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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지금 여기에.


 

 

 

 

#. 기억

 

과음이다.

오랜만에 들이킨 빈속의 소주가 내 위장을 괴롭히더니 급기야 식도를 타고 씹어 삼켰던 것들을 게워내게 한다.  

불과 몇 시간 전 맛나게도 먹었던 오돌뼈 우동볶음이 형태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해 있다.

약간의 악취도 동반했겠지. 그건 기억나지 않는다.

난 취했었거든.

 

순식간에 지나가버린 1년.

난 과음했던 게야.

너무 급했던 게야.

기억나지 않아.

너무 아팠거든. 그래서 기억이 지워졌나봐.

 

든든한 친구 녀석이 함께해서 였을까.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물이 눈꺼풀을 비집고 기어나온다.

눈물 덕분인지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 통곡까지 한 듯 하다.

 

취했군.

머, 서러웠던 게 많았나보지.

 

수화기 너머로 해장은 했냐는 녀석의 걱정에 별 일 아니라는 듯 허허~허탈웃음 한번 날린다.

 

 

##. 낯익은 기억

 

간간히 들러보는 싸이트에서 보았던 집회공지를 어렴풋이 기억해낸다.

간신히 술을 깬 새벽녘,

짜증스럽게 부슬거리는 비를 맞고 도착한, 퀴퀴한 자취방 냄새가 너무나도 정겨운,

후배네서 잠자리 들기 전, 수박을 먹는다.

 

내 기억에서 사라진 두 시간을 돌려줘.

그나저나 너도 낼 거기 가지? 같이 가자.

 

마침 그녀의 현재 남자친구이자 내가 그토록 귀여워했던 토실토실하고 열성이었던 후배가 뚱뚱한 동네 아저씨로 변해 있었다.  

수박을 건네며, "수박은 살 안 쪄. 먹고 너도 낼 같이 가자."

그러나 이제 그 녀석도 내키는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하긴, 일상은 그렇게 사람들을 중독시켜 간다.

 

 

###. 오래된 기억, 그리고 현실

 

비가 우라지게도 많이 온다. 퍼붓는다.

밥먹고 가자는 나의 성화에 아이들이 내심 좋아라 했다고 위안하며 도착한 서울역은, 번잡했다.

순간 새삼스러웠다.

그러나 멀리 있지 않은 기억은 다시 생생해졌고, 그것은 현실이었다.

몇 년이 지나도 변함없는 풍경. 그리고 기억.

 

시선은 쉬이 앞을 향하지 못하고 신발이 젖는다는 핑계로 아스팔트 바닥에 꽂힌다.

그 조그만 확성기 하나 없이 목에 핏대를 세우는 그들의 소리가 바로 앞에서 들리건만,

어설픈 주먹질만 허공을 헤맨다.

그렇게 광화문까지 걸어갔다.

 

혼자 빠져나와 아는 사람이라도 없나 기웃거려보지만,

예전에 잠시 같이 했던 한 동지만 만났을 뿐이다.

제대 후 무얼 하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괜스레 이야기가 길어질 듯 하여 담배 하나 나눠 피고 집회장을 다시 배회한다.

 

조금씩 거리를 두는 것은, 그만큼 나이 먹었기 때문일까.

나이를 먹었기 때문에, 이미 해 볼 만큼 다 해보았기 때문에,

거리를 두는 걸까.

다만 시선을 자신에게 고정시키고 있을 뿐인가.

고개를 치켜 세우고 사람들의 표정을 읽어 보지만 답은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하긴, 언제부터인가 나는 그것 때문에 답답해 하고 있었다.

 

 

####. 나, 여기에

 

혼자 빨빨거리고 다니는 것에는 익숙해져 있던 차였다.

누군가를 만나면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썰이라도 풀 수 있어 좋고,

만나지 못하더라도 혼자이기에 맘대로 활보하고 다닐 수 있어 좋다.

 

예전만큼 절박은 느껴지지 않지만, 예전만큼 날카로운 눈빛을 찾기가 쉽지 않지만,

단 하나, 두려워하지 않음은 느낄 수 있었다.

 

두렵지 않아.

헤쳐 갈 수 있어.

 

느낄 수 있었다면 나에겐 그것이 해답일지 모른다.

무수한 사람들 틈에 껴 있던 그 순간, 난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절박했다 했지만, 절박하지 않았던 것이다.

무수히도 부딪쳐 깨졌다지만, 아직 부딪쳐 보지도 완전히 깨져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해답은 멀리 있지 않다.

바로 여기에.

지금, 바로 여기에.

두려워 하지 않는다면, 뭐든 할 수 있겠지.

인정하면 되는 거다.

 

나, 지금 여기에 발딛고 서 있어. 일어났어.

힘들지만 이제 걸어가야지.

뛰어갈 날도 있을거야.

그래, 뛰어갈 수 있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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