갈리아에 나가 있었고 꽃다운 어린 시절 결혼했던 그의 아내는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운다. 전쟁에 돌아와서도 보레누스의 경제적 상황은 그닥 좋지 않다. 오랜기간 가장 노릇을 할 수 없었고, 기껏 가져 온 노예들도 전쟁으로 인한 노예의 과잉공급에 따른 폭락, 전염병에 의한 죽음으로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것은 개인적 불행이 아니라 구조적 불행이며, 여기서 우리는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과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 자영농의 몰락과 로마 정치의 혼돈상을 떠올려야 한다.

그렇다면 풀로는? 풀로의 가정 배경은 알 수 없지만, 몇몇 대사를 통해 그의 어린시절이 몹시 험악했음은 짐작할 수 있다. 전쟁을 통한 약탈, 착취, 노예로 이뤄지는 고대 로마사회에서 풀로는 그 기반을 이루는 거친 하층민 출신이다. 그는 보레누스의 비웃음대로 피정복민 여자를 강간하거나 화대를 한푼이라도 더 달라고 아우성대는 창녀만을 상대하던 거칠고 폭력적인 말썽꾼이었다. (그런데 이 금욕적인 보레누스가 말썽꾼 풀로를 받아주고, 다시 풀로가 흔들리는 보레누스를 받쳐주는 모습은 이 드라마의 중요한 재미이다.)

보레누스는 경제적으로 몰락해서 평소 경멸했던 도축업자일을 풀로와 해야 했고, 나중에는 로마 공화정에 대한 평소의 신념을 꺽고 카이사르의 독재행각에 부역했다. 풀로는 아예 자객 역할까지 했고.(사실 이 부분에서 두 사람을 꼭 비난할 수만은 없다. 어차피 대안이 없는 이상 영웅들의 장난질에 평범한 서민의 선택은 많지 않다.)

시오노가 그렇게 찬양했던 카이사르는 어떠한가? 'Rome'의 카이사르는 음험하고 탐욕스런 정치가이며, 독재자이다. 브루투스는 고귀한 공화주의자라기 보다 소심하고 나약한 청년에 가깝고, 로마의 안정을 가져왔다는 제1시민 옥타비아누스는 머리 좋은 냉혈한이며, 키케로는 입만 살아있는 얍삽한 인간, 서구 보수주의자들의 우상 카토는 기개는 있으나 완고하고 거만한 귀족주의자일 뿐이다. 하다못해 정숙한 현모양처였다는 옥타비아 조차도 여기서는 어머니와 동생의 권력의지에 희생된 희생양 내지는 타락한 여성일 뿐이다.

이미 제국이었던 그리고 현재 제국인 영국인과 미국인들이 바라보는 로마는 공화주의의 탈을 썼지만 폭력적이고 착취적인 제국의 지배구조, 탐욕스런 귀족, 권력의지에 모든 것을 희생시키는 냉혹한 지배자, 가난한 민중, 폭력적이고 잔뜩 뒤뜰린 거대한 모순이었던 셈이다. 이러한 관점은 현재 민주주의를 운영하며 세계 곳곳으로 군사력을 투여했던 혹은 투여하고 있는 자신들의 조국에 대한 불안한 교훈찾기이다.

예전에 Q채널에서 BBC가 제작한 '글래디에이터-잔혹한 진실'을 보았는데, 과거의 제국 국민들이었던 영국인들은 정작 같은 제국이었던 로마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로마인들은 호전적이었던 국민이었고 그 호전성을 유지하기 위해 검투경기는 로마인들의 타락을 막아주는 스포츠였다. 로마 남성에게 동정심은 타락의 증거였고, 그것은 노파에게나 어울리는 경멸해야 할 감정이었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전파로 부분적으로 검투경기에 대한 금지여론이 나오지만 정작 검투경기를 완전히 금지시킨 것은 로마인들이 야만족이라고 불렀던 이민족이었다. 로마인들이 광적인 유혈극을 벌이는 동안 로마의 변방에서는 온갖 희귀한 맹수들이 사냥되어서 나중에 몇몇 맹수들은 멸종에까지 이르렀다고 전한다.

유럽의 귀족을 동경하고 잃어버린 제국에 대한 꿈을 꾸고 있는 일본의 귀족이 제국을 운영했거나 운영하고 있는 제국시민의 제국비판론에까지 사유를 미칠 수 없음은 당연하다. 그런데 한가지 답답한 것은 그래도 일본은 학문적 기반이 탄탄한 사회이기 때문에 제도권에서는 확실히 선을 긋고 있다. (시오노의 신동아 인터뷰를 보면 일본학계에서 그녀를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어디까지나 퇴행적인 일본 귀족의 개인적인 백일몽일 뿐이지, 이것이 일본 학계나 전반적인 사회의 분위기는 아닌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축적된 학문적 기반이 약해서인지 학계의 부정적이고 우려섞인 시각이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다. 한때는 유명한 사회과학 출판사였던 한길사에서 이런 퇴행적인 우익 서적을 돈이 좀 벌린다는 이유로 독후감 대회까지 열어 가면서 홍보하는 것은 변절과 타락이라는 단어 외에는 달리 떠오르지 않는다. (<<로마인 이야기>>의 중딩, 고딩 독후감을 보고 있자니 그 유치한 감탄과 찬사에 절로 안구에 쓰나미가 몰려 오곤 했다.)

우석훈님의 블로그를 보면 자주 우리사회가 파시즘과 전쟁으로 향하고 있다는 불길한 예언을 접할 수 있다. 요즘 사극에서 없는 제국을 만들거나 일본 귀족의 퇴행적인 제국 취향이 인기를 얻는 것을 보면 확실히 그런 징후가 없다고는 못할 것 같다. 그런데 제국의 안마당 동아시아에서 제국의 2급 동맹국 주제에 무슨 수로 제국을 꿈꾸시는지 그 야무진 속을 알 수가 없다. 정작 그 제국의 심장부에서는 "그 잘난 제국이라는 로마가 사실은 이렇게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난장판이었다. 우리는 저런 꼴 안되게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를 하는 판국에. 그런데 정작 이런 중대한 차이를 못 느끼고 책으로 읽은 로마를 영상으로 느끼고 싶다는 순진한 생각으로 고민없이 이 드라마를 본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잘난 영웅들의 권력 놀음에 힘없는 서민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서로간의 연대일 것이다. 대책없이 카이사르,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에 이끌려가던 보레누스와 풀로가 옥타비아누스이 명령을 어기고 카이사리온을 구하기 위해 힘을 합치던 마지막 회를 보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특히 마지막 클레오파트라의 복수를 다짐하며 아직도 왕자로서의 정체성을 고집하는 카이사리온을 타이르며 걸어가는 풀로의 모습은 영웅과 혈통, 가문의 복수 같은 귀족적 가치에  대한 유쾌한 비웃음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드라마를 보는 내내 세밀한 당시 풍습과 장신구, 생활상에 대한 묘사는 감탄을 하면서 봤다. 전쟁씬을 많이 넣지 않았음에도 만만치 않은 제작비가 들었다는데 아마도 이러한 세밀한 소도구, 의상, 세트장 건설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비단 엄청난 제작비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며 상당한 정도의 역사학적 축적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단적으로 '벤허'같은 오래전의 영화와 비교해보라! 그 몇십년간의 로마사 연구성과의 차이를 볼 수 있다.) 한국의 사극들은 있지도 않은 제국놀음 보다 이런 부분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
  1. 지나가다 2007-10-18 08:13

    님께서 쓰신 글 잘 읽었습니다. 특히나 드라마 'rome'을 매우 재미있게 봤던터라 님의 글을 잘 보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엔 님께서 드라마에 너무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하시는것 같습니다. 반대로 '로마인 이야기'에 대해서는 너무 평가절하를 하시구요. 'rome'은 잘 만들어진 드라마이긴 하지만 드라마는 드라마일뿐 드라마에 나오는 역사적 인물의 설정은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한 설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로마인 이야기'처럼 로마제국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작가나 독자라고 해서 무조건 우익 제국주의자라고 하긴 어렵죠 더구나 님께서 그렇게 싫어하시는 시오노나나미도 정치적으로 보수우익적 발언을 했다는 것도 들은적도 없고 예전에 사상적으로는 좌파였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덧붙여 과거의 역사나 아니면 다른 문명, 문화 또는 나라를 볼때 어느정도 내재적 접근법(?)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조심스럽게 접근해야할 문제겠지만, 역사를 보는 관점을 현재의 기준으로 삼고 바라본다면 역사적인 사실은 객관적으로 보긴 어려울 수 있을니까요.
    그럼 건필하십시오...

    1. umberto blog 2007-10-18 18:51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데 있어서 원래 감상자나 평론가들이 창작자가 생각지 못한 부분이나 인식하지 못한 부분을 재해석해 내기도 합니다. 그리고 감상자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지기도 하지요. 다만 'rome'은 확실히 로마제국에 대해 비판적 시선을 갖고 있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들에 대해 그렇게 냉소적인 묘사를 할 이유가 없지요.

      시오노 나나미는 제국주의자 맞습니다. 지금 정규 학문과정을 통과한 로마학자들 중에 그렇게 무식하게 로마의 침략정책이나 사회정책에 대해 일방적 찬양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로마의 침략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해되고 노예로 팔려갔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싹 무시하고 로마가 피정복민에게 관대했다고만 적는다면 그 사람을 뭐라고 불러야 합니까?

      그리고 일본인들 그 시오노 세대의 경우는 60년대 대학분위기 땜에 별의 별 얼치기들도 좌파흉내를 내고 다녔습니다. 나중에 완전히 우익으로 변신합니다.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이나 '사원 시마' 같은 만화에도 잘 나옵니다. 그리고 시오노가 나온 고등학교와 대학이 어떤 학교들인지 아신다면 그 사람의 가정적 배경을 대충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2. 永革 2007-10-18 09:41

    한국에 번역된 책 중 로마인 이야기 11~15권 빼고는 다 읽어 보았는데.. 시오노 나나미는 우익 맞습니다. 사일런트 마이노리티였나, 에세이 중에서 자신이 전공투 세대였는데 당시 투쟁하는 또래 대학생들을 보며 인간의 선의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는 얘길 한 적이 있긴 합니다만 그걸로 좌파였다고 말하기는 힘들겠죠. 꼭 정치적인 발언을 구체적으로 한 적이 있어야 사상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건 아니죠. 제국주의..는 차마 그 정도로까지 저작에서 드러내지는 못합니다만. 저도 umberto님과 비슷한 관점에서 미완성 독후감(?) 써 둔 게 있기는 합니다. ^^;

    http://www.virtuepeak.net/blog/?p=6

    영어였나 이태리어였나 로마인 이야기를 여튼 서구로 역수출한다던데 어떤 결과를 얻을지 궁금하네요.

    그리고 드라마 로마의 경우도 몰랐는데 물질적인 요소의 고증은 충실하지만 거기서 묘사된 로마인의 성격이라든가 이런 면들은 현대인의 관점을 투입시킨 측면이 크더군요. 저도 예전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사를 읽고 알았습니다.

    http://www.lemonde.co.kr/news/articleView.html?idxno=280

    본문 전체는 유료로군요.. ;; 혹시 내용이 궁금하시면 제가 갖고 있는 과월호 내용을 타이핑쳐서.. 음, 저작권법에 걸리려나요 ;

    1. umberto blog 2007-10-18 18:58

      이태리는 꼴통들이 많아서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영어권에서 그렇게 많이 팔리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roem'이 물질적 고증은 충실하면서도 현대인의 관점을 투입했다는 지적도 (기사를 읽지는 못했지만)타당합니다.

      아티아가 딸 옥타비아와 어울리던 마약중독자 친구의 가문을 응징하자고 옥타비아누스를 꼬드기던 장면은 전형적인 현대 서구가정의 자녀마약 문제를 투영한 것이죠. '로마'에 묘사된 공화정의 위기 모습은 영미인들이 자신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역사적 경계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3. 아니-- blog 2007-10-18 10:04
    추천 0 | 리플 5

    음... 시오노 나나미나 그 글을읽고 쓴 독후감들은 천박하다고 하셨는데, 님의 독후감도 그다지 새로울게 없습니다. 카토가 미 보수주의자들의 우상인건 맞는데 둘다 republican이지만 카토 자체가 보수주의자였을까요?

    1. umberto blog 2007-10-18 19:02

      보수주의라는 표현이 서구 근대정치의 맥락에서 나왔으므로 카토 자체가 보수주의는 아니지만, 귀족적 공화정을 옹호한 카토의 모습은 확실히 부르주아와 귀족층의 입장을 대변한 보수주의자들에게 역사적 선배로 보이긴 했을 겁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제가 카토를 보수주의자라고 쓴 구절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2. 아니-- blog 2007-10-18 21:38

      음... 상당히 방어적이시군요. 님이 카토를 보수주의자라고 썼다고 안했는데요? 미보수주의자들의 카토를 자기 입맞에 해석하는거 같아 그렇게 쓴겁니다.

    3. umberto blog 2007-10-18 21:57

      역사적 카토에 대해서는 제가 뭐라고 할말이 없습니다. 제가 라틴어를 구사해서 사료를 술술 읽을 수준도 아니고, 로마사 전공자도 아니고 따라서 제가 카토를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상식선에서 원로원 중심의 전통적 로마 공화주의와 귀족의 이해관계를 지키려고 했던 인물 정도만의 지식을 갖고 있지요.

      보수주의라는 단어 자체가 프랑스 시민혁명이 아니면 나올 수가 없으므로 고대사의 인물에 대해 "보수주의자였을까요?"라고 묻는 것 자체가 잘못된 질문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뭐가 불만이신거죠? 정확하게 지적해주시죠.

    4. 아니-- blog 2007-10-18 23:20

      보수주의는 근대적 개념이지만 그런 개념을 과거에 적용 할 수 없는 건 아닙니다. 물론 조심해야 할점은 많지요. 역사에 조예가 깊으신 분 같은데 고대사 인물의 보수성에 대해 생각해보는걸 엉뚱하시다고 표현하신다면 좀 그렇군요.

      불만 없는데요? 갑자기 왜 그러세요??

    5. umberto blog 2007-10-18 23:36

      불만이란 단어가 적절하지 않았다면, 사과드리죠. '아니--'님의 리플이 구체적으로 어떤 맥락인지 어떤 부분에 반론을 하시려는 것이지 확실치가 않아서 그렇게 물은 겁니다.

  4. 지나가다 2007-10-18 13:54

    사실 전 시오노나나미가 우익인지 아닌지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를 노골적으로 찬양하지 않는한 작가가 일본우익이라고 해서 무조건 경시해야 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다만 유독 미몹에서 '로마인 이야기'를 무식한 우파들의 교양서 정도로 펌하는 것이 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물론 그런 말을 하시는 분들이야 많은 지식을 가지고 계시니 그 책을 보고 작가가 일본제국주의를 찬양하고 그리워 하는 것이라고 단정하시겠지만, 제가 보기엔 그 책을 보고 근대 이후의 침략적 제국주의를 동일시 하거나 또는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적절한 비유는 아니지만 고대로마제국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근대 이후의 제국주의 찬양으로 보여진다면, 세종대왕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왕권청치 찬양자가 되는 건가요? ㅎㅎ

    1. umberto blog 2007-10-18 19:23

      유독 미몹만 그런 것이 아니고 하다못해 디시인사이드 같은 곳에서도 시오노는 '로마 동인녀'라고 까이는 뎁쇼.

      시오노가 직접적으로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리워하는 발언을 할 사람도 아니고요. 그렇게 단순하고 머리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의 미국조차도 제국의 풍모가 부족하다고 여기는 열혈제국빠 할머니 눈에 '대일본제국'따위가 눈에 차기나 하겠습니까?

      문제는 로마 사회의 성격이 어떠했고, 그 기반을 어떻게 이루고 있었는가겠죠. 시오노를 비판하다 보니 너무 로마사회에 대해 비판만 해버린 감이 없지 않아 있긴한데 여러가지 장점도 있지만 로마는 심각한 단점도 많았습니다. 로마는 절대로 사회적 약자에게 친절한 사회가 아니었습니다. 끝없는 전쟁으로 몰락한 보레누스 같은 사람은 여럿 나오죠. 시즌1에는 카이사르가 군단 퇴역병들에게 황무지를 농지로 내주면서 대신 우두머리 병사를 매수할 것을 보레누스에게 시키는 장면이 나옵니다.

      시오노가 개방적이고 피정복민에게 관대한 로마라고 찬양을 했지만, 사실은 정복지에서 강간, 폭행, 약탈, 납치, 노예화는 일상이었습니다. 카이사르의 장난질로 갈리아에서 죽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카이사르의 갈리아, 브리튼 침공을 일종의 '문명화'과정으로 생각했던 '크리스토퍼 도슨'의 'The Marking of Europe'은 자그마치 1958년에 나온 구닥다리 책입니다.

      구닥다리 제국주의 시절이면 몰라도 요즘 서구학자들이 시오노처럼 무비판적으로 로마를 찬양하는 경우는 (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드문 것 같습니다. 한국의 인문학 기반이 약하다보니 로마사에 관한 읽을만한 저작들이 부족한데, 그런 빈틈을 타서 시오노 책이 읽히다보니 자꾸 그런쪽으로만 보게 되는 겁니다. 서양사 전공자들에게 한번 물어보시죠. 전공자들에게 좋은 평만 들을 수는없을 겁니다.

  5. 정worry 2007-10-19 14:10

    으음... 시리즈 '로마'를 지나치게 편애하십니다 ^^;; 시오노의 로마 편애를 비판하면서 '로마'를 너무 아끼시니까 그게 부조화로 보여요. '로마'가 HBO와 BBC 합작이라고 들었으니 BBC의 시각을 공유하는 건 당연한 거 같아요. 그런데 저는 현재의 서유럽 관점이라고 해서 그닥 미덥지가 않은 것이 로마군의 약탈과 미군의 바그다드 침략을 비교하면서 로마군이 들어갔으면 더 큰일났을 거다 식의 다큐를 본 적이 있거든요. 거 정말 기분 안 좋았죠. 둘 다 침략자이지만 그래도 서유럽이 양반이거든을 주입하려는 그 태도가 이중적으로 보였어요. 시오노가 힘을 얻는다면 바로 그거일 거에요. 로마를 깎아내리면 근세에 서유럽이 저지른 제국주의를 감싸는 게 된다는 모순이요.
    근본적으로 시오노가 제국주의자라는 것은 알지만, '로마인 이야기'와 '로마'가 다루는 로마가 같지 않다는 것도 좀 감안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시오노는 천년을 관통하는 대주제를 잡아내고자하고, '로마'는 제정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만 집중하는 시각차이가 인물해석에 차이를 가져온다고 봐요.
    '로마인 이야기'나 '로마'나 까고 말해(-_-) 팬픽션과 같은 건데 시오노의 세계관이 위험하니까 '로마'가 평가절상되는 건 좀 안 맞아 보여요. 아마도 날려버리셨던 글에 그 이유가 들어있었을 거라 생각하는데... 이 글의 속편 꼭 써 주세요 ( ;;; )

    1. umberto blog 2007-10-20 14:40

      --;;; 속편은 없는뎁쇼. 시오노의 책을 비판하면서 같이 서술을 하다 보니 너무 편애하는 느낌이 강해졌다 봅니다. '로마'의 작가들이 폭력과 섹스, 피로 얼룩진 제국으로 묘사하려고 하다 보니-일종의 역사 뒤집기?-스토리와 실제 역사가 지나치게 멀어진 부분이 없지 않아 있지요. 과장된 부분도 있고요. 옥타비아, 세빌리아, 아티아에 (그러고 보니 다 여자네요. ^^) 대한 묘사가 특히 거슬리더군요. 카이사르나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는 대충 실제 모습과도 비슷할 것 같습니다만.

      카토, 키케로, 브루투스, 카이사르, 기타 정치상황에 대한 묘사는 제국으로써 영미인들의 현실적 고민과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고찰 같은 문제의식이 묻어나더군요. 다만 어떤 부분들은 그런 문제의식이 너무 과잉으로 나타나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2. umberto blog 2007-10-20 14:51

      옥타비아의 마약친구 이야기나 보레누스와 딸들의 대립은 마치 현대 서구가정의 가정사를 보는 것 같더군요. ㅋㅋ

      하지만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한번 봐줄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로마인이야기'땜에 'rome'의 주제의식을 제대로 인식 못하시는 분들이 있던데 그런 부분을 지적하고도 싶었구요. 개인적으로는 보레누스와 풀로의 캐릭터 설정이 참 맘에 들었습니다. 로마의 중하류층을 각각 대표하는 인물들인데 전혀 안어울릴 것 같은 두사람이 우정을 유지하는 것도 그렇고, 시간이 지날수록 둘 다 발전을 하지 않습니까?

      말썽꾼 풀로가 사랑을 배우고 가정을 꾸리고 다정한 남자가 되고, 고집불통 외곬수 원칙주의자 보레누스가 아내가 혼외정사로 나은 자식을 받아들인다든지 하는 장면들은 가슴이 찡했습니다. 사람이 자기 성격의 단점을 극복하기 어려운 법인데 그런 모습들이 참 좋아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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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은 파시즘이다. (퍼옴)

결론은 파시즘이다.  
제3종족 | 2007-10-18 오전 2:18:59
378회 조회 | 10점
한국만큼 압축적으로 정치, 경제, 사회면에서 빠르게 성장한 예는 없다.
현재 한국의 갈등이나 혼란은 별거 아니다.

다른 나라같으면 시간이 해결해줬을 문제가 압축성장 때문에 같은 시간 차원에서
갈등하고 있는 것 뿐이다.

예컨데 위의 1번종족인 산업화 세대..
외국에선 19세기의 유물이고 일본 메이지 세대, 독일 비스마르크 세대 처럼
후발 자본주의 국가에서 20세기 초까지 명맥을 유지하긴 했다...
하지만 어쨌든 지금은 외국에서는 사라지신지 오래된 세대다..
그 세대가 아직도 한국에선 사회 최고위층이다.
외국이라면 현재 200살에서 최소 150살 생일잔치 하실 분들이
환갑잔치 하고 있는게 현재 한국이다.

2번종족인 386세대..
선진국에선 코민테른 시절 한참 유행하던 분들이다...
이 분들은 김일성 연배인 현재 구순노인 "에릭 홉스봄"과 비슷하달까..
(지적 수준 이야기가 아니라.. )
이들 세대가 외국에선 구 변혁세력의 막둥이이자
인간문화재로 기능하고 있지만 한국에선 자기들과 안어울리는
68 이념까지 고민하는 별종들을 포함해서 아주 창창하게 현재진행 중..
외국이라면 현재 100살에서 최소 환갑잔치 하실 분들이
인생의 전성기를 눈앞에 두고 있는게 현재 한국이다.



이런 "화석" 들과 " 폐물" 들이 각각 기세등등한 기득권과 도전 세력으로
21세기에 대립하고 있으니 그 갈등이 아주 기상천외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당연한 이야기다...

문제는 저 3번째 종족.. 바로 우리 10~20대 들이다...
마지막 베이비붐 세대..


한국 신생아 수를 보면 저 2번째 종족이 80~100만..
그리고 세번째 종족인 70년대 중후반~ 80년대 중후반 세대가 70~90만

한마디로 둘다 베이비붐 세대.. 동년배 모두가 존나게 경쟁자이고
쪽수도 더럽게 많은 세대다..

참고로 그 이하의 앞으로 나올 네번째 종족들..
갸들은 특히 90년대 후반 이후 급격한 출산율 저하로
최소한 동년배와의 경쟁이란 면에서는 부담을 상당히 덜 수 있는
신생아수 40만명 세대들이다..


어쨌든 쪽수는 많고,
제 1 종족을 할아버지, 교장선생님, 고위 지휘관이나 행보관, 원로교수님, 직장 보스
로 모시고
제 2 종족을 아버지나 형, 담탱이, 중대장이나 대대간부, 소장파 교수나 강사, 직장 선배로
부대끼고 있는

저 제 3종족.. 바로 88만원 세대..

이들은 도대체 그 시대적 위치를 가늠할 수 없는 세대다..
서구 68세대 비슷한 진보성이나 서구 신자유주의 세대스러운 소비자본문화의 노예스러운
무뇌성, 21세기보이다운 사이버 키취, 산업화 세대에게 배운 돈과 현실에의 굽신굽신과 운동세대에게 배운 때거리 문화 및 유치한 정의감에 기반한 유치한 민족주의....



세계와 호흡할 수 있는 물적기반으로서의 인터넷이란 보검을 손에 쥐고
악플질 또는 연예인 빠순이 짓으로 날밤까는..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만만한 젊은이들..

이렇게 허약하면서도 뿌리없고 미래 전망도 불안한 이들에게 내려질 구원의 손길은
내가 보기에는 딱 하나다..
파시즘...


두고봐라.
한국을 찌질이 파시즘 (동북아에서 한국이 독일같은 위상이 안된다.. 해봐야 찌질이 파시즘이다.. ) 으로 몰고 갈 세대가 바로 우리 세대다.. 생각은 없고 현실은 답답하고 산업화 세대의 보수성, 반동성과 386 세대의 극단적 민족주의, 때거리 문화를 보배운게 우리 세대다..


이런 찌질이들의 존재와 그들 앞에 놓인 막막한 미래야 말로 파시즘 탄생의 최적토양.


한국은 우리가 말아 먹을 것이다.

다행히 국력이 존나 약해서 타국에 피해를 입히지는 못하겠지만,
어쨌든 그 지랄로 몇 안되는 제4종족.. 지금의 초딩, 유아들에게 많은 상처와
잘못된 가르침을 남기고 계속 찌질대면 88만원짜리 히틀러 유겐트 짓거리 하다가
개병진 된 후에도 아무 반성없이 늘 하던대로 " 난 죄없어 " 라며 책임회피하고
여전히 무뇌하게 망국을 이끌어갈 세대가 바로 우리 세대다.



이런 디스토피아를 막으려면..
1, 2종족들이 정신차리고 전향적으로 사고하면서 새로운 가능성과 비젼을 제시해야
할텐데.. 이 시발것들은 외국같으면 화석과 폐물들인 주제에 펄펄나는 저 꾀꼬리
암수서로 칼부림하면서 아주 좋은 본보기만 보이고 있다.



정말 무서운 건 제 4종족.. 지금의 어린이들이다..

화석, 페물들의 싸움 속에 결정된 미래..
보배울 모델이라고는 저 찌질한 우리 3종족..

어차피 저출산으로 망해갈 나라라지만
이들은 어떤 탈출구를 선택할까..
파시즘 이상의 파국.. 그것을 준비하게 될 제 4종족의 미래..
난 그게 죄스럽고 미안하다...

미안하다.. 우리 제 3종족이 정말 병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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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님 ..솜사탕 축제에 오세요...

어제 버스에서 퇴근하는데 갑자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왔다.

번호를보고 그냥 광고인줄알고 안 받을려다가 받았는데

웬여자애 목소리가 들리며 이번에 학교동아리 신입(07학번)

인데 가을축제때 축제행사를한다며 초대한단다.

일단고맙다.

벌써 나이가 꺽인70인데 아직까지 나같은 노땅을 후배들이 선배랍시고 챙겨주는것이 ....장하기는하다.

 

 이번 축제주제는 솜사탕만들기란다..

 아!!!솜사탕만들기..

 

정말,,사회가 바뀐걸 여실히느낀다.

 20대의90%가 엄혹한 비정규직이나 산업예비군으로 전락하며 FTA, 생계형 사회문제가 치솟는지금

의 전도유망한 청년들은  솜사탕이나 빨려그런다..

 

뭐어쩌라구? 그것도 하나의추억아니겠어?

 

라고말할수도있고 또 꼰대의 옛타령 이라고도 할수있다.

 

문제는 그렇게 말하기에는 지금의현실, 앞으로미래의 현실조차도

솜사탕같지않다는데있다.. 

 

사회가바뀌었다고하지만

이미 후기포디즘시대에접어들어 자본의 냉정한 착취가

대놓고기승을 부리며 이것이 진리라한다.

 

난 내후배들의미래가 100% 우익화 된다고본다.

하긴 예전에 동기 선배 후배들도 많은부분은 우익화되어있다.

말해 뭣하랴..

30대인 내가할수있는일은 없는것같다..

그저 노조일열심히하는거?

 

암튼 갈생각은없다..

어쩌랴?

생각이 까칠한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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