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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피는 사람들

  서울에 살 때는 관악산 아래였고 유선도 달지 않아서 TV가 거의 안나왔다. 굳이 볼 생각도 없었고, 그렇게 몇 년을 살았다.

 

 

현장고발 치터스 (원제: Cheaters)


cheat는 '속이다'란 뜻이다. 우리가 컨닝이라고 하는 것은 콩글리쉬이고 영어로는 cheating이라고 한다. cheat는 '바람을 피우다'라는 뜻도 갖고 있으니 치터스라는 프로그램을 우리말로 굳이 하자면 '바람피는 사람들' 정도가 될 것이다. 아버지 때문에 송탄에 내려와 살면서 케이블 Q채널에서 이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바람 피는 것을 몰래카메라로 담아서 배우자에게 보여주고, 배우자와 함께 현장을 덮친다.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고... 나를 포함한 많은 시청자들이 이 훔쳐보기의 진수?를 만끽한다.

전혀 모르는 사람과 바람피는 경우도 있지만 배우자가 자신의 친구와 바람을 피는 경우도 있고, 사돈쪽이긴 하지만 친척과 바람을 피기도 한다. 베이비씨터와 눈이 맞기도 한다. 열 번 정도 보고 나니 그게 그건 것 같기도 하고 요즘은 다시 예전처럼 TV 자체를 거의 보지 않는데 어쨌든 이 프로를 보면서 상당히 재미있었던 것들 몇 가지.



모자이크 처리를 관전하는 즐거움

법적인 문제가 생길 수 있어 이 프로에는 모자이크 처리가 가끔 나온다. 즉 본인 얼굴이 TV에 나오길 원치 않는 경우 모자이크 처리를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원하지 않을 것 같은 상황인데 모자이크 없이 나오는 경우가 꽤 많다는 거다. 당연히 모든 촬영이 끝나고 나서 본인의 허락 여부를 묻는 것일텐데, 온갖 쌩쑈를 하고, 온갖 쪽팔리는 일을 다 저지르는(당하기도 하고) 장면이 모자이크 없이 나온다. 즉 본인이 동의했다는 말이다. 어떤 이는 아예 인터뷰도 따로 한다. 점잖게 말하는데 그 내용은 대략 이렇다. "TV에서 이런 놈을 봤으면 나도 욕했겠지만 어쨌든 내가 당하고 보니 아주 엿같고, 나를 이렇게 만든 마누라도 엿같고, 이런 짓거리 하는 당신들(프로그램 만드는 사람)도 엿같다." 뭐 이런 거였다. (fuck을 편의상 엿같다고 내 맘대로 했다. 물론 이 단어는 TV에 나오지 않는다. 입부분만 모자이크하고 소리도 안나오지만 쉽게 알 수 있다.)

 


들켰을 때의 변명 혹은 반응
열 번 정도 본 걸로 통계를 내기는 우습지만, 어쨌든 바람피는 현장을 덮쳐서 들통났을 때의 가장 흔한 반응이 뭘까? '미안하다'일까? (그럼 재미 없잖아?)


그런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딱 한 번) 제일 많았던 것은 "바람폈다고 이런 식으로 날 망신시켜?" 물론 그걸 트집으로 화만 내고 바람 핀 것에 대해서는 사과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에 못지 않게 흔한 반응이 "네가 이렇게 날 의심하고 뒷조사나 하니까 내가 바람을 피우지" 이거다. 이치에 전혀 맞지 않지만 정말 이런 경우가 많았다.  바람핀 상대와 떠나버리기도 하고, 떠나 보내기도 하고, 바람핀 상대가 떠나버리기도 하고.
재미있었던 경우는 남자가 새로운 여자에게 이혼한 상태라며 거짓말을 하고 바람을 폈다. 즉 두 여자를 모두 속인 것이다. 그래서 두 여자끼리 동병상련으로 우호적이 됐다.

 

 

가족을 지키려는 강박관념과 진행자의 코메디
이 프로를 만드는 사람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안겠지만 내가 보기엔 이건 완전히 코미디 프로다. 여기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이 진지할 수밖에 없는데 그걸 엮어나가는 진행자가 정말 너무 심각하고 진지해서 미치겠다. 자신들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려다 보니, 자기들이 무슨 정의와 가정을 지켜주는 수호천사처럼 말하는데 진짜 못 봐줄 지경이다. 특히 현장을 덮쳤을 때,  당황해서 카메라를 피해 도망가려고 하면 이 프로를 만드는 입장에서는 그림이 좀 덜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계속 쫒아가며 바람 핀 사람을 꾸짖는 장면은 아주 민망하다. 진행자 왈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를 두고 이런 짓을 하다니 부끄럽지 않습니까?" (화가 난 상대방에게 칼에 찔린 경우도 있다.)

 

그 진행자가 속으로 "먹고 살려고 나도 별 짓 다하고 있네"라고 생각할까? 아무리 봐도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자기 딴에는 부정한 배우자들을 심판하고, 시청자들에게는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줌으로써 가족의 해체를 막는 숭고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바람피는 것을 옹호하려는 게 아니다. 가족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말도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헐리우드 영화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가족주의 강박관념'에 대해서다. 누군가 스필버그 영화에 대해서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몽땅 다 가족의 소중함을 주장하는 뻔한 영화들"이라고 혹평을 한 적이 있다. 그 말에 선뜻 공감을 하긴 쉽지 않지만 헐리우드 영화들이 가족에 대해 집착(애착이 아니라)하는 것은 사실이다. 좀 더 확장시켜 가족과 국가를 연결시키기도 한다.

 

동성애자 의뢰인
굳이 이렇게 끄적일 생각을 한 이유는 이것 때문이었다. 치터스를 만드는 과정은 일단 자기 배우자가 바람피는 것 같으니 조사를 해달라고 시청자가 요청하면서 시작된다. 이렇게 의뢰하는 사람들의 심정이 이해가 가기도 하고 안가기도 하는데 어쨌든 가장 인상적인 의뢰인은 동성애자 여성이었다. 이미 '남자'와 결혼했을 때 낳은 딸도 있고 직업은 교사다. 우리나라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우리네 수준에서 생각해 보자면 의뢰해서 TV에 얼굴이 나오면 학교에서도 그 교사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고 그러면 학생들의 반응은 어떨 것이며 학부모들은 가만히 있을까? 딸은 자기 엄마가 레즈비언이란 것을 알고 있었을까?


미국은 정말 악마 같기도 한 나라이지만 어떤 면은 우리보다 훨 나은 것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  의뢰인이 극히 예외적인 경우였을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바람핀 애인뿐만 아니라 바람핀 상대도 모자이크 처리 없이 나왔기 때문이다. 동성애자라는 것이 알려져 사회에서 매장당하는 분위기라면 그 세 명이 모두 모자이크 없이 나올 수 있을까?


"Out At Work"라는 미국 다큐를 보면 분명 미국에서도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이 심각하긴 하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동성애자들이 가혹한 취급을 받는 것에 비한다면 미국은 거의 천국처럼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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