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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이 되살려야 하는 것

예전엔 말지 기사를 하나도 안빼고 다 읽기도 했는데 요즘은 반의 반도 못읽는 것 같다. 인터넷에서는 괜찮은 글도 많긴 하지만 일단 너무 많아 괜찮은 글을 '찾아내는 것'도 큰 일거리다. 이미 검증된 잡지를 보는 것, 그게 바로 내가 아직도 말지를 사서 읽는 이유다. 특히 나는 데스크 칼럼을 좋아하는데 이전 편집장이던 김성환보다는 못한 것 같지만 이종태 편집장의 이번달 데스크 칼럼은 읽어볼만 하다. 진보넷에서는 이 글에 동의하지 않는 분들도 많을 것 같기는 하다. 내 블로그에 오는 이가 별로 없기 때문에 무슨 논쟁거리가 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노동운동이 되살려야 하는 것

 

 "저 공장도 토지도 건물도 문화도 무기도 우리의 것이다!"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까지 나왔던 월간 <노동해방문학>의 뒷표지에 새겨져 있었던 문구이다. 물론 여기서 '우리'는 노동자 계급을 의미한다. 이 잡지는 '노동해방'(사회주의)이란 '노예의 언어'를 사용하긴 했으되 "노동운동의 목표를 사회주의 혁명"으로 뚜렷이 못 박는 선명성을 과시하면서 엄청난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그랬다. '80년대' 대다수 노동운동가들의 꿈은 사회주의였다. 20세기 초 러시아 지식인들이 공동체 건설을 위해 농촌으로 들어갔다면, '80년대' 남한에서는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로 규정한 운동가들이 공장으로 들어가 "변혁의 주체"인 노동자들을 만났다.


 그들에게 사회주의 혁명으로 가는 길은 레닌 등이 교시한 대로 너무나 선명했다. 임금인상 등 노동자들의 처우개선을 위한 "경제투쟁"은 필수적인 것이었지만 거기서 멈춰서는 안 되었다. 노동자들은 이 경제투쟁을 통해 계급의식을 획득하고 궁극적으로는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정치투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운동가들은 생각했다. "파업(경제투쟁)은 혁명(정치투쟁)의 학교"인 것이다.


 그래서 노동운동은 '80년대' 내내 임금인상 등 처우개선을 위해 헌신적으로 싸웠다. 그 경제투쟁은 단지(!) 해당기업 노동자들의 임금인상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가 주인 되는 참세상'을 앞당기기 위한 '예비적 투쟁'으로 설정되었다. 그래서 투쟁의 성과가 설사 해당기업 노동자만의 처우개선에 그친다고 해도 그것은 '전체 노동자를 위한 싸움'이라는 '윤리적 확신'으로 이어졌다. 이런 자부심 덕분에 당시의 노동운동은 '자본의 앞잡이'들이 식칼로 옆구리를 찌르고, 감옥에 가두고, 때로 조직 내부에 프락치를 투입해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리고 윤리적 확신과 자부심이 강한 만큼 투쟁은 치열했다.


 이렇게 '80년대'는 해방 이후 줄곧 수세였던 남한의 노동운동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연대가 되었다. 이 시기 노동운동이 거둔 성과는 놀라울 정도이다. 노동운동의 치열성은 당시 3저호황과 맞물리면서 1987년을 전후한 3년여 동안 전체 노동자계급의 실질임금을 100% 정도 올려 놓았다.


 아이러니한 것은 사회주의자들이 이끈 '80년대'의 노동운동이 오히려 한국 자본주의를 더욱 튼실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1980년대 중후반 한국 경제를 주도한 것은 자동차, 아파트 등 내구소비재 산업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기업들이 쏟아내는 고가의 내구재 상품들이 팔릴 수 있었던 것은 노동자계급의 실질임금이 급속히 상승했기 때문이었다. 한국경제의 생산능력 확대와 임금상승이 맞물려 경제 전체적으로는 선순환을 이루었던 셈이었다. 심지어 1980년대 말 한국 경제의 위기를 극복한 원동력은 내수의 급증이었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이다.


 그러나 이런 '공로'와 별도로 남한 노동운동은 임금인상 이후 사회주의쪽으로는 한치도 나가지 못했다. '사회주의 혁명 노선'을 계속 유지해야 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단지 사회주의의 합리적 핵심인 '공공성과 사회적 연대'의 문제의식만큼은 놓쳐서는 안되었다는 이야기다.


 1980년대 이후 남한 노동운동이 잃은 것은 사회주의적 문제의식이었고, 간직한 것은 레닌주의적 노동운동의 과격성이었다. 이는 자기 기업 내부에서는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윤리적 확신'에 근거한 '치열한 계급투쟁'을 벌이지만 기업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대기업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무심하다는 비난은 이제 모함으로만 들리지 않는다. 최근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기아노조의 채용비리나 민노총 대의원대회 폭력사태 등은 이런 관행의 연장선상에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 개혁이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2005년의 대한민국에서, 밑천이라곤 몸뚱이 하나밖에 없는 노동자들은 모두 잠재적 피해자의 입장일 수밖에 없다. 오늘의 정규직은 내일의 비정규직이다. 그리고 유럽복지국가들의 사례에서 보듯이 지금 뿔뿔이 분열된 남한 노동자들이 우선 '계급'으로 단결할 때 국가-자본과의 사회적 협약과 국민경제의 발전도 가능하다. 이를 위해서는 비교적 여유 있는 노동자들이 상대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놓인 노동자들에게 먼저 연대의 손을 내밀어야 할 것이다. 노동자 계급은 여전히 진보운동의 주요 세력이다.

 

<말> 3월호 '데스크 칼럼' 이종태 편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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