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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길 옆 공부방

한겨레 신문에 '인천 만석동 기찻길옆 작은학교’라는 기사를 보면서 서경화 감독이 만든

'기차길옆 공부방'이란 다큐를 오랜만에 떠올렸다.

그 당시 푸른영상 게시판에 올렸던 글인데 오랜만에 읽어보니 참 마음에 안든다.

그래도 일단 올려본다.

내 스스로 가난에 대한 고민을 진지하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라며.

 



기차길옆 공부방

 

 일단 재미있게 봤다. 아이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될 것이라는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지만 그래서 더 재미있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아이들이 중심이

되면 TV에서 맨날 보는 최루성 휴먼 다큐멘타리 한 편이 추가되는 것으로 끝났을

것 같다.

 

 인권영화제에서 어떤 분이 말한 "가난이라는 것을 너무 낭만적인 시각에서

그렸다."라는 지적은 매우 적절하다고 본다. 그 분 의견에 동의하느냐 마느냐를

떠나 꼭 한 번 거론되어야 할 문제라고 본다. (물론 그 분이 철거민들을 거론한

것은 한마디로 말도 안되는 비교였다. 그렇게 치자면 지금 이 순간에도

전세계에서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은데 최소한 굶어'죽을' 걱정까지는

안하는 철거민들 얘기를 다루는 것도 배부른 소리가 되지 않는가?)

 

 

자발적 가난이라는 것.

 

 거의 일년이 다되가는 것 같다. 전에 경화씨와 술먹으며 이야기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난 거기서 같이 살아가기로 작정한 분들이 궁극적으로는 원래

가난한 사람들과 절대 같아질 수 없다고 말했고, 경화씨는 동의하지 않았다. 내

생각엔 변함이 없다.  그분들의 가난은 '자발적' 가난이다. '가난하다'는 현재의

결과가 동일하다고 해서 결코 그들이 같아질 수는 없다. 이런다면 말이 된다.

'처음엔 자발적으로 가난해졌는데 이젠 그 가난이 지겨워  벗어나고자

발버둥치는데 잘 안된다.' 아니면 '원래 가난했던 분들이 이젠 가난의 미덕을

발견하고 평생 그렇게 가난하지만 아름답게 살겠다고 작정한다'면 그제서야

비로소 같아지는 것이라고 본다. 극히 부분적으로는 이루어졌는지 모르지만

아직은 '차이점'이 더 많을 것 같다. 오히려 이 차이점을 인정해야 올바른 관계가

정립될 것이다. 영화속의 이모, 삼촌들은 이 점을 확실히 파악하고, 생각이

정립되어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오히려 경화씨가 뭘 잘못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경화씨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건가?

 

 자 이제 자발적 가난이라는 것에 대해 말해보자. 미리 겁먹고 말하는 것이지만

'지가 그렇게 못사니까 괜히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게 시비를 건다'라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니 그런 말 들어도 상관은 없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하니까.

 우선 만석동에 자발적으로 들어가신 분들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고 싶다. 참으로

의미있게 사신다고 본다. 하지만 그 분들도 '자 이제 우리 모두 가난하게

살아야만 합니다'라고 주장할 것 같지는 않다. 즉 '자발적 가난'이란 의미있는

삶의 모델 중의 한가지인 것은 사실이지만 지고지선의 유일한 가치이며 모두들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실제로 가능하지도 않다. 4천만이 모두

가난해지려고 노력하는 세상? 그런 세상을 꿈꾸지는 않으리라 본다. 그렇다면

문제가 한 가지 생긴다. 그 분들의 자식들에게 가난이란 어떤 의미가 되는

것인가?

 말지 이번 호에 김동원 감독의 기사를 보면 '가난하게 산다는 것은 그 자식들도

가난하게 살게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라는 말이 나온다.(내 기억력이 정확하지는

않다.) 그리고 자발적 가난에 대한 얘기도 나온다. 김동원 감독도 자발적 가난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물론 난 김동원 감독을 가난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물질적으로는 가진 것이 많지 않지만 다른 것들을 많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발적 가난을 택한 부모를 둔 자식들은 그 덕분에 '선택'이고 뭐고 할

것도 없이 '타고난 가난'을 짊어지고 살아야 한다. 시비를 걸자는 것이 아니고 이

문제에 대해서 말 좀 해보자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훌륭한 부모 밑에서 자라다

보면 부모님을 이해할 확률도 높을 것이다. 하지만 이해를 못한다면? 이해는

하는데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길 원한다면? 이 땅에서 살면서 가난하다는 것은

삶에 있어서 선택의 폭을 상당히 좁게 만든다. 자식들에게 '정직하게 살아라'

같은 것은 강요해도 되겠지만 '가난하게 살아라'하고 강요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

아이들이 친구들에게 이러지는 않을까? '우리집은 원래 가난하진 않았어. 훌륭하신

우리 부모님이 자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려고 이렇게 하신거야.' 라고.

자식이 우리집은 왜 이렇게 못사냐고 칭얼대면 비슷한 말을 해주게 되지는

않을까? 그렣게 되면 자식대에까지도 원래 가난했던 분들과 같아지는 것은

실현되지 않는 것이다.

 

 

 

작품에 대한 별로 중요하지 않은 몇가지 것들

 

 경화씨의 평소 끼(?)로 봤을 때 나래이션을 아주 잘 할 법도 한데 솔직히 좀

어색했다. (물론 성우를 쓰는 것보다는 좋았을 것이라 본다.) 이런 면에서

경화씨보다 별로 나을 것 같지 않은 서명진씨의 경우엔 '봉천동 사람들'에서 그리

어색하지 않았다.  나래이션의 '시점' 차이가 아닐까?  명진씨는 회상하는 식으로

현재에서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었기에 정리하듯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경화씨의

경우는 (아마도 만석동에서 생활하면서 그때 그때 적어두었던 것을 활용한 것이

아닌가 싶은데) 계속 현재 시점으로 지금 겪고 있는 것처럼 하려니 어느 정도의

연기력이 필요한데 다소 역부족이었을 것 같다. 그렇다고 아주 이상하다는 말은

절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시라. 조금, 아주 조금 아쉽다는 말이다.

 

 마지막 정리할 때 앞으로의 희망에 대해 한 명씩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의

형식인가 보다. 'Women Outside'에서 그런 식으로 마무리하는 것을 보고 아주

깔끔하고 인상적이다라는 생각을 했는데 그 이후로 그렇게 끝나는 것을 몇 개

봤지만 그렇게 매끄러워 보이지 않았다. 그럼 기차길옆 공부방은? 글쎄다. 별

무리는 없었다고 보는데 뭔가 아쉽다. 하긴 이건 다큐도 뭔가 극적이고 폼나게

해서 사람들을 좀 움직이길 바라는 나의 (어쩌면 잘못된) 취향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딴 소리

 

 위에 쓴 글은 작품평이라고 할 것도 없고, 그냥 뭔가 생각나는 데로라도

말해주는 것이 경화씨에게 도움이 될까해서 쓴 것이다. 앞으로 이런 글을 다시

쓰게될 것 같지는 않다. 새로운 작품이 나왔다는 것은 나에게 회원기간이

만료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1년치 회비를 낼까 말까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전혀 고민할 필요가 없게됐다. 보증을 서준 것이 문제가 되서 일년동안 매달

41만원씩 갚게됐다. 꿔준 돈 천만원을 못받게 된 것은 그나마 여유돈을 빌려준

것이라 속이 좀 쓰리지만 마음을 비우면 되는데, 이번 문제는 당장 내 주머니에서

돈이 나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혀 상황이 다르다. 내 한 달 수입은 육칠십만원

정도다. 이 돈으로 정혜 공부도 하고 몇 푼 안되지만 처가집에 다달이 용돈도

보내드리며 잘 먹고 잘 살았는데(이게 다 탁월한 나의 살림솜씨 아니겠는가!),

이젠 거의 답이 안나오는 상황이 됐다. 그래도 난 처분할 재산이 있으니

절망적이지 않다. 정혜는 나에게 '어떻게 그렇게 쉽게 쉽게 생각하느냐?'라고

하지만 어렵게 생각한다고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뭘 힘들게 어렵게

생각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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